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여기는 어디지?
질문을 던지자 저 먼 곳에서 울림이 들려왔다.
너.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려 했으나,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에 경악했다. 아니, 경악하지 못했다. 표현이 불가능했으니까. 눈은 떴지만 인식할 수가 없고, 손을 뻗어 무언가를 만진 것 같았지만 만져지지도 않았다. 서있는지, 앉아있는지, 누워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오른 손을 뻗어 자신의 배를 만지려고 했다. 분명 만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배는 그런 느낌을 받은 인식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오른 다리를 들어보려고 했다. 일어서 있으면 넘어지겠지. 누워있으면 가슴에 닿거나 보일 것이고. 그녀는 자신의 몸이 유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넘어질 것을 각오하고 자신 있게 다리를 머리를 향해 올려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허공에 발을 뻗는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때 또다시 그 울림이 들려왔다.
놀라지마, 항상 있는 일이란다.
그녀는 질문했다.
이런 경험이 숨을 쉬는 것처럼 항상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 간혹 침대에서 떨어진 적은 있어도. 아무튼 누군지는 모르지만 좀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나요?
그리고 놀랐다. 질문은 너무나 단순하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평소에 자신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 지 생각났다. 단어를 생각하고, 접목시키고, 내뱉으면서도 강약을 조절해야 의미와 속 뜻이 잘 전달된다. 가끔 필요할 때는 제스처를 사용하지.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생각 그 자체가 흘러나와 공간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오해도 없고, 문장력의 부재도 없었다. 울림이 말했다.
석양이 하늘을 채우는 것처럼, 무지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선문답이었지만, 그녀는 그 말의 뜻이 자신에게 전달되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놀라다? 놀라는 것은 무엇이지?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사고회로가 백지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 느낄 수 조차도 없었다. 몸의 감각처럼 생각 역시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또한 대화를 풀어가는 속도가 빨라졌고, 그리고 단순해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무엇을 보고 싶으냐의 차이란다.
어째서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는 거죠?
잡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존재하진 않지. 반대로 잡을 수 없다고 해서 부재하지도 않아.
여기는 어디죠?
너.
이곳은 무(無)인가요?
그렇지는 않단다. 너와 내가 있잖니.
왜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죠?
넌 보고 있고 만지고 있단다.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
난 인식하고 싶어요.
그럼 하려무나.
난 죽었나요?
너의 죽음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모호하다면.
난 살았나요?
너의 삶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확실하다면.
당신은 누구인가요?
네가 느끼는 것
난 누구죠?
갑자기 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가 본 것은 옅은 안개였다. 손을 뻗자 부드러운 잔디와 들풀이 잡혔다. 이름 모를 노란 꽃에 손바닥이 닿자 비슷한 색의 꽃가루가 살짝 묻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하늘을 보았다. 새벽녘인 듯, 안개가 하늘을 가려 해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실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보이네.”
그녀가 자신의 턱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살과 옅게 난, 바람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솜털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만져지고.”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긴 흑발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가볍게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걸을 수 있어.”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 보았다. 마로 된 듯한 반팔 셔츠와 칠 부 바지, 그리고 바닥에 가죽을 덧댄 비슷한 소재의 신을 신고 있었다. 1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소녀는 키가 165 센티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지만 몸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마른 체형이었다. 실제로 차가운 새벽 바람이 그녀를 건드리자 소녀의 몸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휘날렸다. 그녀는 팔로 몸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으 쌀쌀해.
그녀가 적갈색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뭔가 덮을 것을 찾았다. 하지만 주변에 그녀가 덮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팔로 몸을 감쌌다.
“감기가 걸리는 건 싫은데.”
그녀는 동동 걸음을 몇 번 구르더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안개가 자욱한 지금으로써는 함부로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엉덩이가 젖지 않게 하기 위해 다리를 모아 쪼그려 앉은 그녀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장기판 위에서 생각해보자. 내가 어젯밤에 뭘 했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그 부분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그녀는 당황하며 다시 중얼거렸다.
“지난 주에는…….”
없다. 지우개로 지워도 연필 자국은 남지만 그녀의 기억 속은 물이 차있지 않은 어항과도 같았다. 그녀는 결국 그때까지 보류했던,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질문을 던져야 했다.
“난……누구지?”
기억으로부터의 응답은 없다. 그때 무심코 그녀가 눈가에 무엇인가가 묻어있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한 방울의 눈물이 묻어 나왔다.
“왜 운 거지?”
필시 무서운 꿈을 꾼 것일 게다. 언제나처럼, 기억도 나지 않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옷에 눈물을 대충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초원이었다. 밭을 맨다면 몇 마지기는 나올 법한 공간이었지만 안개 때문에 시야가 많이 가려진 것을 계산하면 더욱 넓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니면 새벽이 주는 촉촉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변의 공기는 태초의 그것처럼 맑았다. 코로 공기를 들여 마시자 얼음장 같은 새벽의 향기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녀의 배를 채우지 못한 모양이다.
꾸르륵.
그녀는 일단 먹을 것을 찾아 보기로 결심하고는 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그녀의 성격과는 그리 맞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다. 해가 떠오를 참인지, 아니면 단지 시간이 지나서 눈이 익숙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안개가 많이 개었다. 그러자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본 것은 풀밭 저편, 약 10여 미터 거리에 있는 대 여섯 그루의 나무 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열매가 열려있는 것 같아 그녀는 단번에 그 쪽으로 달음박질했다. 그리고 나무들 앞에 서자 그녀는 문득 더욱더 허기가 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시선이 잘 익은 듯이 보이는 나무 열매들로 향했다. 가까이서 본 나무들은 상당히 오래된 고목이었다. 모두 각기 다른 색의 열매를 맺고 있었는데, 그 색깔도 분홍색, 자주색, 노란 색, 주황색 등등 다양했고 또한 먹음직스러웠다. 누군가가 심어 놓은 것일까? 자연적으로 자란 것이라고 하기엔 나무들의 거리가 너무 일정하다.
가까이서 보니 세월이 남기고 간 자국인 듯 나무들의 껍질은 두껍고 거칠었다. 거대한 새의 날개처럼 넓게 뻗은 가지 역시 가지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듯 억세고 제멋대로 자라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예쁜 나무야, 나 네 열매 좀 따먹을게.”
그녀는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는 힘차게 나무껍질에 발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녀의 용감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은 힘없이 미끄러졌다. 물기 때문인가? 몇 번의 끙끙거림과 폴짝 폴짝이 시도된 다음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너희, 너무 높아.”
실제로 먹음직스럽게 열린 주먹만한 분홍색 열매는 적어도 그녀 네 명이 무등을 타야 겨우 딸 수 있을 만한 높이에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군침을 흘리며 과일 따먹기를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음식은 꼭 나무에만 달린 것이 아니니까. 그녀가 나무로부터 눈을 돌리자 다시 한 번 아무 것도 없는 잔디밭이 펼쳐졌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돌리자,
“집이다!”
집이 있었다. 가로 10 여 미터 정도, 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방이 두 개를 될 법한, 벽돌과 나무로 만든 고풍스러운 느낌의 단층 집이었다. 아름드리 나무를 세로로 네 등분 해서 만든 듯한 모퉁이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따뜻한 느낌을 주는 연갈색 벽돌이 층층이 쌓여있었다.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벽돌 사이사이에는 종이 한 장도 들어갈만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높이는 조금 전, 그녀가 오르려고 노력하던 나무 정도였다. 단층 집이라고 하기엔 살짝 높은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수평적으로도 넓은 탓에 그리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붕은 양 손바닥을 손목에서 붙여서 쫙 편 것 같은, 큰 새가 둥지에 내려 앉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집의 왼편에 위치한 굵직한 굴뚝을 시작으로 백향목 판자들을 붙이고, 그 사이를 아교로 채운 다음 잘 말린 짚을 엮은 지붕은 웬만한 비나 바람이 불어도 끄떡 하지 않을 태세였다. 전반적으로 어떻게 보면 대충 뚝딱 지은 것 같기도 하면서, 다르게 보면 장인이 정성을 다해 지은 집 같기도 했다.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른 소녀의 평은 간단했다.
“예쁜 집이네.”
잘 제련된 두 개의 디딤돌을 밟고 올라가자 집의 정 중앙에 문이 보였다. 한 쌍의 적갈색 문은 장미 나무로 만든 것 같았다. 집의 높이만큼, 웬만한 일반 문보다 높이가 머리 한 두 개는 더 높은 문은, 장미나무 특유의 단단함과 수려한 문양을 잘 살린 일종의 작품이었다. 집주인은 분명 사치스러운 사람일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계세요?”
똑똑, 똑.
“계세요?”
그녀가 한 받자 쉰 다음 말했다.
“안 계시면 그냥 들어가요.”
누구한테 허락을 구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녀는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쪽이 아닌가?”
그녀는 문을 당겨보았다. 하지만 역시 꼼짝도 하지 않는 문. 일말의 열릴 기색도 보이지 않는 문을 보며 소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차분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미닫이 문이야.”
우당탕!
주인 몰래 꽃으로 장난을 치던 고양이가 주인의 호통소릴 듣고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그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디딤돌에 걸려 뒤로 한 바퀴 구르고 말았다. 아픈 것을 느낄 새로 없이 그녀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그녀에게 말을 건 상대를 바라보았다. 남색 머리카락의, 포근한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괜찮니?”
“아, 안녕하세요?”
소녀는 무의식 중에 대답하면서도, 엉덩이를 보인 자세로 인사하는 것이 집주인에 대한 예의가 맞는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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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건필:)
여기는 어디지?
질문을 던지자 저 먼 곳에서 울림이 들려왔다.
너.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려 했으나,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것에 경악했다. 아니, 경악하지 못했다. 표현이 불가능했으니까. 눈은 떴지만 인식할 수가 없고, 손을 뻗어 무언가를 만진 것 같았지만 만져지지도 않았다. 서있는지, 앉아있는지, 누워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오른 손을 뻗어 자신의 배를 만지려고 했다. 분명 만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배는 그런 느낌을 받은 인식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오른 다리를 들어보려고 했다. 일어서 있으면 넘어지겠지. 누워있으면 가슴에 닿거나 보일 것이고. 그녀는 자신의 몸이 유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넘어질 것을 각오하고 자신 있게 다리를 머리를 향해 올려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고,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허공에 발을 뻗는 것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그때 또다시 그 울림이 들려왔다.
놀라지마, 항상 있는 일이란다.
그녀는 질문했다.
이런 경험이 숨을 쉬는 것처럼 항상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 간혹 침대에서 떨어진 적은 있어도. 아무튼 누군지는 모르지만 좀 더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나요?
그리고 놀랐다. 질문은 너무나 단순하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평소에 자신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 지 생각났다. 단어를 생각하고, 접목시키고, 내뱉으면서도 강약을 조절해야 의미와 속 뜻이 잘 전달된다. 가끔 필요할 때는 제스처를 사용하지.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생각 그 자체가 흘러나와 공간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오해도 없고, 문장력의 부재도 없었다. 울림이 말했다.
석양이 하늘을 채우는 것처럼, 무지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선문답이었지만, 그녀는 그 말의 뜻이 자신에게 전달되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놀라다? 놀라는 것은 무엇이지? 그녀는 자신의 모든 사고회로가 백지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니, 느낄 수 조차도 없었다. 몸의 감각처럼 생각 역시 제대로 인식하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또한 대화를 풀어가는 속도가 빨라졌고, 그리고 단순해졌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요.
무엇을 보고 싶으냐의 차이란다.
어째서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는 거죠?
잡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존재하진 않지. 반대로 잡을 수 없다고 해서 부재하지도 않아.
여기는 어디죠?
너.
이곳은 무(無)인가요?
그렇지는 않단다. 너와 내가 있잖니.
왜 아무 것도 안 보이고 아무 것도 만져지지 않죠?
넌 보고 있고 만지고 있단다. 다만 인식하지 못할 뿐.
난 인식하고 싶어요.
그럼 하려무나.
난 죽었나요?
너의 죽음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모호하다면.
난 살았나요?
너의 삶에 대한 개념이 이렇게 확실하다면.
당신은 누구인가요?
네가 느끼는 것
난 누구죠?
갑자기 눈이 떠졌다. 눈을 뜨자마자 그녀가 본 것은 옅은 안개였다. 손을 뻗자 부드러운 잔디와 들풀이 잡혔다. 이름 모를 노란 꽃에 손바닥이 닿자 비슷한 색의 꽃가루가 살짝 묻어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하늘을 보았다. 새벽녘인 듯, 안개가 하늘을 가려 해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실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보이네.”
그녀가 자신의 턱을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살과 옅게 난, 바람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솜털이 손가락에 느껴졌다.
“만져지고.”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긴 흑발이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가볍게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걸을 수 있어.”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 보았다. 마로 된 듯한 반팔 셔츠와 칠 부 바지, 그리고 바닥에 가죽을 덧댄 비슷한 소재의 신을 신고 있었다. 1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소녀는 키가 165 센티미터 정도는 되어 보였지만 몸은 바람이 불면 날아갈 듯 마른 체형이었다. 실제로 차가운 새벽 바람이 그녀를 건드리자 소녀의 몸이 버드나무 가지처럼 휘날렸다. 그녀는 팔로 몸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으 쌀쌀해.
그녀가 적갈색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며 뭔가 덮을 것을 찾았다. 하지만 주변에 그녀가 덮을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팔로 몸을 감쌌다.
“감기가 걸리는 건 싫은데.”
그녀는 동동 걸음을 몇 번 구르더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안개가 자욱한 지금으로써는 함부로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엉덩이가 젖지 않게 하기 위해 다리를 모아 쪼그려 앉은 그녀는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장기판 위에서 생각해보자. 내가 어젯밤에 뭘 했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그 부분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지운 것처럼. 그녀는 당황하며 다시 중얼거렸다.
“지난 주에는…….”
없다. 지우개로 지워도 연필 자국은 남지만 그녀의 기억 속은 물이 차있지 않은 어항과도 같았다. 그녀는 결국 그때까지 보류했던,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질문을 던져야 했다.
“난……누구지?”
기억으로부터의 응답은 없다. 그때 무심코 그녀가 눈가에 무엇인가가 묻어있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한 방울의 눈물이 묻어 나왔다.
“왜 운 거지?”
필시 무서운 꿈을 꾼 것일 게다. 언제나처럼, 기억도 나지 않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옷에 눈물을 대충 닦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초원이었다. 밭을 맨다면 몇 마지기는 나올 법한 공간이었지만 안개 때문에 시야가 많이 가려진 것을 계산하면 더욱 넓을 가능성도 없지 않아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니면 새벽이 주는 촉촉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변의 공기는 태초의 그것처럼 맑았다. 코로 공기를 들여 마시자 얼음장 같은 새벽의 향기가 가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녀의 배를 채우지 못한 모양이다.
꾸르륵.
그녀는 일단 먹을 것을 찾아 보기로 결심하고는 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그녀의 성격과는 그리 맞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다. 해가 떠오를 참인지, 아니면 단지 시간이 지나서 눈이 익숙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안개가 많이 개었다. 그러자 안개 속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 본 것은 풀밭 저편, 약 10여 미터 거리에 있는 대 여섯 그루의 나무 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열매가 열려있는 것 같아 그녀는 단번에 그 쪽으로 달음박질했다. 그리고 나무들 앞에 서자 그녀는 문득 더욱더 허기가 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시선이 잘 익은 듯이 보이는 나무 열매들로 향했다. 가까이서 본 나무들은 상당히 오래된 고목이었다. 모두 각기 다른 색의 열매를 맺고 있었는데, 그 색깔도 분홍색, 자주색, 노란 색, 주황색 등등 다양했고 또한 먹음직스러웠다. 누군가가 심어 놓은 것일까? 자연적으로 자란 것이라고 하기엔 나무들의 거리가 너무 일정하다.
가까이서 보니 세월이 남기고 간 자국인 듯 나무들의 껍질은 두껍고 거칠었다. 거대한 새의 날개처럼 넓게 뻗은 가지 역시 가지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듯 억세고 제멋대로 자라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예쁜 나무야, 나 네 열매 좀 따먹을게.”
그녀는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는 힘차게 나무껍질에 발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녀의 용감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발은 힘없이 미끄러졌다. 물기 때문인가? 몇 번의 끙끙거림과 폴짝 폴짝이 시도된 다음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너희, 너무 높아.”
실제로 먹음직스럽게 열린 주먹만한 분홍색 열매는 적어도 그녀 네 명이 무등을 타야 겨우 딸 수 있을 만한 높이에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군침을 흘리며 과일 따먹기를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음식은 꼭 나무에만 달린 것이 아니니까. 그녀가 나무로부터 눈을 돌리자 다시 한 번 아무 것도 없는 잔디밭이 펼쳐졌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왼쪽으로 돌리자,
“집이다!”
집이 있었다. 가로 10 여 미터 정도, 크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방이 두 개를 될 법한, 벽돌과 나무로 만든 고풍스러운 느낌의 단층 집이었다. 아름드리 나무를 세로로 네 등분 해서 만든 듯한 모퉁이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따뜻한 느낌을 주는 연갈색 벽돌이 층층이 쌓여있었다.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벽돌 사이사이에는 종이 한 장도 들어갈만한 틈도 보이지 않았다. 높이는 조금 전, 그녀가 오르려고 노력하던 나무 정도였다. 단층 집이라고 하기엔 살짝 높은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수평적으로도 넓은 탓에 그리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붕은 양 손바닥을 손목에서 붙여서 쫙 편 것 같은, 큰 새가 둥지에 내려 앉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집의 왼편에 위치한 굵직한 굴뚝을 시작으로 백향목 판자들을 붙이고, 그 사이를 아교로 채운 다음 잘 말린 짚을 엮은 지붕은 웬만한 비나 바람이 불어도 끄떡 하지 않을 태세였다. 전반적으로 어떻게 보면 대충 뚝딱 지은 것 같기도 하면서, 다르게 보면 장인이 정성을 다해 지은 집 같기도 했다. 어느새 집 앞에 다다른 소녀의 평은 간단했다.
“예쁜 집이네.”
잘 제련된 두 개의 디딤돌을 밟고 올라가자 집의 정 중앙에 문이 보였다. 한 쌍의 적갈색 문은 장미 나무로 만든 것 같았다. 집의 높이만큼, 웬만한 일반 문보다 높이가 머리 한 두 개는 더 높은 문은, 장미나무 특유의 단단함과 수려한 문양을 잘 살린 일종의 작품이었다. 집주인은 분명 사치스러운 사람일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계세요?”
똑똑, 똑.
“계세요?”
그녀가 한 받자 쉰 다음 말했다.
“안 계시면 그냥 들어가요.”
누구한테 허락을 구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그녀는 문을 밀었다.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쪽이 아닌가?”
그녀는 문을 당겨보았다. 하지만 역시 꼼짝도 하지 않는 문. 일말의 열릴 기색도 보이지 않는 문을 보며 소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뒤에서 차분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미닫이 문이야.”
우당탕!
주인 몰래 꽃으로 장난을 치던 고양이가 주인의 호통소릴 듣고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그녀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디딤돌에 걸려 뒤로 한 바퀴 구르고 말았다. 아픈 것을 느낄 새로 없이 그녀는 눈을 휘둥그래 뜨며 그녀에게 말을 건 상대를 바라보았다. 남색 머리카락의, 포근한 미소를 띤 아름다운 여인이 그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괜찮니?”
“아, 안녕하세요?”
소녀는 무의식 중에 대답하면서도, 엉덩이를 보인 자세로 인사하는 것이 집주인에 대한 예의가 맞는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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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