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설마 정말 아무런 목적 없이 도망 나온 거였어?”
“당연하지!”
윙크와 함께 엄지를 내밀어 보이는 그녀를 보며 그는 심연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듯한 기분을 맛봐야 했다. 그녀는 무너져가는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걱정하지마. 네가 그렇게 날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난 네 옆에 있을 테니까, 알았지?”
다른 묘령의 미인이 그렇게 말한다면 감사의 절이라도 올려야 할 판이겠지만, 상대가 유리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외계인한테 관심을 둘 정도로 내가 외롭진 않다는 게 문제지.’
물론 이것을 소리 내어 말할 정도로 대담하진 못한 셀로였다. 그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좋아. 일단은 동행을 허락하지. 대신, 네가 가고 떠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나. 알았어?”
그 말에 유리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셀로는 생각했다.
‘그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뿐이야. 셀로 시드. 마음을 다스려야 해. 그 미친 사디스트랑 살 때는 더 힘들 일들이 많았잖아? 진정하자, 진정해.’
셀로 그렇게 자신을 다스리고 있을 때, 유리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그건 좋은데 말이야, 나 먼저 대장간에 가야 해."
그 말에 겨우 풀리고 있던 셀로의 표정이 굳어졌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그가 물었다.
"지금 온 도시가 우릴 찾으려고 난리를 치는 와중에 그런 곳에 가자는 말이야?"
힐난에 가까운 그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유리는 움츠려 들지 않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다 네가 내 검을 부러뜨리는 바람에 그런 거잖아!"
그러면서 그녀는 등에 맨 보따리를 침대 위에 놓고 풀어 해쳤고, 거기엔 두 동강이 난 유리의 칼 한 자루가 있었다. 그녀는 허리에 한 손을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셀로를 가리키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처럼 쌍검을 쓰는 사람한테는 목숨이 달린 일이라고!"
"네가 약해서 검이 부러진 것을 왜 나한테 뭐라고 하지?"
단조롭게 말하는 셀로와는 달리 유리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녀는 경악이라는 단어를 온 몸으로 표현하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이......새의 한 쪽 날개를 자르고 날아보라 할 잔인한 인간일세! 셀로는 그런 기분 알아?"
순간 셀로의 표정이 귀신을 본 마냥 굳었다. 그는 샘솟듯 솟아나오려는 기억을 억누르려는 듯 머리를 끌어 잡으며 대답했다.
"......알다 마다. 너무나 잘 알지."
"으, 으응?"
나쁜 기억을 떠올릴 뻔한 셀로는 생각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게 하려는 마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좋아, 대장간은 얼마나 떨어져 있지?
그 말에 유리가 반색을 하며 귀염성 있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가까워. 바로 세 블록 뒤에 있는걸?"
언제 그걸 또 알아봤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거기까지 신경을 쓸 시간은 없었다. 사실 그도 대장간이나 무기 점을 들릴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아인의 검과 맞댄 자신의 검도 이가 많이 빠져, 흡사 톱날과도 같을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며 말해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니 얼른 떠나자."
그렇게 말하고 셀로는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유리가 그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잠깐, 어제 그 난리를 벌여놓고 이대로 나가려는 건 아니겠지? 밖에 아마 경찰들이 좍 깔렸을걸?"
셀로는 지금 대장간에 가자고 바득바득 우기는 사람이 누구냐고 쏘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의 말도 일리는 있기는 했다. 그가 한 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경찰들이 어제 밤에 우리 얼굴을 봤을까?"
"적어도 한 사람은. 어제 날 취조하던 형사, 기억 안나?"
그러고 보니 어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던 형사가 어렴풋이 생각나기는 했다. 터틀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지만 목소리나 체격, 머리 색 등은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너는 그렇다 치고, 내 얼굴은 기억할까?"
"당연하지! 경찰들이 얼마나 기억력이 좋은데! 아마 밖에 나가면 우리 몽타주로 도배가 되어 있을걸?"
유리의 단호한 말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한 마디 했다.
"안 들키게 도망치지 뭐."
‘그게 생각 끝에 겨우 나온 대답이냐!’
유리가 어이없어 하며 뭐라 한마디 하려고 할 때, 셀로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유리에게 씌우기 시작했다. 강압적인 그의 손길에 그녀는 당황하며 외쳤다.
"뭐, 뭐 하는 거야?"
“기다려봐, 머리 둘레만 줄이면 될 것 같으니까.”
아주 가벼운 실랑이 끝에 씌워진 것은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하얀색 캡이었다. 그는 유리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런 경험이 없는 유리의 얼굴은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넌 이걸 쓰고 있어. 넌 경찰들한테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넌?"
"난 이걸로 하지 뭐."
그러면서 그는 가방에서 검은 색 비니를 꺼내 뒤집어 썼다. 약간은 풍성한 느낌의 비니는 그의 적갈색 머리카락이 거의 보이지 않게 가려주었다.
"뭐, 변장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그러고선 그는 다시 한 번 문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어서 가자. 대장간에 가고 싶다며? 거긴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니까 서두르면 빨리 볼일을 보고 이동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고마웠다."
"뭐가?"
유리 역시 걸음을 멈추고 묻자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목욕물 받아준 거. 너도 귀찮았을 텐데 말이야. 다음부턴 그렇게 안 해줘도 괜찮아. 그렇게 힘들 일도……아닌가?"
용기를 내서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바로 경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리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는 아찔함을 느끼며 확인 차 물었다.
"......아니었나?"
방 안에 한바탕 폭풍우가 몰아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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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리 꼴레리
vin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