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머니에 하얀 공과 모래를 넣고 한 번 섞은 다음,
안을 들여다보면 지금 내가 보는 하늘이 아니랴.
두둥!
남자가 기분 좋게 시를 한 줄 외우자 옆에 앉아 있던 동자(童子)가 신명 나게 북을 쳤다. 동자는 전체적으로 희고 풍성한 도포를 입고 있었고, 입은 옷보다 더 하얀 얼굴에는 반달 같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남자 역시 흰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동자의 옷소매가 붉은 색실로 장식된 것에 비해, 그의 도포는 한 땀의 색도 없는 완벽한 여백이었다. 거대한 보름달이 뜬 밤이었지만 달은 장막 같은 거대한 먹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 줌의 달 빛도 비치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산맥의 한 절벽 끝에서, 키가 3 미터는 될 법한 소나무 옆에 그들은 앉아 있었다.
오른 손의 부채, 왼 손의 술잔이 다시 춤을 추었다.
어제의 추억은 오늘의 먼지가 되고,
오늘의 하루는 내일의 먹이라네,
둥, 두둥
바다는 시리도록 푸르고 햇볕은 따사로운데
두두둥!
부서진 가을 낙엽은 하얀 눈 사이에 있고
둥!
어제 내린 소나기는 죽은 왕을 추모하는구나!
두두두두두두둥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끝난 시는 동자의 빠른 북소리에 묻혔다. 동자의 북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남자는 손 바닥보다도 큰 술잔을 거의 삼키듯이 입에 털어 넣었다.
“술을 부르는 맑은 밤이구려!”
그가 기분 좋게 웃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색 머리카락이 서늘한 밤바람에 휘날렸다. 그리고 다시 술을 따르는 순간, 구름의 장막에 틈이 생기며 달빛이 땅에 떨어졌다. 달의 전체적인 크기를 보면 아주 작은 한 조각일 뿐이겠지만, 그들을 비추기엔 충분했다. 떨어진 달빛이 옷에 스며든 것처럼 남자와 동자의 하얀 옷이 더욱 더 부각되었다. 얇은 눈썹과 호리호리한 몸, 또한 각 없이 매끄러운 얼굴은 남자의 성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검은 눈동자는 날카로웠고, 차가운 냉정함마저 갖추고 있었다. 동자 역시 전체적으로 가녀린 선과 어깨도 미치지 않는 짧은 검은 색 머리카락 때문에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할 상이었다. 형제 (혹은 남매) 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질 적이었고, 남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닮은 두 사람이었다.
“달빛도 내려주시고, 이 어찌 아니 좋을까? 우울하고도 우울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 우마(愚馬)를 하늘이 한 번을 봐주는 것 같소이다. 아니 그렇소, 도령?”
그의 물음에 동자는 입가에 미소를 한 번 띄우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고 남자는 만족한 듯 했다. 다시 손이 술병으로 갔기 때문이다. 달빛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가, 다시 술잔 속으로 사라졌다. 장난기 가득한 입가에 흐르는 몇 방울의 술을 넓은 도포 소매로 닦으며 그가 쾌활하게 물었다.
“그런데, 귀하의 방문은 어쩐 일이오?”
그 순간, 한 검은 그림자가 소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마치 소나무의 껍질이 일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무의 그늘에서 빠져 나오자 그림자가 벗겨지듯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남색 빛을 띄는 흑발에 신장은 남자의 턱에 닿을까, 말까 한 정도였다. 그녀도 남자와 동자처럼 햇빛을 거의 보지 않은 듯한 하얀 얼굴이었지만, 그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눈과 입매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가녀린 선과 갸름한 턱 선, 그리고 연한 분홍색 입술이 마치 한 그루의 벚나무를 연상시키는 여자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간이 꿈틀거렸다.
“지금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을 때입니까?”
남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지금이 아니라 언제 마시라는 거요? 바람도 시원하고 마침 귀하의 강림으로 달도 나왔으니, 오늘 밤은 늦게까지 마셔 보려 하오만?”
어찌 보면 비웃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여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왼 팔을 들었다.
“당신이 술을 마시는 건 상관이 없지만……”
그리고 그녀의 왼 손이 옆으로 뻗었다.
쿵!
보이지 않는 손이 절벽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약간의 정적 뒤 땅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메아리와 함께 들려왔다. 폭력은 거대한 산맥에 비견해서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녀의 뜻이 전달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만이라도 금주를 시도해 보는 건 어떻겠어요?”
“……내 심각하게 고려해 보도록 하리다.”
남자는 포기한 다는 듯한 태도로 어깨를 한 번 들썩인 다음 술잔과 부채를 내려놓고 자신도 땅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이야기 한 번 들어준다는 식의 태도였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했었다는 듯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팔자가 좋은 것 같이 다행입니다.”
“내 팔자가 좋은 것이 아니라, 본인이 팔자를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오. 그대는 그 동안 어찌 지내셨소? 한동안 격조했는데.”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남자의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저런 생각만 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 아니었소이까?”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제가 그것이 짧은 시간이라 노력하면 짧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서도 시간을 너무 허비한 것 아니오?”
“그쪽이 지금 하는 것이 뭐라 생각하죠?”
남자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한 마디도 안 지는군. 여전히 맹랑한 처자로다.’
물론 이것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는 상황에 따른 폭력은 대체적으로 수용하는 편이었지만 그 대상이 자신으로 바뀌는 것은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그 상대가 산책로를 절벽으로 바꿀 정도의 힘을 가진 대상이라면. 하지만 한 마디를 던지고픈 충동은 느낀 듯 했다.
“그 동안 언변이 조금이나마 는 것 같소? 외로우셨나? 역시 여자는 혼자 놔두면 말이 많 …….”
쿵!
조금 전의 폭력이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남자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시를 읊으며 술을 마셨던 곳으로 산 아래 숲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조금 전까지 그가 마시던 술병을 이미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을 보고 감동해버렸다. 그 동안 운동만 한 것 아니오? 말 수가 는 만큼 용력도 강해졌는데. 물론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정도로 남자는 어리석지 않았다.
“……금주를 시키는 방법치고는 화려하고도.”
남자는 아쉬운 듯이 혀로 입술 살짝 축였다.
“아무튼 어쩐 일이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달로 향했다. 빛이 떨어지는 달의 한 조각은 아직 구름이 덮지 못하고 있었기에 하얀 달빛이 그녀의 얼굴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선택할 때가 됐으니까요.”
아무런 주어도 없는, 마치 오늘 저녁 식사는 어찌 할거냐는 듯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 가벼운 질문을 받은 그의 미간은 마치 거대한 바위에 깔린 듯이 휘었다.
“허,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서 말을 이을 것은 아는 것이다. 여자는 품 속에서 장죽 하나를 꺼내 물었다. 여자의 팔과 비슷한 길이의 검은 색 설대와 은과 옥이 정교하게 얽힌 심플한 디자인의 동그란 대통, 그리고 그와 비슷한 재질의 물부리를 가진 장죽이었다. 그녀가 주머니의 쌈지에서 담배 한 짬을 집어 대통에 넣고 숨을 쉬자 아무런 화기도 없는 상태였음에도 장죽에서 한 줄기 연기가 세어 나왔다. 장죽이 벚꽃 향기를 뻐끔거리며 뱉어내었고, 손가락을 한 번 털자 고운 담배 잎 바람에 날렸다. 그리고 몇 모금 빨았을까,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는 흥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게 말이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술잔을 집어 든 그는 동자에게 손을 내밀었고, 분위기에 억눌려있던 동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 숨겨놓았던 술병을 들어 공손히 술잔을 채웠다.
쪼로록.
맑은 액체가 잔을 채우는 맑은 소리. 여자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그때 남자가 부채를 펴더니 강하게 홰를 쳤다. 마치 큰 학이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리가 달빛 사이로 들렸다. 그 사이, 동자는 다시 북을 들었다. 그들의 노래가 다시 한 번 밤을 채우기 시작했다.
선택은 잠깐이나, 결과는 영원이라,
두둥, 탁!
언제나는 언제나 이겠지만, 잠깐은 잠깐일 것인데
그 누구의 힘으로도 시간을 늘일 수 없건 만은,
두, 탁!
언젠가는 사라질 것에 미련을 두고,
두두두둥!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아아아아아!
둥
!
그리고 남자는 주저앉았다. 마치 하늘을 한 바퀴 휙 돈 학이 땅에 내려 앉은 듯한 자세였다.
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두……
남자의 짧은 창과 동자의 북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온 산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메아리가 사라질 때까지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술을 뗀 것은, 그의 메아리가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혔을 때였다.
“우리가 아닐 텐데.”
“뭐라 하셨소?”
남자는 여전히 주저 앉은 상태였고,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웅얼거리는 것 같았다. 여자는 남자가 그녀의 말을 들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확언했다.
“대적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고요.”
남자가 허리를 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자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모두가 동의했습니까?”
“네. 당신과 지금 잠들어 있는 녀석을 빼고는.”
여자가 한숨과 같은 대답을 하자 담배 연기가 유령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그리고 정적.
스치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컸다. 둘의 침묵 속에서 동자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여자가 먼저 운을 뗐다.
“즐거울 지도 모르지.”
여자의 자조적인 혼잣말에 남자가 하, 하며 헛웃음을 날렸다.
“긍정적인 가능성이구려. 하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긍정적 가능성의 반대편에는 항상 뒤따라 다니는 좋은 친구가 있지.”
남자의 지분거림을 무시하며 여자가 조용히 반박했다.
“부정적 가능성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봤자 우리가 할 일은…….”
“이 세계를 떠나는 것뿐이라?”
남자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대와는 다르게 본인은 이 곳을 홀가분하게 떠나기는 힘드오. 도의적 책임이라는 것도 있고.”
이번엔 여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 입에서 도의적 책임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어요.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남자는 싱긋 웃고는 몸을 크게 돌렸다. 도포 자락이 부드럽게 바람을 타면서 땅바닥을 살짝 건드렸다. 바람의 결을 따라 고운 모래가 살짝 날렸다가, 다시 떨어졌다.
“뭐, 그대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겠소?”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른 봄 갑작스레 피어나는 목련과 같은 미소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연기를 한 모금 빨고, 다시 뱉으며 장죽을 아래로 향했다. 한 줄기의 불꽃이 마치 별똥별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마지막을 불태우는 담뱃재를 발로 비벼 끄는 것을 본 남자가 한 마디 했다.
“불조심하라는 말은 안 해도 되겠구려.”
“땅에 재를 버리는 것이 싫어서 그래요?”
“아니, 원래는 금연을 권할 생각이었소만. 본인은 그대와 같은 힘이 없어서.”
여자는 남자의 지분거림을 가볍게 무시하며 말했다.
“이만 가볼게요.”
남자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에는 점잖은 자리에서 보길 기대하겠소. 아, 그리고!”
여자가 또 뭐냐는 뜻의 눈길을 보내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다음부턴 구름 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건 자제하시오. 본인은 어둠을 좋아한다오.”
그 말에 여자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진한 벚꽃 향기뿐이었다. 그 향기를 지우려는 듯이 남자가 부채를 몇 번 펄럭거리더니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이런 특이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대 하나 밖에 없을 거요.”
향기가 좀 사라지는 기미를 보일 때쯤, 남자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아, 하나 더 있던가?”
남자는 부채를 천천히 펄럭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하늘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달이 구름 사이로 더욱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거참, 본인은 어둠을 좋아한다니까.”
바늘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시간. 하지만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가 조금 전 여자가 박살을 낸 곳, 정확히는 그가 노래를 하던 낭떠러지 끝이었던, 허공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 밑과 땅은 수 백 미터를 될 법한 공간적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마치 얌전한 고양이가 풀밭 위를 걷는 것처럼 편하게 걷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아무래도 인위적으로 그랬을 법한, 뚫고 간 구름 사이에서 고개를 내미는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송세월 놀음도 이제 끝인 것 같구려.”
순간 남자가 강하게 소매를 뿌리쳤다. 넓은 도포자락이 휘날리며 펄럭 하는 소리가 났고, 그리고, 그 뒤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다만 거대한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듯한 날개 짓 소리만이 산맥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
글 제목을 정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
아마 일주일에 한 편 씩 올리게 될 것 같네요
자게란에 글을 올리는 것이 몇 년 만인지 많이 떨리기도 합니다
이곳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건필:)
주머니에 하얀 공과 모래를 넣고 한 번 섞은 다음,
안을 들여다보면 지금 내가 보는 하늘이 아니랴.
두둥!
남자가 기분 좋게 시를 한 줄 외우자 옆에 앉아 있던 동자(童子)가 신명 나게 북을 쳤다. 동자는 전체적으로 희고 풍성한 도포를 입고 있었고, 입은 옷보다 더 하얀 얼굴에는 반달 같은 웃음을 띄고 있었다. 남자 역시 흰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동자의 옷소매가 붉은 색실로 장식된 것에 비해, 그의 도포는 한 땀의 색도 없는 완벽한 여백이었다. 거대한 보름달이 뜬 밤이었지만 달은 장막 같은 거대한 먹구름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 줌의 달 빛도 비치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산맥의 한 절벽 끝에서, 키가 3 미터는 될 법한 소나무 옆에 그들은 앉아 있었다.
오른 손의 부채, 왼 손의 술잔이 다시 춤을 추었다.
어제의 추억은 오늘의 먼지가 되고,
오늘의 하루는 내일의 먹이라네,
둥, 두둥
바다는 시리도록 푸르고 햇볕은 따사로운데
두두둥!
부서진 가을 낙엽은 하얀 눈 사이에 있고
둥!
어제 내린 소나기는 죽은 왕을 추모하는구나!
두두두두두두둥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끝난 시는 동자의 빠른 북소리에 묻혔다. 동자의 북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남자는 손 바닥보다도 큰 술잔을 거의 삼키듯이 입에 털어 넣었다.
“술을 부르는 맑은 밤이구려!”
그가 기분 좋게 웃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색 머리카락이 서늘한 밤바람에 휘날렸다. 그리고 다시 술을 따르는 순간, 구름의 장막에 틈이 생기며 달빛이 땅에 떨어졌다. 달의 전체적인 크기를 보면 아주 작은 한 조각일 뿐이겠지만, 그들을 비추기엔 충분했다. 떨어진 달빛이 옷에 스며든 것처럼 남자와 동자의 하얀 옷이 더욱 더 부각되었다. 얇은 눈썹과 호리호리한 몸, 또한 각 없이 매끄러운 얼굴은 남자의 성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검은 눈동자는 날카로웠고, 차가운 냉정함마저 갖추고 있었다. 동자 역시 전체적으로 가녀린 선과 어깨도 미치지 않는 짧은 검은 색 머리카락 때문에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유발할 상이었다. 형제 (혹은 남매) 라고 하기엔 너무나 이질 적이었고, 남이라고 하기엔 묘하게 닮은 두 사람이었다.
“달빛도 내려주시고, 이 어찌 아니 좋을까? 우울하고도 우울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 우마(愚馬)를 하늘이 한 번을 봐주는 것 같소이다. 아니 그렇소, 도령?”
그의 물음에 동자는 입가에 미소를 한 번 띄우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고 남자는 만족한 듯 했다. 다시 손이 술병으로 갔기 때문이다. 달빛에 그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가, 다시 술잔 속으로 사라졌다. 장난기 가득한 입가에 흐르는 몇 방울의 술을 넓은 도포 소매로 닦으며 그가 쾌활하게 물었다.
“그런데, 귀하의 방문은 어쩐 일이오?”
그 순간, 한 검은 그림자가 소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마치 소나무의 껍질이 일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무의 그늘에서 빠져 나오자 그림자가 벗겨지듯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남색 빛을 띄는 흑발에 신장은 남자의 턱에 닿을까, 말까 한 정도였다. 그녀도 남자와 동자처럼 햇빛을 거의 보지 않은 듯한 하얀 얼굴이었지만, 그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눈과 입매를 가지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가녀린 선과 갸름한 턱 선, 그리고 연한 분홍색 입술이 마치 한 그루의 벚나무를 연상시키는 여자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간이 꿈틀거렸다.
“지금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을 때입니까?”
남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지금이 아니라 언제 마시라는 거요? 바람도 시원하고 마침 귀하의 강림으로 달도 나왔으니, 오늘 밤은 늦게까지 마셔 보려 하오만?”
어찌 보면 비웃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여자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왼 팔을 들었다.
“당신이 술을 마시는 건 상관이 없지만……”
그리고 그녀의 왼 손이 옆으로 뻗었다.
쿵!
보이지 않는 손이 절벽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약간의 정적 뒤 땅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메아리와 함께 들려왔다. 폭력은 거대한 산맥에 비견해서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녀의 뜻이 전달되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지금만이라도 금주를 시도해 보는 건 어떻겠어요?”
“……내 심각하게 고려해 보도록 하리다.”
남자는 포기한 다는 듯한 태도로 어깨를 한 번 들썩인 다음 술잔과 부채를 내려놓고 자신도 땅에 주저 앉았다. 하지만 겁을 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쩔 수 없이 이야기 한 번 들어준다는 식의 태도였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했었다는 듯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팔자가 좋은 것 같이 다행입니다.”
“내 팔자가 좋은 것이 아니라, 본인이 팔자를 좋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오. 그대는 그 동안 어찌 지내셨소? 한동안 격조했는데.”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남자의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저런 생각만 하기엔, 너무 긴 시간이 아니었소이까?”
“길다면 긴 시간이겠지만, 제가 그것이 짧은 시간이라 노력하면 짧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서도 시간을 너무 허비한 것 아니오?”
“그쪽이 지금 하는 것이 뭐라 생각하죠?”
남자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혀를 찼다.
‘한 마디도 안 지는군. 여전히 맹랑한 처자로다.’
물론 이것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는 상황에 따른 폭력은 대체적으로 수용하는 편이었지만 그 대상이 자신으로 바뀌는 것은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그 상대가 산책로를 절벽으로 바꿀 정도의 힘을 가진 대상이라면. 하지만 한 마디를 던지고픈 충동은 느낀 듯 했다.
“그 동안 언변이 조금이나마 는 것 같소? 외로우셨나? 역시 여자는 혼자 놔두면 말이 많 …….”
쿵!
조금 전의 폭력이 조금 더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 남자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시를 읊으며 술을 마셨던 곳으로 산 아래 숲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고, 조금 전까지 그가 마시던 술병을 이미 흔적도 남지 않은 것을 보고 감동해버렸다. 그 동안 운동만 한 것 아니오? 말 수가 는 만큼 용력도 강해졌는데. 물론 같은 실수를 두 번 할 정도로 남자는 어리석지 않았다.
“……금주를 시키는 방법치고는 화려하고도.”
남자는 아쉬운 듯이 혀로 입술 살짝 축였다.
“아무튼 어쩐 일이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달로 향했다. 빛이 떨어지는 달의 한 조각은 아직 구름이 덮지 못하고 있었기에 하얀 달빛이 그녀의 얼굴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선택할 때가 됐으니까요.”
아무런 주어도 없는, 마치 오늘 저녁 식사는 어찌 할거냐는 듯한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 가벼운 질문을 받은 그의 미간은 마치 거대한 바위에 깔린 듯이 휘었다.
“허, 벌써 시간이 그리 되었소?”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알아서 말을 이을 것은 아는 것이다. 여자는 품 속에서 장죽 하나를 꺼내 물었다. 여자의 팔과 비슷한 길이의 검은 색 설대와 은과 옥이 정교하게 얽힌 심플한 디자인의 동그란 대통, 그리고 그와 비슷한 재질의 물부리를 가진 장죽이었다. 그녀가 주머니의 쌈지에서 담배 한 짬을 집어 대통에 넣고 숨을 쉬자 아무런 화기도 없는 상태였음에도 장죽에서 한 줄기 연기가 세어 나왔다. 장죽이 벚꽃 향기를 뻐끔거리며 뱉어내었고, 손가락을 한 번 털자 고운 담배 잎 바람에 날렸다. 그리고 몇 모금 빨았을까,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는 흥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그러게 말이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술잔을 집어 든 그는 동자에게 손을 내밀었고, 분위기에 억눌려있던 동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 숨겨놓았던 술병을 들어 공손히 술잔을 채웠다.
쪼로록.
맑은 액체가 잔을 채우는 맑은 소리. 여자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
그때 남자가 부채를 펴더니 강하게 홰를 쳤다. 마치 큰 학이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리가 달빛 사이로 들렸다. 그 사이, 동자는 다시 북을 들었다. 그들의 노래가 다시 한 번 밤을 채우기 시작했다.
선택은 잠깐이나, 결과는 영원이라,
두둥, 탁!
언제나는 언제나 이겠지만, 잠깐은 잠깐일 것인데
그 누구의 힘으로도 시간을 늘일 수 없건 만은,
두, 탁!
언젠가는 사라질 것에 미련을 두고,
두두두둥!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아아아아아!
둥
!
그리고 남자는 주저앉았다. 마치 하늘을 한 바퀴 휙 돈 학이 땅에 내려 앉은 듯한 자세였다.
아아아아……
두두두두두두두……
남자의 짧은 창과 동자의 북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온 산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메아리가 사라질 때까지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술을 뗀 것은, 그의 메아리가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혔을 때였다.
“우리가 아닐 텐데.”
“뭐라 하셨소?”
남자는 여전히 주저 앉은 상태였고,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웅얼거리는 것 같았다. 여자는 남자가 그녀의 말을 들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확언했다.
“대적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고요.”
남자가 허리를 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남자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모두가 동의했습니까?”
“네. 당신과 지금 잠들어 있는 녀석을 빼고는.”
여자가 한숨과 같은 대답을 하자 담배 연기가 유령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그리고 정적.
스치는 바람소리가 유난히 컸다. 둘의 침묵 속에서 동자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여자가 먼저 운을 뗐다.
“즐거울 지도 모르지.”
여자의 자조적인 혼잣말에 남자가 하, 하며 헛웃음을 날렸다.
“긍정적인 가능성이구려. 하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긍정적 가능성의 반대편에는 항상 뒤따라 다니는 좋은 친구가 있지.”
남자의 지분거림을 무시하며 여자가 조용히 반박했다.
“부정적 가능성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봤자 우리가 할 일은…….”
“이 세계를 떠나는 것뿐이라?”
남자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대와는 다르게 본인은 이 곳을 홀가분하게 떠나기는 힘드오. 도의적 책임이라는 것도 있고.”
이번엔 여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 입에서 도의적 책임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어요.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남자는 싱긋 웃고는 몸을 크게 돌렸다. 도포 자락이 부드럽게 바람을 타면서 땅바닥을 살짝 건드렸다. 바람의 결을 따라 고운 모래가 살짝 날렸다가, 다시 떨어졌다.
“뭐, 그대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겠소?”
여자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른 봄 갑작스레 피어나는 목련과 같은 미소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연기를 한 모금 빨고, 다시 뱉으며 장죽을 아래로 향했다. 한 줄기의 불꽃이 마치 별똥별처럼 땅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마지막을 불태우는 담뱃재를 발로 비벼 끄는 것을 본 남자가 한 마디 했다.
“불조심하라는 말은 안 해도 되겠구려.”
“땅에 재를 버리는 것이 싫어서 그래요?”
“아니, 원래는 금연을 권할 생각이었소만. 본인은 그대와 같은 힘이 없어서.”
여자는 남자의 지분거림을 가볍게 무시하며 말했다.
“이만 가볼게요.”
남자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다음에는 점잖은 자리에서 보길 기대하겠소. 아, 그리고!”
여자가 또 뭐냐는 뜻의 눈길을 보내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다음부턴 구름 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건 자제하시오. 본인은 어둠을 좋아한다오.”
그 말에 여자는 코웃음을 한 번 치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진한 벚꽃 향기뿐이었다. 그 향기를 지우려는 듯이 남자가 부채를 몇 번 펄럭거리더니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이런 특이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그대 하나 밖에 없을 거요.”
향기가 좀 사라지는 기미를 보일 때쯤, 남자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기며 중얼거렸다.
“아, 하나 더 있던가?”
남자는 부채를 천천히 펄럭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하늘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달이 구름 사이로 더욱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거참, 본인은 어둠을 좋아한다니까.”
바늘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한 시간. 하지만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가 조금 전 여자가 박살을 낸 곳, 정확히는 그가 노래를 하던 낭떠러지 끝이었던, 허공을 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발 밑과 땅은 수 백 미터를 될 법한 공간적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마치 얌전한 고양이가 풀밭 위를 걷는 것처럼 편하게 걷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아무래도 인위적으로 그랬을 법한, 뚫고 간 구름 사이에서 고개를 내미는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허송세월 놀음도 이제 끝인 것 같구려.”
순간 남자가 강하게 소매를 뿌리쳤다. 넓은 도포자락이 휘날리며 펄럭 하는 소리가 났고, 그리고, 그 뒤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다만 거대한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듯한 날개 짓 소리만이 산맥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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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제목을 정하는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
아마 일주일에 한 편 씩 올리게 될 것 같네요
자게란에 글을 올리는 것이 몇 년 만인지 많이 떨리기도 합니다
이곳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