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더 빠르게. 더욱 더 빠르게. 낮게, 낮게, 낮게. 그녀는 세월을 지나는 바람이다.
에리아의 육체는 지금 자신의 집에서 편하게 정좌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미 수십 광년을 날고 있었다.
우주는 어둡지 않다. 수많은 천체와 빛을 내는 별들, 행성, 그리고 그 사이를 바쁘게 노니는 혜성들과 이름없는 돌들. 생각하면 아득할 정도의, 그녀의 날개로는 영원히 날아도 닿지도 않을 거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정신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빠르게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빠르게. 더욱 더 빠르게. 그때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찾았다.
보기만 해도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별에서 세 번째 행성. 구름에 둘러싸여 있고 초록색과 푸른색, 그리고 갈색을 띤 전체적인 형상은 라쿤과 비슷하기도 했다. 물론 크기로서는 좀 작았지만. 그녀는 속도를 낮추며 바다 위의 한 지점을 향해 돌진했다.
잠깐의 강렬한 하강과 함께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면서,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그보다 더더욱 푸른 바다가 그녀의 눈 앞에 펼쳐졌다.
하얀 태양빛 아래 끼룩거리는 바다 새들과 즐거운 듯한 사람들의 웃음 소리. 흥분한 것 같은 목소리도 들려오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지르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기 힘든 소리도 들려온다. 수천에 가까운 인파가 몰린 부둣가는 인간들이 내뿜는 열기와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화덕과도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시작한다!”
그 외침이 신호라도 된 듯, 천지를 울리는 듯한 뱃고동 소리가 부둣가에 울려 퍼졌다.
부우우우우우우………
그러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며 소리쳤다.
“정말 세기의 거함이군요!”
“저건 웬만한 폭풍에도 끄덕 없을 거야! 아마 느끼지도 못할 걸?”
“건조하는데 엄청난 금액이 들었다지?”
“아, 나도 한 번 타봤으면!”
등등.
사람들의 말대로 장관이었다. 길이가 250미터, 폭이 25미터를 넘는 거대한 몸체는 3000명 정도의 승객은 가뿐히 태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 크기에 걸맞은 4개의 굴뚝에서는 석탄을 태우면서 나는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있었고, 그 아래 부분에는 구명보트를 점검하는 선원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창문과 갑판 등 배의 모든 부분은 조금 전 청소한 듯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작은 낚시 배라면 배를 띄우기를 심각하게 고려해볼 파도도 거함에겐 잔잔한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잘 가요! 가면 편지 띄워요!”
“선물 부탁해요!”
이미 탑승한 손님들은 부두에서 보내는 부러움의 시선을 우월감, 혹은 아쉬움의 눈빛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었고, 배 위에서는 선원들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손님들에게 음료 등을 서비스했다.
에리아는 생각했다.
장관이군.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여자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보인다.
수 천의 인파 중에서 오직 한 아이만이 그녀의 시선 안에서 움직인다. 열 두 세 살쯤 되었을까? 무릎을 덮는 반팔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단발 머리를 휘날리는 소녀. 왼손은 엄마인듯한 여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아빠인듯한 큰 키의 중절모를 눌러쓴 남자의 손을 잡고 탑승권을 체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소녀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초록색과 푸른색이 살짝 섞인 편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작은 손가방을 어깨에 매고 있었고, 남자는 깃을 새운 연갈색 양복과 색을 맞춘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세 장의 여권과 탑승권을 건네자 푸른색 제복을 입은 젊은 승무원이 확인하듯 물어봤다.
“마크 아이젠아워 씨와 에이코 아이젠아워 씨. 그리고 따님 성함은…….”
승무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여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권이 그가 모르는 것을 알려줄 리는 없었다. 대신 마크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아인(Ein) 아이젠아워요. 독일어로 하나란 뜻이지.”
그 말에 승무원은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이젠아워 씨. 즐거운 여행되시길 기원합니다.”
마크 역시 중절모를 살짝 누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일본에서도 이렇게 큰 배는 보지 못했죠?”
에이코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죠. 저도 일본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서 기억도 희미하지만 확실히 우리가 독일에서 탔던 배보다는 휠씬 크네요.”
약간의 액센트도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영국식 영어였다. 아마 동양인들 중에서 외국어를 이렇게 구사할 수 있는 이는 그리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남편은 독일 식 억양이 상당히 섞인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여인이라니까.’
마크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따르면 에이코는 천재에 가까운 여인이었다. 9세에 군수업자인 아버지를 따라 생면부지의 영국 땅에 온 에이코는 수많은 차별과 냉대 속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특히 수학과 언어 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는 10대 후반에 이미 여러 학교에서 선생으로 모셔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에이코 쪽에서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오직 아버지 사업을 다른 나라로 확장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그러던 차에 독일로 향하는 배에서 마크와 만난 것이다.
“그건 거의 유람선 아니었소? 그 배에서 당신이 나한테 토마토 소스를 엎었었지. 덕분에 바이어와의 회의를 거의 망쳤었다오.”
“어머, 그걸 빌미로 데이트를 신청했던 분이 누구였더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른 쪽 어깨로 늘어뜨린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한 번 쓰다듬었다. 아마도 딸에게 물려준 듯한 고운 흑발이었다. 마크는 당황해 하며 말했다.
“아니, 누차 말하지만 당시엔 정말 순수한 호의로……..”
두 사람의 사랑 싸움에 아인이 꺄르르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에리아는 아인의 전체적인 인상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술과 눈이 상대적으로 갸름한 것에 비해 아버지의 것은 큼직하고 선이 굵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 좋은 것 같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고 덩치 역시 웬만한 운동선수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아인은 어찌 보면 엄마를 닮아 가늘고 여린 것 같으면서도 아빠의 상쾌함을 물려받은, 그런 소녀였다.
그때 둘의 대화를 방해하듯 또 한 번의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탑승객의 출입이 끝난다는 외침과 함께 배와 부두를 잇는 다리들이 분리, 철수 되었고, 거인의 용트림과 비슷한 소리와 함께 쇠사슬에 매인 15톤에 육박하는 거대한 닻 두 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조타실에선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입고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는 선장이 선원들에게 이런 저런 명령을 내리며 불도 붙이지 않은 파이프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상이 없다는 외침이 들려오자 그가 힘차게 말했다.
“자, 그럼 즐거운 항해를 시작해 봅시다, 제군들!”
그 말에 승무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장이 자신 있게 외쳤다.
“출발!”
굴뚝 위를 뒤덮는 연기와 함성, 그리고 많은 아쉬움과 즐거움을 뒤로 한 체, 거함은 부두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치 결혼식을 끝마치고 퇴장하는 신부처럼,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
하루하루가 즐거운 여행길이 되길 :)
Vincent
에리아의 육체는 지금 자신의 집에서 편하게 정좌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미 수십 광년을 날고 있었다.
우주는 어둡지 않다. 수많은 천체와 빛을 내는 별들, 행성, 그리고 그 사이를 바쁘게 노니는 혜성들과 이름없는 돌들. 생각하면 아득할 정도의, 그녀의 날개로는 영원히 날아도 닿지도 않을 거리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정신은 그 어떤 것보다도 빠르게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빠르게. 더욱 더 빠르게. 그때 알 수 없는 어떤 느낌이 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찾았다.
보기만 해도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별에서 세 번째 행성. 구름에 둘러싸여 있고 초록색과 푸른색, 그리고 갈색을 띤 전체적인 형상은 라쿤과 비슷하기도 했다. 물론 크기로서는 좀 작았지만. 그녀는 속도를 낮추며 바다 위의 한 지점을 향해 돌진했다.
잠깐의 강렬한 하강과 함께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면서,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그보다 더더욱 푸른 바다가 그녀의 눈 앞에 펼쳐졌다.
하얀 태양빛 아래 끼룩거리는 바다 새들과 즐거운 듯한 사람들의 웃음 소리. 흥분한 것 같은 목소리도 들려오고 아이들이 뛰어다니면서 지르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기 힘든 소리도 들려온다. 수천에 가까운 인파가 몰린 부둣가는 인간들이 내뿜는 열기와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화덕과도 같았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시작한다!”
그 외침이 신호라도 된 듯, 천지를 울리는 듯한 뱃고동 소리가 부둣가에 울려 퍼졌다.
부우우우우우우………
그러자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며 소리쳤다.
“정말 세기의 거함이군요!”
“저건 웬만한 폭풍에도 끄덕 없을 거야! 아마 느끼지도 못할 걸?”
“건조하는데 엄청난 금액이 들었다지?”
“아, 나도 한 번 타봤으면!”
등등.
사람들의 말대로 장관이었다. 길이가 250미터, 폭이 25미터를 넘는 거대한 몸체는 3000명 정도의 승객은 가뿐히 태우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 크기에 걸맞은 4개의 굴뚝에서는 석탄을 태우면서 나는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있었고, 그 아래 부분에는 구명보트를 점검하는 선원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창문과 갑판 등 배의 모든 부분은 조금 전 청소한 듯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작은 낚시 배라면 배를 띄우기를 심각하게 고려해볼 파도도 거함에겐 잔잔한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잘 가요! 가면 편지 띄워요!”
“선물 부탁해요!”
이미 탑승한 손님들은 부두에서 보내는 부러움의 시선을 우월감, 혹은 아쉬움의 눈빛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었고, 배 위에서는 선원들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손님들에게 음료 등을 서비스했다.
에리아는 생각했다.
장관이군.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여자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보인다.
수 천의 인파 중에서 오직 한 아이만이 그녀의 시선 안에서 움직인다. 열 두 세 살쯤 되었을까? 무릎을 덮는 반팔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단발 머리를 휘날리는 소녀. 왼손은 엄마인듯한 여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아빠인듯한 큰 키의 중절모를 눌러쓴 남자의 손을 잡고 탑승권을 체크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소녀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초록색과 푸른색이 살짝 섞인 편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고 작은 손가방을 어깨에 매고 있었고, 남자는 깃을 새운 연갈색 양복과 색을 맞춘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의 차례가 되었다.
세 장의 여권과 탑승권을 건네자 푸른색 제복을 입은 젊은 승무원이 확인하듯 물어봤다.
“마크 아이젠아워 씨와 에이코 아이젠아워 씨. 그리고 따님 성함은…….”
승무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여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권이 그가 모르는 것을 알려줄 리는 없었다. 대신 마크가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아인(Ein) 아이젠아워요. 독일어로 하나란 뜻이지.”
그 말에 승무원은 부끄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이젠아워 씨. 즐거운 여행되시길 기원합니다.”
마크 역시 중절모를 살짝 누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는 그의 아내에게 말했다.
“일본에서도 이렇게 큰 배는 보지 못했죠?”
에이코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도 보지 못했죠. 저도 일본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서 기억도 희미하지만 확실히 우리가 독일에서 탔던 배보다는 휠씬 크네요.”
약간의 액센트도 찾아보기 힘든 훌륭한 영국식 영어였다. 아마 동양인들 중에서 외국어를 이렇게 구사할 수 있는 이는 그리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의 남편은 독일 식 억양이 상당히 섞인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여인이라니까.’
마크의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에 따르면 에이코는 천재에 가까운 여인이었다. 9세에 군수업자인 아버지를 따라 생면부지의 영국 땅에 온 에이코는 수많은 차별과 냉대 속에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다. 특히 수학과 언어 쪽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녀는 10대 후반에 이미 여러 학교에서 선생으로 모셔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에이코 쪽에서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오직 아버지 사업을 다른 나라로 확장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그러던 차에 독일로 향하는 배에서 마크와 만난 것이다.
“그건 거의 유람선 아니었소? 그 배에서 당신이 나한테 토마토 소스를 엎었었지. 덕분에 바이어와의 회의를 거의 망쳤었다오.”
“어머, 그걸 빌미로 데이트를 신청했던 분이 누구였더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오른 쪽 어깨로 늘어뜨린 부드러운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한 번 쓰다듬었다. 아마도 딸에게 물려준 듯한 고운 흑발이었다. 마크는 당황해 하며 말했다.
“아니, 누차 말하지만 당시엔 정말 순수한 호의로……..”
두 사람의 사랑 싸움에 아인이 꺄르르 웃었다. 그 웃음을 본 에리아는 아인의 전체적인 인상이 아버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입술과 눈이 상대적으로 갸름한 것에 비해 아버지의 것은 큼직하고 선이 굵었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 좋은 것 같은 미소를 띄우고 있었고 덩치 역시 웬만한 운동선수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아인은 어찌 보면 엄마를 닮아 가늘고 여린 것 같으면서도 아빠의 상쾌함을 물려받은, 그런 소녀였다.
그때 둘의 대화를 방해하듯 또 한 번의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탑승객의 출입이 끝난다는 외침과 함께 배와 부두를 잇는 다리들이 분리, 철수 되었고, 거인의 용트림과 비슷한 소리와 함께 쇠사슬에 매인 15톤에 육박하는 거대한 닻 두 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조타실에선 빳빳하게 다린 셔츠를 입고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는 선장이 선원들에게 이런 저런 명령을 내리며 불도 붙이지 않은 파이프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이상이 없다는 외침이 들려오자 그가 힘차게 말했다.
“자, 그럼 즐거운 항해를 시작해 봅시다, 제군들!”
그 말에 승무원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선장이 자신 있게 외쳤다.
“출발!”
굴뚝 위를 뒤덮는 연기와 함성, 그리고 많은 아쉬움과 즐거움을 뒤로 한 체, 거함은 부두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마치 결혼식을 끝마치고 퇴장하는 신부처럼, 화려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
하루하루가 즐거운 여행길이 되길 :)
Vinc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