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오(Duo)] - #02. 레오닐, 붉은 새
놀라는 바람에 감자를 떨어뜨려버렸다. 아, 저거 괜찮은 건가? 별로 높이 띄워놓지 않아서 크게 상하지는 않았겠지만 좀 있다 살펴봐야겠다.
그나저나 근처에 사람이 있는 기척이라곤 없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 이 녀석. 불타는 듯 한 붉은 머리. 어지간히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금방 눈에 띌 것 같은 강렬한 색인데도 이렇게 가까이 올 때 까지 몰랐다니, 고작 감자 두 개 가지고 놀면서 어지간히 집중했던 모양이다.
어라……? 왼손에 무언가 감촉이 느껴져서 내려다보니 레이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레이? 나는 레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붉은 머리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군. 내 쌍둥이 형제는 붙임성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녀석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 붙이기조차 껄끄러워하는 괴팍한 노인하고도 즐겁게 대화할 줄 아는 녀석이 왜 이렇게까지 굳어있는……이 녀석, 나한테 뭐 숨기는 게 있군. 레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반응을 보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 경계하는 게 좋을까, 이 남자.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무슨 일이시죠?”
“음, 길을 좀 물을까 하고. 그나저나 너흰 형제냐?”
“……왜 그러시죠?”
조금 놀랐다. 레이와 나를 처음 본 사람들 중 우리를 형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푸석푸석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나와 찰랑찰랑한 흑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레이는 쌍둥이는커녕 형제라고 하기도 힘들 만큼 닮은 구석이 없다. 우연일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 봤어. 아니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구나. 흐음.”
붉은 머리 남자는 허리를 조금 숙이더니 나와 레이를 번갈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백 미터 전방에서도 ‘날 봐줘요’ 라고 외칠 것 같은 머리색과 달리 눈동자는 평범한 밤색이다. 그의 시선에서는 순수한 호기심 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잡고 있는 레이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어디에 겁을 먹은 거지, 이 녀석……. 나는 슬그머니 레이를 뒤로 끌어당겨 내 몸으로 녀석을 가렸다.
“길을 물으려고 했다면서요? 이 근방은 거의 다 아니까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에 가시죠?”
말을 툭 내뱉으면서 풍겨 나오는 적대감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남자는 허리를 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응-, 그럴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어. 가봐야겠다.”
그는 홱 몸을 돌리더니 어깨너머로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또 보자.”
남자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또 보자고?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돌려 레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남자가 떠나자 안도하는 것 같았다. 다시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을 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 + +
“시레! 이거 우유랑 바꿔 줘.”
나는 모이 먹는 닭을 지켜보느라 무방비하게 쪼그리고 앉아있던 시레의 머리에 감자주머니를 쿵 소리 나게 내리쳤다.
“악! 야, 레오!”
벌떡 일어나 뒤통수를 만지며 나를 노려보는 시레. 덩치 큰 친구의 눈에 눈물이 송글송글이다. 정말로 아팠나 봐. 아싸, 성공이다. ……감자는 괜찮나?
“너 진짜 한번 맞아 볼래? 나 오른팔 다 나았거든?”
“감자나 받아, 시레.”
양팔 멀쩡한 시레와는 절대 안 싸운다. 내가 미쳤냐. 그나저나 내민 감자를 순순히 받아드는 시레를 보니 갑자기 걱정이 밀려온다. 저렇게 순박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누, 쯧.
시레는 닭 모이 그릇을 정리하고 일어나서 받은 감자를 들고 집에 들어갔다. 잠시 후 시레는 병에 담긴 우유를 들고 나왔다.
“자 이거 받고. 깨지지 않게 조심해. 고양이 보러 온 거지?”
“그럼 널 보러 왔겠냐.”
“레이, 나 이 녀석 한 대 때려도 될까?”
“왜 레이한테 허락을 받는 건데. 야, 레이. 너도 뭐라고 말 좀……. 레이?”
레이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응? 뭐?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젠 확신할 수 있다. 이 녀석 정말로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숨기는 게 있어. 나중에 시레랑 헤어지고 나서 제대로 캐물어야지.
시레를 따라 외양간 뒤쪽에 있는 창고로 갔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레가 전등에 불을 붙였고, 잠시 뒤 불빛이 번져나가며 지푸라기 속에 꼬물거리는 네 개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났다.
“우, 우와…….”
“쉿, 조용히 해. 놀라겠다.”
우리는 네 마리 새끼고양이를 향해 다가갔다. 검고 흰 점박이가 한 마리, 삼색이 한 마리, 노란 줄무늬가 한 마리, 그리고 새까만 녀석이 한 마리. 눈도 뜨지 못한 새끼고양이들의 꼬물꼬물 움직이는 꼬리, 분홍빛 코와 발바닥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다.
“신기해……, 이렇게 어린 고양이는 처음 봐. 이렇게 작은데도 발가락이며 눈 코 입을 다 갖고 있네.”
레이가 입을 열었다. 보러 오길 잘 했구나.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실제로 보고 있자니 그저 신기하고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나저나 시레, 우리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어도 되는 거야?”
“어?”
“어미고양이가 새끼고양이들을 다른 데로 옮긴다거나, 버린다거나 하면 어쩌려고.”
“아아.”
시레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 녀석들 어미 사실 새끼 때부터 내가 몰래 몰래 먹이를 줘 왔거든. 키운 거나 다름없으니까 날 경계하지 않아. 괜찮아. 이거 비밀이다, 레오. 우리 아빠가 알았다가는 나 끝장이야. 아까운 밥 낭비했다고.”
“헤에-.”
“……너 지금 약점 잡았다고 생각했지.”
덩치는 커다란 게 눈치 하난 빠르군. 나는 시레에게 혓바닥을 낼름 내밀었다가 녀석의 주먹을 피해 홱 몸을 뒤로 뺐다. 그게 실수였다.
퉁!
몸이 등 뒤에 쌓여있던 나무상자들에 부딪히자 위태위태하게 쌓여있던 상자들이 흔들리다 우리를 향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분명 쿵 소리가 나며 몸 위로 묵직한 상자가 떨어져 내리겠지……. 죽지야 않겠지만 시레처럼 한동안 팔을 못 쓰게 되는 거 아냐?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녀석을 그렇게 놀려대는 게 아니었는데. 하긴 녀석도 같이 깔리는 거니까 기왕이면 비슷하게 다쳤으면 좋겠다……라고 까지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아…….”
우리를 향해 위험스럽게 쏟아져 내렸던 수십 개의 무거운 나무상자들이 깃털이라도 된 듯 가볍게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 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와, 놀랐어…….”
레이는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녀석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 흐트러져 이마를 가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휘둥그레진 눈. 녀석의 왼쪽 눈은 평소와 다름없는 맑은 녹색이었으나 오른쪽 눈동자는 피처럼 붉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마법을 쓸 때 레이의 오른쪽 눈동자는 늘 지금처럼 색이 변했다. 때로는 노을처럼 붉은 색, 때로는 호박처럼 노란 색, 때로는 하늘처럼 파란색. 녀석은 그러니까, 이 많은 상자들을, 이 무거운 상자들을 순간적으로 들어 올린 것이다.
……내가 감자 두 개를 휘젓고 있을 때 말이야.
공중에 떠 있던 상자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내려와 쌓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상자까지 완벽하게 쌓였을 때 시레가 격렬하게 박수를 쳤고, 레이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녀석의 눈동자는 다시 원래의 녹색으로 돌아왔다.
“큰일 날 뻔 했네……. 우리야 그렇다 치고 새끼고양이들이 크게 다칠 뻔 했는걸. 레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 반성 해, 레오.”
“흥, 이 좁은 창고에서 주먹질을 한 네 탓이야, 시레.”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시레에게 다시 한번 혀를 날름거려 준 뒤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시레에게 화가 난 게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나는 레이를 이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레이에게는 안 돼. 그렇다고 녀석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녀석은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했던 내 형제니까. 동네에서 가장 뛰어난 녀석의 능력을 엄마와 마찬가지로 나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어라? 방금 쌓인 상자 뒤로 붉으스름한 뭔가가 스쳐지나간 것 같은데. 다람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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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축분이 없어서 숨차요..
놀라는 바람에 감자를 떨어뜨려버렸다. 아, 저거 괜찮은 건가? 별로 높이 띄워놓지 않아서 크게 상하지는 않았겠지만 좀 있다 살펴봐야겠다.
그나저나 근처에 사람이 있는 기척이라곤 없었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걸까, 이 녀석. 불타는 듯 한 붉은 머리. 어지간히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금방 눈에 띌 것 같은 강렬한 색인데도 이렇게 가까이 올 때 까지 몰랐다니, 고작 감자 두 개 가지고 놀면서 어지간히 집중했던 모양이다.
어라……? 왼손에 무언가 감촉이 느껴져서 내려다보니 레이가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레이? 나는 레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녀석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붉은 머리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군. 내 쌍둥이 형제는 붙임성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녀석이다. 다른 사람들이 말 붙이기조차 껄끄러워하는 괴팍한 노인하고도 즐겁게 대화할 줄 아는 녀석이 왜 이렇게까지 굳어있는……이 녀석, 나한테 뭐 숨기는 게 있군. 레이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반응을 보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조금 경계하는 게 좋을까, 이 남자.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무슨 일이시죠?”
“음, 길을 좀 물을까 하고. 그나저나 너흰 형제냐?”
“……왜 그러시죠?”
조금 놀랐다. 레이와 나를 처음 본 사람들 중 우리를 형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푸석푸석한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나와 찰랑찰랑한 흑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레이는 쌍둥이는커녕 형제라고 하기도 힘들 만큼 닮은 구석이 없다. 우연일까?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 봤어. 아니라고 하지 않는 걸 보니 맞는 모양이구나. 흐음.”
붉은 머리 남자는 허리를 조금 숙이더니 나와 레이를 번갈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백 미터 전방에서도 ‘날 봐줘요’ 라고 외칠 것 같은 머리색과 달리 눈동자는 평범한 밤색이다. 그의 시선에서는 순수한 호기심 밖에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나를 잡고 있는 레이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말 어디에 겁을 먹은 거지, 이 녀석……. 나는 슬그머니 레이를 뒤로 끌어당겨 내 몸으로 녀석을 가렸다.
“길을 물으려고 했다면서요? 이 근방은 거의 다 아니까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에 가시죠?”
말을 툭 내뱉으면서 풍겨 나오는 적대감에 나 스스로도 놀랐다. 남자는 허리를 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응-, 그럴 생각이었지만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났어. 가봐야겠다.”
그는 홱 몸을 돌리더니 어깨너머로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또 보자.”
남자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또 보자고? 무슨 소리야. 나는 고개를 돌려 레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은 남자가 떠나자 안도하는 것 같았다. 다시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을 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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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레! 이거 우유랑 바꿔 줘.”
나는 모이 먹는 닭을 지켜보느라 무방비하게 쪼그리고 앉아있던 시레의 머리에 감자주머니를 쿵 소리 나게 내리쳤다.
“악! 야, 레오!”
벌떡 일어나 뒤통수를 만지며 나를 노려보는 시레. 덩치 큰 친구의 눈에 눈물이 송글송글이다. 정말로 아팠나 봐. 아싸, 성공이다. ……감자는 괜찮나?
“너 진짜 한번 맞아 볼래? 나 오른팔 다 나았거든?”
“감자나 받아, 시레.”
양팔 멀쩡한 시레와는 절대 안 싸운다. 내가 미쳤냐. 그나저나 내민 감자를 순순히 받아드는 시레를 보니 갑자기 걱정이 밀려온다. 저렇게 순박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누, 쯧.
시레는 닭 모이 그릇을 정리하고 일어나서 받은 감자를 들고 집에 들어갔다. 잠시 후 시레는 병에 담긴 우유를 들고 나왔다.
“자 이거 받고. 깨지지 않게 조심해. 고양이 보러 온 거지?”
“그럼 널 보러 왔겠냐.”
“레이, 나 이 녀석 한 대 때려도 될까?”
“왜 레이한테 허락을 받는 건데. 야, 레이. 너도 뭐라고 말 좀……. 레이?”
레이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응? 뭐?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이젠 확신할 수 있다. 이 녀석 정말로 뭔가 이상하다. 분명히 숨기는 게 있어. 나중에 시레랑 헤어지고 나서 제대로 캐물어야지.
시레를 따라 외양간 뒤쪽에 있는 창고로 갔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레가 전등에 불을 붙였고, 잠시 뒤 불빛이 번져나가며 지푸라기 속에 꼬물거리는 네 개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났다.
“우, 우와…….”
“쉿, 조용히 해. 놀라겠다.”
우리는 네 마리 새끼고양이를 향해 다가갔다. 검고 흰 점박이가 한 마리, 삼색이 한 마리, 노란 줄무늬가 한 마리, 그리고 새까만 녀석이 한 마리. 눈도 뜨지 못한 새끼고양이들의 꼬물꼬물 움직이는 꼬리, 분홍빛 코와 발바닥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다.
“신기해……, 이렇게 어린 고양이는 처음 봐. 이렇게 작은데도 발가락이며 눈 코 입을 다 갖고 있네.”
레이가 입을 열었다. 보러 오길 잘 했구나. 생각해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실제로 보고 있자니 그저 신기하고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나저나 시레, 우리 이렇게 들여다보고 있어도 되는 거야?”
“어?”
“어미고양이가 새끼고양이들을 다른 데로 옮긴다거나, 버린다거나 하면 어쩌려고.”
“아아.”
시레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 녀석들 어미 사실 새끼 때부터 내가 몰래 몰래 먹이를 줘 왔거든. 키운 거나 다름없으니까 날 경계하지 않아. 괜찮아. 이거 비밀이다, 레오. 우리 아빠가 알았다가는 나 끝장이야. 아까운 밥 낭비했다고.”
“헤에-.”
“……너 지금 약점 잡았다고 생각했지.”
덩치는 커다란 게 눈치 하난 빠르군. 나는 시레에게 혓바닥을 낼름 내밀었다가 녀석의 주먹을 피해 홱 몸을 뒤로 뺐다. 그게 실수였다.
퉁!
몸이 등 뒤에 쌓여있던 나무상자들에 부딪히자 위태위태하게 쌓여있던 상자들이 흔들리다 우리를 향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았다. 분명 쿵 소리가 나며 몸 위로 묵직한 상자가 떨어져 내리겠지……. 죽지야 않겠지만 시레처럼 한동안 팔을 못 쓰게 되는 거 아냐?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녀석을 그렇게 놀려대는 게 아니었는데. 하긴 녀석도 같이 깔리는 거니까 기왕이면 비슷하게 다쳤으면 좋겠다……라고 까지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아…….”
우리를 향해 위험스럽게 쏟아져 내렸던 수십 개의 무거운 나무상자들이 깃털이라도 된 듯 가볍게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다 레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와, 놀랐어…….”
레이는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녀석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앉아있었다. 흐트러져 이마를 가린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휘둥그레진 눈. 녀석의 왼쪽 눈은 평소와 다름없는 맑은 녹색이었으나 오른쪽 눈동자는 피처럼 붉은 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마법을 쓸 때 레이의 오른쪽 눈동자는 늘 지금처럼 색이 변했다. 때로는 노을처럼 붉은 색, 때로는 호박처럼 노란 색, 때로는 하늘처럼 파란색. 녀석은 그러니까, 이 많은 상자들을, 이 무거운 상자들을 순간적으로 들어 올린 것이다.
……내가 감자 두 개를 휘젓고 있을 때 말이야.
공중에 떠 있던 상자들이 하나씩 차곡차곡 내려와 쌓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상자까지 완벽하게 쌓였을 때 시레가 격렬하게 박수를 쳤고, 레이는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녀석의 눈동자는 다시 원래의 녹색으로 돌아왔다.
“큰일 날 뻔 했네……. 우리야 그렇다 치고 새끼고양이들이 크게 다칠 뻔 했는걸. 레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 반성 해, 레오.”
“흥, 이 좁은 창고에서 주먹질을 한 네 탓이야, 시레.”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시레에게 다시 한번 혀를 날름거려 준 뒤 흥, 하며 고개를 돌렸다.시레에게 화가 난 게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나는 레이를 이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레이에게는 안 돼. 그렇다고 녀석을 미워하는 건 아니다. 녀석은 태어나기 전부터 함께했던 내 형제니까. 동네에서 가장 뛰어난 녀석의 능력을 엄마와 마찬가지로 나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어라? 방금 쌓인 상자 뒤로 붉으스름한 뭔가가 스쳐지나간 것 같은데. 다람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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