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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3 21:45

아인 2-(2)

조회 수 1908 추천 수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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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이미 아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고, 점심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안개는 여전히 두껍게 자리잡고 있었고, 조금 전부터는 비도 몇 방울씩 풀잎을 때리고 있었다.

“편하게 있으렴.”

집 안은 따뜻했다. 집 안 한 쪽에 있는 벽난로에는 잘 마른 장작이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따뜻한 온기보다 소녀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준 것은 그 위의 철판에서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를 내면서 익고 있는 불고기였다. 소녀는 자신이 이렇게 배가 고파 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고기만 보고 있기도 좀 그런 것이 다른 한 편에선 집주인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좀 도와드리지 않아도 될까요?”

여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피곤할 텐데 쉬고 있어도 돼.”

실제로 자신을 에리아라고 소개한 여인은 그 옆의 솥에서 하얀 쌀밥을 주걱으로 접시에 소복이 담고 있었고, 소녀는 다른 한 쪽 구석에 마련된 방석 위에 앉아 따뜻한 레몬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에리아는 위에는 털로 짠 듯한 하얀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하의는 검은 색의 긴치마를 입고 있었다. 긴 치마이기는 했지만 워낙 딱 붙어서 그녀의 늘씬한 다리의 굴곡이 보이기엔 무리가 없었다. 때문에 소녀는 같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쪽으로 시선이 가는 자신을 통제하려 애써야 했다. 밥을 상 위에 얹은 에리아가 한 쪽 벽장에서 털실로 짠 갈색 스웨터를 꺼내주며 말했다.

“비가 올 것 같던데, 입고 있어. 감기 걸리겠다”

마침 몸의 온도가 상당히 내려간 상태였기에 소녀는 감사히 옷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껴입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겉과 비슷하게 집 내부는 상당히 고풍스러웠다. 벽난로를 중심으로 그 오른 쪽엔 큰 책장이 있었는데, 책의 표지의 크기와 색을 잘 배치시켜 놓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소녀의 뒤쪽, 그러니까 입구에서 오른 쪽 벽에는 문과 마찬가지로 장미나무로 만든 장식장이 있었다. 소녀의 목까지 올까 말까 한 높이의 장식장에는 장죽, 비녀, 만년필 등등이 놓여있었다. 하나같이 사치스럽다기 보다는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물건들이었다. 또한 아무런 일관성이 없는 물건들임에도 불구하고 배치한 위치나 각도는 거의 예술에 가까웠다. 소녀는 아까 자신이 내린 평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치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예술적 감각이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라고.

“넌 특이한 아이구나.”

에리아가 식탁 위에 반찬그릇과 수저를 놓으며 말하자 상념에 빠져있던 소녀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패닉 상태에 빠지거나 끊임없이 의심할 텐데 말이지.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건 옵션이고.”

이번에는 소고기와 갖가지 채소 반찬이 담긴 접시들이 상에 올랐다. 어린 배추, 아보카도, 토마토, 어린 시금치 등을 올리브 오일에 버무린 샐러드와 콩나물을 참기름에 무친 듯한 반찬은 보기만 해도 맛깔스러웠다. 음식들을 정신 없이 바라보며 소녀가 넋을 잃은 것처럼 대답했다.

“밥을 안 먹으면 더 패닉에 빠질 것 같아요.”

에리아가 마지막으로 불고기를 담은 접시를 상에 얹으며 말했다.

“그래.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들자.”

소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 그녀는 젓가락을 들며 씩씩하게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아!”

식사는 일방적이었다. 소녀의 젓가락이 춤을 추듯이 식탁 위를 날아다닌 반면에 에리아의 손길은 마치 새가 가지에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가벼웠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소녀가 물을 마시는 것에 반해 에리아는 얇은 목을 가진 뚱뚱한 병에 담긴 술을 반주로 조금씩 마셨다는 정도. 아침 이슬처럼 맑은 술의 싸함을 느끼며 에리아가 물었다.

“입에 맞아?”

소녀는 맑은 미소로 답했다.

“네!”
“다행이구나.”

다시 술잔.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소녀의 젓가락이 점점 느려지다가, 마침내 멈추었다.

“잘 먹었습니다아!”

배고픈 식기가 지나간 식탁 위는 더 먹으라는 말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아니,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

에리아는 그렇게 말하고는 빈 접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때 소녀가 말했다.

“에리아 씨,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니야, 괜찮아. 피곤할 텐데 좀 쉬려무나.”

소녀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설거지 정도는 저도 도울 수 있어요. 얻어먹었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도와 드리는 거라 생각해요.”

잠깐 생각하던 에리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그 친절, 고맙게 받도록 할게.”

안개가 걷히더니, 비가 온다.
방 안에서는 잘 안 보였지만, 벽난로와 책장들 사이에는 집의 뒤편으로 통하는 문이 하나 있었다. 야외이긴 했지만 네 개의 모서리 기둥 위에 나무판자로 지붕을 얹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설계된 곳이었다. 그리고 한 쪽 구석에는 돌로 만든 작은 우물이 있어 세면장과 설거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소녀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온천이네요?”

거대한 야외 온천이었다. 안개와 구분이 모호할 정도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온천의 가장자리는 검고 흰 무늬가 빼어난 수석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바닥엔 비슷한 색의, 그러나 크기는 거의 자갈만한 돌들이 빼곡하게 깔려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주변은 들꽃들과 난초가 자연스럽게 자라게 만든 작은 정원이었다. 소녀는 그 정원을 감상하느라 접시를 깨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고, 결국 에리아가 저녁 때 목욕을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을 하고서야 설거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설거지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소녀가 옮겨준 그릇을 부엌의 찬장에 넣고, 에리아는 찻물을 끓이겠다며 죽어가는 모닥불 위에 주전자를 얹었다. 에리아가 물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차가 있니?”

소녀가 헤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특별히 좋아하는 차는 없어요. 그냥 너무 쓰지만 않으면 되요.”

에리아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머금어졌다.

“좋아. 오늘 날씨에 어울리는 차를 내올게. 먼저 비보기나 하고 있으렴.”

소녀는 미닫이 문들을 활짝 열고 비보기를 했다. 방울방울 내리던 비가 어느새 허공에 수많은 줄을 그어놓고 있다. 안개는 그쳤지만 이젠 소낙비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상체를 두 팔로 지탱한 채로 양반다리를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에리아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쟁반 위에는 찻잎을 넣은 작은 주전자와 하얀 두 찻잔, 그리고 작은 모래시계가 있었다. 에리아는 모래시계에서 오래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 힐끗 보고는 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1분여가 지났을까, 그녀가 모래시계를 뒤집더니 차를 찻잔에 부었다. 쪼로록 하는 소리와 함께 적당히 우려낸 연갈색 찻물이
찻잔 안으로 떨어졌다.

“들렴.”

그리고 잠 시 후, 한 명은 양반다리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번은 양 다리를 한 쪽으로 가지런하게 모은 채로 민들레 향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소녀가 양반 다리를 풀고 맨발을 집 밖에 내놓았다. 길을 잃은 빗방울 몇이 그녀의 발끝에 떨어졌다.

“해가 뜨지 않을 건가 봐요.”

에리아가 차를 한 입 머금고는 대답했다.

“오늘은 그런가 보구나.”
“여기 날씨는 원래 이런가요?”
“날씨야 매일 다르지. 계절이 바뀌면서 날씨도 정형화 되는 것 같지만, 각 계절 속에서 날씨는 매일 달라. 기온이나 습도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침묵. 차를 홀짝이는 소리. 그리고 또 한 박자의 침묵이 흐른 뒤, 정적이 깨졌다.

“이상해요.”

조금 전까지 발가락까지만 젖어있던 그녀의 발은 이제 거의 발목까지 젖어있었다.

“뭐가 말이니?”

소녀가 차를 한 잔 마시며 말했다.

“조금 전에 제가 설거지를 도와드렸죠?”

에리아는 소녀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렇지.”

소녀 역시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말했다.

“전 설거지가 뭔지 몰라요.”

에리아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소녀가 말을 이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의 예상대로 소녀가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설명이 잘못 되었네요. 뭐랄까, 뭔지는 아는데 제가 어떻게 이걸 아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에리아를 돌아보았다. 에리아의 옆 얼굴은 아름다웠다. 화가가 가장 얇은 붓으로 세심한 터치를 한 것 같은 윤곽은 같은 여자가 봐도 우아했고 청초했다. 하지만 그녀는 소녀를 보지 않았다.

“전 온천이 뭔지는 알아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온천을 아는지는 몰라요.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언어를 경험에 의해서 깨달아요. 만약 어린 아이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물을 보면 엄마에게 묻겠죠. 엄마, 저건 뭐야? 누가 뜨거운 물을 부어놨어? 그럼 엄마가 대답해요. 저건 온천이라는 거야. 몸을 담그면 기분이 좋단다. 피부도 예뻐지고. 그렇죠? 그런데 전 이 상황에서 엄마라는 존재가 없어요. 정말 그냥 아는 거에요.”

그녀가 발을 끌어당겼다. 단단한 짚을 엮어 만든 장판 위에 물방울로 이루어진 길이 만들어졌다. 그녀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젓가락질을 배운 적도, 걷는 것을 배운 기억도 없어요. 만년필이 뭔지도, 담뱃대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없어요. 그런데 알아요.”

그녀의 말은 이젠 흡사 웅얼거림이 되었다.

“비가 뭔지도 모르는 데 비를 알아요. 비에 젖는 것이 싫은 것은 아는데 왜 싫은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전 누구죠?”

에리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질문했다.

“왜 그걸 나에게 묻지?”
“제 이름을 아시는 것 같아서요.”

찻잔을 들던 에리아의 손이 아주 살짝 멈췄다가 올라갔다. 들키지도 않을 만큼.

“난 너를 오늘 처음 봤어.”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요. 처음 봤죠. 하지만…….”

소녀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에리아 씨는 제 이름을 묻지 않았잖아요.”



흡사 저녁 노을이 장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밤이 오는 것처럼 다가오는 벚꽃 향기. 그 향기와 어울리는 두 여인이 노을을 받고 있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에리아는 마치 해보기를 하는 듯 노을을 보며 곰방대를 빨고 있었지만 소녀는 웅크리고 누워있다는 것의 차이일 뿐. 에리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로 소녀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하지만 에리아는 달래주지 못했다. 위로가 슬퍼하는 누군가가 가진 최소한의 감정을 공유했을 때 가능한 것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에리아는 위로해주지 못했다. 때문에 단지 등을 토닥여 줬을 뿐이었지만 그 사이 소녀는 잠들어 있었다.

계절이 모호한 장소였고, 봄은 확실히 아닌 날씨였지만, 집 안에는 때아닌 벚꽃 향이 맴돌고 있었다. 그녀는 팔을 길게 뻗어 장죽의 재를 마당에 버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세뇌가 너무 강하게 됐나 보구나. 그래도…….”

슬슬 해가 질 시간이다. 그녀는 불을 지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미안하다고는 말하지 않을게.”

일어나면서 말한, 너무나 작은 속삭임이었기에 그녀의 말은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담배 향에 묻혀 사라졌다. 한숨과 함께 말이 이어졌다.

“너와의 만남과 앞으로의 생활이 즐겁기 바라.”

그리고, 찰나의 정적 끝에 한 이름이 들려왔다.

“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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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이름을 글 제목으로 하면서 왜 제목을 짓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냐고 물으신다면 한 말 없음 이에요(...)
전 제목/작명에 소질이 없..

아무튼 건필이에요:)
VInc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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