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머리야. 여기가 어디메뇨……아, 집이구나. 난 천근처럼 느껴지는 이불
을 걷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아우, 골이야. 순간 띵 하면서 천장이 흔들
렸다. 눈알 튀어나올 것 같아. 속도 아프고. 으윽, 하긴. 어제처럼 미친 듯
이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내가 어제 집에 어떻게 왔더라?
앞으로도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를 안고서 난 힘들게 침대에
서 일어났다. 내 방은 내 방이네. 난 어제 입었던 옷을 찾아 주머니를 뒤져
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 들어있는 돈, 신분증, 카드를 확인하고 난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아, 지쳐라. 아직도 술기운이 몸 안에서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이런 기분 오랜만이어라. 반갑기도 하면
서도 왠지 서글픈데?
드르르륵. 난 머리맡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몸을 부스스 일으켜서 핸드폰
을 찾았다. 진동음은 계속 울리는데 핸드폰은 보이지 않아 침대 밑에까지
조사해봤지만 이놈이 보이지 않는다. 아, 어디 있는거야? 그리고 무심코 들
어 올린 베개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아,
이 바보. 액정을 보니 수지네.
“안녕!”
난 억지로 밝은 척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속은 전쟁 중이니……
으윽, 해장해야겠다.
“응. 일어났네? 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당연하지! 근데 지금 몇 시야?”
“11시 반. 군인이 제대하자마자 이렇게 늦잠자도 되는 거야? 기합이 다 빠
졌네.”
“수지야! 이제 네 남자친구는 군인이 아니야 민간인이라구. 너도 어서 고무
신으로부터 벗어나라, 훠이, 훠이.”
“후후후.”
“그런데 이렇게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어제 못 만났잖아. 오늘 만나자구. 할 이야기도 있구.”
“할 이야기? 안돼!”
“무슨 이야긴 줄 알고 벌써부터 안돼야?”
“아직 난 결혼 할 준비가 안됐어!”
“……일단 한 대 만나고 용건 시작할까?”
“으윽. 미안. 오랜만이라, 장난 좀 쳐보고 싶었어. 언제 만날래?”
“오늘 다섯 시에 평소 보던 데서 보자.”
“그래.”
뚝. 다시 왠지 허무하리만치 쉽게 끊어졌다. 난 한 손으로 마리를 붙잡고
방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배도 고픈 것 같고, 머리도 띵하고. 해장할 거
없나. 집안은 썰렁했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집 안에 인기척이 없다. 하긴
부모님은 아직도 맞벌이하시니. 난 터벅터벅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보
자기에 음식 같은 것들이 씌여져 있었고, 보자기에는 쪽지 하나가 붙여져
있었다.
[아들. 제대하자마자 술독에 빠져사는구나. 다음부턴 해장 안 시켜준다! 콩
나물국 끓여 놨으니까 식었으면 뎁혀서 먹어. -엄마가]
아하. 난 얼굴에 미소를 띄며 보자기를 열었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콩나물
국이 날 유혹하는구나! 난 국을 한 숟갈 떠먹어보고 온도를 가늠한 뒤 국그
릇을 들어서 냄비에 다시 부었다. 그리고 가스 불 찰칵. 드드드득 화르르르
륵. 아마 소리가 난다면 이런 소리겠지. 난 국이 끓을 동안 텔레비전을 보
기 위해서 거실로 나가 리모컨을 들었다. 군 생활 동안 자연스럽게 익은 게
임채널로 채널을 돌리면서 난 곰곰이 생각해봤다. 오랜만에 만나서 할 이야
기란 무엇일까? 하긴. 오랜만이니까 할 이야기도 많겠지? 히힛. 아, 근데
난 군대 이야기밖에 해줄게 없는데. 여자는 군대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한다
는데. 어쩌지? 으음. 어라. 이윤열이다! 요즘 침체기던데, 좀 이겨봐.
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오전을 보냈다.
모처럼만에 외출준비를 했다. 어제야 그냥 아는 형들 만나니까 대충 차려
입고 나갔다. 헐렁한 카고바지에 펑퍼짐한 티 하나? 오늘은 뭐 입을까 고민
하다가 30분을 보내고, 그리고 하나 깨달았다. 군대를 갔다 왔더니 입을 옷
이 없다……. 아무래도 조만간 시간 내서 그동안 모은 월급으로 옷이나 한
벌 사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오늘역시 대충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
름 신경 쓴다고 썼는데, 어제랑 별 반 달라 보이지 않는 건 도대체 무슨 조
화냐. 머리에 왁스도 좀 발라서 모양 좀 내려고 했는데, 에휴. 군바리 머리
가 그게 그거지 뭐. 그 조그마한 잔디밭에 제품 좀 바른다고 역시 티가 날
리가 없다. 결국 다시 머리를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롱 어딘가 굴
러다니는 모자를 꺼내 뒤집어썼다. 그리고 지갑 확인. 1, 2, 3……4 만원.
이 정도면 대충 저녁 식사랑 데이트 비용은 되겠지? 뭐 여차하면 통장에 모
아놓은 30만원이 있으니 꺼내 쓰지, 뭐.
수지랑 언제나 만나는 곳은 우리 집과 수지네 집 앞에 있는 공원이다. 넓
은 공원은 아니고 동네 주민들이 아침이나 저녁에 산책 혹은 운동을 간단하
게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공원이다. 그래도 제법 이름은 그럴싸하다. 중
앙공원이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름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수지네
집과 우리 집이 행정상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려 있는데 공원이 그 가
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 이름을 붙이기가 애
매하니 그냥 중앙공원. 캬, 이름 붙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성의
없이 해놨다.
공원까지는 집에서 대충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버스로 한 정거장? 택
시 타기에는 돈이 아깝고 버스 타기에는 시간이 애매한 그런 위치다. 수지
네 집에서도 대충 10분 정도?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약속을 정할 때 그 공원
으로 잡는다. 만나서 어디 놀러가기가 쉽거든. 누구네 집에 갈 것도 없이
딱 중간 지점에 훌륭한 약속 장소가 있다는 것은 간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이라고 칭한다. 중앙공원보다는 그곳이 단어도 짧고 왠지 신비스러워
보이잖아.
도착한 시간은 4시 40분. 20분 일찍 도착해버렸다. 아, 원래 이런 성격 아니
었는데 오랜만에 본다니까 갑자기 마음이 설렜나보다. 난 근처 벤치에 앉
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수지랑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공부를 워낙 못하던 시절이라 부모
님께서는 궁여지책으로 학원이라도 나가보라고 했고, 난 나가기 싫다고 우
겼고……결국 나가게 된 학원에서 수지를 만났다. 학교는 공학이지만 남녀
분반이라 남자만 득실득실 거려서 학원에서 보게 된 여자애들은 왠지 신비
로웠다. 그리고 그 중간에 수지가 있었다. 처음엔 학원이 싫었지만 그 이후
부터는 열심히 다녔다. 수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중2 때부터 약 2년간 다녔
지만, 말 한 번 제대로 못 꺼내봤다. 그리고 그렇게 고등학교를 올라왔고 집
안이 어려워져서 결국 학원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학원을 그만두면서 수지
한테 고등학교를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려다가 결국 못 물어봤다. 그만큼 여
자라는 존재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숫기가 없던 시절. 1학년을 그렇게 보내
고 2학년을 진학하고 나서 수지를 만났다. 그 때에는 정말 온 세상이 날 축
복해주는 것만 같았지. 수지도 나를 봐서 반가웠는지 처음으로 나한테 말
을 걸어줬다. 그렇게 친해졌…….
“강인아!”
“응?”
날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수지가 서 있었다. 하얀 원
피스에 가슴엔 리본을 달고 생머리를 뒤로 살짝 묶은 모습. 포니와 다른 느
낌에 난 멍할 수 밖에 없었다. 크윽, 감동이야. 역시 내 여자친구. 너무 이쁘
잖아!
“응? 왔구나. 얼마 안 기다…….”
난 말을 하다가 중간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수지 뒤에 있는 남자는 장식
품쯤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말을 꺼내자 수지 앞으로 다가와 수지를 뒤로 감
싸듯이 섰다. 뭐야, 이 자식은. 내기 없는 새에 내가 모르는 동생이라도 만
들었나?
“저기, 형씨. 누군지 모르지만 저 여자 친구 만나러 왔거든요? 좀 비켜주실
래요?”
왠지 불안한 예감에 삐딱하게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뭐지? 갑자기 심하게
불안해지는 이 느낌. 상대방이 피식 웃었다.
“하하하. 이봐요. 강인씨라고 했나. 누가 누구 여자 친구인지는 모르겠지
만 함부로 말하지 말아줄래요? 진짜 남자친구 기분 나쁘거든요?”
“……남자친구?”
“내가 진짜 남자친구거든요? 진짜 중증이네 이 친구. 수지가 자기 따라다
니는 친구 있다길래 그냥 친구거니 했건만 남자친구? 수지야. 이 녀석한테
내 이야기 안 했어?”
“으, 응? 응. 군대 갔다가 막 제대했거든.”
“군대나 다녀오신 분이 이래? 정신상태가 썩었구만. 이봐요, 군대에서 뭘
배웠어? 엉?”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난 멍한 표정으로 수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자신을 남자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봤다. 키는 나보다 한 5센티 커
보인다. 185정도 될 것 같은 키. 제법 운동을 한 듯 운동 한 사람 특유의 탄
탄한 몸이 옷 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다. 팔뚝도 두껍다. 목 근육이 탄탄하
게 발달되어 있다. 제법 잘 생겼다. 머리도 길다. 난 혹시나 하는 질문에 꿈
틀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떨리는 입으로 겨우, 겨우 한 마디 내 뱉었다.
“사, 사귄지……얼마나 되셨죠?”
“1년 됐수다. 이제 좀 떨어져 주시죠? 제 여자 친구가 불안해하거든요?”
수지가 엄청 불안해한다. 날 못 보고 있다. 애꿎은 돌을 발로 차고 있다. 불
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머리가 안 돌아간다. 이 상
황을 거부한다.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란 말이야! 군대 있을 때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 몇 번 있었지만 그 때마다 넌 침착하게 위기를 넘겼잖
아! 배에 불이 났을 때도 침착하게 1차 대응해서 포상휴가도 나갔었잖아! 머
리를 얼차려 주고 심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눈을 질끈 감고 길게 심호흡
을 한 번 하고나자 머리가 조금씩 돌아갔다.
“1년이요?”
“1년이라고 했잖아. 우리 바쁘니까 좀 떨어져 줄래? 난 수지가 같이 가자길
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떨거지 떼어내려고 했던 거였어?”
그래. 이젠 떨거지인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수지를 바라봤
다. 한 번 쯤은 내 얼굴을 봐 줬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날 보고 있
다. 가슴에 뭔가 울컥한다. 눈물이 나오려고 시야가 흐려진다. 난 이를 악물
고 눈물을 참았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난동을 부
릴까. 너 같은 놈 내가 알 바 아니다라고 하면서 소란을 피울까. 싸움이라
면 자신 있는 편은 아니지만 어디서 맞고 다닐 실력도 아니다. 남들이 때린
만큼 때려준다. 아니면…….
“하하하. 미안해, 수지야. 내가 그렇게 널 괴롭혔나 보구나. 알았어. 이제부
터 연락 안 할게. 남자 친구 있었다면 진작에 얘기하지 그랬어. 없는 줄 알
았잖아.”
“그래도 말 통하는 친구네. 수지야, 가자.”
“으, 응? 응…….”
이름도 모를 그 녀석은 그렇게 갑자기 수지 팔을 끌고 어디로 가려고 했
다. 난 움찔하면서 순간 손을 뻗을 뻔 했다. 아냐, 이제 내 여자 친구가 아
냐. 1년 됐다 잖아. 이젠, 내, 여자 친구가, 아냐.
가슴으로 내 뱉는 이런 말이 가슴을 이렇게 아프게 할 줄 처음 알았다. 여
자 친구가 아니게 됐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아린다. 수지는 팔을 잡히자 움
찔하면서 날 쳐다봤다. 불안한 표정.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 무엇일
까. 난 떨리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힘들게 웃어줬다. 미소라고 할 수 있을
까? 그냥 가. 내가 놔줄게. 군대에 있는 놈 기다리기 힘들었겠지. 그래, 이
해 할 수 있어. 이해…할 수…있을 것…같아…….
“어이, 강인씨. 한 마디만 더 할게요. 내 여자 친구한테 연락하지 마소. 기
분 나쁘니까.”
난 그저 웃었다. 그 녀석은 땅에 침을 뱉고는 수지를 끌고 사라졌다. 수지
는 나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땅에 숙인 채 그 녀석을 따라 사라졌다. 그 뒤
로 날 보지 않았다. 난 멍하니 수지만 보고 있었다. 공원 갈림길 너머로 그
녀석과 수지가 사라졌지만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갈림길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수지가 장난이었어, 하고 튀어나오진 않을까. 널 놀래 키려
고 그랬던 거야, 하면서 튀어나오진 않을까. 그럴 가능성은 내가 군 생활하
다가 김정일을 잡아 일 계급 특진되고 제대하는 것만큼의 가능성이 없는 상
황이었지만, 내겐 절박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겨울 해가 일찍 지
는 법이긴 하지만, 어느새 가로등이 없이는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로 어두
워졌다.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난 힘겹게 벤치에 주저앉았다. 주위에 사
람들은 다 사라졌다. 산책 할 시간도 지났나보다. 몸이 급격히 식어간다. 하
지만 육체적 추위보다는 정신적 추위가 더 추웠다. 더 매서웠다. 울지 않으
리라, 울지 않겠어. 울지 않겠어. 울지 않겠단 말이야…….
그런데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묻은 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현실이야…….
-
아 늦게 한 편 더 업
전 개인적으로 슬픈 이야기를 좋아해서..
을 걷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아우, 골이야. 순간 띵 하면서 천장이 흔들
렸다. 눈알 튀어나올 것 같아. 속도 아프고. 으윽, 하긴. 어제처럼 미친 듯
이 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런데 내가 어제 집에 어떻게 왔더라?
앞으로도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를 안고서 난 힘들게 침대에
서 일어났다. 내 방은 내 방이네. 난 어제 입었던 옷을 찾아 주머니를 뒤져
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 들어있는 돈, 신분증, 카드를 확인하고 난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아, 지쳐라. 아직도 술기운이 몸 안에서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 이런 기분 오랜만이어라. 반갑기도 하면
서도 왠지 서글픈데?
드르르륵. 난 머리맡에서 울리는 진동음에 몸을 부스스 일으켜서 핸드폰
을 찾았다. 진동음은 계속 울리는데 핸드폰은 보이지 않아 침대 밑에까지
조사해봤지만 이놈이 보이지 않는다. 아, 어디 있는거야? 그리고 무심코 들
어 올린 베개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아,
이 바보. 액정을 보니 수지네.
“안녕!”
난 억지로 밝은 척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렇지만 속은 전쟁 중이니……
으윽, 해장해야겠다.
“응. 일어났네? 아까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당연하지! 근데 지금 몇 시야?”
“11시 반. 군인이 제대하자마자 이렇게 늦잠자도 되는 거야? 기합이 다 빠
졌네.”
“수지야! 이제 네 남자친구는 군인이 아니야 민간인이라구. 너도 어서 고무
신으로부터 벗어나라, 훠이, 훠이.”
“후후후.”
“그런데 이렇게 아침 일찍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어제 못 만났잖아. 오늘 만나자구. 할 이야기도 있구.”
“할 이야기? 안돼!”
“무슨 이야긴 줄 알고 벌써부터 안돼야?”
“아직 난 결혼 할 준비가 안됐어!”
“……일단 한 대 만나고 용건 시작할까?”
“으윽. 미안. 오랜만이라, 장난 좀 쳐보고 싶었어. 언제 만날래?”
“오늘 다섯 시에 평소 보던 데서 보자.”
“그래.”
뚝. 다시 왠지 허무하리만치 쉽게 끊어졌다. 난 한 손으로 마리를 붙잡고
방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배도 고픈 것 같고, 머리도 띵하고. 해장할 거
없나. 집안은 썰렁했다. 문을 열고 나왔는데 집 안에 인기척이 없다. 하긴
부모님은 아직도 맞벌이하시니. 난 터벅터벅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는 보
자기에 음식 같은 것들이 씌여져 있었고, 보자기에는 쪽지 하나가 붙여져
있었다.
[아들. 제대하자마자 술독에 빠져사는구나. 다음부턴 해장 안 시켜준다! 콩
나물국 끓여 놨으니까 식었으면 뎁혀서 먹어. -엄마가]
아하. 난 얼굴에 미소를 띄며 보자기를 열었다. 고춧가루가 들어간 콩나물
국이 날 유혹하는구나! 난 국을 한 숟갈 떠먹어보고 온도를 가늠한 뒤 국그
릇을 들어서 냄비에 다시 부었다. 그리고 가스 불 찰칵. 드드드득 화르르르
륵. 아마 소리가 난다면 이런 소리겠지. 난 국이 끓을 동안 텔레비전을 보
기 위해서 거실로 나가 리모컨을 들었다. 군 생활 동안 자연스럽게 익은 게
임채널로 채널을 돌리면서 난 곰곰이 생각해봤다. 오랜만에 만나서 할 이야
기란 무엇일까? 하긴. 오랜만이니까 할 이야기도 많겠지? 히힛. 아, 근데
난 군대 이야기밖에 해줄게 없는데. 여자는 군대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한다
는데. 어쩌지? 으음. 어라. 이윤열이다! 요즘 침체기던데, 좀 이겨봐.
난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오전을 보냈다.
모처럼만에 외출준비를 했다. 어제야 그냥 아는 형들 만나니까 대충 차려
입고 나갔다. 헐렁한 카고바지에 펑퍼짐한 티 하나? 오늘은 뭐 입을까 고민
하다가 30분을 보내고, 그리고 하나 깨달았다. 군대를 갔다 왔더니 입을 옷
이 없다……. 아무래도 조만간 시간 내서 그동안 모은 월급으로 옷이나 한
벌 사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오늘역시 대충 입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
름 신경 쓴다고 썼는데, 어제랑 별 반 달라 보이지 않는 건 도대체 무슨 조
화냐. 머리에 왁스도 좀 발라서 모양 좀 내려고 했는데, 에휴. 군바리 머리
가 그게 그거지 뭐. 그 조그마한 잔디밭에 제품 좀 바른다고 역시 티가 날
리가 없다. 결국 다시 머리를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장롱 어딘가 굴
러다니는 모자를 꺼내 뒤집어썼다. 그리고 지갑 확인. 1, 2, 3……4 만원.
이 정도면 대충 저녁 식사랑 데이트 비용은 되겠지? 뭐 여차하면 통장에 모
아놓은 30만원이 있으니 꺼내 쓰지, 뭐.
수지랑 언제나 만나는 곳은 우리 집과 수지네 집 앞에 있는 공원이다. 넓
은 공원은 아니고 동네 주민들이 아침이나 저녁에 산책 혹은 운동을 간단하
게 즐길 수 있게 만들어놓은 공원이다. 그래도 제법 이름은 그럴싸하다. 중
앙공원이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름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수지네
집과 우리 집이 행정상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갈려 있는데 공원이 그 가
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 이름을 붙이기가 애
매하니 그냥 중앙공원. 캬, 이름 붙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성의
없이 해놨다.
공원까지는 집에서 대충 1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버스로 한 정거장? 택
시 타기에는 돈이 아깝고 버스 타기에는 시간이 애매한 그런 위치다. 수지
네 집에서도 대충 10분 정도?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약속을 정할 때 그 공원
으로 잡는다. 만나서 어디 놀러가기가 쉽거든. 누구네 집에 갈 것도 없이
딱 중간 지점에 훌륭한 약속 장소가 있다는 것은 간편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이라고 칭한다. 중앙공원보다는 그곳이 단어도 짧고 왠지 신비스러워
보이잖아.
도착한 시간은 4시 40분. 20분 일찍 도착해버렸다. 아, 원래 이런 성격 아니
었는데 오랜만에 본다니까 갑자기 마음이 설렜나보다. 난 근처 벤치에 앉
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수지랑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였다. 공부를 워낙 못하던 시절이라 부모
님께서는 궁여지책으로 학원이라도 나가보라고 했고, 난 나가기 싫다고 우
겼고……결국 나가게 된 학원에서 수지를 만났다. 학교는 공학이지만 남녀
분반이라 남자만 득실득실 거려서 학원에서 보게 된 여자애들은 왠지 신비
로웠다. 그리고 그 중간에 수지가 있었다. 처음엔 학원이 싫었지만 그 이후
부터는 열심히 다녔다. 수지를 보기 위해서라도. 중2 때부터 약 2년간 다녔
지만, 말 한 번 제대로 못 꺼내봤다. 그리고 그렇게 고등학교를 올라왔고 집
안이 어려워져서 결국 학원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학원을 그만두면서 수지
한테 고등학교를 어디로 갔냐고 물어보려다가 결국 못 물어봤다. 그만큼 여
자라는 존재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숫기가 없던 시절. 1학년을 그렇게 보내
고 2학년을 진학하고 나서 수지를 만났다. 그 때에는 정말 온 세상이 날 축
복해주는 것만 같았지. 수지도 나를 봐서 반가웠는지 처음으로 나한테 말
을 걸어줬다. 그렇게 친해졌…….
“강인아!”
“응?”
날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수지가 서 있었다. 하얀 원
피스에 가슴엔 리본을 달고 생머리를 뒤로 살짝 묶은 모습. 포니와 다른 느
낌에 난 멍할 수 밖에 없었다. 크윽, 감동이야. 역시 내 여자친구. 너무 이쁘
잖아!
“응? 왔구나. 얼마 안 기다…….”
난 말을 하다가 중간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수지 뒤에 있는 남자는 장식
품쯤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말을 꺼내자 수지 앞으로 다가와 수지를 뒤로 감
싸듯이 섰다. 뭐야, 이 자식은. 내기 없는 새에 내가 모르는 동생이라도 만
들었나?
“저기, 형씨. 누군지 모르지만 저 여자 친구 만나러 왔거든요? 좀 비켜주실
래요?”
왠지 불안한 예감에 삐딱하게 나갈 수 밖에 없었다. 뭐지? 갑자기 심하게
불안해지는 이 느낌. 상대방이 피식 웃었다.
“하하하. 이봐요. 강인씨라고 했나. 누가 누구 여자 친구인지는 모르겠지
만 함부로 말하지 말아줄래요? 진짜 남자친구 기분 나쁘거든요?”
“……남자친구?”
“내가 진짜 남자친구거든요? 진짜 중증이네 이 친구. 수지가 자기 따라다
니는 친구 있다길래 그냥 친구거니 했건만 남자친구? 수지야. 이 녀석한테
내 이야기 안 했어?”
“으, 응? 응. 군대 갔다가 막 제대했거든.”
“군대나 다녀오신 분이 이래? 정신상태가 썩었구만. 이봐요, 군대에서 뭘
배웠어? 엉?”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난 멍한 표정으로 수지를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자신을 남자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봤다. 키는 나보다 한 5센티 커
보인다. 185정도 될 것 같은 키. 제법 운동을 한 듯 운동 한 사람 특유의 탄
탄한 몸이 옷 속에 꿈틀거리는 것 같다. 팔뚝도 두껍다. 목 근육이 탄탄하
게 발달되어 있다. 제법 잘 생겼다. 머리도 길다. 난 혹시나 하는 질문에 꿈
틀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떨리는 입으로 겨우, 겨우 한 마디 내 뱉었다.
“사, 사귄지……얼마나 되셨죠?”
“1년 됐수다. 이제 좀 떨어져 주시죠? 제 여자 친구가 불안해하거든요?”
수지가 엄청 불안해한다. 날 못 보고 있다. 애꿎은 돌을 발로 차고 있다. 불
안해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머리가 안 돌아간다. 이 상
황을 거부한다.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란 말이야! 군대 있을 때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 몇 번 있었지만 그 때마다 넌 침착하게 위기를 넘겼잖
아! 배에 불이 났을 때도 침착하게 1차 대응해서 포상휴가도 나갔었잖아! 머
리를 얼차려 주고 심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눈을 질끈 감고 길게 심호흡
을 한 번 하고나자 머리가 조금씩 돌아갔다.
“1년이요?”
“1년이라고 했잖아. 우리 바쁘니까 좀 떨어져 줄래? 난 수지가 같이 가자길
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떨거지 떼어내려고 했던 거였어?”
그래. 이젠 떨거지인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으로 수지를 바라봤
다. 한 번 쯤은 내 얼굴을 봐 줬으면 좋겠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날 보고 있
다. 가슴에 뭔가 울컥한다. 눈물이 나오려고 시야가 흐려진다. 난 이를 악물
고 눈물을 참았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난동을 부
릴까. 너 같은 놈 내가 알 바 아니다라고 하면서 소란을 피울까. 싸움이라
면 자신 있는 편은 아니지만 어디서 맞고 다닐 실력도 아니다. 남들이 때린
만큼 때려준다. 아니면…….
“하하하. 미안해, 수지야. 내가 그렇게 널 괴롭혔나 보구나. 알았어. 이제부
터 연락 안 할게. 남자 친구 있었다면 진작에 얘기하지 그랬어. 없는 줄 알
았잖아.”
“그래도 말 통하는 친구네. 수지야, 가자.”
“으, 응? 응…….”
이름도 모를 그 녀석은 그렇게 갑자기 수지 팔을 끌고 어디로 가려고 했
다. 난 움찔하면서 순간 손을 뻗을 뻔 했다. 아냐, 이제 내 여자 친구가 아
냐. 1년 됐다 잖아. 이젠, 내, 여자 친구가, 아냐.
가슴으로 내 뱉는 이런 말이 가슴을 이렇게 아프게 할 줄 처음 알았다. 여
자 친구가 아니게 됐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아린다. 수지는 팔을 잡히자 움
찔하면서 날 쳐다봤다. 불안한 표정.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이 무엇일
까. 난 떨리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힘들게 웃어줬다. 미소라고 할 수 있을
까? 그냥 가. 내가 놔줄게. 군대에 있는 놈 기다리기 힘들었겠지. 그래, 이
해 할 수 있어. 이해…할 수…있을 것…같아…….
“어이, 강인씨. 한 마디만 더 할게요. 내 여자 친구한테 연락하지 마소. 기
분 나쁘니까.”
난 그저 웃었다. 그 녀석은 땅에 침을 뱉고는 수지를 끌고 사라졌다. 수지
는 나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땅에 숙인 채 그 녀석을 따라 사라졌다. 그 뒤
로 날 보지 않았다. 난 멍하니 수지만 보고 있었다. 공원 갈림길 너머로 그
녀석과 수지가 사라졌지만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갈림길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수지가 장난이었어, 하고 튀어나오진 않을까. 널 놀래 키려
고 그랬던 거야, 하면서 튀어나오진 않을까. 그럴 가능성은 내가 군 생활하
다가 김정일을 잡아 일 계급 특진되고 제대하는 것만큼의 가능성이 없는 상
황이었지만, 내겐 절박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겨울 해가 일찍 지
는 법이긴 하지만, 어느새 가로등이 없이는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로 어두
워졌다.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난 힘겹게 벤치에 주저앉았다. 주위에 사
람들은 다 사라졌다. 산책 할 시간도 지났나보다. 몸이 급격히 식어간다. 하
지만 육체적 추위보다는 정신적 추위가 더 추웠다. 더 매서웠다. 울지 않으
리라, 울지 않겠어. 울지 않겠어. 울지 않겠단 말이야…….
그런데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묻은 채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현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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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늦게 한 편 더 업
전 개인적으로 슬픈 이야기를 좋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