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르르르…….
커다란 바위들이 산비탈을 구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쾅!
지름이 수백 미터는 될 법한 탄탄한 북을 두드리는 소리 같은 천둥이 공기를 흔드는 것 같다. 주변은 온통 하늘을 덮은 먹구름과 비슷한 회색이었다.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리게 보이긴 했으나 아직 밤은 아닐 것이다.
간혹 가다가 눈을 멀게 만들 것 같은 번개도 쳤고 비도 내렸다. 내리는 비의 양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강한 바람 때문에 빗방울은 바늘처럼 피부 위로 떨어져 내렸다. 때문에 소녀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서야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키나 체격이 아직 작은 걸로 봐서 아직 10대 중반 정도 인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도 본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검댕이 묻고 해져 있었다.
회색 톤이 있는 어두운 모래 색 머리에 같은 색의 눈동자에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말도 안돼!’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세찬 바람 때문에 입을 벌리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기에 소녀의 절망적인 외침은 그녀의 가슴 속에만 머물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말도 안돼!’
그러나 입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녀는 한 해안가의 만(灣)에 서있었다. 수 만 명이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을 만한 넓이의 모래 사장과 평소라면 수 많은 이들이 서서 낚시를 즐길만한 돌로 이루어진 곳이었지만 지금은 폭풍 때문에 서있기도 두려운 곳이 되어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느긋하게 발이라도 담그고 싶을 청록색을 자랑하는 바다지만, 지금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한 마리의 야수처럼 울어대고 있었다. 아마 발가락이라도 담갔다가는 한 치의 자비심도 없는 발톱이 군청색 뱃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소녀는 서있었다. 경악과 놀람, 원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이었는데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그것이 보인다.
그 시선이 던져진 곳,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평선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그 위치에는 거대한 탑이 있었다.
소녀가 서있는 곳에서 약 2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해상 위, 폭이 수 백 미터는 될 법하고 꼭대기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 높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마치 그녀가 느끼는 절망처럼 어두운 그림자로 뒤 덮인 탑이었다.
너무나 거대했기에 그녀와 탑 사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탑은 마치 그녀 앞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크기에 비해 밋밋한 외벽엔 창문 하나 없었으며 한 점의 불빛 또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안가에 있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직장 때문에 바쁜 부모 때문에 언제나처럼 간단한 요기거리를 억지로 먹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며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바다가 요동치더니 그것은 곧 거대한 충격파가 되어 해안가를 덮쳤다. 사람들과 자동차, 그리고 건물들이 종잇장처럼 날아다녔고, 곧이어 거대한 파도가 겨우 땅이 고정된 기기들을 붙잡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쓸어갔다.
그것을 반증하듯 해안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래사장에서 햇빛을 쬐던 수 십 명의 사람들과 모래사장을 경계로 서있던 가게들까지. 마치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 자체를 지우려 애쓴 듯 했다.
그녀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을 무작정 기뻐할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이 열렸다. 꺽꺽 거리는 소리를 좀 내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뚫고 그녀의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으아안 ㄷ……!”
하지만 그 소리는 강한 바람 때문에 몇 십 센티미터도 가지 못하고 허공에 먹혀버렸다. 아마 1 미터 앞에 서 있었어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아안, 드아아하난!”
물론 그녀도 대답을 기대하고 말한 것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때, 절대로 들릴 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던 소리가 대답처럼 들려왔다.
“어라? 살짝 늦어버렸네.”
20대의 여인의 목소리였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을 때쯤,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들렸다.
“얘, 어딜 보는 거니? 여기야. 여.기.”
왠지 모르게 핀잔을 주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소녀에겐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또한 그 목소리가 절대로, 절대로 들려올 일이 없는 5미터 위의 허공이었다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들자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색과 자주색이 섞인 것 같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적포도주와 같은 색의 긴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다음엔 소녀를 내려다보기 위해 팔을 턱에 괴고 옆으로 누운 듯한 방만한 자세를 하고 있는, 피곤한 듯하기도 하고 새침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마치 하나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흰 피부를 가진 그녀는 얼굴 근처에 쏟아진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 검지 손가락에 감으며 말했다.
“화장 좀 하고 온다는 게 살짝 늦어 버렸네. 얘,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소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대도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의상 물어보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여인은 대꾸를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바로 세우며 천천히 소녀에게로 내려왔다.
소녀의 시선은 점점 내려가고 여인의 시선은 점점 올라가다가, 이윽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인의 발이 땅에 닿자 소녀는 내심 놀랐다. 여인이 160 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신체 비율이 워낙 좋아서 멀리서 보기에 커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이기에 소녀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연령대 또한 불확실 했지만 아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라 지래 짐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키는 작았지만 가슴 골이 거의 다 드러날 정도로 파인 화려한 검은 미니 드레스를 입은 성숙한 몸은 절대로 10대로 착각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입가에 피어있는 약한 미소 역시 긴 연륜과 쌓이고 쌓인 경험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 같은, 비틀리고 회의적인 냉소였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한 소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세….?”
“뭐라고?”
여인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바람 때문에 소녀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여인의 말은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기에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구..요?”
역시 바람에 의해 목소리가 먹혀버리자 여인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아, 진짜! 약한 것들이란! 이 까짓 바람도 못 이기는 존재란 말이야?”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나오자 놀라서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여인은 거침이 없었다.
“이런 거에나 놀라고. 쯧쯔. 앞으로의 생활이 뻔하다, 뻔해.”
혀를 몇 번 차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여인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살짝 짜증이 나는 것 같다. 소녀도 그리 당하고만 살 수 있는 성격은 아닌 듯,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 그러세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대를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데요?”
“나? 널 택한 몸. 앞으로는 간단하게 스승님이라 부르거라. 아가야. 너 같은 아이를 받아주는 일은 몇 주 전 같았으면 생각도 하기 전에 헛구역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말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소녀가 살던 나라의 여왕을 보는 것 같았다. 때문에 소녀는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불쾌한 감정을 굳이 숨기려 애쓰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아니, 그쪽이 누구신데 그렇게 말씀하세요? 좀 더 친절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건가요? 사람이 예의는 지킬 줄 알아야죠. 또, 어째서 그쪽이 저를 거둔다고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네요? 전 부모님이 있……”
하지만 소녀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여인이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키며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듯한 말투로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나도 너 같은 여자아이 대신 좀 갖고 놀만한 반반한 남자애를 택하고 싶었거든? 근데 그 짜증나는 년이 먼저 여자애를 골랐지 뭐야? 그것도 예쁘장하게 생긴 애로. 내가 질 수야 있나? 나도 여자애 하나 골라서 나중에 본 때를 보여줄 겸해서 너를 택한 거야. 알았어? 그 속이 시커먼 지지배 때문에 말이지! 평소 같으면 너 같은 애가 나자빠지든지 내가 알게 뭐겠어?”
듣기에도 험한 말이었지만 소녀는 왠지 이 여인이 진심을 담아 말한 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화를 낼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대꾸할 말도 딱히 없었기에 가만히 멀뚱멀뚱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분에 못 이겨 발을 구르던 여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살짝 치며 물었다.
“근데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소녀는 자신이 아직까지 이름을 말한 적도 없고 원래 이런 것을 처음에 물어보는 것이 예의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왠지 그랬다간 더 험한 말을 들을 것 같아 애써 감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베리아. 푸른 종려나무 숲의 베리아에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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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축의 반을 썼네용
오늘은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부분입니다.
음
행복하세요
vincent
커다란 바위들이 산비탈을 구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쾅!
지름이 수백 미터는 될 법한 탄탄한 북을 두드리는 소리 같은 천둥이 공기를 흔드는 것 같다. 주변은 온통 하늘을 덮은 먹구름과 비슷한 회색이었다. 모래바람이 휘몰아 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흐리게 보이긴 했으나 아직 밤은 아닐 것이다.
간혹 가다가 눈을 멀게 만들 것 같은 번개도 쳤고 비도 내렸다. 내리는 비의 양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강한 바람 때문에 빗방울은 바늘처럼 피부 위로 떨어져 내렸다. 때문에 소녀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서야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키나 체격이 아직 작은 걸로 봐서 아직 10대 중반 정도 인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도 본래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검댕이 묻고 해져 있었다.
회색 톤이 있는 어두운 모래 색 머리에 같은 색의 눈동자에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물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말도 안돼!’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세찬 바람 때문에 입을 벌리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기에 소녀의 절망적인 외침은 그녀의 가슴 속에만 머물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말도 안돼!’
그러나 입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 소리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녀는 한 해안가의 만(灣)에 서있었다. 수 만 명이 해수욕을 즐길 수도 있을 만한 넓이의 모래 사장과 평소라면 수 많은 이들이 서서 낚시를 즐길만한 돌로 이루어진 곳이었지만 지금은 폭풍 때문에 서있기도 두려운 곳이 되어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느긋하게 발이라도 담그고 싶을 청록색을 자랑하는 바다지만, 지금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한 마리의 야수처럼 울어대고 있었다. 아마 발가락이라도 담갔다가는 한 치의 자비심도 없는 발톱이 군청색 뱃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소녀는 서있었다. 경악과 놀람, 원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을 뿐이었는데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그것이 보인다.
그 시선이 던져진 곳,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평선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그 위치에는 거대한 탑이 있었다.
소녀가 서있는 곳에서 약 2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해상 위, 폭이 수 백 미터는 될 법하고 꼭대기는 구름을 뚫고 올라가 높이를 가늠할 수도 없는, 마치 그녀가 느끼는 절망처럼 어두운 그림자로 뒤 덮인 탑이었다.
너무나 거대했기에 그녀와 탑 사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탑은 마치 그녀 앞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어쩌면 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크기에 비해 밋밋한 외벽엔 창문 하나 없었으며 한 점의 불빛 또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녀는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해안가에 있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직장 때문에 바쁜 부모 때문에 언제나처럼 간단한 요기거리를 억지로 먹고 있을 때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며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바다가 요동치더니 그것은 곧 거대한 충격파가 되어 해안가를 덮쳤다. 사람들과 자동차, 그리고 건물들이 종잇장처럼 날아다녔고, 곧이어 거대한 파도가 겨우 땅이 고정된 기기들을 붙잡고 살아남은 사람들을 쓸어갔다.
그것을 반증하듯 해안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모래사장에서 햇빛을 쬐던 수 십 명의 사람들과 모래사장을 경계로 서있던 가게들까지. 마치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 자체를 지우려 애쓴 듯 했다.
그녀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것을 무작정 기뻐할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입이 열렸다. 꺽꺽 거리는 소리를 좀 내다가, 갑자기 비바람을 뚫고 그녀의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으아안 ㄷ……!”
하지만 그 소리는 강한 바람 때문에 몇 십 센티미터도 가지 못하고 허공에 먹혀버렸다. 아마 1 미터 앞에 서 있었어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아안, 드아아하난!”
물론 그녀도 대답을 기대하고 말한 것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때, 절대로 들릴 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던 소리가 대답처럼 들려왔다.
“어라? 살짝 늦어버렸네.”
20대의 여인의 목소리였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좌우를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싶을 때쯤, 그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들렸다.
“얘, 어딜 보는 거니? 여기야. 여.기.”
왠지 모르게 핀잔을 주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소녀에겐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또한 그 목소리가 절대로, 절대로 들려올 일이 없는 5미터 위의 허공이었다는 사실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들자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색과 자주색이 섞인 것 같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적포도주와 같은 색의 긴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다음엔 소녀를 내려다보기 위해 팔을 턱에 괴고 옆으로 누운 듯한 방만한 자세를 하고 있는, 피곤한 듯하기도 하고 새침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마치 하나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인간의 것이 아닌 것처럼 흰 피부를 가진 그녀는 얼굴 근처에 쏟아진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 검지 손가락에 감으며 말했다.
“화장 좀 하고 온다는 게 살짝 늦어 버렸네. 얘,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소녀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상대도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의상 물어보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여인은 대꾸를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몸을 바로 세우며 천천히 소녀에게로 내려왔다.
소녀의 시선은 점점 내려가고 여인의 시선은 점점 올라가다가, 이윽고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여인의 발이 땅에 닿자 소녀는 내심 놀랐다. 여인이 160 센티미터를 간신히 넘는 자신과 눈높이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신체 비율이 워낙 좋아서 멀리서 보기에 커 보였던 것 같다. 물론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이기에 소녀는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연령대 또한 불확실 했지만 아마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것이라 지래 짐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키는 작았지만 가슴 골이 거의 다 드러날 정도로 파인 화려한 검은 미니 드레스를 입은 성숙한 몸은 절대로 10대로 착각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입가에 피어있는 약한 미소 역시 긴 연륜과 쌓이고 쌓인 경험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진 것 같은, 비틀리고 회의적인 냉소였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실례라고 생각한 소녀가 간신히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세….?”
“뭐라고?”
여인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바람 때문에 소녀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여인의 말은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기에 소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구..요?”
역시 바람에 의해 목소리가 먹혀버리자 여인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아, 진짜! 약한 것들이란! 이 까짓 바람도 못 이기는 존재란 말이야?”
“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나오자 놀라서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여인은 거침이 없었다.
“이런 거에나 놀라고. 쯧쯔. 앞으로의 생활이 뻔하다, 뻔해.”
혀를 몇 번 차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여인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살짝 짜증이 나는 것 같다. 소녀도 그리 당하고만 살 수 있는 성격은 아닌 듯, 자신도 모르게 양손을 허리에 얹고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그러는 그쪽은 누구신데 그러세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하대를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 데요?”
“나? 널 택한 몸. 앞으로는 간단하게 스승님이라 부르거라. 아가야. 너 같은 아이를 받아주는 일은 몇 주 전 같았으면 생각도 하기 전에 헛구역질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고개를 쳐들고 오만하게 말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소녀가 살던 나라의 여왕을 보는 것 같았다. 때문에 소녀는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하는 불쾌한 감정을 굳이 숨기려 애쓰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아니, 그쪽이 누구신데 그렇게 말씀하세요? 좀 더 친절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건가요? 사람이 예의는 지킬 줄 알아야죠. 또, 어째서 그쪽이 저를 거둔다고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네요? 전 부모님이 있……”
하지만 소녀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는데, 다름이 아니라 여인이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리키며 짜증이 머리끝까지 오른 듯한 말투로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나도 너 같은 여자아이 대신 좀 갖고 놀만한 반반한 남자애를 택하고 싶었거든? 근데 그 짜증나는 년이 먼저 여자애를 골랐지 뭐야? 그것도 예쁘장하게 생긴 애로. 내가 질 수야 있나? 나도 여자애 하나 골라서 나중에 본 때를 보여줄 겸해서 너를 택한 거야. 알았어? 그 속이 시커먼 지지배 때문에 말이지! 평소 같으면 너 같은 애가 나자빠지든지 내가 알게 뭐겠어?”
듣기에도 험한 말이었지만 소녀는 왠지 이 여인이 진심을 담아 말한 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화를 낼 법도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대꾸할 말도 딱히 없었기에 가만히 멀뚱멀뚱 서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분에 못 이겨 발을 구르던 여인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살짝 치며 물었다.
“근데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소녀는 자신이 아직까지 이름을 말한 적도 없고 원래 이런 것을 처음에 물어보는 것이 예의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왠지 그랬다간 더 험한 말을 들을 것 같아 애써 감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베리아. 푸른 종려나무 숲의 베리아에요. 그러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
비축의 반을 썼네용
오늘은 글을 쓰면서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부분입니다.
음
행복하세요
vin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