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드렛은 검은 색으로 코팅이 된 한 장의 카드를 받았다. 자신의 이름이 금색으로 프린트 된 카드는 약 10분 후부터 오직 그만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몇 주 동안 쓰는 모든 돈은 전부 공금으로 처리된다. 그 한도액이 얼마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던 메드렛 앞에 한 장의 종이가 놓여졌다.
"여기에 서명만 해주시면 모든 절차가 마무리 됩니다."
다반의 비서 엘사리는 자신의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리며 말했다. 경찰서보다는 술집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검은 색 양복에 붉은 와이셔츠, 그리고 검은 색 넥타이로 한껏 멋을 남자는 어깨까지 기른 자신의 흑발을 귀 뒤로 살짝 넘기며 말을 이었다.
“복귀 날짜는 부 청장님께서 알아서 기입하실 테니 굳이 적으실 필요 없습니다.”
그의 손이 지나가자 금색 귀걸이가 딸랑거리며 빛을 발하는 것이 보였다. 메드렛은 그것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서류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리의 뱀 같은 시선은 계속 해서 그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엘사리 막스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안하무인 적인 태도와 말투,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간성, 거기에 밤거리의 남자도 매일 입지는 못할 것 같은 화려한 옷 매무새. 덕분에 약관 35세인 그가 8년 전 처음으로 다반의 비서로 임명되었을 때는 주변에서 말이 많았다. 거의 예의범절에 관련된 비난과 힐난, 그리고 협박이었지만 그의 직속 상관과 그는 그들의 말을 싸 그리 무시하며, 일명 싸가지 콤비를 구성했다 (물론 그 별명을 입밖에 낸 사람은 본부장 밖에는 없었지만). 많은 이들의 우려와 관심으로 포장된 따가울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과 감시 속에서 엘사리는 놀라운 수행능력과 업무 능력을 발휘했고, 이윽고 그에 대한 나쁜 시선도 점차 사라져 8년이 지난 지금은 그의 패션 감각과 쌀쌀 맞은 성격은 단지 그의 독특한 개성 그 이상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 순전히 탁월한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겨낸 사람은 존경 받아야 마땅하지만 지금 메드렛에겐 단지 짜증을 유발하는 인간일 뿐이었다. 메드렛은 그 종이에 쓰여있는 내용을 천천히 읽다가 다시 책상에 거칠게 내려놓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 어이. 지금 장난하는 거지? 인사이트를 반납하고 가라니, 난 지금 휴가를 가장한 공무 집행을 떠나는 사람이라고."
그러면서 그는 다반이 그랬던 것처럼 머리를 두드려 봤다. 너도 다반의 부하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하지만 엘사리는 그런 그를 대놓고 비웃을 뿐이었다.
"휴가를 가장한 공무든 뭐든 지금 제가 처리하는 것은 20년 근속 특별 휴가입니다만?"
"아니, 그러니까 휴가는 휴가인데 공적으로 떠나는 거라니까! 너도 알잖아 저 밖에 얼마나 흉악한 인간들과 괴물들이 많은지! 그리고 내가 쫓아야 하는 녀석들은 그 중에서도 제일 흉악한 악당들이야, 경찰청을 반파시킨!"
"휴가는 휴가인데 공적으로 떠나는 휴가면 이것도 휴가 아닙니까? 휴양지로 휴가를 떠나시는 와중에 공적인 일을 처리 하신다고 하길래 저도 공적으로 처리하려는 것뿐입니다. 3일 이상의 휴가를 가는 모든 경찰들은 인사이트를 반납하는 것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 일입니다. 설마 이제까지 가신 모든 휴가에 인사이트를 가져가셨다고 말씀하실 수는 없을 텐데요?"
"아니, 부 본부장님께서 말씀 안 하셨어? 이건 부 본부장님이 특별히 허가하신......."
"제가 받은 명령은 모든 서류를 절차대로 처리하라는 것뿐, 그 외의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후아, 미치겠군. 이봐, 너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엘사리는 눈도 꿈쩍하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은 이 상태라면 형사님은 휴가를 가지도 못하고 다시 시내로 복귀해서 제 방에 새 창문을 뚫어준 년 놈들을 찾으셔야 한다는 것뿐입니다만?"
마침 시원한 가을 바람이 둘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만 해도 벽이었던 곳에서 들어오는 것이라 그런지, 안 그래도 신랄하기로 유명한 엘사리의 어투는 더욱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융통성 없는 자식 같으니라고.’
사실 메드렛도 자신이 우기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인 것을 알고 있었다. 휴가를 빙자한 공무집행이었지만 어쨌든 휴가인 만큼, 특별한 취급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모든 서류들은 윗대가리들이 열람할 수 있으니까. 잠깐을 고민하던 그는 결국 크게 한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홀스터에서 인사이트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옛다! 가져가라 이 나쁜 놈아. 너도 융통성이란 걸 좀 키워봐!"
결코 상관의 비서에게 할 말은 아니었지만 엘사리가 문제 삼은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서류 첩을 내밀며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럼 여기 서명을."
은근히 자신에게 화를 내길 기대했던 메드렛은 툴툴거리며 엘사리가 내민 종이에 서명했다. 그의 서명을 확인한 뒤 엘사리가 서류를 파일에 넣으며 말했다.
"이 시간 부로 메드렛 키보스 형사님은 20년 근속 특별 휴가를 받으셨습니다. 그간의 노고에 감사 드리는 바입니다."
정말 형식적이라는 단어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말투에 메드렛이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케이, 알았어. 이만 가본다. 그럼 수고......."
"아 잠시만요."
어깨를 살짝 누르며 그를 다시 앉히는 엘사리를 한 대 쳐주고 싶다는 생각을 꾹꾹 누르며 메드렛이 물었다.
"아, 또 왜!"
"어차피 휴가를 떠나시는 와중에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십사 해서 말입니다만."
내가 지금 네 부탁 따위를 들어주게 생겼냐? 라고 쏘아 붙이고 싶은 것을 다시 한 번 참으며 메드렛이 물었다.
"뭔데? 네 말대로 난 공적인 일에서는 이제 해방이거든?"
짜증을 숨기지도 않는 그의 말투에도 엘사리는 태연하게 비웃음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외투에 손을 넣었다가 꺼냈다.
"이걸 증거물 보관실에 갖다 주셨으면 하는데 말이죠?"
처음엔 귀찮은 시선으로만 보던 메드렛의 눈이 점점 이채롭게 변했다.
“어, 그, 그건……”
엘사리의 손에 든 것은 한 정의 인사이트였다. 일반적으로 경찰용 인사이트가 검은 색으로 도장되어있는 것에 반에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진한 갈색으로 도장이 되어있었다. 바로 경찰용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쓰는 호신용이라는 증거였다. 엘사리가 검지손가락에 인사이트를 끼고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이건 얼마 전에 제가 현장에서 압수한 물건인데, 아직 증거물 보관실에 등록을 못해서 말이죠? 지나가시는 김에 갖다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메드렛 역시 씩 웃으며 대답했다.
“뭐, 언제까지 갖다 주면 되는데?”
“뭐, 아무 때나 갖다 주시면 상관은 없습니다. 누차 말하지만 등록이 아직 안 된 것이거든요?”
엘사리는 빙글빙글 돌리던 인사이트를 그대로 메드렛에게 던져줬다. 묵직하고 익숙한 느낌이 손에 닿았다. 그것을 한 번 훑어보던 메드렛이 아쉬운 말투로 한 마디 했다.
“이왕이면 경찰용이나 군용으로 압수하지 그랬어? 사정거리 2미터로는 토끼 한 마리도 못 잡는다고.”
그의 말대로였다. 2미터의 사정거리는 호신용으로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정작 사정 거리 밖의 물체는 코끼리 정도의 크기가 아닌 이상, 맞추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시민들이 사냥을 나가거나 괴물토벌을 나갈 때는 검과 활을 사용하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엘사리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더욱 더 철저하고 교활한 이였다. 그는 메드렛을 돌아보지도 않고 서류에 뭔가를 끄적거리며 대답했다.
“뭐, 아시겠지만 요즘 인사이트를 불법으로 개조하는 일이 잦아서 말이죠. 음지에서 일어나는 일인 만큼 형사님이 더욱 잘 알겠지만 말입니다.”
“카드도 받을까?”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엘사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법인 카드의 모든 결제는 제 선에서 마무리 한다는 것만 알려드리죠.”
그리고 네 손을 거치면 결제 내역도 바뀌겠지. 그는 엘사리의 대답에서 다반이 이 일을 즉흥적으로 벌인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말투와 성격이 어떻든지 간에 엘사리는 이 경찰서 안에서만큼은 서열 3순위였으니까. 그리고 이 계급사회에서 3순위가 내포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더 은밀하고, 더욱 더 치명적이다. 엘사리는 그의 상관들이 어쩔 수 없이 의식하게 되는 상부의 눈을 간단하게 피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그보다 아래 직급에 있는 직원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과 이야기를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이였다. 또한 그런 그의 역할에 알맞게 똑똑하고 지혜로우며, 또 그 이상으로 교활할 수 있는 이였다. 하지만 그가 단지 이런 성향만 있었다면 엘사리가 모든 이의 신뢰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메드렛은 예전부터 그 점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 녀석이 똑똑하고 교활하면서도 모두의 신뢰를 얻은 이유는 그 이상으로 솔직하기 때문이지.’
태생적으로 똑똑하고 교활한 사람이 솔직하면, 그 교활함도 무기가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받은 권총을 홀스터에 집어 넣었다. 특유의 묵직한 느낌이 들자 마음에 안도감이 드는 것 같다. 그는 인사이트가 들어있는 자켓 왼쪽을 툭툭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뭐, 부 본부장님의 기대에 부응한다는 마음 가짐으로 열심히 하도록 하지.”
하지만 엘사리는 비웃을 뿐이었다.
“기대라는 것을 애초에 하셨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뭐 열심히 일해주시죠.”
“……..”
끝까지 싸가지 없는 놈. 그렇게 마음 속으로 중얼거리던 메드렛은 자신도 모르게 어제까지만 해도 벽이었던 곳으로 아래 층을 내려다 보았다. 건물 아래에는 수많은 인부들이 무너진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안전선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 역사적인 순간을 구경하기 위해 경찰서를 한 번씩은 힐끗 거린 탓에 메드렛은 왠지 모르게 자신들이 동물원의 동물들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탓인가, 오히려 경찰서를 기웃거리지 않는 사람들이 더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얀 모자를 쓴 여자가 눈에 띄었다. 검은 색 비니를 쓴 남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그녀. 그리고 남자는 마치 여자를 가려주는 듯이 계속 해서 사각지대를 만들며 길을 뚫고 있었다. 순간 메드렛이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외쳤다.
“어, 어? 어!”
그러고는 어리둥절해 하는 엘사리를 밀치듯 지나치며 서둘러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혼자 남겨진 엘사리는 메드렛이 밀친 자리를 손으로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여전히 예측하기 힘든 분이시군.”
그는 메드렛이 서명한 파일을 책상 위에 놔두고 그 옆에 놓여 있던 머그잔을 들어 안의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셨다. 씁쓸하면서도 상쾌한 허브 티였다. 그는 향을 몸 안으로 빨아드리려는 듯 숨을 가볍게 쉬었다.
“이렇게 창이 큰 것도 나쁘진 않군. 수리를 조금만 늦춰달라고 해볼까?”
그가 그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바람이 거칠게 불며 그의 책상 위에 있던 서류들을 흩뜨려 놓았고, 덕분에 그는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수 십 장의 서류를 주워 정리해야만 했다. 최대한 수리를 앞당겨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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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얍
vin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