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part. -고양이-
[모두의 마음은 고양이와 같다. 주종관계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만 결정적인 때에 자신을 배반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경우에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김민혁의 책장을 구경하다가 찾은 A4용지에 적힌 구절이었다. 윗 동네에 눈이 녹지 않아서,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린 통에 나는 집에 갈 수 없었고, 김민혁은 나를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해 주었다.
2일이 지났지만 원미영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민혁은 아마 나를 좋아하고 있을거라는, 그런 추측뿐인 이야기이지만,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나에게는 꽤 고민할만한 이야기였다.
고양이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보냈다. 고양이의 열효율이 굉장히 낮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지만, 아무래도 뭔가 병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키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키워지고 있다는 것에 가까우니까 고양이를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없어지면 약간 슬퍼하기는 하겠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안녕. 여기."
나를 보자마자 김민혁은 손에 들고있던 은박지를 내밀었다. 매일마다 얼결에 받기는 했지만 언제나 내용물이 김밥이라는 것에는 약간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김민혁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게 500원짜리 김밥이던, 5만원짜리 선불 단말기던 고맙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나에게 뭔가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있다는 것 만으로도 김민혁은 굉장히 나를 생각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거주하는 집은 이 곳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열악했고, 김민혁도 그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김민혁이 먹을 것을 갖고온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나에게 뭔가 주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하고싶지는 않았다. 내 마음을 아직 나는 잘 몰랐고, 또 원미영이 말한 것도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고양이도 얌전했고, 아직 내일을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것은 아니었고, 언덕의 위쪽이 얼마전에 내린 눈과 비로 몽땅 얼어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직 여유는 있었다.
김민혁은 담배냄새가 완전히 베어버린 코트를 튀어나온 못에 걸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저거 분명히 반대편에서 못을 박은 뒤 튀어나온 것이었다. 잘못해서 부딫치면 파상풍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정도로 못의 끝 부분이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살만해?"
김민혁이 말했다. 거의 하루동안 서로 이야기가 없다가 갑자기 대화를 시작하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쯧. 미안. 어제랑 오늘은 조금 많이 심란했어. 화났어?"
나는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화가 나야 하는 걸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럭저럭 살만한데다가 내가 너한테 화낼 이유는 없잖아."
"그러냐. 그거 고마운 소리네. 최근에 들었던 어떤 말보다도 감사해."
오늘 김민혁은 약간 이상했다. 극히 힘이 없어보였고, 속눈썹에 뭔가가 맺혀있었다.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입의 가장자리가 터져있는 것 같았다. 입술에도 뭔가가 깨문 자국이 선명했다.
"울었어?"
역시 난 이게 문제다.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버리는 것. 그 외에도 문제점이라면 노트 몇 권을 채울 정도로 있지만.
"아... 응. 뭐, 그렇지."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눈가를 닦은 뒤 머리를 맹렬히 긁적였다. 구멍나지 않은 피부가 신기할 정도로.
"말해줘?"
"달리 할 이야기가 없다면."
아직 김민혁이 주인에게 맡기지 않은 이불을 깔고 앉았다. 딱히 할 이야기도 없고, 내가 가진 이야기는 그리 재미있지 않다면 김민혁이 할 이야기는 무료한 구직생활에 약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 3일 됐나? 어쨌든. 기억해? 도와줬더니 배은망덕하게도 여기를 털어간 사람이 있었다는 거?"
"응."
"오늘 내가 일하는 피시방에 찾아왔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2일 전부터 있었어."
"2일 전부터? 미성년자는 10시 이후에 나가야 하지 않아?"
"일단은 그런데... 글쎄. 형제나 자매가 있나봐. 현행법상 위조되거나 허위 신분증이면 잡혀도 책임을 묻는 것은 속인 쪽이지 속은 쪽은 아니거든.
어쨌든. 2일동안 그냥 지켜봤어. 가끔씩 옆을 지나가거나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가끔씩 눈이 마주치면 그냥 서비스 커피나 달라더라고. 나도 몇 분 전까지는 비슷한 사람일거라고 생각했거든. 군말없이 그렇게 대했는데...
문제가 생긴거지."
"문제?"
싸웠나? 컴퓨터를 부쉈나? 카운터의 컴퓨터를 해킹했나?
"오늘로 3일째인데, 슬슬 계산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근무 태만으로 월급이 깎였었거든. 나는 아니지만, 그런 사례가 있었어."
"돈이 없었구나."
"그렇지."
김민혁은 서랍에서 약을 꺼내 페트병의 물과 함께 넘겼다. 목에 약이 걸렸는지 몇 번인가 기침을 했지만 금새 잠잠해졌다.
"돈이 없었어. 그걸로 끝나면 나도 좋아. 그런데, 거기서 거래를 해오더라고."
"거래? 돈이 없는데 무슨..."
김민혁은 숨을 길게 내쉬면서 날 바라보면서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뻔하지. 그 인간은 여자고 난 남자거든?"
"응. 대충 알았어."
대충 이해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김민혁은 그 사람과... 자고 왔다는 것 같았다.
"응. 그래서 경찰서에 가서 조서쓰고 왔어. 경찰들도 몇 번째 잡아들여서 귀찮아하는 눈치더라."
미안, 이라고 하려다가 입을 틀어막아서 막았다. 너무 내 멋대로 사람을 평가해버렸다. 김민혁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딱히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게 슬펐어. 나는 진심으로 대했는데, 저쪽은 등쳐먹을 대상으로 봤던게."
"그래..."
그렇게나 슬픈 일일까?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전부 아닐까?
"뭐, 너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말야... 나름 좋아했다고. 중 3 여름방학때 한 달 정도 근처에서 살면서 꽤 정들었으니까. 그때 가출했었거든. 그래서 울었어."
그랬다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아주 약간 화가 나버렸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김민혁을 때리고 싶어졌다. 기왕이면 좀 아플 곳으로. 죽으면 좀 곤란하지만.
그런데 원미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만약 김민혁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저, 김민혁."
"어?"
김민혁은 반쯤 맛이 간 목소리로 말했다. 혀가 약간 꼬인 것 같았다. 무슨 약일까, 저거.
"내가 그러겠다는 것은 아닌데, 만일 다른 사람이 다시 그런 일을 하면 어쩔거야?"
"잡아서 장기매매로 한 밑천 챙길거야. 저번에 투자했던 천만원이 종이조각이 되어버렸거든."
아... 그거 또 굉장히 어두운 이야기네.
"그럼... 내가 그러면?"
김민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약간 인상을 쓰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러겠다는 것은 아니고."
김민혁은 내가 머뭇거리며 말하자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음..."
센 것만 열 번째. 언제까지 저럴 생각일까. 약 3분 동안 김민혁은 의자에 앉아서 등을 끝까지 젖힌 뒤 오른손으로 양 손을 가렸다. 그리고 계속 생각중이었다.
"음. 일단 찾아서... 어쩔까. 질릴때까지 범한 다음에 빚쟁이들한테 넘겨버릴까? 전혀 모르던 사람도 찾았는데, 빚쟁이 정도라면 일도 아니겠고."
순간 오싹해졌다. 김민혁은 전혀 장난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고, 내 소름을 돋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뭘 심각해져서. 농담이야, 농담."
김민혁은 반쯤 뜬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주 약간 안심한 나는 들이켰던 숨을 내뱉었다. 잠시동안이지만 갑갑해서 죽는 줄 알았다.
"일단 찾기야 하겠지. 이유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그럴때는 돈이 필요해서 그랬을테니까, 다시 그러지 말라고 한 뒤 그냥 넘어갈 것 같은데. 솔직히 난 돈이야 있던 없던, 내일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녀석이니까 돈은 상관 없어."
안심함과 동시에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순이야. 돈이 중요하지 않으면 왜 다른 사람들은 장기매매를 시키는데?"
"어, 그렇네."
김민혁은 얼빠진 소리로 답했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은 내게 말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무방한 걸까?
"아마... 멋대로 내 물건에 손대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고 장기를 팔아?"
"응. 이쪽에서 증거고 뭐고 다 잡고있으니까. 그럼 남은건 장기팔기, 아니면 빵에서 썩기인데 그 인간한테 선택권을 주기 싫거든? 거기에 빵에 가면 난 얻는 것도 없고.
합리적으로 생각한거지. 합리적으로."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거의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럼... 나는?"
그 말에 김민혁은 의자에 바로 앉아서 나를 향했다.
"왜 묻는 건데?"
그 곳에는 평소와 같은 김민혁이 있었다. 그리고 난 그것에 안도하는 자신에 대해서 놀라버렸다.
"어... 그냥?"
"수학문제나 국어문제나 일상회화나 똑같아. 문제를 대할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문제를 풀 방법이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지.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네가 최근에 자극받을 요소라고 하면 원미영밖에 없거든. 어때? 나름 괜찮은 추리 아냐?
맞다면 대답해줘.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딱히 무슨 대답을 원한 건 아닌데."
"아하. 그럼 원미영한테 자극받은 건 진짜네.
혹시 너에게도 그렇게 말했냐? 우리 둘이 무슨 사이냐고?"
쪽집게다. 이 인간, 전부터 느꼈지만 무슨 독심술 같은거 배운 것 같이 예리했다.
"응. 그런데."
내 말에 김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번 혀를 찼다.
"애초에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꼭 사람간의 대인관계라는게 '우리는 이런 사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해야 하냐?
그런거 말하지 않아도 서로 피해받는 것 없이 원만하게 잘 굴러가고 있다면 규정할 필요는 없잖아. 우정이든 애정이든 사랑이든 연민이든 뭐든간에."
김민혁은 실리주의라는 거지, 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지당했다.
나는 알았다는 듯이 끄덕였고,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나는 김민혁이 내 예상보다 엄청날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문득 잠에서 깨었다.
왜 깨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4시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아마 밖에서 차가 들락거리는 소리가 꽤 많이 나고 있었으니까 오후인 것 같았다. 왜 깨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딱딱한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깔았지만 척추쪽이 굉장히 아팠다. 이불이 그다지 두꺼운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내 집에 있는 물건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니까 불평할 수는 없었지만.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고양이는 침대는 좋아하지만 김민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듯 귀퉁이에 누워있었다. 김민혁은 벽을 보고 자는 습관이 있는 것인지 벽을 보면서 자고있었다. 내 기준으로는 꽤나 대단했다. 나는 저렇게 자면 답답해서 못 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누워서 잠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김민혁도 자고있고, 아직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서 다리가 굉장히 아파오고 있었다. 만일 내가 자기 시작한지 하루가 지났다고 해도 아직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이 들려는 그 순간에 시야의 한 구석에서 뭔가가 반짝거렸다. 침대 밑은 거의 막혀있지 않은데다가 청소가 잘 되어있어서 먼지가 거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인 것 같았다.
며칠동안 방바닥에서 자고 잇었지만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동전인가, 싶어서 일단 손을 뻗어보았다. 일단 감촉으로 보아 동전이기는 한데, 뭔가가 같이 딸려오고 있었다. 아마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감촉으로 보아 종이인 것 같았다.
나는 그때까지 주식증서라는 물건을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들이 주식을 하는 것은 대부분이 인터넷상으로 하는 거래였고, 나도 한 번 배워보겠다고 졸라봤지만 한 시간도 못 되어서 너무 어려운 설명에 나가 떨어졌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 주식이라는 것은 그저 인터넷상에서 오고가는 화폐 이상의 인식은 없었다.
위에 주식증서라고 쓰여있는 그 종이는 별로 성하지 않았다. 반 정도 잘린 것 처럼 끝 부분이 하얗게 잘려서 종이 속이 보이고 있었고, 심각하게 많은 주름이 가 있었다. 굉장히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무의식중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식 증서는 그리 두꺼운 종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용물을 알고 싶은 나는 굉장히 조심해서 열어보아야 했다. 위쪽의 부분은 남아있었기에 주식증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무시하고 다시 침대 밑으로 넣을 뻔 했다. 어쩌면 꽤 큰 돈이 될지도 모르니까 조심조심 하면서 열어보았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숨을 삼켰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숨을 쉬는 것 마저 잊어버렸다. 호흡을 재개한 것은 눈 앞이 새까맣게 흐려지기 시작한 이후였다.
주식증서는 '아르케 네트워크'라는 회사의 120주를 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아르케 네트워크.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고, 부모들이 캐나다로 건너간 이유인데.
내 부모들이 만든 회사였다. 4년도 더 되는 세월동안 꽤 호가를 달렸지만 지금은 그저 종이조각에 불과한 종이였다.
그리고 김민혁이 이 것을 갖고있다는 것은... 즉, 어제 말했던 '천만원이 종이조각이 되어버렸다'고 한 것이 이 것을 두고 한 말이었던 것이다. 도저히 그 생각을 하자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고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이것보다는 더 당황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내 가족 때문에 김민혁은 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날렸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김민혁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도저히 김민혁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뭘 하든 들어줄 것 같았고, 어떻게 해서든 보상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숨을 몰아쉬면서 생각했다. 이걸 그대로 넣으면 어떨까, 하고.
그런데 결국 김민혁을 깨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물론 김민혁에게 보이지 않으면 김민혁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서류를 보고 말았다.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내가 이미 알고있는 이상 이미 김민혁을 이전과 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털어놓고 마음이라도 편해지자. 그렇게 생각했다.
김민혁을 어떻게 깨울까 고민하다가 덮고있는 이불을 흔들어서 깨우기로 했다. 그게 가장 간접적이니까 가장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 잠에서 깬 김민혁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더니 나를 등 뒤로 바라보고 눈빛만으로 용건을 물었다. 나도 긴말하지 않고 김민혁에게 주식증서를 내밀었다. 김민혁은 가져가서 흘끗 보더니 머리를 세 번 긁적이고 다시 나에게 내밀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슨 염치로 보여주냐'라던가 '네 주제는 알겠냐'와 같은 반응을 예상했던 나는 적잖이 놀라버렸다. 멍해져 있던 머리가 제 구실을 찾아갈 무렵 나는 다시 이불을 흔들어서 깨웠다.
다시 자려다가 일어난 김민혁은 반사적인 행동인지 다시 내가 내민 주식증서를 집어가서 보고, 머리를 세 번 긁적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침대와 벽 사이의 틈으로 증서를 집어넣어 버렸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김민혁은 '여기 있었네'라고 중얼거리고 다시 잠을 잘 것 처럼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저기, 이거... 내 부모들이 만든 회사인데..."
"그래. 근데 그게 뭐?"
다시 뇌가 탈색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김민혁은 내가 중얼거린 말에 대해서 '지구는 둥글어'라고 말한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미 알고있다는 듯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내쪽이 질려버렸다.
"그... 나 한테도 약간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내 말에 김민혁은 나를 향해 완전히 돌아누웠다. 고양이는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침대가 싫었던 건지 일어나서 내 무릎위에 누웠다. 그리고 기분 좋게 하품을 했다.
"그러니까 왜 책임이 있는데?"
"일단 가족이고..."
그리고 그 이상의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김민혁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가족이라고 전부 다 책임이 있냐? 네가 빚쟁이들한테 너무 시달려서 그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은데, 애초에 채무자는 네가 아니야. 거기에 채무자도 개인파산 신청 했더구만."
그건 그랬다. 그래도 김민혁의 말은 법적으로 적합한 생각이었지만, 도덕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김민혁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거 다 알고 너 도와주겠다고 한거야. 신경쓰지 마."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벽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리고 아무리 둔감한 나라도 김민혁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알고... 있었어?"
"으응. 그럼 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중학교 동창이라는 것 만으로 집에 들이냐? 아무것도 없는 집이지만."
김민혁은 약간 빠르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원미영이 생각났다. 김민혁은 어디서인지 모르겠지만 원미영을 완벽히 조사하고 있었다.
"나를 조사했어?"
"응. 그... 중학교 동창중에 현선우라고 기억해?"
"아니."
누구야, 그건.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 말에 김민혁에게 즉답해버렸다.
"아, 그래. 애초에 나도 잊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개업 초기에 네가 밥도 못 먹는 것 같아서 도와준 적 있는데 말야. 햄버거 하나였지만."
기억에 없었다.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의 시기는 있었지만, 그때 내가 누군가에게 손을 벌릴 수 있을 정도로 낯짝이 두꺼웠던가?
"뭐, 기억하든 아니든. 그 녀석이 1년쯤 전에 흥신소를 차렸어."
"흥신소?"
"아... 그러니까, 사람 조사해주는 곳이라고 보면 돼. 불법적이든, 합법적이든 간에."
김민혁은 아직 이쪽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김민혁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결국 현선우라는 사람에게 나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는 것 같았다.
"어쨌든 현선우랑 내가 투자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1년동안 거의 상승세를 유지한 기업이 있었거든? 아르케 네트워크라고. 그래서 저기에 넣으면 손해는 안 볼 것 같다, 해서 넣었는데..."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에측이 되었다. 결국 망했다는 이야기겠지.
"미안."
"네가 미안해 할 건 아니고. 어쨌든 그래서 현선우가 갑자기 망한 기업에 대해서 굉장히 의구심을 품고 조사했거든? 숨겨둔 재산이라던가, 부동산이라던가... 왜 망한 기업 뒤편에는 그런거 많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없더라고. 숨겨둔 재산은 커녕 친척들한테서 돈 빌려서 빚쟁이들한테 뜯기고 있었고, 부동산도 다 매각된데다가 개인파산 신청까지 했어. 더 이상 볼게 없다 싶어서 그만했는데... 거기서 네 이름이 있더라고."
"그래서 부모님을 조사하다가 날 발견한거야?"
김민혁은 길게 숨을 내쉬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냥 과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이외의 다른 감흥은 느낄 수 없었다.
"응. 난 솔직히 좀 놀랐어. 너 여권도 여행비자도 다 있잖아? 가족들이 캐나다행 비행기표를 샀으니까 너도 갈줄 알았는데,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이 있더라고? 어라? 했는데 조사자료를 보니까 4인 가족인데 비행기표는 세 장이었어. 그래도 혹시 몰라서 돌다리 좀 두드려보다가 교회에서 본거지.
애초에 난 알고있는 줄 알았다고. 보통 교회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예배 드리러 온 줄 알지, 채무자 딸 잡으러 오냐? 처음부터 내가 너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던 그 시점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하는거지."
"둔하다는건 인정할게. 그래도... 그래도 난 아직 네게 책임을 느끼는데..."
김민혁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책임같은거 느껴도 네가 뭘 할 수 있어? 720만원, 갚을 수 있어?"
갑자기 눈이 핑 도는 줄 알았다. 120주라고 해도 내가 주식투자를 해본적이 없어서 큰 돈인지 몰랐던 나에게는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아... 아니."
김민혁은 그렇지? 라고 덧붙였다. 뭔가 미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720만원이면 아마 김민혁이 갖고있더 목돈의 전부였을 것이다. 거기에 김민혁은 나라는 혹을 안고 또 돌봐주고 있었다.
"미안해."
그 말이 한계였다. 내가 김민혁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김민혁도 아마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미 넌지시 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김민혁은 공허한 소리를 내는 웃음을 몇 번 하고 돌아누웠다.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내 말에 김민혁은 머리를 맹렬히 긁적이면서 낮은 신음성을 냈다. 하기야 나는 꽤 쓸모가 없는 사람이니까, 바라는 것이 있을리가...
"뭐, 정 그러면 지금 벗을 수 있어?"
김민혁은 어느새 내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그 말에 굳어진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고 있었다.
"그래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나도 서로 좋아서 뒹구는 거라면 환영이지만, 너는 나 싫어하잖아?"
그 말에 이성이 돌아왔다. 그리고 김민혁은 다시 소리없이 돌아누웠다. 저질스러운 농담도 몇 번 정도 받다보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고 무의식중에 예측해버리는 걸까. 회복은 처음에 비해 굉장히 빨라져 있었다. 나도 말이 없는 김민혁을 보고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해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내가 김민혁을 싫어한다는 말이 계속 걸렸다.
싫어한다? 아니. 전혀 그럴 이유는 없었다. 저런 농담도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농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 심각해지지 말라고 해주는 일종의 교훈과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720만원이라는 빚이 있는데다가, 김민혁이 없었으면 진작에 얼어죽었을 목숨이었다. 만약 며칠 전까지 살아있었다고 해도 지금쯤이면 얼음처럼 얼어버린 언덕을 내려가다가 사고라도 당해서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좋거나 싫다는 감정 보다는 고맙다는 감정이 우선해 있었고, 그걸 무시하더라도 싫어하는 감정이 앞서는 일은 없었다.
"싫어하는건 아닌데..."
또 생각한 것을 그대로 여과없이 말해버리는 내 나쁜 버릇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버렸다. 여기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즉...
"또 시작이냐? 며칠 전 까지는 원미영이 없어서 안 했던거야? 그렇게나 내 인내심이 강해보였어?"
이런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김민혁은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내 바로 위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를 보고 말하고 있었다.
"아... 그게..."
내가 우물쭈물 하고있자 김민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벽쪽으로 간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고양이를 침대 구석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고양이도 갑자기 튀어나온 김민혁을 경계하다가 사라지자 다시 하품을 하면서 잘 준비를 하고있었다.
김민혁과 대화를 하면 상상 이상으로 힘의 소비가 너무 큰 것 같았다. 안심이 되는 건지, 아니면 긴장해서 지쳐버린 건지 몇 초를 세기도 전에 몽롱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슬슬 잠이 왔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몇 분동안 진행된 대화가 굉장히 피곤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끼걱거리는 소리가 굉장히 불길하게 느껴져서 눈을 떴다.
아직 머리는 각성되지 않았다. 시야의 구석이 흐려져 있었고, 눈은 그 사이에 어둠에 적응한 것인지 눈을 뜨자마자 비교적 밝아진 주위에 대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 앞에는 돌아가서 자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김민혁이 얼굴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방금 난 끼걱거리는 소리는 김민혁이 내려와서 생긴 소리인 것 같았다.
"저... 김민혁?"
신기하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착 가라앉아서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였다. 마치 모든 것이 예고되어있고, 나는 그것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김민혁이 왜 내려와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또렷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아, 자려고 했는데 안되더라고. 그게, 나 분명히 경고했잖아. 다음에도 또 같은 일이 있으면 고의적 의사표현으로 간주하겠다고."
김민혁은 진심이라는 것을 눈을 보고 알아냈다. 흔들림 없는, 하지만 공허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까 무의식중에 '응 그렇지'라고 말할 뻔 했다. 뇌는 이미 김민혁이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저항을 해봤자 효과적일 것 같지도 않은데다가, 이미 양 팔이 잡혀있었다. 나는 절망감은 없이, 그저 반사적으로 인상을 잔뜩 쓴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시 졸았나보다. 눈을 뜨자 눈 앞에 있는 것은 아주 어두컴컴한 암흑 뿐이었고, 들리는 것은 김민혁의 조용한 숨소리 뿐이었다. 인상을 쓴 채로 졸아버린 건지 광대뼈 부근의 근육이 굉장히 아파왔다.
약간 어리둥절햇지만 어쨌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뿐이었다. 왜 김민혁이 단념했는지, 그런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변명도 내 상황을 합리화시키기에는 약간 부족해보였다.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오늘 하루동안은 다닌 곳을 다시 다니면서 연락처를 넣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는지 대부분의 사장들은 내 모습도 연락처도 알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도 '다른 사람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상냥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야박하다고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것은 원미영이 했던 그 말이었다. 김민혁은 나를 마음에 두고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당황스럽기보다 의심이 갔지만, 원미영은 이제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어진데다가 정작 본인은 전과 같은 태도여서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자신은 다음달을 넘길 수 있을지 굶어 죽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니까 자신의 마음을 이리저리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유는 넘쳐났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그런대로 이겨낼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자신을 살펴보면 무의식중에 과거를 살펴보게 되어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그게 싫어서 그만둔 것 뿐이었다.
지금 당장의 마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얼어서 못 가는 집 대신에 있을 수 있게 해준것도 고마웠고, 이전에 줬던 10만원은 지금 집에 있지만 충분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서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밉보인 적도 없는 것 같았고, 김민혁은 내게 너무 완벽해서 대하기 꺼려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뭐 심각할 정도로 서로를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좋아할 이유도 없다는 것일 뿐.
식권을 내고 접시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 식권도 김민혁에게 받은 것이었다. 덕분에 하루동안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아마 이 식권이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굶어죽거나 진짜 사창가로 갔을 것이다. 끔찍한 생각에 몸이 떨렸다.
잡생각을 버리고 들고있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일단 식권은 냈으니까 밥이나 반찬으로 강을 만들든 산을 만들든 상관 없었다. 오늘은 산이 좋을 것 같아서 산더미처럼 접시 위에 우겨넣었다. 한 손으로 들다가 떨어뜨릴뻔 했다.
거의 12시간만에 처음 보는 밥이어서 그런지 맛은 끔찍할 정도로 없는데도 쉼없이 넘어갔다. 가게 안에는 나와 다른 한 사람 뿐이었고,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눈치볼 일은 없었다. 그냥 손이 가는대로 입으로 집어넣었다. 근처에서 약간 놀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앞으로 이 식당을 이용하는 것 이외에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애써서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식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걸린 번호는 내가 처음보는 번호였다. 일단 의심이 되어서 한참 노려보다가 끊길 무렵에 받아보았다.
"여보세요?"
그렇게 말했더니 대답 대신에 전화기 너머에서 굉장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서커스의 동물처럼 놀림받는 것 같은 기분에 약간 목소리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잘못 걸린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끊지 않았다.
[지은이니?]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교실 내에서 꽤 자주 부딫쳐서 사이가 나쁜 사람이었다. 맨날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는데, 그게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직설적으로 '난 저 사람 싫어'라고 하면 누가 좋아할까.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속 움직이던 수저를 접시에 잠시 걸쳐두었다. 아직도 허기가 진 것은 아니고, 일단 이 사람이 전화한 것 자체가 내게 좋은 뜻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닐 것이었다. 나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곤란해질 것 같았다.
"응."
내 대답에 전화기 너머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다 끝났다지만 그렇게 느긋한가? 수업시간에 당당히 전화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무슨 일이야?"
어쨌든 이유는 알 바 아니었다. 다만 이 사람과는 나도 좋지 못한 관계이기에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그래서 용건을 물어보았다.
[네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야. 궁금하잖아?]
말문이 막혔다. 난 지금까지 남자 한 번 사귄 적 없었고, 학교에서도 그런 소문은 전혀 돌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있었다. 거기에 내가 그렇게 문란하게 행동했던 것도 아니니까 그런 소문이 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면 이 녀석은 갑자기 왜 내게 그런 말을 꺼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일까.
"아, 그래? 누가 그러는데?"
보나마나 자신이 한 것이 분명했지만,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말했다.
[왜? 사실이니까 말하면 쫓아가서 복수하려고?]
녀석은 즐겁다는 듯이 깔깔대는 말투로 말했다. 진심으로 화가 나려고 하고있었다.
수화기 너머는 굉장히 시끄러웠다. 진짜야? 라면서 묻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없다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었고, 깔깔대면서 웃는 사람도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머릿속의 뭔가가 끊어지기 직전에 진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그런 일 없어."
일단 그렇게 말해두었다. 냉정해지는데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모범답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김민혁이라면 여기에서 어떻게 말했을까.
[그래? 여기 있는 사람이 말하는건 좀 다른데? 그럼 너 왜 학교를 나오지 않는 거야?]
저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살아가면서 볼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응, 그래.'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만일 살아가다가 그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면 내 모습이 정말 비참하게 비쳐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김민혁은 언제나 어떤 행동을 하던지간에 생각할 것이다. 나는 죽었다, 라고.
나는 죽었다. 3주 전에, 나는 이미 이 세상에서 죽었다. 부모가 나를 버리고 갔을 때 나는 사망했다. 죽은 사람은 이런 일 하나하나에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냉정해지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조용히 생각해보자. 의자에 푹 기대서 몸을 이완시켰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어째서 이 녀석이 나에게 그런 누명을 씌우는가, 하는 것. 답은 금방 나왔다.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단지 그때 뿐인 뒷담화를 하고싶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한테 왜 나가지 않는지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아. 다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야."
입은 여유롭게 움직였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 것보다 한 단계 더 진보된 처방이었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자각도 희미해졌다. 한없이 냉정해져서, 지금까지의 잡생각이 다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되었다.
"너에게 말할 이유는 없어. 네 멋대로 날 폄하하는건 상관없어. 다만, 내게 들리지만 않는다면."
김민혁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았다. 아니, 여기에서 좀 더 덧붙였을 것이다.
"그래. 남을 뒤에서 욕하는건 재미있어. 그건 인정할게. 하지만 네가 나에게 뭐라고 누명을 씌워도 변하지 않는 것은, 난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거야. 네가 말해봐. 내가 그렇게 문란하게 놀았어? 아니면 내가 남자친구 하나라도 있다는 소문 들어본 적 있어?
그렇게 누군가를 찍어누르고 싶어? 그래서 남을 짓밟으면 자신이 좀 더 위에 올라간 것 같아? 그렇게 하는 것 밖에 자신이 내세울 것이 없어?"
[야, 너...]
"말 아직 안 끝났어. 그렇게 뒷담화가 하고싶으면 너희들끼리 해. 나를 대상으로 하는 것도 내가 알 수 없으니까 나는 관여할 수 없어. 다만, 너희들이 그렇게 근거없는 말로 깔깔거린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있다는 거야.
자신이 가진 것이 없어서 남을 찍어눌러야 만족감을 얻는 당신은... 솔직히 내 시각으로 봤을 때 불쌍해보여. 한 달 후에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 모르는 내 눈에도."
핸드폰을 느긋하게 닫았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김민혁이 대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약간 구역질이 났다. 마음 속으로는 전혀 하고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도 참기 힘들어서 상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는데, 김민혁은 적어도 내 눈에는 대부분이 다급해보이거나 초조해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여유로운데다가 논리정연하고 완벽해보였다. 나는 김민혁이 하는 짓을 똑같이 하면서 그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눈물이 나와서 먹던 그릇을 그대로 두고 가게에서 나왔다. 다시 가면 욕 좀 많이 얻어먹을 것 같았지만, 울면서 먹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민혁이 없는 고시원에 와서 쓰러져서 계속 울었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첫번째로, 내가 저런 일상에 있었다는 것에 배신감이 느껴졌다.
내가 원하던 일상이 이렇게 비참하고 잔인한 것이었다는 것이 서러웠다. 물론 뒷담화에 관한 것만으로 서럽지는 않았다. 나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만날 수 있을지 만날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지 않는가. 꼭 그렇게 반론도 하지 못하는 엄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잠시동안의 안락을 누려야 했을까. 죽은 사람에게 침을 뱉는 것 보다 더 악랄한 짓이었다.
두번째로, 나를 옹호해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정말 서러웠다.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하루나 이틀 정도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본인의 해명이나 증거가 없을 때 그것을 소문이라고 하게된다. 그러니까, 내가 없어진 이후로 그런 소문이 떠돌았고 시간은 꽤 지났었다. 물론 사람을 깊게 사귄 것은 아니지만 쉬는 시간에 떠들며 노는 친구들은 몇이나 있었다. 그 친구들은 소문이 퍼질때까지 내게 해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저 나에 대한 소문을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머리가 비었구만'이라고 말하는 목소리 는 나와 같이 어울리던 친구의 것이었다.
세번째로, 그냥 눈물이 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이 나와서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하소연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인간관계가 나빴던 것을 후회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렇게 필사적이 되어서 해명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눈물이 나와서 멈출수가 없었다.
울다가 선잠이 든 것 같았다. 팔을 자신의 배개로 생각하는 것인지, 내 팔을 베고 편안히 자고있는 고양이가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도 잠시, 형광등에 눈이 적응하지 못해서 굉장히 시렸다. 저 형광등이 켜진 채로도 잘 수 있었으니까 그리 심각하게 밝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운 뒤에 배개에 엎어져 잔 이후에 대하는 형광등은 굉장히 눈이 부셨다.
아마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것 같았다. 김민혁은 내가 깨기 전부터 뭔가를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하얀 천이 있었고, 중심에서 주변으로 뭔가를 계속 내려놓고 있었다. 종합적으로 보아 뭔가를 분해하는 것 같았다. 아마... 뭔가 작은, 라디오 같은 것 같았는데, 이쪽에서 보아서는 김민혁이 뭘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와. 얼굴 대박인데."
김민혁은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뒤를 고개만 돌려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듣고나서 이해하기까지 3초. 그래. 난 울다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침대에 쓰러져서 잔 것이었다. 정상적인 얼굴이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런 얼굴을 보였다는 것이 굉장히 부끄러워서 얼굴을 돌렸다.
"샤워라도 해. 난 나갈테니."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일어나서 못의 끝부분에 걸린 오리털 외투를 입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큰 종이를 덮어서 지금까지 하고있던 일을 덮었다.
어쨌든 샤워는 나도 하고싶었다. 우는 것도 꽤 힘든 일인건지 굉장히 땀을 많이 흘렸다. 일단 씻고 싶었다. 거기에 내가 쓰고있는 집의 주인이었다. 주인이 하는 충고니까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거기에 일단 전혀 나빠보이지는 않는 충고였다. 그래서 응, 이라고 답하고 김민혁에게 얼굴을 돌린 채로 욕실을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있는건 건드리지 말아줘. 뭐 없어지기라도 하면 정말 슬플거야."
김민혁은 나가기 직전의 문에서 말하는 것 같이 소리가 멀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들춰보기가 정말 미안해졌다.
음. 그래. 열어보지는 말고, 그냥 종이 사이로 보는 것으로 정체를 알아보자.
종이의 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위쪽의 종이를 살짝 들춰보았다. 그런데 끝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날이 달려있기는 한데, 솔직히 날만으로 따지면 면도기에도 달려있고, 문구점용 커터나이프에도 날이 달려있고... 결국 조립하면 어떤 형상이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김민혁은 2일에 한 번 심야 아르바이트를 간다고 했었다. 그리고 어제 갔으니까 오늘은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민혁과 나는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김민혁이 밤에 뭘 하든 알 권리는 없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로 샤워를 하다가 다시 눈물이 나왔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비참하게 되는 것일까. 내가 알던 것보다 일상은 더 추악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처방이랍시고 하는 짓이라고는 마음을 죽이는 것 뿐이었고, 그러면서 하소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무도 나를 소중히 여겨주지 않았다. 조금만,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줬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만 둔다, 는 지금까지 못했던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김민혁의 것일 면도기에 달린 날이 자신을 사용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왼손으로 면도기를 잡았다가, 오른손으로 만류했다. 그리고도 웃기는 것은, 내가 왜 그만두어야 하는지 이유랄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죽기 싫으니까? 아니. 지금 상태와 죽는 것은 그리 달라보이지도 않았다. 생존본능? 아마 그것이 가장 가깝겠지만, 그만 두고싶다는 욕구도 분명히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면도기를 제 자리에 놓고 욕실에서 도망치듯이 나왔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 이후로 누구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조금씩 울고 있었는데, 김민혁이 오는 소리가 들려서 빨리 눈물을 훔쳤다.
"무슨 일이 있었나보네.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도와줄 일은 없어."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와버렸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반사적으로, 목이 심각하게 잠겨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소리가 나온 것 뿐이었다.
"쯧. 현실을 직시하지 말라니까. 볼수록 더 힘들어진다고."
김민혁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절박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정론이었다. 나는, 이 현실을 직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미치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알았어. 조금 소홀했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아 종이를 치웠다.
"그런데 너 옷하고 칫솔은 어떻게 하냐?"
김민혁이 시선을 책상을 향한채로 물었다. 그리고 나는 약간 당황해버렸다.
옷은 갈아입지 못했다. 옷이 없는데다가, 원미영이 두고 간 옷보다 지금 입고있는 옷이 좀 더 상태가 좋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쭉 입고말지. 그런데 최근 며칠동안에도 계속해서 일자리를 구하러 뛰어다녔기에 완전히 땀이 베어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에게 민폐가 될 정도로 심각했다. 음...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옷은 못 갈아입었고, 칫솔은..."
칫솔은... 칫솔은... 그냥 손에 잡히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더 생각하면 굉장히 난처해질 것 같았다.
"칫솔은?"
김민혁이 내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김민혁도 짐작가는 것이 있는지 굉장히 어색하게 웃고있었다.
"칫솔은 집히는 걸로..."
결국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김민혁에게 가방을 빌렸다. 등산용 가방이었는데, 김민혁은 여기에 옷만 10벌 가까이 넣은 적이 있다고 했었다. 아마 얼음이 녹는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다섯 벌 정도만 챙겨도 괜찮겠지. 단순계산이면 가방의 절반만 채우는 것으로 될 것 같았다.
칫솔은 두 개를 사서 하나는 김민혁에게 미안했다는 뜻으로 주었다. 김민혁은 거절하려다가 피식 웃고는 어색한 웃음인채로 칫솔 하나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김민혁의 방으로 돌아가서 화장실에다가 내 칫솔 하나를 걸어놓고 나왔다.
고양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지하철 역 앞까지만 좇아와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시간은 오전 일곱시 정도였다. 김민혁이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서 일단 가방을 빌렸다. 김민혁은 이유를 물었고, 나는 집에 옷을 가지러 간다고 말해주자 전혀 아무런 핀잔도 없이 그냥 빌려주었다.
그래서 지금 지하철을 내려가고 있었다. 출근길의 행렬에 섞여서, 물과 소주가 섞이는 것 처럼 육안으로 보기에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 처럼 융화되었다. 이러고 있으면 마치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게 좋아서 계단을 몇 번이나 왕복하다가 문득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기분은 굉장히 오묘했다. 이 버스를 내리면, 그리고 걸어서 내 집 앞까지 가면 과연 그 집은 내가 알던 그 집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줄 것인가.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리가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희망은 갖고있었지만, 이미 희망은 공상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희망을 품고있는 것인지 내 마음상태 자체도 의심이 갔다.
고양이는 버스에 타려는 순간 내 다리 쪽에 달라붙어서 기사의 눈을 속였다. 진짜 사람같았다. 정말 그 자체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 무릎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 정도. 그리고 곧 졸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조는 것은 또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지만 어떻게든 자는 것 같았다. 이거 또 진귀한 풍경이었다.
집은 언제나처럼 완전히 망가진 상태일 것이다.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다. 결국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것은, 정말 바보같지만, 이보다 더 바보같을 수는 없지만, 딱 2달 전으로 되돌아가서 단란한 내 집을 보고 싶었다. 단 한번, 꿈이라도, 환상이라도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굉장히 간절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사장에서 쓸법한 크기의 해머로 깨진 담벼락을 보고 그런 생각을 접었다. 꿈은 꿈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만 두자. 현실을 직시하지 말자. 그 생각만 하룻밤 내내 했다.
집 안은 난장판일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닥치는대로 때려부수고 찢어놓아서 압류딱지도 붙일 수 없었으니까 아마 건질 옷이 별로 없을지도 몰랐다. 결국 집에 눌러앉았고, 그것을 참지 못해서 결국 우리 가족은 여관방을 전전해야 했다.
TV도 창문도 옷장도 세면대도 유리도 전등도. 부술 수 있는 가재도구는 모두 다 부숴졌고, 덧붙여 우리 가족도 부서졌다. 아니, 빠진 것은 나 혼자뿐이니까 부서졌다고 하면 좀 어폐가 있나?
어쨌든 가방을 열고 부서진 장롱 앞에 앉았다. 조각조각난 장롱의 나무들이 바닥을 메우고 있어서 털썩 주저앉았다가는 그야말로 바늘 방석에 앉게 될 것 같았다.
장롱을 발로 차고,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았지만 그다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을 쓸면서 있던 옷도 다 못 입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들여다보며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 있던지, 잘 있겠지. 그 고양이도 슬슬 나에게 질렸을 것 같고.
결국 신발을 근처에 두고 사람의 키만한 전등의 지지대를 뽑아 아래에 넣었다. 신발 한쪽으로는 받침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연필깎기를 신발 위에 올려서 좀 더 높이를 올렸다. 그리고 힘껏 눌러서 옷장을 들어올렸다. 완전히 들어올려진것도 아니지만, 반대편으로 뒤집기에는 충분했다.
다행히 안에는 티셔츠와 긴팔, 청바지 몇 별이 남아있었다. 치수가 안 맞아보이는 것은 놔두고 편하게 입을 수 있을만한 것들을 골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딩 동]
벨이 울렸다.
◇
팔이 빠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무게의 쓰레기 봉투를 두 개 내려놓고 등을 이완시켰다. 시급 4200원으로 최저임금보다는 400원 정도 비싸기는 하지만, 솔직한 심정은 차라리 최저임금인 3800원만 받아도 괜찮으니까 일 좀 적게 시켰으면 했다.
양지은을 마지막으로 본지 3일이 지났다. 그러면서 핸드폰이고 뭐고 연락할 수단은 전혀 없었다. 전화는 핸드폰 배터리를 억지로 뽑은 것인지 몇 십초동안 통화음이 나다가 끊어졌다.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는, 그런 안일한 생각도 분명히 있었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도 자신의 집에 가는 것 같았으니까 잃어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 얼빵해보이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꽤 여러가지 빼먹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까지 가는데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위쪽의 얼음이 녹아서 길이 풀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집에 아이젠이라도 있거나.
뭐, 어차피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생활에서 누군가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 일상에 들어오는 것을 말리고 싶었다. 1년동안 누군가와 깊게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어색해지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점점 더 익숙해졌다.
그래도 이야기하기 힘들지 않았던 것은, 이미 내가 자신의 자아가 희미해질 정도로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 내 상태라면 상대가 살인자든 사기꾼이든 누구든간에 감정에 섞이지 않고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운슬러나 편견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 직업이 적합하겠지만, 학벌도 전문기술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뭘 맡길까.
어쨌든 자고싶었다. 씻는 것도 뭐도 됐으니까 지금은 들어가서 잤으면...
그런데 침대에 눕자마자 누군가가 전화했다. 짜증이 확 치밀어올랐다.
"여보세요."
[......]
전화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장난전화? 재수 없게 달못 누른 번호인가?
"누구세요?"
아주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 김민혁?]
"네. 그런데... 누구세요?"
침대에 누워서 말했다. 옷을 벗기도 귀찮아서 그냥 이불속에 들어갔다. 좀 더러워지겠지만 몇 달째 빨지 않은 이불이었다. 이 정도는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어. 현선우인데. 양지은이 있으면 동창회라도 해야하지 않나, 해서.]
"아, 그래. 근데 이쪽은 회비고 뭐고 낼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하지가 못해. 개털인데."
[야야야, 너 꽤 있잖아? 좀 쓰지? 돈 뒀다가 국 끓여 먹을거야?]
"국 사먹을거야."
[야. 좀, 재미없는 농담하지 말고.]
재미고 뭐고. 이쪽은 졸려 죽겠다고. 되도록이면 용건만...
그러고보니 좀 걸리는게 하나 있었지.
"그보다 양지은 지금 없어. 집에 있겠지. 그래서 묻는데, 위쪽 동네 얼음 녹았냐?"
[눈? 아니.]
굉장히 당연하다는 듯이 현선우가 말했다. 엄청나게 당연해서 '1+1=2'라고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이해한 이후에는 굉장히 어이가 없었다. 그럼 양지은은 어디에 있다는 거야?
"진짜 안 녹았어?"
[응. 야, 김철민! 너 오늘 아이젠 신은 이유가 얼음 안 녹아서 그런거지?]
수화기 너머에서는 긍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 그리고 그 녀석 바지가 상당히 찢어졌거든? 아이젠 신어도 오기 힘들어. 뭣보다 싸구려라는 점도 한몫 했겠지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만일 그 예측이 들어맞았다면 그런 상황이 되게 만든 내 책임이 절반은 있지 않을까. 옷의 이야기를 꺼낸 것도 가방을 빌려준 것도 내가 한 일이었다.
"현선우. 쓰레기통 좀 빌리자."
미친듯이 달렸다. 이보다 더 절박하게 달린 것은 1년 전 학교에서 체육 시험을 볼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니, 아마 그것보다도 더 심하게 뛰었을 것이다. 왕복 6차선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에 4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골목길의 가장 오른쪽, 아침이라 네온사인이 켜지지 않았을 그 골목의 입구에서 '승리성공인력사무소'라는 간판을 보았다. 그리고 그 건물로 뛰어들어가 계단을 찍어누르듯이 밟아올라서 네 개씩 뛰어올랐다. 도중에 왼쪽 발목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만일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내 발목 정도로는 감당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일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랬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맞아 떨어졌다. 감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나쁜 생각은 다 들어맞았고,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예측은 보란듯이 빗나갔다. 그러면서도 정작 미래에 있을 행운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냥, 나는 빌어먹을 정도로 불행을 감지하는 데에 뛰어났던 것 뿐이었다. 내가 불행을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숨을 몰아쉬면서 마지막 다섯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 올라갔다. 발을 멈추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문 앞에서 망을 보며 책을 읽던 사람이 굳어질 정도로 내 모습은 다급해보였다.
솔직히 말해 구면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단체로 출장을 갔을 때마다 사무실을 봐 주었다. 8시간 동안 전화하고 메모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사무실 구석에 내 캐비넛이 있었다. 물론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지만, 그것도 한 3개월 정도 사무실을 봐 준 적이 없으니까 치웠을 것이다.
"현선우 만나러 왔는데. 있지?"
"아... 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문고리를 거칠게 열고 들어가 문 뒤편의 구석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이라고 해서 음식물 쓰레기라던가 그런 것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파쇄지에 갈린 서류들을 구겨넣는 곳이었다. 애초에 음식물이 반입 금지였다.
밀도가 낮은 종이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쓰레기통을 양 손으로 잡고 옮긴 뒤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랬는데...
"야, 너 애초에 캐비넷 있잖아. 어떤 등신이 팔 물건을 그런 곳에다 두냐?"
그렇게 말하는 현선우에게 눈길도 주지않고 캐비넛을 열었다.
이름, 나이, 생일, 학력, 주민등록번호, 국적, 현재 자산, 가족관계, 이해관계, 이성관계, 키, 체중, 체지방률, 근육 밀도, 운동빈도, 자격증, 알레르기, 과거 병원기록, 산부인과 기록, 정신과 기록, 최근 접속한 인터넷 사이트 30개, 증명사진 한 개...
정작 필요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네 페이지였지만, 끝까지 읽고있을 시간이 없었다. 뒤쪽에서 바라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그런 것 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결국 10분 정도 후에 두번째 페이지의 중반부분에서 '주소'라는 항목을 찾고 가장 최근의 주소를 찾았다. 양지은의 집이었던 곳은 서울 중구의 공덕동인 것 같았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약도가 그려져 있지만, 지하철로 가는건 너무 늦었다.
그리고 나가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현선우를 돌아보았다.
"현선우. 아는 사람중에 의사 있어?"
"솔직히 좀 의외였다? 네가 그렇게 다급해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게 지금도 안 믿겨."
현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어이가 없다는 것 같이 웃었다. 내쪽은 전력질주로 쓰러지기 직전이어서 차의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현선우는 결국 나를 쫓아오기로 했다. 걱정이 되는 것 같지는 않고, 그저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것 같았다. 내쪽에서는 택시비를 내준다는 말로 흔쾌히 승낙을 해버렸으니 할 말은 없었다.
차창 너머로 1년 전까지 몇 번이나 지나다녔던 길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통학로인데... 정오 무렵이어서 그런지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양지은이 보았자면 울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쪽으로서는 아무 느낌도 없는 그저 길거리의 풍경이었다. 1년 전, 살아있을 때에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겠지. 아무 감흥도 없고, 어떤 생각도 없었다. 바이바이, 단란한 학창시절이여. 피식, 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좋아하냐?"
현선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시체한테 뭘 더 바라는 건데?"
난 이미 죽은 녀석이다. 애초에 생물이 아닌 것에게 마음을 묻는다면, 뭐라고도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럼 왜 그렇게 달려온건데? 거의 5년동안 알고지냈는데, 네가 지금처럼 다급해 보이는 건 처음이야."
"내게 책임이 있는 것 같아서."
"거짓말."
귀찮아졌다. 원래부터 이렇게 엉겨붙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자, 만약 네 말대로 내가 좋아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내가 그렇게 누구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어보이냐?"
"야, 감정은 감정일 뿐이잖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안되는."
"그래. 네 말대로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지. 탁상공론은 재미 없으니까 그만해. 만일 내가 양지은을 좋아한다고 해도 감정으로 끝날 일이야."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걸로 끝냈으면 한다. 애초에 나같이 미래도 희망도 없는 사람을 누군가가 좋아할리가 없었다. 애초에 있다고 하면 머리를 해부해봐야 할 일이고.
"쯧. 뭐 그렇다고 치고. 어쩔거냐? 만일 네가 말한대로의 최악의 상황이라면?"
현선우는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럴 때 쓰라고 특공무술이나 합기도 알려준 거 아냐? 그 사람 제대로 배워서 알려주는 거라며."
3개월 정도 전에, 곧 있으면 실종신고가 사망신고로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현선우에게 매달렸더니 의외로 실력이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리고 두어달동안 훈련을 빙자한 구타와 내던짐을 당해서 이제는 어떤 자세로 넘어져도 낙법은 확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뭣도 모르고 주먹만 쓰는 양아치들에게 오히려 돈을 뜯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을 살인도구로 만드는데에는 3주면 충분하다나.
"너를 보호하라고 알려준거지 누구 도와주라고 알려준 건 아닌데."
"그럼 넌 누가 죽는데도 가만히 앉아서 구경할거냐."
"응. 경찰에 신고는 하겠지."
그만 두기로 했다. 경찰이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도 쓸 생각이 없었다.
"경찰로 해결되면 나도 안 싸워. 다만 지금은 네가 맡겨놨던 물건들을 다 들고왔으니까. 여차하면 쓸거야."
현선우는 질렸다는 듯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기사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아마 반대편에서 오는 차에 머리를 들이받았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대꾸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지쳐버렸다. 옆에서 뭐라 떠들고 있는 현선우 떄문이 아니라, 몇 분 동안의 전력질주 때문도 아니라, 어제 야간 아르바이트 때문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이전에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무전취식 여자애가 와서 욕을 한 바가지 했다. 끝내는 영업방해로 경찰을 부를까, 했지만 불쌍해서 그냥 두었다. 대체 머리가 이상해진건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조용한 곳을 찾았다. 애초에 사람은 믿지 않았다. 조용히 돌려보내고 꾸벅꾸벅 졸고있으려니 경찰이 나더러 성폭행 미수라고 연행하려 했다. 매장 전체에 달린 CCTV를 돌려서 경찰을 납득시켰다. 이후에 곧바로 손님 하나가 도망가서 근처 빌딩지역을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결국 잡기는 했는데, 끝내 돈이 없어서 사장님을 불렀다. 사장님은 근 3개월동안 내가 담당일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굉장히 미심쩍게 생각했다.
지금은 조급하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고 판단해서 자두기로 했다. 돈이라고 하면 현선우가 내기로 했고, 일단 같이 타고있으니 이상한 곳에서 내려준다고 해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 조금만, 늪에 가라앉듯이, 자도록 하자.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고양이와는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얼굴쪽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상황이지만, 내가 화내거나 때리려고 해도 고양이는 반사신경이 좋아서 모두 피해버렸다. 그래서 이 고양이가 내 마음을 알고 있다고 단정지어버렸다. 물론 내가 공격할 것을 안다는 것 이외에도, 나는 내 자신을 죽이고 싶어할 정도로 싫어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나를 공격하고, 내가 어디를 때릴지 안다면 내 마음을 읽는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202호실의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기억이 끊기고, 눈을 뜨자 신림역 근처의 커피숍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었다. 돈은 있는데, 쓸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썼다가는 다음달에는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어떻게 얻은 빵껍질을 먹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튀겨서 팔기 때문에 더 이상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출근길에 길 한 구석에 앉아있으면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사람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자면,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 홀로 떨어진 외톨이였다. 말하자면, 높은 빌딩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높아서, 너무 멀어서 자신이 여기에 실재로 존재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이대로 사라져도, 이대로 뛰어내려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한대로 빌딩을 올라가 보았다. 30층이었던가, 40층이었던가. 문을 열자 난기류가 흩어지면서 바람이 몰아쳤다.
장관이었다. 눈에 담는 풍경은 너무나 밀도가 낮고, 마치 안개나 신기루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과 내 눈에 비친 이 시야는 일말의 접점도 없어서, 내가 보는 것이 진짜인지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진짜인지 혼동되기 시작했다.
정직히 말해, 지금 죽어도 문제는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기는 것도 거의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보고싶은 것도 더 이상은 없었다. 다만 모든것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좋든 싫든 부모라는 방패는 없어졌다. 덕분에 갖고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난간 아래쪽의 풍경은 바라보지 못했다. 아직 두려움이라고 할만한 감정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무서워하는 감정이 남았다는 것에 순수하게 놀랐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었다. 나는 내 인생을 며칠 뿐이지만 살았다. 그 누구의 개입도, 누구의 바램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그것이 역겨울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은 없었다.
사랑같은 것을 동경하기는 했지만 해본적은 없었다. 그저 좋겠다고 생각하기만 할 뿐, 부럽다고 생각하기만 할 뿐, 그런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도 싫었고, 과도한 욕심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고, 또 그러면서도 자신을 싫어하는 자신이 싫었다.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았고, 따라서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을 향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은 말을 깨울칠때부터 이미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과, 내가 이룬 성과에 있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저 동경. 바라지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동경일 뿐이었다.
희망은 더 이상 바랄 수 없었다. 내 미래에는 평온한 일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내 발로 차고 나왔다. 평온한 일상, 거짓도니 사랑이지만 문제가 없는 가족, 무난한 미래. 이제는 내 손에 다시는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있었다. 원해도 손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될 수 있다면 바라고싶지 않았다.
평안은 내가 이미 버리고 나왔다. 나는 평안과 바꿔서 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만일 평안을 내가 바란다면 내 인생을 버려야 했다. 그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며칠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가 생존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더라도, 바꾸고싶지 않은 내 인생이었다.
얻고싶은 것이 모두 다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만족한다면 만족했고, 부족하다면 부족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몸이 공기로 가득 차서 배가 고픈것도 어지러운 것도 모두 다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방긋 웃듯이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나도 따라서 손을 흔들어주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떨어지면서 생각했다. 이건 아닌데.
[모두의 마음은 고양이와 같다. 주종관계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만 결정적인 때에 자신을 배반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경우에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김민혁의 책장을 구경하다가 찾은 A4용지에 적힌 구절이었다. 윗 동네에 눈이 녹지 않아서,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린 통에 나는 집에 갈 수 없었고, 김민혁은 나를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해 주었다.
2일이 지났지만 원미영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민혁은 아마 나를 좋아하고 있을거라는, 그런 추측뿐인 이야기이지만, 어느정도 여유가 생긴 나에게는 꽤 고민할만한 이야기였다.
고양이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보냈다. 고양이의 열효율이 굉장히 낮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지만, 아무래도 뭔가 병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키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키워지고 있다는 것에 가까우니까 고양이를 생각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없어지면 약간 슬퍼하기는 하겠지만, 왠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안녕. 여기."
나를 보자마자 김민혁은 손에 들고있던 은박지를 내밀었다. 매일마다 얼결에 받기는 했지만 언제나 내용물이 김밥이라는 것에는 약간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김민혁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게 500원짜리 김밥이던, 5만원짜리 선불 단말기던 고맙기는 마찬가지다. 어쨌든 나에게 뭔가 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있다는 것 만으로도 김민혁은 굉장히 나를 생각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거주하는 집은 이 곳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열악했고, 김민혁도 그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김민혁이 먹을 것을 갖고온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나에게 뭔가 주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하고싶지는 않았다. 내 마음을 아직 나는 잘 몰랐고, 또 원미영이 말한 것도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고양이도 얌전했고, 아직 내일을 걱정할 정도로 가난한 것은 아니었고, 언덕의 위쪽이 얼마전에 내린 눈과 비로 몽땅 얼어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직 여유는 있었다.
김민혁은 담배냄새가 완전히 베어버린 코트를 튀어나온 못에 걸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저거 분명히 반대편에서 못을 박은 뒤 튀어나온 것이었다. 잘못해서 부딫치면 파상풍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정도로 못의 끝 부분이 길게 튀어나와 있었다.
"살만해?"
김민혁이 말했다. 거의 하루동안 서로 이야기가 없다가 갑자기 대화를 시작하니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했다.
"쯧. 미안. 어제랑 오늘은 조금 많이 심란했어. 화났어?"
나는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화가 나야 하는 걸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그럭저럭 살만한데다가 내가 너한테 화낼 이유는 없잖아."
"그러냐. 그거 고마운 소리네. 최근에 들었던 어떤 말보다도 감사해."
오늘 김민혁은 약간 이상했다. 극히 힘이 없어보였고, 속눈썹에 뭔가가 맺혀있었다.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입의 가장자리가 터져있는 것 같았다. 입술에도 뭔가가 깨문 자국이 선명했다.
"울었어?"
역시 난 이게 문제다.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버리는 것. 그 외에도 문제점이라면 노트 몇 권을 채울 정도로 있지만.
"아... 응. 뭐, 그렇지."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눈가를 닦은 뒤 머리를 맹렬히 긁적였다. 구멍나지 않은 피부가 신기할 정도로.
"말해줘?"
"달리 할 이야기가 없다면."
아직 김민혁이 주인에게 맡기지 않은 이불을 깔고 앉았다. 딱히 할 이야기도 없고, 내가 가진 이야기는 그리 재미있지 않다면 김민혁이 할 이야기는 무료한 구직생활에 약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 3일 됐나? 어쨌든. 기억해? 도와줬더니 배은망덕하게도 여기를 털어간 사람이 있었다는 거?"
"응."
"오늘 내가 일하는 피시방에 찾아왔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2일 전부터 있었어."
"2일 전부터? 미성년자는 10시 이후에 나가야 하지 않아?"
"일단은 그런데... 글쎄. 형제나 자매가 있나봐. 현행법상 위조되거나 허위 신분증이면 잡혀도 책임을 묻는 것은 속인 쪽이지 속은 쪽은 아니거든.
어쨌든. 2일동안 그냥 지켜봤어. 가끔씩 옆을 지나가거나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가끔씩 눈이 마주치면 그냥 서비스 커피나 달라더라고. 나도 몇 분 전까지는 비슷한 사람일거라고 생각했거든. 군말없이 그렇게 대했는데...
문제가 생긴거지."
"문제?"
싸웠나? 컴퓨터를 부쉈나? 카운터의 컴퓨터를 해킹했나?
"오늘로 3일째인데, 슬슬 계산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근무 태만으로 월급이 깎였었거든. 나는 아니지만, 그런 사례가 있었어."
"돈이 없었구나."
"그렇지."
김민혁은 서랍에서 약을 꺼내 페트병의 물과 함께 넘겼다. 목에 약이 걸렸는지 몇 번인가 기침을 했지만 금새 잠잠해졌다.
"돈이 없었어. 그걸로 끝나면 나도 좋아. 그런데, 거기서 거래를 해오더라고."
"거래? 돈이 없는데 무슨..."
김민혁은 숨을 길게 내쉬면서 날 바라보면서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뻔하지. 그 인간은 여자고 난 남자거든?"
"응. 대충 알았어."
대충 이해가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김민혁은 그 사람과... 자고 왔다는 것 같았다.
"응. 그래서 경찰서에 가서 조서쓰고 왔어. 경찰들도 몇 번째 잡아들여서 귀찮아하는 눈치더라."
미안, 이라고 하려다가 입을 틀어막아서 막았다. 너무 내 멋대로 사람을 평가해버렸다. 김민혁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딱히 추궁하지는 않았다.
"그게 슬펐어. 나는 진심으로 대했는데, 저쪽은 등쳐먹을 대상으로 봤던게."
"그래..."
그렇게나 슬픈 일일까?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면 전부 아닐까?
"뭐, 너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말야... 나름 좋아했다고. 중 3 여름방학때 한 달 정도 근처에서 살면서 꽤 정들었으니까. 그때 가출했었거든. 그래서 울었어."
그랬다면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아주 약간 화가 나버렸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김민혁을 때리고 싶어졌다. 기왕이면 좀 아플 곳으로. 죽으면 좀 곤란하지만.
그런데 원미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만약 김민혁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저, 김민혁."
"어?"
김민혁은 반쯤 맛이 간 목소리로 말했다. 혀가 약간 꼬인 것 같았다. 무슨 약일까, 저거.
"내가 그러겠다는 것은 아닌데, 만일 다른 사람이 다시 그런 일을 하면 어쩔거야?"
"잡아서 장기매매로 한 밑천 챙길거야. 저번에 투자했던 천만원이 종이조각이 되어버렸거든."
아... 그거 또 굉장히 어두운 이야기네.
"그럼... 내가 그러면?"
김민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약간 인상을 쓰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러겠다는 것은 아니고."
김민혁은 내가 머뭇거리며 말하자 고개를 좌우로 몇 번 흔들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음..."
센 것만 열 번째. 언제까지 저럴 생각일까. 약 3분 동안 김민혁은 의자에 앉아서 등을 끝까지 젖힌 뒤 오른손으로 양 손을 가렸다. 그리고 계속 생각중이었다.
"음. 일단 찾아서... 어쩔까. 질릴때까지 범한 다음에 빚쟁이들한테 넘겨버릴까? 전혀 모르던 사람도 찾았는데, 빚쟁이 정도라면 일도 아니겠고."
순간 오싹해졌다. 김민혁은 전혀 장난기 없는 목소리로 말했고, 내 소름을 돋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했다.
"뭘 심각해져서. 농담이야, 농담."
김민혁은 반쯤 뜬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주 약간 안심한 나는 들이켰던 숨을 내뱉었다. 잠시동안이지만 갑갑해서 죽는 줄 알았다.
"일단 찾기야 하겠지. 이유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그럴때는 돈이 필요해서 그랬을테니까, 다시 그러지 말라고 한 뒤 그냥 넘어갈 것 같은데. 솔직히 난 돈이야 있던 없던, 내일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녀석이니까 돈은 상관 없어."
안심함과 동시에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순이야. 돈이 중요하지 않으면 왜 다른 사람들은 장기매매를 시키는데?"
"어, 그렇네."
김민혁은 얼빠진 소리로 답했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은 내게 말할 생각이 없다고 해도 무방한 걸까?
"아마... 멋대로 내 물건에 손대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고 장기를 팔아?"
"응. 이쪽에서 증거고 뭐고 다 잡고있으니까. 그럼 남은건 장기팔기, 아니면 빵에서 썩기인데 그 인간한테 선택권을 주기 싫거든? 거기에 빵에 가면 난 얻는 것도 없고.
합리적으로 생각한거지. 합리적으로."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거의 의자에 눕다시피 앉아서 손을 휘휘 흔들었다.
"그럼... 나는?"
그 말에 김민혁은 의자에 바로 앉아서 나를 향했다.
"왜 묻는 건데?"
그 곳에는 평소와 같은 김민혁이 있었다. 그리고 난 그것에 안도하는 자신에 대해서 놀라버렸다.
"어... 그냥?"
"수학문제나 국어문제나 일상회화나 똑같아. 문제를 대할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문제를 풀 방법이 아니라 출제자의 의도지.
그런데 내가 볼 때는 네가 최근에 자극받을 요소라고 하면 원미영밖에 없거든. 어때? 나름 괜찮은 추리 아냐?
맞다면 대답해줘.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딱히 무슨 대답을 원한 건 아닌데."
"아하. 그럼 원미영한테 자극받은 건 진짜네.
혹시 너에게도 그렇게 말했냐? 우리 둘이 무슨 사이냐고?"
쪽집게다. 이 인간, 전부터 느꼈지만 무슨 독심술 같은거 배운 것 같이 예리했다.
"응. 그런데."
내 말에 김민혁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 번 혀를 찼다.
"애초에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꼭 사람간의 대인관계라는게 '우리는 이런 사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해야 하냐?
그런거 말하지 않아도 서로 피해받는 것 없이 원만하게 잘 굴러가고 있다면 규정할 필요는 없잖아. 우정이든 애정이든 사랑이든 연민이든 뭐든간에."
김민혁은 실리주의라는 거지, 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지당했다.
나는 알았다는 듯이 끄덕였고, 대화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나는 김민혁이 내 예상보다 엄청날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문득 잠에서 깨었다.
왜 깨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4시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아마 밖에서 차가 들락거리는 소리가 꽤 많이 나고 있었으니까 오후인 것 같았다. 왜 깨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잠시 딱딱한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깔았지만 척추쪽이 굉장히 아팠다. 이불이 그다지 두꺼운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내 집에 있는 물건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니까 불평할 수는 없었지만.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다시 자리에 누웠다. 고양이는 침대는 좋아하지만 김민혁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듯 귀퉁이에 누워있었다. 김민혁은 벽을 보고 자는 습관이 있는 것인지 벽을 보면서 자고있었다. 내 기준으로는 꽤나 대단했다. 나는 저렇게 자면 답답해서 못 잘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누워서 잠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김민혁도 자고있고, 아직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서 다리가 굉장히 아파오고 있었다. 만일 내가 자기 시작한지 하루가 지났다고 해도 아직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이 들려는 그 순간에 시야의 한 구석에서 뭔가가 반짝거렸다. 침대 밑은 거의 막혀있지 않은데다가 청소가 잘 되어있어서 먼지가 거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인 것 같았다.
며칠동안 방바닥에서 자고 잇었지만 전혀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동전인가, 싶어서 일단 손을 뻗어보았다. 일단 감촉으로 보아 동전이기는 한데, 뭔가가 같이 딸려오고 있었다. 아마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감촉으로 보아 종이인 것 같았다.
나는 그때까지 주식증서라는 물건을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들이 주식을 하는 것은 대부분이 인터넷상으로 하는 거래였고, 나도 한 번 배워보겠다고 졸라봤지만 한 시간도 못 되어서 너무 어려운 설명에 나가 떨어졌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게 있어서 주식이라는 것은 그저 인터넷상에서 오고가는 화폐 이상의 인식은 없었다.
위에 주식증서라고 쓰여있는 그 종이는 별로 성하지 않았다. 반 정도 잘린 것 처럼 끝 부분이 하얗게 잘려서 종이 속이 보이고 있었고, 심각하게 많은 주름이 가 있었다. 굉장히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무의식중에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식 증서는 그리 두꺼운 종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용물을 알고 싶은 나는 굉장히 조심해서 열어보아야 했다. 위쪽의 부분은 남아있었기에 주식증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무시하고 다시 침대 밑으로 넣을 뻔 했다. 어쩌면 꽤 큰 돈이 될지도 모르니까 조심조심 하면서 열어보았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숨을 삼켰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숨을 쉬는 것 마저 잊어버렸다. 호흡을 재개한 것은 눈 앞이 새까맣게 흐려지기 시작한 이후였다.
주식증서는 '아르케 네트워크'라는 회사의 120주를 샀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었다. 아르케 네트워크.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고, 부모들이 캐나다로 건너간 이유인데.
내 부모들이 만든 회사였다. 4년도 더 되는 세월동안 꽤 호가를 달렸지만 지금은 그저 종이조각에 불과한 종이였다.
그리고 김민혁이 이 것을 갖고있다는 것은... 즉, 어제 말했던 '천만원이 종이조각이 되어버렸다'고 한 것이 이 것을 두고 한 말이었던 것이다. 도저히 그 생각을 하자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고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이것보다는 더 당황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내 가족 때문에 김민혁은 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날렸다. 그것도 모자라 나는 김민혁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도저히 김민혁을 동등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뭘 하든 들어줄 것 같았고, 어떻게 해서든 보상해야 할 것 같았다.
잠시 숨을 몰아쉬면서 생각했다. 이걸 그대로 넣으면 어떨까, 하고.
그런데 결국 김민혁을 깨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물론 김민혁에게 보이지 않으면 김민혁이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 서류를 보고 말았다. 보지 않았다면 모를까, 내가 이미 알고있는 이상 이미 김민혁을 이전과 같이 대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털어놓고 마음이라도 편해지자. 그렇게 생각했다.
김민혁을 어떻게 깨울까 고민하다가 덮고있는 이불을 흔들어서 깨우기로 했다. 그게 가장 간접적이니까 가장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막 잠에서 깬 김민혁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더니 나를 등 뒤로 바라보고 눈빛만으로 용건을 물었다. 나도 긴말하지 않고 김민혁에게 주식증서를 내밀었다. 김민혁은 가져가서 흘끗 보더니 머리를 세 번 긁적이고 다시 나에게 내밀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무슨 염치로 보여주냐'라던가 '네 주제는 알겠냐'와 같은 반응을 예상했던 나는 적잖이 놀라버렸다. 멍해져 있던 머리가 제 구실을 찾아갈 무렵 나는 다시 이불을 흔들어서 깨웠다.
다시 자려다가 일어난 김민혁은 반사적인 행동인지 다시 내가 내민 주식증서를 집어가서 보고, 머리를 세 번 긁적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침대와 벽 사이의 틈으로 증서를 집어넣어 버렸다.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라는 듯, 김민혁은 '여기 있었네'라고 중얼거리고 다시 잠을 잘 것 처럼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저기, 이거... 내 부모들이 만든 회사인데..."
"그래. 근데 그게 뭐?"
다시 뇌가 탈색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김민혁은 내가 중얼거린 말에 대해서 '지구는 둥글어'라고 말한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미 알고있다는 듯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내쪽이 질려버렸다.
"그... 나 한테도 약간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내 말에 김민혁은 나를 향해 완전히 돌아누웠다. 고양이는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 침대가 싫었던 건지 일어나서 내 무릎위에 누웠다. 그리고 기분 좋게 하품을 했다.
"그러니까 왜 책임이 있는데?"
"일단 가족이고..."
그리고 그 이상의 접점을 찾을 수 없었다. 김민혁은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가족이라고 전부 다 책임이 있냐? 네가 빚쟁이들한테 너무 시달려서 그 당연한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은데, 애초에 채무자는 네가 아니야. 거기에 채무자도 개인파산 신청 했더구만."
그건 그랬다. 그래도 김민혁의 말은 법적으로 적합한 생각이었지만, 도덕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김민혁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거 다 알고 너 도와주겠다고 한거야. 신경쓰지 마."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벽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리고 아무리 둔감한 나라도 김민혁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알고... 있었어?"
"으응. 그럼 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중학교 동창이라는 것 만으로 집에 들이냐? 아무것도 없는 집이지만."
김민혁은 약간 빠르게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때 문득 원미영이 생각났다. 김민혁은 어디서인지 모르겠지만 원미영을 완벽히 조사하고 있었다.
"나를 조사했어?"
"응. 그... 중학교 동창중에 현선우라고 기억해?"
"아니."
누구야, 그건. 들어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 말에 김민혁에게 즉답해버렸다.
"아, 그래. 애초에 나도 잊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개업 초기에 네가 밥도 못 먹는 것 같아서 도와준 적 있는데 말야. 햄버거 하나였지만."
기억에 없었다.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의 시기는 있었지만, 그때 내가 누군가에게 손을 벌릴 수 있을 정도로 낯짝이 두꺼웠던가?
"뭐, 기억하든 아니든. 그 녀석이 1년쯤 전에 흥신소를 차렸어."
"흥신소?"
"아... 그러니까, 사람 조사해주는 곳이라고 보면 돼. 불법적이든, 합법적이든 간에."
김민혁은 아직 이쪽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김민혁의 말을 들었다. 그러니까 결국 현선우라는 사람에게 나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는 것 같았다.
"어쨌든 현선우랑 내가 투자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1년동안 거의 상승세를 유지한 기업이 있었거든? 아르케 네트워크라고. 그래서 저기에 넣으면 손해는 안 볼 것 같다, 해서 넣었는데..."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에측이 되었다. 결국 망했다는 이야기겠지.
"미안."
"네가 미안해 할 건 아니고. 어쨌든 그래서 현선우가 갑자기 망한 기업에 대해서 굉장히 의구심을 품고 조사했거든? 숨겨둔 재산이라던가, 부동산이라던가... 왜 망한 기업 뒤편에는 그런거 많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없더라고. 숨겨둔 재산은 커녕 친척들한테서 돈 빌려서 빚쟁이들한테 뜯기고 있었고, 부동산도 다 매각된데다가 개인파산 신청까지 했어. 더 이상 볼게 없다 싶어서 그만했는데... 거기서 네 이름이 있더라고."
"그래서 부모님을 조사하다가 날 발견한거야?"
김민혁은 길게 숨을 내쉬고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냥 과거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이외의 다른 감흥은 느낄 수 없었다.
"응. 난 솔직히 좀 놀랐어. 너 여권도 여행비자도 다 있잖아? 가족들이 캐나다행 비행기표를 샀으니까 너도 갈줄 알았는데, 뒷모습이 비슷한 사람이 있더라고? 어라? 했는데 조사자료를 보니까 4인 가족인데 비행기표는 세 장이었어. 그래도 혹시 몰라서 돌다리 좀 두드려보다가 교회에서 본거지.
애초에 난 알고있는 줄 알았다고. 보통 교회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예배 드리러 온 줄 알지, 채무자 딸 잡으러 오냐? 처음부터 내가 너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던 그 시점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야 하는거지."
"둔하다는건 인정할게. 그래도... 그래도 난 아직 네게 책임을 느끼는데..."
김민혁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책임같은거 느껴도 네가 뭘 할 수 있어? 720만원, 갚을 수 있어?"
갑자기 눈이 핑 도는 줄 알았다. 120주라고 해도 내가 주식투자를 해본적이 없어서 큰 돈인지 몰랐던 나에게는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아... 아니."
김민혁은 그렇지? 라고 덧붙였다. 뭔가 미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720만원이면 아마 김민혁이 갖고있더 목돈의 전부였을 것이다. 거기에 김민혁은 나라는 혹을 안고 또 돌봐주고 있었다.
"미안해."
그 말이 한계였다. 내가 김민혁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김민혁도 아마 내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미 넌지시 묻기라도 했을 것이다.
김민혁은 공허한 소리를 내는 웃음을 몇 번 하고 돌아누웠다.
"내가... 뭔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내 말에 김민혁은 머리를 맹렬히 긁적이면서 낮은 신음성을 냈다. 하기야 나는 꽤 쓸모가 없는 사람이니까, 바라는 것이 있을리가...
"뭐, 정 그러면 지금 벗을 수 있어?"
김민혁은 어느새 내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그 말에 굳어진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쿡쿡 웃고 있었다.
"그래그래. 그럴 줄 알았어. 나도 서로 좋아서 뒹구는 거라면 환영이지만, 너는 나 싫어하잖아?"
그 말에 이성이 돌아왔다. 그리고 김민혁은 다시 소리없이 돌아누웠다. 저질스러운 농담도 몇 번 정도 받다보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고 무의식중에 예측해버리는 걸까. 회복은 처음에 비해 굉장히 빨라져 있었다. 나도 말이 없는 김민혁을 보고 대화가 끝났다고 생각해서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내가 김민혁을 싫어한다는 말이 계속 걸렸다.
싫어한다? 아니. 전혀 그럴 이유는 없었다. 저런 농담도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농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너무 심각해지지 말라고 해주는 일종의 교훈과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720만원이라는 빚이 있는데다가, 김민혁이 없었으면 진작에 얼어죽었을 목숨이었다. 만약 며칠 전까지 살아있었다고 해도 지금쯤이면 얼음처럼 얼어버린 언덕을 내려가다가 사고라도 당해서 죽어가고 있을 것이다. 좋거나 싫다는 감정 보다는 고맙다는 감정이 우선해 있었고, 그걸 무시하더라도 싫어하는 감정이 앞서는 일은 없었다.
"싫어하는건 아닌데..."
또 생각한 것을 그대로 여과없이 말해버리는 내 나쁜 버릇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문득 생각해버렸다. 여기에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즉...
"또 시작이냐? 며칠 전 까지는 원미영이 없어서 안 했던거야? 그렇게나 내 인내심이 강해보였어?"
이런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김민혁은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내 바로 위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침대 위에서 천장을 바라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리를 보고 말하고 있었다.
"아... 그게..."
내가 우물쭈물 하고있자 김민혁은 한숨을 내쉬면서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다시 벽쪽으로 간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는 뜻으로 알아듣고 고양이를 침대 구석으로 다시 돌려놓았다. 고양이도 갑자기 튀어나온 김민혁을 경계하다가 사라지자 다시 하품을 하면서 잘 준비를 하고있었다.
김민혁과 대화를 하면 상상 이상으로 힘의 소비가 너무 큰 것 같았다. 안심이 되는 건지, 아니면 긴장해서 지쳐버린 건지 몇 초를 세기도 전에 몽롱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슬슬 잠이 왔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몇 분동안 진행된 대화가 굉장히 피곤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끼걱거리는 소리가 굉장히 불길하게 느껴져서 눈을 떴다.
아직 머리는 각성되지 않았다. 시야의 구석이 흐려져 있었고, 눈은 그 사이에 어둠에 적응한 것인지 눈을 뜨자마자 비교적 밝아진 주위에 대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 앞에는 돌아가서 자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김민혁이 얼굴을 밀착시키고 있었다. 방금 난 끼걱거리는 소리는 김민혁이 내려와서 생긴 소리인 것 같았다.
"저... 김민혁?"
신기하게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은 착 가라앉아서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였다. 마치 모든 것이 예고되어있고, 나는 그것을 완전히 숙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김민혁이 왜 내려와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또렷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아, 자려고 했는데 안되더라고. 그게, 나 분명히 경고했잖아. 다음에도 또 같은 일이 있으면 고의적 의사표현으로 간주하겠다고."
김민혁은 진심이라는 것을 눈을 보고 알아냈다. 흔들림 없는, 하지만 공허한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까 무의식중에 '응 그렇지'라고 말할 뻔 했다. 뇌는 이미 김민혁이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저항을 해봤자 효과적일 것 같지도 않은데다가, 이미 양 팔이 잡혀있었다. 나는 절망감은 없이, 그저 반사적으로 인상을 잔뜩 쓴 채로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시 졸았나보다. 눈을 뜨자 눈 앞에 있는 것은 아주 어두컴컴한 암흑 뿐이었고, 들리는 것은 김민혁의 조용한 숨소리 뿐이었다. 인상을 쓴 채로 졸아버린 건지 광대뼈 부근의 근육이 굉장히 아파왔다.
약간 어리둥절햇지만 어쨌든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뿐이었다. 왜 김민혁이 단념했는지, 그런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변명도 내 상황을 합리화시키기에는 약간 부족해보였다.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오늘 하루동안은 다닌 곳을 다시 다니면서 연락처를 넣었다.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는지 대부분의 사장들은 내 모습도 연락처도 알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도 '다른 사람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상냥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야박하다고 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계속 머릿속에 맴돌고 있는 것은 원미영이 했던 그 말이었다. 김민혁은 나를 마음에 두고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당황스럽기보다 의심이 갔지만, 원미영은 이제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어진데다가 정작 본인은 전과 같은 태도여서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내 자신은 다음달을 넘길 수 있을지 굶어 죽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니까 자신의 마음을 이리저리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여유는 넘쳐났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그런대로 이겨낼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자신을 살펴보면 무의식중에 과거를 살펴보게 되어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그게 싫어서 그만둔 것 뿐이었다.
지금 당장의 마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얼어서 못 가는 집 대신에 있을 수 있게 해준것도 고마웠고, 이전에 줬던 10만원은 지금 집에 있지만 충분히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서로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밉보인 적도 없는 것 같았고, 김민혁은 내게 너무 완벽해서 대하기 꺼려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뭐 심각할 정도로 서로를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좋아할 이유도 없다는 것일 뿐.
식권을 내고 접시를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 식권도 김민혁에게 받은 것이었다. 덕분에 하루동안 돈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아마 이 식권이 없었다면 나는 진작에 굶어죽거나 진짜 사창가로 갔을 것이다. 끔찍한 생각에 몸이 떨렸다.
잡생각을 버리고 들고있는 접시를 바라보았다. 일단 식권은 냈으니까 밥이나 반찬으로 강을 만들든 산을 만들든 상관 없었다. 오늘은 산이 좋을 것 같아서 산더미처럼 접시 위에 우겨넣었다. 한 손으로 들다가 떨어뜨릴뻔 했다.
거의 12시간만에 처음 보는 밥이어서 그런지 맛은 끔찍할 정도로 없는데도 쉼없이 넘어갔다. 가게 안에는 나와 다른 한 사람 뿐이었고,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눈치볼 일은 없었다. 그냥 손이 가는대로 입으로 집어넣었다. 근처에서 약간 놀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만 앞으로 이 식당을 이용하는 것 이외에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애써서 신경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식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걸린 번호는 내가 처음보는 번호였다. 일단 의심이 되어서 한참 노려보다가 끊길 무렵에 받아보았다.
"여보세요?"
그렇게 말했더니 대답 대신에 전화기 너머에서 굉장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서커스의 동물처럼 놀림받는 것 같은 기분에 약간 목소리가 날카로워져 있었다. 잘못 걸린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오랫동안 끊지 않았다.
[지은이니?]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어쨌든 교실 내에서 꽤 자주 부딫쳐서 사이가 나쁜 사람이었다. 맨날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는데, 그게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나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나에게 직설적으로 '난 저 사람 싫어'라고 하면 누가 좋아할까.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속 움직이던 수저를 접시에 잠시 걸쳐두었다. 아직도 허기가 진 것은 아니고, 일단 이 사람이 전화한 것 자체가 내게 좋은 뜻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닐 것이었다. 나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곤란해질 것 같았다.
"응."
내 대답에 전화기 너머는 다시 시끄러워졌다.
중간고사도 기말고사도 다 끝났다지만 그렇게 느긋한가? 수업시간에 당당히 전화를 쓸 수 있을 정도로?
"무슨 일이야?"
어쨌든 이유는 알 바 아니었다. 다만 이 사람과는 나도 좋지 못한 관계이기에 빨리 전화를 끊고 싶었다. 그래서 용건을 물어보았다.
[네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야. 궁금하잖아?]
말문이 막혔다. 난 지금까지 남자 한 번 사귄 적 없었고, 학교에서도 그런 소문은 전혀 돌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있었다. 거기에 내가 그렇게 문란하게 행동했던 것도 아니니까 그런 소문이 들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면 이 녀석은 갑자기 왜 내게 그런 말을 꺼내서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일까.
"아, 그래? 누가 그러는데?"
보나마나 자신이 한 것이 분명했지만, 확실히 해두고 싶어서 말했다.
[왜? 사실이니까 말하면 쫓아가서 복수하려고?]
녀석은 즐겁다는 듯이 깔깔대는 말투로 말했다. 진심으로 화가 나려고 하고있었다.
수화기 너머는 굉장히 시끄러웠다. 진짜야? 라면서 묻는 사람도 있고, 머리가 없다며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있었고, 깔깔대면서 웃는 사람도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머릿속의 뭔가가 끊어지기 직전에 진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다잡았다.
"그런 일 없어."
일단 그렇게 말해두었다. 냉정해지는데에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모범답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김민혁이라면 여기에서 어떻게 말했을까.
[그래? 여기 있는 사람이 말하는건 좀 다른데? 그럼 너 왜 학교를 나오지 않는 거야?]
저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내가 살아가면서 볼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응, 그래.'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만일 살아가다가 그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면 내 모습이 정말 비참하게 비쳐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좌시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 뿐이었다. 김민혁은 언제나 어떤 행동을 하던지간에 생각할 것이다. 나는 죽었다, 라고.
나는 죽었다. 3주 전에, 나는 이미 이 세상에서 죽었다. 부모가 나를 버리고 갔을 때 나는 사망했다. 죽은 사람은 이런 일 하나하나에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냉정해지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조용히 생각해보자. 의자에 푹 기대서 몸을 이완시켰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어째서 이 녀석이 나에게 그런 누명을 씌우는가, 하는 것. 답은 금방 나왔다.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단지 그때 뿐인 뒷담화를 하고싶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한테 왜 나가지 않는지 이유를 말하고 싶지 않아. 다만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야."
입은 여유롭게 움직였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 것보다 한 단계 더 진보된 처방이었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자각도 희미해졌다. 한없이 냉정해져서, 지금까지의 잡생각이 다 부질없는 짓으로 생각되었다.
"너에게 말할 이유는 없어. 네 멋대로 날 폄하하는건 상관없어. 다만, 내게 들리지만 않는다면."
김민혁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았다. 아니, 여기에서 좀 더 덧붙였을 것이다.
"그래. 남을 뒤에서 욕하는건 재미있어. 그건 인정할게. 하지만 네가 나에게 뭐라고 누명을 씌워도 변하지 않는 것은, 난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거야. 네가 말해봐. 내가 그렇게 문란하게 놀았어? 아니면 내가 남자친구 하나라도 있다는 소문 들어본 적 있어?
그렇게 누군가를 찍어누르고 싶어? 그래서 남을 짓밟으면 자신이 좀 더 위에 올라간 것 같아? 그렇게 하는 것 밖에 자신이 내세울 것이 없어?"
[야, 너...]
"말 아직 안 끝났어. 그렇게 뒷담화가 하고싶으면 너희들끼리 해. 나를 대상으로 하는 것도 내가 알 수 없으니까 나는 관여할 수 없어. 다만, 너희들이 그렇게 근거없는 말로 깔깔거린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있다는 거야.
자신이 가진 것이 없어서 남을 찍어눌러야 만족감을 얻는 당신은... 솔직히 내 시각으로 봤을 때 불쌍해보여. 한 달 후에 살아있을지 죽어있을지 모르는 내 눈에도."
핸드폰을 느긋하게 닫았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그리고 김민혁이 대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약간 구역질이 났다. 마음 속으로는 전혀 하고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도 참기 힘들어서 상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는데, 김민혁은 적어도 내 눈에는 대부분이 다급해보이거나 초조해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여유로운데다가 논리정연하고 완벽해보였다. 나는 김민혁이 하는 짓을 똑같이 하면서 그렇게 여유롭게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눈물이 나와서 먹던 그릇을 그대로 두고 가게에서 나왔다. 다시 가면 욕 좀 많이 얻어먹을 것 같았지만, 울면서 먹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민혁이 없는 고시원에 와서 쓰러져서 계속 울었다. 눈물이 나는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첫번째로, 내가 저런 일상에 있었다는 것에 배신감이 느껴졌다.
내가 원하던 일상이 이렇게 비참하고 잔인한 것이었다는 것이 서러웠다. 물론 뒷담화에 관한 것만으로 서럽지는 않았다. 나도 전혀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앞으로 만날 수 있을지 만날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지 않는가. 꼭 그렇게 반론도 하지 못하는 엄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서 잠시동안의 안락을 누려야 했을까. 죽은 사람에게 침을 뱉는 것 보다 더 악랄한 짓이었다.
두번째로, 나를 옹호해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 정말 서러웠다.
소문이 돌았다는 것은 하루나 이틀 정도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있는 사실이지만 본인의 해명이나 증거가 없을 때 그것을 소문이라고 하게된다. 그러니까, 내가 없어진 이후로 그런 소문이 떠돌았고 시간은 꽤 지났었다. 물론 사람을 깊게 사귄 것은 아니지만 쉬는 시간에 떠들며 노는 친구들은 몇이나 있었다. 그 친구들은 소문이 퍼질때까지 내게 해명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저 나에 대한 소문을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머리가 비었구만'이라고 말하는 목소리 는 나와 같이 어울리던 친구의 것이었다.
세번째로, 그냥 눈물이 나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이 나와서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하소연할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렇게 인간관계가 나빴던 것을 후회하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그렇게 필사적이 되어서 해명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드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눈물이 나와서 멈출수가 없었다.
울다가 선잠이 든 것 같았다. 팔을 자신의 배개로 생각하는 것인지, 내 팔을 베고 편안히 자고있는 고양이가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도 잠시, 형광등에 눈이 적응하지 못해서 굉장히 시렸다. 저 형광등이 켜진 채로도 잘 수 있었으니까 그리 심각하게 밝은 것은 아니었지만,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운 뒤에 배개에 엎어져 잔 이후에 대하는 형광등은 굉장히 눈이 부셨다.
아마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것 같았다. 김민혁은 내가 깨기 전부터 뭔가를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하얀 천이 있었고, 중심에서 주변으로 뭔가를 계속 내려놓고 있었다. 종합적으로 보아 뭔가를 분해하는 것 같았다. 아마... 뭔가 작은, 라디오 같은 것 같았는데, 이쪽에서 보아서는 김민혁이 뭘 하는지 보이지 않았다.
"우와. 얼굴 대박인데."
김민혁은 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때문인지 뒤를 고개만 돌려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듣고나서 이해하기까지 3초. 그래. 난 울다가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침대에 쓰러져서 잔 것이었다. 정상적인 얼굴이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이런 얼굴을 보였다는 것이 굉장히 부끄러워서 얼굴을 돌렸다.
"샤워라도 해. 난 나갈테니."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조용히 일어나서 못의 끝부분에 걸린 오리털 외투를 입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큰 종이를 덮어서 지금까지 하고있던 일을 덮었다.
어쨌든 샤워는 나도 하고싶었다. 우는 것도 꽤 힘든 일인건지 굉장히 땀을 많이 흘렸다. 일단 씻고 싶었다. 거기에 내가 쓰고있는 집의 주인이었다. 주인이 하는 충고니까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거기에 일단 전혀 나빠보이지는 않는 충고였다. 그래서 응, 이라고 답하고 김민혁에게 얼굴을 돌린 채로 욕실을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김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책상에 있는건 건드리지 말아줘. 뭐 없어지기라도 하면 정말 슬플거야."
김민혁은 나가기 직전의 문에서 말하는 것 같이 소리가 멀었다. 그리고 문고리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들춰보기가 정말 미안해졌다.
음. 그래. 열어보지는 말고, 그냥 종이 사이로 보는 것으로 정체를 알아보자.
종이의 틈으로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위쪽의 종이를 살짝 들춰보았다. 그런데 끝내 무엇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날이 달려있기는 한데, 솔직히 날만으로 따지면 면도기에도 달려있고, 문구점용 커터나이프에도 날이 달려있고... 결국 조립하면 어떤 형상이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김민혁은 2일에 한 번 심야 아르바이트를 간다고 했었다. 그리고 어제 갔으니까 오늘은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김민혁과 나는 그리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김민혁이 밤에 뭘 하든 알 권리는 없었다.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로 샤워를 하다가 다시 눈물이 나왔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비참하게 되는 것일까. 내가 알던 것보다 일상은 더 추악해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처방이랍시고 하는 짓이라고는 마음을 죽이는 것 뿐이었고, 그러면서 하소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무도 나를 소중히 여겨주지 않았다. 조금만, 누구라도 좋으니까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줬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곳에서는 누구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만 둔다, 는 지금까지 못했던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김민혁의 것일 면도기에 달린 날이 자신을 사용하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왼손으로 면도기를 잡았다가, 오른손으로 만류했다. 그리고도 웃기는 것은, 내가 왜 그만두어야 하는지 이유랄 알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죽기 싫으니까? 아니. 지금 상태와 죽는 것은 그리 달라보이지도 않았다. 생존본능? 아마 그것이 가장 가깝겠지만, 그만 두고싶다는 욕구도 분명히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면도기를 제 자리에 놓고 욕실에서 도망치듯이 나왔다.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 이후로 누구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조금씩 울고 있었는데, 김민혁이 오는 소리가 들려서 빨리 눈물을 훔쳤다.
"무슨 일이 있었나보네.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도와줄 일은 없어."
약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와버렸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반사적으로, 목이 심각하게 잠겨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소리가 나온 것 뿐이었다.
"쯧. 현실을 직시하지 말라니까. 볼수록 더 힘들어진다고."
김민혁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절박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정론이었다. 나는, 이 현실을 직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나는 지금도 이렇게 미치기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었다.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알았어. 조금 소홀했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아 종이를 치웠다.
"그런데 너 옷하고 칫솔은 어떻게 하냐?"
김민혁이 시선을 책상을 향한채로 물었다. 그리고 나는 약간 당황해버렸다.
옷은 갈아입지 못했다. 옷이 없는데다가, 원미영이 두고 간 옷보다 지금 입고있는 옷이 좀 더 상태가 좋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쭉 입고말지. 그런데 최근 며칠동안에도 계속해서 일자리를 구하러 뛰어다녔기에 완전히 땀이 베어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에게 민폐가 될 정도로 심각했다. 음...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옷은 못 갈아입었고, 칫솔은..."
칫솔은... 칫솔은... 그냥 손에 잡히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더 생각하면 굉장히 난처해질 것 같았다.
"칫솔은?"
김민혁이 내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김민혁도 짐작가는 것이 있는지 굉장히 어색하게 웃고있었다.
"칫솔은 집히는 걸로..."
결국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김민혁에게 가방을 빌렸다. 등산용 가방이었는데, 김민혁은 여기에 옷만 10벌 가까이 넣은 적이 있다고 했었다. 아마 얼음이 녹는데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 다섯 벌 정도만 챙겨도 괜찮겠지. 단순계산이면 가방의 절반만 채우는 것으로 될 것 같았다.
칫솔은 두 개를 사서 하나는 김민혁에게 미안했다는 뜻으로 주었다. 김민혁은 거절하려다가 피식 웃고는 어색한 웃음인채로 칫솔 하나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김민혁의 방으로 돌아가서 화장실에다가 내 칫솔 하나를 걸어놓고 나왔다.
고양이는 언제나 그렇듯이 지하철 역 앞까지만 좇아와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시간은 오전 일곱시 정도였다. 김민혁이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나서 일단 가방을 빌렸다. 김민혁은 이유를 물었고, 나는 집에 옷을 가지러 간다고 말해주자 전혀 아무런 핀잔도 없이 그냥 빌려주었다.
그래서 지금 지하철을 내려가고 있었다. 출근길의 행렬에 섞여서, 물과 소주가 섞이는 것 처럼 육안으로 보기에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 처럼 융화되었다. 이러고 있으면 마치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게 좋아서 계단을 몇 번이나 왕복하다가 문득 바보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기분은 굉장히 오묘했다. 이 버스를 내리면, 그리고 걸어서 내 집 앞까지 가면 과연 그 집은 내가 알던 그 집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줄 것인가. 그대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리가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희망은 갖고있었지만, 이미 희망은 공상으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래서야 희망을 품고있는 것인지 내 마음상태 자체도 의심이 갔다.
고양이는 버스에 타려는 순간 내 다리 쪽에 달라붙어서 기사의 눈을 속였다. 진짜 사람같았다. 정말 그 자체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 무릎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 정도. 그리고 곧 졸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조는 것은 또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지만 어떻게든 자는 것 같았다. 이거 또 진귀한 풍경이었다.
집은 언제나처럼 완전히 망가진 상태일 것이다. 너무나 명백한 일이었다. 결국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꿈꾸는 것은, 정말 바보같지만, 이보다 더 바보같을 수는 없지만, 딱 2달 전으로 되돌아가서 단란한 내 집을 보고 싶었다. 단 한번, 꿈이라도, 환상이라도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까, 굉장히 간절히 보고 싶었다.
하지만 공사장에서 쓸법한 크기의 해머로 깨진 담벼락을 보고 그런 생각을 접었다. 꿈은 꿈일 뿐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만 두자. 현실을 직시하지 말자. 그 생각만 하룻밤 내내 했다.
집 안은 난장판일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닥치는대로 때려부수고 찢어놓아서 압류딱지도 붙일 수 없었으니까 아마 건질 옷이 별로 없을지도 몰랐다. 결국 집에 눌러앉았고, 그것을 참지 못해서 결국 우리 가족은 여관방을 전전해야 했다.
TV도 창문도 옷장도 세면대도 유리도 전등도. 부술 수 있는 가재도구는 모두 다 부숴졌고, 덧붙여 우리 가족도 부서졌다. 아니, 빠진 것은 나 혼자뿐이니까 부서졌다고 하면 좀 어폐가 있나?
어쨌든 가방을 열고 부서진 장롱 앞에 앉았다. 조각조각난 장롱의 나무들이 바닥을 메우고 있어서 털썩 주저앉았다가는 그야말로 바늘 방석에 앉게 될 것 같았다.
장롱을 발로 차고, 이리저리 흔들어도 보았지만 그다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을 쓸면서 있던 옷도 다 못 입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들여다보며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는데, 고양이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에 있던지, 잘 있겠지. 그 고양이도 슬슬 나에게 질렸을 것 같고.
결국 신발을 근처에 두고 사람의 키만한 전등의 지지대를 뽑아 아래에 넣었다. 신발 한쪽으로는 받침이 되지 않는 것 같아서 연필깎기를 신발 위에 올려서 좀 더 높이를 올렸다. 그리고 힘껏 눌러서 옷장을 들어올렸다. 완전히 들어올려진것도 아니지만, 반대편으로 뒤집기에는 충분했다.
다행히 안에는 티셔츠와 긴팔, 청바지 몇 별이 남아있었다. 치수가 안 맞아보이는 것은 놔두고 편하게 입을 수 있을만한 것들을 골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딩 동]
벨이 울렸다.
◇
팔이 빠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무게의 쓰레기 봉투를 두 개 내려놓고 등을 이완시켰다. 시급 4200원으로 최저임금보다는 400원 정도 비싸기는 하지만, 솔직한 심정은 차라리 최저임금인 3800원만 받아도 괜찮으니까 일 좀 적게 시켰으면 했다.
양지은을 마지막으로 본지 3일이 지났다. 그러면서 핸드폰이고 뭐고 연락할 수단은 전혀 없었다. 전화는 핸드폰 배터리를 억지로 뽑은 것인지 몇 십초동안 통화음이 나다가 끊어졌다.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는, 그런 안일한 생각도 분명히 있었다.
길을 잃어버리는 것도 자신의 집에 가는 것 같았으니까 잃어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 얼빵해보이지는... 부정할 수 없었다. 꽤 여러가지 빼먹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집까지 가는데 무슨 일이 있지는 않겠지. 위쪽의 얼음이 녹아서 길이 풀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집에 아이젠이라도 있거나.
뭐, 어차피 처음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생활에서 누군가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애초에 누군가 일상에 들어오는 것을 말리고 싶었다. 1년동안 누군가와 깊게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어색해지고,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점점 더 익숙해졌다.
그래도 이야기하기 힘들지 않았던 것은, 이미 내가 자신의 자아가 희미해질 정도로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 내 상태라면 상대가 살인자든 사기꾼이든 누구든간에 감정에 섞이지 않고 대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운슬러나 편견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 직업이 적합하겠지만, 학벌도 전문기술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게 뭘 맡길까.
어쨌든 자고싶었다. 씻는 것도 뭐도 됐으니까 지금은 들어가서 잤으면...
그런데 침대에 눕자마자 누군가가 전화했다. 짜증이 확 치밀어올랐다.
"여보세요."
[......]
전화기 너머에서는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장난전화? 재수 없게 달못 누른 번호인가?
"누구세요?"
아주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 김민혁?]
"네. 그런데... 누구세요?"
침대에 누워서 말했다. 옷을 벗기도 귀찮아서 그냥 이불속에 들어갔다. 좀 더러워지겠지만 몇 달째 빨지 않은 이불이었다. 이 정도는 티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어. 현선우인데. 양지은이 있으면 동창회라도 해야하지 않나, 해서.]
"아, 그래. 근데 이쪽은 회비고 뭐고 낼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하지가 못해. 개털인데."
[야야야, 너 꽤 있잖아? 좀 쓰지? 돈 뒀다가 국 끓여 먹을거야?]
"국 사먹을거야."
[야. 좀, 재미없는 농담하지 말고.]
재미고 뭐고. 이쪽은 졸려 죽겠다고. 되도록이면 용건만...
그러고보니 좀 걸리는게 하나 있었지.
"그보다 양지은 지금 없어. 집에 있겠지. 그래서 묻는데, 위쪽 동네 얼음 녹았냐?"
[눈? 아니.]
굉장히 당연하다는 듯이 현선우가 말했다. 엄청나게 당연해서 '1+1=2'라고 한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이해한 이후에는 굉장히 어이가 없었다. 그럼 양지은은 어디에 있다는 거야?
"진짜 안 녹았어?"
[응. 야, 김철민! 너 오늘 아이젠 신은 이유가 얼음 안 녹아서 그런거지?]
수화기 너머에서는 긍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 그리고 그 녀석 바지가 상당히 찢어졌거든? 아이젠 신어도 오기 힘들어. 뭣보다 싸구려라는 점도 한몫 했겠지만.]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만일 그 예측이 들어맞았다면 그런 상황이 되게 만든 내 책임이 절반은 있지 않을까. 옷의 이야기를 꺼낸 것도 가방을 빌려준 것도 내가 한 일이었다.
"현선우. 쓰레기통 좀 빌리자."
미친듯이 달렸다. 이보다 더 절박하게 달린 것은 1년 전 학교에서 체육 시험을 볼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니, 아마 그것보다도 더 심하게 뛰었을 것이다. 왕복 6차선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에 4초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으니까.
골목길의 가장 오른쪽, 아침이라 네온사인이 켜지지 않았을 그 골목의 입구에서 '승리성공인력사무소'라는 간판을 보았다. 그리고 그 건물로 뛰어들어가 계단을 찍어누르듯이 밟아올라서 네 개씩 뛰어올랐다. 도중에 왼쪽 발목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만일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내 발목 정도로는 감당도 되지 않을 정도의 일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랬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은 언제나 맞아 떨어졌다. 감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이후에 일어날 일에 대한 나쁜 생각은 다 들어맞았고,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예측은 보란듯이 빗나갔다. 그러면서도 정작 미래에 있을 행운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냥, 나는 빌어먹을 정도로 불행을 감지하는 데에 뛰어났던 것 뿐이었다. 내가 불행을 너무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숨을 몰아쉬면서 마지막 다섯개의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 올라갔다. 발을 멈추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리고 땀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졌다. 문 앞에서 망을 보며 책을 읽던 사람이 굳어질 정도로 내 모습은 다급해보였다.
솔직히 말해 구면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단체로 출장을 갔을 때마다 사무실을 봐 주었다. 8시간 동안 전화하고 메모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사무실 구석에 내 캐비넛이 있었다. 물론 들어있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었지만, 그것도 한 3개월 정도 사무실을 봐 준 적이 없으니까 치웠을 것이다.
"현선우 만나러 왔는데. 있지?"
"아... 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문고리를 거칠게 열고 들어가 문 뒤편의 구석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이라고 해서 음식물 쓰레기라던가 그런 것이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파쇄지에 갈린 서류들을 구겨넣는 곳이었다. 애초에 음식물이 반입 금지였다.
밀도가 낮은 종이 쓰레기들이 넘쳐나는 쓰레기통을 양 손으로 잡고 옮긴 뒤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그랬는데...
"야, 너 애초에 캐비넷 있잖아. 어떤 등신이 팔 물건을 그런 곳에다 두냐?"
그렇게 말하는 현선우에게 눈길도 주지않고 캐비넛을 열었다.
이름, 나이, 생일, 학력, 주민등록번호, 국적, 현재 자산, 가족관계, 이해관계, 이성관계, 키, 체중, 체지방률, 근육 밀도, 운동빈도, 자격증, 알레르기, 과거 병원기록, 산부인과 기록, 정신과 기록, 최근 접속한 인터넷 사이트 30개, 증명사진 한 개...
정작 필요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기껏해야 네 페이지였지만, 끝까지 읽고있을 시간이 없었다. 뒤쪽에서 바라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았지만, 미안하게도 내게는 그런 것 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결국 10분 정도 후에 두번째 페이지의 중반부분에서 '주소'라는 항목을 찾고 가장 최근의 주소를 찾았다. 양지은의 집이었던 곳은 서울 중구의 공덕동인 것 같았다.
지하철역에서부터 약도가 그려져 있지만, 지하철로 가는건 너무 늦었다.
그리고 나가려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서 현선우를 돌아보았다.
"현선우. 아는 사람중에 의사 있어?"
"솔직히 좀 의외였다? 네가 그렇게 다급해 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게 지금도 안 믿겨."
현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어이가 없다는 것 같이 웃었다. 내쪽은 전력질주로 쓰러지기 직전이어서 차의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현선우는 결국 나를 쫓아오기로 했다. 걱정이 되는 것 같지는 않고, 그저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것 같았다. 내쪽에서는 택시비를 내준다는 말로 흔쾌히 승낙을 해버렸으니 할 말은 없었다.
차창 너머로 1년 전까지 몇 번이나 지나다녔던 길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통학로인데... 정오 무렵이어서 그런지 누구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양지은이 보았자면 울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쪽으로서는 아무 느낌도 없는 그저 길거리의 풍경이었다. 1년 전, 살아있을 때에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이겠지. 아무 감흥도 없고, 어떤 생각도 없었다. 바이바이, 단란한 학창시절이여. 피식, 하고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좋아하냐?"
현선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렸다.
"시체한테 뭘 더 바라는 건데?"
난 이미 죽은 녀석이다. 애초에 생물이 아닌 것에게 마음을 묻는다면, 뭐라고도 대답하기 힘들었다.
"그럼 왜 그렇게 달려온건데? 거의 5년동안 알고지냈는데, 네가 지금처럼 다급해 보이는 건 처음이야."
"내게 책임이 있는 것 같아서."
"거짓말."
귀찮아졌다. 원래부터 이렇게 엉겨붙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자, 만약 네 말대로 내가 좋아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뭐가 달라지지? 내가 그렇게 누구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있어보이냐?"
"야, 감정은 감정일 뿐이잖아.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안되는."
"그래. 네 말대로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소리지. 탁상공론은 재미 없으니까 그만해. 만일 내가 양지은을 좋아한다고 해도 감정으로 끝날 일이야."
재미없는 이야기는 이걸로 끝냈으면 한다. 애초에 나같이 미래도 희망도 없는 사람을 누군가가 좋아할리가 없었다. 애초에 있다고 하면 머리를 해부해봐야 할 일이고.
"쯧. 뭐 그렇다고 치고. 어쩔거냐? 만일 네가 말한대로의 최악의 상황이라면?"
현선우는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럴 때 쓰라고 특공무술이나 합기도 알려준 거 아냐? 그 사람 제대로 배워서 알려주는 거라며."
3개월 정도 전에, 곧 있으면 실종신고가 사망신고로 될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현선우에게 매달렸더니 의외로 실력이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리고 두어달동안 훈련을 빙자한 구타와 내던짐을 당해서 이제는 어떤 자세로 넘어져도 낙법은 확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뭣도 모르고 주먹만 쓰는 양아치들에게 오히려 돈을 뜯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을 살인도구로 만드는데에는 3주면 충분하다나.
"너를 보호하라고 알려준거지 누구 도와주라고 알려준 건 아닌데."
"그럼 넌 누가 죽는데도 가만히 앉아서 구경할거냐."
"응. 경찰에 신고는 하겠지."
그만 두기로 했다. 경찰이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나도 쓸 생각이 없었다.
"경찰로 해결되면 나도 안 싸워. 다만 지금은 네가 맡겨놨던 물건들을 다 들고왔으니까. 여차하면 쓸거야."
현선우는 질렸다는 듯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기사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아마 반대편에서 오는 차에 머리를 들이받았을 것이다. 나는 조용히 대꾸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지쳐버렸다. 옆에서 뭐라 떠들고 있는 현선우 떄문이 아니라, 몇 분 동안의 전력질주 때문도 아니라, 어제 야간 아르바이트 때문에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이전에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무전취식 여자애가 와서 욕을 한 바가지 했다. 끝내는 영업방해로 경찰을 부를까, 했지만 불쌍해서 그냥 두었다. 대체 머리가 이상해진건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면서 조용한 곳을 찾았다. 애초에 사람은 믿지 않았다. 조용히 돌려보내고 꾸벅꾸벅 졸고있으려니 경찰이 나더러 성폭행 미수라고 연행하려 했다. 매장 전체에 달린 CCTV를 돌려서 경찰을 납득시켰다. 이후에 곧바로 손님 하나가 도망가서 근처 빌딩지역을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결국 잡기는 했는데, 끝내 돈이 없어서 사장님을 불렀다. 사장님은 근 3개월동안 내가 담당일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굉장히 미심쩍게 생각했다.
지금은 조급하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고 판단해서 자두기로 했다. 돈이라고 하면 현선우가 내기로 했고, 일단 같이 타고있으니 이상한 곳에서 내려준다고 해도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 조금만, 늪에 가라앉듯이, 자도록 하자.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고양이와는 그런대로 익숙해졌다. 얼굴쪽의 상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가는 상황이지만, 내가 화내거나 때리려고 해도 고양이는 반사신경이 좋아서 모두 피해버렸다. 그래서 이 고양이가 내 마음을 알고 있다고 단정지어버렸다. 물론 내가 공격할 것을 안다는 것 이외에도, 나는 내 자신을 죽이고 싶어할 정도로 싫어하고 있었다. 고양이가 나를 공격하고, 내가 어디를 때릴지 안다면 내 마음을 읽는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202호실의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왔다.
기억이 끊기고, 눈을 뜨자 신림역 근처의 커피숍 앞에서 쪼그려 앉아있었다. 돈은 있는데, 쓸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썼다가는 다음달에는 길거리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어떻게 얻은 빵껍질을 먹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튀겨서 팔기 때문에 더 이상 얻어먹을 수가 없었다.
출근길에 길 한 구석에 앉아있으면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 모든 사람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자면,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 홀로 떨어진 외톨이였다. 말하자면, 높은 빌딩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높아서, 너무 멀어서 자신이 여기에 실재로 존재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이대로 사라져도, 이대로 뛰어내려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한대로 빌딩을 올라가 보았다. 30층이었던가, 40층이었던가. 문을 열자 난기류가 흩어지면서 바람이 몰아쳤다.
장관이었다. 눈에 담는 풍경은 너무나 밀도가 낮고, 마치 안개나 신기루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과 내 눈에 비친 이 시야는 일말의 접점도 없어서, 내가 보는 것이 진짜인지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진짜인지 혼동되기 시작했다.
정직히 말해, 지금 죽어도 문제는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기는 것도 거의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보고싶은 것도 더 이상은 없었다. 다만 모든것을 끝내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좋든 싫든 부모라는 방패는 없어졌다. 덕분에 갖고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난간 아래쪽의 풍경은 바라보지 못했다. 아직 두려움이라고 할만한 감정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무서워하는 감정이 남았다는 것에 순수하게 놀랐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었다. 나는 내 인생을 며칠 뿐이지만 살았다. 그 누구의 개입도, 누구의 바램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그것이 역겨울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원하는 것은 없었다.
사랑같은 것을 동경하기는 했지만 해본적은 없었다. 그저 좋겠다고 생각하기만 할 뿐, 부럽다고 생각하기만 할 뿐, 그런 감정을 가진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도 싫었고, 과도한 욕심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고, 또 그러면서도 자신을 싫어하는 자신이 싫었다.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았고, 따라서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자신을 향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은 말을 깨울칠때부터 이미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능력과, 내가 이룬 성과에 있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저 동경. 바라지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동경일 뿐이었다.
희망은 더 이상 바랄 수 없었다. 내 미래에는 평온한 일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내 발로 차고 나왔다. 평온한 일상, 거짓도니 사랑이지만 문제가 없는 가족, 무난한 미래. 이제는 내 손에 다시는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있었다. 원해도 손에 들어오지 않으니까, 될 수 있다면 바라고싶지 않았다.
평안은 내가 이미 버리고 나왔다. 나는 평안과 바꿔서 내 인생을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만일 평안을 내가 바란다면 내 인생을 버려야 했다. 그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며칠간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내가 생존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더라도, 바꾸고싶지 않은 내 인생이었다.
얻고싶은 것이 모두 다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만족한다면 만족했고, 부족하다면 부족했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몸이 공기로 가득 차서 배가 고픈것도 어지러운 것도 모두 다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방긋 웃듯이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나도 따라서 손을 흔들어주고,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떨어지면서 생각했다. 이건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