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시모넥스는 꿈 속에서조차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과거의 슬픈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 하나 재구성 되어 끔찍한 영상을 만들고 있었다.
결국 시모넥스는 모처럼 든 낮잠에서 진땀을 빼며 깨어날 수 밖에 없었다.
마합의 재판정, 한참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던 그에게 처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고 가까스로 도망친 그에게는 척살령이라는 꼬리가 따라 붙었다. 수 년간 자신과 우정을 나누었던 마술사들을 어쩔 수 없이 다치게 하거나 죽여야만 했다. 영문도 모르게 죽은 민간인들도 많았다.
시모넥스는 야크가 혹시 아니문의 집에 아직까지 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사진을 발견하지는 않았을까 했다.
"그 녀석도 사람이라면 그 사진만큼은 없애지 않았겠지. 가족들과 찍은 마지막 사진인데."
시모넥스는 야크가 그 사진을 분명 보았을 것 같다는 두려움의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네 명이 같이 지낸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 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해왔는데 그까짓 것 때문에 불신이 싹 트겠는가.
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엔 여전히 무거운 돌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듯 했다. 시모넥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 마디 남기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루빨리 마합으로 달려가 야크를 돕는게, 그리고 그의 적이자 나의 적인 아니문을 내 손으로 박살내는거야 말로 지금까지 나의 존재를 속여온 것에 대한 속죄가 되겠지."
시모넥스가 야크에게 아니문의 집에 있는 돈을 훔치라고 했던 것은 그 이유도 있었다. 아니문이 자신의 집에 야크가 왔다는 걸 알게 되면 아몬으로 돌아올 터였고, 그곳에서 이미 꼬일대로 꼬여버린 관계를 청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사이, 시모넥스와 플렉스를 함정에 빠트리고 좋아라 하고 있던 나딘과 소토스는 다시 네스페타리온으 오디즈의 본부로 돌아가 나머지 노모르와 크루엘티 등과 합류했다.
모두들 회의장에 모이자 소토스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에덴 님의 말씀처럼 바운더우사에 녀석들이 왔었습니다."
"어쨌든 그 녀석들은 제로인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잘 정리해놓았으니 이미 저 세상에 가있을거라고. 이젠 더 중요한 일을 할 차례지."
노모르가 술에 취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딸꾹질을 해대며 그의 말에 힘겹게 답했다.
"딸꾹, 그러면 이제 나딘이나 식스 닷을, 딸꾹, 찾으러 가는건가?"
나딘은 언제나 일부러 하고 있는 그 술주정에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을 하고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육지가 있는 행성의 북반구 약 34억㎢를 모두 뒤진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다.
왠만해서는 입을 잘 열지 않는 크루엘티가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어차피 이 넓은 땅을 뒤지는 일은 오래 걸리는 일이다. 비록 에덴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임무를 내려 주셨지만 4명이서 하든 2명이서 하든 긴 세월이 걸릴 일이란 말이지. 우리 모두가 다 그 일에 동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싸늘한 적막을 깨고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동은 일제히 그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안녕하십니까, 캠 프로핑 사제!"
그들끼리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사제'라는 표현을 듣는 사람은 인코니타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았다. 소위 '에덴님'을 제외하고 5계, 크레도스 까지가 일반적이었다.
어쨌든 현재 인코니타를 분류하자면, 제일 낮은 단계에 있는 소토스로서는 모든 이들에게 사제라 칭해야 될 테고 인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7계 라루탄, 6계 제로인과 땅에 묻혀 있는 상태인 12계 샤이먼드를 제외하면
크루엘티, 노모르, 나딘, 그리고 캠 프로핑이 남는다. 명목 상으로는 8계이지만 사실상 크레도스 다음의 실권자인 그는 인코니타에서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의 능력은 '에너지'. 상세히 말하자면 주로 핵융합에서 나올법한 엄청난 에너지와 발열 등, 비상식적 이리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을 엄청난 온도로 끌어 올려서 비행을 한다거나 주변을 핵폭발로 초토화 시켜버릴 수도 있지만 불사의 단계에 이를 수 없었던 한계는 그 에너지가 유한함에 있었다.
'생명'이라는 개념 없이 완전히 파괴시키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않는 네렌이나 주변이 진공이 아니라 조금의 파동도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나는 크레도스와는 달리 그의 육체는 단지 자신이 방출하는 에너지에서 살아남을 만큼 강인할 뿐, 가루가 되어도 살아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네스트에서 계속 세력 확장을 하고, 가끔씩 에덴에게 오는 5계 이상의 인코니타 들을 제외하면 캠이 거의 내부에서는 실세였기 때문에 그의 밑에 있는 자들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곱슬머리의 금발에, 180 후반의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연한 붉은빛이 도는 정열적인 겉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그가 매서운 표정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야크라는 작자……때문에 걱정하는건가."
"꼭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만, 지금 저희가 SSO를 거의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교합의 영향을 크게 받는 네스페타리온 정부의 힘이 SSO에 미치는 것도 무시할 순 없어서 인공위성을 마음대로 동원하여 에티노브나 식스 닷을 찾는 거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캠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나딘의 말을 무시하듯이 끊었다.
"변명은 듣고 싶지 않다. 그들을 찾는 것은 네놈들의 몫이고, 야크는 내가 책임진다. 아직 에덴님께서 별도의 명령을 내려 주시지는 않았지만 곧 어떤 형태로든지 하교를 하실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도록 해. 그리고, 소토스."
"예?"
"넌 SSO에 있는 만큼 현재 야크의 위치를 최대한 파악해봐라. 에티노브와 식스 닷을 찾는 일을 물론 우선시 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야."
캠은 야크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해치워보이겠다는 듯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그 말을 남기고는 다시 어두운 통로로 사라져갔다.
SSO. 과거 페르핀에서 프로티스가 떨어져 나왔을 때 소토스가 마침 이 기관에 숨어 있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계기로 인코니타와 인연 아닌 인연을 맺게 되었던 이 기관. 그렇게 인코니타가 이 기관을 장악하기로 필사적인 노력을 한 끝에 이 기관은 거의 인코니타의 하위개념 정도로 전락해 버린 상태였다.
물론 컴퓨터에는 전문적인 지식이 아주 많지는 않던 인코니타들이다 보니, 네레이드의 해킹 실력에 뚫려서 정보가 줄줄 새는 경우가 다소 있기는 했지만 명실상부한 그들 나름의 정보기관으로 남아있음에는 틀림 없었다.
어찌 되었든, 모두들 그러고 있는 때에 야크는 기차를 타고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도시 동구 13거주단지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황무지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고 했지.'
시모넥스에게 전해 들은 대로, 마합은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주거단지 위쪽으로는 그야 말로 천하의 공지(空地), 황량한 눈밭 그 자체 였던 것이다.
오직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주변의 풍경과 상당히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치직 거리는 가로등 하나.
야크는 씨익 웃으며 멀리 보이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느새 도착한 가로등의 한쪽 면에는 아니나다를까 자그마한 키패드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는 비록 비밀번호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잠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시모넥스에게서 들은 '마합의 구조' 때문이었다.
마합의 건물은 상당히 특이한 형태로 설계 되어 있었다. 이곳 가로등이 있는 눈밭이 갈라진 뒤, 그 밑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보통 건물의 수십 층 높이인 280m나 되는 천장에 그 4~5배 정도 되는 넓은 가로, 세로의 길이를 가진 광대한 로비가 나타난다.
그 거대한 직육면체 형태의 로비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마합으로 들어오 기에 적격한 사람인지 부적격한 사람인지, 그 외에 몇가지 휴식공간 등 기본적인 시설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로비는 바로 마합의 본부와 이어지지 않는다. 실상 반지름이 10km나 되는 거대한 반구(半球)형태의 '진짜 마합'은 로비에서부터 약 700m가량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로비와 거대 돔은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 사이는 흙이나 암석은 전혀 없이, 놀랍게도 그야 말로 텅 비어있다. 로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서 각기 돔으로 수선(垂線)을 내렸을 때 돔의 곡면과 닿게 되는 서쪽 접점과 동쪽 접점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거대한 무게의 흙, 돌, 로비가 무너지지 않고, 로비와 돔 사이의 공간 양쪽에 있는 토양이 쏟아지지 않으며 중력에 반하는 것은 바로 로비와 돔 사이의 공중에 둥둥 떠있는 '마방진-지(地)' 때문이었다.
마합에는 3가지의 마방진이 있다. 각기 태고적으로부터 내려오는 신기한 물건이라 알려져있는데 각기 천(天), 지(地), 인(人)이다.
현재 마방진-천(天)은 마합의 중심부에 봉인되어 있다. 사용자의 마음대로 기상 현상과 자연 현상 등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무서운 물건이다.
그리고 마방진-인(人)은 시모넥스의 513성물 중 하나에 포함되는데, 그가 마합에서 도망칠 당시에 훔쳐 달아난 것이다. 그 마방진은 사용자를 111명 만큼의 광전사의 힘, 내구력, 생명력과 민첩성 등을 가진 초인으로 만들어준다.
마지막으로 마방진-지(地)는 사용자의 마음 대로 자기장이나 중력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을 조종할 수가 있는데, 그 힘으로 로비와 돔 사이에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해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로비와 돔을 잇는 수단은 하나 밖에 없다. 비행체. '수송선(Transport Ship)'이라 불리우는 이 교통수단들은 모두 59대로, 로비와 돔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따라서 만약 야크가 비밀번호를 눌러 엘리베이터를 작동 시킨 뒤 로비에 간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위험 요소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데다가 로비로 수송선이 올라오지 않으면 야크가 돔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진지한 고려를 해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크의 고민 속으로, 시모넥스가 했던 말이 이내 떠올랐다.
「데스라비에는 치밀한 인물이야.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하겠지. 지금 노아가 살아있다면 네가 위트레시아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데스라비에에게 연락을 했을테고 그는 분명 로비에 어느 정도의 병력을 배치해 두었을거야. 하지만 라이더는 없을거야. 일단 너를 떠보기 위함 이겠지. 네가 로비를 쓸어버린다면 그는 분명 라이더를 올려보낼거야.」
「흠, 그렇다면 문제는 그 라이더를 때려부수고 놈의 수송선을 타고 내가 내려가는 일이군.」
「그건 가능할거야. 수송선은 본부의 컴퓨터로부터 통제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로비에 도킹해 놓은 상태라면 네가 그녀석을 쓰러트린뒤 그것을 타고 돔에 가면 돼. 물론 그 다음부터가 문제겠지만.」
야크는 대략적인 구도가 잡혔다. 지금 내려갔다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마술 세례를 받아 저세상으로 갈게 뻔했던 것이다.
그는 현재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다시 점검해보았다. 몇 개 못쓰게 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게슌토 기관총도 많이 남아있었고 A3 수류탄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 틈에 딱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헬기에서 탈출하기 얼마 전, 기내에 있던 무기들 중 몇 개를 점퍼 속에 넣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대부분을 다 잃고 하나만 남은 것이었다.
크레모아. 대인살상용 지뢰. 폭파하면 부채꼴 모양으로 수백 개의 쇠구슬이 튀어나와 50m 범위의 모든 것들을 싹쓸어버린다. 250m까지도 위험거리로써 그야 말로 한방에 주위를 날려 버리는 것이다. 후폭풍도 있어 사용할 때는 멀리 떨어져 있기까지 해야 한다.
야크는 씨익 웃고는 자신있게 가로등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와 함께,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리면서 발밑의 땅이 쩌억 갈라지고는 보통 건물에서 쓰이는 엘리베이터보다 6~7배 정도는 큰 승강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크가 가지고 있던 크레모아에는 다행히도 인계철선과 격발장치 등이 같이 딸려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격으로 폭파시킬 수가 있었다.
그가 타자마자, 엘리베이터는 문이 닫히더니 순식간에 지하로 내려갔다. 로비까지의 거리는 약 300m. 엘리베이터의 속도는 초속 6~7m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1분도 안되어 로비에 도달하게 될 것이었다.
야크는 총을 몇 방 쏘아 엘리베이터의 천장에 구멍을 낸 뒤에 미리 설치한 장비를 승강기 내부에 고정시켜 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꼭대기의 구멍을 비집고 올라가 강풍을 맞으며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닿기까지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이 때다'
마침내 바닥이 야크의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뛰어올라 케이블을 붙잡았다. 그리고, 로비로의 문이 열리자마자 격발장치의 버튼은 눌려졌다.
엘리베이터의 통로 속의 낮은 조명에 비친 야크의 얼굴은 일순간 저승사자의 그것이 되어있었다.
한편, 굉장한 폭발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물론 로비에 있던 모든 마술사들은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야 말았다.
야크는 여유롭게 케이블을 타고 내려오면서 이미 폐허가 되버린 로비를 '확인사살' 하기 위해 A3 수류탄을 몇 개 더 집어 던졌고 곳곳에서 아비규환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이미 피투성이의 지옥, 학살의 대현장이 되버린 로비에 당도한 야크는 멀쩡하게 달려있는 마지막 CCTV 1개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올려 V 표시를 해보였다.
"70명? 그 정도는 나가 떨어진 것 같군. 또 크게 죄를 지었어……네놈들이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생각해라."
그는 진홍빛 공기가 쌓인 답답한 그곳의 시체들을 발로 대충 걷어차며 점점 더 큰 죄악을 범할 자신에게 정신무장을 하고 있었다.
"피 튀기는 전장……과거 수 천년 전에 인간들과 벌였던 일들을 이곳에서 되풀이하는군. 피곤하게 되겠어."
결국 시모넥스는 모처럼 든 낮잠에서 진땀을 빼며 깨어날 수 밖에 없었다.
마합의 재판정, 한참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던 그에게 처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고 가까스로 도망친 그에게는 척살령이라는 꼬리가 따라 붙었다. 수 년간 자신과 우정을 나누었던 마술사들을 어쩔 수 없이 다치게 하거나 죽여야만 했다. 영문도 모르게 죽은 민간인들도 많았다.
시모넥스는 야크가 혹시 아니문의 집에 아직까지 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사진을 발견하지는 않았을까 했다.
"그 녀석도 사람이라면 그 사진만큼은 없애지 않았겠지. 가족들과 찍은 마지막 사진인데."
시모넥스는 야크가 그 사진을 분명 보았을 것 같다는 두려움의 수렁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네 명이 같이 지낸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그 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해왔는데 그까짓 것 때문에 불신이 싹 트겠는가.
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엔 여전히 무거운 돌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듯 했다. 시모넥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 마디 남기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루빨리 마합으로 달려가 야크를 돕는게, 그리고 그의 적이자 나의 적인 아니문을 내 손으로 박살내는거야 말로 지금까지 나의 존재를 속여온 것에 대한 속죄가 되겠지."
시모넥스가 야크에게 아니문의 집에 있는 돈을 훔치라고 했던 것은 그 이유도 있었다. 아니문이 자신의 집에 야크가 왔다는 걸 알게 되면 아몬으로 돌아올 터였고, 그곳에서 이미 꼬일대로 꼬여버린 관계를 청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사이, 시모넥스와 플렉스를 함정에 빠트리고 좋아라 하고 있던 나딘과 소토스는 다시 네스페타리온으 오디즈의 본부로 돌아가 나머지 노모르와 크루엘티 등과 합류했다.
모두들 회의장에 모이자 소토스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에덴 님의 말씀처럼 바운더우사에 녀석들이 왔었습니다."
"어쨌든 그 녀석들은 제로인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잘 정리해놓았으니 이미 저 세상에 가있을거라고. 이젠 더 중요한 일을 할 차례지."
노모르가 술에 취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딸꾹질을 해대며 그의 말에 힘겹게 답했다.
"딸꾹, 그러면 이제 나딘이나 식스 닷을, 딸꾹, 찾으러 가는건가?"
나딘은 언제나 일부러 하고 있는 그 술주정에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을 하고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육지가 있는 행성의 북반구 약 34억㎢를 모두 뒤진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다.
왠만해서는 입을 잘 열지 않는 크루엘티가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어차피 이 넓은 땅을 뒤지는 일은 오래 걸리는 일이다. 비록 에덴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임무를 내려 주셨지만 4명이서 하든 2명이서 하든 긴 세월이 걸릴 일이란 말이지. 우리 모두가 다 그 일에 동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잠깐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그 싸늘한 적막을 깨고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동은 일제히 그에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안녕하십니까, 캠 프로핑 사제!"
그들끼리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사제'라는 표현을 듣는 사람은 인코니타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았다. 소위 '에덴님'을 제외하고 5계, 크레도스 까지가 일반적이었다.
어쨌든 현재 인코니타를 분류하자면, 제일 낮은 단계에 있는 소토스로서는 모든 이들에게 사제라 칭해야 될 테고 인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7계 라루탄, 6계 제로인과 땅에 묻혀 있는 상태인 12계 샤이먼드를 제외하면
크루엘티, 노모르, 나딘, 그리고 캠 프로핑이 남는다. 명목 상으로는 8계이지만 사실상 크레도스 다음의 실권자인 그는 인코니타에서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의 능력은 '에너지'. 상세히 말하자면 주로 핵융합에서 나올법한 엄청난 에너지와 발열 등, 비상식적 이리만큼 강렬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몸을 엄청난 온도로 끌어 올려서 비행을 한다거나 주변을 핵폭발로 초토화 시켜버릴 수도 있지만 불사의 단계에 이를 수 없었던 한계는 그 에너지가 유한함에 있었다.
'생명'이라는 개념 없이 완전히 파괴시키지 않는 한 절대 죽지 않는 네렌이나 주변이 진공이 아니라 조금의 파동도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나는 크레도스와는 달리 그의 육체는 단지 자신이 방출하는 에너지에서 살아남을 만큼 강인할 뿐, 가루가 되어도 살아나는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네스트에서 계속 세력 확장을 하고, 가끔씩 에덴에게 오는 5계 이상의 인코니타 들을 제외하면 캠이 거의 내부에서는 실세였기 때문에 그의 밑에 있는 자들은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곱슬머리의 금발에, 180 후반의 훤칠한 키에 떡 벌어진 어깨, 연한 붉은빛이 도는 정열적인 겉모습이 언뜻 보기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그가 매서운 표정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 야크라는 작자……때문에 걱정하는건가."
"꼭 그런 것 만은 아닙니다만, 지금 저희가 SSO를 거의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교합의 영향을 크게 받는 네스페타리온 정부의 힘이 SSO에 미치는 것도 무시할 순 없어서 인공위성을 마음대로 동원하여 에티노브나 식스 닷을 찾는 거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캠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나딘의 말을 무시하듯이 끊었다.
"변명은 듣고 싶지 않다. 그들을 찾는 것은 네놈들의 몫이고, 야크는 내가 책임진다. 아직 에덴님께서 별도의 명령을 내려 주시지는 않았지만 곧 어떤 형태로든지 하교를 하실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도록 해. 그리고, 소토스."
"예?"
"넌 SSO에 있는 만큼 현재 야크의 위치를 최대한 파악해봐라. 에티노브와 식스 닷을 찾는 일을 물론 우선시 해야겠지만 어느 정도 미리 알아보기 위함이야."
캠은 야크는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해치워보이겠다는 듯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그 말을 남기고는 다시 어두운 통로로 사라져갔다.
SSO. 과거 페르핀에서 프로티스가 떨어져 나왔을 때 소토스가 마침 이 기관에 숨어 있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계기로 인코니타와 인연 아닌 인연을 맺게 되었던 이 기관. 그렇게 인코니타가 이 기관을 장악하기로 필사적인 노력을 한 끝에 이 기관은 거의 인코니타의 하위개념 정도로 전락해 버린 상태였다.
물론 컴퓨터에는 전문적인 지식이 아주 많지는 않던 인코니타들이다 보니, 네레이드의 해킹 실력에 뚫려서 정보가 줄줄 새는 경우가 다소 있기는 했지만 명실상부한 그들 나름의 정보기관으로 남아있음에는 틀림 없었다.
어찌 되었든, 모두들 그러고 있는 때에 야크는 기차를 타고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도시 동구 13거주단지의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황무지 지하에 자리하고 있다고 했지.'
시모넥스에게 전해 들은 대로, 마합은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주거단지 위쪽으로는 그야 말로 천하의 공지(空地), 황량한 눈밭 그 자체 였던 것이다.
오직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주변의 풍경과 상당히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치직 거리는 가로등 하나.
야크는 씨익 웃으며 멀리 보이는 그곳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느새 도착한 가로등의 한쪽 면에는 아니나다를까 자그마한 키패드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는 비록 비밀번호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잠시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었다. 시모넥스에게서 들은 '마합의 구조' 때문이었다.
마합의 건물은 상당히 특이한 형태로 설계 되어 있었다. 이곳 가로등이 있는 눈밭이 갈라진 뒤, 그 밑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보통 건물의 수십 층 높이인 280m나 되는 천장에 그 4~5배 정도 되는 넓은 가로, 세로의 길이를 가진 광대한 로비가 나타난다.
그 거대한 직육면체 형태의 로비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마합으로 들어오 기에 적격한 사람인지 부적격한 사람인지, 그 외에 몇가지 휴식공간 등 기본적인 시설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로비는 바로 마합의 본부와 이어지지 않는다. 실상 반지름이 10km나 되는 거대한 반구(半球)형태의 '진짜 마합'은 로비에서부터 약 700m가량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로비와 거대 돔은 엘리베이터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 사이는 흙이나 암석은 전혀 없이, 놀랍게도 그야 말로 텅 비어있다. 로비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서 각기 돔으로 수선(垂線)을 내렸을 때 돔의 곡면과 닿게 되는 서쪽 접점과 동쪽 접점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거대한 무게의 흙, 돌, 로비가 무너지지 않고, 로비와 돔 사이의 공간 양쪽에 있는 토양이 쏟아지지 않으며 중력에 반하는 것은 바로 로비와 돔 사이의 공중에 둥둥 떠있는 '마방진-지(地)' 때문이었다.
마합에는 3가지의 마방진이 있다. 각기 태고적으로부터 내려오는 신기한 물건이라 알려져있는데 각기 천(天), 지(地), 인(人)이다.
현재 마방진-천(天)은 마합의 중심부에 봉인되어 있다. 사용자의 마음대로 기상 현상과 자연 현상 등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무서운 물건이다.
그리고 마방진-인(人)은 시모넥스의 513성물 중 하나에 포함되는데, 그가 마합에서 도망칠 당시에 훔쳐 달아난 것이다. 그 마방진은 사용자를 111명 만큼의 광전사의 힘, 내구력, 생명력과 민첩성 등을 가진 초인으로 만들어준다.
마지막으로 마방진-지(地)는 사용자의 마음 대로 자기장이나 중력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힘들을 조종할 수가 있는데, 그 힘으로 로비와 돔 사이에 강력한 자기장을 형성해 빈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로비와 돔을 잇는 수단은 하나 밖에 없다. 비행체. '수송선(Transport Ship)'이라 불리우는 이 교통수단들은 모두 59대로, 로비와 돔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따라서 만약 야크가 비밀번호를 눌러 엘리베이터를 작동 시킨 뒤 로비에 간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위험 요소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데다가 로비로 수송선이 올라오지 않으면 야크가 돔으로 내려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진지한 고려를 해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야크의 고민 속으로, 시모넥스가 했던 말이 이내 떠올랐다.
「데스라비에는 치밀한 인물이야.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택하겠지. 지금 노아가 살아있다면 네가 위트레시아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데스라비에에게 연락을 했을테고 그는 분명 로비에 어느 정도의 병력을 배치해 두었을거야. 하지만 라이더는 없을거야. 일단 너를 떠보기 위함 이겠지. 네가 로비를 쓸어버린다면 그는 분명 라이더를 올려보낼거야.」
「흠, 그렇다면 문제는 그 라이더를 때려부수고 놈의 수송선을 타고 내가 내려가는 일이군.」
「그건 가능할거야. 수송선은 본부의 컴퓨터로부터 통제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에 로비에 도킹해 놓은 상태라면 네가 그녀석을 쓰러트린뒤 그것을 타고 돔에 가면 돼. 물론 그 다음부터가 문제겠지만.」
야크는 대략적인 구도가 잡혔다. 지금 내려갔다가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마술 세례를 받아 저세상으로 갈게 뻔했던 것이다.
그는 현재 가지고 있는 무기들을 다시 점검해보았다. 몇 개 못쓰게 된 것들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게슌토 기관총도 많이 남아있었고 A3 수류탄도 많이 남아있었다.
그 틈에 딱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헬기에서 탈출하기 얼마 전, 기내에 있던 무기들 중 몇 개를 점퍼 속에 넣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대부분을 다 잃고 하나만 남은 것이었다.
크레모아. 대인살상용 지뢰. 폭파하면 부채꼴 모양으로 수백 개의 쇠구슬이 튀어나와 50m 범위의 모든 것들을 싹쓸어버린다. 250m까지도 위험거리로써 그야 말로 한방에 주위를 날려 버리는 것이다. 후폭풍도 있어 사용할 때는 멀리 떨어져 있기까지 해야 한다.
야크는 씨익 웃고는 자신있게 가로등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와 함께, 시끄러운 기계음이 들리면서 발밑의 땅이 쩌억 갈라지고는 보통 건물에서 쓰이는 엘리베이터보다 6~7배 정도는 큰 승강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크가 가지고 있던 크레모아에는 다행히도 인계철선과 격발장치 등이 같이 딸려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원격으로 폭파시킬 수가 있었다.
그가 타자마자, 엘리베이터는 문이 닫히더니 순식간에 지하로 내려갔다. 로비까지의 거리는 약 300m. 엘리베이터의 속도는 초속 6~7m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1분도 안되어 로비에 도달하게 될 것이었다.
야크는 총을 몇 방 쏘아 엘리베이터의 천장에 구멍을 낸 뒤에 미리 설치한 장비를 승강기 내부에 고정시켜 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꼭대기의 구멍을 비집고 올라가 강풍을 맞으며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닿기까지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이 때다'
마침내 바닥이 야크의 눈에 들어왔을 때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뛰어올라 케이블을 붙잡았다. 그리고, 로비로의 문이 열리자마자 격발장치의 버튼은 눌려졌다.
엘리베이터의 통로 속의 낮은 조명에 비친 야크의 얼굴은 일순간 저승사자의 그것이 되어있었다.
한편, 굉장한 폭발음과 함께 엘리베이터는 물론 로비에 있던 모든 마술사들은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야 말았다.
야크는 여유롭게 케이블을 타고 내려오면서 이미 폐허가 되버린 로비를 '확인사살' 하기 위해 A3 수류탄을 몇 개 더 집어 던졌고 곳곳에서 아비규환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이미 피투성이의 지옥, 학살의 대현장이 되버린 로비에 당도한 야크는 멀쩡하게 달려있는 마지막 CCTV 1개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올려 V 표시를 해보였다.
"70명? 그 정도는 나가 떨어진 것 같군. 또 크게 죄를 지었어……네놈들이 지도자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생각해라."
그는 진홍빛 공기가 쌓인 답답한 그곳의 시체들을 발로 대충 걷어차며 점점 더 큰 죄악을 범할 자신에게 정신무장을 하고 있었다.
"피 튀기는 전장……과거 수 천년 전에 인간들과 벌였던 일들을 이곳에서 되풀이하는군. 피곤하게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