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스구티 남부, 어촌.
“이유?”
엘베는 대답하기 귀찮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딘은 당황했다.
“불만인가?”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가면 될 텐데. 어차피 보내놓고 공격할 거였으면 여기서 죽이는 게 더 편해. 일부러 몰이 사냥을 하는 건 취미도 아니고, 화약도 아까우니까.”
“정말 그냥 보내주겠다는 소리로 들으라는 것 같은데.”
귀찮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린 엘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화물은 다 옮겼지. 하지만 식수하고 이틀 분 식량은 남겨뒀으니까 이제 그만 사라져 줬으면 좋겠군.”
“…….”
아직도 당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딘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시도도 그를 당혹의 늪에서 구해주지는 못했다. 그 시도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흔들리는 고개를 한 지점에 고정시키며 엘베를 바라보았고, 엘베는 그런 그를 보며 짜증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곤란해.”
“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딘은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걸 무시하고는, 그는 다시 한번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알스터에서는, 일급 군사작전을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사형.”
“비더젠 역시 마찬가지야.”
“그래서?”
“응?”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한 방 먹었다. 정말 제대로 한 방 먹었다는 것을 느끼며, 딘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건 네가 무능해서 생긴 실패일텐데. 너에게 날 쓰러뜨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실패를 겪을 이유는 없지. 딱히 그럴 능력이 없더라도 일류라 자부할 수 있을 정도의 항해술만 갖추고 있었어도 빠져나갈 수는 있었어. 물론 비더젠 출신인 네가 항해술을 익힌다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선원들 대부분은 비더젠 사람이 아닐테니까.”
“어떻게 확신하지?”
“억양. 네 배의 선원들은 대부분 노스구티 인이야. 아닌가?”
두 손을 들어올린 딘은 항복을 선언했다.
“선원들의 항해술이 부족했던 건 사람을 볼 능력이 없는 내 탓이겠지?”
“정답이야.”
“…곤란하군.”
적국인 알스터에서 무기를 수입하려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하다. 그걸 성공했다면 모를까, 실패한 상황에서 알려지는 것은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아무리 내전에 휩싸여 있다고 해도 비더젠 인이 가진 알스터에 대한 반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알스터와 거래를 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것은 그대로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아니, 그런 것은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빌미를 마련한 자신은 그대로 교수대에 매달릴 게 뻔하다는 사실 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딘은 입을 열었다.
“해적이 되는 수 밖에 없겠군.”
“네 선원들이 동의한다면.”
“하지만 그건 힘들 것 같은데. 저 와칸인이야 모르겠지만, 선원들이야 노스구티로 돌아가면 그만이야. 물론 저 배는 그 과정에서 얻은 전리품이 될 테고.”
달갑지는 않지만, 셰어도어의 말은 정확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는 거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뭐?”
“선장은 너야. 난 그저 불쌍한 전직 공무원이라구.”
‘퍽이나.’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엘베는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졌지만, 딘은 그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 보다는 목숨을 선택했다.
“돌아가면 난 저들에게 죽겠지?”
“아마도.”
“그리고 여기서 버티면 너한테 죽고?”
“그렇겠지.”
어쨌든 결론은 죽는다는 소리다. 딱히 자살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거쳐 ‘자살이야말로 인류에게 있어 가장 가치있는 죽음’ 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낸 사람이라도 강요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살만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물며 그런 결론을 도출해 낸 적도 없는 딘으로서는 그런 결론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긴 것 같지는 않았다. 벌써부터 생명이 보장 된 것에 안도하는 선원들은 배에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고작해야 2~30초면 사라질 줄을 보면서 애써 생각을 정리한 딘은, 고개를 돌려 엘베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항해사 필요 없어?”
“항해사는 충분해.”
“에엑?!”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 이 정도 함선을 움직일 능력이 없다면 말이 안 되지.”
덱체어(Deckchair: 갑판용 접의자)에 걸터앉은 라이너는, 당황한 기색이 넘치는 네빈의 시선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물론 이 정도의 함선을 혼자서 움직여 본 적은 없어. 하지만 슬루프 다섯 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혼자서 지휘하는 훈련은 받아 본 적이 있지. 그게 이 함선 하나를 움직이는 것 보다는 쉽지 않을까?”
“…그건 또 무슨 훈련이야?”
“전쟁이 일어날 경우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적군이 아니라 아군의 반란이지. 더군다나 알스터는 국가 해군이라는 게 없어. 보통은 유력자들의 사립함대지.”
“그건 알고 있는데…….”
“끝까지 들어. 아무튼, 그래서 해군은 반란이 일어나기가 쉬워. 물론 그런 적은 없지. 그렇다고는 해도 안심할 수는 없어. 그래서 사관학교에서는 개인의 능력으로 적의 함선을 탈취한 후에 그것을 운용하는 훈련을 실시하지. 아무나 선장으로 임명할 수는 없으니까, 차라리 한 함대를 한 사람이 지휘할 수 있게 하자는 의도였지.”
그게 가능하긴 한 거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라이너는 입을 쩍 벌린 네빈을 보는 대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네빈은 애써 표정을 수습하면서 그것은 거짓말일 거라고 애써 자위하려했고, 실패했다.
아마도 세계 최고의 함선일 알카디우스는 단 한사람의 지휘 만으로 완벽하게 움직였다. 물론 그 명령을 수행하는 선원들의 능력을 폄하할 수는 없겠지만, 수십 개나 되는 돛을 조율하는 것이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다.
“설마 이 상태로 전투까지 가능하다는 소리는 안 하겠지?”
“가능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항변하는 네빈을 슬쩍 쳐다본 라이너는 갑판에 있는 포를 손질하는 선원에게 간단한 신호를 보냈다. 전혀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은 채로 근처에 있는 암초를 박살내는 장면을 지켜 본 네빈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설득시키려 했고, 또 실패했다.
“알스터에서 이게 가능한 사람이 또 있는 건 아니지?”
너라는 예외 말고는 하나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표정의 그를 본 라이너는 ‘내가 아는 것만 열 다섯 명’ 이라는 대답을 하는 것으로 네빈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물론 그 중에서 현역은 겨우 여섯 명이지만.”
“그게 겨우라고?”
“열 다섯 명 보다는 적지.”
“…….”
일반인과 천재… 아니, 그보다는 정상인과 비 정상인의 차이를 실감한 네빈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런 네빈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바다를 미끄러져간 알카디우스는, 어느새 트로이메라이의 동부 해안이 보이는 곳까지 도달해 있었다.
4월. 이곳 트로이메라이도 봄에 접어든 시기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을 유빙(遊氷)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잔물결에 실려오는 조그만 얼음 조각들만이 햇빛을 되돌릴 뿐. 그나마 그들도 해가 조금 더 떠오르면 녹아버릴 것이다.
“저기, 말이야.”
사색을 방해받았다고 느낀 라이너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대답을 하지 않으면 지금의 기분마저 지워질 것 같았기에, 그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뭐지?”
“그럼 알스터는 항해사 몇 명 만으로 타 국가의 전함대를 완전히 박살내 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솔직히 그건 납득하기 힘들어. 그게 가능했다면 이 대륙에 해적이 들끓을 이유가 없잖아.”
“흐음.”
가치없는 질문은 아니다. 그래서, 라이너는 사색을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쾌감을 접어두며 다시 말을 이었다.
“단순한 항해라면 혼자서 열 척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전투는 달라. 나 같은 경우는 함선 다섯 척을 지휘해서 전투 지역을 빠져나갈 능력은 있지만, 그 다섯 척을 모두 지휘해서 전투에 참여할 능력은 없어. 고작 해야 두 척, 이런 함선이라면 한 척이 고작이지.”
“그럼 그 녀석은?”
“그 녀석?”
“우리가 잡아야 될 놈 있잖아. 엘베였던가?”
힐끗 라이너를 바라본 네빈은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
공허함만이 자리한 눈이 저렇게 무서워 보일 수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딱히 적의가 느껴지는 눈도, 무섭게 노려보는 눈도 아니다. 그저 비어있을 뿐인데도, 그것뿐인데도 그 허무에 영혼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나하고 비슷해.”
“그래?”
그럼 걱정할 것 없겠네, 라고 중얼거리던 네빈은 곧이어 들려온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런 건 의미가 없어. …그 녀석은 혼자서 용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으니까.”
“평가는 평가일 뿐이야. 게다가 여긴 해상이라구.”
“그 녀석이 탄 배를 포격으로 침몰시키지 못하면, 죽는 건 우리야.”
씁쓸한 느낌이 감돌았다. 이번엔 네빈도 질문을 던지지 않아, 라이너는 다시 사색에 잠겼다.
오래 전의 일. 사소한 일이었다면 백 번이라도 잊어버릴 만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오히려 강해지는 기억의 자락을 놓을 수 없었다. 그 기억을 지우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가끔씩 떠오르는 그것은 수면위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그를 괴롭혔다.
처음으로 동등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만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세상을 향한 기만. 그리고 검에 대한 기만이었다. 무시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던,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것.
그럼에도… 라이너 반 에델슈타인은 그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교회가 알고 있는 것도 겨우 그 정도겠지.”
“뭐?”
“항해에나 신경 써.”
허리에 매어 놓은 검을 쓰다듬는 모습에, 네빈은 바로 몸을 돌렸다.
‘라오사로 갔겠지.’
먼저 출발한 교회의 함대가 신경쓰였다. 물론 그들이 엘베를 잡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함대를 만들어도 그것을 지휘하는 사람이 무능하다면, 그것은 ‘훌륭한 함대’가 아니라 ‘화려한 함대’ 일 뿐이다. 그리고, 화려한 함대에 지나지 않는 전함대는 상선대 만큼의 가치도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어째서?’
그러고 보면, 알비스타 가(家) 가 완전히 박살났을 때 교회로 도망친 브레 폰 알비스타가 나타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교회의 도움이 있었다 한들, 그 정도의 능력으로 엘베를 잡겠다고 나선 것은 고양이가 호랑이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것 이상의 행동은 절대 될 수 없다.
브레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뭔가 믿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답답한 느낌이 가슴을 눌렀다. 미지에 대한 공포. 인간인 이상 그것을 떨쳐낼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불러 일으킨 것이 한낱 도망자라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기분을 선사했다.
툭, 투둑-.
“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흐려지고, 하늘을 덮은 회색 구름은 비를 토해내었다.
폭풍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전열함 알카디우스는, 막 모습을 드러낸 항구를 향해 그 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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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두 자리 숫자로...(그런데 왜 제가 처음인 걸까요...)
....
이제 막 귀환하신 레인님의 선전을 기대하는 수 밖에 없으려나....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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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 약간의 변경사항이 있습니다. | 刈 | 2006/01/23 | 2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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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Soul cry - 0 | 레인 | 2006/05/05 | 3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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