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역시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김민혁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입을 벌리고 원미영을 바라보았다. 그럼 대체 우리가 했던 논쟁은 뭐야.
"네. 김민혁씨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나봐요. 아직 부모님들에게 좀 더 잘 말하면 바꿀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져요. 돌아가서 좀 더 부딫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좀 더 말했으면, 좀 더 신중했으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해버려요.
이상하죠, 저."
"뭐, 세상 사람들이 다 나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당신 자유야."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많이 앉아있었으면 딱히 힘을 주면서 일어난 것 같지도 않은데 온 몸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하나하나는 손 마디를 꺾어서 나는 소리라도 온 몸에서 동시에 나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무서운 광경이었다.
"처음이지, 집 나온건?"
김민혁이 다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방금과 다른 것이라면, 컴퓨터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서 꺼지고 있었다는 것과 김민혁이 뒤 돌아서 침대를 향했다는 것 이었다.
"네에. 그런데요."
원미영의 말에 김민혁은 길게 한숨을 쉬고 김밥의 포장을 뜯었다. 한 줄에 5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이 굉장히 미심쩍지만 어쨌든 먹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마지막 충고가 될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나는 내가 경험한 것 이외에 말할 수 있는 재주는 없어."
김민혁은 포장을 완전히 다 찢지 않고 먹어치우려 했던 것인지 입속에서 은박지를 빼냈다. 굉장히 기분이 나빠보았다.
"음... 그 전에 하나만 묻자. 내가 몇 번이나 나온 것 같아?"
그건 나도 궁금한 이야기였다. 거의 이 근처에 대해서 훤히 꿰고 있는 것 같고, 완전히 적응이 되어있었다. 아마 1년 전에 죽었다, 는 이야기로 보아서 1년이겠지만.
"글... 쎄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신도 아닌 보통 사람한테 물어보면 정확하게 대답해줄거라고 생각하는거냐, 이 머저리야...!
"세 번째야. 이번으로 마지막일거고. 그런데 내가 두 번 동안 나갔다가 들어오면서 느낀게 뭔지 알아?
일단 굳어진 사람의 인격은 안 바뀐다는 거. 특히 부모는."
"결국 하고싶은 말이 뭐야?"
이 사람은 너무 말을 길게 끄는 경향이 있어서 그만 두게 했다.
"부모들은 이 정도 시위가지고는 꿈쩍도 안 한다는 거."
김민혁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다.
"들어가고 한 2주 정도는 극진하게 모시겠지. 그런데, 문제는 그거야. 2주 후면 원상복귀. 거기에다가 가출한다는 극단적인 선택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더 악랄하게 대할걸.
나는... 어차피 용돈이래봐야 하루 왕복 차비 정도지만, 그것도 끊겼어. 예금계좌를 비롯해서 모든 은행활동도 동결이고. 올해로 주민등록증 나왔으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좋을 것 같아.
근데 난 실종신고 기한만료로 사망신고가 되어버렸거든. 법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게 되어버린거지."
이야기는 슬슬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김민혁이 좌절해버렸다. 보기에도 굉장히 좌절해서 양 손을 얼굴로 가리고 있었다. 여기에서 손 사이로 몇 방울의 눈물이 떨어진다면, 내일 죽는다는 사형선고가 내려진 사형수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 결국..."
원미영은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김민혁을 불렀다.
"아, 그러니까 부모들은 이 정도 시위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거라는 이야기. 그러니까 이 정도 시위에다가 몇 마디 대화로 뭔가 호전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라는 거지. 부모들은 적어도 내 경험으로 보았을 때 바뀌지 않아."
"결국 어쩌라는 거야?"
어째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말을 끝내는 것이 원미영에게 있어서 퇴출선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거기에서 원미영이 절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아무리 매정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연 한 마디로 쫓아낼 수 있을까?
"차라리 네가 너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용산역 2번출구 앞 사창가로 갈거야. 내가볼때는 편리하거든."
"야."
만일 김민혁이 애를 태울 작정이라면 정말 잘하고 있었다.
"알았다고.
가장 추천할 수 있는 방법은 네가 변하는 거지. 부모들이 아니라 당신이 변하는거야. 말하면 변할거라던가, 시간이 해결해준다던가 하는 그런 희망적인 관측은 코풀어서 쓰레기통에다가 처박아. 먼저 가장 큰 대전제는 부모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네 일상은 아주 약간의 변화도 없이 굴러갈거라는 거지."
원미영은 갑자기 멍한 얼굴로 김민혁을 바라보았다. 꽤 쇼크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부모님들은 전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응. 참고로 나는 첫번째에는 2주동안 나가있었고, 두번째에서는 한 달 정도였어. 근데 약발이 먹히는 건 2주가 끝이었어.
자, 그럼 다음 해결책. 여기서 계속 뭉개고 앉아있는 거지. 그러면서 약간씩 '나 여깄어요'하고 오게 만드는 거야. 그렇게해서 들키면 미친듯이 싸워. 정말로 들어가기 싫다는 것 같이. 그러면 좀 더 효과가 오래갈걸."
김민혁은 원미영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말했다. 어쩌면 의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김민혁은 굉장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어떤 의미로 안도했다. 이 사람도 당황하는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럼 마지막. 가장 쓸데없는데다가 가장 비추천인 방법이야. 이걸 할거면 그냥 아까전에 말한대로 용산역 2번 출구로 가. 연줄있는 사람도 알고있으니까 소개해줄게."
원미영은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나라도 들을 생각이 없어질 것 같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야. 자신을 죽여.
생각하는거야. 자신은 이미 죽었다고. 무슨 일을 하던지 현실을 직시하지 마. 살 생각을 버려. 내일 잘 곳이 없어도 괜찮아. 그냥 무시해. 굶어 죽을 때쯤 되어서, 눈앞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면 그때쯤 과거를 생각해보면서 후회해."
"결국... 뭐라는 거야?"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김민혁에게 질문했다.
"자신을 시체로 여기라는 거지. 나는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그냥 죽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1인칭으로 보고있다고 생각하라고.
어려워. 굉장히 어려워. 힘든데다가. 일주일째 되는 날부터 약 3일동안 구토가 끊이지 않았어. 그런데 적응되면 그걸로 끝이야."
김민혁은 흘러내리는 땀을 오른쪽 팔로 닦아냈다. 매운 것을 먹은 사람처럼 숨을 들이키고 있었고, 눈을 거의 깜박이지 않았다.
"선택해. 자신이 바뀔지, 혹은 죽을지."
그 말을 끝으로 김민혁은 전화를 하면서 코트도 입지 않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김민혁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야간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끝날 시간은 오래전에 지났을 터였다.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나와 원미영을 피하고 있다고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원미영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책상 위의 핸드폰을 바라보며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굉장히 지루했지만, 반드시 필요했다고 판단했기에 말을 하거나 설득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저... 둘은 무슨 사이세요?"
원미영은 달관한 것 같이 차분한 태도로 나에게 물었다. 고민 끝에 답을 얻어낸 학생과 같은 표정이었다. 10분 전만 해도 미간에 주름을 딱 잡고 계속 거미줄을 씹고있는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자 굉장히 놀라버렸다.
그런데 할 말이 궁했다.
애초에... 내가 김민혁이라는 사람과 얼마나 되는 접점을 갖고있는 걸까.
"음..."
굉장히 머리아픈 문제였다.
중학교 동창? 아니아니. 그건 좀 이상하지. 겨우 그런 이유로 여기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오히려 원미영은 내가 숨기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대로 믿는다면 그건 정말 좋겠지만, 김민혁이 둔감하다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하겠지.
"그게..."
뭘까. 대체 무슨 관계지? 난 모르겠다. 그리 깊은 관계도 아니고, 사귀는 관계는 더더욱 아니었다. 무엇보다 김민혁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잖아?
"말하기 싫으시면 할 필요 없는데요..."
원미영이 굉장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런건... 그런건 아닌데요..."
아... 뭐지?
"일단 중학교 동창이기는 한데요... 그게, 잘 모르겠어요."
Honesty is the best policy... 라고 했던가. 나도 김민혁도 서로 진지하게 말해본 적이 없지 않았나. 아니, 애초에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숨을 굉장히 깊게 들이쉬어서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저 혼자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김민혁의 마음도 잘 모르겠고...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요."
원미영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보통 중학교 동창이라고 해서 특별한 사이가 아니면 이렇게 무방비로 들여놓을까요?"
그건... 그랬다. 원미영이 말 대로였다. 만일 나라고 하면 몇 년 만에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집안에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난... 잘 모르겠어요."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김민혁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난 감도 잡히지 않았다. 물론 속마음을 많이 털어놓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를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어떤 감정을 갖고있다는 증거는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원미영의 말에 잠시 멍해졌다. 내가 김민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정직히 말하면, 단 한 번도 생각해본적 없었다. 아주 약간만, 시간을 벌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묻는 거죠?"
내 말에 원미영은 굉장히 초조한 모습을 지울 생각인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만 두기로 했어요. 저는 지금까지 그랬듯이 저를 바꾸는 것이 더 능숙한데다가, 어딘가 틀어박혀서 농성하는 것도 결국 결말은 같아요. 또 자신을 죽이라는 것은... 아무래도 저에게는 무리에요."
"잠깐.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난 몇 시간동안 생각해봤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전혀 몰랐다. 원미영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더 이상 원미영에게 적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랬던 것 처럼 굉장히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박쥐같은 고양이네, 이거.
"그러니까, 말 그대로 자신이 죽었다고 최면을 거는거에요. 어떤 감각이나 변화에도 무감각하게. 자신을 무기물이라고. 그런데... 전 못하겠어요. 그러느니 차라리 집에 들어갈래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 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잖아.
"그런데... 어렵나요, 그거?"
무의식중에 물어보았다. 이 성격좀 고쳐야 하는데.
"끝이 안 보여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요. 거기에 어제... 굉장히 당황해 보였잖아요? 그렇게 오래 노력한 사람이라도 부족해보여요."
김민혁은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아마 막 말을 배운 아이라도 미치기 직전까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도 완벽해질 수 없는 행위였다.
"둘이 정말 잘 어울려요. 그 말을 하고싶었어요. 제가 이래보여도 사람 애정만큼은 잘 보거든요.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김민혁이라는 사람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묻고 싶었어요. 만일 제가 돌아가면서 두 분께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 이게 가장 큰 것 같았어요."
어떤 근거인지는 묻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이라고 했던 것도 그렇고, 약간 친절하게 말한다고 해봐야 '여자의 감'이라고 할 것 같았다.
"혼란스럽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저, 그럼... 안녕히계세요."
원미영이 급하게 말했다. 대화의 처음부터 하고있던 만족한 것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나도 인사를 해 주었다. 어딘가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거나,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은, 기약없는 인사였다.
"안녕."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어제 김민혁이 사온 김밥에 손을 올렸을 때 방문이 끼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나는 도둑질을 하던 사람처럼 깜짝 놀래서 손을 거뒀다. 하지만 김민혁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눈을 돌려서 방 구석에 앉아있던 원미영을 바라보았다.
"결정은?"
김민혁이 물었다. 어디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보다는 굉장히 상태가 좋아보였다. 평소보다 좀 더 여유가 있어보이는 표정이었다.
"들어가야겠어요. 저는... 아직 가족들을 사랑하니까요."
원미영은 슬프게 웃는 얼굴로 일어서며 말했다. 김민혁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배웅해주려고 하는데. 괜찮지?"
원미영은 잠시 굳어졌다. 내가 생각해도 의외였다.
"왜?"
"아뇨, 감사합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3분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널필요도 없이 그저 몇 발자국만 걸으면 되었다.
할 말은 없었다. 내가 그다지 도와준 것도 없었고, 있다고 해봐야 좀 더 머리 아프게 일반론을 꺼내준 것과 맨 처음에 데려온 것 정도였다. 오히려 3일동안 숙식을 해결해준 김민혁에게 나보다 몇 십 배는 더 고맙다고 해야할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원미영이 탈 버스를 김민혁이 알고있다는 것이었다. 김민혁은 내가 의심스럽게 쳐다보는 것을 보고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원미영에게 편지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그런데 둘 다 정말 둔하다? 내가 어째서 내가 같은 고민을 안고있을 거라고 장담하는 건데?"
그건... 그랬다. 처음부터 약간 이상했다.
"그리고 지금도 네 집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알고있어. 또 중학교는 바로 저쪽의 신림중학교 나왔다는 것도. 생일이 6월 12일이라는 것과, 나와 동갑이라는 것과, 지금 2학년 4반에 재학중이라는 것도 알고있어."
원미영의 얼굴을 점점 일그러지더니 끝내는 김민혁을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요는, 세상을 너무 믿지 말라는거야. 나도 그랬고. 그런 면에서 저기 있는 양지은은 별로 좋은 본보기가 아니야.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만일 우리처럼 주고받는 것 없이 도와준다는 사람이 있으면 100% 다른 속셈이 있다고 봐도 좋아."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원미영의 손에 라이터를 들려주었다. 원미영은 아까전부터 굉장히 당황한 것 같은 표정으로 종이에 적혀있는 자신의 신상정보를 읽어가고 있었다.
"보관해두던가, 태우던가. 나한테는 더 필요없는 물건이니까 돌려줄게.
그리고 주고받는 것 이라고 해서 생각난 건데..."
김민혁은 잠시 뜸을 들였다. 약간 졸린 건지 머리를 몇 번 두드렸다.
"나는 너에게 숙식을 제공했어. 그럼 나도 받는 것이 있어야 겠지?"
김민혁의 말에 조용히 있으려고 했다가 끼어들고 싶어졌다.
"야, 너...!"
소리지르려 했지만 김민혁은 알았다는 듯이 나를 제지했다.
"사람 말 끝까지 들어.
그러니까, 우리 관계는 트레이드라고. 너는 우리에게 숙식을 요구했어. 근데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대가를 요구하지는 않았거든? 그러니까 지금 가격을 말해줄게."
"너 그러고도 사람..."
이야, 라고 하려다가 고양이가 내 품안에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 그 틈을 타서 김민혁은 말을 이어갔다.
"사람 아니야. 됐냐?
내가 제시할 수 있는 가격은 이 정도야."
품 속에서 포장하지 않은 종이를 꺼낸 김민혁은 원미영이 라이터를 잡고있던 손에 들려주었다.
"어때, 납득할만한 가격이지?"
원미영의 표정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미묘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화를 내거나 굉장한 배신감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정 반대의 것이었다.
버스를 기다릴 것도 없었다. 원미영이 김민혁이 준 롱코트에다가 종이들을 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버스가 왔다.
"저... 감사합니다."
"너는 문구점에서 노트 사고도 고개숙여 인사하냐.
잊지마. 우리가 한 일은 트레이드라고. 넌 고객이고, 난 점포의 주인이야. 누군가가 너를 가출청소년과 어울렸다고 해서 해코지 할 수 있는 권한따위 없어."
말을 마친 김민혁은 즐겁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웃은 후에 손을 흔들었다. 원미영은 나에게도 고개숙여서 고맙다고 말한 뒤 버스에 올랐다.
"얼마나 적었어?"
"굉장히 많이."
여담이지만, 후에 김민혁이 밝힌 가격은 굉장히 유동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 당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만큼.'
어떤 면에서는 어린아이처럼 곤란하게 할 의도가 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순진한 원미영에게서 굉장한 거금을 뜯어낼 방책인지도 몰랐다.
원미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3개월 후의 일이었고,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의 일이다. 내 전화번호는 김민혁이 건넨 청구서에 김민혁의 전화번호와 함께 적혀있었다고 한다.
Middle part. -도피-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