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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스터, 아른헴.



언제나와 같이, 항구는 많은 함선으로 가득 차 있다.
물결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시끄러운 항구에서 이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항구가 멎어버린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정적은 수많은 사람들이 터뜨린 환성에 묻혀버렸다.
"대단하군."
"그렇군요."
굳게 닫혀있던 갑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여섯 척의 전함. 알스터 조선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는 전열함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네 개의 돛대에 매달린 수십 개의 돛이 활짝 펼쳐졌다. 진주 가루를 뿌리고 그 위를 파라핀으로 덮은 삼베로 만들어진 그것은, 저물어가는 태양의 주황색 빛을 받아 황홀한 반사광을 항구에 서 있는 사람들의 눈에 선사하고 있었다.
"교회의 의뢰로 만들어졌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야."
선두로 나선 함선은 온통 검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JS 알카노. 성(聖) 알카노의 이름을 딴, 180 문의 대포를 갖춘 최강의 전함이다. 그런 함선이 교회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아깝군.'
아니, 교회가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저런 함선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으리라.
"교회에서 저런 함선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꼭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지. 유슈프 레이스를 처형한 건 알스터가 아니라 교회였으니까."
"…그렇군요."
'사실, 처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고개를 들어 진수식을 계속 바라보는 라이너에게서 시선을 돌린 아론은 잠시 20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유슈프 레이스(Yusuf Reis). 바다의 왕을 자처했던 그도 알스터의 함선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노스구티 출신인 그가 딱히 알스터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는 알스터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알스터만 아니었다면, 그는 바다의 왕을 자처하는 대신, 정말로 일국의 왕이 되었을 테니까.
80 척으로 이루어진 대 함대와 2만 명의 부하를 거느린 그는, 정말 알스터만 아니었다면 하나의 국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알스터의 함선을 건드려서 좋을 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겠지."
"…무슨 소리십니까, 할아버님."
"혼잣말이다. 일일이 신경쓰는 건 별로 좋지 않아."
"주의하겠습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아론은 계속해서 진수식을 바라보았다.
전열함 여섯 척. 그것은 유슈프 레이스의 함대를 바닷속으로 가라앉힌 것과 같은 구성이다.
저들은, 엘베를 유슈프 레이스와 같은 존재로 보고 있는 걸까.
"어차피 버릴 생각이었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곤란하게 됐구나."
"할아버님?"
"굳이 말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
그렇다.
라이너 역시 알고 있다. 저 여섯 척의 전열함은 '엘베 반 에델슈타인' 이라는 이름을 가진 해적을 처형하기 위해 건조되었다는 건, 이미 저 함선들이 건조 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제독은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알비스타라고 하더군."
"알비스타?"
"기억나지 않는 거냐."
"아니, 기억하고 있습니다."
의외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름에, 라이너는 잠깐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그 녀석이 어떻게……."
"루퍼트 녀석도 의외라고 하더구나."
"누군가의 독단이라는 거군요."
브레 폰 알비스타라는 이름을 떠올리는 건 그다지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예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으니까.
만약, 알비스타 가를 지워버린 일이 없었다면 절대 기억해 내지 못했으리라.
"그 녀석이 형님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물론 자신이 죽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녀석의 능력은 형편없잖습니까."
"뭔가 생각이 있겠지. 교회도 바보가 아니니까."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라이너는 어느새 항구를 빠져나가는 전열함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총 800 문의 대포를 장착한 함대. 그것을 상대하는 것은, 슬루프 한 척만을 가진 엘베로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여섯척의 전함이 항구를 완전히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아론은 몸을 돌렸다.
"할아버님?"
"따라오거라."
진수식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 사이로 걷는다. 항구를 떠나는 그들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발을 옮기는 아론과 라이너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들도 아론을 알아 본 후에는 애써 고개를 돌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서일까. 아론이 발을 멈춘 곳엔 단 한명의 일반인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소리가 크군."
"죄,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 그렇게 땅만 보지 말고 빨리 문이나 열게."
"예, 옛!"
거대한 갑문 옆에 세워진 쪽문이 열렸다.
"할아버님?"
"들어가자."
말을 끝내자마자 문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를 따라, 라이너는 그 안으로 발을 딛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문의 안쪽은 거대한 조선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혹시라도 램프에 톱밥이 날릴 것을 우려해 이중으로 유리를 설치한 램프가 어두워야 할 조선소를 환하게 하고 있었고, 해가 저물어가는데도 계속해서 목재를 다듬는 인부들의 모습이 조선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할아버님. 왜 이곳으로……."
거대한 함선. 조금 전에 본 여섯 척의 전열함을 능가하는 거대한 함선이 그의 눈을 채웠다.
"알카디우스(Arcadius). 총 220문의 대포를 실을 수 있지."
"하지만, 이런 함선을 건조할 만한 예산은……."
"물론 알스터의 재정으로 만든 함선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독단으로 건조한 거니까."
"그럼?"
"조금 전에 본 교회의 함선들 덕분이지."
꽤나 통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론은 라이너를 바라보았다.
"이걸 맡아줘야겠다."
"예?"
"교회가 엘베 녀석을 처형한다면 곤란해지니까 말이야."
"……."
'단순히, 곤란하기 때문입니까.'
소리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론은 그걸 듣기라도 한 것처럼 대화를 이어갔다.
"알아서 돌아올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럴 녀석이 아니니 처리할 수 밖에."
"그렇지만……."
"법무관님?"
"아아, 와 있었나, 볼프만 군."
'볼프만?'
처음 보는 얼굴이다. 물론 알스터에 사는 모든 사람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아론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도, 저 얼굴은 자신의 기억에 들어있지 않았다.
"이쪽이 함장입니까?"
"그렇다네."
"흐음."
왠지 자신을 평가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아, 미안. 형편없는 놈한테 목숨을 맡길 순 없잖아."
"…너, 누구지?"
"응? 아직 이야기 안 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아론을 본 그는 한숨을 내쉬곤 다시 입을 열었다.
"네빈 존 볼프만. 이게 내 이름이야."
"경력은?"
"카탈리아 왕립함대에서 8년간 근무했고, 최근 1년 동안은 일등 항해사로 일했는데."
"…형편없군."
"아니, 뭐, 그렇긴 하지만."
당황한 네빈을 바라보던 아론은 라이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물론 사관학교 출신 항해사만은 못하겠지. 그래도 항해술 하나만큼은 A 급이다."
"그런데 왜 카탈리아 인을 고용하신 겁니까?"
"사관학교 졸업생은 너무 잘 알려져 있으니까."
라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다. 물론 그 능력은 대륙 어딜 가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높지만 그만큼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론은 그들 대신 네빈을 뽑았으리라.
"검은?"
"머스킷이 있는데 왜 검을 들어야 하는 거지?"
"…포술은 알고 있나?"
"이봐, 난 항해사지 대포장이 아니라구."
당황스럽다. 그러나 틀린 말이 아니기에 할 말은 없었다.
"내가 왜 8년 동안 일하면서 일등항해사까지 밖에 못 올라갔는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거 아냐."
"그렇군."
"어, 어이. 그렇게 빨리 납득해버리는 건 좀 곤란한데."
"불만인가?"
"……."
완전히 눌렸군. 이라고 중얼거리는 네빈을 무시한 채, 라이너는 아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상당히 준비를 많이 하셨군요."
"교회 놈들한테 한 방 먹일 기회니까."
그러나, 그것이 알스터 인 특유의 교회에 대한 반감의 표출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겠지요?"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는 아론을 본 라이너는 시선을 돌려 전열함 '알카디우스'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항구를 빠져나간 여섯 척의 함선이 아름답다면, 이것은 강인하다는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 어떤 적이라도… 심지어 용이 나타난다 해도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그것은, 단순한 느낌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엘베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 느낌이 지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거대한 함선 아래에서, 라이너는 그 이유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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