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해방이다. 낄낄.”
“그래. 으샤! 2년간의 고생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거야!”
“결실일까? 그냥 결과 아냐?”
“짜식.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그게 그거잖아.”
“그래? 뭐, 속 편하게 생각하자고.”
개구리 모자. 개구리 야상. 반짝 반짝 빛나는 군화. 아, 세상이 날 반겨주
는 것 같아. 모처럼 날씨도 맑잖아? 삼한 사온이라는 한국의 겨울 날씨 답
지 않게 요 일주일간은 심각하게 추웠다. 내가 있는 곳이 비교적 따뜻한 남
쪽임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영상으로 가지 못하고 영하에 머물러 있던 날씨
였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내가 딱 정문을 나서는 날 날씨가 풀렸다. 아 요놈.
신통방통하단 말이야. 덕분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딱 찔러
넣고 당당하게 헌병 앞을 통과 했다. 그리고 헌병 앞에서 당당하게 핸드폰
을 건빵주머니에서 꺼내 전화하기. 낄낄. 아 내가 생각해도 너무 멋진 것 같
아. 같이 우루루 나온 동기들은 나의 용기를 다들 칭찬한다. 어쩔 테냐 헌병
아. 잡아 갈 텐가? 전역하는 이 나를? 크크크크크. 그렇게 집에 간단히 전화
하고 동기들과 터미널로 향하다보니 어느샌간 10여명이 되던 동기들이 다
흩어지고 우리 배에서 같이 생활했던 동기만 남게 되었다.
“너 제대하고 뭐 할 거냐?”
“글쎄. 복학하지 않을까?”
“복학? 하긴. 복학도 해야 하니까.”
“넌 뭐 할 건데?”
“글쎄. 일단 여자 친구 만나보고 생각하려고. 낄낄.”
“녀석. 오랜만에 만났다고 너무 힘 빼지 마라. 군 생활하는 동안 축적한 정
력 다 날라 간다.”
“그건 네 녀석이 걱정 안 해도 돼, 임마.”
2년 동안 동거 동락했던 동기와도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다. 2년간의 생고
생이 제대 하나로 모두 보상받은 거라고 믿는 녀석. 23년을 홀로 살아와서
여자 친구가 면회 오는 날 언제나 부럽게 쳐다보는 녀석. 그러면서 조리병
이라고 주말이면 날 주방으로 데리고 와서 맛있는 음식을 해 준 녀석. 이 녀
석과도 추억이 많지. 주말에 사관 식당에서 같이 삼겹살 구어 먹다가 당직
사관한테 걸려서 과실점수 얻을 뻔한 점. 함장님의 명령으로 신문 만든다
고 음식 잘 만드는 법 취재한답시고 주말 내내 붙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많
이 얻어먹은 점. 입이 심심하면 달려가서 냉장고 열쇠 얻어서 라면 한두 개
꺼내어 뽀글이 해 먹었던 기억 등등. 덕분에 내 군 생활은 풍요로웠다. 하하
하하.
“잘 가라. 여기서 헤어져야 겠네. 난 전라도 가야 하니까. 나중에 올 일 있
으면 꼭 연락해라! 내가 설마 너 하나 못 재워주겠냐.”
“그래. 너도 서울 올 일 있음 연락해. 나도 너 하난 재워 줄 수 있다. 여자
친구랑 같이 만나러 갈꾸마.”
“됐다, 마. 누구 가슴에 염장 지를 일 있냐. 군 생활 하면서 잊은 모양인데,
나도 300만을 자랑하는 무적의 솔로부대원이다, 임마.”
“낄낄. 그래, 잘 가라. 난 커플 부대원으로서 널 맞이하마. 전쟁 한 판 벌이
자. 낄낄.”
우리 둘은 그렇게 싱겁게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광주로 가는 버스가 먼
저 와서 녀석 먼저 태워 보내고 난 느긋하게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서
울 가는 버스는 꽤 자주 있다. 20분에 한 대 꼴로 있는 편이니까. 하지만 난
월급을 아끼기 위해서 굳이 일반 고속버스를 고집했다. 일반 고속버스가 우
등보다 만원 가까이 싸단 말이야. pc방이 몇 시간이야? 우와. 야간 정액 끊
고도 삼 천 원이 남는다. 아. 군 생활 하다 보니 이런 쪽으로밖에 계산이 안
되네. 심할 때는 외출 나온 시간 10시간을 고대로 pc방에서만 먹고 지냈던
기억도 있다.
난 얌전히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30분은 금방 갔다. 그냥 하
릴 없이 편의점에 들어가 버스에서 먹을 음료수 하나 사고, 의자에 앉아 텔
레비전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중간 중간 간이 pc앞
에 뉴스를 보긴 했지만. 어제만 해도 대기대에서 미친 듯이 뒹굴며 시간 안
간다고 투정 댔는데, 30분은 금방이다. 와, 역시. 사회 시간은 군대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대기대에서 시간이 얼마나 안 가냐면 한 번은 동기들끼
리 대여점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왔다. 만화책 32권, 소설책 8권, 거기에 비
디오까지 덤으로. 그런데 만화책을 다 보고 소설책을 절반가량 보고 낮잠
도 자고 일어나서 비디오도 봤는데 저녁시간이 안됐다! 그걸 깨달은 순간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누워서 책만 봤더니 허리도 아프고, 그렇
다고 나가자니 군화 신기도 귀찮고, 밥 먹으러 가자니 일어나기도 귀찮고
멍하니 누워서 리모컨 버튼을 누르며 깔짝대자니 시간은 미친 듯이 안가
고……. 어제가 오늘처럼만 빨리 가 줬다면 좀 더 빨리 제대 할 수 있었을
까? 낄낄.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아, 나 지금 서울로 올라가.”
“어? 벌써 나왔어?”
“벌써 라니, 섭섭하게. 2년 2개월이라고. 뉴스에서는 군복무 줄어든다지
만, 난 줄어들지도 않고. 아아, 그 시간이여! 얼마나 지루했는데! 마중 나올
수 있어?”
“마중? ……아아, 미안. 나 일이 있어서.”
“에에? 서방님이 제대하는 날짜에 일이 있다니. 오늘 같은 날은 약속을 빼
야지.”
“미안. 정말 중요한 일이라. 내일 보자. 응?”
“내일? ……알았어. 그럼 뭐, 오늘 저녁엔 아는 형들이나 볼게.”
“응. 고마워.”
딸깍. 전화가 끊겼다. 뭔가 좀 서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난 멍하니
창문을 바라봤다. 중요한 약속이란게 무엇일까? 유리창에 수지 얼굴이 그려
졌다.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이 아니라 왠지 무표정한 얼굴이다. 왜 그렇게 쳐
다봐? 버스가 출발하고 난방을 틀자 유리창에 금새 성에가 끼었다. 난 괜히
신경질이 나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수지 얼굴에 손가락으로 엑스자
를 그려봤다. 어느새 수지 얼굴은 사라지고 하얀 성에 위에 내가 그린 엑스
자만 남아있다.
“아, 이 녀석. 짬 냄새 좀 빼고 만나자고 할 것이지. 군바리 냄새가 가득하
잖아.”
“아이, 참. 형도. 그만 놀려요. 저도 이제 민간인이라구요.”
“오늘 나온 녀석이 무슨 민간이이야? 넌 오늘 12시가 지나기 전까진 군인
이야, 임마. 너 싸움나면 경찰서 가는 줄 알아? 너 헌병대한테 끌려가.”
“알아요. 그래도 제대했잖아요.”
난 볼을 부풀렸다. 자글자글 고기 굽는 냄새가 참 반갑다. 이런 분위기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형은 내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그래, 녀석. 수고했다. 오늘은 형이 쏘니까 마음껏 먹어라.”
“어라? 그 말 후회 안 하죠? 군인 많이 먹는 거 몰라요?”
“너 군인 아니라며.”
“오늘까지만 군인 할게요. 낄낄. 형, 일단 한 잔 받으세요.”
자연스럽게 술이 오가는 분위기. 전역식 날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령한테
걸려서 어렵게 기른 머리 어제 다 잘려버렸다. 망할 군대. 꼭 전역하는 사람
한테까지 그래야겠어? 덕분에 내 머리는 이제 갓 입대하는 녀석 마냥 빡빡
밀려있다. 겨우 귀 덮을 수 있게 길렀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
나 신경을 썼는데, 히잉. 공든 탑이 다 무너져 버렸다. 이발병한테 내일 전
역하니까 제발 제발 좀 길게 깎아달라고 사정사정했건만 이 망할 발병이는
어쩔 수 없다며 바리깡으로 그냥 드르륵 밀어버리더라. 넌 어디 제대 할 때
안 그러나 보자! 속으로 시바 시바 하면서 온갖 욕을 다 퍼부었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 오고 나니 서운했던 감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
그래, 머리 모양이 대수냐? 이렇게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발병아, 넌 지
금 이 시간에 점호 청소 하고 있겠지? 난 이렇게 술 마시고 있단다. 그게 너
와 나 차이 아니겠냐. 크하하하하.
왁자지껄. 딱히 하는 이야기는 없다. 그냥 군 생활 이야기, 나는 어땠고 너
는 어땠고. 특공부대 뺨치는 훈련 이야기도 나오고 나도 군 생활 하면서 목
숨 수 십 번 왔다 갔다 했다고 좀 과장해서 이야기 하고. 뭐, 거짓말은 아니
다. 멀미 때문에 아, 이제 죽겠구나 싶은 순간이 솔직히 몇 번 있었으니까.
배 멀미라는 것이 차멀미와 다르게 지속성이 있어서 더 죽는다. 차야 멀미
나면 창문 열고 환기 시키거나 잠시 멈춰서 바깥 공기 좀 쐬고 쉬던가 하지
배 멀미는 그런 게 없다. 육지에 닿는 그 순간까지 멀미는 지속된다, 쭈욱.
그래서 군 생활하면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건 멀미 뿐 이다. 물론 멀
리 때문에 죽을 뻔 했다고 말하진 않았다. 작전 수행하다 죽을 뻔 했다고 조
금 과장하고 오버 했을 뿐이지.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냐? 뭐, 사실 말이야 틀
린 말은 아니다. 배 멀미라는 것이 작전 수행하는 도중에 겪게 되는 일이니
까.
이렇게 제대 후 첫째 날이 지나갔다.
-
뭐, 일단은 시작을 올리고 며칠 만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좀 극악의 연재 속도를 자랑하는지라 업데이트 속도는 느릴 겁니다.
5~6편 정도의 여유 분량은 있지만 앞으로도 이 분량을 유지할 생각이기에..
보시고 욕만 빼고 한 마디씩이라도 적어 주세요.
“그래. 으샤! 2년간의 고생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거야!”
“결실일까? 그냥 결과 아냐?”
“짜식.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그게 그거잖아.”
“그래? 뭐, 속 편하게 생각하자고.”
개구리 모자. 개구리 야상. 반짝 반짝 빛나는 군화. 아, 세상이 날 반겨주
는 것 같아. 모처럼 날씨도 맑잖아? 삼한 사온이라는 한국의 겨울 날씨 답
지 않게 요 일주일간은 심각하게 추웠다. 내가 있는 곳이 비교적 따뜻한 남
쪽임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영상으로 가지 못하고 영하에 머물러 있던 날씨
였다. 그런데 운 좋게도 내가 딱 정문을 나서는 날 날씨가 풀렸다. 아 요놈.
신통방통하단 말이야. 덕분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주머니에 손을 딱 찔러
넣고 당당하게 헌병 앞을 통과 했다. 그리고 헌병 앞에서 당당하게 핸드폰
을 건빵주머니에서 꺼내 전화하기. 낄낄. 아 내가 생각해도 너무 멋진 것 같
아. 같이 우루루 나온 동기들은 나의 용기를 다들 칭찬한다. 어쩔 테냐 헌병
아. 잡아 갈 텐가? 전역하는 이 나를? 크크크크크. 그렇게 집에 간단히 전화
하고 동기들과 터미널로 향하다보니 어느샌간 10여명이 되던 동기들이 다
흩어지고 우리 배에서 같이 생활했던 동기만 남게 되었다.
“너 제대하고 뭐 할 거냐?”
“글쎄. 복학하지 않을까?”
“복학? 하긴. 복학도 해야 하니까.”
“넌 뭐 할 건데?”
“글쎄. 일단 여자 친구 만나보고 생각하려고. 낄낄.”
“녀석. 오랜만에 만났다고 너무 힘 빼지 마라. 군 생활하는 동안 축적한 정
력 다 날라 간다.”
“그건 네 녀석이 걱정 안 해도 돼, 임마.”
2년 동안 동거 동락했던 동기와도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다. 2년간의 생고
생이 제대 하나로 모두 보상받은 거라고 믿는 녀석. 23년을 홀로 살아와서
여자 친구가 면회 오는 날 언제나 부럽게 쳐다보는 녀석. 그러면서 조리병
이라고 주말이면 날 주방으로 데리고 와서 맛있는 음식을 해 준 녀석. 이 녀
석과도 추억이 많지. 주말에 사관 식당에서 같이 삼겹살 구어 먹다가 당직
사관한테 걸려서 과실점수 얻을 뻔한 점. 함장님의 명령으로 신문 만든다
고 음식 잘 만드는 법 취재한답시고 주말 내내 붙어 다니면서 이것저것 많
이 얻어먹은 점. 입이 심심하면 달려가서 냉장고 열쇠 얻어서 라면 한두 개
꺼내어 뽀글이 해 먹었던 기억 등등. 덕분에 내 군 생활은 풍요로웠다. 하하
하하.
“잘 가라. 여기서 헤어져야 겠네. 난 전라도 가야 하니까. 나중에 올 일 있
으면 꼭 연락해라! 내가 설마 너 하나 못 재워주겠냐.”
“그래. 너도 서울 올 일 있음 연락해. 나도 너 하난 재워 줄 수 있다. 여자
친구랑 같이 만나러 갈꾸마.”
“됐다, 마. 누구 가슴에 염장 지를 일 있냐. 군 생활 하면서 잊은 모양인데,
나도 300만을 자랑하는 무적의 솔로부대원이다, 임마.”
“낄낄. 그래, 잘 가라. 난 커플 부대원으로서 널 맞이하마. 전쟁 한 판 벌이
자. 낄낄.”
우리 둘은 그렇게 싱겁게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광주로 가는 버스가 먼
저 와서 녀석 먼저 태워 보내고 난 느긋하게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서
울 가는 버스는 꽤 자주 있다. 20분에 한 대 꼴로 있는 편이니까. 하지만 난
월급을 아끼기 위해서 굳이 일반 고속버스를 고집했다. 일반 고속버스가 우
등보다 만원 가까이 싸단 말이야. pc방이 몇 시간이야? 우와. 야간 정액 끊
고도 삼 천 원이 남는다. 아. 군 생활 하다 보니 이런 쪽으로밖에 계산이 안
되네. 심할 때는 외출 나온 시간 10시간을 고대로 pc방에서만 먹고 지냈던
기억도 있다.
난 얌전히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기다리는 30분은 금방 갔다. 그냥 하
릴 없이 편의점에 들어가 버스에서 먹을 음료수 하나 사고, 의자에 앉아 텔
레비전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중간 중간 간이 pc앞
에 뉴스를 보긴 했지만. 어제만 해도 대기대에서 미친 듯이 뒹굴며 시간 안
간다고 투정 댔는데, 30분은 금방이다. 와, 역시. 사회 시간은 군대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대기대에서 시간이 얼마나 안 가냐면 한 번은 동기들끼
리 대여점에 가서 만화책을 빌려왔다. 만화책 32권, 소설책 8권, 거기에 비
디오까지 덤으로. 그런데 만화책을 다 보고 소설책을 절반가량 보고 낮잠
도 자고 일어나서 비디오도 봤는데 저녁시간이 안됐다! 그걸 깨달은 순간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하루 종일 누워서 책만 봤더니 허리도 아프고, 그렇
다고 나가자니 군화 신기도 귀찮고, 밥 먹으러 가자니 일어나기도 귀찮고
멍하니 누워서 리모컨 버튼을 누르며 깔짝대자니 시간은 미친 듯이 안가
고……. 어제가 오늘처럼만 빨리 가 줬다면 좀 더 빨리 제대 할 수 있었을
까? 낄낄.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아, 나 지금 서울로 올라가.”
“어? 벌써 나왔어?”
“벌써 라니, 섭섭하게. 2년 2개월이라고. 뉴스에서는 군복무 줄어든다지
만, 난 줄어들지도 않고. 아아, 그 시간이여! 얼마나 지루했는데! 마중 나올
수 있어?”
“마중? ……아아, 미안. 나 일이 있어서.”
“에에? 서방님이 제대하는 날짜에 일이 있다니. 오늘 같은 날은 약속을 빼
야지.”
“미안. 정말 중요한 일이라. 내일 보자. 응?”
“내일? ……알았어. 그럼 뭐, 오늘 저녁엔 아는 형들이나 볼게.”
“응. 고마워.”
딸깍. 전화가 끊겼다. 뭔가 좀 서운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난 멍하니
창문을 바라봤다. 중요한 약속이란게 무엇일까? 유리창에 수지 얼굴이 그려
졌다. 환히 웃고 있는 얼굴이 아니라 왠지 무표정한 얼굴이다. 왜 그렇게 쳐
다봐? 버스가 출발하고 난방을 틀자 유리창에 금새 성에가 끼었다. 난 괜히
신경질이 나서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수지 얼굴에 손가락으로 엑스자
를 그려봤다. 어느새 수지 얼굴은 사라지고 하얀 성에 위에 내가 그린 엑스
자만 남아있다.
“아, 이 녀석. 짬 냄새 좀 빼고 만나자고 할 것이지. 군바리 냄새가 가득하
잖아.”
“아이, 참. 형도. 그만 놀려요. 저도 이제 민간인이라구요.”
“오늘 나온 녀석이 무슨 민간이이야? 넌 오늘 12시가 지나기 전까진 군인
이야, 임마. 너 싸움나면 경찰서 가는 줄 알아? 너 헌병대한테 끌려가.”
“알아요. 그래도 제대했잖아요.”
난 볼을 부풀렸다. 자글자글 고기 굽는 냄새가 참 반갑다. 이런 분위기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형은 내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그래, 녀석. 수고했다. 오늘은 형이 쏘니까 마음껏 먹어라.”
“어라? 그 말 후회 안 하죠? 군인 많이 먹는 거 몰라요?”
“너 군인 아니라며.”
“오늘까지만 군인 할게요. 낄낄. 형, 일단 한 잔 받으세요.”
자연스럽게 술이 오가는 분위기. 전역식 날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령한테
걸려서 어렵게 기른 머리 어제 다 잘려버렸다. 망할 군대. 꼭 전역하는 사람
한테까지 그래야겠어? 덕분에 내 머리는 이제 갓 입대하는 녀석 마냥 빡빡
밀려있다. 겨우 귀 덮을 수 있게 길렀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얼마
나 신경을 썼는데, 히잉. 공든 탑이 다 무너져 버렸다. 이발병한테 내일 전
역하니까 제발 제발 좀 길게 깎아달라고 사정사정했건만 이 망할 발병이는
어쩔 수 없다며 바리깡으로 그냥 드르륵 밀어버리더라. 넌 어디 제대 할 때
안 그러나 보자! 속으로 시바 시바 하면서 온갖 욕을 다 퍼부었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 오고 나니 서운했던 감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다.
그래, 머리 모양이 대수냐? 이렇게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발병아, 넌 지
금 이 시간에 점호 청소 하고 있겠지? 난 이렇게 술 마시고 있단다. 그게 너
와 나 차이 아니겠냐. 크하하하하.
왁자지껄. 딱히 하는 이야기는 없다. 그냥 군 생활 이야기, 나는 어땠고 너
는 어땠고. 특공부대 뺨치는 훈련 이야기도 나오고 나도 군 생활 하면서 목
숨 수 십 번 왔다 갔다 했다고 좀 과장해서 이야기 하고. 뭐, 거짓말은 아니
다. 멀미 때문에 아, 이제 죽겠구나 싶은 순간이 솔직히 몇 번 있었으니까.
배 멀미라는 것이 차멀미와 다르게 지속성이 있어서 더 죽는다. 차야 멀미
나면 창문 열고 환기 시키거나 잠시 멈춰서 바깥 공기 좀 쐬고 쉬던가 하지
배 멀미는 그런 게 없다. 육지에 닿는 그 순간까지 멀미는 지속된다, 쭈욱.
그래서 군 생활하면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건 멀미 뿐 이다. 물론 멀
리 때문에 죽을 뻔 했다고 말하진 않았다. 작전 수행하다 죽을 뻔 했다고 조
금 과장하고 오버 했을 뿐이지.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냐? 뭐, 사실 말이야 틀
린 말은 아니다. 배 멀미라는 것이 작전 수행하는 도중에 겪게 되는 일이니
까.
이렇게 제대 후 첫째 날이 지나갔다.
-
뭐, 일단은 시작을 올리고 며칠 만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좀 극악의 연재 속도를 자랑하는지라 업데이트 속도는 느릴 겁니다.
5~6편 정도의 여유 분량은 있지만 앞으로도 이 분량을 유지할 생각이기에..
보시고 욕만 빼고 한 마디씩이라도 적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