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밝은 햇살이 내 몸을 감쌌다. 왜 이렇게 밝게 빛나는 해가 반가운지 모르겠다. 햇빛이란 존재에 대해서 반가운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브리의 도움으로 많이 좋아졌지만, 어제 늑대인간에게 당한 까닭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약해져 있었다. 고작 하급마물조차 물리치지 못할 내 실력으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이 무력감이란.
해가 뜰 무렵, 숲이 사라지고 밀밭이 있는 들판 너머로 멀리 작은 마을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피로, 밤새 잠을 자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는데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검을 휘둘렀던 까닭인지.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오는 것을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잠이온다. 악마였을 때는 잠이란 것을 자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적당히 수면을 조절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을 바로 앞에 두고 이렇게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다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일까? 그리고 서서히 무거워지는 듯한 몸, 난 길가의 바위 위에 주저 앉아 버렸다.
"브...리...조...금...있...다..깨...워..."
"베른씨! 베른씨! 길에서 잠들면 감기걸려요!"
브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난 눈을 감아버렸다.
하계의 집,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지내온 곳이었지만 인간들처럼 집이란 곳에 그다지 애착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창고에는 보석들이 가득 싸여있을테고, 여기에서 한동안 내가 머물고 있을 무렵이었다면, 인간들의 여자나 하급 여악마들이 방마다 들어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랜시간동안 집을 비울 필요가 있을 때는 여자들의 영혼은 먹어버렸고 악마들도 집 밖으로 보내버렸다.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가 이 곳에 머문다는 사실이 싫었으니까.
끝없이 타락해가는 인간들과 그런 그들의 영혼들로부터 힘을 얻은 하계의 악마들, 그렇게 무시못할 정도로 커져버린 악마들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천계에서 징벌의 천사들이 내려왔다. 성마대전, 10년간의 끝없는 전투, 수천의 악마가 소멸해 갔고, 그만큼의 전투천사들과 징벌의 천사또한 사라져갔다. 난 그나마 힘이 있었기에 소멸되지 않았을 뿐.
집에오는 것도 10년만인가? 후..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순간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집을 벗어나기 전에 결계를 쳐놓을껄 그랬나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미 후회하가에는 늦어버렸다. 날 후계자로 지명한 메피스토텔레스 그 악마일까? 기척, 그런데 고위악마의 기운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급 악마? 감히 하급악마 주제에 누가! 난 왠지 화가 치솟는 것을 느끼며 기운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창고문이 있는 방, 기운은 그곳에서 느껴져왔다. 어떤 보석에 미친 악마녀석이 또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찾아왔나보군. 하지만 창고의 문은 내가 아니라면 신이 아닌이상 열리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난 그 간이 큰 하급 악마 녀석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창고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둠속, 예상대로 문에 매달려서 끙끙대고 있는 한 악마 녀석의 형체가 보였다. 느껴지는 기운에는 정말 힘을 쓸 가치조차 없는 하급 악마. 내가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봤는지 악마는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난 조용히 하지만 강한 살기를 담아 이야기를 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네녀석이 들어왔느냐!"
난 내 검은빛 검을 뽑아 녀석의 목에 대었다. 하급 악마일수록 인간과 성질이 비슷하다. 특히 살아 남는 것, 생존과 관련된 면에서는 거의 인간과 차이점이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녀석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 나 역시 가지고 있는 감정이지만, 나를 비롯한 고위 악마들은 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집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하급악마의 경우는 생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소멸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성마대전에서 감정이 없는 천사녀석들만 소멸시켜 천사들의 금빛피에 묻혀 지냈던 10년, 나도 알게 모르게 공포란 느낌은 언제나 그들과의 끝없는 전투로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오랫만에 보는 것이었다. 다른 존재가 나에게 공포를 느끼는 모습, 왠지 묘하게 흥분이 되는 것 같다. 죽여버릴까?
"잘...잘못했습니다..베른님!...제발...소멸시..키시지만은..."
여자 목소리, 여자악마였군...다른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공포란 감정에 흥분이 된 몸에서 여자 악마란 사실을 안뒤부터는 욕망까지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 악마라, 생김새라도 보기 위해 방안에 작은 불을 밝혔다. 외모에 따라 목숨만은 살려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별다른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하급 악마 대부분이 외모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인간의 여자가 더 나을 정도니까. 하지만 생각외였다. 붉은 빛의 머릿결에 연갈빛의 피부, 하급 악마치고는 괜찮게 생긴편이었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군. 10년 동안 참아온 욕정이 온몸을 감싸며 난 그 여자악마를 품에 안았다.
"이름이 뭐지?"
"위....위키에요."
여전히 공포가 가시지 않은 듯 보이는 여자악마. 공포에 질린 거친 숨소리, 난 여자악마가 두르고 있던 허름한 천을 벗겨 버렸다.
"한동안 이 곳에 머물도록 해라. 원하던 보석은 충분히 주겠다."
"아저씨! 아저씨!"
누군가 날 깨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너무 피곤해서 길가에서 잠이들었지. 아무리 인간이 되었다지만. 나도 참. 난 고개를 들어 날 깨운 존재를 쳐다보았다. 밝은 햇빛에 눈이 부셔 난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막 해뜰무렵에 잠이들었었는데 벌써 대낮이 되었나? 잠이란 것은 인간의 몇안되는 삶 중 상당한 시간을 뺏어가는 것 같았다. 인간들의 표현으로 잠깐 존 것 같았는데 반나절이라니. 그리고 꿈이란 것도 꾼 것같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은.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아저씨! 이 곳에 있으면 안되요. 어서 피하세요! 죽는다구요!"
날 깨우고 있는 녀석은 작은 꼬마였다. 햇빛에 피부가 진갈빛으로 타있는 전형적인 시골 꼬마, 이런 스타일의 꼬마도 악마들에게 유혹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즐겁게 지내는 까닭에다 욕심이란 것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피해라니? 난 무슨소리냐는 표정으로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그 꼬마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우리마을에 오면 모두 죽어요!"
갑자기 무슨?.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를 다 죽인다면 한두명이 아닐텐데, 하지만 어린애의 헛소리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감각만큼은 그다지 나빠지지 않았으니까. 최소한 지금 이 꼬마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무슨소리지? 천천히 설명을 해봐."
꼬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금 더듬거리며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브리 이 천사는 어디로 가버렸지?
"마녀가, 마을에 마녀가 있어요. 마녀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을 밤마다 잡아가서 먹어버리는데, 마을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어줘요. 저희 형도,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우리형을 기억하지조차 못해요. 제말을 믿어 주는 사람도 없고."
아무래도 악마 한놈이 이 마을에 있는 것 같군, 어떻게하지? 어제 지도를 보니, 이 마을을 지나지 않으면 한 일주일 정도 둘러서 가야했다. 이 마을을 지나긴 지나야 하는데. 그런데 왜 하필 검은 머리의 남자를 잡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모를텐데, 난 잠시 고민을 하며 꼬마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도 절 안 믿는 거죠? 그런거죠? 왜 어른들은 모두들 너무해, 형이 우리 형이 얼마나 아파하며 죽었는데... "
꼬마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설마, 악마가 사람을 먹는 것을 본 것일까? 인간의 어린애가 보기에는 정신건강상 그다지 좋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애의 형을 잊어버렸다고 했지. 아무래도 마을 전체가 그 악마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 같다. 이 애같은 경우에는 워낙 욕심없는 어린애라서 그 악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테고.
"믿는다. 네 말이 사실이란 것도 느낄 수 있고, 꼬마야, 울지말고 천천히 말해봐. 그 마녀에 대해서, 그리고 형이 어떻게 그 마녀에게 당한 것인지."
난 꼬마를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했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말을 믿는 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록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호감을 얻을 때도 좋은 방법이었지만 지금 내가 악마인 것도 아니고 이런 꼬마애에게 호감을 얻을 필요는 없으니까. 내 말을 들은 꼬마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제말을 믿어요? 아저씨."
확인차 다시 묻는 꼬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했다. 꼬마는 그제서야 얼굴을 펴고 무엇인가 희망이 생긴듯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악마들이 제일 싫어하는 표정, 바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가지는 인간의 표정이었다. 희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인간들은 절망속에서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죽음 이후라고 하더라도.
"여섯달 전쯤이었어요. 촌장님의 친척이라는 아주 예쁜 여자가 우리마을로 왔어요. 겉모습만 보면 너무 아름답고, 꼭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성녀님 같이 생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 그 아가씨를 반겼지요.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마을에서 검은 머리의 남자들이 한명씩 사라지기 시작 하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마을사람들도 사라진 사람들을 찾기 위해 분주했지만 어느 순간 부터는 그 사람들이 마을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어른들은 기억을 하지 못하는거였어요. 그런데...그런데...저희 형의 머리색도 검은 색이었어요."
꼬마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울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일까? 훗, 사람이라 나도 사람은 사람이지.
"전 걱정이 되서 형에게 말을 하니, 형도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기억을 하지 못하는거에요. 그렇게 한달 전 쯤이었어요. 한밤중에 갑자기 형이 집 밖으로 걸어나가는거에요. 제가 불러도 대답을 하지않고, 그래서 그 뒤를 몰래 따라갔는데, 형이 그 여자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거에요. 전 무슨일인가 하고 창문틈으로 지켜봤는데, 그런데....형이 그 여자에게 온몸이, 온몸이 갈갈이 뜯겨져 죽었어요. 그리고 그 마녀는 형을..."
꼬마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휴, 평범한 인간이라면 안믿어줄만도 할 것 같다. 게다가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흑마법으로 기억까지 지워져 있었을테니.
"그 뒤로 마을에서 검은머리의 남자들이 다 없어진 후에는, 지나가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행객들이..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마을에 들어오면 안된다고 했는데, 어린애 말이라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난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내 힘만 있었으면 왠만한 악마정도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될테지만 지금의 내 상태로는 그 악마가 부리는 하급 마물한테도 이기지 못할 테니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일주일이나 걸려가며 마을을 둘러갈 수도 없었다. 하루가 촉박한 나로써는 일주일이란 시간을 낭비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일단 브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 잘못하다가는 브리에게도 피해가 갈 수도 있을테니 혼자 돌파해보도록 해야겠다. 꼬마의 말을 들어보니, 밤에 그 악마도 본격적으로 의식을 행하는 것 같으니, 낮에 마을을 벗어난다면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일단 대부분의 악마들은 밤보다는 낮에 힘이 약해지고 하급마물들은 낮에는 활동을 할 수 없으니까.
해가 뜰 무렵, 숲이 사라지고 밀밭이 있는 들판 너머로 멀리 작은 마을의 모습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피로, 밤새 잠을 자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는데다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검을 휘둘렀던 까닭인지.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오는 것을 억지로 버티고 있었다. 잠이온다. 악마였을 때는 잠이란 것을 자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적당히 수면을 조절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마을을 바로 앞에 두고 이렇게 다리가 잘 움직여지지 않다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일까? 그리고 서서히 무거워지는 듯한 몸, 난 길가의 바위 위에 주저 앉아 버렸다.
"브...리...조...금...있...다..깨...워..."
"베른씨! 베른씨! 길에서 잠들면 감기걸려요!"
브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냥 무시하고 난 눈을 감아버렸다.
하계의 집, 태어났을 때부터 계속 지내온 곳이었지만 인간들처럼 집이란 곳에 그다지 애착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창고에는 보석들이 가득 싸여있을테고, 여기에서 한동안 내가 머물고 있을 무렵이었다면, 인간들의 여자나 하급 여악마들이 방마다 들어가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랜시간동안 집을 비울 필요가 있을 때는 여자들의 영혼은 먹어버렸고 악마들도 집 밖으로 보내버렸다.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가 이 곳에 머문다는 사실이 싫었으니까.
끝없이 타락해가는 인간들과 그런 그들의 영혼들로부터 힘을 얻은 하계의 악마들, 그렇게 무시못할 정도로 커져버린 악마들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천계에서 징벌의 천사들이 내려왔다. 성마대전, 10년간의 끝없는 전투, 수천의 악마가 소멸해 갔고, 그만큼의 전투천사들과 징벌의 천사또한 사라져갔다. 난 그나마 힘이 있었기에 소멸되지 않았을 뿐.
집에오는 것도 10년만인가? 후..그런데 집에 돌아오는 순간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집을 벗어나기 전에 결계를 쳐놓을껄 그랬나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미 후회하가에는 늦어버렸다. 날 후계자로 지명한 메피스토텔레스 그 악마일까? 기척, 그런데 고위악마의 기운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급 악마? 감히 하급악마 주제에 누가! 난 왠지 화가 치솟는 것을 느끼며 기운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창고문이 있는 방, 기운은 그곳에서 느껴져왔다. 어떤 보석에 미친 악마녀석이 또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찾아왔나보군. 하지만 창고의 문은 내가 아니라면 신이 아닌이상 열리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난 그 간이 큰 하급 악마 녀석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창고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어둠속, 예상대로 문에 매달려서 끙끙대고 있는 한 악마 녀석의 형체가 보였다. 느껴지는 기운에는 정말 힘을 쓸 가치조차 없는 하급 악마. 내가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봤는지 악마는 놀라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난 조용히 하지만 강한 살기를 담아 이야기를 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네녀석이 들어왔느냐!"
난 내 검은빛 검을 뽑아 녀석의 목에 대었다. 하급 악마일수록 인간과 성질이 비슷하다. 특히 살아 남는 것, 생존과 관련된 면에서는 거의 인간과 차이점이 없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녀석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 나 역시 가지고 있는 감정이지만, 나를 비롯한 고위 악마들은 그에 대해서는 그다지 집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하급악마의 경우는 생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소멸의 공포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성마대전에서 감정이 없는 천사녀석들만 소멸시켜 천사들의 금빛피에 묻혀 지냈던 10년, 나도 알게 모르게 공포란 느낌은 언제나 그들과의 끝없는 전투로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오랫만에 보는 것이었다. 다른 존재가 나에게 공포를 느끼는 모습, 왠지 묘하게 흥분이 되는 것 같다. 죽여버릴까?
"잘...잘못했습니다..베른님!...제발...소멸시..키시지만은..."
여자 목소리, 여자악마였군...다른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공포란 감정에 흥분이 된 몸에서 여자 악마란 사실을 안뒤부터는 욕망까지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 악마라, 생김새라도 보기 위해 방안에 작은 불을 밝혔다. 외모에 따라 목숨만은 살려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별다른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하급 악마 대부분이 외모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인간의 여자가 더 나을 정도니까. 하지만 생각외였다. 붉은 빛의 머릿결에 연갈빛의 피부, 하급 악마치고는 괜찮게 생긴편이었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군. 10년 동안 참아온 욕정이 온몸을 감싸며 난 그 여자악마를 품에 안았다.
"이름이 뭐지?"
"위....위키에요."
여전히 공포가 가시지 않은 듯 보이는 여자악마. 공포에 질린 거친 숨소리, 난 여자악마가 두르고 있던 허름한 천을 벗겨 버렸다.
"한동안 이 곳에 머물도록 해라. 원하던 보석은 충분히 주겠다."
"아저씨! 아저씨!"
누군가 날 깨우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 너무 피곤해서 길가에서 잠이들었지. 아무리 인간이 되었다지만. 나도 참. 난 고개를 들어 날 깨운 존재를 쳐다보았다. 밝은 햇빛에 눈이 부셔 난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막 해뜰무렵에 잠이들었었는데 벌써 대낮이 되었나? 잠이란 것은 인간의 몇안되는 삶 중 상당한 시간을 뺏어가는 것 같았다. 인간들의 표현으로 잠깐 존 것 같았는데 반나절이라니. 그리고 꿈이란 것도 꾼 것같다. 왠지 기분이 좋지 않은. 하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아저씨! 이 곳에 있으면 안되요. 어서 피하세요! 죽는다구요!"
날 깨우고 있는 녀석은 작은 꼬마였다. 햇빛에 피부가 진갈빛으로 타있는 전형적인 시골 꼬마, 이런 스타일의 꼬마도 악마들에게 유혹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즐겁게 지내는 까닭에다 욕심이란 것이 그다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피해라니? 난 무슨소리냐는 표정으로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는 그 꼬마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우리마을에 오면 모두 죽어요!"
갑자기 무슨?.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를 다 죽인다면 한두명이 아닐텐데, 하지만 어린애의 헛소리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내가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감각만큼은 그다지 나빠지지 않았으니까. 최소한 지금 이 꼬마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무슨소리지? 천천히 설명을 해봐."
꼬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금 더듬거리며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브리 이 천사는 어디로 가버렸지?
"마녀가, 마을에 마녀가 있어요. 마녀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을 밤마다 잡아가서 먹어버리는데, 마을사람들이 아무도 안 믿어줘요. 저희 형도, 하지만 마을사람들이 우리형을 기억하지조차 못해요. 제말을 믿어 주는 사람도 없고."
아무래도 악마 한놈이 이 마을에 있는 것 같군, 어떻게하지? 어제 지도를 보니, 이 마을을 지나지 않으면 한 일주일 정도 둘러서 가야했다. 이 마을을 지나긴 지나야 하는데. 그런데 왜 하필 검은 머리의 남자를 잡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설마,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아직은 모를텐데, 난 잠시 고민을 하며 꼬마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도 절 안 믿는 거죠? 그런거죠? 왜 어른들은 모두들 너무해, 형이 우리 형이 얼마나 아파하며 죽었는데... "
꼬마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설마, 악마가 사람을 먹는 것을 본 것일까? 인간의 어린애가 보기에는 정신건강상 그다지 좋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애의 형을 잊어버렸다고 했지. 아무래도 마을 전체가 그 악마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 같다. 이 애같은 경우에는 워낙 욕심없는 어린애라서 그 악마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테고.
"믿는다. 네 말이 사실이란 것도 느낄 수 있고, 꼬마야, 울지말고 천천히 말해봐. 그 마녀에 대해서, 그리고 형이 어떻게 그 마녀에게 당한 것인지."
난 꼬마를 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했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말을 믿는 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록 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호감을 얻을 때도 좋은 방법이었지만 지금 내가 악마인 것도 아니고 이런 꼬마애에게 호감을 얻을 필요는 없으니까. 내 말을 들은 꼬마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는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제말을 믿어요? 아저씨."
확인차 다시 묻는 꼬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했다. 꼬마는 그제서야 얼굴을 펴고 무엇인가 희망이 생긴듯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악마들이 제일 싫어하는 표정, 바로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가지는 인간의 표정이었다. 희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인간들은 절망속에서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것이 죽음 이후라고 하더라도.
"여섯달 전쯤이었어요. 촌장님의 친척이라는 아주 예쁜 여자가 우리마을로 왔어요. 겉모습만 보면 너무 아름답고, 꼭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성녀님 같이 생겼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 모두 그 아가씨를 반겼지요.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마을에서 검은 머리의 남자들이 한명씩 사라지기 시작 하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마을사람들도 사라진 사람들을 찾기 위해 분주했지만 어느 순간 부터는 그 사람들이 마을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어른들은 기억을 하지 못하는거였어요. 그런데...그런데...저희 형의 머리색도 검은 색이었어요."
꼬마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울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어서일까? 훗, 사람이라 나도 사람은 사람이지.
"전 걱정이 되서 형에게 말을 하니, 형도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사라진 것을 기억을 하지 못하는거에요. 그렇게 한달 전 쯤이었어요. 한밤중에 갑자기 형이 집 밖으로 걸어나가는거에요. 제가 불러도 대답을 하지않고, 그래서 그 뒤를 몰래 따라갔는데, 형이 그 여자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거에요. 전 무슨일인가 하고 창문틈으로 지켜봤는데, 그런데....형이 그 여자에게 온몸이, 온몸이 갈갈이 뜯겨져 죽었어요. 그리고 그 마녀는 형을..."
꼬마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휴, 평범한 인간이라면 안믿어줄만도 할 것 같다. 게다가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흑마법으로 기억까지 지워져 있었을테니.
"그 뒤로 마을에서 검은머리의 남자들이 다 없어진 후에는, 지나가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행객들이..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마을에 들어오면 안된다고 했는데, 어린애 말이라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난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의 내 힘만 있었으면 왠만한 악마정도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도 될테지만 지금의 내 상태로는 그 악마가 부리는 하급 마물한테도 이기지 못할 테니 걱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일주일이나 걸려가며 마을을 둘러갈 수도 없었다. 하루가 촉박한 나로써는 일주일이란 시간을 낭비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일단 브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 잘못하다가는 브리에게도 피해가 갈 수도 있을테니 혼자 돌파해보도록 해야겠다. 꼬마의 말을 들어보니, 밤에 그 악마도 본격적으로 의식을 행하는 것 같으니, 낮에 마을을 벗어난다면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일단 대부분의 악마들은 밤보다는 낮에 힘이 약해지고 하급마물들은 낮에는 활동을 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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