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메뉴 건너뛰기

본문시작

단편
2009.07.27 13:18

고양이가 울었다 ~Front part~(1)

조회 수 295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뷰어로 보기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뷰어로 보기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Front part. -추락지점-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Day 1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처음보는 고양이는 아니었다. 대략 이틀 전 부터인가, 내 방에 뭐라도 두고 간 것인지 매일같이 출석도장을 꽝꽝 찍어대는 녀석이었다. 나도 별로 피해를 본 일도 없고, 고양이는 싫어하지 않으니까(여자중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대로 두고 있었다.


내가 키우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멋대로 왔다갔다 하는 것일 뿐 그다지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뭐어, 도둑고양이라고 불리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이 고양이는 굉장히 기품있고 세련된 것 같았다. 사람을 보아도 그다지 겁을 내지 않았다. 위협을 위해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것 보다는 넌지시 바라보며 관찰한다는 느낌이었다.


색은 검정색. 눈이 마주치면 황색으로 밝게 빛나는 눈빛을 약하게 만들고 나를 바라보곤 했다.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인지 내가 눈을 감거나 자기가 눈을 감으면 꼬리를 내리고 창문을 타고 사라졌다.


걱정은 없다. 걱정은 없는데


"왠지 모르게 신경쓰여."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이런. 4평짜리 고시원인데 소리가 다 울리겠다. 어제도 한소리 들어버렸으니까 조심해야 하는데.



꽃다운 이팔청춘이라고 했나. 그 때가 내 나이는 그 근처인 18살이었다. 생일까지 31일 남았다고 핸드폰이 알려주고 있으니까 확실히 맞았다. 뭐,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까 집어치우고.


18살에 고시공부하려고 이 추운 겨울날에 난방도 안 되는 고시원에서 찌그러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 물이 든 페트병에 금이 갔다.


알기 쉽게 결론만 말하자면, 버림받은 것이다.


그래도 이 이야기에 대해서 냉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의 입장이었다면 나도 주저없이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열 살 때 조부모(祖父母)들과 결별한 부모들은 그 다음해부터 사업을 시작했다.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능이 좋아지기 시작한 개인용 컴퓨터와, 그 컴퓨터들을 모아놓은 PC방이라는 곳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런데 보통은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컴퓨터의 가격은 2, 30대를 몰아놓으면 가격이 무지막지하기 마련이었다. 동네 PC방에서도 기본적으로 20대는 들여놓고 시작하는데, 초기 사업자가 그런 자금이 있을리 없었다. 그래서, 내 부모들이 하는 사업은 그 컴퓨터들을 '대여'해 주고 그 댓가로 매달마다 돈을 받는 것이다.


사업은 잘 되었다. 그때까지 블루오션이었던 사업이었기 때문인지, 초기 자본금을 빼면 거의 날로 먹는 장사였기 때문인지 1년이 지나자 빌렸던 원금을 갚고 그 원금만큼 이익을 남겼다.


그리고 사업은 순식간에 망해버렸다.


아마 조금만 더 융통성있게 운영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만, 그 부모들 특유의 무모함과 고지식함이 불러온 결과였다.


PC방이라는 곳은 이용하는 고객의 90% 정도가 게임을 한다. 그리고 그 게임들이 폭발적으로 컴퓨터의 최소 요구 사양이 높아진 것은 1년 전이었다.


여러 업소에서 사양이 너무 낮아서 구동이 불가능한 게임이 많다는 클레임이 들어오자 부모들은 예산을 측정해보았다. 그리고, 그 때 보유하고 있던 약 1000대 가량의 컴퓨터를 한 번에 '전부' 교체한 것이다. 빚을 내서라도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고객을 모을 수 있다는 빌어먹을 지론을 따르는 것은 분명 맞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원도 시골 촌구석에 있는 컴퓨터까지 전부 다 갈아엎어야 했을까.


컴퓨터의 교체기간은 약 1주일. 1주일 동안 모든 PC방 업소에 휴업을 부탁했다. 그리고 컴퓨터가 바뀌니까, 계약사항도 당연히 교체. 모든 업소의 계약조건을 한꺼번에 갈아치우지 않으면 다른 업소에서 '저 곳은 더 좋은 대우지 않느냐'는 클레임이 들어올 수 있으므로 모든 계약을 일시적으로 해약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미 이 사업은 새빨간 레드오션이라는 것이다. 시장의 50%를 독점하던 부모들을 몰아내기 위해 나머지 경쟁사들은 통합해서 완전히 갈아엎었다.


피시방마다 찾아가서 항의하는 것은 물론이고, 무료로 컴퓨터를 교체해준다고 하는 곳도 있었고, 돈을 얹어주는 곳도 많았다.


인터넷이라던가 소문을 거의 믿지 않는 부모들에게 나는 '바뀌지 않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반 포기상태로 몇몇 사이트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은지 1달하고 2주만에 이꼴이 되었다.


컴퓨터 1000대의 가격을 생각해보았는가? 보통의 PC방에 들어차있는 컴퓨터가 30대정도. 많아봐야 60대 정도다. 평균보다 조금 높게 50대 정도로 보아도 피시방 200개의 규모다.


길게잡아 두 달 만에 대부분의 고객들은 등을 돌렸다. 만일 여기에서 좀 더 출혈을 감안하고 투자자들을 모아 웃돈을 얹어주기만 했더라도 이꼴은 안 났을텐데.


마지막으로 친척집에서 끌어모은 최후의 돈으로 비행기 티켓을 세 장 샀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네 명이었다.


엄마라는 사람은 꼼꼼히 확인하듯 두 자식들에게 표를 나눠주었고, 나는 꽝. 결국 공항에서 따라온 빚쟁이들을 피해 게이트를 통과하다가 나만 덩그러니 놓인 것이었다. 아. 덩그러니라는 말은 맞지 않는 것 같다. 뒤쫓아온 빚쟁이들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뭐어, 동생이라는 작자는 나 엿 먹으라는 건지 캐나다의 친척집에 잘 있다며 메일을 보내왔다. 나는 답장으로 '내 눈에 보이면 잘근잘근 씹어먹을거야'라고 한 마디만 보내뒀다.


알고있었다. 모를리 있는가.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인간이 생각해서 최후에 남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가족이라는 것은 피가 섞인 남일 뿐이다. 그리고 나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만일 당신의 집이 천재지변으로 폭삭 망했다. 가족이고 친척이고 재산이고 다 없어졌다고 가정하면, 당신은 '아 그렇구나'하며 천재지변이 일어난 이 상황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나는 어제 술에 취해 길에서 널브러져 자던 한 직장인의 지갑에서 20만원을 훔쳤다. 아무도 없었건만, 손은 왜 그리 덜덜 떨리는지.


13만원으로 고시원을 잡은지 1주일. 적응되지 않는다.



Day 2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잠시 눈싸움을 하다가 손목시계가 새벽 여섯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다시 누웠다. 고양이는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다가 창문을 한 번 핥고 지나갔다. 창문을 잘 닫아두어서 다행이다.


일단 돈은 그럭저럭 되어보였다. 모아두었던 돈도 있고, 통장에 있던 돈도 언제 압류될지 몰라서 전부 찾아두었다. 거기에 어제 방을 잡고 남은 돈 7만원도 있었다.


신림동 고시촌은 정말 넓다.


길은 엄청나게 비슷비슷하고, 미로처럼 얽혀있는데다가 위쪽으로 갈수록 길이 복잡했다. 그 때문인지 방이 정말 쌌다. 그리고 PC방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고시공부하려고 사람이 모인 곳을 기점으로 상권이 엄청나게 넓어진 듯 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아무리 강남이라고 해도 상권이 신림역에서 버스정류장 다섯개가 지날 때까지 끊이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았다.


문제는, 그렇게 큰 중심부인데도 내가 일할 곳은 한 곳도 없다는 것이었다.
일단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고, 입술만 축일 정도로 기울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먹고갈 수 있게 만들어놓은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핸드폰 요금계산일까지 약 4주정도. 그 안에 답이 나오지 않으면 아마 굶어죽을 것 같았다.


그렇게 다리가 아픈 것도 모르고 멍때리고 있기를 여덟시간이나 지났다. 편의점에 공짜로 계속 있기도 미안해서 컵라면 하나를 먹었다. 그것도 네 시간 전의 이야기였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받아줄 사람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주민등록증도 안 나왔다고 하지, 학교는 고3인데 휴학했다고 하지, 부모님은 외국에 나갔다고 하지...


뭐어, 내가 사장이라면 200원 정도 시급을 내리는 것으로 타협을 봐서 쓸 것 같기는 하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는 것인지, 미성년자를 쓰는 것도 꽤 골치아픈 일인 것 같았다.


배고프다는 생각도 없었다. 팅팅 부어서 감각도 없는 다리는 이미 안중에 없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서 집을 나올때까지 실감하지 못했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거... 굶어죽는거 아냐?'


다시 돌아다니기로 했다. 다리가 부어서 아픔을 넘어 감각이 없어질 때 까지 더 돌아다니면서, 산 꼭대기에서 아랫동네까지 전부 연락처를 남겼다. 피시방으로 한정시키던 곳을 유흥업소, 당구장, 노래방, 편의점으로 넓혔다. 그 이외에 커피숍이나 카페같은 것도 있었고, 제과점도 있었지만 경험자가 아니면 사절이라고 해서 연락처도 남기지 못하고 쫓겨났다.


미칠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뭔가를 하지 않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한 달 전까지 학교도 잘 가고, 부모들끼리는 잘 치고박고 했지만 동생과 히히덕거리면서 놀았다. 이제는 그 때를 생각하면 부서질 것 같이 머리가 아파왔다. 현실을 직시할 수가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이게 네 상황이야'라고 하는 순간 아직 피부에 잘 와닿지 않는 현실감이 솟아나서 죽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 딱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 생활은 내 생활이 아닌 것 처럼 느껴졌다. 여기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고, 나는 집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다시 세 평 남짓한 고시원의 방에서 잠을 자면 방 구석에 있던 자명종의 소리에 맞춰 잠에서 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상에 갑자기 떠난 여행이나, 일탈할때와 같이 땀이 비오듯 흘렀다. 땀이 쉴새없이 흐르고 불안했다. 손이 떨렸다. 하늘을 바라보면 어지럽고, 감각은 극도로 날카로워졌는가, 하면 또 엄청나게 무뎌진 것 같기도 해서, 땅의 티끌이 보일 듯 하지만 사람과 부딫치는 것을 예측하기 힘들었다. 정처없이 걷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편이 오히려 '고시원으로 돌아간다'는 상황에 혼란을 주어 좀 더 안정되게 만들었다.


부서질 것 같다. 정신이 부서질 것 같고, 답답하고, 어지러운데다가 외롭고 고독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칼이 있다면 목에 꽃고 죽고 싶었다. 하지만 아플 것을 생각하면 망설여졌다. 누구와의 소통도 없이, 어떤 확신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 뿐이었다.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먼지처럼 부유하는 것 같이 어중간한 느낌 뿐이라서 불안했다.


1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면 아찔해졌다. 1년 후에도 세 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세우잠을 자는 생활을 생각하면 죽고 싶어졌다.


아찔했다. 세상이 빙빙돌았다. 그러면서도 발은 착실하게 갈 곳으로 가고, 그 길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싸늘했다. 살갗이 얼어붙었다. 그러면서도 사고는 냉정하게 '미래'를 생각하며 절망에 빠졌다.


서글펐다.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기분은 처마끝에서 떨어지는 티끌의 양 만큼도 풀어지지 않았다.


누가 나 좀 죽여줘. 빚쟁이든 부모든 동생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누구든 좋으니까, 난 더 이상 살고싶지 않아.



Day 3.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어제와는 달리 코 앞에 있었다.


갑자기 뺨에 난 상처부문을 핥았는데, 그게 강아지랑 달리 엄청나게 아파서 눈이 번쩍 뜨였다. 일어나다가 책상에 부딪쳐서 비명은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왜 이 고양이가 내 앞에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 방에 먹을것이라고 해봐야 가방의 뻥 뚫린 구멍을 막은 소가죽 정도였다. 백번 양보해 먹는다고 쳐도, 먹을 것을 노리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계속 나에게 엉겨붙었다. 두꺼운 이불을 둘둘 말고 침낭삼아 누웠는데, 다시 내 가슴쪽에 와서 등을 비벼댔다. 그러면서 얼굴은 엄청나게 애교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배가 고픈데다가 아침이 싫은 나에게는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눈싸움을 하다가 문득 연상했다.


'고양이 > 동물 > 살 > 고기 > Eadible(식용가능).'


갑자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먹지 않았다. 진짜로. 일단 취사도구라거나 껍질을 벗길 칼이라거나 갖고있지 않았고, 사체를 처리하는 것도 문제였다. 거기에 처음보다시피 한 나를 이렇게 따라주는데, 버릴 수가 없었다.





고양이는 나를 계속 따라왔다. 지능이 있는 것인지, 내가 방에서 나가려고 하니까 창문 너머로 나갔다가 대문 앞에서 하품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에 남아있는 부재중 전화목록이라고 해봐야 담임 선생님의 전화번호였다. 부모와 동생은 계속 전화하는게 귀찮아서 스팸문자로 등록하고 착신거부설정을 해버렸다. 버렸으면서 뭔 말이 많은 것인지.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


아침 7시 45분의 대화였다. 전화기 너머로 시끌시끌한 것 같은 반의 소리가 들렸다. 아침조례도 시작하기 전에 전화한 것 같았다. '이제 볼 일 없는 사람인데 어때'라는 심정으로 뻔뻔하게 말했다.


"지영이니?"


선생님이 반가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전화번호 안 찍혀요?"


추운 날씨에 외투의 지퍼를 올리며 말했다. 얇은 오리털이지만 주머니가 많아서 좋아하는 옷이었다.


"그건 아닌데... 지금 어디니?"


"지금..."


실 없는 대화면 충분했다. 나는 더 이상 학교에 갈 일도 없을 것이고, 선생님의 얼굴을 볼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다음달에 굶어죽을지 모르는데 무슨.


"서울이요 ."


해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고양이는 아직 졸린지 까칠하게 울며 하품을 하고있었다.


"학교는?"


"아하하하. 그만 둘게요. 빚이 2억이라서요."


뭐어, 지금 갖고 있는 돈도 50만원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도 빚쟁이도 이제 볼 일 없을텐데 뭐.


"빚? 무슨 빚?"


선생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올라갔다. 평소와 다르게 분주한 것 같았다. 좀 더 차분한 이미지였는데.


"사업이 망해서요. 부모들과 동생은 캐나다로 피신했어요."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길게할 마음도 없으니까 짧게 끝내고 싶었다. 오늘도 연락처나 남기고 다녀볼까.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목소리가 더 올라갔다. 무슨 오페라 듣는 기분이었다. 우리 담임선생님... 성악 전공이셨나?


"버려졌으니까요."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고, 실제로도 담담하게 행동할 자신이 있었다.


고양이가 바지를 물고 끌어당겼다. 정신차리고 보니 이쪽 길이 아니었다.


"자, 그럼 선생님. 갑작스럽지만 지금까지 가르쳐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인사도 끝났으니 볼 일은 없겠지. 뭐 빚이 2억이라는데 어쩔거야. 자기 돈을 2억이나 깰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고양이는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꼬리를 내리더니 얌전히 작게 울었다. 내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그렇게 신기했나보다.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얼마정도 앞서가다가 나를 뒤돌아서 바라보고 다시 앞으로 가길 반복해대는 이상한 고양이었다. 내가 모퉁이로 돌려고 하면 용캐 알아차리고 내 앞으로 달려나갔다. 발소리를 그리 크게 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아는건지 정말 신기했다. 피시방이나 당구장에 연락처를 남기려고 들어가면 계단 앞에서 얌전히 '야옹'하고 울었다. 내가 다시 올라오면 꼬리를 휘적거리면서 앉아있다가 나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연비도 좋은건지 내가 밥을 먹기 전까지 쓰레기통이나 사람들이 들고다니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가 라면이라도 사먹으려고 편의점에서 계산을 하면 어느새 사라졌다가, 얼마남지 않은 면을 끄적거리고 있으면 어느새 편의점의 유리를 긁고있었다. 안아들려고 해도 거절하지 않고, 물지도 않았다. 단지 애정표현으로 뺨을 핥는 것 같은데, 뺨의 상처가 굉장히 쓰라리니까 그만뒀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 외에는 솔직히 나보다 더 쓸모있어 보이는 고양이었다.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고, 없는 것은 돈과 일자리였다.


이미 해가 떨어진지 오래였다. 오전서부터 오후까지 쭉 돌아다녔다. 단란주점에서 유치원까지 문과 간판이 있는 곳이면 반사적으로 열고 들어가서 연락처를 남겼다. 화장실은 예외로 치더라도, 대략 50군데는 족히 다닌 것 같은데 연락이 없었다. 핸드폰 설정이 잘못되어있는 것인지 확인해보려고 공중전화로 내 휴대폰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휴대폰은 잘 울렸다. 진동도 아니고 벨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면서.


잠시 피시방에 들어가서 메일을 확인해보았다. 부모들이 보낸 메일은 전부 스펨편지함에 들어있기에 보지도 않고 몽땅 다 삭제시켰다. 제목으로 보아 후회한다는 내용이 절반이고, 미안하다는 말이 절반이고, 예외적으로 하나는 내용이라도 좀 봐달라는 내용인 것 같았다. 알게뭐야.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내 사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에 숨겨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친척들은 부모들이 해외로 도망친날 공항에 남겨져 있던 나를 잡으러 왔었고, 부모라는 작자들을 아는 사람들은 비행기의 목적지를 말하라고 협박했다. 솔직히 말해 한 달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심장이라도 빼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날 버렸다. 한 달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런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메일이고, 쓸데없는 수고였다.


혹시 빼먹은 곳이 있나, 해서 길거리를 무작정 돌아다녔다. 중간에 점심을 해결했던 편의점에서 교체시간인지 종업원이 나오다가 아는 척을 했다. 아직 일거리 없냐는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해버리면 주저앉아 울 것 같아서 말은 할 수 없었다. 고양이도 내가 동요하는 것을 알았는지 잠시 멈춰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정신이 들어서 계속 걷기로 했다.


그러던 중에 '승리성공인력사무소'라는 엄청 수상해보이는 간판이 달린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 주변의 가로등이 낡은 것인지 그 곳이 어두웠고, 꽤 먼 거리였기 때문에 정담할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낯익은 사람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건물과 간판으로 보아 이곳은 분명 위험해보이는 건물이어서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곳이었다.


그나저나 굉장한 작명센스였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인력소... 라는 뜻일까.


저거... 아무리 봐도 조폭 사무실인 것 같은데.



핸드폰은 충전기를 꽂아서 책상위에 놓아두었다. 전화라던가 문자가 오면 딱딱한 책상 위에서 굉장히 시끄럽게 반응하니까 안심하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맨 땅바닥에 별로 푹신하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러다가 곧 등이 아파서 이불의 반은 깔고 반은 덮는 형식으로 침낭 비슷하게 만들어버렸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나 힘들게 걸어다녔으니까 잠이 솔솔 와야 할 것 같지만, 눈이 아플 정도로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은 오전 1시. 평소에는 지금까지 깨어있으면 이유없이 뭔가를 부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착 가라앉아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되어있다. 앞일은 알수도 없고, 이런 생활을 시작한지 한 주도 되지 않아서 적응되지도 않았고, 여기에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안정되어있었다.


고양이는 졸린지 계속 부스럭대는 나에 맞춰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끝내 내 얼굴의 상처를 핥았다. 잠깐 잠이 들 뻔 했는데 확 깨버렸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올리려다가 이 고양이마저 가버리면 진짜 혼자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나는 젼혀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고, 그 말은 즉 다음달이 되면 방에서 쫓겨나거나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디에선가 여유가 생긴 것인지 마음이 가라앉아서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은 현상이었다. 나쁜 일이라면 그 원인이 사태를 해결하는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찾아봐야겠지만, 이건 오히려 좋은 일이니까 그냥 놔두기로 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20대를 생각했다. 날짜를 세다보니 시간이 연상되었고, 일단 10대는 거의 다 지나갔으니 20대가 생각난 것 같았다.


20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연애를 하다가 결혼한다... 는 것은 이미 고양이가 형광등을 씹어먹는 소리인 것 같았다. 아마 간신히 일자리를 찾거나 합법적으로 단란주점에서 일할 것 같았다.


30대에는 잘 된다면 룸살롱에서 돈 많은 재벌을 만나 결혼하고, 애를 낳고 60까지 살 것 같다.


참 단조로운 인생이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간단한 인생이었다.
꿈이 있었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픽션이든 논 픽션이든 좋으니까 그것들을 읽는 것과 관련된 직업이면 뭐든 좋았다. 어시스턴트도 좋을 것 같았고, 편집가도 좋을 것 같았고, 비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고, 논평가는 다른 사람의 것을 깎아내린다는 점에서는 싫었지만, 그래도 많은 것들을 읽어볼 수 있으니까 좋을 것 같았고, 문장교열가도 맞춤법은 제대로 배워놨으니까 좋을 것 같았다.


그것도 이제 과거형이 되어버렸다. 내 학력은 중졸로 끝났다. 고등학교 중퇴라니, 무슨 80년대 공순이가 아닌 이상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골 빈 여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울하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열심히까지는 아니더라도 남들만큼은 노력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내가 아직 자고있지 않은 것이 신기한지 잠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힘내라는 듯이 방긋 웃으면서 내 오른손을 핥아주었다. 사람의 말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마음은 이해할 줄 아는 고양이인 것 같았다.


만일 내가 아이를 낳게된다면,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면 나는 절대로 돈때문에 추락하는 인생을 살게 하지 않을거야. 그렇게 다짐했다. 아마... 아이는 고사하고 결혼도 연애도 해보지 못할 것 같지만.



Day 4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새까만, 그러면서 황색의 눈동자를 가진 고양이었다. 다른 도둑고양이들과 같이 어울리지 않았고, 영역다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먹이 때문에 허덕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상처 하나 없이 피부가 말끔했다. 단지 가끔씩 하품을 많이 한다는 것만 빼면 건강상태도 좋아보였다. 유연성도 대단해서, 등을 크게 휘지 않고도 뒷발의 바닥을 혀로 핥기도 했다. 강아지만 키워봐서 그런지 고양이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는데, 내가 돌보는 것이 아니라 돌봐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느낀것이 있다면 고양이의 혓바닥은 엄청나게 까칠하다는 것이었다. 꼭 나를 깨울때 얼굴에 난 상처를 핥는데, 그게 식초를 뿌리는 것 보다도 더 아팠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보면 어느새 책상은 내 눈앞에 있고


[쾅]


이렇게 부딫치곤 했다. 혹만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굉장히 자극적이고 아픈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야야야."


고양이는 어디 나가자고 조르지도 않고 가만히 4평 남짓한 방의 한가운데에 앉아서 올려다보고 있었다. 배가 고픈가, 싶어서 어제 먹다 남은 생라면을 부숴서 줬더니 흥미가 없다는 듯 코를 긁었다.


이 녀석, 나보다 잘 먹고 다니는 건가?


핸드폰의 문자나 부재중전화는 역시 없음. 하기야 막 겨울방학 직전이었다. 일거리를 찾으려면 11월부터 뛰어다녀야 수월하게 찾을 것이고, 12월 중순쯤 오면 완전히 스테프는 라인업(line up. 등록, 확정.)된다. 그렇지 않으면 100만이 실업자인 우리 나라라고 해도 늦게 직원을 뽑으면 곤란해진다... 라고 여기저기서 주워들었다.


...... 근데 이놈의 고양이새끼는 왜 해가 뜨기 전부터 사람을 깨우는 거지.
현재 시각 여섯시 반. 그리고 일요일이었다.


"아."


짧게 중얼거렸다. 여기에서 한 시간 거리면 내가 가던(=앉아서 졸던)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를 생각하고 왜 갑자기 탄성을 질렀는가 하면...


점심밥이 공짜였다.




고양이는 지하철을 탈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지하철의 계단을 내려가는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앉았다. 그리고 한 손을 들어서 나에게 좌우로 흔들었다.


잠깐. 손을 들어? 사람처럼 인사라도 하는 듯이?


순간 핏기가 싹 가셨다. 저 모습. 허리 아래쭉을 땅에 붙이고 웃는 것 같이 옆으로 벌어진 입을 취했다. 그리고 천천히 오른쪽 앞발이 올려지고, 좌우로 두 번 흔들리더니 중간에서 딱 멈췄다. 내가 갈때까지 저러고 있을 것 처럼, 계속 손을 들고있었다. 고양이라는게, 이렇게나 사람에 가까운 동물이었나?


어쨌든 난간을 잡고 뒷걸음질치며 내려갔다.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저 고양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무심결에 뒤로 발을 내딛다가 보니 어느새 고양이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혹시 아직도 들고있는가, 해서 계단 아래쪽에서 다시 올려다보니 고양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고양이는 삼각지역 4번 출구에 있는 삼각교회 간판 아래에서 잔뜩 웅크리고 털을 고르고 있었다.


쥐며느리와 같이 둥글게 말린 고양이를 인상을 잔뜩 쓰며 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이 고양이.


내가 가만히 있자 나를 알아본 듯이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발등에 애교를 부렸다. 꽤나 기분이 좋은 것인지 땅에 등을 대고 구르기도 했다.


이쯤되면 기특하기보다 무서워지기 마련이었다. 이거, 진짜 사람같았다. 아니, 신림에서 여기까지 쫓아온건가? 걸어서 두 시간 정도 걸릴 거리를? 고양이가?


잠시 공황상태가 되었다.


수 분 후 내려진 결론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고양이가 뭐건간에, 아직 내게 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았... 아니, 해가 될 일을 했으면 그건 이미 늦은건데.


군자는 위험한 곳에는 가지 않는다, 고 했다. 군자는 아니지만, 이건 약간 위험해보였다.


"고양이도 기르냐? 오랜만이네?"


뒤에서 누군가가 넌지시 말했다. 아직 아홉시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잠이 덜 깬 것 같은 얼굴을 하고있었다. 그런데...


"누구...?"


그 사람은 이마에 손을 얹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예상은 했지만 충격적인데. 반 년 동안 매주마다 보지 않았어?"


검은색 외투에 검은색 바지. 거기에 갈색 모자를 그냥 걸치듯이 쓴 사람이었다. 매주마다 보았다는 것은 아마 교회에서 일 것 같은데... 그닥 기억에 없었다.


"김민혁이야. 기억 못하는 것 같지만."


"어... 어어. 응. 그래..."


김민혁이라고 소개한 사람은 나를 지나쳐서 교회로 들어갔다. 고양이는 땅에 앉아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 애도 잠에서 덜 깬 것 같았다. 그리고 교회로 들어가려하자 고양이는 아주 살짝 내 뒤에 따라와 문을 통과했다. 엄청나게 머리가 좋은 고양이었다.





예배를 비롯한 교회활동이 끝냈다. 고3이라서인지 예배를 제외하면 3분만에 끝났다. 그리고 주머니에 수첩과 성경책을 넣고 가려는 선생님을 불러세웠다.


"이제 교회를 그만 나오려고 하는데요. 등록 취소해도 될까요?"


선생님은 놀란듯이 얼굴을 구겼다. 그렇게 놀랄 일일까? 하루에도 몇 명씩 새로 오고 갈텐데.


"왜, 지은아? 공부때문에?"


네,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공부때문에 그만둔다는 녀석이 학교는 가지 않는다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아뇨. 집안 사정이... 좀 힘들어져서요."


힘들어진 정도가 아니라 공중분해 된 것이지만 그렇게 말했다. 공중분해도 아닌가? 그냥 나 혼자 버려진거니.


"집안사정? 왜?"


무심결에 한숨을 쉴 뻔했다. 이 사람, 눈치라고는 극악하게 없었다.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서요."


"그래도 교회를 안 나오면 안되지. 계속 나와라."


선생님은 즉답했다.


어쩔 수 없다. 2억이나 빚이 있는 빚쟁이들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나오는 것은 이번으로 끝을 내야했다. 모질게 대하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정직히 말하면... 사업이 망했어요. 빚이 너무 많아서 갚을 수 없어요. 그리고 가족들은 저만 남겨놓고 8일 전에 캐나다로 피신했습니다."


선생님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실이다. 난 찔릴 것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콧등이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참으며 선생님의 말을 기다렸다.


"진짜냐?"


"네."


이번에는 내가 즉답했다. 아직 선생님은 내게 더 설교를 할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제게 신앙심은 이제 없어요. 오히려 있는 쪽이 이상한 것 아니에요? 신이 있다면 어째서 이렇게 힘들어지죠?"


선생님은 한숨을 푹 쉬더니 나를 의자에 앉히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들어, 지은아. 하느님은 너를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려고 이렇게 하시는 거야.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더 좋은 일이 생길거야. 알아듣니? 네가 겪고있는 상황과 교회를 나오고 안 나오는 것은 별개의..."


더 이상 못 듣겠다. 아무것도 아닌데, 뻔히 틀에 박힌 설교일 뿐인데 그것을 참지 못해서 머리가 익어버릴 정도로 화가 확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 그 대단하신 하느님께서는 제가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도 염두하셨겠죠."


화를 참고 계단을 내려간다. 몇 번이나 발을 헛디딜뻔 했다. 평소에는 두 칸씩, 세 칸씩 내려가던 계단인데, 오늘은 한 칸씩 내려가는 것도 힘들었다.





1층 가까이 내려오자 음식냄새에 위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식욕을 못 참고 방금 모욕하고 온 신의 집에 좀 더 붙어있기로 했다. 어쨌든 공짜였다. 그리고 아까전의 대화와 이건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식당으로 발을 놀리기로 했다.


밥 한 공기 분량에 멸치와 된장국, 깍두기, 시금치, 가지가 약간씩. 내용물이야 어쨌든 거의 일주일만에 제대로된 밥을 먹게 되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먹는 중에 미안한데 좀 앉을게."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허락도 없이 반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입안 가득 넣고 있었으니까 대답하려면 1분 정도 걸렸을 것 같지만, 아주 약간 화났다. 그리고 이 사람 오늘 왜 나한테 이렇게 친한 것 같이 구는거지?


"갑자기 친하게 굴어서 미안한데... 그 밥.. 다 못 먹고 일어나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작은 교회인데다가 예배시간 시작한지 20분이나 지나서 딱 눈에 띄였어.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뭉쳐서 화난 얼굴로 쳐들어오던데."


순간적으로 밥이 넘어올 뻔 했다. 예상보다 심각하게 빨랐다. 적어도 한 주 정도는 걸릴 것 같았는데.


"이미 1층을 뒤지는 중일거야. 큰 교회가 아니니까 지하에서 밥 지으면 냄새가 진동해. 자... 여기까지 말했으면 먹을 시간은 다 끝난 것 같은데."


김민혁은 별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목에 밥이 걸려서 연신 기침이 나왔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고. 진정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물을 내밀었다. 물을 허겁지겁 먹어서 일단 진정했다.


"어쨌든 가자고. 넌 정문 길밖에 모르지? 교회 끝나면 곧바로 학원 가기에 바빴으니까."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식기를 그대로 남겨두고 일어났다.


그 이후로는 간단했다. 김민혁은 빙 돌아서 정문으로 나가는 길을 알려주었고, 빚쟁이들에게는 들키지 않고 교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가 멋대로 나갔으면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 맞았을텐데, 어떻게든 빠져나온 것 같았다.





지하철까지 뛰어온 통에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반면에 김민혁은 숨이 약간 가빠진 정도였다. 신림역까지 가려면 4호선을 타고 사당역까지 간 다음 2호선으로 갈아타서 신림역까지 가야했다. 어림잡아 약 1시간 정도의 시간이 비었다. 숨은 자리를 잡아 앉게되자 잠깐동안 진정되었다.


"집은 고시촌에 잡았지?"


김민혁이 말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상했다. 김민혁은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아는거지?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오다가 봤어. 비슷한 사람인가... 했더니 교회쪽으로 오더라고."


그렇구나... 하고서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 말은, 즉...


"나도 신림역에서 탔거든. 그 이전에 버스틀 탈 때도 얼핏 본 것 같기도 하고. 정류장 근처에서 뛰어왔던 사람이 너야?"


"맞는데... 그러면 너, 그 근처에 살아?'


기뻐하며 물어보았다. 김민혁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 가 아니라 고시촌인데... 왜 좋아하는 거야?"


"아... 그게..."


왜?


좋아하는 이유가 기억나지 않았다. 왜 기뻐하는 걸까?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친하던 사이도 아니고(친했다면 오히려 피했겠지만), 일자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뭐, 어쨌든. 방값은 얼마냐?"


김민혁은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싫었던건지 그렇게 물었다.


"13만원."


"산 꼭대기 쪽에 있는, 간판없는 고시원?"


김민혁이 소리죽여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맞다. 맞기는 한데...


"왜 웃는거야?"


"아아... 음. 처음 사는 사람은 모르겠구나. 그 고시원이 제일 싸기는 해. 8만원짜리가 있기는 한데 최근에 14만원으로 올려버렸고.


일단... 거기 세탁기 먹통이야. 고양이가 많아서 창문을 부수기도 하고, 벌레도 많아서 라면봉지 하나 까두면 하룻밤사이에 없어져. 신발에 지네가 들어있던 적도 있었고. 뜨거운물은 언제나 나오기는 하는데 샤워할 곳이 없어. 칸막이라고 해봐야 통풍 잘되는 곳에다가 방수천 두 개 대놓은 것 뿐인데?"


김민혁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 웃으면서 말한다. 약간 기분이 상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화장실은 남녀 공용인데 샤워기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고, 문을 잠그는 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전에는 새벽 네 시 정도에 해서 다행이었다. 너무 여유가 없어서 가려야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고보면 나... 씻은지 4일 되었구나.


"세제는 일단 주기는 하는데, 그건 표백제 같았고. 흰 옷만 빨아서 다행이었지."


"그럼 넌 어디에 사는데?"


"그 고시촌 내려오면 골목이 대여섯개 있지?"


"응."


"거기 반대편. 방값은 한달에 20만원정도 하는데 화장실이랑 샤워기도 방마다 하나씩 있고, 침대도 있어."


뭐야, 그건. 어디의 다른 세계야? 고시원인데 방마다 화장실이 있어? 샤워기도 있어? 그런주제에 침대도 있어?


"자자, 그렇게 놀라지 말고. 돈 벌면 근처로 이사오던가. 내가 있는 곳은 일단 다 찼지만."


김민혁은 웃음을 멈추고 '다음 고시때면 다시 비겠지'라며 즐거운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렇게 악명이 높아?"


잠시동안의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말했다.


"아? 거기? 글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김민혁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어떻게 알아?"


설마 그 고시원에 살았다거나?


"거기 살았거든. 10개월 전까지. 202호 였나? 소화기 고장난 곳에."


...... 할 말이 없었다. 10개월 전 지금 내가 묵고 있는 방에 살아았었다고 하는 것이다. 뭔가 엄청나게 꼬인 인연인 것 같았다.


"좋게 생각하라고. 그 빌어먹을 고시원에 있기 싫어서라도 일자리 구해야 할 거 아냐? 동기부여는 확실하겠네."


김민혁이 다시 실실 쪼개며 말했다. 다시 말이 없어지기에 김민혁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기로 했다.


얼굴이 썩 잘생긴 것은 아니지만, 이목구비는 뚜렷해보인다. 머리가 수북하게 자라있고, 눈이 약간 지쳐보이고, 다크서클이 꽤 있었고, 그러면서 전체적인 피부는 박피라도 한 것 처럼 잡티하나 없이 깔끔했다. 전체적으로 체형은 말라보였지만, 키는 나보다 주먹 두 개 정도 차이가 날 정도로 컸다. 옷 취향도 나랑 비슷한지 주머니가 많고 검은색 계열이었다.


말투는 약간 비관적인 것 같지만 털털해보이고, 또 누군가 건드리지 않으면 말하지 않지만 말하기 시작하면 한 쪽 보다 더 많이 했다. 필요 이상으로 부연설명까지 즐겁다는 것 같은 태도로 해주었다. 친절하다면 친절하지만, '모르는게 약'인 경우도 서슴없이 말해서 약간 곤란했다.


...... 이제야 기억났다. 이 사람, 나와 중학교때 같은 반이었다. 눈여겨 본지 몇 분도 안되어서 너무 많은 정보가 나온다 싶었다.


"저, 김민혁."


"응?"


인상을 찡그리고 자신의 손목을 살펴보던 김민혁이 반응했다. 귀도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점점 더 확신이 깊어졌다.


"중학교때 같은 반이었어?"


김민혁은 입을 반 정도 벌리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 몰랐어?"


인정해야겠다. 나는 굉장히 눈치가 없다.





시간은 한 시를 약간 넘고있었다. 그리고 지하철 앞에서


"고양이네."


"응. 고양이네."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같은 고양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 발목에 얼굴을 비비면서 굉장히 애교를 떨고있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 고양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통의 도둑고양이고, 단지 비슷한 것이 삼각지역 근처에도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거... 진짜로 고양이일까?


"네가 키우는 거야?"


김민혁의 말에 공황상태가 되어서 뇌가 표백될 것 같은 상황을 간신히 벗어났다.


"아냐."


그럴리가. 신출귀몰한 이런 고양이따위 키우기로 한 기억은 머리 속에 없었다.


"그래?"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걸음을 멈췄다. 나도 지하철에서 내리고 김민혁을 따라오다보니 어느새 모르는 곳이었다. 눈앞에는 공사장이 있었다.


"자, 여기. 명함. 그런데 여분이 없어서, 그냥 네 핸드폰에 등록만 해줄래? 이것마저 없어지면 굉장히 슬플거야."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내가 명함 속의 핸드폰 번호를 누르는 사이에도 김민혁은 공사장 안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다. 곡괭이와 삽으로 갈아엎고, 한쪽에서는 석회를 칠하고, 벽돌을 나르는... 한 마디로 평범한 공사장이었다.


"그런데 일이라는건..."


"아, 공사장 노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대표적 3D업종이기도 하고."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등을 돌렸다. 희미한 미소를 띈 얼굴로 내게 인사를 하며 공사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고양이는 꼬리를 휘적휘적 흔들면서 야옹, 하고 울었다.


어쨌든 고시원 아래쪽의 골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반대편에도 가게는 널렸을 거고,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하나 정도는 있을지도 몰랐다.


오늘은 아침부터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잘 될 것 같은 날이었다.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심심하다는 듯 책상위를 뛰어올라갔다가 바닥으로 내려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 번 정도는 발을 헛디딜만도 하건만, 고양이라는 동물이 그렇게 생긴 것인지 헛디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핸드폰과 눈싸움하기를 1시간. 전화가 오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여섯시간 정도를 걸어다니면서 연락처를 남겨두고, 간단한 면접도 보았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적은데다가 보호자도 없는 사람을 쓰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조급해졌다. 아는 사람을 만나서 약간 고조되었던 것 같았다. 나란 인간은 철저하게 약하고 쓸모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우우우우웅]


진동이 울리자 곧바로 핸드폰을 열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래. 오늘은 뭔가 될 것 같았다...!


[아, 양지은?]


"네. 양지은이라고 하는데요..."


내 이름도 알고있었다. 드디어 일자리가 생겼다.


힘들었다. 어제까지 합하면 총 열 세시간동안 돌아다니면서 연락처를 넣고 면접을 보았다. 다리가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을 정도였고, 손이 얼았다가 녹기를 계속 반복했다. 청년실업 1백만이라는게 실감이 날 정도로 힘든 구직이었다.


[전화받는거 보니 아직 일자리 못 찾았나 보네.


나와. 옷 정도는 빨아야 할 거 아냐.]


....... 그제서야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액정에 쓰여진 이름은 '김민혁'.


[왜 갑자기 한숨이야? 싫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니, 싫은건 아닌데... 일자리 구한줄 알았거든..."


이번에는 김민혁이 한숨을 쉬었다.


[일자리 사정도 빡빡해. 고시병걸려서 공부하다가 포기하고 일자리를 찾는 사람도 많다고. 일자리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봐. 한 일주일 정도 미친듯이 돌아다니지 않으면 힘들걸.]


이거 또 엄청나게 단정지어서 말해주셨다. '너 글렀어'라고.


"어어... 알았어."


[어디 위치를 아는 곳 있어?]


"아는 곳...?"


그리고 그때서야 알았다. 나는 이 동네 길을 전혀 몰랐다.


집에 오는 것도 한 시간 정도를 해메서 간신히 돌어왔다. 골목마다 너무 번잡해서 이렇다할 특징이 없었다. 오히려 이력서를 넣을 때에는 닥치는 대로 찾아가니까 헤매던 말던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었는데...


[몰라?]


"...... 모르겠어."


모르겠다. 모르는건 모르는 것이다. 안다고 해서 뭐가 바뀌면 안다고 하겠는데, 모르겠다.


김민혁은 막막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전화기로 듣는 한숨이 이렇게 거북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좋아. 그럼 내가 갈게. 기다려.]


"알았어."


전화를 끊는 순간


[야옹]


고양이가 내 코에 코를 붙이고 울었다. 마치 합격결과를 물어보는 사람같았다. 그리고 장난이라고 하고싶은 건지 내 코를 까칠까칠한 혀로 핥았다. 약간 따끔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방을 정리... 하려고 해도 정리할 것이 없었다. 이불은 그냥 펴져있는 상태로 두는편이 나을 정도로 살풍경했고, 소화기는 한쪽에 두었다. 옷이 든 가방은 컴퓨터의 본체가 들어갈 서랍에 두었고, 그외 잡다한 물건이 든 가방은 모퉁이에 처박아두었다. 그 외 생수가 책상 위에 두 병 정도.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치우라고.


나는 배째라는 심정으로 이불 위에 드러누웠다. 고양이도 따라서 내 옆에 누웠다. 살짝 끌어안자 기분이 좋은지 작게 울었다.


10분이라고 했나...? '청소하다가 지쳐서 쓰러졌어'라는 핑계 정도는 있으니까, 조금만 자기로 했다. 내가 약속시간에 늦는 것도 아니고, 약속장소가 여기인 이상 내가 없어서 만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별 일 없겠지.





"...... 먹어치울까, 이 여자."


고양이가 사납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깨어서 눈을 약간 떴다.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방에, 고양이의 눈보다 더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가 내 코앞에 있었다. 달빛은 옆집에 반 정도 가려져서 반 정도 잘린 달이 사람의 뺨과 머리카락을 구분할 정도로 비춰졌다. 그 사람의 코와 내 코 사이의 거리는 약 5cm, 주먹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거리. 그림자 밖에 보이지 않는 그 사람의 약간 거친 숨소리가 들리고, 두꺼운 오리털 너머로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내 어깨 바로 위쪽에 두 손이 놓여있었고, 다리는 내 허벅지 옆에 놓여있었다.


"꺄... 웁?"


화들짝 놀라서 소리지르려 할때... 그러니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을 때 그 누군가는 손으로 내 입을 눌러 나를 조용히 만들었다.


어쨌든 위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서 벗어나려 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양 팔로 상대의 배를 두들기고, 몸을 비틀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몸을 들썩거리면서도 손을 놓지는 않았다.


"좀 그만하고, 5분 전 상황을 생각해봐."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상황을 이해하기까지 3초. 김민혁은 내 집으로 온다고 했고, 나는 정리를 하고 배째라는 심정으로 드러누워 자버린 것이다.


"자, 손 뗄게. 소리치지마. 소리치면 진짜로 먹어버린다?"


맨 처음에는 겁을 집어먹었다. 어두운 곳에서 가스렌지의 불을 켠 것 처럼 선명한 초록색으로 김민혁의 눈동자가 빛났다.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위협적인 눈동자였다.


상대는 한숨을 쉬며 팔을 뻗어서 불을 켰다. 불이 켜지자 사람의 것으로 보이지 않던 눈동자의 빛은 사라지고, 눈 앞에는 일단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미안해."


일단 사과했다. 오겠다는 사람에게 허락까지 해주고 자버린 나는 어쨌든 잘못한 것이다. 울기까지 했는지 흘러내린 눈물을 닦았다.


"어이... 잠깐만. 이 상황에서 사과하는게 어떤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야?"


고양이는 김민혁을 경계하는 듯이 내 등 뒤에서 고개만 내밀어 보고있었다.


"응?"


"'미안하니까 벗어'라고 해도 할 말 없을 거 아냐."


김민혁이 말했다.


"우... 아..."


그 한 마디에 머리속이 하얗게 되어버렸다. 그런... 뜻으로 한 것은 아니었는데...


"됐어. 벗어준다면 나야 감사하지만."


김민혁이 약간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할 것 같지만, 끝이 약간 떨렸다. 나도 그 말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내가 느껴질 정도로 화끈거렸으니까 확실할거다.


"그런데 무슨 배짱이냐? 남자더러 방에 오라고 해놓고 고양이랑 뻗어 자는건."


김민혁이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하... 하지만...!'


나만 잘못한건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누가 다른 사람 앞에 있으면 당황하는건 당연하잖아?


"알아, 알아. 나도 잘못했어. 미안해. 설마 문 바로앞에 사람 다리가 있을줄은 몰랐지."


김민혁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내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 같았다. 김이 푹 빠져버렸다.


"어쨌든 가자."


김민혁이 그렇게 말하면서 일어났다. 그리고 난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어딜?"


김민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뭐야, 이건'이라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보는 것 같았다. 정말 얼굴에 생각이 드러나보이는 성격인 것 같다.


"내가 놀러온 것 같았냐? 세탁할 것 준비하라고 했잖아."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분명히... 전화로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 먹어치울까, 이 여자."


김민혁이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굳어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이불을 좀 더 내쪽으로 끌어당겼다.


"됐고, 빨랫감이나 챙겨. 여기 세탁기는 고철덩이니까."


"에?"


갑자기 돌변한 김민혁의 태도에 당황했다. 방금전에는 인간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 싫어? 나랑 뒹굴고 싶으면 그러던가?"


"아... 아니. 그건 아니고."


일단 일어섰다. 그리고 신경쓰이는 것이 하나. 약간 부끄럽기는 하지만... 빨랫감을 챙기라는 것을 보니 확실하기는 하지만...


"냄새... 심해?'


"응."


김민혁은 내 물음에 즉답해주었다.


고양이는 김민혁이 이제 안전하다고 판단했는지 좀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그래도 꼬리를 바싹 세우고 있는 것을 보아 꽤 경계하는 것 같았다.




총 방은 여섯개. 각 방당 여섯평 정도 되어보이고, 화장실과 샤워실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책상에 서랍장도 있는데다가 책장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다 허물어져가지만 어쨌든 침대도 있었다. 같은 고시원인데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런 곳도 있다는 것에 놀라버렸다.


"세탁기는 그 복도 끝에 있어. 세제는 세탁기 위에 있고."


김민혁이 알려준대로 어슴푸레한 형광등이 밝히고 있는 복도로 나가서 세탁기를 찾았다.


여기까지 와서 '세탁기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할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람으로서의 생활력이나 섬세함 같은 것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야... 상식적으로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옷 사이에 세제를 같이 넣는건 좀 이해하기 힘들다?"


혼났다. 그리고 내 속에서 뭔가 와지직하고 뜯겨나가는 것 같은 환청이 들렸다.


그런데 김민혁은 그 이상으로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세탁기에 세제를 두 숟가락 넣고, 빨랫감을 넣은 뒤 버튼을 몇 번 조작하는 것으로 끝냈다. 저렇게 간단한데, 나는 집에서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뭐어... 됐으니까 90분정도 있다가 찾아가. 늦으면 누가 가져가. 전에는 여기 살던 사람이라서 쉽게 잡혔지만 너는 일단 외부인이고, 내 빨랫감이라고 하기도 좀 무리가 있고 말야."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지만, 김민혁은 이 일을 가지고 더 놀리지는 않았다.


"처음 써보지?"


약간 지친 모습의 김민혁이 나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지쳐있지만 약간 미소를 띄고있었다.


"응..."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밑천 다 드러났으니까 여기서 더 고집을 부려도 바보소리만 더 들을 뿐이었다.


"나랑 똑같네. 집에 있을때는 나도 빨래만큼은 해본적이 없어서 말이지... 그래도 어떻게 색깔별로 구분하는 건 했다?"


"여기저기 들은게 많아서... 맞게 한 것 같네."


김민혁의 방은 기본적으로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옷걸이도 없고, 책장은 중간의 한 칸도 다 차있지 않았다. 그것도 약간의 소설책과 수필, 소설 작법론 같이 흥미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내년이면 수능을 볼 사람이라면 정신이 나가지 않은 한 이런 책장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 위쪽만 갈아입건데... 등 돌리고 있어줄래?"


김민혁이 가방에서 옷을 꺼내면서 말했다. 김민혁은 이미 등을 돌리고 옷을 반 정도 벗고있었다. 뺨을 맞기라도 한 것 같이 놀라서 휙 몸을 돌렸다. 놀라서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핏 보였던 등허리 부분이 뇌리에 남았다. 굉장히 예리해보이는 상처가 넷 정도 손바닥만한 크기로 나 있었다.


그리고 정면을 보고있자 책상 모퉁이에 있는 약간의 파란색 돈뭉치가 보였다. 내가 가진 돈보다 적은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손이 뻗어나갔다가 이성적으로 막았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초조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달 생활비가 막막하다고 생각한 시점에서 손이 나가려 했다. 그것도 손을 뻗은 것은 아니고, 나갈 것 같이 반응했기에 놀라서 그만둔 것이다. 그리 죄가 될 것은 아닐 것이다.


"아, 그리고 책상 위에 보면 노트북 이외에 만원지폐 열 장이 있을거야."


알고있었다. 몇 초 전부터 계속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가져가. 네 거야."


솔직히 말하면, 가져가고 싶었다. '고마워'라고 한 마디 해놓고 가져간다...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러기에는 내 얼마남지 않은 자존심이 자기어필을 좀 심하게 했다.


"동정... 이야?"


김민혁이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잠시 멈췄다.


"연민(憐愍)이라고 해둘게. 그것도 싫으면 호의(好意). 그것도 싫다고 하면... 나중에 갚아. 이자는 1년에 7%. 사채치고는 꽤 싼거고, 1만원 이하의 이자는 받지 않을게."


어떻게 해서든 가져가게 하고싶은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말 없이 주머니의 지갑을 열어서 지폐를 넣었다. 김민혁도 자신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며칠동안 안 씻었지?"


김민혁은 허리를 쭉 이완시키며 말했다. 나는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열쇠. 방 열쇠는 하나뿐이니까 내가 들어올 수는 없어. 잠그고 나갈테니까 좋을대로 씻어. 그리고 나면 열어놓고. 내가 내 방에 못 들어오면 정말 슬퍼질거야."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열쇠를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문고리를 크게 소리나게 잠그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 외에 궁금한건?"


궁금한 것... 이라고 하면 쌓일대로 쌓였다. 하지만 김민혁도 나도 지쳐있으니까 하나만 물어보기로 했다.


"왜... 도와주는거야?"


김민혁은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하려든 듯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침대에 앉아있는 나를 쳐다보았다.


"글쎄... 싫어? 싫으면 그만 둘게."


"싫은건 아니야. 그저... 이해할수가 없어서."


김민혁은 그 말에 또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감한 것 같은 웃음을 지었다.


"첫번째로, 미래에 대한 투자야. 네가 크게 되었을 때 나를 잊지는 않았을 거 아냐?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이 구질구질한 생활에서 약간이라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


...... 순식간에 속물이라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현실적이고, 적어도 거짓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두번째는 나도 최근에 대화를 해본 사람이 거의 없어서 말야. 교회에 가봤자 다들 불쌍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 뿐이지. 대화상대가 필요했어. 그게 두번째 이유고..."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김민혁은 대화상대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게 나든, 다른 사람이든 별로 상관 없었다는 것 같다.


"세번째는... 너도 잘 알아둬. 사람이라는 생물은 말야, 자신이 있고 타인이 있는게 아니라, 타인이 있기에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거야."


"무슨 소리야?"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한 달 정도 거의 누구와도 말하지 않으면 알게돼.


만약 온 세상에 인간이 자신 혼자라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할 필요가 없지? 그렇게 되면 '타인'이라는 개념도 '자신'이라는 개념도 무의미해. 그런데 이 세상에는 60억보다 조금 더 많은 사람이 있거든? 그러니까 '자신'이라는 개념이 성립하려면 그에 반대되는 '타인'이라는 개념이 필요하다는거야.


음... 물을 생각하면 편하지. 물 한 덩이는 구분할 필요도 방법도 없지만, 떨어지는 물방울은 구분되지? 그것과 마찬가지.


즉... 요는, 너무 타인을 멀리하다 보면 자신이 붕괴할 위험이 있다는거지. 타인과 관계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요라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너와 관계되는 것을 선택했다는 거지.


더 쉽게 말하자면, 그냥 대화상대가 필요했어."


...... 뭔가 엄청나게 철학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어쨌든 자기방어의 수단으로 나를 도와주었다는 것 같다.


"그리고 네번째는... 됐어. 나중에 말해줄게."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며 나갔다. 뭔가 폭풍 비슷한 것이 휘몰아쳤다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느긋하게 씻기로 했다.





Day 5.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약간 눈을 뜨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며 힘겹게 눈을 떴다. 다 뜨고보니 물을 많이 먹은 것도 아닌데 눈이 부어있었다.


고양이는 내 침대의 옆에 누워서 기분이 좋아보이는 표정으로 목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정말 기분좋게 침대위에서 자는 것이 꼭 사람...


잠깐, 침대?


그 상황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침대. 그러니까 일어나고 나니까 침대의 위, 라는 것이다. 딱딱한 고시원의 방바닥이 아니라 제대로 된 침대였다. 그러니까 이 며칠간의 일은 전부 다 꿈이고, 일어난 나는 이제 학교에 갈 준비를...


"일어났냐?"


김민혁이 굉장히 피곤해보이는 목소리로 내 환상을 무참히 깨트렸다. 한 순간에 들떠있던 마음이 착 가라앉다 못해 지구의 내핵과 키스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상황을 이해하기까지 10초정도.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1. 내 방이 아니다.
2. 어제 김민혁이 했던 말 중 거슬리는 말이 좀 많이 있다.
3. 일어나보니 다른 남자와 같은 방에 있다.



아, 그러니까 즉...


"나... 굉- 장히 널 도와준걸 후회하고 있거든...?"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김민혁을 바라보다가 내 멋대로 놀라버렸다.


"누가 샤워하라고 했지 멋대로 침대에 뻗어서 자라고 했냐."


"아?"


그리고 가장 최근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샤워를 하고, 문의 고리를 돌려서 잠긴 문을 열다가 고양이가 문을 긁고 있기에 들어오게 해 주었다. 김민혁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해야겠고, 빨랫감도 있으니까 고양이랑 놀까, 하는 생각으로 침대에 앉았었다. 그리고...

에...  화낼만 했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 미안해."


김민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노트북을 쓰고있었는지 방안을 신경질적으로 울리던 키보드의 스프링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일단은 당부해둘게. 제발 부탁이니까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말아줘. 한 번만 더 시험했다가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먹어버릴거야."


할 말이 없었다. 선정적인 말이고, 매너고 뭐고 없는 저속한 말인데... 잘못한 사람이 나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깨우면 됐잖아?"


생각한대로 입에 담고 보니 그럴듯했다. 애초에 김민혁이 깨우면 될 일이 아니었나?


그랬는데... 그것이 김민혁의 신경을 거슬렀는지 키보드의 소리가 뚝 멈췄다. 뒷모습으로 보기에 김민혁의 광대뼈부근이 굉장히 두드러져 있었다. 이를 갈고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뒷모습에서 나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다.


"경고는 분명히 했을텐데?"


"에?"


김민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의 일부는 이미 화가 끝까지 치솟았는지 경련하고 있었고, 고양이는 털을 곤두세웠다. 나는 반사적으로 피하기 위해 방패삼아 이불을 걷어올렸다.


"너... 내가 남자라는 자각은 있어?"


"응... 왜 그래?"


김민혁은 이 이후로 들리지 않는 소리만을 중얼거렸다. 너무 화가나서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럼 '고의적 의사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옆에 누울게?"


김민혁은 화내고 있었다. 고양이는 굉장히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세를 낮게 취하고 있었다. 김민혁이 조금만 더 다가서면 물 것 같은 기세였다. 그래도 이미 침대까지 30cm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점점 이불을 머리 위로 걷어올렸다. 내가, 내가 뭘 잘못한거야...?


그러던 중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라면 느껴졌을 감촉 대신 약간 텁텁한 이불의 감촉이 있었다.


"설마..."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누르고 안쪽을 보았다. 형광등의 불빛때문에 다행히도 분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저항을 포기했다.


인정할 수도 있었다. 간만에 씻어서 머리 속까지 녹아내린 것 같이 흐물흐물해졌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옷을 안 입고 자는건 좀 심했다. 아무리 평소에 습관대로 옷을 안 입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방이니까 보통 알게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나는 그 상태로 고양이랑 놀려고 했다는 건가?


"알았으면 옷이나 입어. 나가있을테니까."


김민혁은 눈을 오른손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하룻밤새에 다크서클의 색이 짙어져 있었다.


굉장히 미안해졌다. 돈도 받은데다가 집도 쓰게해줬고, 빨래도 대신 해주었고, 잠까지 방해받아버렸다. 그런데 욕설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보통이라면... 그 상황에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욕구대로 움직이는 것이 남자라고 알고있었는데.


고양이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꼬리를 휘휘 저으면서 자신만만하게 김민혁이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째 고양이나 나나 지능이 비슷한 것 같았다.





"아 ... 그래서... 뭐였지. 일어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려고 했는데."


김민혁을 따라 아침 8시의 거리를 걷고있었다. 김민혁은 잠을 주체할 수 없는지 가끔씩 뒷머리를 오른손으로 두드렸다. 그때마다 미안해져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니까..."


김민혁은 말을 하다말고 얼굴에 손을 얹었다. 뭔가 좌절한 것 같았다.


"아, 맞아. 핸드폰."


김민혁은 간신히 기억해내서 말했다.


"핸드폰이 왜?"


"고의는 아니었어, 일단. 핸드폰을 충전시키려고 하니까 전원이 멋대로 들어오더라고. 그리고 노트북이 다 켜질때쯤 되니까 전화가 한 통 왔어."


그래서 받았다는 건가?


"너를 깨우려고 했는데... 핸드폰으로 머리를 때려도 너 안 일어나더라?"


김민혁은 내가 오히려 자극을 받자 몸을 휙 돌려버렸다고 했다. ...... 꽤 큰일이었다. 조선시대였으면 시집도 가지 못 할 정도로.


"일단 무시하고 뒀는데 10분 간격으로 계속 오더라고. 그래서... 미안. 받아버렸어."


딱히 사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일테니까, 받아서 뭐라고 하던 사과할 일은 아닌 것이다.


"누구였는데?"


일단 궁금했기에 물어보았다.


"첫번째는 '선생님'이라고 등록되어 있었고, 두번째는 '신민아', 세번째가... 누구더라? 어쨌든 반 아이들마다 다 한 번씩은 전화온 것 같았어."


대인관계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김민혁이 말하는 것은 횟수일 뿐으로, 아마 밤새도록 전화가 왔다는 것을 과장한 것 같았다.


"내가 받은 것은 네 담임선생님이라는 분이었는데."


순간 뭔가 이용할 수 있어보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노리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번째로 아직 학교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니까 빚쟁이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쪽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가.


두번째로 담임은 법과 사회를 가르치는 사람이나까 법학에도 정통해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먼저 내가 받으니까 굉장히 당황했어. 말도 제대로 못하더라. 남자라는게 그렇게 쇼크였나?


어쨌든 나는 안 놀라게 하려고 보호자라고 둘러댔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며 전봇대에 설치된 무료신문 가판대에 꽃혀있던 신문 두 부를 집어들었다. 나는 김민혁이 전해주는 신문을 한 손에 접어들고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네 선생님은 나를 꽤 의심하더라고. 일단 남자랑 여자니까 그런것도 당연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파서 자고 있으니까 깨어나면 알려주겠다고 둘러댔어."


뭐... 실로 간단하디 간단한 이야기였다. 보호자가 있는 척 했다는 것인데... 솔직히 쓸데없지 않나?


"그리고 여기 핸드폰. 충전 끝나서 전원 꺼뒀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는 받아서 일단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전화해둬. 물론 학교를 다니는 것은 무리겠지만,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 지금이면 출근했을 테니까 해보는게 어때?"


그래도 사람 앞이고, 무시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건...


"알았어."


어쨌든 빚이 있는 사람이 권하는 것이다. 그리 나쁜 일은 권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고. 또 분명히 내가 까먹을 것 같기에 일단 전화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지은이니?]


"네 . 전화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솔직히말해 가슴이 아프다. 이 곳에 오기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할수록 죽고싶어지는 기분이다. 김민혁도 중학교때의 일을 기억나게 하니까 되도록이면 만나고싶지 않다는 것이 본심이다.


[응. 지금 현재 상황이라도 잘 알아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와줘? 뭘? 돈이라도 쥐어줄 생각인가?


"지금 이리저리 다니고 있어요."


다 듣기에는 내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김민혁은 하늘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하품을 했다.


[먹을건 잘 먹고?]


"연비가 좋아서 괜찮아요."


그러고보면 거의 먹지 않았다. 배고프지 않았던데다가 배가 고플 정도로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어제도 하루종일 라면 하나 정도로 버틴데다가, 그 전날에도 봉지라면을 부숴먹은 것 만으로 끼니를 전부 때웠다.


[일단 만나자. 밥 사줄테니까,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응?]


"아... 그게..."


어떻게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일단 내게 뾰족한 방법이 있는것도 아니니까 옆에 있는 사람에게 묻기로 했다.


"선생님이 밥 사준다는데... 어쩌지?"


전화기의 송신부분을 엄지손가락을 꽉 누르고 말했다.


"잘됐네. 밥 한끼에 5000원 정도니까 돈 굳었네. 가시방석 같겠지만... 잘 해봐."


현실적으로 실속이 있는 것이기는 한데...


"알겠습니다. 오늘 찾아뵐까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오늘 일자리가 잡히지만 않는다면 나야 잃을 것은 없다. 썩어나는 것이 시간이니까.


[그럼... 알았어. 학교 끝나고 전화할게, 근처에 와 있어줄래?]


"네. 그럼 학교 끝나고 뵐게요."


안개가 서서히 걷히더니 해가 뜨려고 하고있었다.


"자. 여기까지 왔으니까 혼자갈 수 있지?"


김민혁이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어느새 앞을 보자 집이 눈앞에 있었다.


오면서도 몰랐는데, 김민혁은 어느새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있었던 것 같다.




연락은 분명히 왔다. 피시방, 당구장, 유흥주점, 룸살롱, 나이트클럽 등.


그리고 전부 다 거절당했다. 고시원에 사는데다가 부모도 없다고 하고, 거기에다가 미성년자라고 하면 그대로 끊어버리는 곳도 많았다. 면접을 보러 간 적도 있지만 시급을 최저임금의 절반으로 준다는 말에 그만두었다. 나도 배가 부른 것 같지만,... 왠지 모르게 좀 위험해보이는 피시방이었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고양이랑 놀고있는 것이다.


길가에서 주운 테니스공인데, 책상 위에서 굴리면 고양이는 좋아라하면서 공을 잡으러 간다. 그리고 힘겹게 물어서 내게 돌려준다. 무슨 개도 아니고, 주인이 던진것을 물어오는 것은 전혀 고양이답지 않다. 설마 주인이 아니라서 이러나?


느낀것이 있다면, 일이라는 것은 인간 생활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펑펑 놀면 좋겠지만, 목적의식도 없이 시간이 무한정 있어봐야 따분할 뿐이다. 이제야 평생 놀고먹을 돈이 있는 사람(빌게이츠 라던가)들이 왜 일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따분했다. 시간을 때우고 싶어도 혼자 놀 수 있는 건 다 한 것 같았다.


시간은 대략 세 시 정도. 지금쯤이면 김민혁도 일어났을 거고, 고맙다는 인사로 뭔가 사들고 가는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여보세요.]


...... 누구?


"아... 양지은인데. 김민혁 맞지?"


[어어. 그래. 너 때문에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잔 김민혁이다. 뭔 일이야?]


목소리가 질량이 느껴질 정도로 굵었다. 그리고 힘없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침에 만났던 누군가를 연상하기에는 너무나 괴리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진짜... 김민혁 맞지?"


[콜록. 맞다니까 . 그게 용건이면 끊는다?]


방금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자. 응. 그게 정신건강에 좋을 것 같았다.


"아 ... 그러니까, 어제 도와줘서 고맙다고. 인사 제대로 못했잖아."


내가 말하는 사이 김민혁은 몇 번인가 기침을 했다.


[어어 . 그래. 일자리는... 없지?]


그러자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일이 읐는 것인지.


"응... 없더라고."


자연스럽게 힘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고양이는 앞서가다가 내 힘없는 목소리에 놀란 것인지 뒤를 휙 돌려보았다.


[그럴거다. 인터넷으로도 찾아봤지?]


"인터넷?"


인터넷에서 일자리라니? 웹사이트를 만든다거나, 디자인 해주는 걸로 돈을 받는 건가?


[...... 너, 몇살이세요?]


"일단은 18살이고... 곧 19살 되는데..."


아니면... 성인사이트?


김민혁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왜 인터넷으로 찾아볼 생각은 안 하냐. 구인 구직광고 올려놓는 사이트도 많은데.]


아. 그렇구나.


"몰랐어."


[....... 말하기 전의 공백이 신경쓰이는데. 야한생각 한 거 아냐?]


귀... 귀신이다, 이 녀석. 진짜 날카롭다. 송곳보다 약간 못할 정도로.


[진짜냐...]


뜨끔하는 마음에 대답하지 못하니 김민혁의 굳히기가 들어왔다. 이미지가 상당히 무너져내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냐아냐. 그럴리가."


[뭐, 됐고. 그 근처에 800원에 한시간 주는 피시방 있을거야. 800원 내고 들어가서, 아무 포털사이트나 들어가서 구인구직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봐.


근데 3시 20분이네. 곧 학교 끝날 것 같은데.]


"가고있어."


[응 . 난 좀 더 잘란다. 앞으로 빨래는 그 근처에 세탁소 있으니까 거기서 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기를 끊어버렸다. 김민혁의 말에 아침의 일이 생각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양이는 빨갛게 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린 후 계속 앞서나갔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냥 멍하니 선생님을 기다리기도 뭐해서 학교 주변에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 뒤에는 고양이를 달고.


믿거나 말거나 이 고양이는 다른 고양이처럼 보이지 않았다. 저 꼬리라거나, 코의 모양새는 아무리 보아도 같은 고양이였다. 믿고싶지는 않지만. 그것만 빼면 나름 귀여웠다.


가만히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꼬리를 밟으면 발이 떼이기도 전에 밟은 사람의 발목을 무는 것이라거나, 꼬마들이 우르르 달려가면 귀를 세우고 바라보다가 다시 별 일이 없으면 몸을 둥글게 말고 하품하는 것이나, 내가 쿡쿡 찌르면 기분 좋다는 듯이 구르는 것이나, 가끔씩 앉으면 뛰어서 내 무릎에 누워있는 것이라거나, 길을 걸을때도 휘적휘적 흔들리는 꼬리라거나. 그래도 꼬리를 잡으면 성질냈지만.


일단 네 시 정도에 학교가 끝날 시간에 맞춰서 학교 근처까지 왔다. 그리고 닥치는대로 가게들을 모두 다 들어가서 알바자리를 구하고 다녔다. 일단 연락처를 남긴 곳은 20군데 정도. 역에서 가까우니까 신림동에서도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과 연락이 된 것은 여섯시 정도였다. 나는 몰랐는데, 학교에서 오늘 사설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었다고 한다. 약간, 가슴 한 구석이 아파왔다. 전 같으면 수학 몇 문제로 울고 웃었을테지만, 지금은 이제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


중간중간에 아는 사람들과도 마주쳤다. 같은 반 회장을 만나서 혼자 살고있다고 알려주고, 옆자리에 앉았던 친구와 만나서 학교에 던져두고 온 교과서는 없으면 멋대로 써도 좋다고 말해두었다. 1학년때부터 알고지내던 친구는 가끔씩 얼굴은 비치라고 성질냈고, 사회선생님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외에는 내가 학교에 안 갔는지 갔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리 튀는 사람도 아니었고, 베푼것도 없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지은이니?"


벤치에 앉아서 고양이가 근처에 굴러다니던 테니스공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고있으려니 선생님이 오셨다.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은 처음에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무리도 아니지. 2학기 들어오고 나서는 계속 머리를 묶고 있었으니까 머리를 푼 모습은 6개월 만일 것이다.




"일단... 그래. 밥 안 먹었지?"


...... 연비가 좋아서 배가 안 고프다는 소리는 죽어도 못하겠는데.


"네에."


"가자. 일단 뭐라도 먹어야지."


"네 ."


내 뒤를 쫓아오는 고양이처럼 나도 선생님의 뒤를 따라갔다.


뒷모습 뿐이지만, 선생님은 굉장히 화사했다. 흰색 상의에 분홍색 스커트. 거기에 두꺼운 파란색 외투를 입고 핸드백을 들고있었다. 분명 보통의 선생님이었다. 아침시간에 들어와서 조는 사람들을 깨우던 그 선생님이고, 청소 시간에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하게 검사하던 그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기에는 남 부러울 것 없이 성공해서 떳떳하게 다니는 그 모습이 너무 화사해보였다. 내가 가질 수 없는 미래니까 이렇게 보이는걸까.


"집은 어떻게 했니?"


선생님은 나란히 걸으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고양이는 대신 답하기라도 할 생각인지 약간 시끄럽게 울었지만 선생님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신림동에 고시원을 하나 잡았어요."


이 이야기 전에 하지 않았나?


"그래... 그렇구나 .


좋아하는 음식은 뭐 있어?"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어요."


얻어먹는 입장이니까. 뭐, 가장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피자라던가가 가장 좋은데.


"아, 그리고 어제 전화받은 사람은 누구니? 아는 사람이야?"


갑자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질문이 왔다. 아. 뭐라고 대답하지?


"그게..."


친척은 곤란했다. 빚을 진 사람 중에 친척도 많았다. 부모님...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린데다가 전에 부모들이 날 버리고 간 것을 말했으니까 글렀고.


"누굴까요?"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대놓고 '친구요!'라고 했다가는 '남자친구?' 이렇게 오해받는건 사양이다. 애초에 며칠 전 까지만 해도 뇌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고.


어쨌든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 등으로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그렇게 되물었다.


"음... 친척이니?"


"네에."


...... 난 틀린 말 안했어.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서 사돈에 팔촌까지 따지면 남이 없다고도 하고(그런식으로 치면 누가 남이 있겠느냐마는)... 결국 남은 아니지. 응. 아마.


그런데 이 고양이가 내 발목을 콱 물었다. 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지.





결국 향한 곳은 피자가게. 학교 근처라서 그런지 맛있어보이는 곳은 거의 없는데다가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곳도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고양이는 따뜻하게 볕이 드는 창가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느긋하게 하품을 했다. 크리스마스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꽤 추울 것이라고 보지만... 일단 동물이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님 말고. 내가 주인도 아니니까 별로 상관 없지 않을까. 없으면 조금 슬퍼지기는 하겠지만 그뿐인 시시한 이야기였다.


대충 맛있어보이는(그리고 싸 보이는) 것으로 주문을 한 뒤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일단 끌고온 사람은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이쯤되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자, 그럼 이제 차분하게 현재 상황을 말해줄래?"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전에도 대충 설명하지 않았나 싶지만, 썩어나는 것이 시간이고, 아까전부터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오늘도 글러먹은 것 같으니 이쪽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설명해볼까. 시간은 많고, 말할 내용은 한시간 정도. 서로 양해는 구했으니 내가 신경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그냥 편하게 해, 편하게."


.....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이런 상황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편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저는 못하겠는데요.


라고 내뱉을 수는 없다. 미치지 않고서야.


한참을 더 머뭇거렸다. 사업 초기의 이야기부터 하기에는 너무 길고, 중간에 자르려고 해도 그게 또 쉽지가 않다. 논술이나 구술같은거 했으면 나 큰일날 뻔 했네.


"현재 상황만 말씀드릴게요.


신림동에 있는 고시촌에 방을 잡고 살고있고요, 집에있던 물건들 중에서 쓸만한 것은 거의 다 집어와서 당장 사는데에는 불편한 것이 없어요. 다만... 일자리가 없으니까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죠."


뭐, 선생님이 물어보신 내용은 이거다. 이유가 어쨌는가는 묻지 않았으니까, 음. 나름 만족해버렸다.


"그래...? 그럼 사촌이 고시원에 살고있는 거야?"


"네..."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버렸다. 번복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긍정해버렸다.


"무슨 일을 하시는데?"


아마 이때 만큼 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 적도 드물 것이다.


'고시원  고시  직업  고시생'


"고시 준비중이세요."


평범하디 평범한 대화인데 굉장히 스릴넘쳤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두꺼운 오리털 옷을 입고 온 것을 후회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피자를 먹으면 위가 아니라 식도에서 막혀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그럼 왜 이렇게 된건지 설명해줄래?"


배경음악이라고 깔아놓은 음악이 너무 밝은 느낌이어서 좀 짜증이 났다. 아마 다른 음악이어도 딱히 마음에 들 것 같지는 않지만.


다 귀찮아졌다. 이런다고 뭔가 뾰족한 수가 나올리는 없었다. 2억이라는 숫자는 0만 여덟개가 붙는 괴물같은 숫자니까. 아니, 애초에 7번째 이하의 자리는 버린 숫자니까 실제로는 더 큰 숫자일 것이다.


"부모님 사업이 망했고, 2억이나 되는 돈을 떼이게 된 빚쟁이들은 파산신청 정도로 넘어가주지 않는다는 거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2억으로 줄인것도 대단한 것이다. 사채까지 끌어썼으니까 적자가 14억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떻게... 친척분들은 못 도와준다고 하시고?"


"예에. 친척분들께도 1억정도 빌린 것이 있으니까요. 그리 형편이 좋은 분들도 아닌데 애써서 도와주셨더니 말아먹은거죠. 오히려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렸어요."


내 말을 듣고 선생님께서는 푹 한숨을 쉬셨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빨간색 줄무늬의 정장을 입은 종업원이 피자판을 내려주었다. 선생님과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래도 학교는 나와야 하지 않겠니? 일단 직장도 다녀야 하고..."


"저도 다닐 수 있다면 다니고 싶어요. 학교 안에서 당당하게 행패를 부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학교에서 만큼은 안전하겠죠. 하지만 집에서는요? 학교에 올 때는요?"


선생님도 나도 말이 없었다. 나는 말없이 피식 웃고는 그릇을 선생님 앞에 하나 놓고 내 앞에 하나 놓았다. 일단 피자가 왔으니 식기전에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아마 굶어죽거나 이리저리 팔려다니겠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나는 선생님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과 나는 근본적으로 타인이니까, 도울 수 없다면 무시해'라고.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공지 [필독]게시판 공지사항입니다. 현이 2008.05.19 22551
182 마왕 카론텔레스트(6)리치 ... 고양이대형 2009.09.02 1861
181 라안비카 part-1 [역사가의... 암현 2009.09.01 1743
180 라안비카 part 1[역사가의 ... 암현 2009.08.28 1986
179 마왕 카론텔레스트(5)마왕... 고양이대형 2009.08.24 1865
178 괴물 - Ep 1. It's just be... 투명인간 2009.08.22 1908
177 마왕 카론텔레스트(4)마왕... 고양이대형 2009.08.21 1915
176 단편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못... K.kun 2009.08.21 3306
175 마왕 카론텔레스트(3)오늘... 고양이대형 2009.08.14 2156
174 마왕 카론텔레스트(2)여기... 고양이대형 2009.08.12 2025
173 마왕 카론텔레스트(1)일상 고양이대형 2009.08.10 1740
172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End 2~ 투명인간 2009.08.09 3071
171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End 1~ 투명인간 2009.08.09 2910
170 마왕 카론텔레스트-(프롤로그) 고양이대형 2009.08.08 2082
169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Last par... 투명인간 2009.08.03 3028
168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Last par... 투명인간 2009.08.03 3023
167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Last par... 투명인간 2009.08.03 2947
166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middle p... 투명인간 2009.07.30 2959
165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middle p... 투명인간 2009.07.30 2882
164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Front pa... 투명인간 2009.07.27 3051
» 단편 고양이가 울었다 ~Front pa... 투명인간 2009.07.27 295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16 Nex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