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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4……. 2024……."




세 명은 도서실이라기보다는 서고에 가까운 곳에 틀어박혀서 앨범을 찾고 있었다. 정철진은 왼손에는 단도를 든 채로 경계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떨리는 오른손으로는 앨범들을 가리키면서 2037이라는 숫자를 찾고 있었다.




책장들은 기본적으로 규칙성이 없었다. 거기에 관리는 전혀 안 되는 것인지 앨범을 쭉 훑다보면 손은 어느새 검은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료들은 확실히 책장에 꽃혀있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빗자루라던가, 청소기로 단 한 번이라도 청소한 적이 없어 보이는, 그런 모습이었다. 1, 2년 단위가 아니다. 먼지가 뿌옇게 끼어서 도금이 된 글씨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분명 아니겠지만, 다급한 심상민의 마음에는 개교 이래로 전혀 손질하지 않은 것 같은 서고처럼 느껴졌다.




문은 총 두 개였다.




하나는 들어오는 문이고, 다른 하나는 서고에 딸린 작은 방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그 곳을 정철진이 록픽으로 열어보려 했으나 시간낭비라고 판단해 그만두었다. 들어올 때 창문으로 본 것으로는 책상과 책장이 있는 사무용의 방이었다. 하지만 쓰지 않는 것인지 의자는 뒤집혀있고 책장은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책장은 들어오는 문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갈라져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책장에 꽃혀있는 책을 볼 수 있도록 문 쪽을 향해있는 책장들은 만일의 경우 약간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도록 해 줄 것이다. 물론 창문이 있었지만, 학교 높이의 3층이라면 보통 아파트의 5층 정도에 해당하는 높이이다. 죽지는 않더라도 뛸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정철진처럼 변혁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찾았다. 2037년, 맞지?"




정철진이 도금이 벗겨진 앨범을 열면서 말했다. 심상민은 그 말을 듣고 찾고 있던 앨범을 바닥에 던지며 달려갔다.




정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앨범의 속표지에는




"……. 속았어."




1990년이라고 쓰여 있었다.




1990년이면 대략 50년 전의 앨범이었고, 그때 이 학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아마, 이 세계를 만든 사람의 질 나쁜 농담일 것이다. 그것도 모두 한 사람의 모습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빈칸이나 여백도 없이, 단 한 사람의 사진이 빽빽이 들어차서 앨범을 보고 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더욱 웃긴 것은, 보고 있는 사람을 따라 눈동자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자극이 있은 후에, 가장 먼저 그 정적을 깬 것은 심상민이었다.




"젠장-! 전부 다 뒤져봐야 한다는 거야?"




심상민이 가장 구석의 앨범을 펼치면서 말했다.




"아, 그런 거라면 찾았는데요."




박보람이 한 손에 앨범을 들고 말했다.




정철진이 살펴보자 첫 페이지에 분명 2037년이라고 적혀있었다. 분명 작년이었다.




앨범은 꽤 복잡했다. 이름, 전화번호, 주소는 물론이고 증명사진과 과거 병력, 학교 성적과 교우관계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의 여백에는 발표의 횟수와 말한 횟수까지 적혀 있었다. 이 정도면 이미 신이 탐색할 수 있는 범위까지 도달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할 정도로 집요한 기록부였다.




"찾았다. 던져줘?"




정철진이 심상민을 부르자 심상민은 곧바로 돌아서며 정철진에게 달려갔다. 정철진이 내민 앨범이 심상민의 손에 닿으려는 순간




[덜컹]




문이 열리고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정철진은 반사적으로 앨범을 끌어당겼다. 방금 전까지 앨범이 있던 자리에 뭔가가 대기를 가르며 지나갔다.




괴물이 난입해왔다.




새어나오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렸고, 다른 나이프를 오른손에 들기 위해 나이프를 묶음에서 빼어내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렸다. 달빛은 괴물을 등지고 있어서, 도서실의 중간을 횡단하며 괴물의 그림자가 문의 반대편 벽까지 늘어졌다. 박보람은 긴장감이 없는지 1990년의 앨범을 보고 있었다. 보통의 상황에서도 무서울 그 백과사전만한 앨범을 재미있다는 듯이 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세 명은 가장 구석에 있었다. 아마 말해도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정철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철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심상민."




정철진의 말에 심상민은 정철진을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아직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 쪽은 가만히 있어라. 나와 박보람은 저 문 쪽으로 가지."




"왜 박보람까지?"




"둘 이상이 가야 저 녀석이 따라올 테니까."




당연한 논리였다. 아마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녀석에게 통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적어도 2개인가 1개인가를 선택하라면 당연히 2개를 선택하겠지.




"알았어. 앨범은……."




심상민이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정철진은 양 손에 앨범을 쥐고 심상민에게 던지고 있었다. 오른손에는 1990년의 앨범을, 왼손에는 2037년의 앨범을 쥐고 던졌다.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아무리 단도가 빠르다고 해도 백과사전과 비슷한 두께의 종이뭉치를 관통하지는 못 할 것이다.
당연히 오른손에 들었던 앨범에만 단도가 꽂혀 날아가고 왼손의 앨범은 정철진의 의도대로 심상민의 앞에 떨어졌다. 분명 정철진과 박보람이 작은 방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림자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넌 기회를 봐서 빠져나와."




정철진은 달려서 문 앞에 도착했다. 록픽을 꺼내는 것도 없이, 살짝 뛴 뒤 방문을 걷어차서 문고리를 뜯어내었다. 그림자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듯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박보람은 자세를 낮추고 뛰어서 들어갔다. 괴물은 잠시 심상민이 있는 곳을 바라보더니, 단념한 듯 정철진에게 달려왔다.




정철진은 다리를 잡고 있었다. 1.5V의 건전지를 다리에 이식한 것 같은 찌릿함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변혁을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서 통각신경을 차단하지 못했다. 이대로 있으면, 정철진은 미간에 구멍이 나서 뇌수를 흩뿌리게 될 것이다. 정철진은 통증에 오른쪽 눈을 감고 인상을 잔뜩 쓰면서 왼쪽 눈으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미칠 듯이 부정하고 싶지만 저것은 분명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빨리 와요-."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박보람의 발이 복도의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정철진은 무너지듯이 방으로 들어가 오른손에 든 단검을 멈추는 자세의 녀석에게 날렸다.




목표는 머리. 심장은 왼손이 있어서 막힐 것이다. 거기에 단도 하나나 둘 정도는 무시하고 돌진하는 녀석이므로,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녀석이 이쪽을 바라보는 순간 강도의 변화가 불가능한 눈에 박히는 것.




[캉]




투척용의 단검은 보기 좋게 단도에 튕겨져서 창밖으로 날아갔다. 너무 낙관적이었다. 하지만 정철진은 단도가 잘 박혔는지를 확인하지도 않고 옆으로 달리고 있었다.




원래의 목표는, 정철진이 변혁을 끝낼 동안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모든 변혁을 포기하고, 통각신경의 해제에만 총력을 기울였다. 결과는 성공적. 아이들링을 하지 않았지만 그럴 시간은 없었다.




정철진은 자리를 박차고 창문으로 달렸다. 문틀을 양 손으로 잡고 구르듯이 빠져나왔다. 방금 전까지 정강이가 있던 곳을 검은색의 칼날이 지나갔다. 그야말로 찰나보다 더 빠른 시간차였다. 만일 단 한 순간이라도 망설였으면 인대가 끊어져서 변혁하더라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다.




곧이어 정철진의 모습을 한 괴물이 창문을 가볍게 넘어왔다. 바닥과 마찰하는 신발의 소리를 듣고 정철진은 뒤로 돌아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를 악물고, 비어있는 오른손에 단도를 쥐고 변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묵빛의 철이 공격해오고 있었다.




길어야 20초. 변혁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완벽하게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공격을 흘리는 식으로 후퇴하며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정철진이 그렇게 생각한지 단 2초 만에, 전략이 바뀌었다.




칼날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정수로 잡았다면 날이 있을 곳에 단도를 가져다 대었지만 갈비뼈 부근을 베였다. 문제는 이것. 암광처리가 너무 확실하게 되어있어서 구름에 가려진 달의 달빛 정도로는 윤곽을 잡기가 너무 애매했다. 정수로 잡았는지, 역수로 잡았는지도 불분명하고, 정확한 날의 위치를 알지 못하면 정확한 흘리기는 불가능했다.




방법이 없었다. 두 번째 공격으로 뺨에 자상을 입었다. 세 번째 공격으로 팔에 긴 상처가 생겼다. 네 번째 공격으로 오른쪽 허리를, 다섯 번째 공격으로 이마를 얇게 베였다.




저 괴물의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마치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로봇인 양 끝없이 날은 가속해왔다. 산소가 부족해 근육이 삐그덕거리면 심장을 가속시키고, 분명 한계가 넘었음에도 심장은 끝없이 가속된다. 아마 정철진이 했다면 전투 직후에 심장이 멎어버릴 정도의 속도로 공격해오는 괴물에게서, 정철진은 아주 잠시 동안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날아오는 칼날 때문도 아니고, 끝없이 가속하는 심장 때문도 아니고, 늘어가는 상처와 출혈에 대한 걱정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 괴물의 턱없이 높은 비현실성 때문도 아니다.




원인은 하나. 자신이 저렇게 변할 수 있다고 하는, 부정하고 싶은 가능성.




그 때, 불빛이 환하게 비춰졌다. 박보람이 들고 있던 손전등은 확실히 둘을 비추고 있었다. 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즉, 어디엔가 고정되어 있었다. 인간은 맥박 때문에 필연적으로 손을 떨게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박보람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무엇인가.




정철진이 양쪽에서 날아오는 단도를 정면으로 막아 녀석의 손을 봉쇄했다. 변혁을 하지 않은 정철진에게 있어서 마지막 방어. 만일 이 이후로 한 번만 더 이런 짓을 하면 그 즉시 팔에 축적된 내출혈이 밖으로 나오면서 신경을 자극해 쓰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미 정철진의 팔은 내출혈을 호소하면서 떨리고 있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단 한 발의 총탄이 괴물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단검이지만 분명히 암광처리가 되어서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손전등이 비추는 빛과는 다른 각도로 날아들었다. 보일리가 없었다. 하지만 괴물은 파리를 쫓아버리듯 왼손의 단도를 움직여 다시 박보람 쪽으로 단검을 쳐냈다. 어떻게 날아올지 뻔히 보였다는 듯이 가벼운 동작이었다.




박보람은 단검을 줍고 복도를 달렸다. 뒤쪽에서는 이미 두 개의 무기가 부딪치며 소음을 만들고 있었다. 긴 톨로의 시작부분에 서서, 박보람은 유리를 깨고 버튼을 눌렀다. 그 버튼은 빨간색으로, 어두운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유사시 유리를 깨고 누르시오'라고 적힌 유리의 너머에 있었다.




사이렌소리와 시끄러운 종소리가 교사를 뒤흔들었다. 정철진은 소리를 듣고 녀석을 주시하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녀석은 잠시의 소강상태를 즐기고 싶은 것인지 천천히 정철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상태로 부딪친다면 그 후는 없다. 정철진은 적어도 팔의 통증만은 막기 위해 변혁을 시작했다.




그 때, 녀석이 날아들었다.




땡땡거리는 종소리에 맞추어서 발소리를 죽이고, 분명 우연이겠지만 그 곳에 있었던 소화기를 밟아 부숴서 그 소화물질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정철진이 무방비상태에 들어가기 직전에 녀석이 도약했다.
우연에 우연이 겹쳤다. 정철진은 입술을 깨물며 변혁을 중지시키고 하얀 안개에 가려진 녀석의 모습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할로겐 소화기였다. C급 이상의 방화를 막기 위한 소화물질은 꽤 독했고, 사람 몸집만한 대형 소화기에서 뿜어져 나온 안개는 자욱했다.




정철진은 뒤로 걸으면서 안개에서 눈을 떼어놓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2분 정도면 문이 모두 내려올 것이다.




녀석은 달려 나왔다. 새고 있는 소화물질이 끝나가는 것을 안 것일까, 안개 속에서 공격했던 것 보다 더 빠르게 공격해왔다. 거기에 정철진은 벽을 등지고 있었다. 뒷걸음질 친 것은 좋은데, 뒤를 볼 수 없으므로 방향이 틀어진 것이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고, 녀석은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팔에 있던 내출혈이 상처를 타고 흘러나왔다. 이미 오른손은 아무리 발악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철진도 알고 있었다. 이미 서고 옆의 작은 방에서 단검을 던졌을 때부터 오른손은 전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가져다 대어서 녀석의 공격방향을 아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철진은 등에 맞닿은 벽이 차갑다고 느꼈다. 피가 거의 빠져나가 자신의 몸처럼 차가운, 그런 벽이었다. 이미 의식은 천천히 단선되고 있었다. 발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머리가 진공상태가 되는 것처럼 울리고, 왼손은 거의 본능적으로 허공을 움직이고 있다. 움직임을 명령할 때 마다 시야가 한 번씩 검게 물들어서 의식이 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오른손에 있는 단도를 놓치지는 않도록 의식을 분배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다.




정철진의 의식 속에서, 분명히 현실이 아는 곳에서,




[───────]




가청주파수 이상으로 울부짖는 야수의 외침을 들었다.




정철진의 동공이 정지했다. 날아오는 단도에 집중하고 필사적으로 막고 있던 왼손도 정지했다. 괴물의 공격을 한 번 막고, 다른 손으로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의, 그 짧은 순간동안 정철진은 의학적으로 '사망'했다. 심장박동은 정지, 판막도 역시 움직이지 않게 굳어져 있었고, 이 혈액은 오로지 관성에 의해 약간 더 돌고 있었다. 폐는 물론이고 횡격막의 움직임도 정지했으며, 장의 연동운동 및 뇌의 내분비선도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일순간에 그 잔해들이 타올랐다.




목에서 내질러지는 고함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입은 맞서고 있는 괴물의 그것과 비슷하게 광소하고 있었고, 더 이상 움직일 리 없는 오른팔은 며칠 전 하굣길에 보였던 것 보다 더 유연하고 자유롭게 움직였다.




한 번 정지했던 심장이 끝없이 가속해나갔다. 가속에 가속을 거듭해, 한계를 넘었다. 마치, 적을 죽이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처럼 끝없이 연소시키는 그 광경은 보는 눈들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연소시키기 위해 타는 불길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확실히 생명이 연소되고 있었다.




완력에서 밀렸던 정철진이 오른손으로 녀석이 왼손에 든 단도를 쳐냈다. 그 단도는 반 정도 내려온 셔터 쪽으로 들어갔다. 박보람은 자신의 목 정도까지 닫힌 셔터를 보고 이 정도면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 입을 열어 정철진을 불렀다.




"선배-. 빨리 와요!"




그 때 정철진은 왼손으로 녀석의 무기와 맞서고, 오른손으로 머리를 공격해 녀석의 시야를 억지로 돌렸다. 그리고 발을 들어 녀석의 몸에 위치시킨 뒤 다리를 쭉 폈다. 결과적으로 괴물은 꼴사납게 복도를 나뒹굴며 난간 모서리에 뒤통수를 부딪쳤다.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뇌진탕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불수의근을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다면 뒷목의 근육을 억지로 경직시켜서 뇌진탕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약간 얼이 빠진 것 같은 정도. 괴물은, 쉽게 죽지 않기에 괴물이라 불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정철진은 그런 괴물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느긋하게 끝을 보겠다는 듯 가속된 심장을 이완시키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분당 약 200번이 뛸 정도로 심장이 기세 좋게 뛰고 있었다. 아마 몇 분만 더 지속되면 졸도할지도 모를 정도의 빠르기로 심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천천히 걷던 그 발에, 멍한 머리를 각성시키려는 괴물이 떨어뜨린 단도가 밟혔다. 하지만 정철진은 눈길을 한 번 주더니 필요 없다는 듯이 지나쳤다.




그 정도로 괴물과 같이 변한 정철진이, 박보람이 부르는 소리를 듣자 방금 전에 죽었던 것처럼 온 몸이 멈추었다. 덜컥, 하고 움직이던 기계에 전력을 차단한 것처럼 정지했다. 선풍기같이 관성을 이용하는 기계가 아닌, 컴퓨터와 같이 전기적 신호를 사용해 0.1초만 차단해도 그대로 멈춰버리는 기계의 플러그를 뽑은 것처럼.




그리고 정철진의 오른팔이 완전히 정지했다. 억지로 잡고 있던 단도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면서 떨어졌다. 정철진은 오른쪽 발에 뭔가가 걸린다고 생각해 아래를 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단도 이외에도 녀석의 손에서 떨어진 단도가 떨어져 있음을 알고 하나는 발로 차서 셔터 너머로 차 놓았다.




괴물은 곧 일어서서 정철진을 따라오고 있었다. 거의 무릎까지 내려온 셔터를 기어서 넘어간 정철진이 고개를 드는 순간




[와직]




셔터가 사람의 팔 하나 정도는 될 것 같은 깊이로 우그러졌다. 아마 저쪽에서 달리다가 힘껏 찼을 것이다.




정철진은 떨어진 단도의 날을 집어넣고 절뚝거리는 오른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버튼을 눌러서 저쪽 셔터를 내려줘."




다시 한 번 셔터가 이쪽으로 우그러졌다. 아마 앞으로 세 번 정도면 충분히 구멍이 날 것이다. 처음 셔터가 우그러진 곳보다 오른쪽이었다.




다음 공격으로 그 사이의 셔터를 우그러뜨리고, 그 다음 공격으로 다시 한 번 중간을 공격해서 우그러뜨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공격하면 사람하나가 굴러서 넘을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은 뚫릴 것이다. 아마 정철진이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가장 빨리 A급 방화셔터를 부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공격한 곳은 첫 번째로 우그러뜨린 곳이었다. 이상하기로 따지만 방화셔터를 공격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만일 정철진이라면 창을 열고 나가 밖으로 손을 뻗어 셔터 너머의 창을 깨고 창틀을 잡아 몸을 빼내서 저쪽으로 넘어갈 것이다. 저렇게 공격할 필요도 없었다.




셔터는 너무 느리게 내려왔다. 정철진은 시간에 대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자 이유는 모르겠지만 몸에서 유일하게 다시 변혁되어 있는 왼팔로 셔터의 끝을 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쾅]




그리고 팔을 한 순간에 쭉 폈다. 몸의 체중이 전부 셔터에 실리면서 핀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핀이 끊어진 셔터는 빠르게 내려와서 무릎까지 닫혔다. 다시 거기서부터는 핀이 있는 것인지 느리게 내려왔다. 정철진은 숨을 몰아쉬면서 덜덜 떨리는 발을 내딛었다.




[심상민이다. 밖으로 나왔어.]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새벽 1시 정도. 이지수는 책을 읽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이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내준 숙제라던가, 오늘 꼭 읽어야 할 분량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흥미를 위해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읽고 있는 책은 표지만 보아도 잠이 쏟아질 것 같은 철학책이었지만, 속독도 하지 않고 정독으로 끝까지 읽고 있었다.




전등은 건전지를 쓰는 스탠드를 찾아내어서 그것으로 대체하고, 자리는 항상 앉는 자리에 앉아서 파란 표지의 철학책을 읽고 있었다. 그것도 장장 6시간동안. 그 정도로 재미있었다. 책 읽기에 이렇게 매료된 적은 처음이라고 이지수가 생각했다. 다리가 나빠서 총을 고치는 데에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총기서적은 이 큰 도서실에도 없던 터라 어쩔 수 없이 이지수는 혼자가 되었다. 가방에 있는 논문을 읽을까, 하다가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아무 책이나 책장에서 뽑았다. 그리고 쭉 읽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도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 재미없는 철학책을 끝까지 정독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책이 재미있다는 것은 느끼기 힘들었다. 오히려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이지수가 매료되어 있는 것은 책이 아닌, 그 읽는다는 행위 자체였다. 자유롭게, 그 많은 서고에서 단 하나의 서적을 찾아 자신의 지식으로 쌓는다―. 지금까지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은 글자를 접했지만 이런 즐거움은 없었다. 그저 남이 시켰기에, 누군가와의 약속이기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이기에 한 의무적인 행동이었다. 전까지의 독서가 억압과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한 행동이라면, 지금 끝내가고 있는 이 독서는 자유롭고 흥미 넘치는 것이었다.




책장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고, 이지수는 표지를 덮고 몸을 쭉 늘리며 이완시켰다. 고개를 뒤로 넘기고 희미한 전등에서 비춰지는 전등에 회색이 드러난 천장을 바라보다가 며칠 전까지 둘러앉아 회의를 했던 책상을 바라보았다. 계속 천장만 바라보기 보다는 좀 더 책을 읽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지수는 한 권의 책이 더 있는 책상을 보기 위해 고개를 내렸고, 그 사이 그 둥그런 탁자가 보였을 뿐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지수는 그 당연한 일에서 엄청난 위화감을 느꼈다.




그것은 직감이 경고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위화감은 분명히 느꼈다. 무언가 더해진 것 같기도 하고, 빼진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머릿속을 꿰뚫듯이 알게 된 것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 트랜스시버가 울렸다.




[심상민이다. 밖으로 나왔어.]




깜짝 놀란 이지수는 뒤쪽 다리로만 지탱되던 의자를 제어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다시 탁자와 의자들을 보았을 때, 그런 위화감은 홍수에 씻긴 듯 사라져 있었다.




'기분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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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시] 11월 14일 오전 06:42 KIRA 2008.11.15 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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