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앞으로 쏠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기억의 파편을 보았다. 사실은 내가 뛰어내리려던 순간 아래쪽을 보고 생각을 고쳐먹었는데, 아무래도 악몽인지 그 부분만 빠져 있었다.
현선우는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리고 곧 나를 깨우려고 할테니까 먼저 일어났다. 현선우는 예상대로 팔을 뻗다가 움직이는 나를 보고 멈췄다.
공덕역에서부터 그려져 있는 약도는 양지은의 집까지 10분 이내에 갈 수 있다고 적혀있었다. 다시 달리려는 순간 현선우가 나를 만류했다.
"의사 기다려야지."
"이거 보고 찾아와."
그렇게 서류봉투를 현선우에게 맡기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은 당연하게도 잠겨있었다. 그것을 조용히 문고리를 당겨서 확인하고 다시 열려있던 대문으로 돌아갔다. 심호흡을 깊게 해서 숨을 진정시켰다.
땅은 완전히 얼어있었고, 아주 약간씩 풀과 잡초가 섞여 있어서 발소리가 날 걱정은 없었다. 조용히 움직이면서 창문 근처를 돌아다녔다. 무슨 소리가 나는지 알기 위해 귀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마 눈 앞에 누군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부딫쳤을 정도로.
결국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베란다의 구석에서 방쪽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어두워서인지, 방에는 불이 들어와 있어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현관문으로 돌아왔다.
쯧. 되도록이면 쓰고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용히 동전지갑을 꺼냈다. 회색의 적쇠와 꺽쇠를 양 손에 쥐었다.
자물쇠가 돌아가는 원리는 간단하다. 다섯개에서 여덟개 정도의 원통형 실린더가 있고, 각각의 핀이 있어서 그 핀들이 일정한 위치에 오면 문이 열리는 형식이다. 그러니까, 열쇠가 없더라도 핀을 일정한 높이에 놓을 수 있는 어떤 장비가 있으면 문은 열리게 되어있다. 다만, 굉장히 힘들다 뿐이지.
전문적인 도구로 록픽이나 피킹툴 같은 도구는 분명히 존재했다. 단지 내 지갑사정이 굉장히 나빠서 갖지 못한 것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시도했던 해정(解鋌, 자물쇠열기)중에서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좀 오래 걸렸다는 점.
내가 쓰는 물건은 현선우가 쓰다가 필요없게 되어서 내게 준 물건이었다. 꺽쇠와 적쇠로 불리는데, 꺽쇠로 실린더를 정렬시키고 적쇠로 핀을 눌러 고정시키는 물건이었다. 원래 만드는 제작공정은 나이프를 단조하는 제작방식이어서인지 손잡이에는 손때가 새까맣게 묻을 정도인데도 이 하나 나가지 않았다. 나도 심심해서 현선우에게 배웠던 것으로 몇 번인가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범법행위는 아니고, 이 동네에는 열쇠방이 굉장히 희귀한데다가 또 가격이 비쌌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이 부탁하면 몇 번 열어준 정도였다. 저번주에도 두 번인가 열어주었으니까 몇 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보다 더 간단한 법을 찾는다면, 얇고 넓적하고 작은 쇠판을 열쇠구멍에다가 넣고 삽시간에 굳힐 수 있는 물질... 예를들어서 시멘트 따위를 채워넣으면, 즉석에서 열쇠가 만들어진다. 다만 일회용에다가 문짝 통째로 갈아야하고, 누군가가 열었다는 것을 반드시 들키게 되어버린다. 사실, 애초에 들켜도 된다는 전제라면 가장 깔끔하게 도끼나 공사장 해머로 문을 으깨버리고 들어가는 것도 방법이다. 시멘트를 사용한 것은 현선우의 사무실에 있는 금고가 최초였고, 아마 최후일 것이다. 지금은 어딘가의 고물상에 굴러다니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기까지 왜 중얼거렸냐 하면, 더럽게 안 열리기 때문이었다.
녹을 없애는 윤활제가 있다면 진작에 열고 들어가서 뭔 짓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문짝은 쓴지 하도 오래되어서인지, 아니면 누가 엉성하게 록픽질을 하다가 록픽을 부러뜨린 건지 핀은 분명히 여섯개 다 맞췄는데 열리지 않았다. 인내가 한계에 도달해서 숨을 푹 내쉬고 적쇠와 꺽쇠를 힘으로 비틀어보았다. 그러자, 문은 소리없이 열렀다.
허탈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안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양지은일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발소리를 죽이고 신발을 신은채로 안에 들어갔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식은땀이 등을 메우고 있었다.
해정도구를 주머니에 넣고 방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끼걱거리는 가구의 소리가 들렸고, 낮은 음성으로 말이 되지 않는 중얼거림을 반복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킥킥거리는 역겨운 웃음소리와, 로션 위에서 발을 구르는 것 같이 찌걱거리는 소리. 비릿한 생선의 피냄새와 흡사한 피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내 이성을 놓게 만든 것은 3일 전까지 내 방에 있던 양지은이 울며 흐느꼈던 그 소리가 지금 들렸기 때문이다.
내 자신이 생각하기도 전에, 양 손에는 검고 긴 줄이 잡혀있었다.
그리고, 이후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이성이 타버린 건지, 아니면 처음으로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무력을 휘두르는 것에 당황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이성보다는 본능과 반사적인 행동이 내 의사결정을 도맡아서 했다.
첫번째로, 침대 위에서 허리를 흔들고 있던 녀석의 뒤에 다가가 줄을 두 바퀴 돌려 감고 양 팔을 쭉 늘렸다. 어느 정도의 힘이었는지, 얼마만큼의 시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목을 파고든 줄을 떼어내기 위해 자신의 목을 쥐어뜯던 녀석이 잠잠해질때까지 누구도 만류하지 않았다.
두번째로, 방에 굴러다니고 있던 전등의 몸체로 보이는 물건을 들어 다른 한 사람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전구가 깨지고, 필라멘트가 박히고, 나무 몸체의 한 부분이 빨갛게 물들때 즈음 그만 두게 되었다.
세번째로, 옆에서 누군가가 차서 벽에 세개 들이받았다. 그리고 이미 날을 꺼내고 있었던 잭나이프를 한 손으로 으스러뜨릴 정도로 꽉 잡았다. 녀석도 놀랐는지 뒷걸음질 치다가 벽에 부딫쳤다. 조용히, 침착하게 다가가 나이프를 날이 아래로 가게 역수로 잡고 머리 위에서 내리찍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팔을 잡고 넘어졌다. 차이는 통에 떨어뜨렸던 전등의 몸체 위로 누워버렸다. 그것을 계기로 이성이 행동의 주도권을 잡았다.
"거기까지."
현선우의 목소리였다. 아까전부터 눈은 계속 뜨고 있었는데, 지금 방금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숨은 극도로 평온했고, 방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흘렸던 땀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현선우는 내가 나이프를 집어넣는 것을 보고 천천히 일어났다.
"왜 막은거야? 아는 사람이냐?"
현선우를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현선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나를 잡아서 방 밖으로 끌고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계속 그 방에 있었다면, 그래서 침대 위에 뻗어있던 양지은에게 눈길을 한 번이라도 주었다면, 나는 이성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현선우의 선택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아니. 분명히 후회할테니까 막았어."
현선우의 말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나에 대한 호의였다는 것 만은 확실히 알았다.
"이거 또... 심하네."
한 달 전까지 나를 신나게 내동댕이쳤던 사람이 방을 들여다보고 말했다. 이 사람이 내게 가짜약을 준 사람이고, 내게 무술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키는 나보다 약간 작아서 목에 오는 정도였고, 긴 생머리에 파란색의 머리카락을 갖고있었다. 천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인 말로는 후천적이지만 염색은 아니라고 했다. 한 달 전이나 오늘이나 가까이 가면 과일향수의 냄새가 아주 옅게 났고, 겉으로 보이는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이목구비는 굉장히 뚜렷하고 아담해서 솔직히 동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이지만, 현선우는 피식 웃으면서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나보다 열 살 정도 위라고 한 달 전에 알려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림이 왜 여기에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여기는 왜..."
"의사 찾는다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손이 굉장히 섬세해보였고, 나를 훈련시키면서도 게속 가죽장갑을 손에서 때어놓지 않았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 손으로 의술을 행하는 것은 전혀 연상되지 않았다.
"저... 현선우?"
현선우는 나를 보고 기억났다는 듯이 말했다.
"성함은 박보람. 내 상관이셨고... 3년 전에 은퇴해서 본직으로 돌아가 있어. 믿기 힘들어? 만약 안 고쳐지면 그 칼로 날 찔러."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믿지 않을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신뢰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걸리는 것이 하나.
"저... 그런데 남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내용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있던 것 같은데요."
얼핏 주워들은 수준이지만,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다.
"안 했어, 그런거."
털털하게 말하는 태도로 보아 분명 그 사람이었다. 말뜻을 이해하고 인상을 쓰기까지는 약 1초 정도 걸렸던 것 같았다.
"야, 현선우."
괜찮은거냐? 라고 물으려는 순간 현선우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자, 남성분들은 이것들 좀 들고나가요."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군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가 최대한 침대에 시선을 주지 않고 쓰레기만 끌어냈다.
"30분이면 될거야. 담배 피우려면..."
"피우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에서 피가 나는 쓰레기를 옷을 잡고 끌어냈다.
다만 내가 이상하게 여긴 것은 어째서 방에 있는 모두가 널브러져 있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둘을 분리수거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는 남아있어야 할텐데.
"그런데 그건 어떻게 된거냐?"
내가 처리하지 못했던 쓰레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현선우에게 물었다.
"나도 열받아서 말이지. 네가 잠시 멍해진 사이 눕혀버렸어."
그리고 현선우는 다시 그 기절한 녀석에게 몇 번인가 발길질을 해댔다.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면, 내가 왜 퓨즈가 나가서 저런 짓을 했을까. 모두 다 맥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살아있는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양지은과 나는 남남이었다. 이렇게까지 할 권리도 이유도 내겐 없었다.
"왜 이랬을까."
혼잣말을 하듯이 말했다. 현선우는 피식 웃더니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용서할 수 없던 거겠지."
"좋아하는 것도 아닌 내가 왜?"
"사람이라면 당연히 분노하지 않을까. 거기에...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의 정은 있을 거 아냐."
설마, 라고 쏘아주지는 못했다. 그것마저 부정한다면 내가 양지은을 좋아한다고 믿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왜지. 내가 그렇게 분노했던 이유가 뭘까.
30분이면 끝난다는 조치는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방해하기 싫어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 보았더니 산부인과 의술은 써본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그게 30분 전의 일이었다.
"끝났어. 들어와."
메치기가 환상적인 의사가 그렇게 말하며 박수를 쳐서 졸고있던 우리를 깨웠다. 쓰레기들은 한데 묶어서 어떻게 처리할지 본인에게 묻기로 했다.
양지은은 초점없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의사는 기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소독은 제대로 된 것인지, 안전한건지 묻고싶었지만 저쪽에서 속일 마음으로 나온다면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애초에 의미없는 논쟁이 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그런데... 용케 알아차렸네?"
의사는 그렇게 말하며 청색 가방에 도구들을 정리해서 집어넣었다.
"불행은 많이 겪어봐서 감지할 수 있거든요."
그렇게 대꾸하고 양지은을 좀 더 살펴보았다. 옷은 여기가 양지은의 집이니까 어렵지 않게 구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도 반 정도 걸레가 되어버린 옷이 방 구석에 굴러다니는 모습은 전혀 보고싶지 않았다.
마지막에 보았을 때 얼굴에 있던 상처는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건만, 이제는 확실히 흉이 질 것 같이 깊게 상처가 나 있었다. 긁힌 상처가 아니라, 뭔가가 물어뜯은 것 같은 상처였다.
"흉터는 남지 않을거야. 한 시간도 안 된 상처라서 다행이지."
약간 안심했다. 내쪽이 그 상처를 보면서 양지은을 똑바로 대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옷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집에 간다고 했던 그 사람이 연락이 되지 않는 것에서 곧바로 이상을 알아차리고 달려올 수 있지 않았는가.
"저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막막한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사과한다고 용서해줄까. 용서하지 않는다면 난 어떻게 해야할까.
"네가 잘못한 건 없잖아?"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굉장히 긴장감 없는, 장난치는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있어요. 내가... 내가 부추겨서 왔다고요.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아차렸으면..."
"좋게 보라고. 네가 안 왔다면 지금도 진행중이었을 재앙이야."
현선우가 침울해져서 말했다.
한동안 생각이 뒤엉켜서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생각을 정리했다.
"너도..."
양지은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모든 생각을 멈추고 양지은을 바라보았다.
"너도 날 원해?"
눈이 마주친 순간 얼어붙었다. 무저갱. 그 눈 안에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있었다. 그야말로 '끝'이라는 개념마저 어둠으로 물들어버린 것 같이 공허한, 그리고 깊은 구덩이었다. 나에게 초점이 맞는 것 같지 않는 눈으로, 그저 천장을 바라보던 눈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 그리고
[짝]
박수를 치는 것 같은 마른 소리가 울렸다.
상황을 이해하기까지 3초. 의사는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뺨을 풀 스윙으로 갈겨버린 것이다.
"왜...?"
"당연하잖아."
당연하다고 의사는 말했다. 지금 누워있는 환자가 뭘 잘못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되는거야?"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지 않습니까."
"말 할 수 있으면 뇌쪽에 이상은 없다고 봐도 좋아. 대뇌를 건너뛰고 중뇌부터 타격이 있는 경우는 약물정도고.
정신적인 쇼크라고 해도, 이미 머릿속으로 알고 있을걸? 네가 그런 마음을 갖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만 두기로 했다. 애초에 내가 가진 돈으로 치료비를 다 댈 수 있을까도 고민이었고, 내가 여기에서 발끈할 이유는 이성적으로 찾을수가 없었다. 부글부글 끓던 머릿속을 차가운 이성으로 식히고 반론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아파... 아픈건 싫어... 그만해줘..."
쇼크는 대단한 것 같았다. 그 말만 계속 하며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지도 못했다.
"저, 그래서 돈은 얼마입니까?"
의사는 그 말에 막 생각이 났다는 것 처럼 허공에 주판을 튕기기 시작했다. 주판을 어떻게 쓰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굉장히 빨리 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굉장히 많이 낼 것 같았다.
"뭐, 좋아. 10년 후에, 네가 버는 돈의 40%만 내. 받는건 그때가서 할게."
"오래 사셔야 할 것 같네요."
현선우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런데 내족은 조금도 웃을 수 있을만한 여유가 없었다.
"서로 좋아하는 거지?"
의사는 갑자기 웃음기를 지우고 그렇게 말했다.
"아뇨, 저는..."
무엇에 뜨끔했는지는 모르겟지만, 의사의 눈과 마주치자 나는 반사적으로 말을 삼켰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따위가 아니라,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도 말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 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짜로 아니야?"
그래도 그것 뿐이었다. 뜨끔하는 것 따위, 마음이 살아있는 녀석에게나 적용될 일이지.
"아니에요."
내 태도를 보고 의사는 끄덕거린 후 플라스틱 통 두 개를 내밀었다. 각각 손에 잡힐 정도로 작은 반투명의 통이었다.
"오른쪽거는 안정제. 왼쪽거는 수면제야. 둘 다 후유증에 대처하라고 주는건데, 자학기질이 보이면 안정제를, 불면증이 보이면 수면제를 써."
"...... 궁금해서 묻는 겁니다만, 얼마쯤 합니까?"
"아- 그거? 합해서 3천원 정도. 난 2천원에 구했어. 약이 비싸다는 편견은 버려버려. 공장에서 찍어내는 생산원가가 400원 수준일걸."
약간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괜찮을거야. 부러진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디 잘린것도 아니고. 마음은 시간이 약일거고. 이 아이, 가족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무리 구해준 사람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볼 권리가 있나?
"나머지 가족은 필리핀의 수도인 페트로마닐라에 있어요."
현선우는 이후에 나를 보면서 '병원비 치고는 싸잖아'라며 덧붙였다. 뭐,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의사는 가방을 등에 매고 일어나면서 피식 웃었다.
"여기있는 사람 전부 동류(同類)네. 정상이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그리고 이건 명함. 이름에 전화번호밖에 없지만 명함이야. 또 일 있으면 연락줘. 다음부터는 현찰로 받을거야."
의사는 그렇게 냉소적으로 웃으면서 현관문을 나갔다. 현선우와 나, 그리고 양지은만이 방에 남았다. 양지은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말하듯 아까전부터 때리지 말라는 말만 게속하고 있었다.
"어쩔거냐? 아르바이트는."
이제 또 현실적인 문제가 들이닥쳤다. 솔직히 말하면 그 문제가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다.
"양지은을 지금 들쳐업고 고시원으로 돌아간다... 고 하는건 무리가 좀 많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의식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옮긴다고. 거기에 지금 상태로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을 허락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말이라고 하냐."
현선우도 나를 따라 피식 웃었다.
"어쩔까. 내가 낼 수 있는 방법은 오늘 아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서 갈 수 없다고 전화로 통보하는 것 정도야. 내일이면 '너 짤렸어'라고 사장은 말해올거고."
오후파트 아르바이트는 굉장히 경쟁률이 높은데다가 위험부담이 적고, 거기에 시간도 짧은 편이었다. 얼핏 보았던 장부로는, 내 뒤로 8명인가가 대기중이었던가.
"그러고 싶어?"
"다른 방법이 있다면 하겠지."
그렇게 말하고 체념하며 전화기를 들었다. 아, 젠장. 이제 실종사망이 되어서 동사무소에서도 등본을 떼어주지 않는데.
"시간당 얼마 받아?"
"4300? 4200? 왜?"
"오케이. 합격. 그럼 다른 사람이 대타로 뛰어주면 시간당 5600원 이상 낼 의사가 있냐?"
"미쳤냐. 적어도 3일동안 그렇게 해야할텐데, 수입 하나도 없이 6000원 가까운 돈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아."
"그게 아니라... 네 계산에 맞춰주면 시간당 1300원 정도만 내면 돼. 계산은 나중에 월급날 월급 받을때 해주는 시스템이고. 아직 이해가 안돼? 한시간에 4200원 받는 건 당연히 일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한테 주고, 너는 추가적으로 1300원만 더 내라는 거야. 물론 정산은 월말가서.
양쪽에서 돈 먹고 튀는 녀석들이 많아서... 이렇게 내가 고안해봤어. 어때?"
그럼 뭐... 합리적인 가격인가? 1300원이면 아르바이트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이번 3일동안 쓴다고 하면, 내 손해는 단순계산으로 하룻동안 일하는 임금이었다.
"좋아. 할게."
"대신에 하나만 인정해라."
뭘? 이라고 묻는 것 대신 고개를 갸웃 거리는 것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너 양지은을 꽤 많은 수입보다 중시하고 있어."
부정할 수 없어서 조용히 혀를 차는 것으로 분함을 나타내었다. 시간은 두시가 조금 넘고 있었다.
현선우는 전화하고 10초만에 내가 일하는 곳을 물어왔다. 굉장한 수완가랄지, 그 상황에서도 자기 몫으로 얼마를 챙기는 것을 보면 상인이랄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근데 사무소는 괜찮냐?"
할 말이 궁해져서 그렇게 말했다. 양지은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이내 잠들었고, 링거는 정말 느리게 조정되어 있는건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흥신소가 항상 바쁘겠냐. 그 일대에서는 하나 뿐이지만 대부분이 고시병 걸려서 공부하고 있다고. 바쁠리가 있나."
현선우는 그렇게 말하고 '강남이라면 좀 다르겠지만'이라며 뺨을 긁적였다.
"내가 어떻게 하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머리를 긁으면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뾰족한 수가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너한테 책임은 없어.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설마 너 빚쟁이들한테 정보 팔아먹은건 아니지?"
현선우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입에 올렸다.
"나도 정보를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어. 내 캐비넛이지만 아직 남아있는지도 몰랐으니까."
"그럼 됐잖아. 솔직히 너도 알고있지 않냐? 네가 지금 자신을 책망하는건 바보같은 짓이라고."
"내가 옷 이야기만 꺼내지 않았어도 여기에 올 일은 없었어."
"그래서? 그게 네 의도였어?"
"의도가 중요한게 아니라 결과가 중요하지."
"네 논리대로 하자면 세상에 떳떳한 사람 아무도 없어. 예를들어서 네 지갑속에 있는 만원 지폐가 위조지폐라고 가정하면, 쓰고있는 넌 중범죄자네?"
나름 타당한 예시였다. 할 말이 없었다. 나도 한 구석으로는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그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이중으로 움츠러들었다.
"정말로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더 시간이 가기전에 어떻게든 손을 써봐. 이런 것은 시간이 약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때는 죽어서도 쫓아다닐 트라우마가 될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마약이라도 구해서 놓아주면 될까?"
그거라면 확실히 행복해지겠지. 발상이 빈곤하다기보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인 것 같았다.
"그런 짓 하면 평생 의존증에 시달릴걸. 네가 바라는게 그거야?"
"그건 아니지."
"좀 더 고민해보자고. 애초에 한 사람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몇 분 만에 뚝딱 답이 나온다는 것도 넌센스야. 나도 오늘 하룻동안 여기서 같이 궁리할게."
그 말을 듣고 현선우에게 아직 하지 못한 말이 생각났다.
"어이 현선우."
"어?"
현선우는 얼빵한 얼굴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도 슬슬 졸렸다.
"너 좋은 녀석이야. 고맙다."
현선우는 결국 돌아가버렸다. 계속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있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 1년 정도 전의 상관이 찾아왔다면서 가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 주었으면 했다. 양지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그리 탐탁치 않았다. 오히려 정직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일생동안 짊어지고 갈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누구나 싫어할테니까, 되도록이면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남은 문제는 문제는 쓰레기의 분리수거. 직장으로 보이는 차림의 둘과 딱 봐도 노숙자인 쓰레기 하나. 다들 나도 범행에 동조시키고 싶어했지만, 그럴 마음이었으면 쓰레기들을 묶어놓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현선우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필시 죽였을 것이다. 그런데 후회라니. 이것들은 인간같지도 않은데.
양지은은 여섯시간 정도를 잤다가 일어났다. 그런데 일어난 후에도 굉장히 풀린 눈이어서, 뭐라 말을 걸기가 굉장히 미안했다.
"김... 김민혁?"
"알아보는구나. 다행이네."
안도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됐어. 생각하지 마."
그 일을 서로 기억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싶겠지. 이거 또 최면술사 같은 거라도 찾는 편이 좋을까.
"국수 끓일테니까 좀 먹어. 알았지?"
양지은은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생각했다. 나도 좀 자둘걸.
졸린 상태의 칼질은 확실히 위험했다. 고추를 썰었는데, 어째 파란색 고추가 빨갛게 되어있었다. 왼손에 난 세 개의 칼자국은 사소한 문제니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멸치와 미역만 넣고 끓인 국물에 야채를 넣었다. 면을 삶을때는 약간 덜 익다시피 한 상태에서 꺼낸 뒤 국물에 넣고 조금 더 끓였다. 내가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요리는 얼마 되지 않는데, 라면 다음으로 잘 끓이는 요리를 말하라고 하면 주저없이 이걸 말할 것이다.
"뭐야?"
양지은은 불을 끄고 싶은 것인지 계속 불을 껐다. 어디 부러지지는 않았다고 해도 움직이기 힘들 것 같은데, 용케 일어나서 계속 불을 껐다. 뭔가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았다.
"잔치국수. 나 싫다고 버리지 마. 먹을거에는 죄가 없어."
추측이지만, 남성 기피증이라는 것도 있기에 일단 말해두었다. 그러자 양지은은 별 대꾸없이 먹기 시작했다.
"맛있네."
갑자기 또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양지은이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원인이 저기에 있는 쓰레기 세 봉투라는 것을 유추해냈다. 후회해도 좋으니까 봉투 하나만이라도 내가 없애고 싶었다.
"부엌 멋대로 썼어. 미안해."
역시 대답이 없었다. 다만 후룩거리면서 먹는 소리만이 울렸다.
"어이 형씨. 나도 좀 주지?"
달그락, 하고 접시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희미한 가로등의 빛에 의지해서 양지은을 살펴보니, 완전히 굳어서 무서워하고 있었다.
"아직... 있었어?"
애초에 치워놓는게 더 나았나. 현선우가 하도 본인이 결정할 문제라고 해서 남겨두었는데.
"묶어놨어. 절연테이프랑 박스테이프를 전부 써서 묶어놨으니까 일어나지도 못해."
글러먹었다. 양지은은 덜덜 떨기만 할 뿐 대화를 하려는 기색도 없었다.
"양지은?"
1분 넘계 계속 부르자 양지은은 그제서야 나에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원망하는 마음은 없었다. 내 책임이 반 이상이었으니까.
"아... 응?"
"진정해. 진정하라고."
고양이 앞의 쥐도 이것보다는 더 떨지 않을 것 같았다. 슬슬 저 쓰레기들을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양지은이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믿고있기는 한데... 솔직하게 말해줘."
"응. 그럴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이걸로 찌르던가."
반 정도는 '못 찌르겠지'라는 판단으로, 반 정도는 어차피 죽은 녀석이니까 여기서 죽어도 나쁘지 않다는 심정으로 날을 뺀 잭나이프를 양지은의 손에 들려주었다. 자해가 걱정되기는 했지만, 자해증상이 있다면 애초에 젓가락이 들렸을 때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건?"
"나이프야. 날이 나와있으니까 그냥 찌르면 돼. 그만... 불 켜도 될까?"
"켜지 말아줘."
양지은은 즉답했다. 자신의 모습이 보기 싫은건지, 아니면 그저 눈이 아파서 싫은건지 알 수 없었지만, 원하는대로 켜지 않은 상태로 두었다.
"묻고 싶은건?"
"넌... 이 일에 관계 없지?"
"고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옷 이야기를 꺼낸건 나니까. 원망해도 괜찮아."
"그래. 너 때문이었지..."
그리고 한 순간 젓가락으로 들고있던 국수가 가벼워졌다. 반짝, 하고 나이프의 날이 빛났던 것을 보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그럼 왜 날 구하러 왔어?"
"알고 지냈으니까. 내 탓이기도 하고. 어떻게든 바로잡고 싶었어."
나이프의 날은 피부에 닿아있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별 감흥이 없다는 것이다. 택시에서 예전 통학로를 볼 때보다 더 무미건조했다. 하도 자아를 죽이다보니 진짜 육체의 죽음에 둔감해진건지, 식욕이 당겨서 국수를 입에 넣고있었다.
"미안해. 난... 어떻게든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었어."
"...... 내 탓이잖아?"
"당연한 일이잖아. 나도 네 입장이면 한번 생각했을거야."
양지은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드물게도 오늘 밤은 그믐달이고, 그래서 이웃집의 처마에 반 정도 잘린 길가의 가로등빛이 광원의 전부였다. 양지은보다 창문에서 멀리 있는 나에게는 양지은의 얼굴 한 면 밖에 보이지 않았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세피아빛으로 물든 뺨에, 한 방울의 은색 수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은지 양지은의 왼쪽 팔은 나이프를 쥔 채로 내 왼쪽 어깨를 꽉 누르고 있었고, 날카로운 나이프의 칼날은 아주 얇게, 그리고 천천히 목을 스치며 진동했다.
끌어안고 싶었다. 나도 울며 미안하다고, 늦어서 미안하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당장에 나이프를 낚아채고 튀어나가서 뇌에 직통으로 숨구멍 하나씩을 더 뚫어놓고 싶었다. 아니 그 이전에 발끝에서 머리까지 얇게 다져서 근처 야산에 뿌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가 너무 초라했다. 양지은은 내가 끌어안는다고 해서 좋아할리가 없었다. 오히려 들고있는 나이프로 찌르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내가 너무 늦어버렸다. 하루라도 더 일찍, 아니. 애초에 전화기에 이상이 보일때부터 달렸어야 했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쓰레기를 소각시킬 권리도 없었다. 아무리 큰 죄라고 해도, 주변의 제 3자가 처벌할 권리는 없으니까. 복수도 용서도 당한 사람의 몫이니까.
"우는 도중에 미안하지만, 쓰레기 세 덩어리는 거실에 있어. 뭘 해도 난 널 긍정할거야. 죽이든 살리든 좋을대로 해."
그 사실을 인지하자 극도로 무기력해졌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내 최선이었다.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양지은은 양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목이 서늘해서 손을 가져대 대니 끈적한 피가 묻어나왔다. 그리 아프지도 않았고, 주요혈관이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현선우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그 회사의 주주중에서 중앙지검 검사 둘과 경찰서장이 하나 있었어. 너에게 아무런 위해도 없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지."
한동안 둘이 아무 말도 없었다.
"죽인 후에... 사체는?"
"그냥 두고 가도 되지 않을까. 넌 실종인데다가 난 실종기한 만료로 사망신고야. 수사는 오리무중이겠지. 교통카드는 네 이름으로 되어있는 걸 썼어?'
"아니. 현금으로."
"그럼... 내가 볼 때는 달리 잡힐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문득 서로가 범행논의를 자연스럽게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죽일 수... 있을까?"
"남자인 나로서는 잘 모르겠어. 당하지도 않았고, 그리 닳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선택은 네 몫이야. 여기에 가둬놓고 굶어죽인다, 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칼로 난자하는 것도 가능하겠고, 팔 다리 모두 없애는 것도 가능할거고. 난 네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인정할거야. 다만, 사람을 밟을때와 머리를 숙일때는 확실하게 하는게 좋다고 봐. 어중간하면 그 후에 뒷감당이 굉장히 힘드니까."
"어쩌는 편이... 좋을까?"
"정확히는 모르겠어.
경찰은 아까전에도 말했듯이 추천하지 않아. 성폭행 처벌은 상해가 아무리 많이 붙어도 5년 이상 집어넣기 힘들어. 유아처벌이라면 모를까... 너 일단 민증 나올 나이잖아. 기껏해야 5년정도? 거기에 최악의 경우 중앙지검 검사와 개인적인 인맥이 있으면 그냥 무죄판결 내지는 협상이겠지.
솔직히 말해서... 이 녀석들 굉장히 질이 나빠. 한 녀석은 요 앞 부동산에 있어서 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고, 한 녀석은 열쇠가게를 하고 있어서 열쇠를 갖고있었고, 마지막 녀석은 신림동에 염화칼슘과 모래가 부족한건 이 사람 탓이야. 노숙자니까, 그다지 거리낄 것 없이 털었겠지. 계획적이었다고. 자신들 입으로 말했으니까 거짓말도 아닐테고."
잠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마음같아서는 모두 죽이고 싶지만,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부모일지도 모르고, 누군가의 아들일지도 몰랐다. 정말 참을 수 없이 씁쓸해졌다.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유가 중요한게 아냐. 어떻게 할지가 중요하지."
어떻게 할까. 여기서 살인같은 짓을 하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거고, 또 그냥 넘어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누군가의 부모고 뭐고간에, 지금 내게는 원수이지 않는가.
"죽이자."
양지은이 말했다. 그래. 그게 최선이지.
"방법은 여러가지라며?"
양지은은 예측했다는 듯이 곧바로 물어왔다.
"가장 죄책감이 없지만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것은 아닌데. 기분을 풀려고 하면 나름 풀릴 것도 있고."
"어떻게?"
문득 피식 웃어버렸다. 솔직히 내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있던가?
양지은의 앞에는 쓰레기 세 봉지가 있었다. 오른손의 나이프는 미끄러지지 말라고 손잡이에 테이프를 잔뜩 감아놓았고,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나도 끼어들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정당한 이유가 없는 폭력은 익숙하지 않았다.
"어이. 그거 휘두르면..."
나는 그 말을 다 듣지 못하고 호쾌하게 얼굴을 차 날려버렸다.
"오. 미안. 말보다 발이 먼저 나갔네."
한마디라도 더 하면 턱을 으깨줄 생각으로 차 날린거니까 성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하나는 뉘우치는 것 같았고, 하나는 재수없어서 걸렸다는 표정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빛이 없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예고없이, 나이프의 은색 날이 누런 가로등의 불빛을 반사했다.
재갈을 물리는 것도 생각했지만, 양지은은 한껏 잔혹해져서 비명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해왔다. 이 정도로 사람을 잔인하게 만들었으면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창문과 문틈에 모두 박스테이프를 붙여서 소리를 막아보았다. 뭐, 잘 막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느정도 떨어진 단독주택이라면 그래도 방음성은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도, 살이 갈라지는 소리도, 칼을 넣는 소리도, 칼을 뽑는 소리도 없었다. 간간히 뼈가 부딫쳐서 턱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을 제외하면, 순도 100%의 울부짖음이었다.
양지은은 웃고있었다. 나는 다 부서진 쇼파에 앉아서 저렇게 변하게 만든 내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돼지의 멱을 따는 것 같이 추하고 긴 비명소리와, 시냇물이 흐르는 것 처럼 작고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흘렀다.
시냇물은 간헐천이 되어, 발작적으로 튀어나오는 웃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가서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소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주저앉아서 양지은은 울기 시작했다. 비명소리를 모두 묻어버릴 정도로 큰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내게 다가왔다. 나도 죽일 생각일까.
"왜... 왜 이런 일이 일어난거야?"
"...... 저 인간들이 나빠서."
양지은은 울며 나이프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는 소리없이 박혔다.
"기분은 풀렸어?"
양지은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흐느껴 울었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서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나이프를 잡고 나이프의 날에 감았던 테이프를 뜯었다. 노트뭉치와 신문지를 뭉쳐서 만든 딱딱한 종이다발이 떨어졌다. 빛이 없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기껏해야 피가 있는 곳은 나이프의 끝에서 1cm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찌르는 감각은 확실히 있고, 비명과 고통도 있으니까 기분은 확실히 풀렸을 것이다.
"양지은."
내가 양지은을 부르자 양지은은 자신의 모습이 꼴사납게 느껴졌는지 얼굴을 양 손으로 문질러서 어떻게든 수습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 양지은이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잡아낼 수 없는데.
"응?"
"이 정도는 내가 해도 될까?"
한 쓰레기의 오른쪽 팔에 나이프를 갖다대고 말했다.
"뭘 할건데?"
양지은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힘줄을 끊을거야. 살아나갈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지. 괜찮아?"
이 정도 하지 않으면 내 기분도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것도 한 몫 했다. 마음만 같아서는 목을 긋고 싶었지만.
"응."
그리고 난 팔을 움직였고, 쓰레기의 비명은 순식간에 절정까지 올라갔다. 오른팔을 잡고있던 왼팔에 확실하게 뭔가가 끊어지는 느낌이 왔다. 낡아빠진 기타를 조율하다가 현을 끊어버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기분이 풀리지 않아서 조금 위치만 다른 곳을 한 번 더 찔러서 힘줄을 한번 더 끊었다. 거기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내가 생각해서 있을만한 곳을 노렸다.
쓰레기 세 봉투에 동등하게 같은 짓을 해두자 한동안 굉장히 시끄러워서 귀가 아파왔다. 주방에서 쓰던 헝겊으로 상처를 감아주고 다시 박스테이프와 절연테이프로 손발을 묶었다. 쓰레기들의 핸드폰과 지갑을 꺼내서양지은에게 빌려줬던 가방에 넣고, 가방을 들었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가자. 저대로 두면 굶어죽겠지."
주방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았고, 만들었던 국물과 면들은 뒷마당의 장독 아래를 파서 묻었다. 링거와 약병은 당연히 챙겼다. 이걸로 우리는 이 자리에 없던 것이 될 것이다.
쓰레기들은 양팔과 양 다리를 묶고, 이불을 둘둘 말아서 한번 더 포장했다. 이 정도면 유가족들이 시체를 펴는데에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거고, 냄새가 일단 이불에 베인 후에 퍼지기 시작하니까 그다지 냄새가 심할 것 같지도 않았다. 또 이불을 움직여서 도망친다는 경우도 고려해서 침대를 들고 그 아래에 쓰레기 세 봉투를 놓은 뒤 침대를 덮었다. 움직인다고 해도 침대 아래일 것이고, 침대 아래의 공간은 굉장히 적었다. 아마 아사하거나 폐쇄공포증으로 사망하겠지.
양지은은 비틀거리며 걸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몇 번인가 넘어졌다. 양지은이 볼때마다 내가 한 일이라고 온 몸으로 호소하는 것 같아서 지켜볼 수가 없었다.
"저... 양지은."
"응?"
양지은은 넘어졌다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얼음이라고는 하나도 얼어있지 않은데다가 평지인 길인데, 굉장히 위태로워보였다.
"업어주면 안될까?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
양지은은 내가 말하는 사이에도 다시 넘어졌다가, 내가 말을 하자 그냥 주저앉았다.
"미안해. 나... 누구를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한숨이 나왔다. 업히는 것이 싫으면 잡고 일어나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양지은은 그것도 잡지 않고 자기 힘으로 일어서려다가 다시 넘어졌다.
"잘한 짓일까?"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 있어."
"그건... 싫어."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이고는 싶지만, 책임은 지고싶지 않은 것이겠지. 이기주의적이고 비 논리적이지만 인간적인 감정이었다.
어쨌든 지하철을 탔다. 크리스마스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 다 삼삼오오 모여 시끌시끌하게 떠들고 있었다. 별 감흥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 상태의 걱정이라면 양지은의 상태와, 집에 문을 잠그고 오는 것을 잊어버려서 안의 물건들이 무사할지가 걱정이었다. 타인의 행복은 타인의 것이다. 내가 참견할 권리는 없었다.
그런데
[야옹]
고양이가 울었다. 멍하니 양지은을 올려다보던 고양이는 능숙하게 뛰어올라 무릎에 앉아 양지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짐작가는 바가 있어서 오른손을 고양이의 뒤쪽으로 이동시켰다.
덜컹덜컹거리는 지하철의 소음에 섞여서, 고양이가 양지은의 얼굴로 뛰어들었다. 역시 나쁜 예측은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양지은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난 준비했던 손으로 고양이의 뒷목을 잡아 바닥에 집어던졌다.
고무줄로 묶어놓은 쓰레기들의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사실 이 핸드폰을 가져온 이유가, 그들도 가족이 있고 아는 사람이 있기에 전화가 오면 공덕 주변에 있다는 것을 알려서 살리려고 한건데...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오히려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더 이상 일반론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좀 더 편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역겹지만, 인정해야했다.
이 사람도 이제 자기 자신을 싫어하기 시작했구나.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지하철 바닥에 내던져져서 죽은듯이 누워있던 고양이는 다시 지하철의 계단 끝부분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양지은은 힘겹게 계단 난간을 잡고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문제는 저 고양이. 물론 죽거나 부러지지는 않겠지만, 자신에게 잘 대해주던 동물이 이를 들이대는 것은 참기힘든 고통일 것이다.
결국 고양이는 양지은에게 달려들었고, 나는 혀를 차면서 고양이의 배를 차 날렸다. 애초부터 나는 고려대상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양지은만 보고있기에 뒤로 돌아가서 준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양지은을 업어버렸다. 약간 앞서가다가 넘어질때를 맞춰서 업어버렸다. 본인은 말 그대로 발광을 하면서 놓아달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나를 싫어해도 좋으니까, 더 이상 양지은이 넘어지는 것을 보기 싫었다. 그리고 눈을 가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등 여러가지로 괴롭히기에 꽉 잡지 않으면 떨어질 정도로 달렸다. 그러자 양지은은 떨어지기는 싫은지 딱 등에 기대어 있었다. 내려놓으면 어떻게 될지 뻔하지만, 그때가 되면 나이프를 쥐어줄 생각이었다. 찌른다고 해도 상관 없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일상이었다. 여기에서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양지은은 지쳐있었다. 여섯시간정도 잔 것 같기는 하지만, 과연 그게 충분한 휴식이었을까. 어쨌든 양지은은 내 등 뒤에서 자고있었다. 나는 마침 얼음이 녹지 않은 곳이 나오기도 했고, 양지은이 더 이상 괴롭힐 일도 없으니 천천히 걷기로 했다.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바보같다고 할 것이다. 분명히 싫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있는데도 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등 뒤에서 울며 자는 사람이나 둘 다 바보였다.
문득 생각했다. 신은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
중세시대라면 종교재판에 회부될만한 일이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만일 존재한다면 그 자신의 피조물을 이렇게까지 극한으로 내몰리가 없었다. 그래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는 기독교의 신이라면, 어째서 모두에게 동등한 조건과 동등한 고충과 동등한 무게의 고난을 주지 않고 편중되게 주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야, 인간의 두뇌로 신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원미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내가 양지은을 좋아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양지은은 그때 자고 있었기에 알지 못했겠지만, 원미영은 모든 것을 달관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나도 원미영의 그런 미소를 보고 '이 인간 돌아가겠구나'라고 생각해서 준비하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말할 수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당신이 잘못 짚은거야, 라고. 흘러내리는 양지은을 다시 고쳐 업으면서 생각했다.
사람을 좋아해본 적이 없었다. 동경하거나 부러워했던 적은 있었지만, 내게 특별할 정도로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도 없었고, 내게 호감을 보인 사람도 없었다. 반면에 죽도록 싫어해서 죽이기 직전까지 간 사람은 양 손에 발까지 합쳐도 다 세지 못했다. 이런 생활을 시작하게되자, 굉장히 따분했고 또 그럴수록 생각나는 것은 옛날 일 뿐이어서... 결국 저질러버린 것이다. 약국 앞까지 질질 끌고 데려다 놓았으니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어도 뭐... 어차피 천국같이 좋은 곳은 갈 수 없다고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으니까, 변할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반면 '싫어한다'거나 '증오한다'는 감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원미영은 내가 '좋아한다는 감정이 뭐야?'라는 질문에 '싫어하는 감정의 반대요'라고 답했다. 재미없기는. 사람의 추상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그리 정확하지 않아서, 수학의 각도재기처럼 180만 더하면 정 반대편이 나오는 편리한 것이 아니다.
내가 양지은을 여기까지 돕는 이유도 이제 나름 답이 나왔다. 사람이라면 분명히 분노하고 도와주고 싶어하는... 그래, 맹자가 말하는 사단에 나오는 측은지심과 비슷한 것이었다. 왜, 천인공노할 짓, 이라는 말도 쓰지 않는가.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 행동에 대해서 분노할 뿐이지, 양지은과 따로 떼어놓아도 그 감정은 전혀 희석되지 않았다.
이제 약 5분만 더 가면 집이었다. 그리고 놀라버렸다.
시야가 흐려졌다. 신경을 눈가에 집중해보니 눈 아래쪽으로 차가운 것이 흘러내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울고있던 것이다.
이유는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양지은이 처한 상황이 너무 비극적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업어서 양지은이 싫어하게 될 것 때문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집이 가까워져서 양지은을 더 이상 업어줄 수 없다는 것이 슬퍼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눈물이 나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다. '인간은 눈물을 흘림으로서 세상의 죄악을 씻어낸다'고. 하지만 내가 지은 죄를 씻어내서 희석시킬 생각은 없었다. 만일 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면 위에서 방관중인 신이 아니라, 내 등 뒤에서 자고있는 양지은이었다. 그런데 업지 말라는 것을 억지로 업었으니 이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을 것이다. 이런. 죽을때까지 끌고 갈 죄가 되어버린 것 같은데.
집에 양지은을 눕혀두고 양지은의 핸드폰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것을 확인한 뒤 머리맡에 놔두었다. 잠시, 기분전환이라도 할 겸 산책이나 하기로 했다.
지리는 훤했다. 여름철마다 차로 에어컨의 배달이 불가능한 산 비탈까지 운반했었다. 손바닥보다 자세히 알 자신은 없었지만, 헤메서 길을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양지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일어났냐?"
양지은은 말이 없었다.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 좀 해줬으면 하는데.
[업어준거야?]
이건 또 무슨 동문서답인지.
"응. 힘들어서 픽픽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있기가 괴로웠어. 미워해도 돼.
고시원은 마음대로 써. 뭐... 일종의 뇌물같은거야. 나중에 기분 풀리거나 도와줄 일 있으면 불러줘."
[왜...?]
"업지 말라는거 억지로 업었잖아. 기억안나? 내쪽은 머리에 손톱만한 민둥산이 만들어졌다고."
물론 뒷말은 거짓말이었다. 양지은은 머리카락도 뽑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마음이 착잡해져서 핸드폰을 닫았다. 더 이상 양지은과 무신경한 척 대화할수가 없었다. 오히려 말하고 있는 내가 자해를 하는 것 같았다.
아마 양지은의 상처는 죽을때까지 남을 것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평생 유병율은 6.7%밖에 되지 않는... 한 마디로 '재수없으면 평생 가는' 병이지만, 사건 후에도 지속적인 재경험을 하고, 거기에 소모되는 에너지와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고 양지은의 집에서 보았던 의사는 말했다. 행동치료, 지속노출치료, 인지치료등의 심리요법이 있지만... 그에 따른 비용은 천차만별. 기간을 특정지을 수 없으니까, 주기적으로 '병이 완치될때까지' 돈을 내야 하는 것이다.
생각을 접고 아까전부터 울리던 전화를 손에 들었다. 이거 또 전화는 더럽게 좋은거 썼었구만. 쓰레기 주제에.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아, 원래 주인과 목소리가 너무 달랐나.
[저... 누구세요?]
오. 누군지 모르겠지만 부인이 있었나보다. 거 참 불쌍도 하셔라. 과부되시겠네.
"인간 쓰레기 분리수거한 사람."
원래 생각했던 것은 '쓰레기 분리수거 해서, 당신 남편 죽었으니까 그리 알아'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목소리를 대하니까 그리 심하게 말하지도 못하겠다.
[네?]
"알 필요 없고. 당신이 이 핸드폰 주인의 부인 맞지?"
[네. 그런데요.]
"찾지마. 그 쓰레기는 지금 열심히 아기를 만들고 있을테니."
[잠깐만요, 그 무슨...]
24시간 전이면 사실이었다. 자, 이걸로 며칠동안 잠잠하겠지. 양지은이 그럴 마음이 들면 전화해서 알려주면 되는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대로 두면 될 것 같았다. 처리한 것은 나이지만, 그건 뭐... 원인이 된 사람의 속죄라고 해두자.
핸드폰의 배터리를 분리시키고 나머지 핸드폰을 들었다. 노숙자는 핸드폰 자체가 없어서 나머지라고 하면 이게 전부였다. 쓰레기의 집에 전화를 걸까, 하다가 여자 이름만 열 개가 넘어서 그만두었다. 어디에 전화를 할지 모르겠다.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내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문자인가 싶어서 꺼내들었는데 전화였다.
"여보세요?"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액정을 살펴보니 양지은이었다.
"양지은? 왜?"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지만 평소와는 달리 그다지 나쁜 느낌이 들지 않아서 빨리 걷는 정도로만 서둘렀다. 애초에 얼음이 꽁꽁 얼어있어서 뛸 수가 없었다.
방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보았을 때 불은 켜져있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보아도 자고있는 것 같았는데... 자다가 버튼을 잘못 눌렀나. 싱겁기는.
문고리에 손을 올렸지만 열지는 않았다. 불은 꺼져있겠지만, 애초에 나를 불렀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뻔뻔하게 '전화했으니까 부른거지'라고 하며 들어가겠지만, 그것도 사람 나름이었다. 저렇게 쇠약해진데다가 심리적 상처를 갖고있는 사람인데, 뻔뻔하게 나갈 자신은 전혀 없었다.
발이 아플때까지 기다렸다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양지은이었다.
좁은 복도니까 전화기를 열고 조용히 말했다.
"무슨 일 있어?"
[...... 너는, 안 그럴거지?]
"안 그럴게. 평소에는 나도 농담이었어."
설마 그걸 진담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을까. 뭐, 마지막에는 반 정도 진심이었지만, 양지은이 얼굴 전면으로 '싫어'라는 표정을 짓고있기에 그만두었다.
[믿어도... 돼?]
"어떻게 하면 믿을건데?"
양지은에게도 그런 질문은 꽤 의외였던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을 믿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 아무 이유도 없이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가 거짓말로 치부할 것 같아서 곤란했다.
[모르겠어.]
한참이 지나, 양지은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좋아. 나이프 줄게. 언제든 찔러. 그거면 됐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이프의 날에 묻은 피를 옷에 문질러 닦았다. 어차피 검은색 옷이고, 냄새는 하도 돌아다녔으니 빠졌을 것 같았다. 그리 문제될 것은 없겠지. 자학증상이 있다면 이미 나타났을 것이고.
[...... 나 불안정한데. 괜찮아?]
"홧김에 찔러도 돼. 그 이후에 뒷처리는 현선우에게 50정도 쥐어주면 될거고."
무심결에 본심이 나와버렸다. 그리 살 마음이 없다는 것은 이것으로 전해졌겠지. 또 고달파질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대답은? 여기서 잘 수 없으면 빨리 움직여야 방이 잡힐 것 같은데."
양지은은 낮게 신음성만 낼 뿐 딱히 대답이 없었다. 바라는 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있어줄 수 있지만.
[들어와줘.]
그 말을 듣고 방에 들어가자 안에는 창문이 없어서 완전히 칠흑 그 자체였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이것보다는 덜 어두울 것 같았다.
"자. 나이프."
복도의 불빛을 의지해 양지은에게 나이프를 내밀었다. 피를 닦는다고 닦았는데, 말라붙어서 깔끔하게 닦을수는 없었다. 양지은은 나이프의 손잡이를 양 손으로 잡았다.
"단지 한 가지만 부탁하고 싶은건... 그걸로 죽지 말라는 거야. 내가 나이프를 준 이유는 지키라고 준거지 죽으라고 준게 아니니까."
혹시 몰라서 그렇게 못박아두었다. 양지은도 그럴 생각 없다고 잘라말했다.
일단 눕는다고 양지은에게 말하고 자리를 깐 뒤 누웠다.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청각에 집중하다가 어느샌가 모르게 자버렸다.
생각해보면, 그 시점에서 이미 36시간 이상 깨어있었다.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아니, 울었기는 울었는데 아무리 들어도 공격하는 것 처럼 위협적인 소리였다. 시끄러운데다가 날카로운 소리여서 눈이 뜨기에는 정말 적격이었다. 거기에 나무문을 긁는 소리가 추가되어서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런데 왠만하면 좀 자고 싶었다. 어차피 현선우에게는 3일이라고 해뒀고, 딱히 급한 일도 없었고, 일단 오늘내일 할 정도로 급한 상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양지은이 아프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빨리 의사를 부르고 싶었다.
그런데 일어났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니까, 양지은은 나를 죽이고 싶어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홧김에 죽였어도 그리 원망하지는 않았을텐데.
머리에 정을 대고 망치로 때리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서서히, 심장박동에 맞춰 고조되는 고통은 참기 힘들 정도로 증폭되었다. 심장이 한 번 뛸때마다 망치를 한 번씩 내려치는 것 같은 착각. 환청일테지만, 머릿속에서 천을 찢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아하하하.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이대로 죽나' 싶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 속이지만, 시야가 진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죽고싶어서 그냥 둬 보았지만, 끝내 여덟시간이 지나도 목숨이 끊어지는 일은 없었다. 얻을 것 없는 고통은,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빨리 끝내는 것이 이득일 것이다.
"야... 양지은? 깨어있어?"
몇 시간이 지난지도 모르니 양지은이 자고있는지 깨어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말 그대로 머리가 쪼개지는 고통을 참고 물어보았다.
"응."
"아파서 그러는데, 불 켜도 돼?"
양지은은 말이 없었다. 아 젠장. 어디다가 뒀더라. 책상 서랍? 아니. 나이프의 분해청소를 하기위해 천을 꺼낸 뒤 안쪽을 다시 정리했으니까 안에 있던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드륵드륵하고 문을 긁는 소리는 내 신경을 긁는건지 아니면 문을 긁는 소리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급한대로 몸을 일으켜서 첫 번째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다. 보이지 않았지만 손의 촉감에 의지해 서랍을 뒤지고 있었는데, 안에 잡히는 것에 스테이플러의 알이라거나 압정과 같은 것도 있어서 상당히 아팠다. 하지만 머릿속이 그야말로 새하얗게 타오르는 것 같아서 손의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눈 앞이 번쩍거렸다. 불이 켜진다는 것을 알고 빨리 적응하기 위해 형광등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책장의 세 번째 칸에 갈색 약병이 있는 것을 알고 일어나 손을 뻗었다. 물은 언제나 그랬듯 책상의 구석에 있었다. 약을 넘기고 그대로 쓰러졌다. 양지은은 불을 켜고 나를 바라보다가 내 상태가 심각하다고 느꼈는지 약간 경계하는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서 대화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방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마 약이 돌때까지 10분. 뭘 하든 제대로 생각할 수 있을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멍청히 있는 것도 바보같았다.
링거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완전히 비어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링거액이 떨어지지 않아서 고장났는가, 싶었는데 나름 잘 작동하고 있던 것 같았다. 시계는 각도가 안 좋아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1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고개를 좀 더 돌려보니 흐트러진 약병이 보였다. 고양이가 방문을 긁고있는 소리는 어느새 귀의 이명에 묻혀있어서 오히려 약간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 의식이 끊기고 양지은이 내게 다가와 뭐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꽤 다급해보이는데 내쪽은 평형감긱이고 뭐고 거의 쓸모가 없을 정도니까 대화는 불가능했다. 애초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심각한 상태였나? 남성기피증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인데, 내 머리를 무릎으로 받치고 울고있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 정신이 없고, 기억이 이리저리 왜곡되고, 어지럽고, 아플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양지은. 그냥 두통일 뿐이야. 남들보도 좀 더 심한. 그러니까 그렇게 울 필요까지는 없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거고, 아마 넌 나 같은 걸 위해 울었던 걸 후회할거야. 그러니까 그만해.
기묘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울어준 적이 있었던가.
어라. 죽는 줄 알았더니 멀쩡히 살아버렸다. 한편으로는 꽤 좋아했는데.
그런데 머리는 아직도 아팠다. 약기운이 떨어질 정도로 오래 잤던가, 아니면 편두통이 악화되어서 약이 통하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 뭐, 슬슬 악화되지 않으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뇌에 압력이 높아지면 두통이 심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뭐, 종양이라거나 그런 종류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어라. 움직이네."
아직 귀의 이명현상이 계속되고 있어서 움직이지 못할 줄 알았는데 멀쩡히 움직여주셨다. 그런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서 이거 또 굉장히 기묘하게 거부감이 드는 감각이었다.
"미안. 아직 들리지 않아."
그렇게 말하면서 몇 번 정도 손을 허공에 헛손질하다가 약병을 잡고 알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물병도 몇 번 만에 간신히 잡을 수 있었다. 입에서는 이미 쓴맛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아주 서서히 청각과 방향감각이 회복되었다.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고있으려니 내 머리맡 위에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양지은?"
"응."
양지은은 굉장히 심각한 얼굴을 하고있었다. 얼굴이 전체적으로 팅팅 부어서 양지은처럼 보이지 않았다. 양지은의 얼굴을 보고 '양지은?'이라고 한 이유는 반사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사람처럼 보이기에 진짜로 확인을 한 것이었다.
"지금 몇 시야?"
그런 말을 하는 순간 고양이가 맹렬하게 방문을 긁어댔다.
"2시."
양지은은 딸꾹질을 하면서 말했다.
그렇게 슬퍼한 일인가... 싶다가 생각해보면 죽을뻔한 것 같았다. 꽤 큰 일이기는 한데. 글쎄. 그다지 슬픈 일인가? 애초에 그렇게 마음을 쓸 관계는 아니었을텐데.
통증은 꽤 가라앉았다. 이명현상도 없어서 소리도 잘 들렸고, 다만 몸이 약간 저려왔다. 피가 통하지 않던 팔이나 다리처럼 온몸 구석구석이 저려오는 느낌은 장난으로라도 괜찮다고 할 성질이 아니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괜찮아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다만 종종 있는 일이니까 너무 과민반응 할 필요는 없어."
이 두통으로 죽을때는 죽을때다. 남길것도 미련도 없으니 언제 죽어도 문제는 없었다.
"약 먹으면... 괜찮아져?"
"응. 지금은 그럭저럭 살만하고. 약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한동안 괜찮으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양지은이 깨물고 있던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고맙다는 느낌보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배 안고파?
미칠 것 같이 아파서 식은땀이 줄줄 날때는 몰랐는데 꽤나 배가 고파왔다. 일단 다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소화기관을 다친 것도 아니고, 몸에서 열이 나는 것도 아니니까 먹는 것을 가릴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쪽은 일단 가리는 음식이라고 하면 삭힌 홍어회나 약간의 혐오동물 정도인데...
양지은은 대답 대신 책상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면 전날에 초코바를 20개인가 사오기도 했었다. 언제나 비상식량 대용으로 갖고있던건데, 아직까지 남아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배 안고파?"
그럴리는 없겠지만,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고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는 배가 고팠으니까 편의점에서 컵라면이라도 들고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양지은은 대답이 없었다.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사람처럼 인상을 찡그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고민하는 얼굴은 굉장히 망가져 있어서, 아마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몰랐다면 창자가 꼬일 정도로 웃다가 죽었을 것 같았다.
"음... 배는 고픈데 나가기는 싫어? 아니면 나랑 같이 나가는게 싫어?"
양지은은 내 말에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어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뭐 잘못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는... 왜 날 괴롭히지 않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는대로 말해보았다.
"왜 내가 널 괴롭혀야 해?"
뭔가 맹렬히 슬퍼지기 시작했다. 나 그렇게 무뢰한에다가 악취미로 보였나? 그래도 양지은에게 나름 친절하게 대한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꺼낸 말이 굉장히 큰 일이 되기는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적으로, 고의적으로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양지은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내가 괴롭혔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넌 내 가족 때문에 돈을 잃었고, 또 지금까지 나에게 준 것도 있잖아. 그리고 평소에 말하던 것으로 보면..."
양지은은 거기까지 말하고 시선을 피했다. 피해의식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난 그럴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말했다시피, 돈을 되찾고 싶은 마음은 없어. 평소에 말했던건 장난이라고 했었고. 그리고 너에게 줬다는 이유로 너한테 뭘 요구하면 그건 교환이지. 슈퍼에서 돈주고 물건사는 거랑 비슷한... 그런 교환.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아마 계속 나랑 같은 동네에 살게될텐데, 상점주인과 고객의 관계라면 서로 대하기 힘들겠지. 그게 싫었어. 원미영에게 그렇게 당부했던건 행여라도 누가 그걸 약점으로 잡고 휘두르는 것을 보기 싫어서였고. 너도 떠날 일 있으면 서로 비슷하게 끝날거야.
이걸로 됐어?"
있는 그대로의 내 마음이었다. 원미영과의 관계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되고, 아마 지금 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난 주저없이 그런 결말을 선택했을 것이다. 앞으로 살면서 한 번 볼까 말까한 상대가 될 나 때문에 누군가에게 경멸받는다면 굉장히 미안해질테니까.
"의심하는건 이해해.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내가 널 괴롭힐 이유는 없잖아?
물론 의도하지 않게... 그런 일을 당하게 된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지금 즉석에서 죽여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솔직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다지 거짓말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고, 필요할 때가 아니면 거짓말은 하지 말자는 주의였다.
"그럼..."
잠시동안의 침묵 후에 양지은이 말했다. 전과 달리 반응시간이 굉장히 느려졌다. 그 사소한 변화가 심장에 비수를 꽃는 것 같았다.
"날 좋아해줄 수 있어?"
왜? 라고 묻는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공사장의 타워크레인이 쓰러져서 뒷통수를 후려친 것 처럼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아니, 보통은 죽겠지. 어쨌든 몇 달 동안 느껴본 적 없는 패닉을 한꺼번에 느끼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무표정인데다가 어조마저 느껴지지 않게 건조한 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양지은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약간 갸웃거렸다. 내 상태는 한눈에 보아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 이런 더러운 여자는 싫지?"
그 말에 다시 한 번 쓰레기들을 완전히 갈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 활발하던 사람을 이렇게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니, 사람이란 음성적인 곳에 정열을 쏟으면 거기까지 될 수 있구나.
"그런게 아니라... 그건 무리야. 그러니까 내 능력 밖의 이야기라고."
뭐, 간단한 이야기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낀 적은 없었고, 누구도 나를 좋아해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고 하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 '사랑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한 행동원인'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지만, 그런 것 없이 살고있어도 딱히 불편함은 느끼지 못했다.
"무슨 소리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나는 양지은을 경멸할 자격도 없을 뿐더러, 느끼는 감정에 대한 변화는 없었다. 지금 당장 목에 칼을 들이대고 진실을 말하라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하면 납득해 줄 것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됫목이 따끔거렸다. 평소 습관대로 초조하면 머리를 긁은 것 뿐인데, 슬슬 버려야 할 습관인 것 같았다.
"나는 잘 모르겠어.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나름대로의 충족감도 있고 만족감이 있기는 한데... 글쎄.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솔직히 난 이해 못하겠어."
이 이상 자세히 말하라고 하면 난 이미 한계다. 그러니까 내가 설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간단하게 말한다면 '이해능력 부족'이라는 것이다.
양지은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 진짜인데. 믿어주세요."
아니, 진짜다. 솔직히 드라마에서 죽고 못사는 것 처럼 연기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다가 솔직히 좀 추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리 드라마를 열중해서 본 것도 아니지마는.
"사랑 없이 자식을 키울 수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발끈하다가 양지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판단이 간신히 의식을 정상으로 돌려놓았다.
"뭔가 전제 자체가 글러먹은 것 같은데. 내가 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들은 그저 내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에 집착했던 것 뿐이다. 고액과외에서 동네학원까지 안 다닌 곳이 없고, 그러면서 오르는 성적에 그들은 기뻐했다 뿐이지 나 자체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아... 미안."
"뭐, 그 인간들이 가진건 사랑보다는 집착이지. 그것도 나 때문이 아니라 성적이나... 등수같은 것들에 대해서. 대리만족 같은걸지도 몰라."
양지은은 내 말에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데 잠깐 전부터 든 생각은, 이 인간은 나를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저 의지할 상대가 필요한 것 아닐까.
"저기, 양지은.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양지은은 내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여기서 더 상처를 주면 깨질 것 같이 위태로워보였다. 무슨 말을 하기가 굉장히 곤란해서 인상만 구기고 있자 양지은이 재촉했다. 음... 뭐, 심해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그래도 양지은이 운다거나 하면 내가 이전의 쓰레기들이나 같아지는 꼴이니까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일단 내가 생각하는게 아니라면 따귀정도는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은 그냥 의지할 상대가 필요한 것 아니야? 그 대상이 딱히 나일 이유는..."
[짝]
넵. 보기좋게 뺨을 맞았습니다.
"미안. 맞을거라고 예상했어."
약간의 자괴감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런데 양지은은 자신의 손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때릴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미안해."
"음... 그래서 결국 긍정하는거야?"
"아니. 말할건 확실하게 말할게."
양지은은 그렇게 말하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더 말할게 있나?
"난 널 좋아해. 그건 확실히 해두고 싶어. 네 부모님들과는 달리 네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너라는 인격 자체를 좋아하고 있어."
이번에는 충격이 적었다. 바로 직전에 자신을 좋아해달라는 부탁을 했다는 것에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 하나만 질문할게. 그... 좋아한다는 감정의 이유는 뭐야?"
"이유?"
"응. 이유. 그러니까 원인."
양지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를 심각하게 궁리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원인은... 너에게 이것저것 굉장히 많이 받았으니까. 그런 호의가 좋았어."
"호의라고 하면 일생동안 살면서 다른 사람도 많이 베풀어줄텐데?"
"음...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어. 다만... 네가 좋아. 다른 사람들보다 관심을 받고싶고, 또 관심을 끌고싶고, 같이 있으면 안심되고..."
"거기까지. 그만. 들으면 들을수록 모르겠어."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찬 느낌이었다. 양지은은 얼굴이 빨갛게 되어서 손가락을 얽고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데다가 초조해져서 머리를 긁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던 중이었지?"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겠지. 널 좋아한다고."
맹렬하게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두통은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굉장히 혼란스러워서 두통으로 변질된 것 같았다.
어쨌든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을 잡고 양지은을 바라보았다.
"좋아. 알았어. 그런데 지금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해. 내가 먹을거 사올테니까, 먹으면서 생각을 정리한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양지은은 부끄러운지 얼굴을 양 손으로 가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같은 녀석한테 그런 말 한 것 자체가 꽤 충격이기는 하겠지.
고시원 건물의 1층을 나서면서 현선우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연결이 되자마자 인사도 생략하고 말했다.
"현선우. 계속 부탁만 해서 미안한데, 아이젠 좀 빌려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