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 하고 마른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곳은 당연히 내 오른손으로, 때린 곳은 다른 사람의 뺨이었다.
"현선우가 부탁했던 거야."
뒤에서 때려서인지, 김민혁은 땅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습이 죽은사람보다 더 힘없이 일어나서 오히려 무서워졌다.
"다시 온거냐, 아니면 안 간거냐."
"안 갔어. 너 같으면.."
"아아, 나중에. 한 5분만 있다가."
갈 수 있겠냐, 고 말하려다가 김민혁이 내 옆을 지나쳐가서 얼어버렸다.
"뭐?"
"서로 할 말 많을테니까, 장소좀 옮기자고. 여기서 말하면 보기도 안 좋고 동네 민폐니까."
김민혁은 예상했다는 듯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말했다.
변하지 않았다. 김민혁은 한 달 전과 같이 외딴 섬에 사는 것 처럼 고독하게 살고있었다. 자신이 1년 전에 죽었다고 말했던 것 처럼.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18년 동안 굳어진 사람 성격이다. 그래도 결심했다. 이 사람을 난 어떻게든 돌려놓을 것이다.
"소리 안 지를 자신 있어?"
김민혁이 카페 앞에 멈춰서 말했다.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아... 뭐..."
"됐다. 네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욱하면 무섭지. 열쇠 아직 있지?"
조용히 김민혁에게 열쇠를 넘겨주었다. 김민혁은 잿빛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김민..."
"고시원에 가면 무슨 말이든지 들어줄게."
신호등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무료해서 말했더니 김민혁은 말하게 두지 않았다. 그리고 옆모습을 바라보았더니 시선보다 약간 낮은 곳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슬퍼보였다고 하면 내가 착각한 것일까.
하늘은 굉장히 어두웠다. 담뱃재를 믹서기로 갈아내서 뿌린 것 같은 색이었다. 김민혁을 처음 만난 날처럼 하늘이 굉장히 어두워서, 그게 기쁘다면 기뻤다.
김민혁은 열쇠를 열고 들어와서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에 자기가 살던 것 보다 굉장히 깨끗해져서 놀라는 것 같았다. 김민혁이 살았을 때에는 보이는 곳만 먼지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슬쩍 보기만 해도 전혀 청소를 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극히 실용적인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보이는 외향에만 신경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유는?"
김민혁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나는 말하기 전에 일단 책상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놓았다.
"비행기 표는 환불받았고, 나머지 돈은 생활비 빼면 하나도 쓰지 않았어."
아쉽게도 일할 곳은 생기지 않았다. 운이 없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뒤에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막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건 상관 없는데. 왜 가지 않았어?"
"가기 싫었어."
김민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나라고 해도 분명 그랬을 것 같았다. 만일 내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었는데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이가 없다 못해 힘이 빠질 것이다.
"이상하네. 만나면 만났다는 걸 후회할 정도로 욕을 퍼부어서 찍소리 못하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증거로, 고양이도 내 무릎에 앉아서 앞발을 핥고 있었다.
"그건 나도 그랬어. 10년 안에 내가 성공할리는 없으니까, 만나면 욕을 한 바가지 뒤집어 씌워서 질질 짜는 상태로 대화를 시작하자고 했었는데."
김민혁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콧등을 긁었다. 서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 김민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내가 김민혁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호감과 애정 사이. 그 정도의 감정이었던 것 같지만,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고. 왜 가기 싫었는데?"
"좋아하는 네가 있으니까."
김민혁은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게 화가 난다면 약간이나마 화가 났다. 놀라는 척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그래도 가족이 있는데?"
"가족은... 그래.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연락이라도 하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올 것 같은데."
"그럼 나는?"
"지금 가족과 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난 주저없이 너를 선택할거야. 오늘도 그랬고."
김민혁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재수가 없었구만. 내일이면 싫다고 할지도 모르는데'라고 투덜댔다. 김민혁의 성격은 어느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이런 실없이 농담하는 것에도 대꾸하면 결국 김민혁의 페이스에 말려버릴 것이다.
"그래도 말야, 세상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냐?"
김민혁이 고양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양이는 김민혁을 빤히 바라보기는 했지만 별 반응없이 앞발을 핥았다. 김민혁도 이제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왜 꼭 내가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김민혁은 잠시 생각하듯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생각하기 위한 것인지 크게 하던 호흡이 세 번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김민혁은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나랑 있어봐야 미래같은건 공기속의 아르곤함량의 절반도 안 된다는 거지."
아르곤이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왜?"
내 말에 김민혁은 나를 살짝 노려보았다.
"아픈 기억일테지만... 원인은 내가 태반이라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고."
"네가 나쁜거야?"
"응. 내가 나쁜거야. 처음 만나자마자 가족에게 돌려보냈어야 하는데... 내 욕심 때문에 시간만 질질 끌다가 그렇게 된거지."
며칠동안은 이렇게 김민혁이 자책하면 '그런 줄 알면 날 행복하게 해.'라고 할 작정이었지만, 그래서야 김민혁은 능력이 없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렇게 자책하는게 취미라면 나도 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네가 없었으면 나는 얼어 죽었을거야, 분명히."
"재미없는 소리 하지마.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렸잖아."
그렇게 말한 김민혁은 시선을 돌렸다.
김민혁은 나쁜 사람같지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을 엄격하게, 아니 명백하게 자신의 탓이 아닌 잘못을 떠안으려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리고 나 살면서 운이라거나 좋을만한 일이 극히 드물었다고. 이런 녀석한테 붙어있으면 불행이 옮아버려."
"그게 다야?"
김민혁은 약간의 신음성을 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더 뭔가 있는가, 싶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없으면 그걸로 끝이네. 나는 분명히 말했어. 그 책임은 네가 질 것이 아니야. 오히려 옷을 가져오지 않은 내 탓이 커. 물론 네가 잘못을 떠안는다면 굉장히 편하기는 할테지만, 나는 네가 그만한 부담을 안고있는게 더 싫어. 알아들어?"
"아니. 너 편한대로 해줘."
"응. 난 네가 쓸데없는 책임을 안 가지는게 더 편하니까 이대로 할래."
김민혁은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이건 아닌데'라는 표정이었지만, 반론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밥먹고 자는 것과 면접 보는 동안을 제외한 모든 시간동안 김민혁과 가상문답을 질리도록 주고받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목소리와 억양도 확실히 기억해서 어제도 만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 좋아. 그래. 아니, 별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정하자고.
하지만 말했다시피 난 너랑 안 얽히는게 낫다니까? 억울한 누명쓰는건 물론이고, 나랑 같이있는 것 자체로 병 옮길지도 모르는데?"
...... 이런 정신으로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 고등학교 조기졸업하고 어딘가의 외국으로 유학갔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김민혁이 한 말을 단 한글자도 틀리지 않게 예상했다. 아주 약간 아쉬우면서도,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 확실히 난 지금까지 너 만큼 불행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 불행에서 꺼내줄게. 내가."
김민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의자에서 끼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럴필요 없어. 그냥 너 혼자 행복..."
"만일 네가 그걸 거부한다면, 난 너보다 더 불행해질거야. 한 달 사이에 나는 정말 모든것을 잃어버릴테니까."
김민혁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열고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머리를 맹렬히 긁었다. 이 사람 머리는 뭘로 만들어졌을까.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나는 잘 들을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혼잣말이면 혼자 하게 두면 되는것이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쉰 김민혁은 결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약 너와 잘 되었다고 치자. 그래서 내가 널 책임질 수 있냐?"
김민혁은 비실비실 웃으면서도 굉장히 초조한지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정직히 말하자면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뭔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기회에 임기음변에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누가 책임지래?"
그래. 김민혁이라면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김민혁은 당연하게도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회적 통념이 그렇다고 나까지 그럴 줄 알았어? 미안. 난 결혼을 무기로 삼는 인간이 아니라서. 난 말이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 그러니까..."
다음 말을 말하려다가 숨을 들이쉬었다. 약간 진정하지 않으면 소리를 빽 질러서 주인에게 쫓겨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발 궁상맞게 내 인생 책임지려고 하지마. 내 인생은 내 거야. 그 누구에게도 안 줘. 나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뭐든지 다 줄 수 있어. 하지만 설령 너라고 해도 그것만은 못 주겠어. 물론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도와주는 일은 분명히 있을거야. 하지만 거기까지야. 내 인생은 내 거고,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너에게 부탁하거나 무리한 부탁을 하지도 않을거야."
마지막. 여기에서까지 김민혁이 할 말이 남아있다면 내쪽에 준비된 카드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일종의 확신은 있었다. 원미영의 말이 맞다면 분명히 내 말에 반론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2분의 1확률. 판돈을 걸기에는 충분한 도박 아닐까.
"제발 그만 좀 피해! 넌 네가 쌓아온 모든 것을 전부 다 바쳐서 한 번 도피했잖아? 이제는 나에게서까지 도망칠거야? 도피가 그렇게 좋아?
쓸데없는 것을 당당히 맞서라고 하는 건 아냐!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다만 네가 좋아하는 것을 아무런 얻는 것도 없이 자신을 비하하는 것으로 피해다니지 마!"
김민혁은 놀랐는지 아주 약간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힘이 빠진 로봇처럼 한숨을 푹 쉬며 찌그러졌다. 어딘가의 영화처럼 관철이나 이음새 부분에서 뜨거운 증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도 김민혁은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짙은 패배감에 싸여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민혁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여겼는지 나를 따라 입을 멈췄다.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싫어? 내가 좋아하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싫은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다고 할 사람은 없겠지.
그런데 김민혁은 지금까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있다가 처음으로, 표정이 굳었다.
"아니, 잠깐만. 그건 아냐. 다만 행복해지려면 서로 부딫치지 않는게 좋다고 보는데."
무슨 생각을 떨쳐내려는 것인지 김민혁은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됐잖아. 다른건 다 필요 없어. 나랑 부딫치면 나까지 불행해진다고 했지?"
김민혁은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을 표했다.
"나랑 같이 나락 끝까지 떨어지기 싫으면 저리가."
아, 안돼겠어. 이 인간 너무 꽉 막혀서 한 대 더 치고 싶어졌어.
열이 팍 올라버렸다. 이 인간,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리고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김민혁이 한 말이 진짜라고 하면, 이 사람은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암울했을 것이다. 내가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김민혁에게 확실하게 말해두고 싶었다.
"내가... 내가 끌어올려 줄게."
김민혁은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잡고 말했다.
"응?"
김민혁은 고개를 갸웃거려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지옥에서 꺼내줄게."
내 생각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주 약간 당황했다.
방금 김민혁의 말로 지금가지의 내가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통절하게 느꼈다.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분명히 앞으로 계속 만나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벼운 연애감정으로 치유할 수 있는 상처로 끙끙대고 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김민혁은 고개륻 돌리고 말했다.
"잘 될지 어떨지는 몰라. 다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걸 해줄게.
그리고 미안해. 네 상처가 그렇게 깊은줄 모르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어."
아주 잠시동안의 침묵이 있고, 김민혁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넌 못할 것 같아."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아서려 했다. 여기에서 나가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니, 내 생각보다 먼저 손이 나가서 김민혁의 팔을 잡고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내 말에 김민혁은 분한 것 같이 어금니를 마찰시켰다. 귀 아래쪽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난 행복해질거야. 하지만 나 혼자서라면 그걸로 됐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건 나보다 너야. 만약... 우리 둘 중에 한 명만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난 주저없이 너에게 줄거야.
너 혼자서는 답이 없었잖아? 둘이라면... 방법이 생길지도 몰라."
김민혁은 참담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졌다. 인정할게. 네 맘대로 해."
김민혁은 한 손을 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름의 항복표시인 것 같았다.
"그럼... 내가 곁에 있어도 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김민혁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어어. 전리품이잖냐. 버리려면 언제든 버려."
그런일은 없을거야, 라고 덧붙이기 이전에 웃음을 지으며 김민혁을 끌어안았다.
"미안. 늦어버렸네.
좋아해, 김민혁. 나중에는 어째서일지는 모르겠지만 얼굴도 보기 싫어질지 몰라. 하지만 난 지금 분명히 널 좋아하고 있어. 그건 잊지 말아줘."
김민혁은 품속의 나를 어쩔지 모르고 머뭇거렸다.
삐걱거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나름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는 몰랐다.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 걸릴지도 몰랐다. 다만 지금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고양이는 우리 둘이 일어나자마자 책상 위에 두었던 지갑 두 개를 한꺼번에 물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입을 건 다 입고 있었고, 아무일도 없었다. 김민혁에게 이것 저것 묻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굉장히 지나버려서, 그리고 아주 약간 장난기가 동해서 김민혁에게 자고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김민혁은 머뭇거렸다.
'너 남자를 너무 신사적으로 보는 것 같은데... 그 성격 고치지 않으면 고생할지도 몰라.'
김민혁은 그렇게 말했고, 내 다음말을 듣고 참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 소중히 대해줄거라고 믿으니까 괜찮아.'
김민혁은 끝에가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먼저 침대에 처박혀버렸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내게 질려버린 것 같았다.
어쨌든 고양이는 우리 둘이 일어나자마자 어떻게인지 열려있는 문을 통해 나갔다. 공황상태에 빠질 시간도 없이 우리 둘은 빨리 일어나서 걸어야 했다.
그런데 정작 김민혁은 그닥 투덜대지 않았다. 방금의 한 마디가 전부로, 욕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다는 내 예상과는 꽤 많이 달랐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저 고양이는 무슨 생각으로 사람을 질질 끌고 나온걸까."
아는가 싶어서 물어보았는데, 김민혁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고양이가 아니니까 모르겠어."
김민혁이 몸을 제대로 펴면서 말했다. 고양이는 입에 김민혁과 내 지갑을 물고있었다. 내건 비어있으니까 그냥 놔둬도 괜찮겠지만, 김민혁의 경우는 35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다는 말에 외투도 못 챙겨입고 나와버린 것이다.
[야옹]
고양이는 그렇게 울며 멈춰섰다. 고양이의 앞에는 지갑이 두 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가가자 고양이는 우리가 간 만큼 더 멀어져서 지갑을 줍는 우리를 앉아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았고, 나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려버렸다.
고양이는 뒷다리를 접어서 앉고, 왼손으로 균형을 잡은 뒤 오른손을 양 쪽으로 흔들고 있었다. 영락없는 사람아닌가.
김민혁도 약간 놀라는 것 같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이를 바라보더니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뒤 고양이를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저... 저거..."
멍해져버렸다. 이거, 진짜로 사람이잖아.
"이해하지 마. 세상 살면서 모든 일이 네게 이해될만한 일이 되는건 아냐."
김민혁은 담담히 말했다. 나도 잘 생각해보니, 나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손을 흔드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인사이지 않을까. 지금까지 안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긴 이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의사소통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말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어쩔 수 없었다. 이 두 달동안 굉장히 정이 든 고양이지만, 잡을 방법은 없었고, 잡아서 할 일도 없었다. 그저 내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틀린 소유욕으로 잡아두기에는, 저 고양이가 너무 아까워보였다.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천천히 손을 흔들자 고양이는 씩 웃는 것 처럼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렸다. 나도 그것을 보고 뿌듯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는 몇 초 동안 손을 더 흔들다가 미련없이 돌아서서 꼬리를 활발하게 휘저으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울지마."
김민혁이 내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울 생각은 없었는데, 눈물은 그 이후로도 몇 분간 나왔다.
"어디로 갔을까?"
의미없이 말했다. 김민혁도 알리가 없었다.
"글쎄. 재주 많은 고양이었으니까 말이지. 거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잖아."
"응?"
"결국 저 고양이는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안 맞았을 때, 자신을 혐오할때와 같이 잘못된 짓을 했을 때 참견했잖아. 누군가... 있겠지. 우리처럼 자기 마음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Last part -고양이- End.
Epilogue -도피의 끝-
따뜻한 봄날에, 에어컨은 완전히 고장나서 열만 내고 있고, 창문도 없어서 쪄 죽을 것 같은 날이었다. 그래도 내 방 보다는 더 나을 것 같아서 눌러앉아 있었다. 뭐, 그닥 시원하지는 않지만서도.
"잘하는건 뭐 있어?"
내가 김민혁을 쏘아보며 말했다.
세 달 동안 김민혁과 붙어다니면서 알 수 있던 것은, 이대로 가면 명백히 위험해진다는 것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나이는 대략 35세까지. 그런데 평균수명은 현재 약 90세. 단순계산이라도 노후준비가 가능할리 없었다.
"없어."
이렇게 말하는 김민혁은 피식 웃고있었다. 예전 같으면 당연한 기정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해서 굳은 표정이겠지만, 지금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있었다.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김민혁도 도피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혐오해서 자신을 무신경하게 바꿔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굉장히 빨랐다. 내가 적당히 의지가 될 때는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그러면서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물론 그건 칼날 위를 걷는 것 처럼 미묘한 균형을 맞춰야 해서 굉장히 힘들었다. 아직 보통의 활발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김민혁은 적어도 전보다는 인간미가 있게 되어있었다.
"음... 그럼 맨날 키보드를 두드리던건 뭐야?"
김민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다가 노트북을 열어서 전원버튼을 눌렀다. 컴퓨터나 기계에 약한 나는 아무래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거."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모니터를 돌려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나도 익히 본 적 있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에 글자가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이거다."
느낌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역량 중 하나는 어떤 상황을 서술하는데에 있어서도 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김민혁은 그 부분에 있어서라면 굉장할 정도의 자질을 갖고있는 것이다.
"응? 이게 뭐?"
김민혁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야, 이거."
"그니까 그게 뭐? 내쪽은 아직 퇴고도 안된데다가 검증안된 녀석을 보여주니까 굉장히 부끄럽다고. 빨리 끝내."
"이걸로 노후준비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김민혁은 한숨을 푹 쉬고 아직도 그 이야기냐, 라고 투덜댔다. 김민혁은 언제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애늙은이라던가, 우리는 아직 젊다거나, 그때까지 내가 붙어있지 못할 거라는 등의 핑계를 대며 어물쩍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평생을 붙어있기로 작정했으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했다. 이런 직업들은 정년퇴직이 없다고 해도, 지금부터 준비할 것은 많아보였다.
"쯧. 거기에 소재가 떨어져서 막혀버렸다고. 이것도 곧 미완성본 모아놓은 폴더에 처박힐걸."
"소재? 소재는 있잖아."
김민혁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우리 이야기를 쓰자. 나쁘지 않잖아?"
"자기 일을 객관적으로 볼 자신이 있어?"
"너나 나 혼자라면 힘들겠지만, 두 명이잖아? 시소처럼 서로 교정할 수 있을걸?"
김민혁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켜놓았던 프로그램을 '중단'이라는 폴더에 옮겼다.
"그럼 시작하자고. 나도 지지부진한 것 붙잡고 씨름하는 취미는 없어. 잘 되는것부터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것이 당신이 보고 있는 글의 전말이다.
생각해보면 꽤 파란만장한 한 달이었다. 가족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일상을 잃었고, 순결을 잃었고, 집을 잃었고, 안락함을 잃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이득이 있다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두 손을 써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 자신의 행복을 일궈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나에게 이 미래와, 한 달 전의 일상이 계속되는 미래를 놓고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내가 살고있는 이 미래를 선택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도 물론 행복했다. 더 없이 행복하고 안락한데다가 가만히 있어도 존재하는 것 만으로 내게 주어지는 것이 있었다. 어떤 것을 위해 분투할 이유도 없었고, 그저 만들어진 평화와 안락에 취해 부유하듯이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편했다.
하지만 지금의 만족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살아있다고 굉장할 정도로 확실히 느끼고 있었고, 내 손으로 만들어낸 행복에 취해 만족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일은 불확실하다. 불확실하다는 것 만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윤곽마저도 결정된 미래가 없다는 것은, 지금부터 뭔가를 시작하면 미래에 무언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인생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인생에서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될지 생각하면, 그 만족감마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주저없이 내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돌아볼 자신이 있다.
누가 뭐래도 내 인생은 내 것이다. 힘들지도 모른다.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분명히 원망할 일도 생기고, 후회할 일도 꽤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내 인생에서 내가 일궈낸 내 행복은 나만의 것이다.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성과다. 0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기에 나는 굉장한 만족감에 기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하나.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지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 성취도 업적도 자신의 것이고, 그 실패도 자신이 책임질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도 당신이 할 일이고,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가 되어도, 아무리 깊은 사이가 되어도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살아야 할 것이다.
너무 긴가? 요약하면 간단하다.당신이 자신의 인생에 주체가 되어라.
SOLITUDE (고독) - Ella wheeler wilcox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낡고 슬픈 이 땅에선 환희는 빌려야만 하고,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득하니까.
노래하라, 언덕들이 응답하리라.
탄식하라, 허공에 흩어지고 말리라.
메아리들은 즐거운 소리에 춤을 추지만
너의 근심은 외면하리라.
기뻐하라, 사람들이 너를 찾으리라.
슬퍼하라, 그들은 너를 떠날 것이다.
사람들은 너의 즐거움을 원하지만
너의 고통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즐거워하라, 그러면 친구들이 늘어날 것이다.
슬퍼하라, 그러면 그들을 다 잃고 말 것이다.
네가 주는 달콤한 술은 아무도 거절하지 않지만
인생을 한탄할 때는 너 홀로 술을 마시게 될 것이다.
축제를 열라, 그럼 너의 집은 사람들로 넘쳐나리라.
굶주리라, 세상이 너를 외면할 것이다.
성공하여 베풀라, 그것이 너의 삶을 도와주리라.
하지만 아무도 죽음은 막지 못한다.
즐거움의 방들엔 여유가 있어
길고 화려한 행렬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좁은 고통의 통로를 지날 때는
우리 모두는 한 줄로 지나갈 수밖에 없다.
※ 끝. 쫑. END.
넵. 끝입니다. 더 없어요.
...... 그리고 읽는 사람도 없지요(묵념).
아무나 감평이라던가 까주던가 좀 해줘요.
"현선우가 부탁했던 거야."
뒤에서 때려서인지, 김민혁은 땅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습이 죽은사람보다 더 힘없이 일어나서 오히려 무서워졌다.
"다시 온거냐, 아니면 안 간거냐."
"안 갔어. 너 같으면.."
"아아, 나중에. 한 5분만 있다가."
갈 수 있겠냐, 고 말하려다가 김민혁이 내 옆을 지나쳐가서 얼어버렸다.
"뭐?"
"서로 할 말 많을테니까, 장소좀 옮기자고. 여기서 말하면 보기도 안 좋고 동네 민폐니까."
김민혁은 예상했다는 듯이 굉장히 자연스럽게 말했다.
변하지 않았다. 김민혁은 한 달 전과 같이 외딴 섬에 사는 것 처럼 고독하게 살고있었다. 자신이 1년 전에 죽었다고 말했던 것 처럼.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18년 동안 굳어진 사람 성격이다. 그래도 결심했다. 이 사람을 난 어떻게든 돌려놓을 것이다.
"소리 안 지를 자신 있어?"
김민혁이 카페 앞에 멈춰서 말했다.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아... 뭐..."
"됐다. 네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고. 욱하면 무섭지. 열쇠 아직 있지?"
조용히 김민혁에게 열쇠를 넘겨주었다. 김민혁은 잿빛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김민..."
"고시원에 가면 무슨 말이든지 들어줄게."
신호등을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무료해서 말했더니 김민혁은 말하게 두지 않았다. 그리고 옆모습을 바라보았더니 시선보다 약간 낮은 곳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모습이 굉장히 슬퍼보였다고 하면 내가 착각한 것일까.
하늘은 굉장히 어두웠다. 담뱃재를 믹서기로 갈아내서 뿌린 것 같은 색이었다. 김민혁을 처음 만난 날처럼 하늘이 굉장히 어두워서, 그게 기쁘다면 기뻤다.
김민혁은 열쇠를 열고 들어와서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에 자기가 살던 것 보다 굉장히 깨끗해져서 놀라는 것 같았다. 김민혁이 살았을 때에는 보이는 곳만 먼지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슬쩍 보기만 해도 전혀 청소를 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극히 실용적인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보이는 외향에만 신경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유는?"
김민혁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나는 말하기 전에 일단 책상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놓았다.
"비행기 표는 환불받았고, 나머지 돈은 생활비 빼면 하나도 쓰지 않았어."
아쉽게도 일할 곳은 생기지 않았다. 운이 없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뒤에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막았다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건 상관 없는데. 왜 가지 않았어?"
"가기 싫었어."
김민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나라고 해도 분명 그랬을 것 같았다. 만일 내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그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었는데 하기 싫어서 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이가 없다 못해 힘이 빠질 것이다.
"이상하네. 만나면 만났다는 걸 후회할 정도로 욕을 퍼부어서 찍소리 못하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증거로, 고양이도 내 무릎에 앉아서 앞발을 핥고 있었다.
"그건 나도 그랬어. 10년 안에 내가 성공할리는 없으니까, 만나면 욕을 한 바가지 뒤집어 씌워서 질질 짜는 상태로 대화를 시작하자고 했었는데."
김민혁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콧등을 긁었다. 서로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해 김민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내가 김민혁을 그렇게 좋아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호감과 애정 사이. 그 정도의 감정이었던 것 같지만, 적어도 지금은 확실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고. 왜 가기 싫었는데?"
"좋아하는 네가 있으니까."
김민혁은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게 화가 난다면 약간이나마 화가 났다. 놀라는 척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는 걸까.
"그래도 가족이 있는데?"
"가족은... 그래.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연락이라도 하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올 것 같은데."
"그럼 나는?"
"지금 가족과 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난 주저없이 너를 선택할거야. 오늘도 그랬고."
김민혁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재수가 없었구만. 내일이면 싫다고 할지도 모르는데'라고 투덜댔다. 김민혁의 성격은 어느정도 파악한 것 같았다. 이런 실없이 농담하는 것에도 대꾸하면 결국 김민혁의 페이스에 말려버릴 것이다.
"그래도 말야, 세상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냐?"
김민혁이 고양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양이는 김민혁을 빤히 바라보기는 했지만 별 반응없이 앞발을 핥았다. 김민혁도 이제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왜 꼭 내가 가족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김민혁은 잠시 생각하듯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생각하기 위한 것인지 크게 하던 호흡이 세 번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김민혁은 입을 열었다.
"아... 그러니까, 나랑 있어봐야 미래같은건 공기속의 아르곤함량의 절반도 안 된다는 거지."
아르곤이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적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왜?"
내 말에 김민혁은 나를 살짝 노려보았다.
"아픈 기억일테지만... 원인은 내가 태반이라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고."
"네가 나쁜거야?"
"응. 내가 나쁜거야. 처음 만나자마자 가족에게 돌려보냈어야 하는데... 내 욕심 때문에 시간만 질질 끌다가 그렇게 된거지."
며칠동안은 이렇게 김민혁이 자책하면 '그런 줄 알면 날 행복하게 해.'라고 할 작정이었지만, 그래서야 김민혁은 능력이 없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그렇게 자책하는게 취미라면 나도 더 말하지 않을게. 하지만 네가 없었으면 나는 얼어 죽었을거야, 분명히."
"재미없는 소리 하지마. 이유야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버렸잖아."
그렇게 말한 김민혁은 시선을 돌렸다.
김민혁은 나쁜 사람같지가 않았다. 이렇게 자신을 엄격하게, 아니 명백하게 자신의 탓이 아닌 잘못을 떠안으려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그리고 나 살면서 운이라거나 좋을만한 일이 극히 드물었다고. 이런 녀석한테 붙어있으면 불행이 옮아버려."
"그게 다야?"
김민혁은 약간의 신음성을 내면서 고개를 돌렸다. 더 뭔가 있는가, 싶어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없으면 그걸로 끝이네. 나는 분명히 말했어. 그 책임은 네가 질 것이 아니야. 오히려 옷을 가져오지 않은 내 탓이 커. 물론 네가 잘못을 떠안는다면 굉장히 편하기는 할테지만, 나는 네가 그만한 부담을 안고있는게 더 싫어. 알아들어?"
"아니. 너 편한대로 해줘."
"응. 난 네가 쓸데없는 책임을 안 가지는게 더 편하니까 이대로 할래."
김민혁은 인상을 팍 구기며 고개를 약간 흔들었다. '이건 아닌데'라는 표정이었지만, 반론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나는 밥먹고 자는 것과 면접 보는 동안을 제외한 모든 시간동안 김민혁과 가상문답을 질리도록 주고받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목소리와 억양도 확실히 기억해서 어제도 만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조... 좋아. 그래. 아니, 별로 좋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정하자고.
하지만 말했다시피 난 너랑 안 얽히는게 낫다니까? 억울한 누명쓰는건 물론이고, 나랑 같이있는 것 자체로 병 옮길지도 모르는데?"
...... 이런 정신으로 공부를 했으면 지금쯤 고등학교 조기졸업하고 어딘가의 외국으로 유학갔을지도 모르는데. 지금 김민혁이 한 말을 단 한글자도 틀리지 않게 예상했다. 아주 약간 아쉬우면서도,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은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그래? 확실히 난 지금까지 너 만큼 불행했던 적은 없는 것 같아. 그러니까 그 불행에서 꺼내줄게. 내가."
김민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의자에서 끼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럴필요 없어. 그냥 너 혼자 행복..."
"만일 네가 그걸 거부한다면, 난 너보다 더 불행해질거야. 한 달 사이에 나는 정말 모든것을 잃어버릴테니까."
김민혁은 할 말이 없는지 입을 열고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머리를 맹렬히 긁었다. 이 사람 머리는 뭘로 만들어졌을까.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데, 나는 잘 들을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혼잣말이면 혼자 하게 두면 되는것이다. 그리고 숨을 깊게 들이쉰 김민혁은 결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자,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약 너와 잘 되었다고 치자. 그래서 내가 널 책임질 수 있냐?"
김민혁은 비실비실 웃으면서도 굉장히 초조한지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정직히 말하자면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문득 뭔가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기회에 임기음변에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안 것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누가 책임지래?"
그래. 김민혁이라면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김민혁은 당연하게도 벙찐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회적 통념이 그렇다고 나까지 그럴 줄 알았어? 미안. 난 결혼을 무기로 삼는 인간이 아니라서. 난 말이지,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 그러니까..."
다음 말을 말하려다가 숨을 들이쉬었다. 약간 진정하지 않으면 소리를 빽 질러서 주인에게 쫓겨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발 궁상맞게 내 인생 책임지려고 하지마. 내 인생은 내 거야. 그 누구에게도 안 줘. 나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뭐든지 다 줄 수 있어. 하지만 설령 너라고 해도 그것만은 못 주겠어. 물론 너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도와주는 일은 분명히 있을거야. 하지만 거기까지야. 내 인생은 내 거고,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너에게 부탁하거나 무리한 부탁을 하지도 않을거야."
마지막. 여기에서까지 김민혁이 할 말이 남아있다면 내쪽에 준비된 카드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일종의 확신은 있었다. 원미영의 말이 맞다면 분명히 내 말에 반론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2분의 1확률. 판돈을 걸기에는 충분한 도박 아닐까.
"제발 그만 좀 피해! 넌 네가 쌓아온 모든 것을 전부 다 바쳐서 한 번 도피했잖아? 이제는 나에게서까지 도망칠거야? 도피가 그렇게 좋아?
쓸데없는 것을 당당히 맞서라고 하는 건 아냐! 피할 수 있으면 피해! 다만 네가 좋아하는 것을 아무런 얻는 것도 없이 자신을 비하하는 것으로 피해다니지 마!"
김민혁은 놀랐는지 아주 약간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힘이 빠진 로봇처럼 한숨을 푹 쉬며 찌그러졌다. 어딘가의 영화처럼 관철이나 이음새 부분에서 뜨거운 증기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도 김민혁은 할 말이 있었다. 나는 짙은 패배감에 싸여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김민혁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여겼는지 나를 따라 입을 멈췄다.
"왜 그래?"
"내가... 그렇게 싫어? 내가 좋아하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싫은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다고 할 사람은 없겠지.
그런데 김민혁은 지금까지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있다가 처음으로, 표정이 굳었다.
"아니, 잠깐만. 그건 아냐. 다만 행복해지려면 서로 부딫치지 않는게 좋다고 보는데."
무슨 생각을 떨쳐내려는 것인지 김민혁은 고개를 강하게 가로저었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됐잖아. 다른건 다 필요 없어. 나랑 부딫치면 나까지 불행해진다고 했지?"
김민혁은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을 표했다.
"나랑 같이 나락 끝까지 떨어지기 싫으면 저리가."
아, 안돼겠어. 이 인간 너무 꽉 막혀서 한 대 더 치고 싶어졌어.
열이 팍 올라버렸다. 이 인간,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리고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측은한 마음이 생겼다. 김민혁이 한 말이 진짜라고 하면, 이 사람은 지금까지 살면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암울했을 것이다. 내가 그럴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김민혁에게 확실하게 말해두고 싶었다.
"내가... 내가 끌어올려 줄게."
김민혁은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손을 잡고 말했다.
"응?"
김민혁은 고개를 갸웃거려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지옥에서 꺼내줄게."
내 생각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아주 약간 당황했다.
방금 김민혁의 말로 지금가지의 내가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통절하게 느꼈다.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분명히 앞으로 계속 만나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벼운 연애감정으로 치유할 수 있는 상처로 끙끙대고 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떻게?"
김민혁은 고개륻 돌리고 말했다.
"잘 될지 어떨지는 몰라. 다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걸 해줄게.
그리고 미안해. 네 상처가 그렇게 깊은줄 모르고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어."
아주 잠시동안의 침묵이 있고, 김민혁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넌 못할 것 같아."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고 돌아서려 했다. 여기에서 나가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니, 내 생각보다 먼저 손이 나가서 김민혁의 팔을 잡고 있었다.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
내 말에 김민혁은 분한 것 같이 어금니를 마찰시켰다. 귀 아래쪽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난 행복해질거야. 하지만 나 혼자서라면 그걸로 됐어. 내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건 나보다 너야. 만약... 우리 둘 중에 한 명만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난 주저없이 너에게 줄거야.
너 혼자서는 답이 없었잖아? 둘이라면... 방법이 생길지도 몰라."
김민혁은 참담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졌다. 인정할게. 네 맘대로 해."
김민혁은 한 손을 들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나름의 항복표시인 것 같았다.
"그럼... 내가 곁에 있어도 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김민혁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어어. 전리품이잖냐. 버리려면 언제든 버려."
그런일은 없을거야, 라고 덧붙이기 이전에 웃음을 지으며 김민혁을 끌어안았다.
"미안. 늦어버렸네.
좋아해, 김민혁. 나중에는 어째서일지는 모르겠지만 얼굴도 보기 싫어질지 몰라. 하지만 난 지금 분명히 널 좋아하고 있어. 그건 잊지 말아줘."
김민혁은 품속의 나를 어쩔지 모르고 머뭇거렸다.
삐걱거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나름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는 몰랐다. 어쩌면 죽는 그 순간까지 걸릴지도 몰랐다. 다만 지금은 할 수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고양이는 우리 둘이 일어나자마자 책상 위에 두었던 지갑 두 개를 한꺼번에 물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입을 건 다 입고 있었고, 아무일도 없었다. 김민혁에게 이것 저것 묻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굉장히 지나버려서, 그리고 아주 약간 장난기가 동해서 김민혁에게 자고 가도 되냐고 물었더니 김민혁은 머뭇거렸다.
'너 남자를 너무 신사적으로 보는 것 같은데... 그 성격 고치지 않으면 고생할지도 몰라.'
김민혁은 그렇게 말했고, 내 다음말을 듣고 참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날 소중히 대해줄거라고 믿으니까 괜찮아.'
김민혁은 끝에가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먼저 침대에 처박혀버렸다. 화가 났다기 보다는 내게 질려버린 것 같았다.
어쨌든 고양이는 우리 둘이 일어나자마자 어떻게인지 열려있는 문을 통해 나갔다. 공황상태에 빠질 시간도 없이 우리 둘은 빨리 일어나서 걸어야 했다.
그런데 정작 김민혁은 그닥 투덜대지 않았다. 방금의 한 마디가 전부로, 욕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다는 내 예상과는 꽤 많이 달랐다.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저 고양이는 무슨 생각으로 사람을 질질 끌고 나온걸까."
아는가 싶어서 물어보았는데, 김민혁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고양이가 아니니까 모르겠어."
김민혁이 몸을 제대로 펴면서 말했다. 고양이는 입에 김민혁과 내 지갑을 물고있었다. 내건 비어있으니까 그냥 놔둬도 괜찮겠지만, 김민혁의 경우는 35만원이라는 거금이 들어있다는 말에 외투도 못 챙겨입고 나와버린 것이다.
[야옹]
고양이는 그렇게 울며 멈춰섰다. 고양이의 앞에는 지갑이 두 개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가가자 고양이는 우리가 간 만큼 더 멀어져서 지갑을 줍는 우리를 앉아서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바라보았고, 나는 놀라서 입을 떡 벌려버렸다.
고양이는 뒷다리를 접어서 앉고, 왼손으로 균형을 잡은 뒤 오른손을 양 쪽으로 흔들고 있었다. 영락없는 사람아닌가.
김민혁도 약간 놀라는 것 같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고양이를 바라보더니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뒤 고양이를 따라서 손을 흔들었다.
"저... 저거..."
멍해져버렸다. 이거, 진짜로 사람이잖아.
"이해하지 마. 세상 살면서 모든 일이 네게 이해될만한 일이 되는건 아냐."
김민혁은 담담히 말했다. 나도 잘 생각해보니, 나에게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손을 흔드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인사이지 않을까. 지금까지 안했던 것으로 보아, 아마 긴 이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말리고 싶었지만, 이미 의사소통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가 말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어쩔 수 없었다. 이 두 달동안 굉장히 정이 든 고양이지만, 잡을 방법은 없었고, 잡아서 할 일도 없었다. 그저 내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틀린 소유욕으로 잡아두기에는, 저 고양이가 너무 아까워보였다.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천천히 손을 흔들자 고양이는 씩 웃는 것 처럼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렸다. 나도 그것을 보고 뿌듯해져서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는 몇 초 동안 손을 더 흔들다가 미련없이 돌아서서 꼬리를 활발하게 휘저으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울지마."
김민혁이 내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울 생각은 없었는데, 눈물은 그 이후로도 몇 분간 나왔다.
"어디로 갔을까?"
의미없이 말했다. 김민혁도 알리가 없었다.
"글쎄. 재주 많은 고양이었으니까 말이지. 거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잖아."
"응?"
"결국 저 고양이는 자신의 마음과 행동이 안 맞았을 때, 자신을 혐오할때와 같이 잘못된 짓을 했을 때 참견했잖아. 누군가... 있겠지. 우리처럼 자기 마음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Last part -고양이- End.
Epilogue -도피의 끝-
따뜻한 봄날에, 에어컨은 완전히 고장나서 열만 내고 있고, 창문도 없어서 쪄 죽을 것 같은 날이었다. 그래도 내 방 보다는 더 나을 것 같아서 눌러앉아 있었다. 뭐, 그닥 시원하지는 않지만서도.
"잘하는건 뭐 있어?"
내가 김민혁을 쏘아보며 말했다.
세 달 동안 김민혁과 붙어다니면서 알 수 있던 것은, 이대로 가면 명백히 위험해진다는 것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나이는 대략 35세까지. 그런데 평균수명은 현재 약 90세. 단순계산이라도 노후준비가 가능할리 없었다.
"없어."
이렇게 말하는 김민혁은 피식 웃고있었다. 예전 같으면 당연한 기정사실을 말한다고 생각해서 굳은 표정이겠지만, 지금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짓고있었다.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김민혁도 도피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혐오해서 자신을 무신경하게 바꿔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굉장히 빨랐다. 내가 적당히 의지가 될 때는 의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그러면서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 물론 그건 칼날 위를 걷는 것 처럼 미묘한 균형을 맞춰야 해서 굉장히 힘들었다. 아직 보통의 활발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김민혁은 적어도 전보다는 인간미가 있게 되어있었다.
"음... 그럼 맨날 키보드를 두드리던건 뭐야?"
김민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짓다가 노트북을 열어서 전원버튼을 눌렀다. 컴퓨터나 기계에 약한 나는 아무래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거."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모니터를 돌려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나도 익히 본 적 있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에 글자가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이거다."
느낌이 좋았다. 아니, 정확히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작가의 역량 중 하나는 어떤 상황을 서술하는데에 있어서도 평정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김민혁은 그 부분에 있어서라면 굉장할 정도의 자질을 갖고있는 것이다.
"응? 이게 뭐?"
김민혁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이거야, 이거."
"그니까 그게 뭐? 내쪽은 아직 퇴고도 안된데다가 검증안된 녀석을 보여주니까 굉장히 부끄럽다고. 빨리 끝내."
"이걸로 노후준비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김민혁은 한숨을 푹 쉬고 아직도 그 이야기냐, 라고 투덜댔다. 김민혁은 언제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애늙은이라던가, 우리는 아직 젊다거나, 그때까지 내가 붙어있지 못할 거라는 등의 핑계를 대며 어물쩍 넘기고 있었다. 그래도 평생을 붙어있기로 작정했으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했다. 이런 직업들은 정년퇴직이 없다고 해도, 지금부터 준비할 것은 많아보였다.
"쯧. 거기에 소재가 떨어져서 막혀버렸다고. 이것도 곧 미완성본 모아놓은 폴더에 처박힐걸."
"소재? 소재는 있잖아."
김민혁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우리 이야기를 쓰자. 나쁘지 않잖아?"
"자기 일을 객관적으로 볼 자신이 있어?"
"너나 나 혼자라면 힘들겠지만, 두 명이잖아? 시소처럼 서로 교정할 수 있을걸?"
김민혁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켜놓았던 프로그램을 '중단'이라는 폴더에 옮겼다.
"그럼 시작하자고. 나도 지지부진한 것 붙잡고 씨름하는 취미는 없어. 잘 되는것부터 하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것이 당신이 보고 있는 글의 전말이다.
생각해보면 꽤 파란만장한 한 달이었다. 가족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일상을 잃었고, 순결을 잃었고, 집을 잃었고, 안락함을 잃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이득이 있다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두 손을 써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 자신의 행복을 일궈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나에게 이 미래와, 한 달 전의 일상이 계속되는 미래를 놓고 선택하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내가 살고있는 이 미래를 선택할 것이다.
가족과 함께 있을 때도 물론 행복했다. 더 없이 행복하고 안락한데다가 가만히 있어도 존재하는 것 만으로 내게 주어지는 것이 있었다. 어떤 것을 위해 분투할 이유도 없었고, 그저 만들어진 평화와 안락에 취해 부유하듯이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편했다.
하지만 지금의 만족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살아있다고 굉장할 정도로 확실히 느끼고 있었고, 내 손으로 만들어낸 행복에 취해 만족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내일은 불확실하다. 불확실하다는 것 만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윤곽마저도 결정된 미래가 없다는 것은, 지금부터 뭔가를 시작하면 미래에 무언가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대학을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인생도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인생에서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될지 생각하면, 그 만족감마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나는 주저없이 내 인생을 후회하지 않고 돌아볼 자신이 있다.
누가 뭐래도 내 인생은 내 것이다. 힘들지도 모른다. 불안하기도 할 것이다. 분명히 원망할 일도 생기고, 후회할 일도 꽤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내 인생에서 내가 일궈낸 내 행복은 나만의 것이다.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성과다. 0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기에 나는 굉장한 만족감에 기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싶은 말이 하나.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책임지게 되어서도 안 된다. 그 성취도 업적도 자신의 것이고, 그 실패도 자신이 책임질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도 당신이 할 일이고, 누구도 대신해주지 못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가 되어도, 아무리 깊은 사이가 되어도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살아야 할 것이다.
너무 긴가? 요약하면 간단하다.당신이 자신의 인생에 주체가 되어라.
SOLITUDE (고독) - Ella wheeler wilcox
웃어라,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되리라.
낡고 슬픈 이 땅에선 환희는 빌려야만 하고,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득하니까.
노래하라, 언덕들이 응답하리라.
탄식하라, 허공에 흩어지고 말리라.
메아리들은 즐거운 소리에 춤을 추지만
너의 근심은 외면하리라.
기뻐하라, 사람들이 너를 찾으리라.
슬퍼하라, 그들은 너를 떠날 것이다.
사람들은 너의 즐거움을 원하지만
너의 고통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즐거워하라, 그러면 친구들이 늘어날 것이다.
슬퍼하라, 그러면 그들을 다 잃고 말 것이다.
네가 주는 달콤한 술은 아무도 거절하지 않지만
인생을 한탄할 때는 너 홀로 술을 마시게 될 것이다.
축제를 열라, 그럼 너의 집은 사람들로 넘쳐나리라.
굶주리라, 세상이 너를 외면할 것이다.
성공하여 베풀라, 그것이 너의 삶을 도와주리라.
하지만 아무도 죽음은 막지 못한다.
즐거움의 방들엔 여유가 있어
길고 화려한 행렬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좁은 고통의 통로를 지날 때는
우리 모두는 한 줄로 지나갈 수밖에 없다.
※ 끝. 쫑. END.
넵. 끝입니다. 더 없어요.
...... 그리고 읽는 사람도 없지요(묵념).
아무나 감평이라던가 까주던가 좀 해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