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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 파괴된 대지 위에 한 아이가 서있었다.
검은 빛깔의 머리카락은 피를 머금은 바람에 흩날리고 투명한 것만
같은 피부는 붉은 땅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찢어질 것이 연약했다.
아이는 걷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살았을 집과 뛰어
놀았을 공터는 그 터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까지 파괴되었다.
농부들이 땀을 흘리고 아이들이 하룻밤 서리를 즐겼을 밭은 미친 소 수
십 마리가 날뛴 듯한 참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이는 밭으로 내려갔다.
혹시 뭐라도 먹을 것이 남아 있는가, 확인해보려던 아이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차가운 느낌. 피를 마신 쇠의 느낌이다.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야채가 자라고 있어야 할 곳에는 작열하지
못한 포탄이 피를 머금고 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에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농부의 시체가 잎의 역할
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모르겠다.
태풍 같던 포격 이후로 마을의 구조는 완전히 재배치 되었다. 우선
야채가게 쪽으로 달려보자. 야채가게는 그녀의 집에서 일직선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200미터? 터만 남은 골목에서 거리라
는 감각은 이미 둔화된 지 오래였다. 그녀는 여관을 생각해 내었다. 시
장에서 두 번째 골목.
그런데 시장은 어디지? 그녀는 뛰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너지다 만 벽돌 더미와 무너지고 있는 벽돌 더미 사이에 그녀는
서있었다.
무너지다 만 그녀와 이미 무너진 그녀의 세계 속에서 그녀는 방황
하고 있었다.
시장 한 구석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며 아이들의 쉼터가 되었던
나무는 포탄에 갈기갈기 찢긴 밑동을 부여잡고 있었다. 거센 바람
이라도 한 차례 불면 무너질 것이다.
그 나무를 본 순간 그녀의 머리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천
천히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겨우 버티고 있던 세계에서 벽돌 하
나만 뺀 것뿐이지만, 그녀는 무너졌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울 힘도
없다. 공복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감정의 허기짐에서 나는 무
기력함이었기에 그 정도는 더욱 심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남았던 빛의 잔상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 치다가, 어느 한
점으로 빨리듯 사라졌다.
바스락. 마른 낙엽이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렸다. 생기 없는
모래알이 바람에 날리며 옷 속으로 들어갔다. 작은 알갱이가 살을
찌른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생존자가 있었네?”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파장에, 아이의 어둠이 약간 일
그러졌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목소리가 그녀의 어둠을 방해했다. 비
교적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살아있는 거에요, 아니면 살아있는 척 하는 송장이에요?”
일행의 시니컬한 물음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조금만 더 익히면 멋진 요리가 될 것 같아.”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는 현기증을 느꼈다. 남자가 그
녀를 들어올린 것이다. 아이는 등 쪽에서 남자의 건장한 팔을 느
낄 수 있었다. 그때 아이의 얼굴 바로 앞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
렸다. 너무 가까워서 머리카락의 움직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꼬마야, 목 안 마르니?”
아이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자 역시
대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 수통을 열어 조금씩 물을 아이
의 입에 부어 넣기 시작했다. 물이 몸 속에 들어오자 아이는 어둠
이 조금씩 걷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물었다.
“이름이 뭐니?”
“……에리아.”
“어머, 목소리가 트였구나. 나이는?”
“……7살.”
여자의 숨결이 얼굴 쪽에서 떠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봐요 트리버, 이 아이 데려갈 거에요?”
트리버라 불린 남자는 당황했다. 이 여자는 난감한 질문을 너무
직접적으로 한다는 말이야. 트리버는 직접적인 질문에는 직접적
인 답을, 그리고 난감한 질문에는 난감하게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놔두면 죽겠지, 프리카?”
프리카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아이의 입에 물을 조금 더 부어줬다.
“넌 전쟁이 싫니?”
“……전쟁이 뭐에요?”
프리카의 목소리가 더욱 뚜렷하게 들렸다.
“너의 마을을 파괴한 것이지.”
순간 에리아의 눈이 떠졌다. 초점이 확실하지 않아 얼굴은 잘 보
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프리카를 응시했다.
“……난 전쟁이 싫어요.”
프리카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맑은 목소리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에리아.”
그 순간 에리아는 자신 속에서 무너진 세상이 재건축되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그 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좀 더 예술적이게,
그리고 조금 더 광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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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쓰다가 만 소설을 다시 한 번 긁적여봅니다
태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듯, 파괴된 대지 위에 한 아이가 서있었다.
검은 빛깔의 머리카락은 피를 머금은 바람에 흩날리고 투명한 것만
같은 피부는 붉은 땅 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찢어질 것이 연약했다.
아이는 걷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가 살았을 집과 뛰어
놀았을 공터는 그 터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까지 파괴되었다.
농부들이 땀을 흘리고 아이들이 하룻밤 서리를 즐겼을 밭은 미친 소 수
십 마리가 날뛴 듯한 참극을 연출하고 있었다. 아이는 밭으로 내려갔다.
혹시 뭐라도 먹을 것이 남아 있는가, 확인해보려던 아이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차가운 느낌. 피를 마신 쇠의 느낌이다.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야채가 자라고 있어야 할 곳에는 작열하지
못한 포탄이 피를 머금고 은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에는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농부의 시체가 잎의 역할
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모르겠다.
태풍 같던 포격 이후로 마을의 구조는 완전히 재배치 되었다. 우선
야채가게 쪽으로 달려보자. 야채가게는 그녀의 집에서 일직선으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200미터? 터만 남은 골목에서 거리라
는 감각은 이미 둔화된 지 오래였다. 그녀는 여관을 생각해 내었다. 시
장에서 두 번째 골목.
그런데 시장은 어디지? 그녀는 뛰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너지다 만 벽돌 더미와 무너지고 있는 벽돌 더미 사이에 그녀는
서있었다.
무너지다 만 그녀와 이미 무너진 그녀의 세계 속에서 그녀는 방황
하고 있었다.
시장 한 구석에서 넓은 자리를 차지하며 아이들의 쉼터가 되었던
나무는 포탄에 갈기갈기 찢긴 밑동을 부여잡고 있었다. 거센 바람
이라도 한 차례 불면 무너질 것이다.
그 나무를 본 순간 그녀의 머리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는 천
천히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겨우 버티고 있던 세계에서 벽돌 하
나만 뺀 것뿐이지만, 그녀는 무너졌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울 힘도
없다. 공복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감정의 허기짐에서 나는 무
기력함이었기에 그 정도는 더욱 심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 남았던 빛의 잔상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 치다가, 어느 한
점으로 빨리듯 사라졌다.
바스락. 마른 낙엽이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건드렸다. 생기 없는
모래알이 바람에 날리며 옷 속으로 들어갔다. 작은 알갱이가 살을
찌른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이 없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어라, 생존자가 있었네?”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파장에, 아이의 어둠이 약간 일
그러졌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목소리가 그녀의 어둠을 방해했다. 비
교적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살아있는 거에요, 아니면 살아있는 척 하는 송장이에요?”
일행의 시니컬한 물음에 남자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조금만 더 익히면 멋진 요리가 될 것 같아.”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는 현기증을 느꼈다. 남자가 그
녀를 들어올린 것이다. 아이는 등 쪽에서 남자의 건장한 팔을 느
낄 수 있었다. 그때 아이의 얼굴 바로 앞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울
렸다. 너무 가까워서 머리카락의 움직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꼬마야, 목 안 마르니?”
아이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여자 역시
대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듯 수통을 열어 조금씩 물을 아이
의 입에 부어 넣기 시작했다. 물이 몸 속에 들어오자 아이는 어둠
이 조금씩 걷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물었다.
“이름이 뭐니?”
“……에리아.”
“어머, 목소리가 트였구나. 나이는?”
“……7살.”
여자의 숨결이 얼굴 쪽에서 떠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봐요 트리버, 이 아이 데려갈 거에요?”
트리버라 불린 남자는 당황했다. 이 여자는 난감한 질문을 너무
직접적으로 한다는 말이야. 트리버는 직접적인 질문에는 직접적
인 답을, 그리고 난감한 질문에는 난감하게 대답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놔두면 죽겠지, 프리카?”
프리카가 살짝 웃었다.
그리고 아이의 입에 물을 조금 더 부어줬다.
“넌 전쟁이 싫니?”
“……전쟁이 뭐에요?”
프리카의 목소리가 더욱 뚜렷하게 들렸다.
“너의 마을을 파괴한 것이지.”
순간 에리아의 눈이 떠졌다. 초점이 확실하지 않아 얼굴은 잘 보
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프리카를 응시했다.
“……난 전쟁이 싫어요.”
프리카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맑은 목소리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 에리아.”
그 순간 에리아는 자신 속에서 무너진 세상이 재건축되는 것을 느
낄 수 있었다. 그 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좀 더 예술적이게,
그리고 조금 더 광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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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쓰다가 만 소설을 다시 한 번 긁적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