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기사도, 그리고 사회의 계급
기사도
로마 제국의 세력이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인 서기 5 세기경, 북부유럽 제국
(제국)은 아직 뚜렷한 국가 형태를 갖추지 않았엇다. 다소 힘이 있는 많은
족장(족장)들은 그들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지역적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위해 단결하곤 했으
나 평상시에는 서로 적대시했다. 그러한 사태하에서는 사회의 하류 계급의
권리는 침략자의 손에 좌우되었다. 따라서족장들의 방종한 세력에 어떤 제재
를 가하지 않았더라면, 사회가 미개 상태로 퇴보했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한 제재는 첫째로족장들 스스로의 경쟁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 상호간의 질투가 서로서로를 견제케 했다. 둘째로 교호히의 영향에서
그러한 제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는 순수한 동기에서든 이기적인 동기
에서든, 약한 자를 옹호하기 위하여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을 서약했다. 마
지막으로 어떠한 격정과 이기심의 중압 아래 짓눌려 있었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자연적으로 깃들여있는 관용과 정의감 속에서 그런 제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원천으로부터 기사도(기사도)가 나왔다. 그런데 이
기사도라는 것은 무적의 힘과 용기, 정의, 겸손, 웃사람에 대한 충성, 동료에
대한 예절, 약자에 대한 동정, 그리고 교회에 대한 헌신등을 구비한 것으로
서, 영웅적 성격의 이상(이상) - 실생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할지라
도 모든 사람들이 지고(지고)의 모범으로 인정하고 있는 - 을 이루고 있었
다.
chivalry(기사도)라는 말은 불어의 cheval, 즉 말(마)에서 유래한다.
knight(기사)라는 말은 어원상으로는 사환 아이느 하인을 의미했었는데, 후
에는 특히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특권이 인정된 젊은 남자를 호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특권은 부유한 명문 출신의 청년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었
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무기의 휴대가 허용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사는
말을 탄 전사(전사)로서 그 자신이 지위 있는 자이거나 또는 다른 지위 있는
자에게 봉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보통독립된 생활 수단을 가지고 있으
나 때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웃사람이 주는 보수에 의존하기도 하였
으며, 또는 종종 실력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전시(전시)에는 기사는 종자(종자)들과 함께 자기 영주(영주)의 야영지에 있
거나 싸움터에서 전투 지휘를 하거나, 또는 영주의 성을 지키고있었다. 평화
시에 그들은 가끔 자기 영주의 궁전에서 시중을 들었고, 제후(제후)들이 여
가를 즐기는 연회나 마상 경기(마상경기) 등에 참석함으로써 그 자리를 한층
빛냈다. 또한 그들은 부정을 제거하고 정의를관철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모험을 찾고나, 때로는 종교 혹은 사랑의 어떤 서약을 실행하기 위하여 전국
을 방랑했다. 이 방랑하는 기사들을 무예수행자(knights-errant)라고 일컬었
다. 그들은 귀족들의 성에서는 환영받는 빈객(빈객)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귀
족들의 따분한 은거 생활에 활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도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우대하였다. 쉽게 말해서 그것은 수도원이 그 수입의 중요한
부분을 기사들의 보호에 힘입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근처에 성도 수도원도
암자도 없을 경우엔, 그들은 저녁도 먹지 않고 길가에 있는 십자가(십자가)
아래 누워서 야숙(야숙)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들의 평상시의 인고(인고) 습
관이 이러한 일을 쉽사리 감내케 하였다.
이러한 수단에 의해서 집행되는 정의가 가장 미개한 종류의 것이었으리라
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악을 제거한다는 합법적인 목적을 가진 힘이 오히려
악용되어, 악을 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실에 있어서는
가공적이라 할지라도 풍습의 묘사로는 건실하다고 할 수 있는 중세 기사이
야기에서, 기사의 성(성)이 이따금 주위 지방에 대하여 공포적이었고, 그 성
의 지하 감옥에 억류된 기사나 숙녀들이 어떤투사가 나타나 자기들을 해방
시켜 주기를 고대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석방되는 이야기, 할 일 없는 가신
(가신)들의 무리가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자기네 영주의 명령을 시행하기 위
하여 항상 가까이에 있었으며, 무기를 지니지 않은 군중들의 권리는 보잘것
이 없었다는 사실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기사도에 관한 사실과 이론이 이처
럼 상반되는 까닭에, 그에 관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반대되는 인상들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가장 열렬한 찬사의 주제가 되어 왔는가 하면 또다른
한편에서는 같은 정도로 맹렬히 비난을 받아 왔다. 냉정히 판단해볼 때 오늘
날은, 기사도 대신에 법이 통치하게 되고 덜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문관(문
관)이 갑옷을 입은 투사를 대신하게 된 데 대하 경하(경하)하지 않을 수 없
다.
기사 수업
기사 지원자들의 예비 교육은 기간이 길고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귀족 자제
들은 일곱 살이 되면 보통 그들의 친가(친가)로부터 미래의보호자의 궁전이
나 성으로 옮겨 와서 지배자의 지위 아래에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지배자는
그들에게 신앙의 제 1 조목들과, 영주와 상관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가르
쳤으며, 궁전의 의식에 그들을 입회시켰다. 시동(시동)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직무는 식탁에서 고기를 저미고, 시중을 들고, 그 외 잔심부름들을 하는 것
이었다. 그 당시에는이러한 일들이 천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한가할 때면 그
들은 춤추고하프를 연주하는 것을 배웠고 또 숲과 강에서 하는 일, 다시 말
하면수렵, 매사냥, 낚시질과 씨름, 창시합, 기타 마상(마상)에서 여러 가지 군
대 훈련을 행하는 것을 교수 받았다. 열네 살이 되면 시동은 기사의 종자가
되어 보다 엄격하고 힘겨운 훈련을 시작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등에
올라타거나 달리기, 성벽에 기어 오르기, 도랑 뛰어넘기, 씨름, 큰 도끼 휘두
르기, 마술(마술)의 모든 동작을 우아하게 해내는 것 등이 기사 작위(작위)를
받는 데 필요한 예비 행위였던것이다.
그런데 그 기사 작위는 보통 스물 한 살이 되었을 때, 즉 젊은이의교육이
완전히 끝났다고 인정되었을 때 수여되었다. 그동안에 기사의종자들은 그 당
시 커티시(courtesy)라고 불렸던 모든 예의 범절을 습득하는 데에 게을리하
지 않았다. 그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같은 성내에는 항상 젊 처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시동들에게는 나이가 매우 어릴 때부터 그 궁정의 어떤
숙녀를 마음의 연인(연인)으로선택할 것이 장려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감
정과 말과 행동을 그연인과 연관시키도록 교육받았다. 연인에게 봉사하는 것
이 기사의 영광이자 직무였으며, 애정과 감사에 넘친 그녀의 미소가 그의 참
다운용기에 대한 보상으로서 제공되었다. 충성과 사랑의 영향은 종교의영향
과 결합되었고, 성직자의 신분에 수반되는 모든 신성(신성)과 종교적 외경이
부여된 기사의 작위는 가장 위대한 영주들에게 있어서도동경의 대상이 되었
다.
기사입단식은 특별히 엄숙했다. 기사 후보자들은 엄격한 단식을 행하고 수
일간 철야 기도를 한 뒤에, 참회를 하고 성찬을 받았다. 그리고 새하얀 옷으
로 갈아입고 기사의 칼을 목에 걸치고, 식이 행해질교회나 회관으로 향했다.
식을 집행하는 사제는 그 칼을 손에 들고축복한 후에 다시 기사 후보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 후보자는 팔짱을 끼고, 사회를 보는 기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회를 보는 그기사는 후보자가 기사가 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에
관한 질문을 하고 그에게 선서를 시킨 뒤에 그의 요구를 승낙했다.
기사입단식에 참석한 몇몇 기사들은, 숙녀들이나 때로는 소녀들에게서 황금
의 박차(박차)와 갑옷, 팔찌, 긴 장갑 등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칼을 찼다. 그
다음 그는 다시 사회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회자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는데, 그 의식은 "신(신)과 성 미카엘과 성 조지
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를 기사로만드오니, 용감하고 예절바르고 충성스러울
지어다"라는 말과 더불어기사 후보자의 어깨나 목을 칼등으로 세 번 두드리
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후보자는 투구와 방패, 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수
여식은 끝나는 것이었다.
마상(마상) 경기
기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마상 경기의 장려한 광경과 그 화려한 장식품
및 기사도적인 규칙들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마상 경기는 종종 교회의
비난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종국에 가서는 벌어지고야마는 싸움과 가끔
일어나는 치명적인 결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상창시합(마상창시합, joust)
은 마상 경기와는 달랐다. 전자에 있어서는기사들이 창을 가지고 싸워 상대
자를 말에서 떨어뜨려야 했는데, 이는기동(기동)운동의 기술과 솜씨의 과시
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무기를 사용했으며 엄격한 예절이 규칙
으로 준수되었다. 이 규칙에의하면 말에 부상을 입히는 것이나 칼끝을 사용
하는 것, 투구의 면갑(면갑)을 올리는 것 혹은 투구의 끈을 푼 후에 기사를
공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숙녀들은 이러한 경기에서 그녀들의 기사를 격려
했고 상품을수여했다. 승리자의 공적들은 이야기와 노래의 테마가 되었다.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관람석은 탑 모양, 테라스 모양, 발코니 모양, 현원(현
원, pensile gardens) 모양을 한 것 등 매우 다채로왔고, 색무늬의 융단이나
큰 천막, 기치(기치)등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투사들은 그가 사랑하고 봉사했던 숙녀의 이름을 선언했다. 그는 계속
관람석을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그에게 감응력을 내려주는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격려를 받곤 했다. 기사들은 또한 그들의 투구나 방패나 갑옷에, 목도
리나 베일, 소맷자락, 팔찌, 고리 등의 사랑의 선물들, 즉 여자 복장 가운데
서 몇 가지를 걸치고 다녔다. 만약 싸우는 동안에 이러한 부속물의 어떤 것
이 땅에 떨어지거나 잃어버리면, 아름다운 증여자(증여자)는, 특히 자신의 이
름을 선서한 기사의 노력에 만족할 때에는 때때로 새것을 그에게 보내 주곤
했다.
자유민, 천민 및 성직자 계급에 대해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다른 계급 중 첫째는 자유민이었는데, 그들은약간의
토지를 소유하고 독립된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자진해서 그들보다
부유한 이웃 사람들의 가신(가신)이 되기도 했는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 그 부유한 자들의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수가 많았던 다른 두 계급은 농노와 천민이었는데, 그들은다 노예
들이었다. 농노들은 노예 중에서도 최하의 상태에 있었다. 그네들이 노동하
여 얻은 모든 수확은 지주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주의 땅을 경작하
는 대신 지주로부터 자신들의 의식(의식)을 제공받았다. 천민들은 그들보다
는 좀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지위는 제정(제정) 러시아 농민들의 그것
과 흡사했던 것 같다. 농노와 마찬가지로그들은 땅에 예속되었고 땅과 함께
매도(매도)되었다. 그러나 그들은지주에게 일정한 소작료만 지불하면 됐고,
근면의 대가로 생기는 잉여는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성직자(clerk)라는 말은 매우 광범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순수
한 의미의 성직자(clergy)에 속하는 사람들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는 결혼한 사람들도 허다했고, 장인(장인)들이나 그 밖의사람들도 많았다. 그
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훨씬 더 광범한 규칙이제정되었다. 그래서 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사제로 간주되었고, 성직자의 은전(은전)이 허
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범법(범법) 행위를 했을 경우, 사형이나 어떤 다른 형
태의 처벌에서 면제되었다.
로망스(Romances)…… 그 추억을 되짚으며
아무런 서적도 없었고 귀족과 제후들마저도 문맹(문맹)이었던 시대에는, 역
사나 전설은 설화자(설화자)들의 독점물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그네들 선조
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들을 상속받았는데, 그들은 후에얻은 견문에다가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 그것을 공중(공중)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시대나 지
리(지리), 장소나 풍습의 착오가 허다했다. 그럴 듯한 족보(족보)들이 날조되
기도 했는데, 이 족보에 의하면 아더(Arthur)와 그의 기사들, 그리고 칼 대제
(Charlemagne)와 그의 용사들이 아이네이아스(Aineias)나 헥토르(Hektor) 또
는 다른 어떤 트로이의 영웅들에게서 그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기사이야기(Romance)라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것은 라틴어와 지방토착어가 혼합되어 서부 유럽에서 형성된 방
언이 'Langue Romaine(로망스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
랑스어는 르와르강을 그 경계로 두 개의 방언으로분리되었다. 강 남쪽 지방
에서는 긍정(긍정)을 나타내는 '그렇다'라는 말이 'oc'라는 말로 표시되었고,
북쪽에서는 'oil(oui)'라고 불렸다. 그래서 단테는 남쪽 말을 'langue d'oc(오
크어)'라 했고, 북쪽의것을 'langue d'oil(오일어)'라 했다. 후자는 노르만인1)
들에 의해서잉글랜드2)로 옮겨졌고 오늘날의 프랑스어의 기원이기도 한데,
그것을 'French Romance(프랑스적 로망스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고 전자는 'Provencal'이나 'Provencial Romance(프로방스적 로망스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랑스 남부 지방인 프로방스와랑그 도크에 사는 사
람들이 그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이 방언들은 전혀 반대되는 특성에 의해 구별되었다.
온화하고 나른해지는 기후, 다른 해양 국가들과의 용이한 교통에 의해 촉진
된 상정신(상정신), 재화(재화)의 유입(유입), 그리고 보다안정된 정부등의 제
조건은 프로방스어(어)의 말씨를 윤택하게 하고부드럽게 하는 데 한층 더 이
바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방스어로시작(시작)을 한 시인들은 '뜨루바두
르(Troubadour)'라고 불렸는데,그들은 이탈리아인, 특히 페트라르카의 스승
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작품들은 풍자시(Sirventes), 연가(연가)와 대화시
(Tensons)였는데,후자는 사랑에 관해서 의심스러운 미묘한 몇 가지 점에 대
해서 서로질문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의 시인들간의 대화 형식을 취한 시였
다.
프로방스인들은 이러한 미묘한 문제들에 전적으로 골몰했었기 때문에모험과
기사도에 관한 설화의 제작은 등한시하고 또 무시하였으므로,'음유시인
(Trouvere)'이라고 불린 그 왕국의 북부 지방 시민들에게대부분이 과업이
남겨지게 된 것 같다.
기사도가 세상에서 널리 찬탄을 받고 또 종교의 적들을 치기 위해전력을
다하던 때에, 문학이 똑같은 충동을 받고 차츰 높아 가는 경쟁심을 자극할
용기와 신심(신심)의 귀감(귀감)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역사와 우화의 수집
이 필요했던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더와 칼 대제는 이 목적을 위해
서 선택된 두 사람의 영웅이었다. 아더왕은, 자신이 항상 훌륭한 전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용감한 전사라고자부했다. 그는 이교도들, 다시 말해 색슨족3)
의 군대에게 단호히 저항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포들인 브리튼인4)들은 그의
추억을 매우존중하였고 웨일즈와 그 동족 국가인 아모리카, 즉 브르따뉴로
그의공적의 추억을 가지고 갔는데, 그들의 민족적 허영심이 그것을 부지불식
간에 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실루리아, 즉 남부 웨일즈의 어린
왕자가 잉글랜드와 갈리아5), 그리고 유럽 대부분의 정복자로서 영웅시되기
까지 이르렀다. 아더의 가계(가계)는 점차로 가상의 브루투스(Brutus)와 트
로이 전쟁 시기까지 소급되었고, 일종의 연대기(연대기)가 제왕사(제왕사)라
는 호화로운 타이틀 아래 1150 년경에 몬머스6)의 조프리(Geoffrey)라는 사
람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웨일즈의 평론가들은 그 작품의 자료를,
7 세기에 성 에서프(Asaph)7)의 주교인 성 탤리언(Talian)이 쓴, 보다 더 오
래 된 역사로간주한다.
칼 대제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의 실제 공적만 하더라도 그 이름을영원히
남게 하기에 족한 것이긴 했지만, 그가 사라센인들과 싸웠던'성전(성전)'을
인기 있는 소설의 주제로 삼지 않았던들 그의 불후의명성은 불가능했을 것
이다. 따라서 이 전쟁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11세기 말경에 한 수도사에 의해
서 씌어졌을 때, 그는 자기 작품을 그전쟁이 행해진 시대와 동시대인의 이름
으로 내는 것이 그 책의 품위를 높일 것이라 생각해 저자명을 773 년경 림
즈(Rheims)8)의 대주교였던 터핀(Turpin)으로 했다.
이 전설적인 기록들은 잠시 동안은 지방어나, 단지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틴어) 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터핀이나 조프리의 자굼은
그 당시 유일한 라틴어 학자였던 성직자들에 의해서읽혀졌는지도 모른다. 그
리고 조프리의 브리튼어 원문(원문)을 웨일즈인들이 읽었더라면 매우 만족했
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책도 일반적이고 흔히 통용되는 언어로 번역되기까
지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앵글로 색슨어는 그 당시에는 단지 정복된 속국에서만 사용되었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오직 노르만 프랑스어9)만
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귀족들에 의해 사용되고 이해되었다. 따라서 그
것은 새로운 형태의 문학에 대하여 적당한 매개체가 되었다.
노르만 프랑스어는 노르망디공(공) 윌리엄의 정복 이전에 잉글랜드에서 유
행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 후에는 그 언어만이 런던의 궁정에서 사용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의 허다한 정복과 그 비상한 민족의 열렬한 용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신기한 사건들에 친숙하도록 만들었기때문에, 그들의 시인들은 열심
히 아더와 칼 대제의 전설들에서 취재하여 그 당시의 언어로써 번역하였고
오래지 않아 여러 가지 모방물을 산출하였다. 군주들과 그들의 뛰어난 전사
들의 이 모험담은 다른많은 전설적, 가상적인 영웅들의 모험담과 더불어 점
차로 편찬되어방대한 양의 놀랄 만한 이야기들이 되었던 것인데, 그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씌어진 방언의 이름에 의해 그것들이 기사이야기
(Romance)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 원래 스칸다나아 지방에 거주하던 게르만의 일종으로, 10 세기 경 프랑스
서부구부로 이주하였고 1066년에 노르망디공 윌리엄에 인솔되어 영국을 정
복했음.
2)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섬 남부의 대부분, 이하 잉글랜드 는 이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겠음.
3) 튜튼족의 한 종족으로, 워내는 라인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다가 5~6 세기
경 독일 북부를 점령하고 일부는 영국으로 이주했음.
4) 고대 브리튼에 거주하던 켈트 종족의 하나.
5) 고대 지명으로, 기원전 10세기경 이래 켈트족이 거주했던 서유럽 지역의
총칭.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및 독일, 스위 스, 네덜란드의 일
부를 포함함.
6) 동부 웨일즈 연안의 주(주)인 몬머스셔의 주도(주도).
7) 북부 웨일즈의 플린쳐주에 있는, 주교의 법좌(법좌)가 있는 촌락.
8) 프랑스 동북쪽 마렌느 지방의 한 도시.
9) 노르만 정복 후 영국 노르만 계통인이 사용한 프랑스어로, 후에 영국 법
정(법정) 용어로 사용됨.
영웅주의와 기사도
기사도적 이상이 간절히 추구된 곳에서는 어디나 이 이상이 내포하고 있는
금욕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성을 띱니다. 따라서 십자군 시대에는 이 이상
은 수도원적 열망과 결합되면서 템플 기사단(Temple Knight)과 같은 군대와
종교적인 것이 결합한 기사단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편력기사란 가난해야 하
고 현세적 관계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같이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고결한전사
의 이상이야말로 "비록 현실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감정적으로나마 여전히
삶의 전사적(전사적)이고 귀족적인 개념을 지배하고 있다."고 윌리엄 제임스
(Willam James)는 말합니다. "기사에게서야말로 우리는 모든 질곡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상을 보며 그를 찬미하게 된다.자기 생명 이외에는 아
무것도 가진게 없으며 필요하다면 언제고 생명을 내걸 각오가 되어있는 그
는 이성적인 방향으로 향한 완전한 자유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기사도젓인
이상과 동정(동정)이나 충성,정의 같은 윤리적인 요소와의 관계가 인위적이
고 피상적이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도를 삶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까지 격상 시킨 것
은 기사도가 뿌리내리고 있는 그런 윤리들이 아니라 다름아니 '사랑' 이었습
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요소가 이 열망들의 총체에 삶의 열기를 준것이죠.
기사도적 이상의 특징인 금욕주의와 용감한 희생정신 등은 하나의 에로틱
한 기반을 갖습니다. 그것들은 그 속에 억제된 욕망들이 윤리적인 변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에다 형식과 양식을 부여하려는 욕구는
단순히 문학이나 조형예술 등에서만 만족되는 것이 아니며 삶 자체-사교,대
화,스포츠 등-에서도 충족되어야 함을 우리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사
랑은 거기서도 그 숭고하고 로맨스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문학과 삶
자체의 상호관계에서와 같이 결국 사랑의 기사도적 성격은 문학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삶에서 생겨난 것입니다.그리고 기사도적 테마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테마를 제공한것도 역시 삶의 실제적인 관계들인 것입니다.
기사와 귀부인, 사랑에 의한 영웅주의, 이는 어디서나 나타나는 소설의 모
티브입니다.그것은 관능적 욕망이 자기희생으로 변하는 즉각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인의 전적인 포기는 가장 사랑하는 부인에게
자기 용기를 과시하려는 의지, 즉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을 견디며 강인해 보
이려는 청년기 특유의 열망으로부터 발로된 것입니다. 욕망의 표현과 충족은
모두 불가능한 듯이 보이지만 이는 보다 고양된 한가지 즉 사랑에 의해 시
도된 영웅적 행동이라는 승화된 형태로 변모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죽음만이
유일하게 욕망 성취에의 양자택일적 대안이 되며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해방
은 보장됩니다.
처녀 구출, 이것은 너무나 자주 반복되고 닳아빠져 가끔 버려지는 때도 있
으나 또 다시 새로운 유형들-로맨스적 영화의 카우보이의 테마-을 만들어
내며 제차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세는 이처럼 청년기의 채울길 없는 욕망을
가지고 틀에 박힌 테마, 즉 사랑의 갈증을 표현하는 방식이 훨씬 더 세련되
고 절제된, 더 정신적인, 그러나 그만큼 더 암시적인 형테를 만들어 냈으나
로맨스라는 장르는 무한정 새롭고 언제나 똑같은 모험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로맨스는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로선 거의 이해하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
습니다.우리가 때늦은 기사도 로맨스들을 시대착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
만 기사도 시대가 훨씬 지난 16세기 후반-휴머니즘에 푹 잠겨있던 시대임에
도 불구하고-에 그 시대의 이름난 현자들이 아마디스(Amadis) 로맨스들을
읽고 거의가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 같은 황홀한 기분" 이라고 서술 했다는
걸 주목해야 합니다.이를 볼때 13세기 균형잃은 시대의 로맨스들이 얼마나
수용성이 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맨스적 사랑의 형태는 문학 뿐 아니라 무대의 형태로도 나타납니다.이 유
희는 크게 두가지,연극적 상연과 스포츠가 그것입니다.스포츠가 중세엔 더
중요합니다.드라마는 대체로 아직 성스러은 주제만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
죠.그리서 드라마는 사랑의 모험을 극히 예외적인 요소로 보고 있지만 중세
의 스포츠 특히 기마 시합은 그 자체로 고도의 드라마틱한 것이었고 강력한
에로티시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스포츠는 이 두가지 요소를 항상 내포하기
마련이지만 현대의 스포츠는 거의 그리스적 단순함을 가지는 반면, 중세의
기마시합은 그 풍성한 장식과 연출로 드라마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15세긴 귀족 사회의 지적,감정적 생활이 하나의 사회적 유희로 쇠퇴해 가는
몰락기 였습니다.사람들은 난폭하고 잔인하며 냉혹한 현실을 기사도적 이상
의 꿈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거대한 기만이며 약간의 빈정거림으로
서만이 완화될 수 있는 일종의 속임수인 란슬로트의 가면을 씁니다.
결국 15세기의 전기사도 문화는 감수성과 빈정거림간의 위험한 줄타기 무
대였습니다.명예,충성심,사랑 등의 기사도적 덕목들은 가장 심각하게 취급되
는 한편 또 그 엄격한 위엄은 종종 웃음으로 느슨해 지는 경우도 있었습니
다.그러나 그중에서 의식적인 패러디가 가장 우세했던 곳은 이탈리아 뿐이었
고 곧 이러한 기사도적 감수성은 그 고유 영역을 되찾아 심각함과 웃음을
넘어서 그 감수성이 가장 고전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명정의 범주로 고양됩
니다.
1400년경의 프랑스에서도 기사도적 이상의 진지성은 확인됩니다."모든 것이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바쳐졌고 모든 것이 그것을 찬미하는 데 바쳐
졌다.그의 사랑하는 귀부인 앞에서 만은 그의 말씨는 우아했고 예의발랐으며
조심스러웠다."라는 부시코(프랑스의 문학가이자 기사.1400년경 궁정 사회를
열광케 했던 진정한 사랑과 경박한 연애간의 문학적 논쟁을 주도함)의 말에
서도 알 수 있습니다.
치정적인 내용이 빠져버린 모든 로맨스적인 형태들이 다 그렇듯이 궁정식
사랑은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이죠.정교하게 다듬은 시행들과 화려한 기마 시
합이 표현하던 그 정열은 안타깝게도 이미 꺼져버렸습니다.그것은 이제 몇몇
천재의 희귀한 작품들 속에서밖에는 살아 남아 있지 않습니다.하지만 예술
작품으로서는 열등한 이 모든 작품들은 삶의 치장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면
에서는 크나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수세기 이래 꺼져버린 기마 시합에서
묘사되는 기사들의 갈매기형의 눈썹과 좁은 이마 밑에소 번득이는 눈빛들은
훨씬 뒤까지 살아 남아 폐허처럼 쌓인 모든 문학 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입
니다.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이 사회적 형식들의 치정적(치정적) 의미를 간
파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이 우연한 섬광입니다. 다음은 [에롱의 맹세 Le
Vceu du Heron] 에서 쟝 드 보몽이 전투에 임하는 기사도적 맹세를 요청받
고서 어떻게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막에서 우리가 독한 술을 마시고 있을때
가녀린 숙녀들이 우릴 쳐다보며 지나가네.
새하얀 목덜미에 꽉죄인 등옷을 입고
그네들의 다채로운 눈빛은 미소띠며 아름답게 빛나누나.
하여 본능은 우리에게 욕망으로 타는 가슴을 갖게 하네.
그 때 우리는 요몽(Yaumont)과 아굴랑(Agoulant)을 정복하고 또 다른 이
들은 올리비에(Olivier)와 롤랑(Rolland)을 정복하리.
그러나 우리가 전장에서 달리는 군마 위에 앉아 있을 때 방패를 목에 걸
고 창을 아래로 내려뜨린 채 매서운 추위가 우릴 온통 얼어붙게 하고
사지는 힘이 없어 무너질 듯하고 힘없이 앞뒤를 흔들거릴 때 그리고 적
들이 우리를 향해 일찌기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큰 방안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리. 그리고 "오호라 샤를르 르 테메레르 진영에서는 전투,해산,
돌격,창겨누기 따위를 누가 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보살펴주고 우
리에게 잘하라고 격려 해주는 여자들이 있기 대문인데!
라고 필립 드 크르와는 말했습니다.
기마시합의 에로틱한 요소는 기사가 사모하는 부인의 베일이나 옷을 걸치
고 나오는 습관 속에서 분명히 드러 납니다.('차원기사 '라는 작품속에서도
주인공이 자기의 사모하는 여인의 소매를 지니고 다닙니다) 시합의 열기 속
에서 여자들은 몸에 걸친 장신구들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마침내 경기가 끝
나면 그녀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팔과 어깨마저 소매없이 맨
살을 드러냅니다.이는 13세기 후반기의 '세기사와 셔츠'라는 글에서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 되었습니다.
고귀한 관용으로 가득찬 그러나 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가진
한 부인이 자기를 사모하는 세 기사들에게 셔츠-Chinese 속옷의 일종-를 보
냅니다. 그들에게 자기의 셔츠를 흉갑도 입지 않고 그 셔츠만을 입고 다음번
자기의 남편이 주최하는 기마 시합에 참석하라고 말합니다.처음의 두 기사들
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가련한 세번째의 기사만은 그 셔츠를 끌어안고 열
렬히 애무한 뒤 그 기마 시합에 그 셔츠를 입고 출전 합니다.그는 크게 다치
고 셔츠는 찢어져 피로 물들지만 그의 용맹은 상을 받고, 그는 부인에게 한
가지 보상을 요구합니다.즉 그는 그녀에게 그 피로 얼룩진 옷을 돌려 보내며
그녀로 하여금 기마 시합의 폐회 축하연 동안 그것을 옷위에 걸쳐 입고 있
으라고 요구합니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옷위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그것을
걸쳐 입습니다.대부분의 참서자들이 그녀를 비난하고 남편은 당황해 수치를
느낍니다.이 이야기를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죠:
"이 두연인 중 누가 더 상대를 위해 큰 희생을 치루었는가?"
기마시합을 둘러싼 이 격정적인 분위기는 교회가 이 스포츠를 꺼린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이 경기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가끔씩 명백한 간통 사건을 유
발 시켰습니다.교회의 사법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마 시합을 금하고 있었
습니다.처음엔 전투 훈련을 위해 실시되던 기마 시합은 그 과도함과 남용때
문에 모랄리스트들과 위마니스트들의 도마에 올려지기 일쑤였습니다.중세기
의 기마 시합과 마상경기들은 그리스나 현대의 스포츠들보다 훨씬 더 복잡
합니다.귀족적 오만과 사랑 그리고 예술 등이 그 시합들에 짜릿한 묘미를 부
여합니다. 과도한 장식과 호사로 둘러싸인,그리고 영웅적 환상들로 가득찬
기마 시합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공연이며 갈망과 꿈들의 실현이죠. 군대
생활과 궁정 생활은 영웅주의적 사랑의 감정들에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햇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러한 영웅주의로 부풀어 오르고,그것을 살
아 보고자 했기 때문에 호사스런 마상시합을 통해 스스로 보다 아름다운 삶
을 창조해 내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피튀기는 난폭성을 요구
한 것은 이른바 에로틱한 성격이라는 것입니다.기마 시합은 그것을 고무시키
는 모티브들로 보아 옛 힌두 서사시에 아오는 전투인 '마하바라타'와 여성을
위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기마시합의 연출은 원탁기사의 로망의 연출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요정 이
야기식의 유아적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거인과 난장이들을 만나는 허
구적인 모험이 거기서는 궁정식 사랑의 감상주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15
세기의 기마 시합은 상상적이고 로맨스적인 모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배
경도 '퐁텐 데 플레르(눈물의 샘)'이니 '샤를르마뉴의 나무'니 하는 감동적인
이름을 갖지요. 샘은 그러한 효과를 위해 구상됩니다.초상화를 보면 샘터앞
에는 정자가 있고, 거기에는 일년 내내 한 귀부인이 앉아 방패 셋을 든 유니
콘 한마리를 붙들고 잇습니다.매달 초하룻날이면 무명위 기사 하나가 그 방
패를 만지러 올 것이고 방패를 만진 기사는 모두 기마 시합의 '조항들'에 명
시된 조건 속에서 격투에 참가 해야 할 것입니다.
후우~ 이로써 중세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중에 하나인 기사도 정신의 배
경과 거기에 따른 부인 숭배,그리고 그것의 한 형태인 기마(마상) 시합에 관
한 글이 일단락 되는군요.
이 글은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 이라는 책의 내용을 발췌하여 요약,편집
한 것입니다.
별첨 ** 호이징가의 기사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중세의 사고는 종교적 개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다 제한된 영역 즉 궁정과 귀족 계급내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사고속에 기
사도적 이상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적 영역 까지도 침범
하지요. 예를 들어 천사장 미카엘의 무훈은 "위급한 때 무훈을 세훈 최초의
기사도적 군대요 무훈" 이었습니다(사탄과 천사들의 전쟁에서...). "지상의 군
대요 인간 기사단"으로서 하나님을 보좌를 에워싼 천사들의 찬양대를 모형
으로 한 기사도는 바로 거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스페인의 시인 후안 마누엘
(Juan Manuel)도 기사도를 일종의 성사(성사)로 부름으로써 영세나 혼례 미
사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귀족 계급에 기초한 이 드높은 열망은 구체적인 형태를 띨까요? 또 그것은
이 계급의 의무와 관련된 어떤 일정한 정치 사상에까지 이를까요? 그렇습니
다. 그 사상이란 여러 왕들의 연합에 기초한 만국 평화의 수립과 예루살렘
정복 및 터키족 축출을 위한 싸움입니다. 지칠줄 모르고 뭔가를 계획하는 필
립 드 메지에르는 템플 기사단과 자선수도회의 옛 세력을 능가할 새로운 기
사단을 꿈꾸며 그의 [노 순례자의 꿈]이라는 책에서 세계 복지를 확보할 멋
진 계획안을 구상합니다. [프랑스의 젊은 국왕은 - 이는 1388년경 그 많은
희망사항들이 불행항 샤를르 육세에 근거를 두었던 그 당시에 쓰여진것입니
다 - 젊고 또 그래서 옛 전쟁의 책임이 전혀 없는 영국왕 리챠드와 쉽게 화
친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서로 평화를 유지해야 하며 평화를
예고해온 놀라운 계시들을 서로 이야기 해야한다. 협상은 사제나 법조계 인
사들 또는 군대의 장(장)들에게 맡기기만 하면 별반 어려운 난관을 빚지 않
을 것이며, 또 그럴려면 치사한 이해 관계 따위는 버려야 한다. 프랑스 국왕
은 국경 지방의 몇몇 도시와 성들을 양도해야 하며 평화 협정이 체결되는
즉시로 십자군 원정이 준비될 수 있을 것이다. 곳곳에서는 묵은 싸움들과 묵
은 원한들이 가라앉을 것이고 나라의 전제적인 통치도 개혁될 것이다. 전도
(전도)만으로 타타르인, 터키인, 유태인, 사라센인들을 개종시키기가 충분치
않다면, 모든 공의회는 기독교 제후들을 전쟁에 소집할 것이다.] 이 모든 중
대한 구상들은 그럴싸함 때문에 심지어는 셀레스틴회 수도원에서 메지에르
와 젊은 루이 도를레앙 사이에 있은 비밀 대담에서 까지 논의 되었습니다.
도를레앙 자신도 실제적이고 타산적인 정치적 구상을 거기에 섞긴 했지만
평화와 십자군에 대한 꿈속에 살고 있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될수 없는 것이
죠.
하지만 기사도에 기초한 사회라는 이 같은 환상은 기묘하게도 현실과는 상
당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아무 연
대기 작가라도 들어보죠. 프로아사르와 몽스틀레, 데쿠시, 샤틀랭, 라 마르슈,
몰리네등 아무라도. 코민과 토마스 바쟁을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는 다 글 서
두에 자기들이 기사도적 덕행과 명예로운 투사의 행적을 찬양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호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들
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나마 가장 성공하고 있는것도 샤를랭 뿐입니다. 기사
도 서사시의 뒤늦은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초공상적인 시 [멜리아도르]
의 작가 프로아사르도 이상적 무용담들과 '군대의 대무훈들'로 머릿속이 꽉
차있습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적인 그의 필치하에서는 배신행위와 잔혹행
위, 권력의 탐욕스러운 남용 이외에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몰리네의 경우
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자신의 기사도적 의도를 망각한채 단순하게 사건의
나열만 해 나갑니다(그것도 과장된 문체로 된 추상화만을). 그러는 중에 그
는 때때로 처음 의무로 삼았던 고귀한 치장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만 그 이
야기들을 중단할 뿐입니다.
기사도란 개념은 이들 작가들의 피상적인 정신에게는 당시의 사건들을 스
스로 납득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마술 열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시
대의 정치가 그러했듯이 전쟁 역시도 극도로 조잡했고 십중팔구는 지리멸렬
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거대한 영역위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진 채 각각 고립되
어 싸웠고 소규모 국부전들이 만성적 상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외교술을
복잡하고도 결함이 많은 방편으로서 한편으로는 매우 일반적인 전통적 사고
의 지배를 받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국부적이고 사소한 권리적 문제들의
잘 풀리지 않는 거대한 총체에 의해 좌우되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결국 실제
의 사회발전을 식별할 수가 없었으므로 기사도적 이상이라는 허구를 사용하
였으며, 그것의 아름다운 이미지의 범주로 축소시키면서 질서의 환상을 만들
어 냈습니다. 이 같은 역사적 기준으로 말하자면 투키디데스식 판단에 비유
될 수 있으며 그다지 질이 좋다고는 볼 수가 없을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
된 역사는 기껏해야 군대생활의 멋진 행적들과 장엄한 의례들에 대한 단순
한 진순들로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관점에서라면 진짜 역사가는
과연 누구일까요? 프로아사르의 생각으로는 군사(군사)들과 군대의 장(장)들
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고귀한 행적의 목격자요 증인이므로 그들이 이 행
위들을 공식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은 명예와 그에 관한 문제에 있어
서 숙련된 전문가들이며 또 이 두가지는 역사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황금양털 기사단의 규약이 기사도적 군대 행적들의 관계를 명했습니다. '황
금양털' 이라는 별명을 가진 르페브르 드 생-레미와 군사 베리는 연대기적
군대 영웅의 전형입니다.
삶의 이상으로서 기사도의 개념은 매우 특수한 성격을 띱니다. 본질상 그것
은 환상과 영웅적 감동에서 나온, 그러나 외관에 있어선 윤리적 이상을 담당
한 하나의 미학적 이상이었습니다. 중세적 사고는 기사도의 개념을 종교와
미덕에 결부시켜서만 그 기사도적 개념에 귀족적 위치를 부여 할 수 있었습
니다. 하지만 기사도는 결코 완벽하게 이 윤리적 기능의 높이에까지 이를 수
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지상적 기원이 그에게 그것을 막는 것이죠. 왜냐하
면 그 같은 이상의 본질은 미(미)의 위치까지 올려진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샤를랭은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후
들의 영예는 교만으로 기울어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주요 권력들은
교만이라는 한 좁은 점으로 수렴되고 있다." 교만은 양식화되고 찬양받으면
서 기사도적 삶의 축이라 할 수 있는 명예를 탄생시켰습니다. 테느는 중간계
층과 하위층의 사회적 관계속에서는 이해관계가 그 주된 원동력인 반면에
귀족 계급에서는 교만이 큰 원동력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
간의 깊은 감정들 중에서 그보다 더 청렴함과 애국심과 양심으로 변모되기
에 적당한 것은 없다. 자부심이 강한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는 그에 합당한 자가 되려 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테느는 귀족주의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상 귀족 계급의
역사는 도처에서 파렴치한 에고이즘(이기주의)과 결합된 교만의 이미지를 제
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들이 귀족적 이상에 대한 좋은 정의
인 것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 시대의 명
예감에 대해 판단한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 즉 양심과 에고이즘의 이 기이
한 혼합이야말로 수많은 악행과 양립할 수 있으며 극도의 착각을 가능케 합
니다. 그러나 한 인간속에 순수하고 귀족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은
거기에 의거하며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힘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 영예에의 갈망은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르네상스기(기) 인간의 특성
처럼 생각됩니다. 그는 이탈리아 외부에서 중세적 삶을 고무하는 계급적 명
예 및 영광에 대립시켜 단테 이래 과거 모델들의 영향하에 이탈리아 정신이
멸망한 인간적 영광 및 명예심을 대립시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르크하르트
자신이 중세와 르네상스 또 서유업과 이탈리아 사이의 거리감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르네상스기 인간 튿유의 이 명예심
과 영예욕은 본질상 전 시대의 기사도적 야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봉건적 감정은 제거되고 고대적 사고에 의해 윤색된 확대된 계급적 명예심
이죠. 후세에게서 찬양받으려는 열렬한 희구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예술운동
을 주도한 아름다운 정신들에게서 보다 12세기의 궁정기사나 14세기의 거친
장수들에게서 더 낯선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로아사르에 따르면, 로베르 드
보마노아경과 영국인 장수 로버트 밤보로 사이에 30인 전투(1351년 3월 27
일)전에 체결된 협정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 "그러므로 우
리는 다가올 시대에 홀이나 궁정, 공회당 그리고 전세계 다른 장소들에서도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실행할 것이다." 기사도적 이상을
존중하는 점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중세적인 샤틀랭도 다음과 같이 쓸 때는
매우 르네상스적이다.
명예는 온갖 고귀한 성품을 심어
그 자체로서 고결한 모든 것을 사랑케 한다.
귀족성은 거기에 공정함을 또 덧붙이도다.
다른 데서 그는 또,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서는 명예가 훨씬 더 소중한 것
이었는데, 그것은 기독교도들이 명예를 종교에 의해 천국에서 받을 보상에
대한 소망속에 받아들이는 반면,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서는 명예가 그 자체
로서 현새적 칭송의 기대속에 길러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프로아사르도 이미,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동기를 벗어버린 용맹성, 즉 영광
과 명예를 얻기 위한 그리고 -- 얼마나 앙팡 테리블 enfant terrible (끔찍한
유아, 무서운 아이란 뜻,주) 인가 -- 경력을 만들기 위한 단순하고 순진한
용맹성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기사도적 영광과 명예에의 추구는 영웅 숭배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웅 숭배 속에는 중세적 요소와 르네상스적
요소가 뒤섞여 있습니다. 기사도적 삶은 하나의 모방, 즉 아더왕 서사시군
(군)의 영웅들이나 -- 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 고대 영웅들의 모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궁적식 로망이 꽃피어난 시대 이후로는 기
사도적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었습니까? 고대 역사는 여전히 경이로운 원탁
의 나라들과 뒤섞입니다. 르네왕은 그의 여러 시 가운데 하나에서 랑슬로트,
시저, 다윗, 헤라클레스, 파리스, 트로일루스 등의 무덤들이 나란히 각각의
문장들로 장식된채 있는 환상을 묘사합니다. 기사도 자체도 로마에 기원을
둔것 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 영국의 헨리 5세에 관한 이야기입
니다 -- 옛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사도 계율을 잘 지켰다." 고전주의
는 점차 비중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이 고대에 갖고 있던 이미지에 수정, 변
화를 가져옵니다. 포루투갈의 귀족 바스크 드 뤼센은 샤를르 르 테메레르를
위해 [켕트 뤼크스]를 번역하면서 150년전 야콥 판 마에르란트가 선언했던
것처럼 정통 '알렉산더 대왕'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작가들이 역사를 왜곡시
킨 그 거짓말들을 남김없이 제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쨌든 이 시기는 수많은 과장과 왜곡들을 통한 표상의 모방을 하는 시대
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모든것은 모방
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15세기 기사에 의해서
만큼 현대의 병사에 의해서도 그만큼 잘 씌어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사
도에 관련된 것들은 특별히 중세적일게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장의
용맹성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위험 한가운데서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며 동료
의 용기에 감동을 느끼는 것, 또 충성심과 희생정신의 극한 희열 등등, 이
같은 원시적인 금욕주의는, 기사도적 이상이 남성적 완벽성의 고귀한 표현
즉 그리스 인들의 '칼로카가티아'에서 표현된 것 같은 아름다운 삶에로의 열
망에까지 고양되는 기반이 됩니다. 이 이상이야말로 수세기 동안 하나의 에
네르기의 원찬으로 남을 것이며 ...... 또 모든 에고이즘(이기심)과 난폭함의
세계를 뒤에 숨긴 마스크로 남을 것입니다.
기사도
로마 제국의 세력이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인 서기 5 세기경, 북부유럽 제국
(제국)은 아직 뚜렷한 국가 형태를 갖추지 않았엇다. 다소 힘이 있는 많은
족장(족장)들은 그들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지역적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위해 단결하곤 했으
나 평상시에는 서로 적대시했다. 그러한 사태하에서는 사회의 하류 계급의
권리는 침략자의 손에 좌우되었다. 따라서족장들의 방종한 세력에 어떤 제재
를 가하지 않았더라면, 사회가 미개 상태로 퇴보했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한 제재는 첫째로족장들 스스로의 경쟁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 상호간의 질투가 서로서로를 견제케 했다. 둘째로 교호히의 영향에서
그러한 제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는 순수한 동기에서든 이기적인 동기
에서든, 약한 자를 옹호하기 위하여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을 서약했다. 마
지막으로 어떠한 격정과 이기심의 중압 아래 짓눌려 있었지만 인간의 마음
속에자연적으로 깃들여있는 관용과 정의감 속에서 그런 제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원천으로부터 기사도(기사도)가 나왔다. 그런데 이
기사도라는 것은 무적의 힘과 용기, 정의, 겸손, 웃사람에 대한 충성, 동료에
대한 예절, 약자에 대한 동정, 그리고 교회에 대한 헌신등을 구비한 것으로
서, 영웅적 성격의 이상(이상) - 실생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할지라
도 모든 사람들이 지고(지고)의 모범으로 인정하고 있는 - 을 이루고 있었
다.
chivalry(기사도)라는 말은 불어의 cheval, 즉 말(마)에서 유래한다.
knight(기사)라는 말은 어원상으로는 사환 아이느 하인을 의미했었는데, 후
에는 특히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특권이 인정된 젊은 남자를 호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특권은 부유한 명문 출신의 청년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었
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무기의 휴대가 허용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사는
말을 탄 전사(전사)로서 그 자신이 지위 있는 자이거나 또는 다른 지위 있는
자에게 봉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보통독립된 생활 수단을 가지고 있으
나 때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웃사람이 주는 보수에 의존하기도 하였
으며, 또는 종종 실력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전시(전시)에는 기사는 종자(종자)들과 함께 자기 영주(영주)의 야영지에 있
거나 싸움터에서 전투 지휘를 하거나, 또는 영주의 성을 지키고있었다. 평화
시에 그들은 가끔 자기 영주의 궁전에서 시중을 들었고, 제후(제후)들이 여
가를 즐기는 연회나 마상 경기(마상경기) 등에 참석함으로써 그 자리를 한층
빛냈다. 또한 그들은 부정을 제거하고 정의를관철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모험을 찾고나, 때로는 종교 혹은 사랑의 어떤 서약을 실행하기 위하여 전국
을 방랑했다. 이 방랑하는 기사들을 무예수행자(knights-errant)라고 일컬었
다. 그들은 귀족들의 성에서는 환영받는 빈객(빈객)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귀
족들의 따분한 은거 생활에 활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도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우대하였다. 쉽게 말해서 그것은 수도원이 그 수입의 중요한
부분을 기사들의 보호에 힘입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근처에 성도 수도원도
암자도 없을 경우엔, 그들은 저녁도 먹지 않고 길가에 있는 십자가(십자가)
아래 누워서 야숙(야숙)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들의 평상시의 인고(인고) 습
관이 이러한 일을 쉽사리 감내케 하였다.
이러한 수단에 의해서 집행되는 정의가 가장 미개한 종류의 것이었으리라
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악을 제거한다는 합법적인 목적을 가진 힘이 오히려
악용되어, 악을 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실에 있어서는
가공적이라 할지라도 풍습의 묘사로는 건실하다고 할 수 있는 중세 기사이
야기에서, 기사의 성(성)이 이따금 주위 지방에 대하여 공포적이었고, 그 성
의 지하 감옥에 억류된 기사나 숙녀들이 어떤투사가 나타나 자기들을 해방
시켜 주기를 고대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석방되는 이야기, 할 일 없는 가신
(가신)들의 무리가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자기네 영주의 명령을 시행하기 위
하여 항상 가까이에 있었으며, 무기를 지니지 않은 군중들의 권리는 보잘것
이 없었다는 사실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기사도에 관한 사실과 이론이 이처
럼 상반되는 까닭에, 그에 관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반대되는 인상들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가장 열렬한 찬사의 주제가 되어 왔는가 하면 또다른
한편에서는 같은 정도로 맹렬히 비난을 받아 왔다. 냉정히 판단해볼 때 오늘
날은, 기사도 대신에 법이 통치하게 되고 덜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문관(문
관)이 갑옷을 입은 투사를 대신하게 된 데 대하 경하(경하)하지 않을 수 없
다.
기사 수업
기사 지원자들의 예비 교육은 기간이 길고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귀족 자제
들은 일곱 살이 되면 보통 그들의 친가(친가)로부터 미래의보호자의 궁전이
나 성으로 옮겨 와서 지배자의 지위 아래에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지배자는
그들에게 신앙의 제 1 조목들과, 영주와 상관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가르
쳤으며, 궁전의 의식에 그들을 입회시켰다. 시동(시동)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직무는 식탁에서 고기를 저미고, 시중을 들고, 그 외 잔심부름들을 하는 것
이었다. 그 당시에는이러한 일들이 천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한가할 때면 그
들은 춤추고하프를 연주하는 것을 배웠고 또 숲과 강에서 하는 일, 다시 말
하면수렵, 매사냥, 낚시질과 씨름, 창시합, 기타 마상(마상)에서 여러 가지 군
대 훈련을 행하는 것을 교수 받았다. 열네 살이 되면 시동은 기사의 종자가
되어 보다 엄격하고 힘겨운 훈련을 시작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등에
올라타거나 달리기, 성벽에 기어 오르기, 도랑 뛰어넘기, 씨름, 큰 도끼 휘두
르기, 마술(마술)의 모든 동작을 우아하게 해내는 것 등이 기사 작위(작위)를
받는 데 필요한 예비 행위였던것이다.
그런데 그 기사 작위는 보통 스물 한 살이 되었을 때, 즉 젊은이의교육이
완전히 끝났다고 인정되었을 때 수여되었다. 그동안에 기사의종자들은 그 당
시 커티시(courtesy)라고 불렸던 모든 예의 범절을 습득하는 데에 게을리하
지 않았다. 그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같은 성내에는 항상 젊 처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시동들에게는 나이가 매우 어릴 때부터 그 궁정의 어떤
숙녀를 마음의 연인(연인)으로선택할 것이 장려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감
정과 말과 행동을 그연인과 연관시키도록 교육받았다. 연인에게 봉사하는 것
이 기사의 영광이자 직무였으며, 애정과 감사에 넘친 그녀의 미소가 그의 참
다운용기에 대한 보상으로서 제공되었다. 충성과 사랑의 영향은 종교의영향
과 결합되었고, 성직자의 신분에 수반되는 모든 신성(신성)과 종교적 외경이
부여된 기사의 작위는 가장 위대한 영주들에게 있어서도동경의 대상이 되었
다.
기사입단식은 특별히 엄숙했다. 기사 후보자들은 엄격한 단식을 행하고 수
일간 철야 기도를 한 뒤에, 참회를 하고 성찬을 받았다. 그리고 새하얀 옷으
로 갈아입고 기사의 칼을 목에 걸치고, 식이 행해질교회나 회관으로 향했다.
식을 집행하는 사제는 그 칼을 손에 들고축복한 후에 다시 기사 후보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 후보자는 팔짱을 끼고, 사회를 보는 기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회를 보는 그기사는 후보자가 기사가 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에
관한 질문을 하고 그에게 선서를 시킨 뒤에 그의 요구를 승낙했다.
기사입단식에 참석한 몇몇 기사들은, 숙녀들이나 때로는 소녀들에게서 황금
의 박차(박차)와 갑옷, 팔찌, 긴 장갑 등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칼을 찼다. 그
다음 그는 다시 사회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회자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는데, 그 의식은 "신(신)과 성 미카엘과 성 조지
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를 기사로만드오니, 용감하고 예절바르고 충성스러울
지어다"라는 말과 더불어기사 후보자의 어깨나 목을 칼등으로 세 번 두드리
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후보자는 투구와 방패, 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수
여식은 끝나는 것이었다.
마상(마상) 경기
기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마상 경기의 장려한 광경과 그 화려한 장식품
및 기사도적인 규칙들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마상 경기는 종종 교회의
비난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종국에 가서는 벌어지고야마는 싸움과 가끔
일어나는 치명적인 결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상창시합(마상창시합, joust)
은 마상 경기와는 달랐다. 전자에 있어서는기사들이 창을 가지고 싸워 상대
자를 말에서 떨어뜨려야 했는데, 이는기동(기동)운동의 기술과 솜씨의 과시
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무기를 사용했으며 엄격한 예절이 규칙
으로 준수되었다. 이 규칙에의하면 말에 부상을 입히는 것이나 칼끝을 사용
하는 것, 투구의 면갑(면갑)을 올리는 것 혹은 투구의 끈을 푼 후에 기사를
공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숙녀들은 이러한 경기에서 그녀들의 기사를 격려
했고 상품을수여했다. 승리자의 공적들은 이야기와 노래의 테마가 되었다.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관람석은 탑 모양, 테라스 모양, 발코니 모양, 현원(현
원, pensile gardens) 모양을 한 것 등 매우 다채로왔고, 색무늬의 융단이나
큰 천막, 기치(기치)등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투사들은 그가 사랑하고 봉사했던 숙녀의 이름을 선언했다. 그는 계속
관람석을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그에게 감응력을 내려주는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격려를 받곤 했다. 기사들은 또한 그들의 투구나 방패나 갑옷에, 목도
리나 베일, 소맷자락, 팔찌, 고리 등의 사랑의 선물들, 즉 여자 복장 가운데
서 몇 가지를 걸치고 다녔다. 만약 싸우는 동안에 이러한 부속물의 어떤 것
이 땅에 떨어지거나 잃어버리면, 아름다운 증여자(증여자)는, 특히 자신의 이
름을 선서한 기사의 노력에 만족할 때에는 때때로 새것을 그에게 보내 주곤
했다.
자유민, 천민 및 성직자 계급에 대해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다른 계급 중 첫째는 자유민이었는데, 그들은약간의
토지를 소유하고 독립된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자진해서 그들보다
부유한 이웃 사람들의 가신(가신)이 되기도 했는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 그 부유한 자들의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수가 많았던 다른 두 계급은 농노와 천민이었는데, 그들은다 노예
들이었다. 농노들은 노예 중에서도 최하의 상태에 있었다. 그네들이 노동하
여 얻은 모든 수확은 지주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주의 땅을 경작하
는 대신 지주로부터 자신들의 의식(의식)을 제공받았다. 천민들은 그들보다
는 좀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지위는 제정(제정) 러시아 농민들의 그것
과 흡사했던 것 같다. 농노와 마찬가지로그들은 땅에 예속되었고 땅과 함께
매도(매도)되었다. 그러나 그들은지주에게 일정한 소작료만 지불하면 됐고,
근면의 대가로 생기는 잉여는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성직자(clerk)라는 말은 매우 광범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순수
한 의미의 성직자(clergy)에 속하는 사람들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는 결혼한 사람들도 허다했고, 장인(장인)들이나 그 밖의사람들도 많았다. 그
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훨씬 더 광범한 규칙이제정되었다. 그래서 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사제로 간주되었고, 성직자의 은전(은전)이 허
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범법(범법) 행위를 했을 경우, 사형이나 어떤 다른 형
태의 처벌에서 면제되었다.
로망스(Romances)…… 그 추억을 되짚으며
아무런 서적도 없었고 귀족과 제후들마저도 문맹(문맹)이었던 시대에는, 역
사나 전설은 설화자(설화자)들의 독점물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그네들 선조
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들을 상속받았는데, 그들은 후에얻은 견문에다가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 그것을 공중(공중)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시대나 지
리(지리), 장소나 풍습의 착오가 허다했다. 그럴 듯한 족보(족보)들이 날조되
기도 했는데, 이 족보에 의하면 아더(Arthur)와 그의 기사들, 그리고 칼 대제
(Charlemagne)와 그의 용사들이 아이네이아스(Aineias)나 헥토르(Hektor) 또
는 다른 어떤 트로이의 영웅들에게서 그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기사이야기(Romance)라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것은 라틴어와 지방토착어가 혼합되어 서부 유럽에서 형성된 방
언이 'Langue Romaine(로망스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
랑스어는 르와르강을 그 경계로 두 개의 방언으로분리되었다. 강 남쪽 지방
에서는 긍정(긍정)을 나타내는 '그렇다'라는 말이 'oc'라는 말로 표시되었고,
북쪽에서는 'oil(oui)'라고 불렸다. 그래서 단테는 남쪽 말을 'langue d'oc(오
크어)'라 했고, 북쪽의것을 'langue d'oil(오일어)'라 했다. 후자는 노르만인1)
들에 의해서잉글랜드2)로 옮겨졌고 오늘날의 프랑스어의 기원이기도 한데,
그것을 'French Romance(프랑스적 로망스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고 전자는 'Provencal'이나 'Provencial Romance(프로방스적 로망스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랑스 남부 지방인 프로방스와랑그 도크에 사는 사
람들이 그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이 방언들은 전혀 반대되는 특성에 의해 구별되었다.
온화하고 나른해지는 기후, 다른 해양 국가들과의 용이한 교통에 의해 촉진
된 상정신(상정신), 재화(재화)의 유입(유입), 그리고 보다안정된 정부등의 제
조건은 프로방스어(어)의 말씨를 윤택하게 하고부드럽게 하는 데 한층 더 이
바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방스어로시작(시작)을 한 시인들은 '뜨루바두
르(Troubadour)'라고 불렸는데,그들은 이탈리아인, 특히 페트라르카의 스승
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작품들은 풍자시(Sirventes), 연가(연가)와 대화시
(Tensons)였는데,후자는 사랑에 관해서 의심스러운 미묘한 몇 가지 점에 대
해서 서로질문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의 시인들간의 대화 형식을 취한 시였
다.
프로방스인들은 이러한 미묘한 문제들에 전적으로 골몰했었기 때문에모험과
기사도에 관한 설화의 제작은 등한시하고 또 무시하였으므로,'음유시인
(Trouvere)'이라고 불린 그 왕국의 북부 지방 시민들에게대부분이 과업이
남겨지게 된 것 같다.
기사도가 세상에서 널리 찬탄을 받고 또 종교의 적들을 치기 위해전력을
다하던 때에, 문학이 똑같은 충동을 받고 차츰 높아 가는 경쟁심을 자극할
용기와 신심(신심)의 귀감(귀감)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역사와 우화의 수집
이 필요했던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더와 칼 대제는 이 목적을 위해
서 선택된 두 사람의 영웅이었다. 아더왕은, 자신이 항상 훌륭한 전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용감한 전사라고자부했다. 그는 이교도들, 다시 말해 색슨족3)
의 군대에게 단호히 저항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포들인 브리튼인4)들은 그의
추억을 매우존중하였고 웨일즈와 그 동족 국가인 아모리카, 즉 브르따뉴로
그의공적의 추억을 가지고 갔는데, 그들의 민족적 허영심이 그것을 부지불식
간에 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실루리아, 즉 남부 웨일즈의 어린
왕자가 잉글랜드와 갈리아5), 그리고 유럽 대부분의 정복자로서 영웅시되기
까지 이르렀다. 아더의 가계(가계)는 점차로 가상의 브루투스(Brutus)와 트
로이 전쟁 시기까지 소급되었고, 일종의 연대기(연대기)가 제왕사(제왕사)라
는 호화로운 타이틀 아래 1150 년경에 몬머스6)의 조프리(Geoffrey)라는 사
람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웨일즈의 평론가들은 그 작품의 자료를,
7 세기에 성 에서프(Asaph)7)의 주교인 성 탤리언(Talian)이 쓴, 보다 더 오
래 된 역사로간주한다.
칼 대제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의 실제 공적만 하더라도 그 이름을영원히
남게 하기에 족한 것이긴 했지만, 그가 사라센인들과 싸웠던'성전(성전)'을
인기 있는 소설의 주제로 삼지 않았던들 그의 불후의명성은 불가능했을 것
이다. 따라서 이 전쟁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11세기 말경에 한 수도사에 의해
서 씌어졌을 때, 그는 자기 작품을 그전쟁이 행해진 시대와 동시대인의 이름
으로 내는 것이 그 책의 품위를 높일 것이라 생각해 저자명을 773 년경 림
즈(Rheims)8)의 대주교였던 터핀(Turpin)으로 했다.
이 전설적인 기록들은 잠시 동안은 지방어나, 단지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틴어) 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터핀이나 조프리의 자굼은
그 당시 유일한 라틴어 학자였던 성직자들에 의해서읽혀졌는지도 모른다. 그
리고 조프리의 브리튼어 원문(원문)을 웨일즈인들이 읽었더라면 매우 만족했
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책도 일반적이고 흔히 통용되는 언어로 번역되기까
지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앵글로 색슨어는 그 당시에는 단지 정복된 속국에서만 사용되었다.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오직 노르만 프랑스어9)만
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귀족들에 의해 사용되고 이해되었다. 따라서 그
것은 새로운 형태의 문학에 대하여 적당한 매개체가 되었다.
노르만 프랑스어는 노르망디공(공) 윌리엄의 정복 이전에 잉글랜드에서 유
행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 후에는 그 언어만이 런던의 궁정에서 사용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의 허다한 정복과 그 비상한 민족의 열렬한 용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신기한 사건들에 친숙하도록 만들었기때문에, 그들의 시인들은 열심
히 아더와 칼 대제의 전설들에서 취재하여 그 당시의 언어로써 번역하였고
오래지 않아 여러 가지 모방물을 산출하였다. 군주들과 그들의 뛰어난 전사
들의 이 모험담은 다른많은 전설적, 가상적인 영웅들의 모험담과 더불어 점
차로 편찬되어방대한 양의 놀랄 만한 이야기들이 되었던 것인데, 그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씌어진 방언의 이름에 의해 그것들이 기사이야기
(Romance)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 원래 스칸다나아 지방에 거주하던 게르만의 일종으로, 10 세기 경 프랑스
서부구부로 이주하였고 1066년에 노르망디공 윌리엄에 인솔되어 영국을 정
복했음.
2)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섬 남부의 대부분, 이하 잉글랜드 는 이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겠음.
3) 튜튼족의 한 종족으로, 워내는 라인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다가 5~6 세기
경 독일 북부를 점령하고 일부는 영국으로 이주했음.
4) 고대 브리튼에 거주하던 켈트 종족의 하나.
5) 고대 지명으로, 기원전 10세기경 이래 켈트족이 거주했던 서유럽 지역의
총칭.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및 독일, 스위 스, 네덜란드의 일
부를 포함함.
6) 동부 웨일즈 연안의 주(주)인 몬머스셔의 주도(주도).
7) 북부 웨일즈의 플린쳐주에 있는, 주교의 법좌(법좌)가 있는 촌락.
8) 프랑스 동북쪽 마렌느 지방의 한 도시.
9) 노르만 정복 후 영국 노르만 계통인이 사용한 프랑스어로, 후에 영국 법
정(법정) 용어로 사용됨.
영웅주의와 기사도
기사도적 이상이 간절히 추구된 곳에서는 어디나 이 이상이 내포하고 있는
금욕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성을 띱니다. 따라서 십자군 시대에는 이 이상
은 수도원적 열망과 결합되면서 템플 기사단(Temple Knight)과 같은 군대와
종교적인 것이 결합한 기사단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편력기사란 가난해야 하
고 현세적 관계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같이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고결한전사
의 이상이야말로 "비록 현실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감정적으로나마 여전히
삶의 전사적(전사적)이고 귀족적인 개념을 지배하고 있다."고 윌리엄 제임스
(Willam James)는 말합니다. "기사에게서야말로 우리는 모든 질곡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상을 보며 그를 찬미하게 된다.자기 생명 이외에는 아
무것도 가진게 없으며 필요하다면 언제고 생명을 내걸 각오가 되어있는 그
는 이성적인 방향으로 향한 완전한 자유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기사도젓인
이상과 동정(동정)이나 충성,정의 같은 윤리적인 요소와의 관계가 인위적이
고 피상적이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도를 삶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까지 격상 시킨 것
은 기사도가 뿌리내리고 있는 그런 윤리들이 아니라 다름아니 '사랑' 이었습
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요소가 이 열망들의 총체에 삶의 열기를 준것이죠.
기사도적 이상의 특징인 금욕주의와 용감한 희생정신 등은 하나의 에로틱
한 기반을 갖습니다. 그것들은 그 속에 억제된 욕망들이 윤리적인 변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에다 형식과 양식을 부여하려는 욕구는
단순히 문학이나 조형예술 등에서만 만족되는 것이 아니며 삶 자체-사교,대
화,스포츠 등-에서도 충족되어야 함을 우리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사
랑은 거기서도 그 숭고하고 로맨스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문학과 삶
자체의 상호관계에서와 같이 결국 사랑의 기사도적 성격은 문학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삶에서 생겨난 것입니다.그리고 기사도적 테마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테마를 제공한것도 역시 삶의 실제적인 관계들인 것입니다.
기사와 귀부인, 사랑에 의한 영웅주의, 이는 어디서나 나타나는 소설의 모
티브입니다.그것은 관능적 욕망이 자기희생으로 변하는 즉각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인의 전적인 포기는 가장 사랑하는 부인에게
자기 용기를 과시하려는 의지, 즉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을 견디며 강인해 보
이려는 청년기 특유의 열망으로부터 발로된 것입니다. 욕망의 표현과 충족은
모두 불가능한 듯이 보이지만 이는 보다 고양된 한가지 즉 사랑에 의해 시
도된 영웅적 행동이라는 승화된 형태로 변모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죽음만이
유일하게 욕망 성취에의 양자택일적 대안이 되며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해방
은 보장됩니다.
처녀 구출, 이것은 너무나 자주 반복되고 닳아빠져 가끔 버려지는 때도 있
으나 또 다시 새로운 유형들-로맨스적 영화의 카우보이의 테마-을 만들어
내며 제차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세는 이처럼 청년기의 채울길 없는 욕망을
가지고 틀에 박힌 테마, 즉 사랑의 갈증을 표현하는 방식이 훨씬 더 세련되
고 절제된, 더 정신적인, 그러나 그만큼 더 암시적인 형테를 만들어 냈으나
로맨스라는 장르는 무한정 새롭고 언제나 똑같은 모험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로맨스는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로선 거의 이해하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
습니다.우리가 때늦은 기사도 로맨스들을 시대착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
만 기사도 시대가 훨씬 지난 16세기 후반-휴머니즘에 푹 잠겨있던 시대임에
도 불구하고-에 그 시대의 이름난 현자들이 아마디스(Amadis) 로맨스들을
읽고 거의가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 같은 황홀한 기분" 이라고 서술 했다는
걸 주목해야 합니다.이를 볼때 13세기 균형잃은 시대의 로맨스들이 얼마나
수용성이 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맨스적 사랑의 형태는 문학 뿐 아니라 무대의 형태로도 나타납니다.이 유
희는 크게 두가지,연극적 상연과 스포츠가 그것입니다.스포츠가 중세엔 더
중요합니다.드라마는 대체로 아직 성스러은 주제만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
죠.그리서 드라마는 사랑의 모험을 극히 예외적인 요소로 보고 있지만 중세
의 스포츠 특히 기마 시합은 그 자체로 고도의 드라마틱한 것이었고 강력한
에로티시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스포츠는 이 두가지 요소를 항상 내포하기
마련이지만 현대의 스포츠는 거의 그리스적 단순함을 가지는 반면, 중세의
기마시합은 그 풍성한 장식과 연출로 드라마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15세긴 귀족 사회의 지적,감정적 생활이 하나의 사회적 유희로 쇠퇴해 가는
몰락기 였습니다.사람들은 난폭하고 잔인하며 냉혹한 현실을 기사도적 이상
의 꿈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거대한 기만이며 약간의 빈정거림으로
서만이 완화될 수 있는 일종의 속임수인 란슬로트의 가면을 씁니다.
결국 15세기의 전기사도 문화는 감수성과 빈정거림간의 위험한 줄타기 무
대였습니다.명예,충성심,사랑 등의 기사도적 덕목들은 가장 심각하게 취급되
는 한편 또 그 엄격한 위엄은 종종 웃음으로 느슨해 지는 경우도 있었습니
다.그러나 그중에서 의식적인 패러디가 가장 우세했던 곳은 이탈리아 뿐이었
고 곧 이러한 기사도적 감수성은 그 고유 영역을 되찾아 심각함과 웃음을
넘어서 그 감수성이 가장 고전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명정의 범주로 고양됩
니다.
1400년경의 프랑스에서도 기사도적 이상의 진지성은 확인됩니다."모든 것이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바쳐졌고 모든 것이 그것을 찬미하는 데 바쳐
졌다.그의 사랑하는 귀부인 앞에서 만은 그의 말씨는 우아했고 예의발랐으며
조심스러웠다."라는 부시코(프랑스의 문학가이자 기사.1400년경 궁정 사회를
열광케 했던 진정한 사랑과 경박한 연애간의 문학적 논쟁을 주도함)의 말에
서도 알 수 있습니다.
치정적인 내용이 빠져버린 모든 로맨스적인 형태들이 다 그렇듯이 궁정식
사랑은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이죠.정교하게 다듬은 시행들과 화려한 기마 시
합이 표현하던 그 정열은 안타깝게도 이미 꺼져버렸습니다.그것은 이제 몇몇
천재의 희귀한 작품들 속에서밖에는 살아 남아 있지 않습니다.하지만 예술
작품으로서는 열등한 이 모든 작품들은 삶의 치장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면
에서는 크나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수세기 이래 꺼져버린 기마 시합에서
묘사되는 기사들의 갈매기형의 눈썹과 좁은 이마 밑에소 번득이는 눈빛들은
훨씬 뒤까지 살아 남아 폐허처럼 쌓인 모든 문학 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입
니다.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이 사회적 형식들의 치정적(치정적) 의미를 간
파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이 우연한 섬광입니다. 다음은 [에롱의 맹세 Le
Vceu du Heron] 에서 쟝 드 보몽이 전투에 임하는 기사도적 맹세를 요청받
고서 어떻게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막에서 우리가 독한 술을 마시고 있을때
가녀린 숙녀들이 우릴 쳐다보며 지나가네.
새하얀 목덜미에 꽉죄인 등옷을 입고
그네들의 다채로운 눈빛은 미소띠며 아름답게 빛나누나.
하여 본능은 우리에게 욕망으로 타는 가슴을 갖게 하네.
그 때 우리는 요몽(Yaumont)과 아굴랑(Agoulant)을 정복하고 또 다른 이
들은 올리비에(Olivier)와 롤랑(Rolland)을 정복하리.
그러나 우리가 전장에서 달리는 군마 위에 앉아 있을 때 방패를 목에 걸
고 창을 아래로 내려뜨린 채 매서운 추위가 우릴 온통 얼어붙게 하고
사지는 힘이 없어 무너질 듯하고 힘없이 앞뒤를 흔들거릴 때 그리고 적
들이 우리를 향해 일찌기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큰 방안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리. 그리고 "오호라 샤를르 르 테메레르 진영에서는 전투,해산,
돌격,창겨누기 따위를 누가 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보살펴주고 우
리에게 잘하라고 격려 해주는 여자들이 있기 대문인데!
라고 필립 드 크르와는 말했습니다.
기마시합의 에로틱한 요소는 기사가 사모하는 부인의 베일이나 옷을 걸치
고 나오는 습관 속에서 분명히 드러 납니다.('차원기사 '라는 작품속에서도
주인공이 자기의 사모하는 여인의 소매를 지니고 다닙니다) 시합의 열기 속
에서 여자들은 몸에 걸친 장신구들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마침내 경기가 끝
나면 그녀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팔과 어깨마저 소매없이 맨
살을 드러냅니다.이는 13세기 후반기의 '세기사와 셔츠'라는 글에서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 되었습니다.
고귀한 관용으로 가득찬 그러나 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가진
한 부인이 자기를 사모하는 세 기사들에게 셔츠-Chinese 속옷의 일종-를 보
냅니다. 그들에게 자기의 셔츠를 흉갑도 입지 않고 그 셔츠만을 입고 다음번
자기의 남편이 주최하는 기마 시합에 참석하라고 말합니다.처음의 두 기사들
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가련한 세번째의 기사만은 그 셔츠를 끌어안고 열
렬히 애무한 뒤 그 기마 시합에 그 셔츠를 입고 출전 합니다.그는 크게 다치
고 셔츠는 찢어져 피로 물들지만 그의 용맹은 상을 받고, 그는 부인에게 한
가지 보상을 요구합니다.즉 그는 그녀에게 그 피로 얼룩진 옷을 돌려 보내며
그녀로 하여금 기마 시합의 폐회 축하연 동안 그것을 옷위에 걸쳐 입고 있
으라고 요구합니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옷위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그것을
걸쳐 입습니다.대부분의 참서자들이 그녀를 비난하고 남편은 당황해 수치를
느낍니다.이 이야기를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죠:
"이 두연인 중 누가 더 상대를 위해 큰 희생을 치루었는가?"
기마시합을 둘러싼 이 격정적인 분위기는 교회가 이 스포츠를 꺼린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이 경기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가끔씩 명백한 간통 사건을 유
발 시켰습니다.교회의 사법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마 시합을 금하고 있었
습니다.처음엔 전투 훈련을 위해 실시되던 기마 시합은 그 과도함과 남용때
문에 모랄리스트들과 위마니스트들의 도마에 올려지기 일쑤였습니다.중세기
의 기마 시합과 마상경기들은 그리스나 현대의 스포츠들보다 훨씬 더 복잡
합니다.귀족적 오만과 사랑 그리고 예술 등이 그 시합들에 짜릿한 묘미를 부
여합니다. 과도한 장식과 호사로 둘러싸인,그리고 영웅적 환상들로 가득찬
기마 시합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공연이며 갈망과 꿈들의 실현이죠. 군대
생활과 궁정 생활은 영웅주의적 사랑의 감정들에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햇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러한 영웅주의로 부풀어 오르고,그것을 살
아 보고자 했기 때문에 호사스런 마상시합을 통해 스스로 보다 아름다운 삶
을 창조해 내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피튀기는 난폭성을 요구
한 것은 이른바 에로틱한 성격이라는 것입니다.기마 시합은 그것을 고무시키
는 모티브들로 보아 옛 힌두 서사시에 아오는 전투인 '마하바라타'와 여성을
위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기마시합의 연출은 원탁기사의 로망의 연출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요정 이
야기식의 유아적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거인과 난장이들을 만나는 허
구적인 모험이 거기서는 궁정식 사랑의 감상주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15
세기의 기마 시합은 상상적이고 로맨스적인 모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배
경도 '퐁텐 데 플레르(눈물의 샘)'이니 '샤를르마뉴의 나무'니 하는 감동적인
이름을 갖지요. 샘은 그러한 효과를 위해 구상됩니다.초상화를 보면 샘터앞
에는 정자가 있고, 거기에는 일년 내내 한 귀부인이 앉아 방패 셋을 든 유니
콘 한마리를 붙들고 잇습니다.매달 초하룻날이면 무명위 기사 하나가 그 방
패를 만지러 올 것이고 방패를 만진 기사는 모두 기마 시합의 '조항들'에 명
시된 조건 속에서 격투에 참가 해야 할 것입니다.
후우~ 이로써 중세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중에 하나인 기사도 정신의 배
경과 거기에 따른 부인 숭배,그리고 그것의 한 형태인 기마(마상) 시합에 관
한 글이 일단락 되는군요.
이 글은 호이징가의 '중세의 가을' 이라는 책의 내용을 발췌하여 요약,편집
한 것입니다.
별첨 ** 호이징가의 기사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중세의 사고는 종교적 개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다 제한된 영역 즉 궁정과 귀족 계급내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사고속에 기
사도적 이상이 가득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적 영역 까지도 침범
하지요. 예를 들어 천사장 미카엘의 무훈은 "위급한 때 무훈을 세훈 최초의
기사도적 군대요 무훈" 이었습니다(사탄과 천사들의 전쟁에서...). "지상의 군
대요 인간 기사단"으로서 하나님을 보좌를 에워싼 천사들의 찬양대를 모형
으로 한 기사도는 바로 거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스페인의 시인 후안 마누엘
(Juan Manuel)도 기사도를 일종의 성사(성사)로 부름으로써 영세나 혼례 미
사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귀족 계급에 기초한 이 드높은 열망은 구체적인 형태를 띨까요? 또 그것은
이 계급의 의무와 관련된 어떤 일정한 정치 사상에까지 이를까요? 그렇습니
다. 그 사상이란 여러 왕들의 연합에 기초한 만국 평화의 수립과 예루살렘
정복 및 터키족 축출을 위한 싸움입니다. 지칠줄 모르고 뭔가를 계획하는 필
립 드 메지에르는 템플 기사단과 자선수도회의 옛 세력을 능가할 새로운 기
사단을 꿈꾸며 그의 [노 순례자의 꿈]이라는 책에서 세계 복지를 확보할 멋
진 계획안을 구상합니다. [프랑스의 젊은 국왕은 - 이는 1388년경 그 많은
희망사항들이 불행항 샤를르 육세에 근거를 두었던 그 당시에 쓰여진것입니
다 - 젊고 또 그래서 옛 전쟁의 책임이 전혀 없는 영국왕 리챠드와 쉽게 화
친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개인적으로도 서로 평화를 유지해야 하며 평화를
예고해온 놀라운 계시들을 서로 이야기 해야한다. 협상은 사제나 법조계 인
사들 또는 군대의 장(장)들에게 맡기기만 하면 별반 어려운 난관을 빚지 않
을 것이며, 또 그럴려면 치사한 이해 관계 따위는 버려야 한다. 프랑스 국왕
은 국경 지방의 몇몇 도시와 성들을 양도해야 하며 평화 협정이 체결되는
즉시로 십자군 원정이 준비될 수 있을 것이다. 곳곳에서는 묵은 싸움들과 묵
은 원한들이 가라앉을 것이고 나라의 전제적인 통치도 개혁될 것이다. 전도
(전도)만으로 타타르인, 터키인, 유태인, 사라센인들을 개종시키기가 충분치
않다면, 모든 공의회는 기독교 제후들을 전쟁에 소집할 것이다.] 이 모든 중
대한 구상들은 그럴싸함 때문에 심지어는 셀레스틴회 수도원에서 메지에르
와 젊은 루이 도를레앙 사이에 있은 비밀 대담에서 까지 논의 되었습니다.
도를레앙 자신도 실제적이고 타산적인 정치적 구상을 거기에 섞긴 했지만
평화와 십자군에 대한 꿈속에 살고 있었다는 점은 결코 간과될수 없는 것이
죠.
하지만 기사도에 기초한 사회라는 이 같은 환상은 기묘하게도 현실과는 상
당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14세기와 15세기에 잘 알려진 프랑스의 아무 연
대기 작가라도 들어보죠. 프로아사르와 몽스틀레, 데쿠시, 샤틀랭, 라 마르슈,
몰리네등 아무라도. 코민과 토마스 바쟁을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는 다 글 서
두에 자기들이 기사도적 덕행과 명예로운 투사의 행적을 찬양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호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들
은 아무도 없었으며 그나마 가장 성공하고 있는것도 샤를랭 뿐입니다. 기사
도 서사시의 뒤늦은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초공상적인 시 [멜리아도르]
의 작가 프로아사르도 이상적 무용담들과 '군대의 대무훈들'로 머릿속이 꽉
차있습니다. 그러나 저널리스트적인 그의 필치하에서는 배신행위와 잔혹행
위, 권력의 탐욕스러운 남용 이외에는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몰리네의 경우
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자신의 기사도적 의도를 망각한채 단순하게 사건의
나열만 해 나갑니다(그것도 과장된 문체로 된 추상화만을). 그러는 중에 그
는 때때로 처음 의무로 삼았던 고귀한 치장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만 그 이
야기들을 중단할 뿐입니다.
기사도란 개념은 이들 작가들의 피상적인 정신에게는 당시의 사건들을 스
스로 납득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마술 열쇠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시
대의 정치가 그러했듯이 전쟁 역시도 극도로 조잡했고 십중팔구는 지리멸렬
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거대한 영역위에서 산발적으로 흩어진 채 각각 고립되
어 싸웠고 소규모 국부전들이 만성적 상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외교술을
복잡하고도 결함이 많은 방편으로서 한편으로는 매우 일반적인 전통적 사고
의 지배를 받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국부적이고 사소한 권리적 문제들의
잘 풀리지 않는 거대한 총체에 의해 좌우되기도 했습니다. 역사는 결국 실제
의 사회발전을 식별할 수가 없었으므로 기사도적 이상이라는 허구를 사용하
였으며, 그것의 아름다운 이미지의 범주로 축소시키면서 질서의 환상을 만들
어 냈습니다. 이 같은 역사적 기준으로 말하자면 투키디데스식 판단에 비유
될 수 있으며 그다지 질이 좋다고는 볼 수가 없을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
된 역사는 기껏해야 군대생활의 멋진 행적들과 장엄한 의례들에 대한 단순
한 진순들로 끝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관점에서라면 진짜 역사가는
과연 누구일까요? 프로아사르의 생각으로는 군사(군사)들과 군대의 장(장)들
입니다. 그들이야말로 이 고귀한 행적의 목격자요 증인이므로 그들이 이 행
위들을 공식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들은 명예와 그에 관한 문제에 있어
서 숙련된 전문가들이며 또 이 두가지는 역사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황금양털 기사단의 규약이 기사도적 군대 행적들의 관계를 명했습니다. '황
금양털' 이라는 별명을 가진 르페브르 드 생-레미와 군사 베리는 연대기적
군대 영웅의 전형입니다.
삶의 이상으로서 기사도의 개념은 매우 특수한 성격을 띱니다. 본질상 그것
은 환상과 영웅적 감동에서 나온, 그러나 외관에 있어선 윤리적 이상을 담당
한 하나의 미학적 이상이었습니다. 중세적 사고는 기사도의 개념을 종교와
미덕에 결부시켜서만 그 기사도적 개념에 귀족적 위치를 부여 할 수 있었습
니다. 하지만 기사도는 결코 완벽하게 이 윤리적 기능의 높이에까지 이를 수
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 지상적 기원이 그에게 그것을 막는 것이죠. 왜냐하
면 그 같은 이상의 본질은 미(미)의 위치까지 올려진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샤를랭은 이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후
들의 영예는 교만으로 기울어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모든 주요 권력들은
교만이라는 한 좁은 점으로 수렴되고 있다." 교만은 양식화되고 찬양받으면
서 기사도적 삶의 축이라 할 수 있는 명예를 탄생시켰습니다. 테느는 중간계
층과 하위층의 사회적 관계속에서는 이해관계가 그 주된 원동력인 반면에
귀족 계급에서는 교만이 큰 원동력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
간의 깊은 감정들 중에서 그보다 더 청렴함과 애국심과 양심으로 변모되기
에 적당한 것은 없다. 자부심이 강한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존경심을 필요로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그는 그에 합당한 자가 되려 하기 때문이다."
확실히 테느는 귀족주의를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상 귀족 계급의
역사는 도처에서 파렴치한 에고이즘(이기주의)과 결합된 교만의 이미지를 제
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들이 귀족적 이상에 대한 좋은 정의
인 것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부르크하르트가 르네상스 시대의 명
예감에 대해 판단한 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 즉 양심과 에고이즘의 이 기이
한 혼합이야말로 수많은 악행과 양립할 수 있으며 극도의 착각을 가능케 합
니다. 그러나 한 인간속에 순수하고 귀족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은
거기에 의거하며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힘을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개인적 영예에의 갈망은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르네상스기(기) 인간의 특성
처럼 생각됩니다. 그는 이탈리아 외부에서 중세적 삶을 고무하는 계급적 명
예 및 영광에 대립시켜 단테 이래 과거 모델들의 영향하에 이탈리아 정신이
멸망한 인간적 영광 및 명예심을 대립시킵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르크하르트
자신이 중세와 르네상스 또 서유업과 이탈리아 사이의 거리감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르네상스기 인간 튿유의 이 명예심
과 영예욕은 본질상 전 시대의 기사도적 야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봉건적 감정은 제거되고 고대적 사고에 의해 윤색된 확대된 계급적 명예심
이죠. 후세에게서 찬양받으려는 열렬한 희구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예술운동
을 주도한 아름다운 정신들에게서 보다 12세기의 궁정기사나 14세기의 거친
장수들에게서 더 낯선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로아사르에 따르면, 로베르 드
보마노아경과 영국인 장수 로버트 밤보로 사이에 30인 전투(1351년 3월 27
일)전에 체결된 협정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 "그러므로 우
리는 다가올 시대에 홀이나 궁정, 공회당 그리고 전세계 다른 장소들에서도
사람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실행할 것이다." 기사도적 이상을
존중하는 점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중세적인 샤틀랭도 다음과 같이 쓸 때는
매우 르네상스적이다.
명예는 온갖 고귀한 성품을 심어
그 자체로서 고결한 모든 것을 사랑케 한다.
귀족성은 거기에 공정함을 또 덧붙이도다.
다른 데서 그는 또,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서는 명예가 훨씬 더 소중한 것
이었는데, 그것은 기독교도들이 명예를 종교에 의해 천국에서 받을 보상에
대한 소망속에 받아들이는 반면,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서는 명예가 그 자체
로서 현새적 칭송의 기대속에 길러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프로아사르도 이미,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동기를 벗어버린 용맹성, 즉 영광
과 명예를 얻기 위한 그리고 -- 얼마나 앙팡 테리블 enfant terrible (끔찍한
유아, 무서운 아이란 뜻,주) 인가 -- 경력을 만들기 위한 단순하고 순진한
용맹성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기사도적 영광과 명예에의 추구는 영웅 숭배와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
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웅 숭배 속에는 중세적 요소와 르네상스적
요소가 뒤섞여 있습니다. 기사도적 삶은 하나의 모방, 즉 아더왕 서사시군
(군)의 영웅들이나 -- 또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 고대 영웅들의 모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궁적식 로망이 꽃피어난 시대 이후로는 기
사도적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었습니까? 고대 역사는 여전히 경이로운 원탁
의 나라들과 뒤섞입니다. 르네왕은 그의 여러 시 가운데 하나에서 랑슬로트,
시저, 다윗, 헤라클레스, 파리스, 트로일루스 등의 무덤들이 나란히 각각의
문장들로 장식된채 있는 환상을 묘사합니다. 기사도 자체도 로마에 기원을
둔것 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 영국의 헨리 5세에 관한 이야기입
니다 -- 옛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사도 계율을 잘 지켰다." 고전주의
는 점차 비중을 갖게 되면서, 사람들이 고대에 갖고 있던 이미지에 수정, 변
화를 가져옵니다. 포루투갈의 귀족 바스크 드 뤼센은 샤를르 르 테메레르를
위해 [켕트 뤼크스]를 번역하면서 150년전 야콥 판 마에르란트가 선언했던
것처럼 정통 '알렉산더 대왕'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작가들이 역사를 왜곡시
킨 그 거짓말들을 남김없이 제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쨌든 이 시기는 수많은 과장과 왜곡들을 통한 표상의 모방을 하는 시대
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모든것은 모방
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15세기 기사에 의해서
만큼 현대의 병사에 의해서도 그만큼 잘 씌어질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사
도에 관련된 것들은 특별히 중세적일게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전장의
용맹성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위험 한가운데서 자신을 망각하는 것이며 동료
의 용기에 감동을 느끼는 것, 또 충성심과 희생정신의 극한 희열 등등, 이
같은 원시적인 금욕주의는, 기사도적 이상이 남성적 완벽성의 고귀한 표현
즉 그리스 인들의 '칼로카가티아'에서 표현된 것 같은 아름다운 삶에로의 열
망에까지 고양되는 기반이 됩니다. 이 이상이야말로 수세기 동안 하나의 에
네르기의 원찬으로 남을 것이며 ...... 또 모든 에고이즘(이기심)과 난폭함의
세계를 뒤에 숨긴 마스크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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