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다닥.
빠르게 타자를 치던 손놀림이 전등이 깜박거리는 바람에 잠깐 멈췄다가, 다시 빠르게 다음 문장을 쳐내려 갔다. 그에 따라 산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깔끔한 모니터 안에 몇 가지 문장들이 나타났다. 문서를 작성하던 남자는 손가락을 멈추더니 앞에 앉아 새치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흘깃 노려보며 질문했다.
“이름은?”
“……..”
“나이는?”
“…….”
“직업은?”
“……..”
“새벽 1시라는 늦은 시각에 신전에 몰래 잠입한 이유는?”
“…….”
묵묵무답이었다. 거기까지 질문한 남자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었다. 그가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묵비권이란 말이지? 그래, 좋아. 뭐, 엘칸의 모든 시민들에게는 권리라는 게 있으니까. 그런데……”
남자는 책상을 탁 내려치면서 소리쳤다.
“이름이라도 말하란 말이야! 그 정도는 말할 수 있잖아!”
밖은 가을을 맞아 쌀쌀해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는 끓어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가죽점퍼를 벗어 아무데나 던져버렸다.
“나도 답답하다고, 아가씨. 그냥 간단하게 진술만 하고, 정당한 이유만 있으면 훈방조치라도 시켜줄 수 있어. 그냥 뭘 훔치러 들어갔던 거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면 벌금형 정도면 끝날 수도 있고! 나도 지금 밀린 사건이 몇 개나 되거든요? 지금 아가씨랑 씨름할 시간은 없거든요?”
메드렛은 얼핏 봐도 이런 저런 일들을 겪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형사 일에 굳은 막 중년에 이른 형사였다. 지난 달에 20년 근속 포상을 받았고, 또 큰 문제 없이 20년을 근속한 것을 증명하듯 그의 몸은 한 점의 불필요한 지방을 찾기 힘들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청장이 직접 훈장을 주며 치하할 만큼 연륜과 실력이 쌓인 그인 만큼, 이런 아가씨를 다루는 데는 이골이 나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래서 예쁘장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가씨를 어려워하는 신입한테 형사의 본을 보이겠다며 1시간만 달라고 하고는 당당하게 가로채왔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가 한 것은 ‘묵비권 행사 중’이라는 문장만 지웠다가 다시 쓰는 일뿐이었다.
솔직히 사건 자체는 간단했다. 신입이 사건을 넘겨주기 전에 적은 글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하얀 밤의 여왕이라는, 너무나 마이너해서 오히려 더 유명해진 고대신의 신전에 불법 침입하려 했음. 도굴의 가치가 거의 없는 시립관광지인 점과 당시 아무런 저항과 도주가 없이 잡힌 것으로 봐 초짜 도적이거나 학술적 같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임. 소지품은 잡화가 든 가방 하나와 길이 75센티 미터의 도검 두 자루. 입고 있는 의복은 청색 반바지와 검은 색의 셔츠뿐. 아마 수 백 번은 읽은 글귀일 것이다. 그는 거의 절규하듯 책상을 다시 한 번 내리쳤다.
“30시간 째야, 30시간 째! 당신 식사비만 해도 벌써 40 베라가 나갔다고! 내 이틀 급료에 가까운 세금이 당신 뱃속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야! 아유, 법 때문에 굶길 수도 없고, 그냥!”
거기까지 말한 그는 넥타이를 거칠 게 잡아 풀며 의자 뒤로 몸을 뉘었다.
“몰라, 몰라. 당신이 이름이라도 말하지 않는 이상 난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해.”
웬만한 사람이라면 불쌍해서라도 뭐라 한 마디 했을 테지만 여자의 입술은 일 자로 굳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엔 그녀가 벙어리이거나 난청인 줄 알고 필사도 사용해보고, 혹은 문맹 싶어서 온 몸으로 표현을 해봤다. 그 눈물 나는 노력이 중단된 것은 그의 우스꽝스런 몸짓을 보다가 그녀가 피식 웃으며 저녁을 먹을 때였을 것이다. 폭력적인 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메드렛은 이 여자가 하루만 더 이곳에 죽치고 있게 되면 반드시 혈압 약을 처방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심정과는 정 반대로, 현재 이 사건은 본부장과 부 본부장이 사건의 결말을 직접 알려달라고 전언을 보냈을 만큼 경찰서 내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단순 도난이나 무허가 침입 사건은 보통 한 달에 한 두 번쯤은 있는 류의 일이었고, 또 1시간 안에 조사가 끝났기에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은 그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커져있었다. 물론 조사를 받는 혐의자가 흔히 보기 힘든 미인이라는 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 그는 따분한 형사들 사이에서 내기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했다. 아마 그의 활약에 따라 오늘 내일 지갑 사정이 달라질 이들이 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미칠 것 같았다. 앞에 앉은 여자가 미녀든 추녀든 상관이 없었다. 후배들이나 동료들의 비웃음, 혹은 상사의 호통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앞에 앉아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차를 마시는 여자의 정체가 정말 미치도록 궁금할 뿐이었다. 만약 악마가 자신의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저 여자의 정체를 알려주는 대신 혼을 팔라고 한다면, 팔지는 않더라고 심각하게 고민은 할 것 같은 정도였으니까. 그는 뒤로 고개를 누운 체로 여자를 봤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불순한 눈빛이 되었지만 여자는 그리 개의치 않는 듯 하다.
그녀는, 그녀를 체포한 신입의 말을 빌리자면, 대박이었다. 엄청난 미인이라기 보다는 신체의 모든 부위가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최고급 비단을 연상시키는 블루블랙의 포니 테일과 이목구비가 뚜렷한 하얀 얼굴, 그리고 작은 가방 하나 들기 힘들어 보이는 가냘픈 몸매는 대부분의 남성이 원하는 이상형일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적갈색의 눈동자 한 쌍은 무심한 듯 찻잔 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형사가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는 사이 그녀의 손가락이 섬세한 움직임을 그리며 찻잔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가늘다 못해 부러질 것 같은 검지와 엄지 사이에는 약간 긴 녹차 조각이 들려있었다.
그때였다. 절대로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입술이 열린 것은.
“대흉(大凶)이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형사가 의자째로 뒤로 넘어간 것이다.
“바, 방금 말, 말했지?”
여자는 이상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당연한 것을 질문하네, 형사님.”
새침한 말투였지만 지금 그는 마치 신탁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팔을 걷어 붙이며 의욕적으로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릴 준비를 했다.
“좋아, 아가씨. 이제야 말할 기분이 들었다, 이거지? 괜찮아. 지금부터라도 다 말하면 내가 최대한 편의를 봐주도록 하지. 내일 점심에 특대 스테이크를 쏠 수도 있어. 자, 이름이 뭐지?”
하지만 그녀는 작게 한 숨을 쉴 뿐이었다. 메드렛이 갑자기 열이 뻗는 것을 느끼며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할 때, 그녀가 창가 쪽을 돌아보면서 끼어들었다.
“내가 말 안 했나? 대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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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한주 시작하세요~
vin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