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 1
축제가 시작될 저녁 즈음이 되자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색지로 동그랗게 싸인 등(燈)들이 가만가만 흔들렸다. 마치 아름답게 치장한 달 여러 개가 수줍게 춤을 추는 듯 했다. 검은 하늘을 무대 삼아 펼쳐지는 무도회 같았다. 등들은 장로의 집 지붕에서부터 줄을 타고 퍼져 있었다. 주민들은 장로의 집 앞에 큰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그들의 뒤로는 음식들이 여러 식탁에 풍성하게 올려져 있었다. 주민들은 작은 접시에 각자 음식을 담아서 먹었다. 불기운이 일렁일 때마다 주민들의 얼굴에 홍조가 더해갔고 웃음꽃이 만개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체면치레 할 것 없이 즐거움을 만끽했다. 축제의 흥에 잔뜩 취한 사람들은 채 앉질 못하고 서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국경 부근의 가난한 마을이 근래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쁨이었다.
수길은 즐거워하는 주민들을 보며 마음이 벅차 올랐다. 가난한 사비국의 가난한 마을에서 이 정도의 축제도 대단한 재력을 요구했다. 그 중 대부분을 수길이 맡았음은 당연지사였다. 옆에 앉은 박랑모 주사보나 마법사 '벼리'도 꽤 흥분한 듯 보였다. 그들도 국경 부근에 근무하면서 이런 축제는 오랜만, 아니 처음이었으리라. 그들은 장로의 집을 등뒤로 하여 긴 식탁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식탁은 진귀한 음식과 음료들로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또 이 마을의 약초들로 만들어진 음식도 있었다.
"마법학교 졸업식 이후로 이런 즐거운 잔치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마법사 '벼리'가 흥이 오른 어조로 말했다.
"나도 그렇네. 게다가 이 귀한 음식들을 이런 곳에서 먹게 될 줄이야……!"
옆에 앉은 박랑모가 큰소리로 웃었다. 몸을 흔들면서까지 그는 식탁 위 음식들을 훑어보았다.
"특히 이 치즈, 이 치즈는 정말 오랜만이야! 대단한 준비를 하셨오."
"아, '쇼스테라(Shosteraa)' 치즈 말씀이군요. 귀한 분들을 모셔 놓고, 품위와 권위를 상징한다는 이 '쇼스테라' 치즈를 빠뜨릴 수야 있나요."
수길이 치즈 이름에 은근히 힘을 주며 대답했다. 사실 마을의 약초로 만든 음식도 박랑모가 신경 써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렇게 흥이 오른 주사보의 모습만으로도 괜찮았다. 약초로 만든 음식은 박랑모가 돌아갈 때 싸주면 될 것이다. 수길은 그렇게 다음 계획을 마음속으로 세웠다.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이 자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속 골몰했다.
"그래, '쇼스테라'! '쇼스테라'! 귀족들이나 먹는 것이지만, 황도(皇都)에서도 구하기 힘들다던 바로 그 치즈인데 말이야!"
박랑모가 크게 웃으며 외쳤다. 정말 신이 났는지 손바닥으로 식탁까지 두드렸다. 오후에 봤던 거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부산스러운 모습에 오히려 친근감마저 들었다.
형골은 그의 큰 웃음과 흔들리는 탁자 때문에 깜짝 놀랐다. 먹던 음식까지 떨어뜨렸다. 식탁 가운데에 앉아 있는 박랑모를 잠깐 째려봤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형골도 축제 분위기에 젖어있었다. 오늘은 무슨 짓을 하여도 용서가 될 것 같았다. 그토록 멀게 느껴지던 그 마을 안에서 이렇게 긴장이 풀어진 적은 처음이다. 비록 오늘 주민들과 말 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벌써 이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웃다가 눈이 마주친 주민들도 형골을 예전과 같은 눈빛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먹던 술잔을 들어올려 형골과 흥을 나누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런 것 때문에 영감이 자신을 그토록 끌고 오려고 했는지 모르겠다고 형골은 생각했다. 형골은 옆에 앉아 있는 대규가의 손을 가만히 훔쳐보았다. 식탁 위에 올려진 대규가의 손에는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꼴깝은… 치즈 하나 같고……."
형골은 스스로 낯간지러운 생각을 했다고 느껴 애꿎은 박랑모에게 일부러 소리 죽여 퉁을 놨다. 그 소리에 대규가는 형골을 바라보더니 집게손가락으로 그들 앞에 놓인 치즈를 가리켰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그 치즈에서 한 덩이 떼어 형골의 식기에 놓았다. 고약한 냄새가 풍겨왔다. 그래도 형골은 기막힌 맛을 기대하고 조금 떼어 입에 넣었다.
"윽……!!"
살인 충동이 밀려들었다. 수길과 얘기를 하며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박랑모를 쏘아보았다. 혀가 비틀어질 것 같았다. 도로 뱉지는 못하고 형골은 그대로 꿀꺽 삼켜 버렸다. 그러자 이번엔 그 특유의 냄새가 식도를 타고 올라와 코를 들쑤셨다. 코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 냄새를 버리려 코로 날숨을 힘껏 내뱉었다. 그러나 콧물만 더 흥건해 질 뿐이었다. 형골은 음료수를 찾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입 안쪽과 식도가 이미 헐어버려서 눈물이 날 만큼 아팠다. 게다가 맛이 진한 음료였기에 그 아픔은 더 했다. 사레까지 들려 숨쉬기도 어려웠다. 경련을 일으키듯 온몸이 꼬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참 축제를 온몸으로 즐기는 녀석이군, 브라보!' 라고 생각했을 법한 몸짓이었다.
그 모습을 본 대규가가 참았던 웃음보를 터뜨렸다. 대규가 옆에 앉은 마법사 '벼리'도 따라서 크게 웃어댔다.
"뭐야, 이거!?"
형골은 시뻘개진 얼굴을 한껏 찌푸리며 신경질을 냈다.
"그 치즈 맛은 고약하기로 유명하죠. 황실(皇室)이나 고관대작들도 어렵사리 구해 식탁에 올려놓고도 정작 그 맛 때문에 먹지 못한다고 하죠. 처음 먹는 분은 위장이 좀 놀랐을 겁니다."
마법사 '벼리'가 다독이듯 말했다.
"쳇, 먹지도 못할 거면서 뭐 하러 이런 걸 만들지?!"
심장까지 놀랐는지 형골은 거세게 콧숨을 내쉬었다. 대규가를 만나기 전에 끼니 하나 때우기 어려웠던 시절이 언뜻 기억났다.
"대부분은 허세·허영, 그리고 권위 의식과 특권 의식 때문이겠지. 비록 먹지는 못해도 이 치즈를 식탁에 얹어 놔야 자신도 특권층에 속해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거든. 장신구 하나, 찬거리 하나에도 그들은 신경을 안 쓸 수가 없겠지. 그 특권층에서 계속 살아 남기 위해선 무엇보다 스스로 다른 계층·집단에 비해 우월감을 가지는 게 중요해. 바로 그것을 메워주는 것 중에서 이 '쇼스테라' 치즈가 한 자리 차지하지. 모르긴 해도 이 치즈 한 덩이가 우리 마을보다 값어치가 높을 거다."
대규가가 형골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규가는 건조하게 웃고 있었다.
"미쳤구만, 미쳤어! 먹지도 못할 치즈 때문에 마을 하나 값을 써 버려?!"
"욘석아, 니 녀석도 그 위치에 가면 그렇게 변할 지 몰라. 권력이라는 걸 얻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 권력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지. 니 녀석도 마법사가 되려고 한다면 분명 권력을 탐하게 될 수도 있고, 이 치즈가 없는 식탁엔 눈길조차 주지 않을 지도 모르지. 앞날을 어떻게 장담하누?"
옆에 앉은 마법사 '벼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황도(皇都)에서 권력과 지위에 휩쓸린 많은 친우들을 봐 왔다.
"영감, 웃기지 마! 내가 그렇게 되면 사람이 아니다! 난 출세를 해도 절대 이 치즈와는 상종을 않겠어!!"
"놀랍군. 니 녀석이 출세나 할 수 있겠냐?"
대규가가 짐짓 아니꼽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제자의 호언장담이 싫지 않은 웃음을 지었다.
형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절대라고, 절대!"
"먹다 말고 어디가?"
형골은 듣는 체도 하지 않고 마을 외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작은 마을이기에 축제 분위기는 마을 전체를 감싸고도 남았다. 단지 마을 외곽 쪽은 흥겨움보다 낭만에 젖어 있었다. 마을 중앙으로부터 은은히 퍼져오는 불빛과 노랫소리가 마을 연인들의 마음을 이끌었다. 몇은 손을 잡고 풀밭에 누워 막 개인 밤하늘을 올려다보았고, 몇은 나무벤치에 나란히 앉아 입맞춤을 나누었다. 수줍은 달빛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그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부드러운 분위기에 동화되어 한층 형골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치즈 얘기에 뒤틀렸던 심사도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홀로 있기도 불편하여 좀더 외곽으로 향하여 숲길로 들어섰다. 저녁을 지나 밤이 되자 하늘을 덮었던 구름은 가셨다. 맑은 밤하늘에서 달빛과 별빛이 쏟아져 내려왔지만 숲길은 여전히 어두웠다. 형골은 천천히 눈앞을 재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 누구 계시나요? 저 좀 도와주세요."
여자의 가냘픈 목소리가 숲 안에서부터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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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설로도 그렇고, '크뤼거'로도 그렇고 넘 올만이네요.ㅋㅋ
이번 편은 분량이 나름 많다고 판단해서 2개로 나누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나중에 올릴게요.
사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소제목을 '가현'으로 잡고 있었는데요
# 6 이 그 '가현'의 마지막 분량입니다.
-하늘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