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세력이 기울어 가고 있을 무렵인 서기 5 세기경, 북부유럽 제국(제국)은 아직 뚜렷한 국가 형태를 갖추지 않았었다. 다소 힘이 있는 많은 족장(족장)들은 그들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지역적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목적을 위해 단결하곤 했으나 평상시에는 서로 적대시했다. 그러한 사태하에서는 사회의 하류 계급의 권리는 침략자의 손에 좌우되었다. 따라서족장들의 방종한 세력에 어떤 제재를 가하지 않았더라면, 사회가 미개 상태로 퇴보했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한 제재는 첫째로족장들 스스로의 경쟁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 상호간의 질투가 서로서로를 견제케 했다. 둘째로 교호히의 영향에서 그러한 제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는 순수한 동기에서든 이기적인 동기에서든, 약한 자를 옹호하기 위하여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을 서약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격정과 이기심의 중압 아래 짓눌려 있었지만 인간의 마음속에자연적으로 깃들여있는 관용과 정의감 속에서 그런 제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원천으로부터 기사도(기사도)가 나왔다.
그런데 이기사도라는 것은 무적의 힘과 용기, 정의, 겸손, 웃사람에 대한 충성, 동료에 대한 예절, 약자에 대한 동정, 그리고 교회에 대한 헌신등을 구비한 것으로서, 영웅적 성격의 이상(이상) - 실생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지고(지고)의 모범으로 인정하고 있는 - 을 이루고 있었다.
chivalry(기사도)라는 말은 불어의 cheval, 즉 말(마)에서 유래한다.knight(기사)라는 말은 어원상으로는 사환 아이느 하인을 의미했었는데, 후에는 특히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특권이 인정된 젊은 남자를 호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특권은 부유한 명문 출신의 청년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무기의 휴대가 허용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사는 말을 탄 전사(전사)로서 그 자신 지위 있는 자이거나 또는 다른 지위 있는 자에게 봉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보통독립된 생활 수단을 가지고 있으나 때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웃사람이 주는 보수에 의존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종종 실력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전시(전시)에는 기사는 종자(종자)들과 함께 자기 영주(영주)의 야영지에 있거나 싸움터에서 전투 지휘를 하거나, 또는 영주의 성을 지키고있었다. 평화시에 그들은 가끔 자기 영주의 궁전에서 시중을 들었고, 제후(제후)들이 여가를 즐기는 연회나 마상 경기(마상경기) 등에 참석함으로써 그 자리를 한층 빛냈다. 또한 그들은 부정을 제거하고 정의를관철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모험을 찾고, 때로는 종교 혹은 사랑의 어떤 서약을 실행하기 위하여 전국을 방랑했다. 이 방랑하는 기사들을 무예수행자(knights-errant)라고 일컬었다. 그들은 귀족들의 성에서는 환영받는 빈객(빈객)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귀족들의 따분한 은거 생활에 활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도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우대하였다. 쉽게 말해서 그것은 수도원이 그 수입의 중요한 부분을 기사들의 보호에 힘입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근처에 성도 수도원도 암자도 없을 경우엔, 그들은 저녁도 먹지 않고 길가에 있는 십자가(십자가) 아래 누워서 야숙(야숙)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들의 평상시의 인고(인고) 습관이 이러한 일을 쉽사리 감내케 하였다.
이러한 수단에 의해서 집행되는 정의가 가장 미개한 종류의 것이었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악을 제거한다는 합법적인 목적을 가진 힘이 오히려 악용되어, 악을 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실에 있어서는 가공적이라 할지라도 풍습의 묘사로는 건실하다고 할 수 있는 중세 기사이야기에서, 기사의 성(성)이 이따금 주위 지방에 대하여 공포적이었고, 그 성의 지하 감옥에 억류된 기나 숙녀들이 어떤투사가 나타나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기를 고대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석방되는 이야기, 할 일 없는 가신(가신)들의 무리가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자기네 영주의 명령을 시행하기 위하여 항상 가까이에 있었으며, 무기를 지니지 않은 군중들의 권리는 보잘것이 없었다는 사실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기사도에 관한 사실과 이론이 이처럼 상반되는 까닭에, 그에 관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반대되는 인상들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가장 열렬한 찬사의 주제가 되어 왔는가 하면 또다른 한편에서는 같은 정도로 맹렬히 비난을 받아 왔다. 냉정히 판단해볼 때 오늘날은, 기사도 대신에 법이 통치하게 되고 덜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문관(문관)이 갑옷을 입은 투사를 대신하게 된 데 대하 경하(경하)하지 않을 수 없다.
기사 수업
기사 지원자들의 예비 교육은 기간이 길고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귀족 자제들은 일곱 살이 되면 보통 그들의 친가(친가)로부터 미래의보호자의 궁전이나 성으로 옮겨 와서 지배자의 지위 아래에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지배자는 그들에게 신앙의 제 1 조목들과, 영주와 상관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가르쳤으며, 궁전의 의식에 그들을 입회시켰다. 시동(시동)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직무는 식탁에서 고기를 저미고, 시중을 들고, 그 외 잔심부름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이러한 일들이 천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한가할 때면 그들은 춤추고하프를 연주하는 것을 배웠고 또 숲과 강에서 하는 일, 다시 말하면 수렵, 매사냥, 낚시질과 씨름, 창시합, 기타 마상(마상)에서 여러 가지 군대 훈련을 행하는 것을 교수 받았다. 열네 살이 되면 시동은 기사의 종자가 되어 보다 엄격하고 힘겨운 훈련을 시작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등에 올라타거나 달리기, 성벽에 기어 오르기, 도랑 뛰어넘기, 씨름, 큰 도끼 휘두르기, 마술(마술)의 모든 동작을 우아하게 해내는 것 등이 기사 작위(작위)를 받는 데 필요한 예비 행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기사 작위는 보통 스물 한 살이 되었을 때, 즉 젊은이의교육이 완전히 끝났다고 인정되었을 때 수여되었다. 그동안에 기사의종자들은 그 당시 커티시(courtesy)라고 불렸던 모든 예의 범절을 습득하는 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같은 성내에는 항상 젊 처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시동들에게는 나이가 매우 어릴 때부터 그 궁정의 어떤 숙녀를 마음의 연인(연인)으로선택할 것이 장려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감정과 말과 행동을 그연인과 연관시키도록 교육받았다. 연인에게 봉사하는 것이 기사의 영광이자 직무였으며, 애정과 감사에 넘친 그녀의 미소가 그의 참다운용기에 대한 보상으로서 제공되었다. 충성과 사랑의 영향은 종교의 영향과 결합되었고, 성직자의 신분에 수반되는 모든 신성(신성)과 종교적 외경이 부여된 기사의 작위는 가장 위대한 영주들에게 있어서도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기사입단식은 특별히 엄숙했다. 기사 후보자들은 엄격한 단식을 행하고 수일간 철야 기도를 한 뒤에, 참회를 하고 성찬을 받았다. 그리고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기사의 칼을 목에 걸치고, 식이 행해질교회나 회관으로 향했다. 식을 집행하는 사제는 그 칼을 손에 들고축복한 후에 다시 기사 후보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 후보자는 팔짱을 끼고, 사회를 보는 기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회를 보는 그기사는 후보자가 기사가 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에 관한 질문을 하고 그에게 선서를 시킨 뒤에 그의 요구를 승낙했다.
기사입단식에 참석한 몇몇 기사들은, 숙녀들이나 때로는 소녀들에게서 황금의 박차(박차)와 갑옷, 팔찌, 긴 장갑 등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칼을 찼다. 그 다음 그는 다시 사회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회자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는데, 그 의식은 "신(신)과 성 미카엘과 성 조지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를 기사로만드오니, 용감하고 예절바르고 충성스러울지어다"라는 말과 더불어기사 후보자의 어깨나 목을 칼등으로 세 번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후보자는 투구와 방패, 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수여식은 끝나는 것이었다.
마상 경기
기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마상 경기의 장려한 광경과 그 화려한 장식품 및 기사도적인 규칙들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마상 경기는 종종 교회의 비난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종국에 가서는 벌어지고야마는 싸움과 가끔 일어나는 치명적인 결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상창시합(마상창시합, joust)은 마상 경기와는 달랐다.
전자에 있어서는기사들이 창을 가지고 싸워 상대자를 말에서 떨어뜨려야 했는데, 이는기동(기동)운동의 기술과 솜씨의 과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무기를 사용했으며 엄격한 예절이 규칙으로 준수되었다. 이 규칙에의하면 말에 부상을 입히는 것이나 칼끝을 사용하는 것, 투구의 면갑(면갑)을 올리는 것 혹은 투구의 끈을 푼 후에 기사를 공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숙녀들은 이러한 경기에서 그녀들의 기사를 격려했고 상품을수여했다. 승리자의 공적들은 이야기와 노래의 테마가 되었다.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관람석은 탑 모양, 테라스 모양, 발코니 모양, 현원(현원, pensile gardens) 모양을 한 것 등 매우 다채로왔고, 색무늬의 융단이나 큰 천막, 기치(기치)등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투사들은 그가 사랑하고 봉사했던 숙녀의 이름을 선언했다. 그는 계속 관람석을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그에게 감응력을 내려주는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격려를 받곤 했다. 기사들은 또한 그들의 투구나 방패나 갑옷에, 목도리나 베일, 소맷자락, 팔찌, 고리 등의 사랑의 선물들, 즉 여자 복장 가운데서 몇 가지를 걸치고 다녔다. 만약 싸우는 동안에 이러한 부속물의 어떤 것이 땅에 떨어지거나 잃어버리면, 아름다운 증여자(증여자)는, 특히 자신의 이름을 선서한 기사의 노력에 만족할 때에는 때때로 새것을 그에게 보내 주곤 했다.
자유민, 천민 및 성직자 계급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다른 계급 중 첫째는 자유민이었는데, 그들은 약간의 토지를 소유하고 독립된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자진해서 그들보다 부유한 이웃 사람들의 가신(가신)이 되기도 했는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부유한 자들의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엄청나게 수가 많았던 다른 두 계급은 농노와 천민이었는데, 그들은 다 노예들이었다. 농노들은 노예 중에서도 최하의 상태에 있었다. 그네들이 노동하여 얻은 모든 수확은 지주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주의 땅을 경작하는 대신 지주로부터 자신들의 의식(의식)을 제공받았다. 천민들은 그들보다는 좀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지위는 제정(제정) 러시아 농민들의 그것과 흡사했던 것 같다. 농노와 마찬가지로그들은 땅에 예속되었고 땅과 함께 매도(매도)되었다. 그러나 그들은지주에게 일정한 소작료만 지불하면 됐고, 근면의 대가로 생기는 잉여는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성직자(clerk)라는 말은 매우 광범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순수한 의미의 성직자(clergy)에 속하는 사람들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결혼한 사람들도 허다했고, 장인(장인)들이나 그 밖의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훨씬 더 광범한 규칙이제정되었다. 그래서 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사제로 간주되었고, 성직자의 은전(은전)이 허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범법(범법) 행위를 했을 경우, 사형이나 어떤 다른 형태의 처벌에서 면제되었다.
로망스(Romances)…… 그 추억을 되짚으며
아무런 서적도 없었고 귀족과 제후들마저도 문맹(문맹)이었던 시대에는, 역사나 전설은 설화자(설화자)들의 독점물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그네들 선조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들을 상속받았는데, 그들은 후에얻은 견문에다가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 그것을 공중(공중)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시대나 지리(지리), 장소나 풍습의 착오가 허다했다. 그럴 듯한 족보(족보)들이 날조되기도 했는데, 이 족보에 의하면 아더(Arthur)와 그의 기사들, 그리고 칼 대제(Charlemagne)와 그의 용사들이 아이네이아스(Aineias)나 헥토르(Hektor) 또는 다른 어떤 트로이의 영웅들에게서 그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기사이야기(Romance)라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것은 라틴어와 지방토착어가 혼합되어 서부 유럽에서 형성된 방언이 'Langue Romaine(로망스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어는 르와르강을 그 경계로 두 개의 방언으로분리되었다. 강 남쪽 지방에서는 긍정(긍정)을 나타내는 '그렇다'라는 말이 'oc'라는 말로 표시되었고, 북쪽에서는 'oil(oui)'라고 불렸다.
그래서 단테는 남쪽 말을 'langue d'oc(오크어)'라 했고, 북쪽의것을 'langue d'oil(오일어)'라 했다. 후자는 노르만인1)들에 의해서잉글랜드2)로 옮겨졌고 오늘날의 프랑스어의 기원이기도 한데, 그것을 'French Romance(프랑스적 로망스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는 'Provencal'이나 'Provencial Romance(프로방스적 로망스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랑스 남부 지방인 프로방스와랑그 도크에 사는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이 방언들은 전혀 반대되는 특성에 의해 구별되었다.온화하고 나른해지는 기후, 다른 해양 국가들과의 용이한 교통에 의해 촉진된 상정신(상정신), 재화(재화)의 유입(유입), 그리고 보다안정된 정부등의 제조건은 프로방스어(어)의 말씨를 윤택하게 하고부드럽게 하는 데 한층 더 이바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방스어로시작(시작)을 한 시인들은 '뜨루바두르(Troubadour)'라고 불렸는데,그들은 이탈리아인, 특히 페트라르카의 스승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작품들은 풍자시(Sirventes), 연가(연가)와 대화시
(Tensons)였는데,후자는 사랑에 관해서 의심스러운 미묘한 몇 가지 점에 대해서 서로질문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의 시인들간의 대화 형식을 취한 시였다.프로방스인들은 이러한 미묘한 문제들에 전적으로 골몰했었기 때문에 모험과 기사도에 관한 설화의 제작은 등한시하고 또 무시하였으므로,'음유시인(Trouvere)'이라고 불린 그 왕국의 북부 지방 시민들에게 대부분이 과업이 남겨지게 된 것 같다.
기사도가 세상에서 널리 찬탄을 받고 또 종교의 적들을 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때에, 문학이 똑같은 충동을 받고 차츰 높아 가는 경쟁심을 자극할 용기와 신심(신심)의 귀감(귀감)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역사와 우화의 수집이 필요했던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더와 칼 대제는 이 목적을 위해서 선택된 두 사람의 영웅이었다. 아더왕은, 자신이 항상 훌륭한 전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용감한 전사라고자부했다. 그는 이교도들, 다시 말해 색슨족의 군대에게 단호히 저항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포들인 브리튼인4)들은 그의 추억을 매우존중하였고 웨일즈와 그 동족 국가인 아모리카, 즉 브르따뉴로 그의공적의 추억을 가지고 갔는데, 그들의 민족적 허영심이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실루리아, 즉 남부 웨일즈의 어린 왕자가 잉글랜드와 갈리아 그리고 유럽 대부분의 정복자로서 영웅시되기까지 이르렀다. 아더의 가계(가계)는 점차로 가상의 브루투스(Brutus)와 트로이 전쟁 시기까지 소급되었고, 일종의 연대기(연대기)가 제왕사(제왕사)라는 호화로운 타이틀 아래 1150 년경에 몬머스6)의 조프리(Geoffrey)라는 사람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웨일즈의 평론가들은 그 작품의 자료를, 7 세기에 성 에서프(Asaph)7)의 주교인 성 탤리언(Talian)이 쓴, 보다 더 오래 된 역사로 간주한다.
칼 대제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의 실제 공적만 하더라도 그 이름을 영원히 남게 하기에 족한 것이긴 했지만, 그가 사라센인들과 싸웠던'성전(성전)'을 인기 있는 소설의 주제로 삼지 않았던들 그의 불후의명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전쟁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11세기 말경에 한 수도사에 의해서 씌어졌을 때, 그는 자기 작품을 그전쟁이 행해진 시대와 동시대인의 이름으로 내는 것이 그 책의 품위를 높일 것이라 생각해 저자명을 773 년경 림즈(Rheims)8)의 대주교였던 터핀(Turpin)으로 했다.
이 전설적인 기록들은 잠시 동안은 지방어나, 단지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틴어) 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터핀이나 조프리의 자굼은 그 당시 유일한 라틴어 학자였던 성직자들에 의해서읽혀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프리의 브리튼어 원문(원문)을 웨일즈인들이 읽었더라면 매우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책도 일반적이고 흔히 통용되는 언어로 번역되기까지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앵글로 색슨어는 그 당시에는 단지 정복된 속국에서만 사용되었다.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오직 노르만 프랑스어9)만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귀족들에 의해 사용되고 이해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문학에 대하여 적당한 매개체가 되었다.
노르만 프랑스어는 노르망디공(공) 윌리엄의 정복 이전에 잉글랜드에서 유행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 후에는 그 언어만이 런던의 궁정에서 사용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의 허다한 정복과 그 비상한 민족의 열렬한 용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신기한 사건들에 친숙하도록 만들었기때문에, 그들의 시인들은 열심히 아더와 칼 대제의 전설들에서 취재하여 그 당시의 언어로써 번역하였고 오래지 않아 여러 가지 모방물을 산출하였다. 군주들과 그들의 뛰어난 전사들의 이 모험담은 다른많은 전설적, 가상적인 영웅들의 모험담과 더불어 점차로 편찬되어방대한 양의 놀랄 만한 이야기들이 되었던 것인데, 그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씌어진 방언의 이름에 의해 그것들이 기사이야기(Romance)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 원래 스칸다나아 지방에 거주하던 게르만의 일종으로, 10 세기 경 프랑스 서부구부로 이주하였고 1066년에 노르망디공 윌리엄에 인솔되어 영국을 정복했음.
2)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섬 남부의 대부분, 이하 잉글랜드 는 이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겠음.
3) 튜튼족의 한 종족으로, 워내는 라인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다가 5~6 세기경 독일 북부를 점령하고 일부는 영국으로 이주했음.
4) 고대 브리튼에 거주하던 켈트 종족의 하나.
5) 고대 지명으로, 기원전 10세기경 이래 켈트족이 거주했던 서유럽 지역의 총칭.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및 독일, 스위 스, 네덜란드의 일부를 포함함.
6) 동부 웨일즈 연안의 주(주)인 몬머스셔의 주도(주도).
7) 북부 웨일즈의 플린쳐주에 있는, 주교의 법좌(법좌)가 있는 촌락.
8) 프랑스 동북쪽 마렌느 지방의 한 도시.
9) 노르만 정복 후 영국 노르만 계통인이 사용한 프랑스어로, 후에 영국 법정(법정) 용어로 사용됨.
영웅주의와 기사도
기사도적 이상이 간절히 추구된 곳에서는 어디나 이 이상이 내포하고 있는 금욕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성을 띱니다. 따라서 십자군 시대에는 이 이상은 수도원적 열망과 결합되면서 템플 기사단(TempleKnight)과 같은 군대와 종교적인 것이 결합한 기사단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편력기사란 가난해야 하고 현세적 관계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같이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고결한 전사의 이상이야말로 "비록 현실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감정적으로나마 여전히 삶의 전사적(전사적)이고 귀족적인 개념을 지배하고 있다."고 윌리엄 제임스(Willam James)는 말합니다.
"기사에게서야말로 우리는 모든 질곡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상을 보며 그를 찬미하게 된다.자기 생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으며 필요하다면 언제고 생명을 내걸 각오가 되어있는 그는 이성적인 방향으로 향한 완전한 자유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기사도젓인 이상과 동정(동정)이나 충성,정의 같은 윤리적인 요소와의 관계가 인위적이고 피상적이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도를 삶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까지 격상 시킨 것 은 기사도가 뿌리내리고 있는 그런 윤리들이 아니라 다름아니 '사랑' 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요소가 이 열망들의 총체에 삶의 열기를 준 것이죠.
기사도적 이상의 특징인 금욕주의와 용감한 희생정신 등은 하나의 에로틱한 기반을 갖습니다. 그것들은 그 속에 억제된 욕망들이 윤리적인 변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에다 형식과 양식을 부여하려는 욕구는 단순히 문학이나 조형예술 등에서만 만족되는 것이 아니며 삶 자체-사교,대화,스포츠 등-에서도 충족되어야 함을 우리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사랑은 거기서도 그 숭고하고 로맨스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문학과 삶 자체의 상호관계에서와 같이 결국 사랑의 기사도적 성격은 문학에서 태어난것이 아니라 삶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기사도적 테마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테마를 제공한것도 역시 삶의 실제적인 관계들인 것입니다.기사와 귀부인, 사랑에 의한 영웅주의, 이는 어디서나 나타나는 소설의 모티브입니다.그것은 관능적 욕망이 자기희생으로 변하는 즉각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인의 전적인 포기는 가장 사랑하는 부인에게 자기 용기를 과시하려는 의지, 즉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을 견디며 강인해 보이려는 청년기 특유의 열망으로부터 발로된 것입니다. 욕망의 표현과 충족은 모두 불가능한 듯이 보이지만 이는 보다 고양된 한가지 즉 사랑에 의해 시도된 영웅적 행동이라는 승화된 형태로 변모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죽음만이 유일하게 욕망 성취에의 양자택일적 대안이 되며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해방은 보장됩니다.
처녀 구출, 이것은 너무나 자주 반복되고 닳아빠져 가끔 버려지는 때도 있으나 또 다시 새로운 유형들-로맨스적 영화의 카우보이의 테마-을 만들어 내며 제차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세는 이처럼 청년기의 채울길 없는 욕망을 가지고 틀에 박힌 테마, 즉 사랑의 갈증을 표현하는 방식이 훨씬 더 세련되고 절제된, 더 정신적인, 그러나 그만큼 더 암시적인 형테를 만들어 냈으나 로맨스라는 장르는 무한정 새롭고 언제나 똑같은 모험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로맨스는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로선 거의 이해하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우리가 때늦은 기사도 로맨스들을 시대착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기사도 시대가 훨씬 지난 16세기 후반-휴머니즘에 푹 잠겨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에 그 시대의 이름난 현자들이 아마디스(Amadis) 로맨스들을 읽고 거의가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 같은 황홀한 기분" 이라고 서술 했다는걸 주목해야 합니다.이를 볼때 13세기 균형잃은 시대의 로맨스들이 얼마나 수용성이 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맨스적 사랑의 형태는 문학 뿐 아니라 무대의 형태로도 나타납니다.이 유희는 크게 두가지,연극적 상연과 스포츠가 그것입니다.스포츠가 중세엔 더 중요합니다.드라마는 대체로 아직 성스러은 주제만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죠.그리서 드라마는 사랑의 모험을 극히 예외적인 요소로 보고 있지만 중세의 스포츠 특히 기마 시합은 그 자체로 고도의 드라마틱한 것이었고 강력한 에로티시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스포츠는 이 두가지 요소를 항상 내포하기 마련이지만 현대의 스포츠는 거의 그리스적 단순함을 가지는 반면, 중세의 기마시합은 그 풍성한 장식과 연출로 드라마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15세긴 귀족 사회의 지적,감정적 생활이 하나의 사회적 유희로 쇠퇴해 가는 몰락기 였습니다.사람들은 난폭하고 잔인하며 냉혹한 현실을 기사도적 이상의 꿈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거대한 기만이며 약간의 빈정거림으로서만이 완화될 수 있는 일종의 속임수인 란슬로트의 가면을 씁니다.결국 15세기의 전기사도 문화는 감수성과 빈정거림간의 위험한 줄타기 무대였습니다.명예,충성심,사랑 등의 기사도적 덕목들은 가장 심각하게 취급되는 한편 또 그 엄격한 위엄은 종종 웃음으로 느슨해 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그러나 그중에서 의식적인 패러디가 가장 우세했던 곳은 이탈리아 뿐이었고 곧 이러한 기사도적 감수성은 그 고유 영역을 되찾아 심각함과 웃음을 넘어서 그 감수성이 가장 고전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명정의 범주로 고양됩니다.
1400년경의 프랑스에서도 기사도적 이상의 진지성은 확인됩니다."모든 것이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바쳐졌고 모든 것이 그것을 찬미하는 데 바쳐졌다.그의 사랑하는 귀부인 앞에서 만은 그의 말씨는 우아했고 예의발랐으며 조심스러웠다."라는 부시코(프랑스의 문학가이자 기사.1400년경 궁정 사회를 열광케 했던 진정한 사랑과 경박한 연애간의 문학적 논쟁을 주도함)의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치정적인 내용이 빠져버린 모든 로맨스적인 형태들이 다 그렇듯이 궁정식 사랑은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이죠.정교하게 다듬은 시행들과 화려한 기마 시합이 표현하던 그 정열은 안타깝게도 이미 꺼져버렸습니다.그것은 이제 몇몇 천재의 희귀한 작품들 속에서밖에는 살아 남아 있지 않습니다.하지만 예술 작품으로서는 열등한 이 모든 작품들은 삶의 치장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면에서는 크나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수세기 이래 꺼져버린 기마 시합에서 묘사되는 기사들의 갈매기형의 눈썹과 좁은 이마 밑에소 번득이는 눈빛들은 훨씬 뒤까지 살아 남아 폐허처럼 쌓인 모든 문학 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이 사회적 형식들의 치정적(치정적) 의미를 간파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이 우연한 섬광입니다. 다음은 [에롱의 맹세 Le Vceu du Heron] 에서 쟝 드 보몽이 전투에 임하는 기사도적 맹세를 요청받고서 어떻게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막에서 우리가 독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가녀린 숙녀들이 우릴 쳐다보며 지나가네. 새하얀 목덜미에 꽉죄인 등옷을 입고 그네들의 다채로운 눈빛은 미소띠며 아름답게 빛나누나. 하여 본능은 우리에게 욕망으로 타는 가슴을 갖게 하네. 그 때 우리는 요몽(Yaumont)과 아굴랑(Agoulant)을 정복하고 또 다른 이 들은 올리비에(Olivier)와 롤랑(Rolland)을 정복하리.
그러나 우리가 전장에서 달리는 군마 위에 앉아 있을 때 방패를 목에 걸 고 창을 아래로 내려뜨린 채 매서운 추위가 우릴 온통 얼어붙게 하고 사지는 힘이 없어 무너질 듯하고 힘없이 앞뒤를 흔들거릴 때 그리고 적 들이 우리를 향해 일찌기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큰 방안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리. 그리고 "오호라 샤를르 르 테메레르 진영에서는 전투,해산, 돌격,창겨누기 따위를 누가 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보살펴주고 우 리에게 잘하라고 격려 해주는 여자들이 있기 대문인데! 라고 필립 드 크르와는 말했습니다.
기마시합의 에로틱한 요소는 기사가 사모하는 부인의 베일이나 옷을 걸치고 나오는 습관 속에서 분명히 드러 납니다.('차원기사 '라는 작품속에서도 주인공이 자기의 사모하는 여인의 소매를 지니고 다닙니다) 시합의 열기 속에서 여자들은 몸에 걸친 장신구들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마침내 경기가 끝나면 그녀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팔과 어깨마저 소매없이 맨살을 드러냅니다.
이는 13세기 후반기의 '세기사와 셔츠'라는 글에서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 되었습니다.고귀한 관용으로 가득찬 그러나 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가진 한 부인이 자기를 사모하는 세 기사들에게 셔츠-Chinese 속옷의 일종-를 보냅니다. 그들에게 자기의 셔츠를 흉갑도 입지 않고 그 셔츠만을 입고 다음번 자기의 남편이 주최하는 기마 시합에 참석하라고 말합니다.처음의 두 기사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가련한 세번째의 기사만은 그 셔츠를 끌어안고 열렬히 애무한 뒤 그 기마 시합에 그 셔츠를 입고 출전 합니다.그는 크게 다치고 셔츠는 찢어져 피로 물들지만 그의 용맹은 상을 받고, 그는 부인에게 한가지 보상을 요구합니다.
즉 그는 그녀에게 그 피로 얼룩진 옷을 돌려 보내며 그녀로 하여금 기마 시합의 폐회 축하연 동안 그것을 옷위에 걸쳐 입고 있으라고 요합니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옷위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그것을 걸쳐 입습니다. 대부분의 참서자들이 그녀를 비난하고 남편은 당황해 수치를 느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죠:
"이 두연인 중 누가 더 상대를 위해 큰 희생을 치루었는가?"
기마시합을 둘러싼 이 격정적인 분위기는 교회가 이 스포츠를 꺼린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이 경기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가끔씩 명백한 간통 사건을 유발 시켰습니다.교회의 사법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마 시합을 금하고 있었습니다.처음엔 전투 훈련을 위해 실시되던 기마 시합은 그 과도함과 남용때문에 모랄리스트들과 위마니스트들의 도마에 올려지기 일쑤였습니다.중세기의 기마 시합과 마상경기들은 그리스나 현대의 스포츠들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귀족적 오만과 사랑 그리고 예술 등이 그 시합들에 짜릿한 묘미를 부여합니다. 과도한 장식과 호사로 둘러싸인,그리고 영웅적 환상들로 가득찬 기마 시합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공연이며 갈망과 꿈들의 실현이죠. 군대 생활과 궁정 생활은 영웅주의적 사랑의 감정들에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햇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러한 영웅주의로 부풀어 오르고,그것을 살아 보고자 했기 때문에 호사스런 마상시합을 통해 스스로 보다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 내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피튀기는 난폭성을 요구한 것은 이른바 에로틱한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기마 시합은 그것을 고무시키는 모티브들로 보아 옛 힌두 서사시에 아오는 전투인 '마하바라타'와 여성을 위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기마시합의 연출은 원탁기사의 로망의 연출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요정 이야기식의 유아적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거인과 난장이들을 만나는 허구적인 모험이 거기서는 궁정식 사랑의 감상주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15세기의 기마 시합은 상상적이고 로맨스적인 모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배경도 '퐁텐 데 플레르(눈물의 샘)'이니 '샤를르마뉴의 나무'니 하는 감동적인 이름을 갖지요. 샘은 그러한 효과를 위해 구상됩니다.
초상화를 보면 샘터앞에는 정자가 있고, 거기에는 일년 내내 한 귀부인이 앉아 방패 셋을 든 유니콘 한마리를 붙들고 잇습니다.매달 초하룻날이면 무명위 기사 하나가 그 방패를 만지러 올 것이고 방패를 만진 기사는 모두 기마 시합의 '조항들'에 명시된 조건 속에서 격투에 참가 해야 할 것입니다.후우~ 이로써 중세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중에 하나인 기사도 정신의 배경과 거기에 따른 부인 숭배,그리고 그것의 한 형태인 기마(마상) 시합에 관한 글이 일단락 되는군요.
-네이버 지식 검색-
그들 상호간의 질투가 서로서로를 견제케 했다. 둘째로 교호히의 영향에서 그러한 제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는 순수한 동기에서든 이기적인 동기에서든, 약한 자를 옹호하기 위하여 중재자의 역할을 할 것을 서약했다. 마지막으로 어떠한 격정과 이기심의 중압 아래 짓눌려 있었지만 인간의 마음속에자연적으로 깃들여있는 관용과 정의감 속에서 그런 제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원천으로부터 기사도(기사도)가 나왔다.
그런데 이기사도라는 것은 무적의 힘과 용기, 정의, 겸손, 웃사람에 대한 충성, 동료에 대한 예절, 약자에 대한 동정, 그리고 교회에 대한 헌신등을 구비한 것으로서, 영웅적 성격의 이상(이상) - 실생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지고(지고)의 모범으로 인정하고 있는 - 을 이루고 있었다.
chivalry(기사도)라는 말은 불어의 cheval, 즉 말(마)에서 유래한다.knight(기사)라는 말은 어원상으로는 사환 아이느 하인을 의미했었는데, 후에는 특히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특권이 인정된 젊은 남자를 호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특권은 부유한 명문 출신의 청년들에게만 부여되는 것이었고, 대다수의 사람들에겐 무기의 휴대가 허용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기사는 말을 탄 전사(전사)로서 그 자신 지위 있는 자이거나 또는 다른 지위 있는 자에게 봉사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들은 보통독립된 생활 수단을 가지고 있으나 때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웃사람이 주는 보수에 의존하기도 하였으며, 또는 종종 실력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전시(전시)에는 기사는 종자(종자)들과 함께 자기 영주(영주)의 야영지에 있거나 싸움터에서 전투 지휘를 하거나, 또는 영주의 성을 지키고있었다. 평화시에 그들은 가끔 자기 영주의 궁전에서 시중을 들었고, 제후(제후)들이 여가를 즐기는 연회나 마상 경기(마상경기) 등에 참석함으로써 그 자리를 한층 빛냈다. 또한 그들은 부정을 제거하고 정의를관철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모험을 찾고, 때로는 종교 혹은 사랑의 어떤 서약을 실행하기 위하여 전국을 방랑했다. 이 방랑하는 기사들을 무예수행자(knights-errant)라고 일컬었다. 그들은 귀족들의 성에서는 환영받는 빈객(빈객)이었다.
그들의 존재가 귀족들의 따분한 은거 생활에 활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도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며우대하였다. 쉽게 말해서 그것은 수도원이 그 수입의 중요한 부분을 기사들의 보호에 힘입었던 때문이다. 그러나 근처에 성도 수도원도 암자도 없을 경우엔, 그들은 저녁도 먹지 않고 길가에 있는 십자가(십자가) 아래 누워서 야숙(야숙)하는 일도 있었는데, 그들의 평상시의 인고(인고) 습관이 이러한 일을 쉽사리 감내케 하였다.
이러한 수단에 의해서 집행되는 정의가 가장 미개한 종류의 것이었으리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다. 악을 제거한다는 합법적인 목적을 가진 힘이 오히려 악용되어, 악을 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사실에 있어서는 가공적이라 할지라도 풍습의 묘사로는 건실하다고 할 수 있는 중세 기사이야기에서, 기사의 성(성)이 이따금 주위 지방에 대하여 공포적이었고, 그 성의 지하 감옥에 억류된 기나 숙녀들이 어떤투사가 나타나 자기들을 해방시켜 주기를 고대하거나 몸값을 지불하고석방되는 이야기, 할 일 없는 가신(가신)들의 무리가 법과 정의를 무시하고 자기네 영주의 명령을 시행하기 위하여 항상 가까이에 있었으며, 무기를 지니지 않은 군중들의 권리는 보잘것이 없었다는 사실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기사도에 관한 사실과 이론이 이처럼 상반되는 까닭에, 그에 관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반대되는 인상들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은 가장 열렬한 찬사의 주제가 되어 왔는가 하면 또다른 한편에서는 같은 정도로 맹렬히 비난을 받아 왔다. 냉정히 판단해볼 때 오늘날은, 기사도 대신에 법이 통치하게 되고 덜 낭만적이기는 하지만, 문관(문관)이 갑옷을 입은 투사를 대신하게 된 데 대하 경하(경하)하지 않을 수 없다.
기사 수업
기사 지원자들의 예비 교육은 기간이 길고 힘이 드는 것이었다. 귀족 자제들은 일곱 살이 되면 보통 그들의 친가(친가)로부터 미래의보호자의 궁전이나 성으로 옮겨 와서 지배자의 지위 아래에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지배자는 그들에게 신앙의 제 1 조목들과, 영주와 상관들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가르쳤으며, 궁전의 의식에 그들을 입회시켰다. 시동(시동)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직무는 식탁에서 고기를 저미고, 시중을 들고, 그 외 잔심부름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이러한 일들이 천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한가할 때면 그들은 춤추고하프를 연주하는 것을 배웠고 또 숲과 강에서 하는 일, 다시 말하면 수렵, 매사냥, 낚시질과 씨름, 창시합, 기타 마상(마상)에서 여러 가지 군대 훈련을 행하는 것을 교수 받았다. 열네 살이 되면 시동은 기사의 종자가 되어 보다 엄격하고 힘겨운 훈련을 시작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말등에 올라타거나 달리기, 성벽에 기어 오르기, 도랑 뛰어넘기, 씨름, 큰 도끼 휘두르기, 마술(마술)의 모든 동작을 우아하게 해내는 것 등이 기사 작위(작위)를 받는 데 필요한 예비 행위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기사 작위는 보통 스물 한 살이 되었을 때, 즉 젊은이의교육이 완전히 끝났다고 인정되었을 때 수여되었다. 그동안에 기사의종자들은 그 당시 커티시(courtesy)라고 불렸던 모든 예의 범절을 습득하는 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같은 성내에는 항상 젊 처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시동들에게는 나이가 매우 어릴 때부터 그 궁정의 어떤 숙녀를 마음의 연인(연인)으로선택할 것이 장려되었다.
그리고 그의 모든 감정과 말과 행동을 그연인과 연관시키도록 교육받았다. 연인에게 봉사하는 것이 기사의 영광이자 직무였으며, 애정과 감사에 넘친 그녀의 미소가 그의 참다운용기에 대한 보상으로서 제공되었다. 충성과 사랑의 영향은 종교의 영향과 결합되었고, 성직자의 신분에 수반되는 모든 신성(신성)과 종교적 외경이 부여된 기사의 작위는 가장 위대한 영주들에게 있어서도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기사입단식은 특별히 엄숙했다. 기사 후보자들은 엄격한 단식을 행하고 수일간 철야 기도를 한 뒤에, 참회를 하고 성찬을 받았다. 그리고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기사의 칼을 목에 걸치고, 식이 행해질교회나 회관으로 향했다. 식을 집행하는 사제는 그 칼을 손에 들고축복한 후에 다시 기사 후보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면 후보자는 팔짱을 끼고, 사회를 보는 기사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회를 보는 그기사는 후보자가 기사가 되고자 하는 동기와 목적에 관한 질문을 하고 그에게 선서를 시킨 뒤에 그의 요구를 승낙했다.
기사입단식에 참석한 몇몇 기사들은, 숙녀들이나 때로는 소녀들에게서 황금의 박차(박차)와 갑옷, 팔찌, 긴 장갑 등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칼을 찼다. 그 다음 그는 다시 사회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회자는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는데, 그 의식은 "신(신)과 성 미카엘과 성 조지의 이름으로 나는 그대를 기사로만드오니, 용감하고 예절바르고 충성스러울지어다"라는 말과 더불어기사 후보자의 어깨나 목을 칼등으로 세 번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다음에 후보자는 투구와 방패, 창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수여식은 끝나는 것이었다.
마상 경기
기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마상 경기의 장려한 광경과 그 화려한 장식품 및 기사도적인 규칙들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마상 경기는 종종 교회의 비난을 받았는데, 아마도 그것은 종국에 가서는 벌어지고야마는 싸움과 가끔 일어나는 치명적인 결과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상창시합(마상창시합, joust)은 마상 경기와는 달랐다.
전자에 있어서는기사들이 창을 가지고 싸워 상대자를 말에서 떨어뜨려야 했는데, 이는기동(기동)운동의 기술과 솜씨의 과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고 여러 가지 무기를 사용했으며 엄격한 예절이 규칙으로 준수되었다. 이 규칙에의하면 말에 부상을 입히는 것이나 칼끝을 사용하는 것, 투구의 면갑(면갑)을 올리는 것 혹은 투구의 끈을 푼 후에 기사를 공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숙녀들은 이러한 경기에서 그녀들의 기사를 격려했고 상품을수여했다. 승리자의 공적들은 이야기와 노래의 테마가 되었다.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관람석은 탑 모양, 테라스 모양, 발코니 모양, 현원(현원, pensile gardens) 모양을 한 것 등 매우 다채로왔고, 색무늬의 융단이나 큰 천막, 기치(기치)등으로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투사들은 그가 사랑하고 봉사했던 숙녀의 이름을 선언했다. 그는 계속 관람석을 쳐다보았고 그곳에서 그에게 감응력을 내려주는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격려를 받곤 했다. 기사들은 또한 그들의 투구나 방패나 갑옷에, 목도리나 베일, 소맷자락, 팔찌, 고리 등의 사랑의 선물들, 즉 여자 복장 가운데서 몇 가지를 걸치고 다녔다. 만약 싸우는 동안에 이러한 부속물의 어떤 것이 땅에 떨어지거나 잃어버리면, 아름다운 증여자(증여자)는, 특히 자신의 이름을 선서한 기사의 노력에 만족할 때에는 때때로 새것을 그에게 보내 주곤 했다.
자유민, 천민 및 성직자 계급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다른 계급 중 첫째는 자유민이었는데, 그들은 약간의 토지를 소유하고 독립된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자진해서 그들보다 부유한 이웃 사람들의 가신(가신)이 되기도 했는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부유한 자들의 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엄청나게 수가 많았던 다른 두 계급은 농노와 천민이었는데, 그들은 다 노예들이었다. 농노들은 노예 중에서도 최하의 상태에 있었다. 그네들이 노동하여 얻은 모든 수확은 지주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주의 땅을 경작하는 대신 지주로부터 자신들의 의식(의식)을 제공받았다. 천민들은 그들보다는 좀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지위는 제정(제정) 러시아 농민들의 그것과 흡사했던 것 같다. 농노와 마찬가지로그들은 땅에 예속되었고 땅과 함께 매도(매도)되었다. 그러나 그들은지주에게 일정한 소작료만 지불하면 됐고, 근면의 대가로 생기는 잉여는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성직자(clerk)라는 말은 매우 광범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원래 순수한 의미의 성직자(clergy)에 속하는 사람들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결혼한 사람들도 허다했고, 장인(장인)들이나 그 밖의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훨씬 더 광범한 규칙이제정되었다. 그래서 글을 읽을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은 사제로 간주되었고, 성직자의 은전(은전)이 허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범법(범법) 행위를 했을 경우, 사형이나 어떤 다른 형태의 처벌에서 면제되었다.
로망스(Romances)…… 그 추억을 되짚으며
아무런 서적도 없었고 귀족과 제후들마저도 문맹(문맹)이었던 시대에는, 역사나 전설은 설화자(설화자)들의 독점물이었다. 그들은 대대로 그네들 선조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들을 상속받았는데, 그들은 후에얻은 견문에다가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 그것을 공중(공중)에게 들려주었다. 물론 시대나 지리(지리), 장소나 풍습의 착오가 허다했다. 그럴 듯한 족보(족보)들이 날조되기도 했는데, 이 족보에 의하면 아더(Arthur)와 그의 기사들, 그리고 칼 대제(Charlemagne)와 그의 용사들이 아이네이아스(Aineias)나 헥토르(Hektor) 또는 다른 어떤 트로이의 영웅들에게서 그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기사이야기(Romance)라는 말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그것은 라틴어와 지방토착어가 혼합되어 서부 유럽에서 형성된 방언이 'Langue Romaine(로망스어)'란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어는 르와르강을 그 경계로 두 개의 방언으로분리되었다. 강 남쪽 지방에서는 긍정(긍정)을 나타내는 '그렇다'라는 말이 'oc'라는 말로 표시되었고, 북쪽에서는 'oil(oui)'라고 불렸다.
그래서 단테는 남쪽 말을 'langue d'oc(오크어)'라 했고, 북쪽의것을 'langue d'oil(오일어)'라 했다. 후자는 노르만인1)들에 의해서잉글랜드2)로 옮겨졌고 오늘날의 프랑스어의 기원이기도 한데, 그것을 'French Romance(프랑스적 로망스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는 'Provencal'이나 'Provencial Romance(프로방스적 로망스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프랑스 남부 지방인 프로방스와랑그 도크에 사는 사람들이 그 말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이 방언들은 전혀 반대되는 특성에 의해 구별되었다.온화하고 나른해지는 기후, 다른 해양 국가들과의 용이한 교통에 의해 촉진된 상정신(상정신), 재화(재화)의 유입(유입), 그리고 보다안정된 정부등의 제조건은 프로방스어(어)의 말씨를 윤택하게 하고부드럽게 하는 데 한층 더 이바지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방스어로시작(시작)을 한 시인들은 '뜨루바두르(Troubadour)'라고 불렸는데,그들은 이탈리아인, 특히 페트라르카의 스승이었다. 그들이 좋아하는작품들은 풍자시(Sirventes), 연가(연가)와 대화시
(Tensons)였는데,후자는 사랑에 관해서 의심스러운 미묘한 몇 가지 점에 대해서 서로질문을 주고받았던 두 사람의 시인들간의 대화 형식을 취한 시였다.프로방스인들은 이러한 미묘한 문제들에 전적으로 골몰했었기 때문에 모험과 기사도에 관한 설화의 제작은 등한시하고 또 무시하였으므로,'음유시인(Trouvere)'이라고 불린 그 왕국의 북부 지방 시민들에게 대부분이 과업이 남겨지게 된 것 같다.
기사도가 세상에서 널리 찬탄을 받고 또 종교의 적들을 치기 위해 전력을 다하던 때에, 문학이 똑같은 충동을 받고 차츰 높아 가는 경쟁심을 자극할 용기와 신심(신심)의 귀감(귀감)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역사와 우화의 수집이 필요했던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더와 칼 대제는 이 목적을 위해서 선택된 두 사람의 영웅이었다. 아더왕은, 자신이 항상 훌륭한 전사라고는 할 수 없어도 용감한 전사라고자부했다. 그는 이교도들, 다시 말해 색슨족의 군대에게 단호히 저항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포들인 브리튼인4)들은 그의 추억을 매우존중하였고 웨일즈와 그 동족 국가인 아모리카, 즉 브르따뉴로 그의공적의 추억을 가지고 갔는데, 그들의 민족적 허영심이 그것을 부지불식간에 과장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실루리아, 즉 남부 웨일즈의 어린 왕자가 잉글랜드와 갈리아 그리고 유럽 대부분의 정복자로서 영웅시되기까지 이르렀다. 아더의 가계(가계)는 점차로 가상의 브루투스(Brutus)와 트로이 전쟁 시기까지 소급되었고, 일종의 연대기(연대기)가 제왕사(제왕사)라는 호화로운 타이틀 아래 1150 년경에 몬머스6)의 조프리(Geoffrey)라는 사람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웨일즈의 평론가들은 그 작품의 자료를, 7 세기에 성 에서프(Asaph)7)의 주교인 성 탤리언(Talian)이 쓴, 보다 더 오래 된 역사로 간주한다.
칼 대제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의 실제 공적만 하더라도 그 이름을 영원히 남게 하기에 족한 것이긴 했지만, 그가 사라센인들과 싸웠던'성전(성전)'을 인기 있는 소설의 주제로 삼지 않았던들 그의 불후의명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전쟁의 전설적인 이야기가 11세기 말경에 한 수도사에 의해서 씌어졌을 때, 그는 자기 작품을 그전쟁이 행해진 시대와 동시대인의 이름으로 내는 것이 그 책의 품위를 높일 것이라 생각해 저자명을 773 년경 림즈(Rheims)8)의 대주교였던 터핀(Turpin)으로 했다.
이 전설적인 기록들은 잠시 동안은 지방어나, 단지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라틴어) 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사실 터핀이나 조프리의 자굼은 그 당시 유일한 라틴어 학자였던 성직자들에 의해서읽혀졌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프리의 브리튼어 원문(원문)을 웨일즈인들이 읽었더라면 매우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책도 일반적이고 흔히 통용되는 언어로 번역되기까지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앵글로 색슨어는 그 당시에는 단지 정복된 속국에서만 사용되었다.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는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오직 노르만 프랑스어9)만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귀족들에 의해 사용되고 이해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문학에 대하여 적당한 매개체가 되었다.
노르만 프랑스어는 노르망디공(공) 윌리엄의 정복 이전에 잉글랜드에서 유행되었다. 그리고 그 사건 후에는 그 언어만이 런던의 궁정에서 사용되었다. 노르망디인들의 허다한 정복과 그 비상한 민족의 열렬한 용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신기한 사건들에 친숙하도록 만들었기때문에, 그들의 시인들은 열심히 아더와 칼 대제의 전설들에서 취재하여 그 당시의 언어로써 번역하였고 오래지 않아 여러 가지 모방물을 산출하였다. 군주들과 그들의 뛰어난 전사들의 이 모험담은 다른많은 전설적, 가상적인 영웅들의 모험담과 더불어 점차로 편찬되어방대한 양의 놀랄 만한 이야기들이 되었던 것인데, 그중 가장 오래된 이야기가 씌어진 방언의 이름에 의해 그것들이 기사이야기(Romance)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1) 원래 스칸다나아 지방에 거주하던 게르만의 일종으로, 10 세기 경 프랑스 서부구부로 이주하였고 1066년에 노르망디공 윌리엄에 인솔되어 영국을 정복했음.
2) 그레이트 브리튼(Great Britain)섬 남부의 대부분, 이하 잉글랜드 는 이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겠음.
3) 튜튼족의 한 종족으로, 워내는 라인 엘베강 유역에 거주하다가 5~6 세기경 독일 북부를 점령하고 일부는 영국으로 이주했음.
4) 고대 브리튼에 거주하던 켈트 종족의 하나.
5) 고대 지명으로, 기원전 10세기경 이래 켈트족이 거주했던 서유럽 지역의 총칭.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및 독일, 스위 스, 네덜란드의 일부를 포함함.
6) 동부 웨일즈 연안의 주(주)인 몬머스셔의 주도(주도).
7) 북부 웨일즈의 플린쳐주에 있는, 주교의 법좌(법좌)가 있는 촌락.
8) 프랑스 동북쪽 마렌느 지방의 한 도시.
9) 노르만 정복 후 영국 노르만 계통인이 사용한 프랑스어로, 후에 영국 법정(법정) 용어로 사용됨.
영웅주의와 기사도
기사도적 이상이 간절히 추구된 곳에서는 어디나 이 이상이 내포하고 있는 금욕적인 요소가 대단히 중요성을 띱니다. 따라서 십자군 시대에는 이 이상은 수도원적 열망과 결합되면서 템플 기사단(TempleKnight)과 같은 군대와 종교적인 것이 결합한 기사단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편력기사란 가난해야 하고 현세적 관계들을 끊어야 합니다. 이같이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고결한 전사의 이상이야말로 "비록 현실적으로는 아니라 해도 감정적으로나마 여전히 삶의 전사적(전사적)이고 귀족적인 개념을 지배하고 있다."고 윌리엄 제임스(Willam James)는 말합니다.
"기사에게서야말로 우리는 모든 질곡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상을 보며 그를 찬미하게 된다.자기 생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으며 필요하다면 언제고 생명을 내걸 각오가 되어있는 그는 이성적인 방향으로 향한 완전한 자유의 대표자이다." 따라서 기사도젓인 이상과 동정(동정)이나 충성,정의 같은 윤리적인 요소와의 관계가 인위적이고 피상적이라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기사도를 삶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까지 격상 시킨 것 은 기사도가 뿌리내리고 있는 그런 윤리들이 아니라 다름아니 '사랑' 이었습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요소가 이 열망들의 총체에 삶의 열기를 준 것이죠.
기사도적 이상의 특징인 금욕주의와 용감한 희생정신 등은 하나의 에로틱한 기반을 갖습니다. 그것들은 그 속에 억제된 욕망들이 윤리적인 변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에다 형식과 양식을 부여하려는 욕구는 단순히 문학이나 조형예술 등에서만 만족되는 것이 아니며 삶 자체-사교,대화,스포츠 등-에서도 충족되어야 함을 우리는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사랑은 거기서도 그 숭고하고 로맨스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것입니다.문학과 삶 자체의 상호관계에서와 같이 결국 사랑의 기사도적 성격은 문학에서 태어난것이 아니라 삶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기사도적 테마와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라는 테마를 제공한것도 역시 삶의 실제적인 관계들인 것입니다.기사와 귀부인, 사랑에 의한 영웅주의, 이는 어디서나 나타나는 소설의 모티브입니다.그것은 관능적 욕망이 자기희생으로 변하는 즉각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개인의 전적인 포기는 가장 사랑하는 부인에게 자기 용기를 과시하려는 의지, 즉 위험을 무릅쓰고 고통을 견디며 강인해 보이려는 청년기 특유의 열망으로부터 발로된 것입니다. 욕망의 표현과 충족은 모두 불가능한 듯이 보이지만 이는 보다 고양된 한가지 즉 사랑에 의해 시도된 영웅적 행동이라는 승화된 형태로 변모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죽음만이 유일하게 욕망 성취에의 양자택일적 대안이 되며 결국 어떤 식으로든 해방은 보장됩니다.
처녀 구출, 이것은 너무나 자주 반복되고 닳아빠져 가끔 버려지는 때도 있으나 또 다시 새로운 유형들-로맨스적 영화의 카우보이의 테마-을 만들어 내며 제차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세는 이처럼 청년기의 채울길 없는 욕망을 가지고 틀에 박힌 테마, 즉 사랑의 갈증을 표현하는 방식이 훨씬 더 세련되고 절제된, 더 정신적인, 그러나 그만큼 더 암시적인 형테를 만들어 냈으나 로맨스라는 장르는 무한정 새롭고 언제나 똑같은 모험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로맨스는 그렇지만 언제나 우리로선 거의 이해하기 힘든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우리가 때늦은 기사도 로맨스들을 시대착오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기사도 시대가 훨씬 지난 16세기 후반-휴머니즘에 푹 잠겨있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에 그 시대의 이름난 현자들이 아마디스(Amadis) 로맨스들을 읽고 거의가 "현기증을 일으킬 것만 같은 황홀한 기분" 이라고 서술 했다는걸 주목해야 합니다.이를 볼때 13세기 균형잃은 시대의 로맨스들이 얼마나 수용성이 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로맨스적 사랑의 형태는 문학 뿐 아니라 무대의 형태로도 나타납니다.이 유희는 크게 두가지,연극적 상연과 스포츠가 그것입니다.스포츠가 중세엔 더 중요합니다.드라마는 대체로 아직 성스러은 주제만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죠.그리서 드라마는 사랑의 모험을 극히 예외적인 요소로 보고 있지만 중세의 스포츠 특히 기마 시합은 그 자체로 고도의 드라마틱한 것이었고 강력한 에로티시즘을 포함하고 있습니다.스포츠는 이 두가지 요소를 항상 내포하기 마련이지만 현대의 스포츠는 거의 그리스적 단순함을 가지는 반면, 중세의 기마시합은 그 풍성한 장식과 연출로 드라마적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15세긴 귀족 사회의 지적,감정적 생활이 하나의 사회적 유희로 쇠퇴해 가는 몰락기 였습니다.사람들은 난폭하고 잔인하며 냉혹한 현실을 기사도적 이상의 꿈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거대한 기만이며 약간의 빈정거림으로서만이 완화될 수 있는 일종의 속임수인 란슬로트의 가면을 씁니다.결국 15세기의 전기사도 문화는 감수성과 빈정거림간의 위험한 줄타기 무대였습니다.명예,충성심,사랑 등의 기사도적 덕목들은 가장 심각하게 취급되는 한편 또 그 엄격한 위엄은 종종 웃음으로 느슨해 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그러나 그중에서 의식적인 패러디가 가장 우세했던 곳은 이탈리아 뿐이었고 곧 이러한 기사도적 감수성은 그 고유 영역을 되찾아 심각함과 웃음을 넘어서 그 감수성이 가장 고전적인 표현을 발견하는 명정의 범주로 고양됩니다.
1400년경의 프랑스에서도 기사도적 이상의 진지성은 확인됩니다."모든 것이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을 위해 바쳐졌고 모든 것이 그것을 찬미하는 데 바쳐졌다.그의 사랑하는 귀부인 앞에서 만은 그의 말씨는 우아했고 예의발랐으며 조심스러웠다."라는 부시코(프랑스의 문학가이자 기사.1400년경 궁정 사회를 열광케 했던 진정한 사랑과 경박한 연애간의 문학적 논쟁을 주도함)의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치정적인 내용이 빠져버린 모든 로맨스적인 형태들이 다 그렇듯이 궁정식 사랑은 매우 우스꽝스럽게 보이죠.정교하게 다듬은 시행들과 화려한 기마 시합이 표현하던 그 정열은 안타깝게도 이미 꺼져버렸습니다.그것은 이제 몇몇 천재의 희귀한 작품들 속에서밖에는 살아 남아 있지 않습니다.하지만 예술 작품으로서는 열등한 이 모든 작품들은 삶의 치장과 감정의 표현이라는 면에서는 크나큰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수세기 이래 꺼져버린 기마 시합에서 묘사되는 기사들의 갈매기형의 눈썹과 좁은 이마 밑에소 번득이는 눈빛들은 훨씬 뒤까지 살아 남아 폐허처럼 쌓인 모든 문학 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오늘날 우리들로 하여금 이 사회적 형식들의 치정적(치정적) 의미를 간파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이 우연한 섬광입니다. 다음은 [에롱의 맹세 Le Vceu du Heron] 에서 쟝 드 보몽이 전투에 임하는 기사도적 맹세를 요청받고서 어떻게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막에서 우리가 독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가녀린 숙녀들이 우릴 쳐다보며 지나가네. 새하얀 목덜미에 꽉죄인 등옷을 입고 그네들의 다채로운 눈빛은 미소띠며 아름답게 빛나누나. 하여 본능은 우리에게 욕망으로 타는 가슴을 갖게 하네. 그 때 우리는 요몽(Yaumont)과 아굴랑(Agoulant)을 정복하고 또 다른 이 들은 올리비에(Olivier)와 롤랑(Rolland)을 정복하리.
그러나 우리가 전장에서 달리는 군마 위에 앉아 있을 때 방패를 목에 걸 고 창을 아래로 내려뜨린 채 매서운 추위가 우릴 온통 얼어붙게 하고 사지는 힘이 없어 무너질 듯하고 힘없이 앞뒤를 흔들거릴 때 그리고 적 들이 우리를 향해 일찌기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큰 방안에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리. 그리고 "오호라 샤를르 르 테메레르 진영에서는 전투,해산, 돌격,창겨누기 따위를 누가 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보살펴주고 우 리에게 잘하라고 격려 해주는 여자들이 있기 대문인데! 라고 필립 드 크르와는 말했습니다.
기마시합의 에로틱한 요소는 기사가 사모하는 부인의 베일이나 옷을 걸치고 나오는 습관 속에서 분명히 드러 납니다.('차원기사 '라는 작품속에서도 주인공이 자기의 사모하는 여인의 소매를 지니고 다닙니다) 시합의 열기 속에서 여자들은 몸에 걸친 장신구들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마침내 경기가 끝나면 그녀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팔과 어깨마저 소매없이 맨살을 드러냅니다.
이는 13세기 후반기의 '세기사와 셔츠'라는 글에서 강렬한 방식으로 표현 되었습니다.고귀한 관용으로 가득찬 그러나 싸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가진 한 부인이 자기를 사모하는 세 기사들에게 셔츠-Chinese 속옷의 일종-를 보냅니다. 그들에게 자기의 셔츠를 흉갑도 입지 않고 그 셔츠만을 입고 다음번 자기의 남편이 주최하는 기마 시합에 참석하라고 말합니다.처음의 두 기사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만 가련한 세번째의 기사만은 그 셔츠를 끌어안고 열렬히 애무한 뒤 그 기마 시합에 그 셔츠를 입고 출전 합니다.그는 크게 다치고 셔츠는 찢어져 피로 물들지만 그의 용맹은 상을 받고, 그는 부인에게 한가지 보상을 요구합니다.
즉 그는 그녀에게 그 피로 얼룩진 옷을 돌려 보내며 그녀로 하여금 기마 시합의 폐회 축하연 동안 그것을 옷위에 걸쳐 입고 있으라고 요합니다.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옷위에 부드럽게 키스하고 그것을 걸쳐 입습니다. 대부분의 참서자들이 그녀를 비난하고 남편은 당황해 수치를 느낍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시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죠:
"이 두연인 중 누가 더 상대를 위해 큰 희생을 치루었는가?"
기마시합을 둘러싼 이 격정적인 분위기는 교회가 이 스포츠를 꺼린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이 경기는 역사가 증명하듯이 가끔씩 명백한 간통 사건을 유발 시켰습니다.교회의 사법권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마 시합을 금하고 있었습니다.처음엔 전투 훈련을 위해 실시되던 기마 시합은 그 과도함과 남용때문에 모랄리스트들과 위마니스트들의 도마에 올려지기 일쑤였습니다.중세기의 기마 시합과 마상경기들은 그리스나 현대의 스포츠들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귀족적 오만과 사랑 그리고 예술 등이 그 시합들에 짜릿한 묘미를 부여합니다. 과도한 장식과 호사로 둘러싸인,그리고 영웅적 환상들로 가득찬 기마 시합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공연이며 갈망과 꿈들의 실현이죠. 군대 생활과 궁정 생활은 영웅주의적 사랑의 감정들에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햇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그러한 영웅주의로 부풀어 오르고,그것을 살아 보고자 했기 때문에 호사스런 마상시합을 통해 스스로 보다 아름다운 삶을 창조해 내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그 속에 내재된 피튀기는 난폭성을 요구한 것은 이른바 에로틱한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기마 시합은 그것을 고무시키는 모티브들로 보아 옛 힌두 서사시에 아오는 전투인 '마하바라타'와 여성을 위한 싸움이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기마시합의 연출은 원탁기사의 로망의 연출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요정 이야기식의 유아적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거인과 난장이들을 만나는 허구적인 모험이 거기서는 궁정식 사랑의 감상주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15세기의 기마 시합은 상상적이고 로맨스적인 모험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배경도 '퐁텐 데 플레르(눈물의 샘)'이니 '샤를르마뉴의 나무'니 하는 감동적인 이름을 갖지요. 샘은 그러한 효과를 위해 구상됩니다.
초상화를 보면 샘터앞에는 정자가 있고, 거기에는 일년 내내 한 귀부인이 앉아 방패 셋을 든 유니콘 한마리를 붙들고 잇습니다.매달 초하룻날이면 무명위 기사 하나가 그 방패를 만지러 올 것이고 방패를 만진 기사는 모두 기마 시합의 '조항들'에 명시된 조건 속에서 격투에 참가 해야 할 것입니다.후우~ 이로써 중세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중에 하나인 기사도 정신의 배경과 거기에 따른 부인 숭배,그리고 그것의 한 형태인 기마(마상) 시합에 관한 글이 일단락 되는군요.
-네이버 지식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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