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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씨, 그런데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흑마녀 회의가 열리는 것 같습니다."

에이프리는 조금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내게 말을 했다. 흑마녀회의? 휴, 일이 꽤 골치 아프게 된 것 같다. 흑마녀는 악마들이 인간세계에 심어 놓은 직속 부하라고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한명이 있었지만 그 마녀는 능력이 미미한데다가 마녀라고 보기에는 너무 순진해서 그냥 시골 소녀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다른 이상한 마녀들이 계약을 하려고 달라 붙는 것이 귀찮아 그 마녀와 계약을 해뒀던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계약만 해놓고 몇번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 마녀도 그다지 힘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지만 어쨌든, 흑마녀 회의 때는 이런 저런 이유로 악마들도 꽤 많이 찾아오기 때문에 나하고 안면이 있는 악마와 마주치게 될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날 공격했던 그 녀석도 아마 흑마녀 회으에 참가하기 위해 오던 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들었다.

"큰일이군.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벅차지 않을까? 그럼 빨리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대답이 없는 에이프리,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해봐도 조금 무책임한 말을 한 것 같다. 이 곳에서 시간이 지체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나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역시 몸상태가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아직 몸을 움직일 만한 상황은 못되었다.

"제가 힐링 포션을 몇 개 더 구해 오겠습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에이프리는 그 말을 마친 후, 방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무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날 빨리 회복 시켜서 이 곳을 벗어나야 된다는 것.

그런데 저 녀석은 무슨 이유로 내게 도움을 주는 것일까? 브리처럼 내 수호천사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게 뭔가 다른 힘이 있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녀석이 날 도와줄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뭘까?

으심, 내가 의심이라는 것을 한다는 사실이 왠지 우습게 여겨졌다. 악마였을 때는 온통 불신으로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절대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의심이란 행동은 궁극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행동이었다. 흠. 믿음이라.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다시 방문이 열리며 브리가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브리가 옆에 없었었군. 나와 에이프리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에 잠시 나갔다온 듯 했다. 그나저나 인간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저 순진한 천사가 돌아다니면 위험할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곧 그 생각을 떨쳐버렸다. 의심에 이어 걱정이라, 너무나 빨리 인간화가 되어가는 내 자신을 보며, 내가 과연 예전에 악마로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긴, 예전에도 내가 악마라는 사실에 그다지 자부심을 느낀다거나 애착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베른씨, 배고프시죠? 이거 좀 드셔보세요."

브리가 부르는 소리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브리가 양손으로 그릇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냄세를 맡아보니 스프인 것 같은데, 저걸 구하기 위해 브리가 밖으로 나갔다 온 것인가? 아무래도 내게 무엇인가 도움을 줘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한 것 같다. 쩝. 무엇인가 이해하기 힘든 묘한 감정이 느껴졌지만 브리의 말처럼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난 브리에게서 그릇을 받아들었다.

스프를 조금씩 마심에 따라 따뜻한 액체가 뱃속으로 흘러들어오며 몸전체가 따스해 지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꽤 기분좋은 느낌. 만든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스프는 거의 식지 않은 듯 했다. 맛도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었다.

악마였을 때와 신체구조가 달라진 까닭인지 입맛도 변한 듯 했다. 악마였을 때는 주로 조리가 안된 생으로 된 음식을 즐겨 먹었지만 지금은 조리된 음식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 했다.

브리는 침대 옆에서 내가 스프를 마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스프를 별말없이 다 마시자 브리는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수호천사란 존재는 내 상식으로는 이해하려고 해도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브리가 좋아할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난 순간 갈등을 했지만, 내 생각이 맞는지 확인을 해보자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잘 먹었어. 브리. 고맙다."

브리는 나의 그 말 한마디에 얼굴 가득 밝은 느낌이 들도록 활짝 웃었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 하지만 나 역시 그런 브리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베른씨, 그럼 전 그릇 돌려주고 올게요."


브리는 내 손안에 있던 빈 그릇을 잽싸게 받아들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밖으로 걸어나갔다. 내가 그 말을 해준게 저정도까지 기분이 좋은 일일까? 그녀를 제외하고는 2000년간 악마와 전투천사, 그리고 타락한 인간들만을 주로 상대해온 내가 저런 스타일의 천사를 바로 이해하려하는 것이 무리가 있었다. 단지 막연하게 브리가 기뻐하는 것을 내 상식범위 안에서 추론해 본다면 인간들의 군주와 그의 충성스러운 신하 사이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비슷한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 그 관계와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 것을 잡아 내가기 힘들었다.

답답함에 난 바람이라도 쐴 겸, 창쪽으로 다가갔다. 에이프리가 준 힐링포션의 도움으로 통증은 많이 가셨지만 아직도 발걸음을 때기가 그다지 쉽지 않았다. 창을 열자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 그 바람을 쐐니 기분이 상쾌해지는 듯 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감정이 변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가 인간이 되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길 쪽을 내려다보니, 브리가 여관에서 나와 맞은 편 가게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맞은 편 가게는 길가에 과일이 진열되어 있는 과일 가게였다. 아무래도 브리가 과일을 구하려 하는 것 같은데, 브리한테 돈이 있었나? 난 호기심에 브리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았다.

잠시후, 브리가 돈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일가게 주인이 과일을 한아름이나 브리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쩝, 천사의 특권이라는 걸까? 악마와는 달리 천사는 대부분의 선량한 인간들에게 본능적으로 호감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들었다. 게다가 브리는 예쁘장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그 효과가 더욱더 클 것이었다. 보통인간들이 저 또래의 예쁜 소녀들에게 약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 순간 한 쪽에서 꽤 익숙한 복장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잠깐, 저 녀석들은? 검은빛 하지만 우중충한 느낌의 검은빛 긴 로브를 입은 녀석들, 악마교의 신도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흑마녀의 부하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 녀석들이 마을에 나타난 것은 아무래도 마녀들의 의식에 필요한 제물을 구하기 위해서 인 듯 했다. 물론,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할리는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순간 그녀석들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더니 과일을 안고 여관쪽으로 걸어오는 브리쪽을 향해 다가갔다.

"꺅!"

브리의 비명소리와 함께 녀석들은 브리를 안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젠장! 아무래도 브리를 이번 의식 때 제물로 선택한 것 같았다. 보통 신성력이 있는 예쁜 소녀를 재물로 삼곤 하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악마들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변태적인 녀석들이 그런 제물을 무지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주위에 있는 인간들은 그냥 힐끔 그들을 쳐다볼 뿐, 아무도 브리를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겁함, 그런 그들을 지키기 위해 천사들은 그들 자신의 존재까지 소멸하곤 한다는 사실이 새삼 떠오르며, 그들이 브리가 천사인 것을 알리는 없었지만 왠지 분노가 느껴졌다. 그래, 그런 것이 인간이었다.

난 다급함에 옆에 놓여져 있던 칼을 들고, 창 밖으로 뛰어 내렸다. 내가 인간의 몸인데다가 그 마저도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잊은 행동이었다. 땅에 떨어지며 온몸으로 충격이 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 고통을 억누르고, 녀석들을 향해 비틀거리며 다가갔지만 녀석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결국, 난 극심한 통증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 앉아버렸다. 이번에도 멀찍히 떨어져서 수근거리며 날 보기만 하는 인간들.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이었지만 내가 그 당사자가 되었다는 사실의 비참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어찌하여 신께서는 이런 인간들에게 구원이란 축복을 내렸는지 그 의문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베른님!"

멀리서 에이프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걸음과 함께 날 붙잡는 부드러운 손이 느껴졌다.

"베른, 괜찮으십니까?"

에이프리의 물음에 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에이프리는 바닥에 쓰러진 내 몸을 부축하여 일으키며, 급히 힐링포션의 뚜껑을 따더니 포션의 액체를 내 입으로 흘러 넣었다. 그리고 그 뒤에 몇 개의 힐링포션을 더 내게 먹였다. 힐링 포션 특유의 느낌이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내 몸을 감싸더니 통증이 서서히 사라지며 몸이 회복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브리가 녀석들에게 납치 됬다."

난 적당히 통증이 가셔지자 에이프리에게 말을 했다. 내 말을 들은 에이프리는 왠지 당혹감이 느껴지는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에이프리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내게 말을 했다.

"브리를 인간으로 착각한 것 같더군. 만약, 진짜 천사인 것을 그들이 알아차린다면 브리를 가만히 두지 않을거야."

난 왠지모를 다급함에 에이프리를 향해 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보면 단지 내가 가야할 길에 짐이 될지도 모를 예전에는 적이었던 천사 한명이 납치되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 것일까? 미소를 띈 채 그릇을 받아가던 브리의 웃는 모습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에이프리는 날 시험하듯 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돌아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을 맴도는 여러 가지 생각들, 너무 혼란스러웠다.

브리가 잡혀간 그 곳에는 마녀뿐만 아니라 얼마만큼의 악마가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들 중에는 내 얼굴을 아는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난 지금 이렇게 목숨을 헛되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냥 브리를 포기할 수 밖에.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넌 지금 내 주위의 인간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 그렇게 했지만, 내게는 그녀를 구해야만 한다는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아니다. 넌 위선자다. 네 주위의 인간들과 다를바 없는 자신의 목숨만 생각하는 비겁한 놈인다. 난 처음으로 맞이하는 엄청난 갈등 속에서 정신을 도저히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분명 브리를 구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그 곳으로 갔을 것이다. 아무런 힘이 없더라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 브리를 도울 방법을 모색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녀는 그런 여자였었다. 그녀의 생각을 하니,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어느새 진정이 되며, 난 결국 선택을 했다. 그녀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구하러 가야지."

내 대답을 들은 에이프리의 표정에서 무엇인가 결심을 한 존재들이 하는 표정이 보인 것 같이 느껴진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에이프리는 엷은 미소를 얼굴에 띄운 채 내게 말을 했다.

"제 눈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군요. 저도 돕겠습니다. 베른."

여자 목소리와 비슷할 정도로 가녀린 에이프리의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서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무게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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