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약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즐거운 일도 있었고, 서로의 마음에 얕은 상처를 내는 일도 있었다. 모든 사
람이 사는 것처럼.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아인의 힘은 점점 강해졌고 에리아 역시 아
인을 가르치는 일에 점점 재미를 들여갔다. 체술과 마법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
부터 에리아는 아인에게 무기를 가르쳤다. 이미 체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몸의 균형
과 근력이 어느 정도 붙었기에 무기를 섭렵하는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짧았다. 체술과
마법을 수준급으로 구사하는데 약 4년 여가 걸린 것에 비해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데는 10개월 여 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요즘에는 검을 비롯해 창과 활도 손을 댈 정
도였으니까. 그러나 체술과 마법을 익히는 데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은 덕택에 아인의
백병전은 에리아도 혀를 내두를 만큼 발전했고 검을 다루는 솜씨 역시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매서워 졌다. 예전에 대련을 할 때는 에리아가 핸디캡을 두었지만 요즘엔 마법
전(戰) 이외에는 핸디캡을 두는 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아인의 승률은 아직
0이었지만.
늘씬한 모양의 한 자루의 도검이 허공을 가른다. 가느다란 바람소리에 쇠에 반사되는
빛이 묻어 나온다. 자신의 키의 절반이 넘는 도검을 오른쪽 대각선으로 한 번 그은 다
음, 다시 들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왼쪽으로 그어 내렸다. 하지만 날이 땅에 닿지는 않
았다. 마치 땅을 어루만지는 것과 같이 살짝 스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연속
동작이 시작되었다.
오른쪽으로 옆 베기, 들어올렸다가 수직 베기. 가슴쯤에서 멈추고 바로 왼쪽 상단.
덕분에 거의 춤을 추는 것과 같은 모양새였지만 아인은 열심히 칼을 휘둘렀다. 아무런
형식도 없이, 단지 원심력을 이용한 베기와 타격의 정점에서 그것을 무시하는 정교한
움직임, 그리고 이어지는 참격. 목검이 움직이는 괘도를 그린다면 하나의 구(球)가 될
것이다.
에리아가 아인에게 무기에 대하여 가르친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에리아의
검법을 책으로 쓴다면 난처하면서도 간단할 것이다. 몇 페이지면 끝날 테니까. 그녀가 주
문한 것은 거의 모든 각도에서 칼을 휘두를 것과 움직임이 끊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
고 공격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움직임에 어떤 의미를 둬야 한다는 거지?
아주 잠깐의 상념이었다. 하지만 대가를 컸다.
딱!
목검이 흔들리는 틈을 타서 에리아의 막대기가 아인의 정수리에 작렬했다.
“아얏!”
짧은 비명과 함께 아인은 풀밭에 구르며 소리쳤다.
“잠깐 딴 생각 한 것뿐이에요! 너무 아프잖아요!”
“그 잠깐의 생각 때문에 네 목이 날아가는 것보단 낫잖니?”
에리아의 대답에 아인은 할 말을 잃고 이마를 문지를 뿐이었다. 에리아는 팔보다 조금
긴 막대기를 한 번 빙글 돌리더니 싱긋 웃었다.
“다음부터는 나도 진짜 목검을 쓸지도 몰라. 각오하렴?”
아인은 이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럴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
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에리아는 마치 검을 휘두르듯 막대기를 허공에 한 번 그
었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공격할 때는 어려운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니야. 단지 그을 뿐. 상대방의 몸을
검으로 긋는 다고 생각해. 지금은 어렵겠지만, 아마 수련이 끝나갈 때쯤에는 너도 이것
을 할 수 있을 거야.”
뭔가 의미심장한 말이었지만 아직 이해하기는 힘든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해는 못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 그렇게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어나 목검을 들고 자세를 잡
으려는 순간, 에리아의 막대기가 움직이며 목검의 길을 막았다.
“잡생각 시작도 안 했어요!”
항의하는 아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에리아가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근데 왠지 손님이 온 듯 하구나.”
“손님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높이 허공에 진분홍 빛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셀 수 없는
문자들과 숫자들이 직경 3미터는 될만한 원을 그렸고, 그 원의 한가운데는 역시 빽
빽한 문자들이 움직이며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은 한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였다.
그리고 그 나비가 날개 짓을 하듯 마법진이 살랑거리자 그 한 가운데서 두 명의 여자가
튀어나왔다. 단신의, 하지만 옷을 걸친 부분보다 드러낸 부분이 더 많은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와 그보단 살짝 큰 모래 색의 단발머리를 한 여자였다. 단발 머리 여자는, 비록 다리
에 살짝 붙는 반바지로 날렵한 다리 굴곡을 드러내긴 했지만, 자신의 일행과는 다르게 상
당히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을 연상케 하는 푸른색 점퍼는 가녀린 몸을 적당히
감싸고 있었고, 안에 받쳐 입은 검은 색 셔츠 역시 노출을 거의 자제한 모양새였다.
“어이!”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마법진에서 나오자마자 에리아를 보며 외쳤다.
“흰둥이!”
그 말을 들은 에리아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쉐리안? 그 뿌리를 알 수도 없는 별명은 오랜만에 듣는구나.”
쉐리안은 땅에 발이 닿자마자 에리아 앞에 우뚝 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착한 척은 여전하구나?
“무슨 말인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뒤로는 호박씨 깔 것 다 까고, 연락은 죽어라 안 하더만?”
에리아는 여전히 미소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키 차이 때문에 에리아가 내려다보는
형색이었지만 쉐리안 역시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상당한 무게 감을 내뿜고 있었다.
“설명이 좀 필요한 것 같긴 한데, 너도 설마 이런 말이나 하려고 먼 걸음을 옮긴 건 아니
겠지? 붉은 얼음의 지배자님?”
그 말에 쉐리안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오호, 하얀 밤의 여왕 (The Queen of the White night)께서 말솜씨가 많이 느셨네? 역시
여자는 혼자 있어야 자기 관리가 좀 되는 법인가?”
하얀 밤의 여왕 에리아. 전에 에리아와 식사를 하면서 성(姓)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
다. 기억을 잃어버린 아인은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기억을 하지 못했고, 그런 이야기를 하
던 와중에 에리아의 성에 대한 질문이 나온 것이다. 에리아는 자신들은 성이 없고 대신 별
명 비슷한 것이 대명사처럼 붙는 다고 한다. 하얀 밤의 여왕이라는 호칭도 그때 들었다. 그
별명이 어떻게 생겼냐고 물었을 때 에리아의 대답은 아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그녀가 예전에 검을 휘둘렀을 때, 달빛에 비추는 검광 때문에 세상이 훤하게 보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런 호칭이 쓰인 것은 수 백 년 전이고 이제는 몇몇만 겨우 기억하는
별명 같은 것이라고만 들었다. 하얀 밤의 여왕, 에리아가 웃으며 쉐리안의 말을 받아 쳤다.
“넌 그 오랜 시간 혼자 있었으면서 자기 관리는 별로 한 것 같지 않구나? 예전보다 화장이 짙어
졌는데?”
쉐리안이 발끈 하려는 찰나, 에리아가 적절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와 함께 온 아가씨는 누구야? 소개 정도는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에리아의 발언 때문에 치고 들어갈 박자가 어중간해진 쉐리안은 살짝 인상을 쓰며 그녀 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여자를 앞으로 불러 세웠다.
“푸른 종려나무 숲의 베리아. 내 제자지.”
“만나서 반갑습니다.”
짧고 굵은 인사와 함께 베리아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자, 에리아와 아인은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둘을 대표해서 에리아가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 푸른 종려나무 숲의 베리아. 난 에리아라고 하고, 얜 아인이라고 해. 근데 특
이한 이름이네, 푸른 종려나무 숲의 베리아?”
베리아는 이미 익숙해졌는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냥 베리아라고 불러도 되요. 제가 온 세계는 자신이 태어난 곳의 지명에 따라 이름이 결정
되거든요. 어차피 마을의 태반이 같은 성을 써서 성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기도 하고요.”
그녀는 말이 끝나자마자 에리아의 옆에 서있던 아인에게 손을 내밀며 붙임성 있게 인사했다.
“반가워. 네 소식은 진작에 들었어. 사부 말대로 정말 예쁘구나?”
“응. 응?”
예의상으로 하는 말 같기는 했지만 예상치 못한 칭찬에 당황한 아인은 뒤늦게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고, 고마워. 근데 난 아직 네 소식을 못 들어서…….”
아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얼버무렸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기억을 잃은
이후로 대화를 나눈 존재는 에리아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낯선 사람을 대하는 것
을 어려워하는 걸 보면 천상 10대 소녀 같다고 생각한 에리아는 속으로 웃으면서 그녀
대신 대답해 주었다.
“아인한테는 아직 아무의 소식도 전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당황하지 않아도 돼, 얘.”
그 말에 쉐리안이 끼어들었다.
“잠깐, 아무 소식도 안 전했다고? 그럼 가인이나 무차파, 그런 아이들도 아직 모른다는 말이야?”
“몰라.”
너무도 가볍게 대답하는 에리아가 살짝 얄미워진 쉐리안은 미간을 찡그리며 쏘아 붙였다.
“모른다고? 벌써 6년째가 다 되어가는데 그런 소식도 하나 전하지 않았어?”
“수련에 그리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말이지.”
한 마디 되받아 칠 만도 하지만 에리아는 느긋했다. 쉐리안과 알고 지낸 세월 덕에 그녀가 진짜
로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여기서 한두 마디만 받아주면 제 풀에 지쳐서 화제
를 돌릴 것이다.
“그래도 내가 보냈던 메일이나 그런 것들이 있을 거 아냐? 한두 마디도 못 전하니?”
“아인의 스승은 나야. 이런 사소한 것쯤은 내가 판단해.”
보통 이쯤 되면 툴툴거리면서 말을 멈출 쉐리안이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녀의
얇은 허리에 하얀 손이 올라갔다. 이건 쉐리안이 약간 짜증이 날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넌 항상 그런 식이지. 지금 시국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아직도 느긋하게 스승제자 놀이 중이신가?”
약간은 자극적인 말에 에리아의 눈 주변이 움찔했다.
“무슨 뜻이지? 대답 여하에 따라서 약간의 폭력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폭력사태라는 말에 제자들은 움찔하며 각각 자신들의 스승을 바라봤다. 하지만 쉐리안은
사과하지도 않았고, 사과할 생각도 없었다. 비록 자신의 말이 약간 과했다는 것은 알지만,
현재는 천하태평 한 에리아가 얄미울 뿐이었다. 쉐리안이 상체를 앞으로 숙으며 도발하듯
말했다.
“바보처럼 아무 것도 모른 체 몸만 열심히 굴리는 네 제자님이 불쌍하다, 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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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인의 이야기도 두 편 밖에 안 남았네요
사실 1부 2부 나눌 생각도 없긴 했어요. 여기서 완결내고 끝낼까, 라는 생각도
모락모락 ㅎㅎ
아무튼 좋은 밤 되세요
vin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