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탕은 우릴 보는 거 같네.
-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는 뜬금없는 한숨 섞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내 앞에 턱을 괸 채 창밖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 뜬 구름 잡는 이야기 같겠지. 뜬금없을 거란 것도 알아. 근데 설탕은 참 우릴 닮은 거 같아. 설탕 각자 하나하나의 알갱이들이 나를, 너를, 그리고 저기서 졸고 있는 카페 사장님을 닮아있어.
- 알 수가 없네.
그녀는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깊어보였다. 나무껍질 같은 눈동자에는 빗물이 아롱아롱 맺히고 있는 창문이 비쳤다. 두 번째 한숨을 쉬며 그녀는 계속 커피 잔을 휘젓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곤 설탕 종지를 집어 들었다.
- 잘 봐. 이 설탕이 우리야. 우리의 인생이야. 우리는 이렇게 종지 속에 있을 땐 함께야. 마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우리나라만 이상하게도 의무적인 대학교까지도 말야. 모두가 비슷하고. 그래, 물론 차이는 있을 수 있어. 조금 크고 작고 같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이렇게 멀리서 모아놓고 한 군데 담아 놓으면 그런 차이는 희미해져. 결국 다 같아 보이는 거지.
- 그래서? 설탕이 우리란 건 잘 이해했어. 그런데 아직 이해는 잘 안되네.
-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야지. 설탕은 이 종지 속에서 기다리며 언젠가 밖으로 나갈 날을 기다리겠지. 어떤 요리를 달콤하게 해주기 위해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렇지?
- 그렇겠지. 설탕은 그렇게 쓰려고 만들어졌으니까.
- 그 말인 즉 설탕은 아주 옛날 어떤 사람이 사탕수수에서 정제해냈을 때부터 이미 자신의 역할이 정해져있단 말이지? 아직 까지도 설탕의 용도는 전혀 변화하지 않았고.
- 궤변인데. 말이 앞뒤가 안 맞아. 차별이 없다는 것과 용도가 변하지 않았단 건 무슨 말이야? 전혀 상관이 없잖아.
- 아니야. 이야기는 여기서부터야. 너 내 말 그렇게 툭툭 끊는 거 좀 고쳐. 여튼 이건 다음에 이야기하고, 내가 이 설탕을 커피 속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
- 녹겠지.
- 그리고?
- 아마 커피 성분이 조금 들어간 설탕물이 되겠지.
- 맞아.
그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설탕을 한 스푼 듬뿍 들어 올려 커피로 가져갔다.
- 이렇게 넣으면 설탕이 녹고 커피는 달콤해질 거야.
하얀색 알갱이는 커피 속에서 투명한 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사라져갔다. 달겠군, 그리고 단 걸 싫어하는 그녀는 또 나에게 이 갈색 설탕물을 대신 마셔달라고 넘기겠지.
- 그래, 그건 나도 잘 알아. 네가 이제 그걸 마시지 않을 거란 것도 잘 알지.
그녀는 한차례 꺄르르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물론 커피 잔을 날 향해 쭉 밀면서 말이다.
- 맞아. 이건 정답 경품. 그럼 다시 이야기를 이어갈게. 설탕은 조그맣든 크든 각자 개성이 있어. 하지만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저 작은 설탕 알갱이들일 뿐이지. 그 설탕 알갱이에 어떤 역사가 있는지 어떻게 생겼건 간에 말이야. 그렇지? 그리고 그 설탕을 사용하려는 사람에 의해 뜨여지고, 그리고 무언가 속으로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 각자의 형태를 잃게 된단 말이네.
- 맞아. 예를 들어 이 커피 속에서 설탕은 이제 각자가 아니게 되는 거야. 너는 내가 되고, 나는 네가 되고. 그렇게 우리의 입장에선 설탕은 이제 설탕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거지.
- 좋아. 거기까진 알겠어. 고등학생때 화학을 배웠으니까. 그런데 그거랑 우리랑은 무슨 상관이야? 설탕에 관련된 철학은 저번 학기에 교양으로 들어본 철학수업에서도 전혀 언급된 적이 없는 데 말이지.
- 내가 저번 주 그 사건 때 너한테 멍청하다고 했던 말 기억나? 오늘 다시 할게. 넌 아무래도 멍청한 거 같아. 아니면 상상력이 부족하거나. 꼭 설명해줘야 알겠어?
- 그땐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원래 알고 있던 거라고 했잖아. 여튼 관두고, 네 설명이나 계속 해줘. 네가 무슨 생각을 했는 지 끝까지 들어봐야겠어.
- 또 변명. 알았어. 일단 설명을 해줄게. 아까 말했지. 설탕은 우리야. 개성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지만 사회가 우릴 바라보기에는 그냥 학생 1, 학생 2 이상으론 인식되어지지 않아. 심지어 성인이 되면 바코드처럼 개성과는 관련 없는 주민등록번호란 것도 주어지지. 그렇게 철저히 내 개성과 취미와 성격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세상으로 내던져지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섞여 결국 그런 나의 것들을 잃어버리고 정말 어른 1로 변해버리는 거야. 왜냐? 살아남기 위해서이지. 개성은 사라지고, 남는 것은 사회생활이라는 변명을 뒤집어 쓴 획일화일 뿐이야. 다들 서로를 닮아가고, 그렇게 녹아서 나라는 사람은 희미해지게 되는 거야. 어때, 닮았지?
아마 내 감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넌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겠지? 난 설탕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 이게 바로 너와 나의 차이란 거지. 난 생각을 해서 고안을 하는 사람이고 넌 결국 사용만 할 줄 아는 사람이란 거지.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나는 내 생각을 말하기로 했다.
- 상념이 많네. 항상 뭔가를 바라보면 그런 생각을 했던 거야? 의외로 놀라운 면이 있네. 네 말이 맞아. 확실히 우리는 설탕을 닮아있어.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그녀는 자신이 바랐던 답이 나오지 않자 약간 샐쭉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팔짱을 끼며 날 지긋이 보았다. 아마 저건 계속하라는 의사표현이겠지. 난 설탕을 한 스푼 떠서 내 커피에 넣으며 이어갔다.
- 맞아. 서로가 서로를 닮아서 나라는 경계가 희미하게 흩어져간다는 것은 슬픈 거야. 하지만 과연 그럴까? 꼭 그걸 슬픈 것일까? 물론 나라는 정체성을 삶 속에서 잃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야. 하지만 내가 나를 잃어감으로써 또 다른 무언가를 얻지.
- 무언가를 얻는다? 그냥 녹아갈 뿐인 설탕에 무슨?
- 여기는 밖이라 보여주긴 좀 그렇지만, 만약 내가 이 커피를 계속 끓인다면 마지막엔 뭐가 남지?
- 설탕이랑 커피가 섞인 덩어리겠지.
- 그래. 우리는 우리를 이어갈 사람을 낳게 되는 게 아닐까. 설탕은 녹아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사회 속에서 스스로를 잃었지만 그렇게 떠돌다 언젠간 자신과 닮은 설탕을 만들게 되는 거지. 또 설탕 알갱이 이던 시절도 있었으니 자신만의 삶을 어느 정도 즐겼던 시간도 있었을 거잖아. 꼭 그걸 그렇게 슬퍼할 필요까진 없지.
- 억지논리네. 커피를 끓이지 않으면 설탕 덩어리도 남지 않아. 외부의 요건이 개입해선 안되지.
- 아니야. 내가 커피를 끓인 단 건 단순히 외부요건을 가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어. 시간의 가속을 이야기하는 거 였지. 그럼 외부의 요건이 전혀 없이. 내가 이 커피를 뙤약볕에 몇 일간 놔둔다면? 똑같은 결과겠지. 시간이야. 우리의 삶에는 시간이란 요소도 포함되어있어. 흩어졌던 우리를 모아놓는 것도. 사라진 나를 다시 만드는 것도 시간이 할 일 이란 말이지. 슬프게도 나라는 것으로는 돌아오진 않겠지만 다른 형태를 가진 무언가가 되어 내 뒤를 이을거란 말이지.
- 희망적이네. 실용적이고. 역시 쓸 줄 밖에 모르는 녀석의 생각다워.
- 고마워. 그리고 하나만 덧붙이자면, 설탕은 한 가지 용도로만 태어나진 않아. 그리고 설탕이 태어날 땐 그 용도로만 태어나진 않는 거지. 네가 말한 달게 해주는 용도 뿐 이라는 건 결국 인간의 죽음을 뜻하는 말이라 생각해. 달게 해주기 위해 태어났다. 죽기 위해 태어났다. 이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땅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운명이지. 하지만 설탕은 이렇게 커피에 넣을 수도 있고, 수박화채에도, 다른 요리에도, 아주 많은 용도로 쓰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죽기 위해 태어났지만 그 각자의 삶의 방식은 다를 거라 생각해. 그렇게까지 비관적인 슬픔은 아니라는 거지.
- 그래. 무승부로 하자. 네 말도 맞다고 인정해줄게.
- 좋아. 근데 우리 이렇게 느긋하게 있어도 괜찮아? 이제 슬슬 해가 지려고 하는 데,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
- 맞네. 해가 지기 전에 비가 그쳐줬음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밤이 되니 더 심해지고 말이야. 일단 나가자, 몇 일간 준비했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나는 내 앞에 놓인 두 잔의 커피를 연거푸 들이키곤 일어났다. 혓바닥을 감싸는 달콤함과 씁쓸함은 각자의 개성을 더욱 진하게 드러내며 내 얼굴을 더욱 찡그리게 했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살포시 웃더니 카페의 문을 밀며 나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 가자. 오늘은 축축하고 습한 게 아리따운 나에겐 최악의 날이지만, 너 같은 우락부락한 쓸 줄만 아는 바보한테는 상관없겠지? 오늘은 네가 좀 더 힘써줘야겠어.
아무래도 오늘 토론의 무승부로 토라진 모양이다. 그녀와 같은 족속들은 이래서 좋아지지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동업을 하기로 한 이상 착실히 돈은 벌어야하니 별수 없다. 나는 그녀가 반쯤 밀며 연 문을 대신 열고 앞서 나가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좋아. 가자, 마법사 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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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커피마시다가 쓰던 건데 이게 왜 어느샌가 환상 소설이 되었을까요. 누가 알까요. 허허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