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움직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는 이가 있으니.
과거의 흐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니라-
에리아는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온 가을 바람이 더없이 차갑게 느껴진다.
바람, 바람, 달빛, 바람, 바스락, 바람, 바람, 바람, 달빛, 바스락, 바람, 바람…….
에리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왼 손을 배게 밑에 가져갔다. 길쭉
하고 단단한 그러나 매끄럽지 않은 그것은 그녀의 일부분인 듯,
소리 없이 그녀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번엔 오른 손
을 천천히 다리 쪽으로 향했다. 역시 익숙한 느낌의 손잡이가
느껴졌다.
바람, 바람, 달빛, 바람, 바스락, 바람, 바람, 바람, 달빛, 바스락,
바스락, 끼익…….
자세히 듣지 않으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조심스러운 손놀림
이었지만 창문의 간격이 조금 더 벌어지며 들어오는 바람까
지 막지는 못했다. 그것을 의식한 듯 움직임이 조금 멈췄지만
조용히 자는 에리아를 보고 안심한 듯 창문의 간격은 더욱 벌
어졌다. 조금만 더. 에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침입자
가 에리아가 원하던 간격으로 들어왔다. 일단 창문을 넘어서면
다시 나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창문에서 세 걸음 반 떨어진
곳, 즉 창문과 침대 사이에 침입자가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에리
아의 몸이 탄력 받은 제비처럼 높이 점프했다. 그리고 그녀가
착지한 곳은 정확히 침입자가 서있는 곳이었다.
철컥-
권총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부싯돌이 긁히는 소
리가 났다. 힐키아가 자랑하는 연발 권총이었다. 네 발 정도 밖
에 들어가지 않고 정비도 까다롭지만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는
최고의 살상력을 발휘한다. 물론 쏘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정확
도의 차이도 있지만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네 발 모두를 피한다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총구가 자신의 관자놀
이를 지긋이 누르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침입자는 몸을 앞으로 재빨리 숙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
다가 날이 곧게 선 단검이 목젖 앞에 있는 것을 느끼고는 그것도
포기했다. 결국 침입자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좋은 밤.”
철컥-
“어이, 에리아, 나야 나.”
끼리릭…….
“알았어, 미안, 미안하다고!”
총구가 관자놀이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낀 침입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정말 장난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니?”
어둠 속에서 에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는, 내가 지금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장난? 망할 년.”
에리아가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녀석. 조금 지
린 것 같잖아. 애면 애다운 장난을 못 치나? 프리카는 자신의
동생들이 어릴 적에 자신에게 쳤던 장난과 에리아가 자신에게
거는 장난을 비교해 보다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최
소한 그 애들은 권총이나 단검을 쓰진 않았다고. 차라리 개구리
나 분필가루를 택하겠어. 프리카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우선 불 좀 켜줄래?”
에리아는 아무 말 없이 책상 쪽으로 향했다. 램프 옆에 있는 손
잡이를 몇 번 돌리자 기름 냄새와 함께 불이 피어 올랐다. 어둡
던 방 안이 환하게 밝혀지자 서로의 모습을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프리카가 먼저 소감을 말했다.
“더 예뻐졌네?”
에리아가 대답했다.
“고마워. 언니는 이제 화장에 심히 신경 써야 할 나이네?”
“……좋은 말은 못해주는 거니?”
에리아는 천덕스럽게 대답했다.
“적의 약점을 잡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전투의 기초 중의 기
초라고 트리버가 그랬어.”
“……그리고 나 만나면 그 말 전하라고 한 것도 그 인간이지?”
“응.”
프리카는 속으로 트리버에게 무지막지한 욕을 퍼부어 주며 생각
했다. 사실 틀린 말도 없지, 뭐. 12년 전에 만난 꼬마는 이제 19살
의 풋풋한 소녀고 자신은 서른 살을 바라보는 여자니까. 거의 2년
만에 보는 에리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검고
긴 생머리는 최고급 벨벳을 보는 것 같았고 이목구비 역시 아찔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고 얇은 잠옷만 걸치고 있는 몸도 더 이상
일곱 살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검푸른 눈
동자는 달 없는 밤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투명한 얼음 호수 같았다.
질투? 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아이가 자신에게 질투를 느낄 지도.
“내가 언니한테 질투를 느낀다고 하면 믿을 거야?”
프리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녀석 설마 독심술도 쓰나? 그러
나 프리카의 그런 우려와는 반대로 에리아는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던졌을까? 3년 전? 7년 전? 아니면 어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언니가 부러워.”
프리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하기로 했다.
“너도 여기선 자유롭잖니.”
이런 바보 같은 년, 겨우 한다는 위로가! 자신에게 신랄한 비평을
마친 프리카는 조심스럽게 에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
는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고마워, 언니.”
“응? 뭐, 뭘 이 정도 가지고.”
프리카는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다간 더 큰 실수를 할 것 같아서
에리아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난 이만 피곤해서 먼저 갈게. 내일 이야기 계속하자.”
“응, 잘자 언니.”
프리카는 이번엔 방 문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면서 그녀가
들어온 창문의 커튼이 바람에 휘날렸다. 에리아는 권총을 다리
에 찬 작은 가방에 넣고 검을 배게 밑에 쑤셔 넣었다. 그녀는 다
시 침대에 누웠다. 아직 한 밤 중이다.
이런 밤 중에 프리카가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남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방을 통해 들어온 것은?
그녀는 보닐 제 화장품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그 말은 근 몇
년 동안 보닐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힐키아로 돌아온 것일까?
창문으로 들어올 때 움직임은 많이 둔화되어 있었다. 즉, 며칠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국경을 달렸다는 것이다. 그녀 바지에 묻은 강아지풀
가루가 보닐과 힐키아 국경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종류의 강아지
풀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에리아는 배게 속에 얼굴을 묻으며 이러한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썼
다.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사실인데 뭘. 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
며 다시 꿈나라로 향했다. 그녀가 다시 본 꿈에서 붉은 땅이 나왔다.
그곳에는 어린 소녀가 혼자 울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는 이가 있으니.
과거의 흐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니라-
에리아는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온 가을 바람이 더없이 차갑게 느껴진다.
바람, 바람, 달빛, 바람, 바스락, 바람, 바람, 바람, 달빛, 바스락, 바람, 바람…….
에리아는 소리가 나지 않게 왼 손을 배게 밑에 가져갔다. 길쭉
하고 단단한 그러나 매끄럽지 않은 그것은 그녀의 일부분인 듯,
소리 없이 그녀의 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번엔 오른 손
을 천천히 다리 쪽으로 향했다. 역시 익숙한 느낌의 손잡이가
느껴졌다.
바람, 바람, 달빛, 바람, 바스락, 바람, 바람, 바람, 달빛, 바스락,
바스락, 끼익…….
자세히 듣지 않으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조심스러운 손놀림
이었지만 창문의 간격이 조금 더 벌어지며 들어오는 바람까
지 막지는 못했다. 그것을 의식한 듯 움직임이 조금 멈췄지만
조용히 자는 에리아를 보고 안심한 듯 창문의 간격은 더욱 벌
어졌다. 조금만 더. 에리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침입자
가 에리아가 원하던 간격으로 들어왔다. 일단 창문을 넘어서면
다시 나가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창문에서 세 걸음 반 떨어진
곳, 즉 창문과 침대 사이에 침입자가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에리
아의 몸이 탄력 받은 제비처럼 높이 점프했다. 그리고 그녀가
착지한 곳은 정확히 침입자가 서있는 곳이었다.
철컥-
권총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부싯돌이 긁히는 소
리가 났다. 힐키아가 자랑하는 연발 권총이었다. 네 발 정도 밖
에 들어가지 않고 정비도 까다롭지만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는
최고의 살상력을 발휘한다. 물론 쏘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정확
도의 차이도 있지만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네 발 모두를 피한다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물며 총구가 자신의 관자놀
이를 지긋이 누르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더.
침입자는 몸을 앞으로 재빨리 숙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보
다가 날이 곧게 선 단검이 목젖 앞에 있는 것을 느끼고는 그것도
포기했다. 결국 침입자는 최후의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좋은 밤.”
철컥-
“어이, 에리아, 나야 나.”
끼리릭…….
“알았어, 미안, 미안하다고!”
총구가 관자놀이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낀 침입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넌 정말 장난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니?”
어둠 속에서 에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는, 내가 지금 하는 게 뭐라고 생각해?”
“……장난? 망할 년.”
에리아가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빌어먹을 녀석. 조금 지
린 것 같잖아. 애면 애다운 장난을 못 치나? 프리카는 자신의
동생들이 어릴 적에 자신에게 쳤던 장난과 에리아가 자신에게
거는 장난을 비교해 보다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최
소한 그 애들은 권총이나 단검을 쓰진 않았다고. 차라리 개구리
나 분필가루를 택하겠어. 프리카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우선 불 좀 켜줄래?”
에리아는 아무 말 없이 책상 쪽으로 향했다. 램프 옆에 있는 손
잡이를 몇 번 돌리자 기름 냄새와 함께 불이 피어 올랐다. 어둡
던 방 안이 환하게 밝혀지자 서로의 모습을 더욱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프리카가 먼저 소감을 말했다.
“더 예뻐졌네?”
에리아가 대답했다.
“고마워. 언니는 이제 화장에 심히 신경 써야 할 나이네?”
“……좋은 말은 못해주는 거니?”
에리아는 천덕스럽게 대답했다.
“적의 약점을 잡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은 전투의 기초 중의 기
초라고 트리버가 그랬어.”
“……그리고 나 만나면 그 말 전하라고 한 것도 그 인간이지?”
“응.”
프리카는 속으로 트리버에게 무지막지한 욕을 퍼부어 주며 생각
했다. 사실 틀린 말도 없지, 뭐. 12년 전에 만난 꼬마는 이제 19살
의 풋풋한 소녀고 자신은 서른 살을 바라보는 여자니까. 거의 2년
만에 보는 에리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검고
긴 생머리는 최고급 벨벳을 보는 것 같았고 이목구비 역시 아찔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고 얇은 잠옷만 걸치고 있는 몸도 더 이상
일곱 살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검푸른 눈
동자는 달 없는 밤 아래에서만 볼 수 있는 투명한 얼음 호수 같았다.
질투? 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아이가 자신에게 질투를 느낄 지도.
“내가 언니한테 질투를 느낀다고 하면 믿을 거야?”
프리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녀석 설마 독심술도 쓰나? 그러
나 프리카의 그런 우려와는 반대로 에리아는 시선을 멀리 던지고
있었다. 어디까지 던졌을까? 3년 전? 7년 전? 아니면 어제? 그녀가
말을 이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언니가 부러워.”
프리카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를 하기로 했다.
“너도 여기선 자유롭잖니.”
이런 바보 같은 년, 겨우 한다는 위로가! 자신에게 신랄한 비평을
마친 프리카는 조심스럽게 에리아의 얼굴을 살폈다. 다행히 그녀
는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고마워, 언니.”
“응? 뭐, 뭘 이 정도 가지고.”
프리카는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하다간 더 큰 실수를 할 것 같아서
에리아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난 이만 피곤해서 먼저 갈게. 내일 이야기 계속하자.”
“응, 잘자 언니.”
프리카는 이번엔 방 문으로 나갔다. 방문이 닫히면서 그녀가
들어온 창문의 커튼이 바람에 휘날렸다. 에리아는 권총을 다리
에 찬 작은 가방에 넣고 검을 배게 밑에 쑤셔 넣었다. 그녀는 다
시 침대에 누웠다. 아직 한 밤 중이다.
이런 밤 중에 프리카가 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남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방을 통해 들어온 것은?
그녀는 보닐 제 화장품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그 말은 근 몇
년 동안 보닐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힐키아로 돌아온 것일까?
창문으로 들어올 때 움직임은 많이 둔화되어 있었다. 즉, 며칠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국경을 달렸다는 것이다. 그녀 바지에 묻은 강아지풀
가루가 보닐과 힐키아 국경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종류의 강아지
풀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뒷받침해준다.
에리아는 배게 속에 얼굴을 묻으며 이러한 생각들을 떨쳐내려 애썼
다. 어차피 내일이면 알게 될 사실인데 뭘. 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
며 다시 꿈나라로 향했다. 그녀가 다시 본 꿈에서 붉은 땅이 나왔다.
그곳에는 어린 소녀가 혼자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