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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09.07.03 00:39

[단편] 조각난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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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계절 특집 단편]


이건 내가 고등학교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고향인 영국 런던으로 급한 일이 생겨 잠시 돌아갔을 때 나는 어머니의 동생인 지하 이모에게 맡겨졌다.

어머니와 지하 이모가 늘 만날 때면 웃으며 만났다가 화를 내고 헤어진다. 그건 마치 신이 정한 절대적 규칙과도 같았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어서인지(두 사람 모두 고아였다.) 싸움 후에는 화해를 하지 않아도 늘 웃으면서 다시 만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신기하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싸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울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내가 옆에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싸우지 않는 규칙을 만들기까지 했었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들었다.

지하 이모는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지독한 독신론자다. 게다가 대단한 애주가(愛酒家)에 애연가(愛煙家)다. 어쩌면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 이상한 종류의 약까지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할 정도로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처럼 조신한 사람과 한 핏줄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모가 살고 있는 집의 2층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고 있자면 두 사람은 틀림없이 한 가족이라는 확신이 든다. 어머니 역시 대단한 책벌레였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나 역시 책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에도, 대학교를 입학하는 날에도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이모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 사실 이러한 사실이 썩 싫지는 않다. 원래 2층 서양식 주택에 살고 있었던 이모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소유하고 있던 책들을 자신에게 줘버리자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워 집을 개조했다. 내가 예전에 살던 집에 모든 짐들을 갖다놓은 다음 2층은 개인 소유의 도서관, 1층은 지하 이모의 본업인 미술품들을 걸어놓을 수 있는 화랑으로 리모델링했다. 그리고 뒤뜰을 없애고 거기에는 자신이 쓸 작업실과 거주 공간을 마련했다. 내가 생활하는 방도 그곳에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고등학교 1학년. 1년 정도 이모와 함께 생활을 하다 보니 나는 저절로 조수가 되어 도서관 책들을 정리하거나 찾아온 손님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일들이 점차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가던 어느 날, 이모의 개인 도서관에 두 여성이 찾아왔다.

나는 아버지와의 전화 상담 끝에 방학 중에는 학교 수업에 참가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맡았기 때문에 다른 애들과 달리 집에서 이모에게 보충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그날은 특히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던 무더운 날이었다. 실내는 항상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인간이 살고 있는 거주 공간은 찜통이나 다름없다. 이건 설계상의 미스가 분명했지만 이모는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

“인간은 책보다 강하잖아?”

이런 씨도 먹히지 않을 핑계거리를 대는 이모에게 반항할 기력조차 없었던 날, 도서관을 방문한 두 사람은 딱 봐도 대기업의 중축을 담당하고 있을 법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캐리어 우먼들이었고 1층의 화랑을 한 번 둘러본 그녀들은 갑자기 이모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잠깐 땀이나 식히자고 화랑을 배회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참았어야 했다. 그랬으면 그런 가슴 아픈 일은 겪지 않았을 텐데.

이모는 지하실에 있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이모의 철칙 중 하나는 설령 안에서 죽어가는 신음이 흘러나와도 작업은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 사람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바쁠 텐데도 두 사람은 상관으로 짐작되는 사람의 이름을 짜증난다는 투로 말하면서 오늘 꼭 만나야하니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둘을 2층 도서관에 있는 커피 테이블로 안내했다. 1층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고 거주공간에는 외부 손님을 들이지 않는 것 또한 이모의 철칙 중 하나다. 그들을 2층으로 안내한 다음 나는 부엌으로 내려가 커피 두 잔을 탔다. 이건 이모가 만든 규칙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손님들을 기다리게 한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갔다 줬다.

기다리는 손님들이라……. 이모의 그림은 내가 이해할 수는 없는 종류지만 사회에서 꽤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특히 사회 고위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기에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종류는 옆집 사람부터 외국에서 온 고관까지 꽤 다양하다. 하지만 이모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만나자고 말한 사람들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기다려야 했다.

커피와 집에 있는 과자들을 가져주고 오전에 다녀간 아이들이 어질러놓은 아동 도서를 정리하고 있을 때 본의 아니게 두 여자의 대화를 엿듣고 말았다.

“아아. 그때 생각하면 정말로 끔찍했어. 술김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설마 임신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그러니까…… 10년 전이었나?”

“벌써 그렇게 됐어? 세월 참 빨리 가네.”

“그러게. 우린 벌써 이렇게 쭈글쭈글 늙어버렸어.”

“아하핫. 늙은 건 너겠지. 난 아직 탱탱하다고. 아직도 나이트에 가면 현역이야.”

“기가 차서 웃음도 안 나온다. 거울 좀 보시지 그래?”

“안 돼. 거울을 보면 눈부셔서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단 말이야. 호호호. 그나저나 그때 아이를 낳았으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

10년 전. 나는 책을 정리하면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10년 전에 아이를 지웠구나. 가끔 책상에 앉아 그날의 기억을 되살릴 때면 난 낙태를 했다는 말을 저리도 쉽게 꺼내는 여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무척 화가 났다. 부모님 두 분에게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넘치는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살인’을 해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여자에게 인간적으로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모는 화랑의 문을 닫는 오후 6시까지도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고 두 사람은 한껏 수다만 떨다가 시간이 되자 나에게 연락처가 담긴 명함을 주고 회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나고 내가 저녁밥을 준비할 때 이모가 부엌에 초췌한 눈으로 나타났다.

“으으으으. 물…….”

“수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세요? 자, 여기 있습니다.”

“어우. 괜찮아. 와― 역시 시원해.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냉장고에 있던 차가운 물을 마시고 나서야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이모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내가 만들고 있는 찌게요리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오늘 저녁밥도 푸짐한 거 같아. 럭키! 좋아좋아. 내가 매일 밥을 먹을 때면 네가 이곳으로 온 게 하늘의 뜻이라는 걸 느끼고 있어. 신은 날 버리지 않았다니까.”

“하아. 그러시겠죠. 그런데 이모. 오후에 손님이 오셨어요.”

“응? 아, 손님?”

미리 꺼내놓은 반찬을 젓가락으로 뒤적거리던 이모는 김치를 한 조각 입에 넣은 다음 내게 손을 내밀었다. “밥!” “여기요.” “생큐! 그리고 손님은 알고 있어. 그래서 나오지 않은 거야. 할 것도 없는 아래에서 심심해 죽는 줄 알았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계셨어요?”

“응. 화장실 가다가 발견했지. 만나기 싫어서 그냥 작업실에서 자고 있었어.”

“……여기 명함이요.”

“음. 어? 회장님이 보낸 사람들이구나. 기왕이면 직접 올 것이지. 뭐가 바쁘다고 그런 질 나쁜 사람들을 보내는 거야. 자, 명함 도로 갖고 있어. 만지는 것도 싫다.”

나는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질이 나쁜 사람들이요?”

“응. 두 사람 다 풍기는 분위기가 기분 나빴어.”

나는 이모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어머니는 무당이셨다. 그리고 일찍 돌아가신 외할머니도 무당이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모에게도 신기(神氣)같은 게 있었다. 가령 일기예보처럼 오늘의 날씨를 맞춘다거나 사회에서 커다랗게 다뤄지는 사건들을 미리 예견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관상을 봐주기도 했다. 그 능력으로 주식투자를 했으면 지금쯤 엄청난 부자가 됐을 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깝군.

그때 나는 이모가 말한 분위기 때문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있죠. 그 사람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어요.”

다 말했다. 아동 서적들을 정리하다가 들은 말. 보이지 않는 두 개의 책장 너머에서 나도 모르게 끝까지 엿들어버린 대화를 말했다. 그러자 이모는 내가 떠온 찌게를 먹다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후후. 나쁜 아이네. 남의 사생활이나 엿듣고.”

“윽.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서 네가 진짜 신경 쓰는 건 뭔데?”

“낙태는 과연 올바른 걸까요?”

이모는 젓가락 끝을 입에 물더니 뚱한 표정을 지었다.

“넌 어떻게 보면 애어른 같아. 요즘 시대 청소년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사람은 각기 나름의 가치관을 지녔으니까 뭐라고 할 수 없는 거겠지. 아참. 2층 도서관에 ‘ㅈ’열 5번째 칸에 『조각난 빛』이라는 책이 있을 거야. 그거 한 번 읽어봐.”

“『조각난 빛』이요?”

“응. 그러고 보니 여름이네. 여름에 읽으면 딱 알맞은 책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먹을 찌게를 국그릇에 퍼서 식탁에 올려놓았다. 고민 상담이 끝나자 이모는 내가 사용한 젓가락과 수저를 미리 놔둔다. 우리는 동시에 말했다. 밥을 먹을 때는 늘 힘차게.

“잘 먹겠습니다!”





『조각난 빛』




째각. 째각. 째각. 째각.

눈을 떴을 때 나는 시멘트 바닥에 까만 원피스 하나만을 걸치고 누워 있었다. 귓가에 울리는 시계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이곳이 대체 어디지? 완전히 낯선 장소. 생전 처음 보는 곳에서 깨어난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다. 도배는 물론 장판도 깔려있지 않아 사방이 회색빛으로 가득한 방으로 온 기억은 없다. 어제 분명 술집에서 만난 부잣집 도련님과 필름이 끊기기 전까지 마신 다음 그의 집까지 갔던 기억은 있다. 그리고 거기서 위스키를 더 마셨다. 위스키의 이름은 싱글톤 오브 글렌 오드(Singleton of glen ord) 35년산. 아아. 그래. 사방에서 머리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숙취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을 봐서 시간은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다.

내 옷은 어디 갔지? 내 가방은? 내 핸드폰은? 내 소지품은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도둑맞은 것일까. 아니면 이건 인신매매? 내가 누구에게 납치당한 거야? 나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면서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시계소리가 들렸는데 시계는 어디 있지?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 뒤에는 아이가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장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까만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아이의 손목에는 눈에 전혀 낯설지가 않는 갈색 가죽시계가 차여져 있었는데 꽤 고급으로 보였다. 방금 전까지 들린 시계는 저 소녀의 것이었나 보다.

나는 소녀의 코앞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다행히 그녀는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잠든 아이의 몸을 흔들었다.

“야. 야. 꼬마야. 일어나봐. 어서.”

내 바람과는 다르게 아이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깨우는 일은 포기하고 까만 커튼으로 걸어갔다. 커튼을 걷으면 분명 창문이 있을 거다. 방을 가로질러 커튼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 나는 있는 힘껏 커튼을 옆으로 걷어냈다.

“하아…….”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창문은 있었다. 하지만 창문 너머가 회색빛 벽으로 꽉 막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잠시 시멘트에 귀를 대고 있어봤다. 소용없다.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다. 다시 방을 가로질러 이번에는 유일하게 짙은 갈색을 지닌 나무문으로 다가간다. 금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져 흉해보이는 손잡이를 붙잡고 돌리려는 데 뒤에서 기침소리가 났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네.

뒤를 돌아보니 아이가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흙먼지로 지저분한 아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주변을 돌아보더니 콩알만큼이나 자그마한 목소리로 엄마를 찾았다.

“엄마 어디 있어……?”

아이도 나와 마찬가지로 난생 처음 보는 공간에 갇히게 된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던 소녀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눈동자가 미치도록 모성애를 자극한다.

“아줌마는 누구세요?”

취소. 갑자기 살인충동이 솟아난다.

“아줌마 아니야. 언니라고 불러. 언니. 나도 마찬가지로 자고 일어나보니 여기더라. 넌 어쩌다가 여기 왔어? 혹시 기억나는 거라도 있어?”

내 질문에 소녀는 땅바닥을 쳐다보면서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를 썼다.

“어, 어 그러니까. 엄마와 같이 있었어요. 어두웠는데 갑자기 빛이 보였어요. 그랬는데, 그러니까 딱딱하고 차가운 게…… 갑자기 몸에 닿아서 깜짝 놀랐는데. 피하려고 애를 썼는데, 엄마가 같이 있었는데도 못 피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아…….”

이런. 갑자기 소녀가 말을 하다가 나를 쳐다본다. 그녀의 얼굴에 점점 어두운 그림자와 동시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지독한 공포가 떠올랐다.

“까아아악!”

양팔로 몸을 부여잡은 소녀는 목청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머리가 깨질듯이 아픈데 아이의 비명까지 들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일단 진정시키는 게 우선인지라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아이를 보듬었다.

“괜찮아. 괜찮아.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래. 그래. 착하지.”

“흑……. 흐흑……. 엄마는 어디 있어요?”

“곧 찾으러 오실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그때까지 언니와 같이 있자.”

“여, 여기서 나가요. 이 방 무척 기분 나빠요.”

간신히 울음을 그친 아이의 얼굴을 옷으로 닦아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 빌어먹을 방에서 나가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아까 돌리려던 손잡이를 잡고 시계 방향으로 조금씩 돌렸다. 행여나 누가 들을까봐 무섭다. 지금 우리를 여기에 가둔 사람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문 밖은 바로 복도로 통했다. 어릴 때 다니던 학교의 복도처럼 나무가 깔린 바닥에는 먼지가 가득했지만 하얀 벽이 칙칙한 잿빛 회색보다는 전체적으로 괜찮았다. 모퉁이마다 거미줄이 쳐져 있었지만 거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미 복도 전체에서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저기, 바닥에 발자국이 없어요.”

소녀의 지적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아이의 말이 맞았다. 바닥에는 분명 먼지가 하얗게 깔려있는데 발자국이 없었다. 도대체 범인은 어떤 방식을 통해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을까.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위를 쳐다봤다. 설마 천장을 걸어오지는 않았겠지?

“일단 가보자. 여기서 조금이라도 빨리 나가고 싶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소녀의 손을 꽉 잡는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소녀의 온기가 더없이 따스하다. 아……. 이 애를 꼭 지켜주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복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방에 갇혀 있었다. 오른쪽은 창문이 있었지만 방과 마찬가지로 창 너머는 벽으로 꽉 막혀있었다. 우리는 더 볼 것도 없이 왼쪽으로 가야만 했다.

벽을 따라 왼쪽으로 계속 걸어간다. 세 번째 코너를 지나서야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버튼을 눌러봤다. 아아. 이것 역시 소용없다. 엘리베이터에는 전원 자체가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낙심하고 있는데 소녀가 내 원피스 자락을 끌어당겼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있어요.”

무슨 소리인가해서 바닥을 쳐다봤더니 정말로 아이의 말대로 바퀴자국이 있었다. 네 개의 바퀴자국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바퀴자국을 따라가기로 했다.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잡은 단서를 가지고 끝까지 추적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시 바퀴자국을 따라 이동했다. 복도를 따라 가면서 몇 개의 문을 발견했지만 문은 대부분 잠겨있었다. 어쩌다가 열리는 문이 있기는 했지만 창문처럼 꽉 막힌 벽이 존재했다. 아무래도 이 층에 방으로 통했던 문은 처음 우리가 있었던 것 밖에 없었다……. 그런 추측을 하기 시작할 때쯤 바퀴자국이 끝났다. 그리고 거기에는 우리가 찾았던 이동식 침대가 있었다. 복도 한 가운데에 완벽하게 박살난 침대의 매트리스를 덮고 있는 천에는 핏자국이 묻어 있었고 우리는 서로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부서진 침대로 다가가 무기로 쓸 만한 부위를 찾았다. 다행히 내가 휘두르기 괜찮을 정도의 길이를 가진 파이프가 있었다. 우습게도 이제야 조금 마음이 놓인다. 소녀는 피가 묻어있는 파이프를 보더니 숨을 헐떡였다.

“그거 꼭 챙겨야 해요?”

“괜찮아. 필요할 지도 모르니까. 넌 내가 꼭 지켜줄 테니 염려 말고. 이래봬도 언니 꽤 강해.”

내가 웃자 그녀도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나는 파이프를 꽉 잡았다. 침착하자. 어른인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우리는 부서진 침대를 지나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소녀의 시계로 5분 정도가 지났다. 복도의 끝은 도무지 보이지가 않는다고 투덜거릴 때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서 소녀에게도 확인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을 감고 청각에 정신을 집중하더니 “아.” 라는 귀여운 탄성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저 너머에서 들려요.”

나도 다음 코너라고 생각했다. 금속 물체로 시멘트 바닥을 긁어대는 듯한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우리는 숨소리보다도 커진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연신 침을 꿀꺽 삼켰다. 코너의 벽에 몸을 바싹 기대고 살짝 고개만 내밀자 문이 보였다. 짙은 갈색 문이 아닌 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옅은 녹색이 칠해진 수술실 문이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온 것은 문 위에 달린 작은 간판에 붉은 빛 불이 켜져 있다는 점이었다. 거기에는 붉은 색으로 ‘수술중’이라는 글씨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나는 소녀에게 여기에서 숨어있으라고 말했다.

“……왜요? 저 버리지 말아요.”

“아니. 버리는 게 아니야.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소리를 지르면 도망가. 알았지? 나도 뒤따라갈게.”

나는 혹시나 버림받을까봐 무서워하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자그마한 소녀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에 두려움마저 잊어버린다. 나는 소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갔다 올게.”

손을 흔들어 소녀에게 인사를 하고 다른 손으로는 파이프를 꽉 움켜쥔다. 저 애만큼은 내가 꼭 지켜주겠어. 서서히, 조금씩, 천천히 문을 향해 다가간다. 바닥을 긁는 소리는 더욱 커졌고 문 앞까지 다가가고 나서야 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나는 살짝 문을 밀었다. 다행히 바닥을 긁는 소리는 멈추지 않은 게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조금 열린 문 안의 세상은 캄캄하고 어두웠다. 바닥을 긁는 소리는 이제 몸에 직접 닿는다. 꽤 가까운 곳에 있는 모양이다. 용기를 내어 문을 더 열어본다. 문을 2/3정도 열었을 때. 나는 동작을 멈췄다. 그건 사람의 발이었다. 피에 젖은 하얀 구두를 신은 사람의 발. 스타킹의 색깔로 보아서 간호사인 듯 싶다. 바닥을 긁는 소리에 맞춰 그녀의 두 발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문을 더 열었다. 틈으로 들어간 빛인 다리를 지나 배로 다가가면서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를 보여줬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를 괴롭혔다. 구역질이 나려고 했지만 애써 참았다. 아직까지도 상대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여기서 망쳐버릴 수는 없다. 그리고― 문을 거의 열었을 때 나는 피로 붉게 물든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를 발견했다. 바닥을 긁는 소리의 범인은 의사가 분명했다. 그는 매스를 잡은 손을 간호사의 배에 집어넣고 같은 장소를 연신 긁어대고 있었다. 오죽이나 긁었으면 시체의 배가 거의 반으로 잘려질 정도였다.

털썩.

“누구냐!”

의사가 이쪽을 돌아봤을 때 나는 비명을 지르는 방법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에게 ‘눈’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의사들이 상처를 봉합할 때 사용하는 실로 꿰매진 눈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문으로 들어간 빛에도 반응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내가 코너에 숨어있으라던 소녀가 바로 뒤에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소녀는 충분히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시체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저, 저 사람이에요. 저, 저를 여기에 데려왔던― 히익!”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핫!”

소녀의 목소리를 들은 남자가 갑자기 허리를 제치면서 미친 듯이 웃었다. 그는 생긴 것과 다르게 평상시에 환자를 대하는 것처럼 매우 상냥한 태도로 말했다.

“거기 있었구나. 드디어 나타났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자, 이리오렴. 수술해야지?”

나는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신! 대체 정체가 뭐지! 도대체 누구야! 우리는 왜 여기에 데려왔지?”

저 사람의 눈을 저렇게 만든 게 누군지 알바 없다. 어차피 이미 미친놈으로 치부한 이상 여기서 나갈 방법만 알아내면 된다. 남자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매스를 앞으로 휘두르며 경계의 태도를 취했다.

“큭. 너는 누구냐! 너도 그 애와 같은 녀석이냐!”

“그렇다면 어쩔건데!”

우리 사이에 흐르던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 멎었다. 남자는 거의 꺼져가던 불씨가 돌풍을 만나 순식간에 산 전체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폭발적으로 우리를 향해 달렸다.

“다 죽여 버리겠어!”

상대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남자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이것으로 끝이야! 부웅! 내가 무엇인가 휘두르는 소리를 들은 남자는 동물적인 반사신경으로 그것을 피해내더니 몸 전체로 나를 밀어냈다. “까악!” 벽까지 밀려 머리를 부딪치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그가 매스를 거꾸로 쥐고 내리친다.

“언니 위험해!”

나도 보고만 있지 않아! 나는 있는 힘껏 상대의 발목을 걷어찼다. 그러자 남자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아아악! 내 다리! 으으으! 이 죽일 놈들이…….”

매스까지 놓친 그는 부러진 발목을 붙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잃어버린 매스를 찾으려고 주변을 더듬거린다. 나도 벽에 부딪쳤던 머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젠장. 미끈거리는 게 아무래도 상처가 난 모양이다. 나는 파이프를 더욱 강하게 잡았다. 죽여 버리겠어.

나는 일부러 남자가 매스를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마침내 그가 매스를 찾았을 때 나는 그의 손을 발로 짓밟았다.

“아아악! 누구야!”

“죽어버려. 이 변태자식.”

퍽! 퍽! 퍽! 퍽! 퍽!

내 머리에 난 상처에서 흘린 피의 곱절에 곱절을 더해 녀석의 머리를 내리친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힘을 쓴 적이 있어나 싶을 정도로 있는 힘껏 내리쳤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버려! 죽…….”

나는 때리던 것을 멈추고 뒤를 쳐다봤다. 그곳에서는 소녀가 울고 있었다. “언니, 그만 됐어요. 그만 울어요. 이제 괜찮아요. 흑흑.” 나 역시 울고 있었다. 도대체 우리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지. 나는 차가운 파이프를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따뜻한 온기를 지닌 소녀를 와락 껴안았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으면서 참고 있었던 감정을 모두 털어놓았다. 너무 끔찍해.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한참을 울고 나서야 우리는 감정을 추슬렀다. 소녀의 말대로라면 이 의사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범인이다. 나는 죽어버린 녀석의 주머니를 뒤졌다. 하아. 명함 이외에는 건진 게 없다. 명함을 본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느낌. 이건 처음 소녀의 시계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명함 속의 이 남자. 어디서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디서 봤었지? 이름은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얼굴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아아. 안타까워. 난 눈에서 발산하는 매력을 보고 상대를 평가하는데 이 남자는 눈이 없다. 젠장.

“어! 언니! 저기 토끼!”

뭐? 내 허리를 꽉 붙잡고 있던 소녀가 갑자기 호들갑을 떨었다. 토끼를 봤단다. 나는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정말로 토끼가 있었다. 그것도 먼지라고는 전혀 묻지 않은 새하얀 털을 가진 토끼였다. 입에는 신선해 보이는 당근을 물고 있다.

나와 눈을 마주치자 토끼는 잽싸게 방향을 틀어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소녀의 손을 붙잡고 그것을 따라 달렸다.

“거기서!”

“어, 언니! 먼저 가세요! 저까지 따라가면 늦어요! 발자국 보고 따라갈게요!”

“알았어!”

확실히 소녀의 판단이 옳았다. 그녀를 데리고 뛰었다가는 토끼를 놓치게 된다. 저 녀석은 분명 어딘가로 이어지는 굴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당근. 그것은 다듬어진 당근이었다. 먹이로 누군가가 준 것이라면 구조요청을 할 수도 있다.

토기를 필사적으로 쫓아가던 도중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내 속도로 잡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게다가 소녀가 쫓아오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코너 앞에서 마치 나를 기다리는 것처럼 멈춰서 당근을 갈아먹는 녀석을 죽이고 싶다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물론 저 녀석을 잡아 여기서 나가고 싶다. 하지만 소녀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놓은 발자국을 따라 되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너가 나왔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바닥만 보고 따라가다가 이내 무언가에 머리를 쾅 하고 부딪쳤다.

“아야야. 아파. 뭐야 이건?”

말도 안 돼. 그건 짙은 갈색의 문이었다. 내 발자국은 분명 안으로 반쯤 잘라져 이어져있었다. 하지만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복도 중앙을 가로 막는 문은 없었다. 내가 지금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게다가 숫자까지 있다. 304. 여기가 3층이라는 뜻인가.

나는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아 문을 열었다. 또 벽 같은 게 있겠지. 라는 생각으로.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벽은 없었다. 안은 지극히 정상적이었고 고급 호텔처럼 보이는 아늑한 방이 꾸며져 있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싶어 볼을 꼬집었다가 이내 후회하고 말았다. 엄청 아프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는 걸로 보아하니 현실이 틀림없는 모양이다. 발밑으로 갑자기 하얀 녀석이 확 지나간다. 토끼였다.

“야!”

녀석은 살짝 열려진 방으로 쏜살같이 뛰어가더니 모습을 감췄다. 좋아. 이제 넌 갇혔어. 잡아서 출구를 알려주기 않으면 가죽을 벗겨서 구워버리겠어. 나는 녀석이 간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후회했다.

“이, 이게 뭐야.”

방안은 지옥이었다. 가구라고는 오직 침대뿐인 방의 벽면은 사방이 붉게 칠해져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피라는 것을 알았다. 코를 찌르는 짙은 피비린내도 지금 눈앞에 들어온 광경에 비하면 애교였다. 침대에는 사지가 남자의 절단된 고깃덩어리가 있었다.

“우웩!”

자신이 처한 처지도 모르고 활짝 웃고 있는 남자의 머리는 가슴 위에 장식처럼 꽂혀있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내가 그 남자를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예전에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사귄 남자친구였다. 호기심에 처음으로 내가 몸을 허락했던 남자애였다. 그때 나는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임신을 했고 병원에서 낙태를 했다. 그날 나는 엄마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싸웠다. 그리고 연락을 끊었다. 이후 집을 나온 나는 여러 남자들에게 전전하면서 생활했었다.

구토를 끝내고 대충 입가를 옷으로 닦아냈다. 일어설 기운이 남아있지 않아서 간신히 뒤로 기어서 거실로 나갔다. 툭. 무언가에 부딪쳤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소녀가 당근을 입에 문 토끼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무사했구나.”

나는 소녀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는 자그마한 손을 내 머리에 올렸다.

“괜찮아요?”

“응. 이제 괜찮아.”

“그런데 기억 안나요?”

순간 나는 등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등골을 타고 발끝까지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전신에 소름을 돋게 만든다.

“그 의사 말이에요. 낙태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인데 기억 안나요, 엄마?”

아……. 아……. 아……! 수술을 하기 전에 의사를 만났었다. 녹색 수술복을 입은 그는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서 눈만 보였다.

“아이가 아직 작아서 자궁에서 으깬 다음에 조각을 하나하나씩 꺼낼 겁니다.”

내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소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기억나요? 그럼 이 시계는요?”

아아……. 기억나. 저 시계는 날 임신시킨 남자애가 사줬던 선물이었다. 낙태를 한 이후에 심하게 다퉈서 헤어졌고 나는 저것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엄마. 왜 날 버렸어요?”

소녀의 쓸쓸한 목소리에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 아이의 앞에서는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도저히 입을 열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녀와 말을 하는 순간 지금껏 내가 살았던 삶이 무너져버리기 때문이다.

“엄마. 날 바라봐줘요.”

그녀의 보드라운 손길을 따라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보였지만 그건 전혀 상관없었다. 아이는 아이다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마가 그때 날 죽이지 않았다면 난 이렇게 자랐어요. 유치원도 다니고 친구들도 사귀고 학교에도 갔겠죠. 학원을 빼먹고 친구들과 놀러가서 선생님께 전화가 오면 엄마는 화를 냈겠죠. 하지만 성적표가 나온 날만큼은 기분이 좋았을 거예요. 엄마는 내게 정말 충실했을 테니까. 그래서 성적도 좋았을 텐데. 사춘기가 오면 남자친구도 사귈 테죠. 침대에 같이 누워 오이를 서로의 얼굴에 붙여주면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엄마는 내게 남자친구를 잘 고르는 방법 같은 걸 알려줄 거예요. 나중에는 엄마가 바라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설령 그게 내가 바라는 꿈이 아니라 할지라도 엄마가 원하는 거니까 난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난 분명 그렇게 할 거예요. 그런데, 그런데 엄마는 왜 날 죽였나요?”

“미안……. 미안해…….”

나는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는 아이를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게는 너무도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나는 이런 아이를 죽였다. 내 어리석은 판단으로 생명을 죽였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

소녀는 내 머리를 살포시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 엄마도 죽어.”

  





…….

우와. 뭐야 이거. 이모가 말한 건 제목만 있을 뿐 저자의 이름이나 출판사가 적혀있지 않은 회색 표지의 얇은 책이었다. 아무래도 개인이 자비로 출판한 책 같았다. 조각난 빛. 빛은 아이의 미래를 말하고 조각이란 아이의 죽음을 말하는 게 분명하다. 그렇군. 여하튼 정말 소름끼치는 책이다. 이모가 여름에 읽어야할 책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여름은 호러의 계절. 호러소설을 추천해준 것이다. 그나저나 같이 갇혔던 소녀가 사실은 죽은 딸이었다니. 그리고 마지막에는 복수를 한다라……. 역시 여자의 한은 무섭다.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게 할 정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후우. 더워. 진짜로 서리가 내리면 좋을 텐데. 여긴 밤인데도 지나치게 덥단 말이야.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 몸을 돌렸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에 있는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었다. 뒤를 돌았을 때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너, 너는…….”

그건 환상이 아니었다.

“부탁이 있어요.”

내 상상력이 지나친 것도 아니었다. 우리학교의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귀신?”

그녀는 내 말을 무시했다.

“부탁이 있어요.”

아까와 똑같은 말. 나는 조금 안심을 했다. 나를 죽이러 온 모양은 아닌가보다. 침을 꿀꺽 삼킨 다음 말라버린 입술을 혀로 핥았다.

“뭔데?”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아? 나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까만 리본을 집었다. 이건 머리가 긴 여자애들이 사용하는 끈이다.

“이걸 어떻게?”

“전화해요.”

“어, 어디로?”

그녀는 내 주머니를 가리켰다. 그리고 나는― 모든 걸 이해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이모에게 밤에 겪었던 일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설명했다. 이모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내가 준 명함을 받아서 그곳에 전화했다. 밝은 목소리로 상대와 통화한 이모는 10분 후에 도착한다고 말해줬다.

나는 2층 테이블에 앉아 그 사람을 기다렸다. 10분이 지나자 정말로 그 사람이 왔다. 어제와 다르게 여자는 혼자였다. 아래에서 이모를 만난 그녀는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다음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이모는 저 여자가 싫다고 했다. 어떤 제의든 거절할 게 뻔하다. 내 추측이 맞았는지 여자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돌아가려고 하자 이모가 그녀의 팔을 붙잡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는 2층에 앉아있는 날 가리킨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살짝 목례를 했다.

2층으로 올라온 그녀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나를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니? 나에게 볼 일이 있다고?”

“잠깐이면 됩니다. 앉아주실래요?”

“미안해. 여기에 더 이상 볼 일은 없어. 게다가 시간도 없고. 회장님께서 주최하시는 전시회에 출품을 거절당한 이상 다른 대상과 접촉을 해야 하거든.”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그것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평범하게 생긴 까만색 리본.

“……이게 뭐니?”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신의 딸이 제게 주더군요.”

“하? 딸? 미안. 난 아직 처녀야.”

“예뻤어요.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요. 눈매가 모친을 닮았더군요. 차분해 보이는 성격은 아마도 부군을 닮은 거겠지요. 이름은 뭐로 하실 생각이었죠? 혹시―”

나는 조각난 빛이 잠시나마 가졌던 이름을 꺼냈다. 순간 그녀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렀다.

“할머니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할머니는 낳을 거라면 그 이름으로 하자고 하셨다면서요.”

“너, 너,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목을 졸린 처녀귀신 같은 외침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한때 생명을 품었던 여인은 끝까지 실존했던 그녀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었다.

“그녀가 태어났더라면 제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라요.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거든요.”

짝!

내 고개가 돌아갔다. 입안이 찢어졌는지 비릿한 피의 냄새가 코로 올라왔다. 짭짤한 맛. 도서관 바닥에 침을 뱉을 수 없어서 나는 그것을 침과 함께 삼켰다. 이모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아마 마음 같아서는 진작 이 여자를 쫓아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간청했다.

“너, 정체가 뭐야!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정체…….”

나는 손을 뻗어 책상에 있는 까만 리본을 움켜쥐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소설과는 다르게 현실은 해피엔딩이니까.”

“뭐라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당신이 품었던 빛의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그래도 엄마와 3개월 동안 같이 있을 수 있어서 행복했어!”

“…….”

나는 이를 악물었다.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더 이상 입을 열었다가는 무슨 말을 해버릴지 모르겠다.

“그걸 어떻게…… 3개월…….”

구체적인 숫자가 나오고 나서야 그녀는 내 말을 믿어줬다.

“정말로 그 애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이게 거짓말이라고는……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탁이 있어요. 전화해요. 그래서― 내가 있는 곳으로 보내줘요. 혼자서는 너무 외로워요.”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결국 눈앞에서 그녀는 끝까지 딸의 존재를 부정했다. 리본으로 손을 옮기려다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획 돌아선다. 책장에 기대고 서 있는 이모의 존재를 확인한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숙인다.


“실례하겠습니다.”


누군가 그녀의 등에 총구라도 겨누고 있었는지 허겁지겁 도서관을 빠져나가는 모습에서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지 않아서 더욱 서글프다. 흐느끼고 있는 나에게 이모가 다가왔다.


“이제 만족했니.”


“……네.”


“그래. 잘 했다. 맞기는 했지만 조금 더 다듬으면 훌륭한 교섭인이 되겠어.”


나는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울분을 삼킨다. 웃고 있는 이모를 쳐다보며 내가 추측하고 있는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이걸로 끝이 아니죠?”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야기의 끝이 어떻게 되었지?”


아……. 역시.


끝은 비극이구나.

  

[조각난 빛]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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