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일까? 난 피가 흐르는 왼쪽 어깨를 지긋이 눌러봤다.
'악!'
눈물이 날 정도의 통증이 느껴졌다. 다행히 총알은 관통한 것 같았지만 출혈은 계속되는 것 같다. 난 일단 웃옷에 넣어둔 붕대를 꺼내 지혈을 시작했다. 출혈량이 심해 쉽지는 않았지만 지혈제와 약간의 진통제가 묻어 있는 붕대라 그런지 그럭저럭 지혈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상처 부위를 압박하는 붕대의 느낌 밑으로 불에 타는 것 같은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하지만 누굴 탓하겠는가? 내 부주의로 인해 벌어진 일인데.
가루 성분으로 된 진통제가 상처 부위로 흘러 들어가자 통증이 점점 무뎌지는 것 같다. 그러자 고통이 지배하고 있던 정신의 한 켠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그리고 그곳은 곧 다른 이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찼다.
'오빠들은 무사할까? 타카시는? 람은?'
람에 대한 생각이 들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날 것 같다. 어린 꼬맹이가 얼마나 무서울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은 타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야 자기 몸 하나 지키는 데는 도가 튼 사람들이니까 난 내 살 길만 일단 생각하지.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약간 편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때였다. 뭔가 대화가 오가고 문이 쾅 하며 닫혔다. 그리고 들려오는 발소리.
뚜벅 뚜벅.
그것은 내가 숨어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 편일까, 아니면 내 적일까? 갑자기 큰 오빠의 말이 생각난다.
'카피탈에 사는 사람을 믿지마.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살지 몰라도 알고 보면 모두 이루나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니까.'
뚜벅.
발걸음이 멈춘다.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난 언제든 휘두를 수 있게 군용 단검을 쥔 오른 손에 힘을 줬다. 진한 피의 향기가 코 끝을 간질이는 침대 밑의 좁은 공간. 그곳을 가리던 침대 포가 열리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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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누나, 오늘은 감자를 캤어!”
가족 중 가장 어린 람이 바구니에 감자를 한 가득 담아 나에게 자랑하듯 가져온다. 붉은 곱슬 머리에 망토나 다름이 없는 진한 녹색의 허름한 옷을 걸친 8살짜리 꼬마. 우리 8 명의 형제 중 가장 어리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가장 보탬이 되기도 하는 아이다. 물론 육체적으로는 가장 약하고 어리지만 내 삶에 활력이 되는 우리 꼬맹이. 키는 내 가슴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로 작다. 또 아직 응석을 많이 부리는 편이기도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부모님 대신 형 누나들을 보고 자란 아이의 성장 과정이 정상적 이길 기대하기란 무리이니까. 난 람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그가 캐온 감자를 훑어 보았다. 알갱이가 모두 내 주먹보다 큰 것이 꽤 먹음직스럽다.
“잘 했어, 람. 여기까지 들고 오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다음부턴 다른 애들하고 같이 가서 캐와.”
“에이. 다른 형 누나들은 모두 자기 할 일 한다고 바쁜 걸? 각자의 할 일은 각자가 해야 한다고 마린 형이 그랬어.”
람은 약간은 토라진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난 나중에 원수 같은 둘 째 오빠를 보면 한 소리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람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어 줬다.
“뭐, 맞는 말이긴 해. 하지만 다음에 형이 그렇게 말하면 서로 돕는 것이 진짜 형제가 아니냐고 한 마디 해줘. 알았지?”
“응! 알았어!”
내 말에 람은 얼굴이 활짝 핀다. 그리고는 서둘러 캔 감자를 머리에 이고는 우물가로 간다.
“오늘 저녁엔 사리타 누나한테 맛있는 감자구이 해달라고 할게, 기대해!”
“오케이!”
난 들떠있는 꼬맹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득 내 머리 속을 지나간 생각 하나.
“근데 감자를 씻으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할 텐데, 괜찮아?”
그 말에 람이 달려가다 말고 제 자리에 우뚝 선다. 불쌍한 꼬맹이가 금방이라도 눈동자로 날 돌아보며 묻는다.
“그, 그러게. 나 방금 올라왔는데…….”
“으이그. 미리미리 씻어 왔으면 좋았잖아. 뭐 어쩔 수 없지. 특별히 정화조의 물을 쓰도록 해. 타카시가 이번 주 안에 비가 올 것 같다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대신 한 바가지 이상은 안돼!”
“네!”
꼬맹이는 밝게 웃으며 바구니를 안고 집의 뒤편에 있는 정화조로 쪼르르 달려간다. 귀여운 녀석.
“조심해, 넘어지겠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긴, 50미터나 되는 계곡을 반복해서 올라갔다 내려가는 것은 어린 아이에게는 좀 힘든 일이지. 난 내가 해야 할 일, 즉 무기를 손보는 일을 마무리 하기 위해 동물의 기름이 든 작은 나무 통과 걸레를 들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 일을 하러 나가서 아무도 없을 때만 맡을 수 있는 적막한 공기가 엄습해오자 이런 저런 잡념이 든다. 수리를 하긴 했지만 곳곳이 낡고 구멍이 뚫린 커다란 나무 집. 이곳에 정착한지 7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모든 수리를 마무리 하진 못했다. 아마 이 집은 어느 한적한 평야에 있는 누군가의 저택 혹은 별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변혁이 온 후, 이 곳은 해발 50미터나 되는 거대한 협곡 위에 위치하게 되었다. 덕분에 문만 나서면 수 십 킬로미터에 이르는 광활한 숲이 눈 앞에 들어온다. 땅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숲 속엔 얼마나 많은 도피자들이 살고 있을까? 건너편과의 거리는 약 300 미터. 건너편 역시 녹색에 뒤덮인 수 많은 기둥들과 계곡이 있다. 집 한 채가 들어서기도 힘들 정도의 면적에 높이만 수 십 미터를 상회하는 돌기둥들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이 위태로웠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것을 본 적은 아직 한 번도 없다. 마치 자연이 알아서 균형을 잡아준 것만 같은 자태다.
우리들의 마을은 단층이지만 방이 7개는 될 법한 거대한 저택이다. 내가 굳이 마을이라 지칭하는 이유는 이 집을 중심으로 반경 20미터 내에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 철물점, 무기점, 식품점 등등. 아마 이 집을 지은 사람도 이곳이 이런 목적으로 쓰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주변에 다른 폐가들도 있었지만 모두 접근이 어렵거나 심하게 파괴되어 살기가 부적합한 곳들이다. 이곳만 계곡을 통해 오르락 내리락 할 수 있었고, 또한 전망도 좋아 혹시 모를 적의 침입을 미리 대비할 수 있다. 물론 23살의 여자가 살기엔 그리 어울리지 않는 장소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16년 전, 세계는 변했지. 그리고 그 날부터 난 어린 애로 돌아가지 못했고.’
내가 6살, 아니 정확하게 7살 생일을 맞이하기 며칠 전,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대변혁이 온 것은 2016년을 몇 달 앞 둔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세상을 그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들은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또 싸우기를 반복했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큰 오빠의 말에 따른 것이다. 오빠는 당시에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우리들 중 당시의 일을 가장 잘 기억하고 있다). 이런 패턴은 가장 작게는 개인으로, 그 다음엔 가족, 조직, 그리고 나아가서는 나라 단위로 수 천 년에 걸쳐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 10월 26일 (이 날짜도 역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 명의 언니 오빠들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변혁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떤 독재자의 변덕 때문도 아니고 광신도의 어긋난 신앙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이 사태는 오지 않았겠지. 왜냐하면 변혁은 지구 자체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미친듯한 자연 재해였다. 마치 인간을 몰아내려는 마냥 시작된 재앙들은 내 기억에도 또렷하다. 바다는 진동했고 각 대륙은 지진에 시달렸으며, 지각이 뒤틀리고 바다에서는 새로운 대륙이 된 땅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기존에 있던 대륙의 많은 부분이 바다 아래로 순식간에 가라 앉았다. 중국의 8할이 사라졌고 태평양에는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 생겼다. 유럽은 뒤틀리고 아메리카 대륙들은 수 십 조각으로 갈라져 하나의 대륙적 군도가 되어 버렸다. 아시아의 수많은 섬나라들은 재앙의 시작과 동시에 바닷물 아래로 수몰되었고 중동 지방은 반복되는 지진으로 인해 괴멸 당했다. 당시 60억을 육박하던 인구수는 매일 같이 몰아치는 태풍, 지진, 화산 폭발 등에 의해 1억을 겨우 넘을까, 말까 한 수준이 되었다. 전형적 학구파인 지아 녀석은 자연 재해들이 한 달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인류는 아예 멸망했을 것이라고 가끔 말하기도 했다. 한국 국적의 지아는 학교 다닌 적도 거의 없지만 이곳에 남아 있는 도서관에서 습득한 지식으로 우리 중에서 가장 똑똑한 녀석이다. 사실 이곳의 있는 기구들과 생필품들은 녀석과 녀석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남매인 리타와 둘이서 만든 것들이다. 근데 요즘 들어 둘의 분위기가 좀 핑크 빛이란 말이지.
“뭐, 친 남매도 아닌데 상관 없으려나?”
난 잘 재련된 구리로 만들어진 화살촉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철보다는 약하지만 쇠를 주조할 수 있는 용광로를 만들기는 불가능 했기에 어쩔 수 없다. 큰 오빠와 사리타 언니는 언젠가부터 여행을 다니며 갖가지 무기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총은 구해도 총알을 만들 수는 없었기에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총을 쓰지 않는다. 덕분에 누군가가 화살촉을 만들 수 있을 만한 구리 등을 가져오면 마린 오빠는 그것들을 녹여 화살촉이나 다른 장비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난 그것을 날카롭게 갈고 살과 깃을 붙여 화살로 만들어 내는 것이고. 이것은 나의 소소한 일과 중 하나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한 두 가지씩 일을 맡고 있다. 그리고 아무도 이에 대해 불평은 하지 않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한다. 언제까지나 이런 나날만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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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꾸었던 꿈을 바탕으로 단편을 써보자! 해서 써봅니당
물론 꿈에서 전 남자였습니만 당시 유리 역활을 했던 누님이 인상에 깊어서
1인칭으로 써봐요. 1인칭을 쓰는 건 거의 10년 만인듯!
음 단편이라 한 30장 안밖 정도로 마무리 될 것 같습니다.
아, 저 유리랑 아인에 나오는 유리는 다른 사람이에요
이름 만들기 귀찮아서(...)
유리 발렌타인이란 이름이 이상하게 정감이 가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