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악마란 무엇인가? 그리고 또 구원이란. 신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곳, 그 멸망의 도시, 내가 그 곳을 향해 인간의 육체로 다가가는 이유는? 난 낮에 받은 그 빛나는 성경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펼쳐진, 한 곳.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구원을 얻으리라.'
익숙한 글귀였다. 내가 가장 많이 읽었던 구절, 인간을 위해서만 인간에게만 적용될 줄 알았던 이 구절이 내게도 의미가 있을 줄은 천계에 뛰어드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에 대한 절망...천계로 홀로 뛰어든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옆에 놓여진 옷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으로써의 이틀째,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데, 그녀와 헤어진지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서 갈등이 솟아오르는 것이 느겼다. 신성한 이 마을에서라면 다른 악마들의 공격에 대한 걱정없이 인간으로써의 편안한 생을 마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 이틀만에 너무나 인간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악마였던 내가. 더 마음이 약해지기전에 떠나야 할 것 같다. 저녁 때 찾아온 새 옷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검은빛 망토를 두르고 위에 배낭을 매었다.
검은색을 좋아하는 것은 악마였을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전처럼 흰색에 대한 거부감이 들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아무래도 검은빛에 더 친근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흰빛 보다는 검은빛이 더 다른 존재의 눈에 드러나지도 않으니까. 난 더 이상 마음이 약해지기전에 길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성경을 가슴에 넣고, 별로 미덥지 않은 칼을 허리에 찬체로 아랫층을 향해 내려갔다.
방구석에서 그 큰 책을 꺼내서 이리저리 뒤지고 있던 브리는 나를 보고는 책을 허공으로 사라지게 한 후, 내 뒤를 따라 졸래졸래 걸어왔다. 걷고 있는 천사라,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날개를 저렇게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천사는 정말 처음 봤으니까.
밤늦은 시간, 여관의 카운터에는 낮의 그 청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를 향해 싫다고 자신있게 말하던 그 청년을 보며, 내가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회가 다시 느껴졌다. 악마였다면 아무런 주저없이 칼을 휘둘렀겠지? 인내. 인간들만 가지고 있는 감정, 어떻게 보면 축복, 어떤 면에서는 또다른 속박과 고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내라는 감정이 있기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이었다. 난 별말 없이 여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관앞 길가에 보이는 쓸쓸한 적막, 밤바람의 쌀쌀함에 옷깃을 여미었다. 밤에 마을 밖으로 보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낮에 받았던 그 통행증을 생각해 낸 뒤에는 걱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의 법으로는 나를 제약할 수 없다라, 성기사직, 선의의 목적이라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기를 드는 것도 허용을 해주는 직책이었다. 배려, 소원을 들어준 것 뿐만 아니라 그 후의 일도 생각을 해주신, 신, 수천년간 크게 인식하지 못했던 그 분의 존재에 대해 다시한번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브리는 꼭 등불처럼 밤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천사, 백년전만 해도 내가 어떻게 천사하고 이렇게 같이 다닐 수 있을까하고 생각을 했을까? 아니, 단 하루전만 해도 내게 수호천사란 존재가 생기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 다가가니 경비병들이 작은 문을 닫은체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밤에 누가 습격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떤 인간의 군대가 교황이 있는 곳을 함부로 습격할 수 있겠냐하는 생각을 하니, 졸고 있는 경비병도 이해가 갔다. 경비병은 내 인기척에 눈을 뜨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밤에는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경비병은 하품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낮에 받았던 그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밤이라 통행증에서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 눈에 띄었다. 통행증을 보던 경비병은 다시 한번 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경례를 붙였다.
"실례했습니다. 베른 경."
베른 경, 익숙치 않은 그 호칭에 쓴 웃음을 지으며 통행증을 다시 받은 뒤, 경비병이 열어준 작은 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물론 브리는 또 막혀 있는 벽을 아무런 장애없이 통과했다. 내가 나가자 뒤로 경비병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난 동쪽으로 향한 작은 숲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브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흰빛에 밤이라도 그다지 걸음에 불편이 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 악마였었다면 밤이라도 별 상관이 없었겠지만, 인간인 까닭에 밤에는 시력이 상당히 약화 되었다. 어두운 숲으로 부터 들려오는 늑대들의 울음소리, 하지만 이번에도 보통의 인간들과 다르게 그다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작은 동물들이야 수호천사가 어떻게 해결해 주겠지.
후, 그나저나 악마녀석들이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하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칼이라도 좋으면 몰라도 이런 칼로 상대를 할 수도 없고, 성경 구절을 읽으면 되겠지만. 솔직히 다른 성직자들과는 다르게 난 필요한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베른씨, 베른씨는 전에 악마이셨다고 하셨죠.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인간이 되신 거에요?"
혼자서 작은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던 브리가 말을 멈추고 나를 향해 물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말이 많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호천사라, 어떻게 보면 할 일이 아닐 것 같다. 그 대상이 죽을 때까지 오로지 그 사람만을 지켜보며 지내야 함에도, 그 대상은 자신의 수호천사를 볼 수 없을테니까.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도 않겠지. 악마들은 최소한 인간으로부터 비난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인간이 된 이유라. 인간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일, 그리고 구하는 일."
"어이, 아가씨 괜찮은데? 우리가 잘해줄게, 오늘밤 우리하고 노는게 어때?"
저녁무렵이면 흔하게 보이는 풍경, 골목 으슥한 곳에서 여러명의 사내들이 한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난 인간들의 그런 추한 모습을 비웃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신이 만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짧은 시간동안 저렇게 타락할 수 있을까...고작 저런 기본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성과 양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쩌면 본성, 그 자체만을 가지고 있는 나같은 악마들에게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저런 놈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악마들에게는 더 좋긴 하지만.
"제발, 놓아주세요."
가늘게 들리는 목소리, 하지만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난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남자들 사이로 보이는 여인, 며칠 전에 내가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던. 그 깨끗한 도화지 같은 여자였다. 난 무의식 중에 칼을 뽑아들어 그 녀석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한치의 꺼리낌도 없이 그 여자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의 몸을 베어버렸다. 저항한번 하지 못하고 지옥의 업화에 묻히는 인간들. 난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옷의 곳곳이 찢어진체 있는 여인에게선 처음 보았을 때 보이던 그 당당함이 보이지 않았다. 왠지 지켜주고 싶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이 감정에 대해 난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살려주세요."
힘없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던 여인은 내 품에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너무나 약해보이는 하지만 너무나도 깨끗한 그녀가...
"그럼, 지금 그 사람을 지키러 가시는 거에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난, 브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천사의 신성한 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낮에 받은 성경때문인지. 근처에서 몇몇의 들짐승들의 눈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지만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예전같았으면 저렇게 위협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갈갈이 찢어버렸겠지. 하긴 감히 늑대 주제에 감히 내게 저렇게 위협조차 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리고 들짐승들이 공격을 할 수 없다면, 오히려 밤이 더 안전할 것 같다. 도적들도 누군가가 밤에 움직일 것이라고는 모를테니까, 밤에 강해지는 악마들과 마물들만 없다면...
지도에 따르면 내일 아침쯤에는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인간들의 기운도 그정도 거리였고. 그나저나 이제부터는 밤에는 신전에가서 잠을 청해야 하는건가? 전 마을에서는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 평범한 여관에 묵었었는데, 하지만 지금 부터는 악마들이 한두명씩 있는 것이 정상인 마을에 들려야 한다. 악마들에게 소문이 퍼졌다면 나를 노리고 있을 녀석들이 한둘은 아닐테니. 내 영혼과 악마 서열 58위란 자리는 악마녀석들에게도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사치스러운 물품으로 치장된 화려한 방, 어떻게 보면 경박스러고 천한 느낌이 드는 화려함으로 방은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방가운데의 침대에 누워있는 한 여인으로 인해 방의 그 천박한 느낌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저, 누구시죠? 아, 며칠전에 그 분이시군요. 어떻게 제가 여기에.."
여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했다. 여자가 쓰러져 있었던 반나절, 이런 여자에게는 그런 일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도시에 있는 평범한 여자였다면 좋다하고 그 녀석들과 같이 잤겠지.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여기는 저희 집입니다만..."
여자를 향해 평소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평소의 여자들을 만날 때처럼 그렇게 흑마법을 사용하거나 하고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도화지, 언제까지나 깨끗하게 지켜주고 싶은 그런 기분, 난 계속 누워있는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들의 이야기 중 들었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꼭 그 이야기에 나오는 공주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보면 볼수록 무엇인가 사람을 끌어드리는 느낌. 다른 여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색기와는 다른..고결한 느낌.
"저를 구해주셨나요? 정말 감사해요. 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여자는 그 사건이 기억이 났는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끝까지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정말 다른 의도가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눈물을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다.
"앞으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댁은 어디십니까? 댁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이 여자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욕망을 이겨내며 난 여자에게 말을 했다. 너무나 깨끗한 도화지, 그런 존재가 검은빛 먼지 투성이인 내 곁에서 있으면 안된다.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강조하며..왠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나던 여자가 화뜰짝 놀라는 것이었다. 무슨 잘못이 있었나? 난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 했다.
"저...제가 입고 있던 옷은...."
여자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 곳곳이 뜯겨져 나간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놓았는데 그 것 때문이었나 보다. 아마 내가 자신의 알몸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걱정인 것 같은데, 저런 깨끗한 아가씨라면 그걸 걱정할만도 하지. 언제나 타락한 여자들만 보아왔던 까닭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찢어진 부분이 너무 많아 버렸습니다.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다면 하녀들에게 다른 옷을 가져오도록 시키겠습니다."
난 하녀들이란 말을 강조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제서야 그 아가씨는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알던 여자들이었으면 정말 아무 꺼리낌 없이 내 앞에서 옷을 벗곤 했었는데, 정말 달랐다 너무나도.
"아니에요. 너무 좋은 옷이라."
여자는 나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했다. 처음만났을 때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 있는 미소였다.
"제 이름은 아니엘 퓨얼니스에요. 아저씨는 성함이..."
퓨얼니스, 순결. 그녀에게 알맞는 성이었다. 내 이름이라. 난 이 여자가 나에게 얽히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 중에 이름을 말해버렸다. 그리고 악마서열 3위인 악마의 후계자임을 알리는 성도.
"베른 메피스토펠레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구원을 얻으리라.'
익숙한 글귀였다. 내가 가장 많이 읽었던 구절, 인간을 위해서만 인간에게만 적용될 줄 알았던 이 구절이 내게도 의미가 있을 줄은 천계에 뛰어드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음에 대한 절망...천계로 홀로 뛰어든 것은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옆에 놓여진 옷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으로써의 이틀째,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데, 그녀와 헤어진지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내 마음 속에서 갈등이 솟아오르는 것이 느겼다. 신성한 이 마을에서라면 다른 악마들의 공격에 대한 걱정없이 인간으로써의 편안한 생을 마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단 이틀만에 너무나 인간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악마였던 내가. 더 마음이 약해지기전에 떠나야 할 것 같다. 저녁 때 찾아온 새 옷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검은빛 망토를 두르고 위에 배낭을 매었다.
검은색을 좋아하는 것은 악마였을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전처럼 흰색에 대한 거부감이 들거나 하지도 않았지만 아무래도 검은빛에 더 친근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흰빛 보다는 검은빛이 더 다른 존재의 눈에 드러나지도 않으니까. 난 더 이상 마음이 약해지기전에 길을 나서기로 결심했다. 성경을 가슴에 넣고, 별로 미덥지 않은 칼을 허리에 찬체로 아랫층을 향해 내려갔다.
방구석에서 그 큰 책을 꺼내서 이리저리 뒤지고 있던 브리는 나를 보고는 책을 허공으로 사라지게 한 후, 내 뒤를 따라 졸래졸래 걸어왔다. 걷고 있는 천사라,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날개를 저렇게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천사는 정말 처음 봤으니까.
밤늦은 시간, 여관의 카운터에는 낮의 그 청년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를 향해 싫다고 자신있게 말하던 그 청년을 보며, 내가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회가 다시 느껴졌다. 악마였다면 아무런 주저없이 칼을 휘둘렀겠지? 인내. 인간들만 가지고 있는 감정, 어떻게 보면 축복, 어떤 면에서는 또다른 속박과 고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내라는 감정이 있기에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이었다. 난 별말 없이 여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여관앞 길가에 보이는 쓸쓸한 적막, 밤바람의 쌀쌀함에 옷깃을 여미었다. 밤에 마을 밖으로 보내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낮에 받았던 그 통행증을 생각해 낸 뒤에는 걱정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인간의 법으로는 나를 제약할 수 없다라, 성기사직, 선의의 목적이라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기를 드는 것도 허용을 해주는 직책이었다. 배려, 소원을 들어준 것 뿐만 아니라 그 후의 일도 생각을 해주신, 신, 수천년간 크게 인식하지 못했던 그 분의 존재에 대해 다시한번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브리는 꼭 등불처럼 밤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천사, 백년전만 해도 내가 어떻게 천사하고 이렇게 같이 다닐 수 있을까하고 생각을 했을까? 아니, 단 하루전만 해도 내게 수호천사란 존재가 생기게 될줄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마을 입구에 다가가니 경비병들이 작은 문을 닫은체 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밤에 누가 습격이라도 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떤 인간의 군대가 교황이 있는 곳을 함부로 습격할 수 있겠냐하는 생각을 하니, 졸고 있는 경비병도 이해가 갔다. 경비병은 내 인기척에 눈을 뜨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밤에는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경비병은 하품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난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낮에 받았던 그 통행증을 보여주었다. 밤이라 통행증에서 저절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더 눈에 띄었다. 통행증을 보던 경비병은 다시 한번 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경례를 붙였다.
"실례했습니다. 베른 경."
베른 경, 익숙치 않은 그 호칭에 쓴 웃음을 지으며 통행증을 다시 받은 뒤, 경비병이 열어준 작은 문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물론 브리는 또 막혀 있는 벽을 아무런 장애없이 통과했다. 내가 나가자 뒤로 경비병이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난 동쪽으로 향한 작은 숲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브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흰빛에 밤이라도 그다지 걸음에 불편이 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 악마였었다면 밤이라도 별 상관이 없었겠지만, 인간인 까닭에 밤에는 시력이 상당히 약화 되었다. 어두운 숲으로 부터 들려오는 늑대들의 울음소리, 하지만 이번에도 보통의 인간들과 다르게 그다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작은 동물들이야 수호천사가 어떻게 해결해 주겠지.
후, 그나저나 악마녀석들이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상대를 해야 하지?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칼이라도 좋으면 몰라도 이런 칼로 상대를 할 수도 없고, 성경 구절을 읽으면 되겠지만. 솔직히 다른 성직자들과는 다르게 난 필요한 구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베른씨, 베른씨는 전에 악마이셨다고 하셨죠.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인간이 되신 거에요?"
혼자서 작은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던 브리가 말을 멈추고 나를 향해 물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렇게 말이 많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호천사라, 어떻게 보면 할 일이 아닐 것 같다. 그 대상이 죽을 때까지 오로지 그 사람만을 지켜보며 지내야 함에도, 그 대상은 자신의 수호천사를 볼 수 없을테니까.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지도 않겠지. 악마들은 최소한 인간으로부터 비난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인간이 된 이유라. 인간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일, 그리고 구하는 일."
"어이, 아가씨 괜찮은데? 우리가 잘해줄게, 오늘밤 우리하고 노는게 어때?"
저녁무렵이면 흔하게 보이는 풍경, 골목 으슥한 곳에서 여러명의 사내들이 한 여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난 인간들의 그런 추한 모습을 비웃으며, 그들을 지나쳤다. 신이 만든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짧은 시간동안 저렇게 타락할 수 있을까...고작 저런 기본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성과 양심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쩌면 본성, 그 자체만을 가지고 있는 나같은 악마들에게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저런 놈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악마들에게는 더 좋긴 하지만.
"제발, 놓아주세요."
가늘게 들리는 목소리, 하지만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난 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남자들 사이로 보이는 여인, 며칠 전에 내가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던. 그 깨끗한 도화지 같은 여자였다. 난 무의식 중에 칼을 뽑아들어 그 녀석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한치의 꺼리낌도 없이 그 여자들을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의 몸을 베어버렸다. 저항한번 하지 못하고 지옥의 업화에 묻히는 인간들. 난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옷의 곳곳이 찢어진체 있는 여인에게선 처음 보았을 때 보이던 그 당당함이 보이지 않았다. 왠지 지켜주고 싶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이 감정에 대해 난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살려주세요."
힘없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던 여인은 내 품에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너무나 약해보이는 하지만 너무나도 깨끗한 그녀가...
"그럼, 지금 그 사람을 지키러 가시는 거에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난, 브리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호천사의 신성한 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낮에 받은 성경때문인지. 근처에서 몇몇의 들짐승들의 눈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지만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예전같았으면 저렇게 위협을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갈갈이 찢어버렸겠지. 하긴 감히 늑대 주제에 감히 내게 저렇게 위협조차 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리고 들짐승들이 공격을 할 수 없다면, 오히려 밤이 더 안전할 것 같다. 도적들도 누군가가 밤에 움직일 것이라고는 모를테니까, 밤에 강해지는 악마들과 마물들만 없다면...
지도에 따르면 내일 아침쯤에는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인간들의 기운도 그정도 거리였고. 그나저나 이제부터는 밤에는 신전에가서 잠을 청해야 하는건가? 전 마을에서는 악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서 평범한 여관에 묵었었는데, 하지만 지금 부터는 악마들이 한두명씩 있는 것이 정상인 마을에 들려야 한다. 악마들에게 소문이 퍼졌다면 나를 노리고 있을 녀석들이 한둘은 아닐테니. 내 영혼과 악마 서열 58위란 자리는 악마녀석들에게도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사치스러운 물품으로 치장된 화려한 방, 어떻게 보면 경박스러고 천한 느낌이 드는 화려함으로 방은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방가운데의 침대에 누워있는 한 여인으로 인해 방의 그 천박한 느낌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저, 누구시죠? 아, 며칠전에 그 분이시군요. 어떻게 제가 여기에.."
여자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했다. 여자가 쓰러져 있었던 반나절, 이런 여자에게는 그런 일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이 도시에 있는 평범한 여자였다면 좋다하고 그 녀석들과 같이 잤겠지.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여기는 저희 집입니다만..."
여자를 향해 평소와는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하지만 평소의 여자들을 만날 때처럼 그렇게 흑마법을 사용하거나 하고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도화지, 언제까지나 깨끗하게 지켜주고 싶은 그런 기분, 난 계속 누워있는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간들의 이야기 중 들었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꼭 그 이야기에 나오는 공주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보면 볼수록 무엇인가 사람을 끌어드리는 느낌. 다른 여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색기와는 다른..고결한 느낌.
"저를 구해주셨나요? 정말 감사해요. 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여자는 그 사건이 기억이 났는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끝까지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 정말 다른 의도가 없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눈물을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았다.
"앞으로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댁은 어디십니까? 댁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이 여자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욕망을 이겨내며 난 여자에게 말을 했다. 너무나 깨끗한 도화지, 그런 존재가 검은빛 먼지 투성이인 내 곁에서 있으면 안된다.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강조하며..왠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침대에서 일어나던 여자가 화뜰짝 놀라는 것이었다. 무슨 잘못이 있었나? 난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 했다.
"저...제가 입고 있던 옷은...."
여자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아, 곳곳이 뜯겨져 나간 그녀의 옷을 갈아입혀 놓았는데 그 것 때문이었나 보다. 아마 내가 자신의 알몸을 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걱정인 것 같은데, 저런 깨끗한 아가씨라면 그걸 걱정할만도 하지. 언제나 타락한 여자들만 보아왔던 까닭에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찢어진 부분이 너무 많아 버렸습니다.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으십니까?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다면 하녀들에게 다른 옷을 가져오도록 시키겠습니다."
난 하녀들이란 말을 강조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제서야 그 아가씨는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알던 여자들이었으면 정말 아무 꺼리낌 없이 내 앞에서 옷을 벗곤 했었는데, 정말 달랐다 너무나도.
"아니에요. 너무 좋은 옷이라."
여자는 나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했다. 처음만났을 때만큼, 밝지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이 있는 미소였다.
"제 이름은 아니엘 퓨얼니스에요. 아저씨는 성함이..."
퓨얼니스, 순결. 그녀에게 알맞는 성이었다. 내 이름이라. 난 이 여자가 나에게 얽히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의식 중에 이름을 말해버렸다. 그리고 악마서열 3위인 악마의 후계자임을 알리는 성도.
"베른 메피스토펠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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