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도
1.기사도
로마제국이 기울 무렵인 서기 5세기 경, 북유럽 국가들은 아직 뚜렷하게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세력이 비슷한 많은 족장들이 자신의 세력권내에서 각기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공동목적을 위해 연합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서로 적대시하기가 예사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의 하층계급의 권리는 침략자의 손에 좌우되었다. 따라서 족장들이 마음대로 휘두르는 권력에 대해 견제가 없었다면 사회는 분명 야만상태로 퇴보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세 가지 요인이 적절히 견제역활을 했다. 첫쨰요인은 족장들 자신의 경쟁심으로서, 서로에 대한 질시로 상대방을 견제했다. 둘째 요인은 교회의 영향력으로서, 순수한 동기에서든 이기적인 동기에서든 교회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중재할 것을 서약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요인이, 분노와 이기심 때문에 곧잘 방해받기는 했지만,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있는 관용과 정의감인데 바로 여기서 기사도가 탄생했다. 기사도란 영웅이 갖추어야 할 이상적인 품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윗사람에게는 용기, 정의, 겸손, 충성으로, 동료들에게는 예의로, 약자에게는 연민으로 대하고, 교회에서는 헌신할 것을 요구했다. 이 기사도 정신의 이상은 비록 현실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려웠지만 모든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최고의 모범으로 인정됐다.
기사도(Chivarly)는 말을 뜻하는 프랑스어 슈발(Cheval)에서 유래했다.
원래 소년이나 급사를 의미하던 기사(Knight)는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된 젊은 남자를 특별히 지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은 가문이 좋고 부유한 젊은이들만이 누릴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무기를 지닐수 없었다. 그 당시 기사란, 말을 탄 전사나, 지위가 놓은 사람, 혹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섬기며 보호받는 사람이었다.
기사 자신도 독립적인 생계수단이 있기는 했지만, 보통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자신이 섬기는 상급자들의 은혜나, 힘있는 사람이 휘두르는 권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시에는 종자들과 함께 군주의 야영지에 머물며, 전투를 지휘하거나 군주를 위해 성을 지켰다.
평상시에는 군주의 조정과 연회에 자주 참석하고, 군주들이 여가로 베푸는 마상시합(tournament)에 참가하며 소일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험을 찾아 이곳저곳 떠돌며,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확립하며, 때로는 종교나 사랑의 서약을 이행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처럼 떠도는 기사들은 편력기사(Knignt-errant)라고 불렀으며 귀족들 성에서는 언제나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외떨어진 곳에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던 귀족들에게 활기를 되찾아주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는 수입의 많은 부분을 기사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러나 근처에 성이나, 수도원, 수사들이 은둔하던 암자가 없을 경우에는 저녁도 거른 채 길가 십자가 아래 누워 밤을 보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참을 줄 아는 강건한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정의를 세우려했다는 것이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불의를 바로잡는 것이 정당한 목적이었던 권력 때문에 도리어 기사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어낸 얘기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풍속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로맨스를 보면, 기사의 성이 주변국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성채의 감옥에 갇힌 수많은 기사와 귀부인들이 용감한 기사가 나타나 자신들을 석방해주거나 몸값을 물고 석방되기를 기다리는 이야기, 정의나 법을 무시하고 군주의 명령을 시행하는데만 급급한 못된 신하들, 힘없는 하급계급의 권리를 무시한 사실 등도 잘 나타나 있다.
기사도에 대해 사람들이 마음속에 상반된 인상을 품게 된 이유는 이렇게 이상과 현실이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도를 열렬히 찬양한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냉정히 판단해보면, 현대에 접어들어 비록 덜 멋있기는 하지만 법이나 치안 판사가 갑옷입는 기사를 대신하여 통치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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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사수업
기사후보들이 받는 예비교육 과정은 길고도 혹독했다. 귀족의 자제들은 일곱살만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 미래의 후견인이 될 사람의 궁전이나 성으로 거처를 옮겨 가정교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스승에게서 종교의 중요한 항목과, 군주나 윗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법 등을 익히고, 궁정의식의 기초지식을 배웠다.
이들을 시동(pages, valets, warlets)이라 불렀는데, 식탁에서 고기를 썰어 나누어 주거나, 자질구레한 시중을 드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일들을 전혀 천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가시간에는 춤추는 법과 하프연주하는 법을 배웠고 사냥이나 매사냥, 낚시 등 수렵에 관한 여러가지 기술을 익혔다.
또한 검을 휘두르는 법을 배우고 말을 타고 하는 여러가지 무예훈련도 받았다.
중무장을 하고 말 등에 올라타기, 달리기, 성벽 기어오르기, 도랑과 장애물 뛰어넘기, 무기 다루기, 격투, 우아한 마술(마법따위의 마술이 아님ㅡㅡ;)동작 등이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한 필수예비지식이었다. 기사작위는 보통 스물 한 살에 받게 되는데, 그로써 젊은이에 대한 모든 교육은 완성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시기동안 또한 수습기사(esquire)들은 당시에 궁중범절(courtsy)이라고 부른 예의 범절을 부지런히 익혀야 했다.
그들이 교육받고 있던 성에는 젊은 처녀들도 자주 드나들었으므로, 수습기사들은 어렸을 때부터 궁중의 처녀둘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마음속의 연인으로 삼도록 권장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자 언행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연인에 대한 봉사는 기사의 영광이자 직분이었고, 연인이 애정과 감사를 담아 보내는 미소는 기사의 참다운 용기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졌다.
충성과 사람의 힘은 신앙심과 어울려 하나가 되고, 사제가 주관하는 신성하고 종교적인 경외감으로 가득찬 기사작위는 위대한 군주들도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기사입단식은 특별히 더 장엄했다.
기사후보자는 철저히 단식하고 며칠간 철야기도를 한 뒤 고해를 하고 성사를 받는다.
그런 다음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사제가 축성해 준 칼을 목에 걸고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교회나 식장으로 향한다.
후보자가 두 팔을 포갠 채 무릎을 꿇으면, 식을 주재하는 기사는 입단 승인을 요청하는 동기와 목적을 물어보고 맹세를 시킨 후 요청을 수락한다.
입단식에 참석한 기사들과 귀부인, 처녀들이 차례로 말 용구, 갑옷 등을 건네주면 기사후보자가 마지막으로 칼을 찬다. 그런 다음 다시 무릎을 꿇으면, 주재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과, 성 미카엘과 성 조지의 이름으로 그대를 기사로 만드노니 용감하고 예절바르며 충성을 다할지어다!"라는 말과 함께 후보자의 어깨와 목을 칼등으로 세번 두드림으로써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
그리고 나서 후보자가 투구와 방패와 검을 받으면 모든 의식이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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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사적 기술
전투장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었다.
말은 필수불가결한 전투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기사의 사회적 우월성을 나타내주는 가장 분명한 표지였다. 그리고 매우 비싼 개인 장비가 있는데(갑주만 해도 상당한
농토의 가치와 엇비슷했다) 부자들만이 그러한 장비로 무장할 수 있었다.
말과 무장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 두가지 요소가 더욱 긴밀하고 효과적으로 결합된 것이 11세기가 경과하는 동안이었다. 서기 1000년경에는 기사들의 무장은 아직 단순했다. 전투에서 쓰이는 짧은 창은 바이외(Bayeux)의 유명한 태피스트리 -노르망디 공 정복자 기욤의 전투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1180년경에 그 부인이 수를 놓아 만들었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멀리서 적에게 던지는 투창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육박전에서는 무척 길고도 무거운 검이 사용되었는데 주요한 무기였던 검-말과 마찬가지로 검은 그 고유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무훈시를 통해 알 수 있다-은 중세 초로부터 대장장이들간에 전수되어온 기술에 따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방어를 위해서는 금속으로 된 투구가 있었다.
갑옷은 가죽으로 되어있었는데 여기저기에 비늘 모양으로 된 두터운 판으로 보강되었다. 그리고 역시 가죽으로 된 둥근 혹은 삼각형의 방패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가벼워 움직이는 데에 편했다. 제철술의 보급-이것은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과 연관된 주요한 진보가 방어구의 개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안면을 가리는 금속판인 안면가리개가 투구에 부착되었다.
가죽 갑옷은 곧 머리부터 무릎까지 몸 전체를 덮는 쇠고리와 사슬로 이루어진 쇠사슬 갑옷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갑주를 입음으로써 전사들은 투창이나 조그만 활의 화살같은 날아오는 무기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수 있었다.그래서 원거리에서 가하는 공격의 중요성이 줄어들어 몸과 몸이 맞부터 싸우는 육박전이 전투의 결정적인 양상이 되었다. 쇠사슬 갑옷의 착용으로 인해 기사는 더 둔중해지고 더 무거워져 이동하기에 어려웠다.
움직이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말이 새로운 역활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예전에는 목표물에 접근하기 위한 이동이나 기습공격 그리고 혼전중에 적을 밀쳐내거나 추격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했다.
그러다 검을 가지고 싸울때에는 말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차츰 접전하는 한가운데서 말을 사용하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사로 하여금 더욱 안정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고 말과 일체과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등자와 큰 안장의 덕택이었다.
그리고 또 농업기술의 진보와 연관된 말의 개량으로 인한 것이기도 했다. 잘 먹인 말은 더 튼튼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때문에 새로운 무구를 갖춘 전사는 민첩성을 상실함이 없이 잘 지탱할 수 있었다.
그래서 11세기 말에 군사적인 접전은 기사들의 충돌 즉 마상 창전투가 되었다. 그 이후 공격무기는 압도적으로 장창이 된다. 장창을 허리에 꿰어차고 말을 돌진시키는 기사는 적을 말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 장창을 사용했다. 낙마한 기사는 그의 갑옷 때문에 꼼짝 못한 채 한순간 그 상대방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미제리코르드(mise'ricorde)"[원래의 의미는 긍휼이나 자비를 말한다/역주] 라는 것은 갑옷의 빈틈으로 들어가 적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작은 단검에 사람들이 후에 붙인 이름이다.
추 가 된 자 료
사계급의 엘리트인 기사가 지켜야 할 윤리적, 미적 행동규범을 기사도라고 하는데, 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기사제도 그 자체를 고찰해 보겠다.
♣ 기사제도의 기원
심신이 건실한 젊은이에게 일정한 성인식으로 거쳐 무기를 주어 전사집단 에 참가시키는 관습은 옛부터 게르만민족 사이에서 행해져 왔다.
중세유럽의 기사서임식과 기사제도는 게르만 관습에서 유래된 것인데, 단지 전사간의 관 행에 그치지 않고 전체교회가 개입하고 있는 점, 즉 기사가 단지 전사일 뿐 아니라 신에게 봉사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검을 잡는 크리스챤'인 것에 특징이 있다.
공교회개입의 시기는 아마도 8세기 말경이고 처음에는 서임식 에서 무기의 축성(祝聖)을 집행하는 정도였을 것이나, 나중에는 의식 자체를 주도하게 되었다.
또, 서임식에서는 기사지망자의 머리를 검으로 가볍게 두 드리는 의식이 무기수여시에 행해졌다.
♣ 기사수업과 연한.
봉토를 매개로 한 종속적 보호와 충성의 계약관계가 봉건제인데, 일반적으 로 전사는 자기자식을 직속영주(直屬領主)에게 맡겨 전투기술, 예의 등에 관 한 교육을 받게 하였다. 수업연한을 무사히 마치면 좋은 날을 택하여 원칙적 으로 영주이며 기사인 사람에 의해 기사로 서임되었다. 주목할 점은 기사신 분이란 점에서 국왕이나 일개 신하도 원칙적으로는 동격이고 수평관계였으 므로 국왕이라 하더라도 일정수업이 없는 왕자를 기사로 서임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수직원칙이 수평원칙보다 강하였고, 기사신분도 후에는 세습되었다. 수업연한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길어져서 서임연령이 11세기에는 15세가, 13세기에는 20세 정도로 되었다).
♣ 기사의 권리와 의무.
엄격한 수업시대, 엄숙한 기사서임식을 거쳐 겨우 기사의 신분에 올라가지만, 기사의 권리와 의무란 결국 정신적인 것이었다.
권리라 해도 물질적인 이익이 뒤따르는 것이 아니였다. 다만 군대의 수뇌부가 되어 군사행동시 주요역할을 담당하거나 문장(紋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구체적인 특권으 로 생각되었다.
의무는 거의 정신적인 것이였다. 종교면에서 전교회의 재산, 성직자의 안전을 지킬 것, 부녀자, 미망인 등 약자와 빈자를 보호할 것, 이웃 에게 자비심을 가질 것 등이였고 세속적인 면에서는 봉건신분상 제의무를 지킬 것(수직원칙에 수평원칙이 포함되는 요인이기도 했다)이었다.
또 개인 적인 면에서는 무엇보다도 명예를 소중히 할 것 등이였다. 정신적이라는 의미는 위반할 경우 처벌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고 또 재판하는 경우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적 의무의 경우에는 즉 군주에 대한 반역, 군사상의 배반의 경우는 재판에 회부되는 것이 원칙이였고 이 재판은 수직원리에 따 라서 행해졌다.
♣ 기사제도의 변질.
오래고 엄격한 수업에 비해 큰 특권을 기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여러가지 의무를 부담시키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이 속하고 있는 계층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 역할에 대해 회의를 품지 못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또 계층 내부의 등지적 단결을 확신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즉 일종의 공동체환상을 성립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조정이 초기 십자군시대에는 가능하였지 만 그 후 전사계급의 상대적 기반약화, 전사간의 상대적 빈부격차의 확대 등 에 의해 사정이 변화되었다.
가난한 기사는 기마시합에서 돈내기로 수입을 얻거나 개인간 전투의 용병역할로 호구를 연명해야 했지만, 신분이 높고 부유한 기사는 화려한 궁정에서 귀부인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데 많은 시 간과 정력을 소비하였다.
여하튼 고귀한 행동, 귀부인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가 기사신분의 고유한 의무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국제적 규모의 군사수도회 가 우수한 기사를 휘하에 둔다든지, 중앙집권화를 발전시킨 국왕 권력이 사 투(私鬪)를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기사제도의 변질에 박차를 가하였다.
13세 기 이후의 기사제도는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 기사도와 신사도.
기사제도가 중세와 더불어 몰락하자 기사도에 대신하여 존경할 만한 남성 의 행동규범으로 신사도가 이어서 나타났다.
우선 투쟁본능을 가능한 한 억 제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함부로 남과 싸우지 않는 것,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는 경우도 일정한 룰을 지키고(소위 페어플레이 정신), 부상당한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엇보다도 명예를 소중히 하는 태도도 기사의 의무인 동시에 신 사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신사엽정이란 암묵적 계약관게를 가능케 한 것도 이것이며, 사교계의 교제(때로는 도박까지)를 성립시키는 것도 바로 이 명예였다.
또한 여성에 대한 정중한 태도,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위로 등도 기사도의 신사도에 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기사도와 신사도 사이에 연속만이 있고 질적 단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이상적인 기사의 경우는 인격적으로 결합된 신이 내면에 자리잡고 있지만 신사 및 신사도에 있어서는 그럴 필요 성은 없다.
신사도는 기사도의 세속적인 면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서양사의 기초지식 - 신서원, 1990)
1.기사도
로마제국이 기울 무렵인 서기 5세기 경, 북유럽 국가들은 아직 뚜렷하게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세력이 비슷한 많은 족장들이 자신의 세력권내에서 각기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공동목적을 위해 연합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서로 적대시하기가 예사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의 하층계급의 권리는 침략자의 손에 좌우되었다. 따라서 족장들이 마음대로 휘두르는 권력에 대해 견제가 없었다면 사회는 분명 야만상태로 퇴보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세 가지 요인이 적절히 견제역활을 했다. 첫쨰요인은 족장들 자신의 경쟁심으로서, 서로에 대한 질시로 상대방을 견제했다. 둘째 요인은 교회의 영향력으로서, 순수한 동기에서든 이기적인 동기에서든 교회는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중재할 것을 서약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요인이, 분노와 이기심 때문에 곧잘 방해받기는 했지만,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있는 관용과 정의감인데 바로 여기서 기사도가 탄생했다. 기사도란 영웅이 갖추어야 할 이상적인 품성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윗사람에게는 용기, 정의, 겸손, 충성으로, 동료들에게는 예의로, 약자에게는 연민으로 대하고, 교회에서는 헌신할 것을 요구했다. 이 기사도 정신의 이상은 비록 현실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려웠지만 모든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최고의 모범으로 인정됐다.
기사도(Chivarly)는 말을 뜻하는 프랑스어 슈발(Cheval)에서 유래했다.
원래 소년이나 급사를 의미하던 기사(Knight)는 무기를 소지할 수 있는 특권이 허용된 젊은 남자를 특별히 지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특권은 가문이 좋고 부유한 젊은이들만이 누릴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무기를 지닐수 없었다. 그 당시 기사란, 말을 탄 전사나, 지위가 놓은 사람, 혹은 자신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섬기며 보호받는 사람이었다.
기사 자신도 독립적인 생계수단이 있기는 했지만, 보통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자신이 섬기는 상급자들의 은혜나, 힘있는 사람이 휘두르는 권력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시에는 종자들과 함께 군주의 야영지에 머물며, 전투를 지휘하거나 군주를 위해 성을 지켰다.
평상시에는 군주의 조정과 연회에 자주 참석하고, 군주들이 여가로 베푸는 마상시합(tournament)에 참가하며 소일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험을 찾아 이곳저곳 떠돌며, 불의를 바로잡고, 정의를 확립하며, 때로는 종교나 사랑의 서약을 이행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이처럼 떠도는 기사들은 편력기사(Knignt-errant)라고 불렀으며 귀족들 성에서는 언제나 환영받는 손님이었다. 외떨어진 곳에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던 귀족들에게 활기를 되찾아주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는 수입의 많은 부분을 기사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맞이했다. 그러나 근처에 성이나, 수도원, 수사들이 은둔하던 암자가 없을 경우에는 저녁도 거른 채 길가 십자가 아래 누워 밤을 보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참을 줄 아는 강건한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정의를 세우려했다는 것이 그 당시 상황을 정확히 설명해주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불의를 바로잡는 것이 정당한 목적이었던 권력 때문에 도리어 기사들이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어낸 얘기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풍속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로맨스를 보면, 기사의 성이 주변국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성채의 감옥에 갇힌 수많은 기사와 귀부인들이 용감한 기사가 나타나 자신들을 석방해주거나 몸값을 물고 석방되기를 기다리는 이야기, 정의나 법을 무시하고 군주의 명령을 시행하는데만 급급한 못된 신하들, 힘없는 하급계급의 권리를 무시한 사실 등도 잘 나타나 있다.
기사도에 대해 사람들이 마음속에 상반된 인상을 품게 된 이유는 이렇게 이상과 현실이 다르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사도를 열렬히 찬양한 사람이 있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냉정히 판단해보면, 현대에 접어들어 비록 덜 멋있기는 하지만 법이나 치안 판사가 갑옷입는 기사를 대신하여 통치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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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사수업
기사후보들이 받는 예비교육 과정은 길고도 혹독했다. 귀족의 자제들은 일곱살만 되면 부모의 품을 떠나 미래의 후견인이 될 사람의 궁전이나 성으로 거처를 옮겨 가정교사의 보살핌을 받았다.
스승에게서 종교의 중요한 항목과, 군주나 윗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는 법 등을 익히고, 궁정의식의 기초지식을 배웠다.
이들을 시동(pages, valets, warlets)이라 불렀는데, 식탁에서 고기를 썰어 나누어 주거나, 자질구레한 시중을 드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일들을 전혀 천하게 여기지 않았다.
여가시간에는 춤추는 법과 하프연주하는 법을 배웠고 사냥이나 매사냥, 낚시 등 수렵에 관한 여러가지 기술을 익혔다.
또한 검을 휘두르는 법을 배우고 말을 타고 하는 여러가지 무예훈련도 받았다.
중무장을 하고 말 등에 올라타기, 달리기, 성벽 기어오르기, 도랑과 장애물 뛰어넘기, 무기 다루기, 격투, 우아한 마술(마법따위의 마술이 아님ㅡㅡ;)동작 등이 기사 작위를 받기 위한 필수예비지식이었다. 기사작위는 보통 스물 한 살에 받게 되는데, 그로써 젊은이에 대한 모든 교육은 완성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시기동안 또한 수습기사(esquire)들은 당시에 궁중범절(courtsy)이라고 부른 예의 범절을 부지런히 익혀야 했다.
그들이 교육받고 있던 성에는 젊은 처녀들도 자주 드나들었으므로, 수습기사들은 어렸을 때부터 궁중의 처녀둘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 마음속의 연인으로 삼도록 권장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자 언행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연인에 대한 봉사는 기사의 영광이자 직분이었고, 연인이 애정과 감사를 담아 보내는 미소는 기사의 참다운 용기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졌다.
충성과 사람의 힘은 신앙심과 어울려 하나가 되고, 사제가 주관하는 신성하고 종교적인 경외감으로 가득찬 기사작위는 위대한 군주들도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기사입단식은 특별히 더 장엄했다.
기사후보자는 철저히 단식하고 며칠간 철야기도를 한 뒤 고해를 하고 성사를 받는다.
그런 다음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사제가 축성해 준 칼을 목에 걸고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교회나 식장으로 향한다.
후보자가 두 팔을 포갠 채 무릎을 꿇으면, 식을 주재하는 기사는 입단 승인을 요청하는 동기와 목적을 물어보고 맹세를 시킨 후 요청을 수락한다.
입단식에 참석한 기사들과 귀부인, 처녀들이 차례로 말 용구, 갑옷 등을 건네주면 기사후보자가 마지막으로 칼을 찬다. 그런 다음 다시 무릎을 꿇으면, 주재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과, 성 미카엘과 성 조지의 이름으로 그대를 기사로 만드노니 용감하고 예절바르며 충성을 다할지어다!"라는 말과 함께 후보자의 어깨와 목을 칼등으로 세번 두드림으로써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
그리고 나서 후보자가 투구와 방패와 검을 받으면 모든 의식이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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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군사적 기술
전투장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었다.
말은 필수불가결한 전투 수단이었을 뿐 아니라 기사의 사회적 우월성을 나타내주는 가장 분명한 표지였다. 그리고 매우 비싼 개인 장비가 있는데(갑주만 해도 상당한
농토의 가치와 엇비슷했다) 부자들만이 그러한 장비로 무장할 수 있었다.
말과 무장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이 두가지 요소가 더욱 긴밀하고 효과적으로 결합된 것이 11세기가 경과하는 동안이었다. 서기 1000년경에는 기사들의 무장은 아직 단순했다. 전투에서 쓰이는 짧은 창은 바이외(Bayeux)의 유명한 태피스트리 -노르망디 공 정복자 기욤의 전투를 그리고 있는 것으로 1180년경에 그 부인이 수를 놓아 만들었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멀리서 적에게 던지는 투창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육박전에서는 무척 길고도 무거운 검이 사용되었는데 주요한 무기였던 검-말과 마찬가지로 검은 그 고유한 이름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무훈시를 통해 알 수 있다-은 중세 초로부터 대장장이들간에 전수되어온 기술에 따라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방어를 위해서는 금속으로 된 투구가 있었다.
갑옷은 가죽으로 되어있었는데 여기저기에 비늘 모양으로 된 두터운 판으로 보강되었다. 그리고 역시 가죽으로 된 둥근 혹은 삼각형의 방패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가벼워 움직이는 데에 편했다. 제철술의 보급-이것은 당시에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으나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과 연관된 주요한 진보가 방어구의 개량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안면을 가리는 금속판인 안면가리개가 투구에 부착되었다.
가죽 갑옷은 곧 머리부터 무릎까지 몸 전체를 덮는 쇠고리와 사슬로 이루어진 쇠사슬 갑옷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갑주를 입음으로써 전사들은 투창이나 조그만 활의 화살같은 날아오는 무기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수 있었다.그래서 원거리에서 가하는 공격의 중요성이 줄어들어 몸과 몸이 맞부터 싸우는 육박전이 전투의 결정적인 양상이 되었다. 쇠사슬 갑옷의 착용으로 인해 기사는 더 둔중해지고 더 무거워져 이동하기에 어려웠다.
움직이는 것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말이 새로운 역활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예전에는 목표물에 접근하기 위한 이동이나 기습공격 그리고 혼전중에 적을 밀쳐내거나 추격하기 위해서 말을 사용했다.
그러다 검을 가지고 싸울때에는 말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차츰 접전하는 한가운데서 말을 사용하는 일에 익숙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사로 하여금 더욱 안정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해주고 말과 일체과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등자와 큰 안장의 덕택이었다.
그리고 또 농업기술의 진보와 연관된 말의 개량으로 인한 것이기도 했다. 잘 먹인 말은 더 튼튼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때문에 새로운 무구를 갖춘 전사는 민첩성을 상실함이 없이 잘 지탱할 수 있었다.
그래서 11세기 말에 군사적인 접전은 기사들의 충돌 즉 마상 창전투가 되었다. 그 이후 공격무기는 압도적으로 장창이 된다. 장창을 허리에 꿰어차고 말을 돌진시키는 기사는 적을 말에서 떨어뜨리기 위해서 장창을 사용했다. 낙마한 기사는 그의 갑옷 때문에 꼼짝 못한 채 한순간 그 상대방의 손에 맡겨지게 된다.
"미제리코르드(mise'ricorde)"[원래의 의미는 긍휼이나 자비를 말한다/역주] 라는 것은 갑옷의 빈틈으로 들어가 적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수 있는 작은 단검에 사람들이 후에 붙인 이름이다.
추 가 된 자 료
사계급의 엘리트인 기사가 지켜야 할 윤리적, 미적 행동규범을 기사도라고 하는데, 그 내용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기사제도 그 자체를 고찰해 보겠다.
♣ 기사제도의 기원
심신이 건실한 젊은이에게 일정한 성인식으로 거쳐 무기를 주어 전사집단 에 참가시키는 관습은 옛부터 게르만민족 사이에서 행해져 왔다.
중세유럽의 기사서임식과 기사제도는 게르만 관습에서 유래된 것인데, 단지 전사간의 관 행에 그치지 않고 전체교회가 개입하고 있는 점, 즉 기사가 단지 전사일 뿐 아니라 신에게 봉사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검을 잡는 크리스챤'인 것에 특징이 있다.
공교회개입의 시기는 아마도 8세기 말경이고 처음에는 서임식 에서 무기의 축성(祝聖)을 집행하는 정도였을 것이나, 나중에는 의식 자체를 주도하게 되었다.
또, 서임식에서는 기사지망자의 머리를 검으로 가볍게 두 드리는 의식이 무기수여시에 행해졌다.
♣ 기사수업과 연한.
봉토를 매개로 한 종속적 보호와 충성의 계약관계가 봉건제인데, 일반적으 로 전사는 자기자식을 직속영주(直屬領主)에게 맡겨 전투기술, 예의 등에 관 한 교육을 받게 하였다. 수업연한을 무사히 마치면 좋은 날을 택하여 원칙적 으로 영주이며 기사인 사람에 의해 기사로 서임되었다. 주목할 점은 기사신 분이란 점에서 국왕이나 일개 신하도 원칙적으로는 동격이고 수평관계였으 므로 국왕이라 하더라도 일정수업이 없는 왕자를 기사로 서임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수직원칙이 수평원칙보다 강하였고, 기사신분도 후에는 세습되었다. 수업연한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점차 길어져서 서임연령이 11세기에는 15세가, 13세기에는 20세 정도로 되었다).
♣ 기사의 권리와 의무.
엄격한 수업시대, 엄숙한 기사서임식을 거쳐 겨우 기사의 신분에 올라가지만, 기사의 권리와 의무란 결국 정신적인 것이었다.
권리라 해도 물질적인 이익이 뒤따르는 것이 아니였다. 다만 군대의 수뇌부가 되어 군사행동시 주요역할을 담당하거나 문장(紋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구체적인 특권으 로 생각되었다.
의무는 거의 정신적인 것이였다. 종교면에서 전교회의 재산, 성직자의 안전을 지킬 것, 부녀자, 미망인 등 약자와 빈자를 보호할 것, 이웃 에게 자비심을 가질 것 등이였고 세속적인 면에서는 봉건신분상 제의무를 지킬 것(수직원칙에 수평원칙이 포함되는 요인이기도 했다)이었다.
또 개인 적인 면에서는 무엇보다도 명예를 소중히 할 것 등이였다. 정신적이라는 의미는 위반할 경우 처벌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고 또 재판하는 경우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속적 의무의 경우에는 즉 군주에 대한 반역, 군사상의 배반의 경우는 재판에 회부되는 것이 원칙이였고 이 재판은 수직원리에 따 라서 행해졌다.
♣ 기사제도의 변질.
오래고 엄격한 수업에 비해 큰 특권을 기대할 수 없었고, 오히려 여러가지 의무를 부담시키게 하기 위해서는 그 인간이 속하고 있는 계층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 역할에 대해 회의를 품지 못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또 계층 내부의 등지적 단결을 확신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즉 일종의 공동체환상을 성립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조정이 초기 십자군시대에는 가능하였지 만 그 후 전사계급의 상대적 기반약화, 전사간의 상대적 빈부격차의 확대 등 에 의해 사정이 변화되었다.
가난한 기사는 기마시합에서 돈내기로 수입을 얻거나 개인간 전투의 용병역할로 호구를 연명해야 했지만, 신분이 높고 부유한 기사는 화려한 궁정에서 귀부인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데 많은 시 간과 정력을 소비하였다.
여하튼 고귀한 행동, 귀부인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가 기사신분의 고유한 의무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국제적 규모의 군사수도회 가 우수한 기사를 휘하에 둔다든지, 중앙집권화를 발전시킨 국왕 권력이 사 투(私鬪)를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기사제도의 변질에 박차를 가하였다.
13세 기 이후의 기사제도는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 기사도와 신사도.
기사제도가 중세와 더불어 몰락하자 기사도에 대신하여 존경할 만한 남성 의 행동규범으로 신사도가 이어서 나타났다.
우선 투쟁본능을 가능한 한 억 제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함부로 남과 싸우지 않는 것, 어쩔 수 없이 싸우게 되는 경우도 일정한 룰을 지키고(소위 페어플레이 정신), 부상당한 상대를 필요 이상으로 다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으로 무엇보다도 명예를 소중히 하는 태도도 기사의 의무인 동시에 신 사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신사엽정이란 암묵적 계약관게를 가능케 한 것도 이것이며, 사교계의 교제(때로는 도박까지)를 성립시키는 것도 바로 이 명예였다.
또한 여성에 대한 정중한 태도,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위로 등도 기사도의 신사도에 대한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기사도와 신사도 사이에 연속만이 있고 질적 단절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이상적인 기사의 경우는 인격적으로 결합된 신이 내면에 자리잡고 있지만 신사 및 신사도에 있어서는 그럴 필요 성은 없다.
신사도는 기사도의 세속적인 면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서양사의 기초지식 - 신서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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