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잔의 항구는 엘칸에서 가장 유명한 항구답게 세계 곳곳으로 떠나는 가지각색의 배들이 진열된 것처럼 도크에 묶여있었다. 길이가 수십 미터 되는 호화여객선에서부터 개인이 소유한 작은 보트까지, 그 개수를 정확히 알기 위해선 수 백 미터나 되는 항구를 일일이 돌아야 할 것이다. 나라나 회사가 운영하는 여객선이나 상선은 항구의 입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있고, 그 거대한 크기 때문에 띄엄띄엄 묶여있는 반면에 개인이 돈을 내고 자신의 보트를 맡기는 곳은 조금 더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야만 했고, 값이 싼 곳은 한 공간에 수 채의 보트가 묶여있기도 했다. 그나마 돈이 좀 있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공간을 빌릴 수 있는 것이다. 항구는 한 달 사용료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낚시꾼들은 보트를 쓸 날에는 수고스럽더라도 마차를 빌려 자신의 보트를 나르기도 했다. 서너 명이 타는 소형 보트엔 보틀과 엔진을 달 수가 없어 그리 무겁지 않아 일반 마차로도 충분히 옮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매표소는 항구의 입구에서 십 수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말이 매표소지, 휴게실과 통신실을 겸한 4층짜리 건물에서는 쉴 세 없이 사람들이 들락날락 하고 있었다. 그 곳은 네 개 대륙의 수많은 지역에서 밀려오는 인파 때문에 물감으로 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색의 머리카락과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도 경찰들은 블루블랙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들만 골라내 잡고 있었다. 그러나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는 상당히 흔한 편이라서 그런지, 거의 포기한 분위기였다.
유리는 선착장의 한 구석에서 초조하게 셀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역시 경찰들이 깔려 있긴 했지만 한 곳에 숨어서 기척을 줄이고 있는 것은 그녀가 어릴 때부터 해왔던 일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들키지 않을 만한 곳에 몸을 은닉할 수 있었다. 다만 걱정인 것은 데얀으로 가는 배표를 사러 간 셀로였다. 물론 그의 인상착의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의심을 받는 다면 상당히 곤란한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엔 물리적인 충돌까지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유리 하나를 찾자고 경찰서를 반파한 셀로는 그런 상황을 그리 두려워하진 않았지만 유리는 상황이 달랐다.
'소란이 커지면 녀석들이 나를 찾게 될지도 몰라.'
그녀가 생각하는 녀석들은 에덴의 부활과 레미레스에 관련된 일 이외엔 모든 것을 하찮게 볼 때가 대부분이었고, 그 하찮은 것에 선량한 시민들이 빠지는 법은 없었다. 아마 그들이 개입하기 시작한다면 이 도시엔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녀는 초조한 마음에 그의 위치를 추적해보기로 했다. 눈을 감고 신경을 집중하자 전방 약 100미터 지점에 뭔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다른 인간들의 움직임도 느껴졌지만, 마치 아무것도 없는 암흑 속에서 그의 존재만 빛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이들은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느낌. 유리는 몇 달 전의 일을 생각하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 거의 기적적으로 섬에서 빠져 나온 뒤, 그녀는 새장을 도망쳐 나온 새의 기분을 맛봐야 했다. 유년시절에 금전적인 개념이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긴 했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맛 본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강도를 잡아 경찰서에 넘겨 주다가 오히려 도둑으로 몰리고, 그녀를 팔아 넘기기 위해 접근한 사람들의 피를 검에 묻히고, 또 그들의 돈을 빼앗아 달아나는 일이 점점 잦아질 무렵엔 이미 바깥 세상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후였다. 그녀의 머리가 점점 세상에 굳어지고 있을 때, 우연찮게 느낀 것이 바로 셀로였다. 차가운 바다 위에서 표류하던 선원이 등대를 봤을 때의 그 따뜻한 기분.
"어이, 뭐해 눈 감고?"
스릉!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유리의 검이 반쯤 뽑혔다가, 다시 모습을 감추었다.
"아, 놀라라. 기척 좀 내고 다녀!"
자신도 모르게 반격을 할 뻔한 셀로가 긴장을 풀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 기척쯤은 쉽게 느낄 수 있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안되지. 아무튼 무슨 생각하고 있었어? 이상한 표정 지으면서."
"아, 아니야! 아무 것도. 그것보다 표는 구했니?"
갑작스럽게 말을 돌리는 유리를 이상한 눈으로 보단 셀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니, 못 구했어."
"여권 줬잖아! 뭐 위조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와 다를 리가 없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은 배가 없데. 데얀으로 가는 배 자체가. 엔진에 문제가 있어서 한 3일 동안은 운항 금지란다."
그 말이 유리가 울상을 지었다.
"3일이나? 그 동안 어떻게 하지?"
"뭐,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긴 하겠지. 정 안되면 기차를 타도 되고......."
그때였다. 갑자기 항구 한 쪽이 시끌벅적해지며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선글라스를 쓰고 화려한 무늬의 셔츠와 수영복을 입은 젊은 청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20대의 젊은 여자였다. 청년은 금반지가 치렁치렁한 손을 흔들며 옆에서 넙죽넙죽 인사를 하는 중년의 남자에게 거만한 말투로 외쳤다.
"어이, 우리 사랑스러운 베이비에 연료 꽉꽉 채워 놓으라고! 내일도 선상파티를 해야 하니까!"
자신의 두 배는 살았을 법한 어른을 이름도 부르지 않고 종 부리듯 했지만 정작 상대편은 큰 상관이 없는 듯 했다. 그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기분을 맞추는 데만 급급했다.
"네네, 예비 연료랑 고기도 실어 놓겠습니다."
그 말에 청년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좋아, 좋아. 맛있는 술로 가득 실어 달라고. 내일도 퍼 마셔야 하니까. 아, 돈은 모두 우리 회사로 달아 놓은 것 잊지마. 당신 보너스도 두둑하게 주지."
"헤헤헤. 감사합니다, 사장님!"
"좋아, 모처럼의 휴가인데 우리 모두 맛있는 저녁이나 먹으러 가볼까? 물론 내가 쏘는 거-지!"
그 말에 그를 에워 싼 여자들이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를 꺅꺅 질러대며 그에게 더욱 밀착하기 시작했다. 거만함이 몸에 배인 청년과 여자들, 그리고 옆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이고 비굴하게 아부를 떠는 남자를 보며 유리의 표정은 점차 좋지 않게 변했다.
"천박한 인간들. 정말 쫓기는 몸만 아니었으면 모두 바다에 던져 놓고 싶네. 그렇지, 셀로?"
하지만 셀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빛나는 눈빛으로 중년 남자가 박스를 들고 사라지는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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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 잡히기만 해봐라!"
모두 시내 순찰을 나간 덕분에 아무런 도움도 구하지 못한 메드렛은 서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중앙로를 내달렸다. 마치 단거리 경주를 하는 것 같은 필사적인 질주에 지나가던 시민들은 그런 그를 이상한 눈으로 봤지만 그가 그런 것을 상관할 리는 없었다.
‘공권력을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맹점을 찔린 것이다. 경찰들끼리 하는 말 중, 범인은 현장에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설마 경찰서를 박살낸 범인들이 설마 다시 돌아오랴, 라는 생각으로 거의 대부분의 인력을 밖으로 내보낸 것이 실패의 한 수였다. 물론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닐 테지만 그렇게 느긋하고 당당하게 경찰서 앞을 지나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들이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경찰서를 지나가야 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시를 빠져나갈 세 가지 방법 중 두 가지가 그 쪽에 있거든?’
일단 도보로 나갈 수는 없다.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장벽은 이미 군인들이 차단한 지 오래다. 정말 급한 사람이나 마차 이외에는 모두 출입 금지가 되었고, 그나마 나가는 사람도 한참을 걸쳐 신원조회를 일일이 한 다음에 출입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배와 기차다. 도시의 동족엔 항구가 있고, 북동 쪽에는 기차역이 있다. 그런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점점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당하게 경찰서 앞을 지나간 것도 모자라서, 이젠 표까지 사서 이 도시를 빠져 나가겠다는 거냐?'
"적어도 내가 현역일 때는 안돼!"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외치고는 더욱 이를 악물고 속도를 높였고, 이윽고 그들이 사라진 갈림길에 도착했다. 그는 숨을 몰아 쉬며 고민에 빠졌다. 오른쪽으로 향하는 길은 항구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한 쪽은 기차를 타로 역으로 향하는 길이다.
‘나라면 어디로 갈까?’
기차를 타든, 배를 타든 여권이 필요하다. 기차보다는 배가 좀 더 자주 출항하긴 하지만 일단 배에 오르면 물고기나 새가 아닌 이상 탈출은 불가능해진다.
“아이씨, 나보고 어쩌라고!”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잘못된 선택 한 번으로 그 남녀를 놓칠 수도 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자신의 운을 믿기로 했다.
"어디로 갔을 까요, 알아 맞춰 보세요. 딩동댕, 동!"
그리고 주저 없이 역으로 향하는 왼쪽 길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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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척박사님! 이라고 해야했음
vin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