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드 님께서 너를 지원하라고 나를 여기로 보냈다. 펜릴도 곧 있으면 도착 할꺼다.”
“지원? 거기다 펜릴까지?”
타르칸이 브리칸트의 돌격대장이라 한다면 펜릴은 작전을 지휘하고 전략을 구축하는 조직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전투에서 빠져서는 안 될 두 인물이 자신을 지원하기위해 여기로 왔다는 말에 잔은 타르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여기에 너와 펜릴까지 지원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있나?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적들은 전부 그들의 꼭두각시나 고용된 용병 들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매린과 샤아만으로도 충분한 상황인데·······지원이라니?”
오늘 있었던 전투 말고도 알게 모르게 인성을 위협하는 무리들이 나타난 적이 몇 번 더 있었다. 하지만 장난이라 생각 할 정도로 약하고 적은 인원이었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그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낸들 아냐? 명령이면 받들어야지. 거기다가 총대장님에게서 직접 명령 사항이 내려온 것 같던데.”
총대장이란 말에 잔은 눈을 크게 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항이었나?”
“그냥, 별거 없이 위험이 있을 땐 경계하고, 먼저 도발하지 말고 펜드레건님이 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
“펜드레건 전하까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펜드레건까지 투입되었다는 말에 잔은 그분의 의도를 점점 더 이해 할 수 없었다. [아바돈]. 그들이 위험한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 전력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에 투입되어 있는 지금 한국에 과연 자신과 타르칸들, 거기다가 펜드레건까지 필요로 하는 작전이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펜드레건 전하 단독으로 오시는 것인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펜릴은 일단 홀몸으로 왔다.”
“음······.”
잔은 그분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했다. 미래를 예측하고 정확한 판단능력을 가진 그분께서 이런 명령을 한 데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에 비춰보면 그저 전력을 낭비하는 명령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잔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시야가 타르칸에게 말을 걸었다.
“타르칸님과 펜릴님, 두 분께서 여기로 오셨다는 말은 미국에서의 전투가 승리했다는 말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시야의 나긋나긋한 말에 타르칸은 웃으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당연하지. 우린 최강의 조직이라고. 누가 어떤 싸움을 걸어와도 결국엔 블라드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지!”
“이렇게 빨리 끝났다고? 아바론의 12명의 신 중에 3명이나 투입된 전투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잔이 타르칸에게 물었다.
“물론. 우리 위대하신 대장께서는 그들을 단번에 쓸어버렸지. 그 신인가 하는 나부랭이들은 우리 대장의 위용에 겁을 먹었는지 여섯 차례의 전투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고. 조무래기들이야 우리에게 상대도 안되지. 얘기를 들어보니까 유럽에서 있었던 전투도 승세가 우리 쪽으로 기운다고 하던데?”
그녀는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미국은 그렇다 치고 유럽은 펜드레건과 비아신의 부재로 매우 힘든 전세를 예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보고했던 그녀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타르칸은 고심하고 있는 잔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녀의 팔에 팔짱을 겼다. 잔은 놀라서 타르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할 필요 없어. 네가 결론을 낸다고 해도 총대장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보다······.”
타르칸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잔에게 속삭였다.
“오랜만에 만났잖아. 우리 어디가서 가볍게 데이트라도 하자고.”
“뭐?”
타르칸의 말에 매린이 발끈 해서 외쳤다.
“뭡니까 타르칸님! 그런건 제가 용납 할 수 없습니다!”
“어쭈? 꼬맹이 부하님이 무슨 권리로 용납하니 마니 하는거냐?”
“계속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그 비밀 다 말해버릴 겁니다!”
“뭐야?!”
잔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타르칸의 말대로 자신이 그분의 의도를 파악해봤다 여전히 명령을 따라야 된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잔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
“누나, 나 다녀왔어.”
인성은 대문을 열고 고단한 목소리고 서희에게 자신이 온 것을 알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인성은 일찍 오라는 말을 어겨 서희가 매우 화나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는 겁을 먹고 한동안 현관에 서있었다. 하지만 이 때쯤이면 누나의 검은 몽둥이가 1차로 날아오고 뒤를 이어 주먹 이 연타를 날렸을 법한데도 집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네. 불은 켜져 있는데?”
인성은 신발을 벗고 환한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9를 가르키고 있었다. 인성은 혹시나 2층에 서희가 있나 싶어 불이 꺼져있는 계단을 올라가 서희의 방에 가 보았다. 노크를 하고 문을 살짝 열었지만 거기에도 서희는 없었다. 인성은 1층으로 내려와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혼나진 않아서 다행이다·······.”
서희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을 것이라 예상했던 인성은 예상이 빗나가자 안심한 표정으로 욕실로 향했다. 일단 씻어야 된다는 생각에 옷을 벗어 세탁기에 구겨 넣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잠깐 차가운 물이 나오는 듯 하더니 곧 뜨거운 물이 나오면서 뿌연 수증기가 욕실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인성은 손을 슬쩍 물에 가져다 대어보곤 데지 않게 온도를 조절 한 후 머리를 감고 온 몸을 씻었다. 이리 저리 넘어지고 뛰어나져서인지 평소보다 유난히 많은 먼지들을 깨끗이 씻어낸 인성은 옷을 갈아입고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는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바라보며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인성은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들어 소매를 걷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는 인성의 팔은 그가 오늘 겪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인성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겁이 나고 무서웠던 모든 상황들이 지금은 너무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몇 날 며칠을 불안에 떨 법도 하건만 인성은 왠지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에 신뢰가 갔다.
-당분간 위험은 없을 겁니다.
인성은 처음 이야기를 나눈 여인의 말을 자신이 너무 쉽게 믿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하고 보낸 것이 아쉬웠다. 그렇게 잠시 누워 있던 인성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차! 주영이!”
인성은 부리나케 1층으로 뛰어 내려가면서 왜 이제야 주영이 생각을 떠올렸는지 자책했다. 전화기를 든 인성은 우선 주영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한참 신호음이 들리다가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성은 주영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몇 번 신호음이 울리고 난 후 주영을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괜찮은 거야? 지금 어디야!”
“아, 인성이냐.”
주영은 힘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어디야?"
"여기? 어디긴 어디야. 병원이지.”
주영은 인성이 사라지고 난 후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 되었다고 했다. 놀래서 달려온 주영의 어머니는 주영이 총기사고로 인해 다쳤다는 말을 듣고 실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이 총알이 장기나 신경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어깨를 그대로 관통했기 때문에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했다.
“넌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쓰러지고 나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야.”
인성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부 주영에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주영은 인성의 말이 웃긴 듯 피식거리다가 결국에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걸 믿으라고 나보고?”
“진짜라니까!”
“여자가 발로 화장실 칸막이를 부수고 총을 쏘던 괴한을 때려잡은 걸 나보고 믿으라고 지금?”
주영은 웃어서 어깨가 결린지 끙끙거리다가 인성에게 말했다.
“됐어 임마. 보나마나 열심히 도망쳐 적당한데 숨어 있었겠지. 안봐도 훤하다.”
“휴······. 그래. 믿던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야. 그것보다, 오늘 수사 한답시고 병실에 들어온 사람들 좀 이상하더라.”
말을 돌려버리는 주영에 인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상했다고?”
“응, 뭐랄까······. 마치 내 증언을 다 무시한다고 해야 되나······. 여튼 내가 계속 너를 겨냥했다고 네가 위험하다고 말했는데도 내 말을 무시하고 사고였네 뭐였네 하면서 허튼소리만 하고 나가더라. 총기 사건은 꽤나 엄격하게 조사하고 수사해야 되는 것 아니야? 완전 급하게 마무리 짓고는 휑하니 가버려서 조사받는 내가 더 당황스럽더라. 어쨌든, 네가 무사해서 진짜 다행이다.”
주영은 그 뒤로 간호사들 얼굴이 망했다느니 간호사 때문에 병원이 망할 것이라니 하는 농담 섞인 말을 하다가 취침시간이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인성은 내일 학교 마치고 문병이나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갑자기 인성의 마음속에 불안한 기운이 빠르게 싹트며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늦은 밤 혼자 집에 있다는 불안감 따위가 아니었다. 평소에 후배들이나 친구들과 만나거나 동네 불량아들을 교육한답시고 저녁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곤 하는 누나였지만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은 서희가 인성의 집에 오고 난 후부터 단 한번도 없었다. 인성의 머리엔 순간 서희의 모습과 주영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인성은 안절부절하다가 전화기를 들어 서희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사오니······.”
“제기랄!”
인성은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욕지기를 내뱉고는 잠옷바람으로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중간 중간에 깜빡거리는 침침한 불빛을 뱉어내고 있는 가로등이 인성을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성은 골목길을 달려 내려가면서 서희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누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죽을 뻔 했는데, 누나의 안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아마도 누나는 강하다 라는 인식이 인성의 생강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간과해 버렸던 것 같았다.
“야, 저거 인성이 아니냐?”
“새끼야! 어딜 그렇게 좆 빠지게 뛰어가?”
골목 어귀에서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고 있던 남자 한 무리가 자신의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던 인성을 불렀다. 아마도 누나가 평소에 알고 지내는 동네 형들 같았다. 인성은 뛰는 것을 멈추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누나, 우리 누나······!”
“뭐? 누나가 왜?”
머리를 빡빡 깎고 이마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인성의 말에 뭔가 일이 터진 것을 직감하고는 인성에게 물었다. 인성은 이미 누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처럼 울먹이는 말투로 누나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남자들의 표정은 묘했다.
“형들, 우리 누나 좀 찾아 주세요. 네?”
“누나를 여기서 왜 찾아.”
“무슨 소리에요 그게!”
빡빡이 남자는 인성이 빽 소리를 지르자 손가락을 들어 인성의 뒤를 가리켰다. 무슨 짓인가 싶은 인성은 그의 손이 가르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자신을 참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던 누나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가득 담고 끙끙거리면서 들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누나!”
인성은 서희를 부르며 다가갔다. 힘든 표정으로 골목을 올라오던 서희는 인성이 잠옷 차림에 맨발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너?”
인성은 다짜고짜 누나를 안았다.
“왜 이러니?”
서희는 인성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일단 봉지를 놓고 인성을 밀어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누나를 쳐다보던 인성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누나를 살폈다.
“어디 갔다 온거야? 집에 없어서 놀랬잖아!”
“냉장고에 보니까 먹을게 다 떨어졌길래 장보고 왔지. 너야말로 잠옷 바람에 신발도 안 신고 이게 뭐니?”
“아······.”
인성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단추가 다 풀린 윗도리에 땅에 질질 끌려 더러워진 바지 밑단, 그리고 더러워진 발바닥. 완전 어느 밤거리 길에 앉아 구구단 외며 길가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정신이 반쯤 모자란 사람의 옷차림과 흡사했다. 부끄러워진 인성은 얼굴이 빨개졌다.
“어이구. 우리 동생. 내가 없어서 무서웠어?”
“시, 시끄러. 나 먼저 집에 갈래.”
인성은 키득거리는 남자 무리들을 무시하고 집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남자들은 서희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님. 나가실 때 인성이한테 이야기라고 하고 가시지 그랬어요.”
“저 녀석이 집에 늦게 들어와서 이야기를 못 했······. 잠깐.”
서희는 갑자기 눈을 치켜뜨고 집으로 올라가는 인성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서희와 남자들의 대화에 인성도 움찔 하며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인성은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이건 자기 스스로가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간 꼴이었다. 서희는 딱딱 끊어지는 음성으로 인성의 이름을 불렀다.
“김. 인. 성.”
인성은 뒤를 돌아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너. 내가 몇 시에 들어오라고 했지?”
“누, 누나. 미안······.우악!”
인성은 잡아먹을 듯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누나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맹렬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김인성! 거기 안서!”
“미안해 누나!”
“잡히면 죽는다!”
“우왁! 아깐 무거운 척 다하더니 왜 이렇게 빨리 쫓아오는 거야!”
“시끄러!”
“누나! 당근 떨어졌어! 당근!”
오늘 여러모로 많이 뛰는 인성이었다.
“지원? 거기다 펜릴까지?”
타르칸이 브리칸트의 돌격대장이라 한다면 펜릴은 작전을 지휘하고 전략을 구축하는 조직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전투에서 빠져서는 안 될 두 인물이 자신을 지원하기위해 여기로 왔다는 말에 잔은 타르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여기에 너와 펜릴까지 지원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 있나?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적들은 전부 그들의 꼭두각시나 고용된 용병 들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매린과 샤아만으로도 충분한 상황인데·······지원이라니?”
오늘 있었던 전투 말고도 알게 모르게 인성을 위협하는 무리들이 나타난 적이 몇 번 더 있었다. 하지만 장난이라 생각 할 정도로 약하고 적은 인원이었다. 거기다가 지금까지 그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낸들 아냐? 명령이면 받들어야지. 거기다가 총대장님에게서 직접 명령 사항이 내려온 것 같던데.”
총대장이란 말에 잔은 눈을 크게 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항이었나?”
“그냥, 별거 없이 위험이 있을 땐 경계하고, 먼저 도발하지 말고 펜드레건님이 올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는 것.”
“펜드레건 전하까지······.”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펜드레건까지 투입되었다는 말에 잔은 그분의 의도를 점점 더 이해 할 수 없었다. [아바돈]. 그들이 위험한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 전력 대부분이 유럽과 미국에 투입되어 있는 지금 한국에 과연 자신과 타르칸들, 거기다가 펜드레건까지 필요로 하는 작전이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펜드레건 전하 단독으로 오시는 것인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펜릴은 일단 홀몸으로 왔다.”
“음······.”
잔은 그분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했다. 미래를 예측하고 정확한 판단능력을 가진 그분께서 이런 명령을 한 데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에 비춰보면 그저 전력을 낭비하는 명령일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잔이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시야가 타르칸에게 말을 걸었다.
“타르칸님과 펜릴님, 두 분께서 여기로 오셨다는 말은 미국에서의 전투가 승리했다는 말이군요. 축하드립니다.”
시야의 나긋나긋한 말에 타르칸은 웃으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당연하지. 우린 최강의 조직이라고. 누가 어떤 싸움을 걸어와도 결국엔 블라드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지!”
“이렇게 빨리 끝났다고? 아바론의 12명의 신 중에 3명이나 투입된 전투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잔이 타르칸에게 물었다.
“물론. 우리 위대하신 대장께서는 그들을 단번에 쓸어버렸지. 그 신인가 하는 나부랭이들은 우리 대장의 위용에 겁을 먹었는지 여섯 차례의 전투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고. 조무래기들이야 우리에게 상대도 안되지. 얘기를 들어보니까 유럽에서 있었던 전투도 승세가 우리 쪽으로 기운다고 하던데?”
그녀는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미국은 그렇다 치고 유럽은 펜드레건과 비아신의 부재로 매우 힘든 전세를 예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보고했던 그녀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타르칸은 고심하고 있는 잔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녀의 팔에 팔짱을 겼다. 잔은 놀라서 타르칸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할 필요 없어. 네가 결론을 낸다고 해도 총대장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보다······.”
타르칸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잔에게 속삭였다.
“오랜만에 만났잖아. 우리 어디가서 가볍게 데이트라도 하자고.”
“뭐?”
타르칸의 말에 매린이 발끈 해서 외쳤다.
“뭡니까 타르칸님! 그런건 제가 용납 할 수 없습니다!”
“어쭈? 꼬맹이 부하님이 무슨 권리로 용납하니 마니 하는거냐?”
“계속 그렇게 나오신다면 저도 그 비밀 다 말해버릴 겁니다!”
“뭐야?!”
잔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타르칸의 말대로 자신이 그분의 의도를 파악해봤다 여전히 명령을 따라야 된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잔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었다.
*
“누나, 나 다녀왔어.”
인성은 대문을 열고 고단한 목소리고 서희에게 자신이 온 것을 알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인성은 일찍 오라는 말을 어겨 서희가 매우 화나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는 겁을 먹고 한동안 현관에 서있었다. 하지만 이 때쯤이면 누나의 검은 몽둥이가 1차로 날아오고 뒤를 이어 주먹 이 연타를 날렸을 법한데도 집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네. 불은 켜져 있는데?”
인성은 신발을 벗고 환한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9를 가르키고 있었다. 인성은 혹시나 2층에 서희가 있나 싶어 불이 꺼져있는 계단을 올라가 서희의 방에 가 보았다. 노크를 하고 문을 살짝 열었지만 거기에도 서희는 없었다. 인성은 1층으로 내려와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혼나진 않아서 다행이다·······.”
서희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을 것이라 예상했던 인성은 예상이 빗나가자 안심한 표정으로 욕실로 향했다. 일단 씻어야 된다는 생각에 옷을 벗어 세탁기에 구겨 넣고는 샤워기를 틀었다. 잠깐 차가운 물이 나오는 듯 하더니 곧 뜨거운 물이 나오면서 뿌연 수증기가 욕실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인성은 손을 슬쩍 물에 가져다 대어보곤 데지 않게 온도를 조절 한 후 머리를 감고 온 몸을 씻었다. 이리 저리 넘어지고 뛰어나져서인지 평소보다 유난히 많은 먼지들을 깨끗이 씻어낸 인성은 옷을 갈아입고 2층으로 올라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리고는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바라보며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인성은 아직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을 들어 소매를 걷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는 인성의 팔은 그가 오늘 겪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인성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겁이 나고 무서웠던 모든 상황들이 지금은 너무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몇 날 며칠을 불안에 떨 법도 하건만 인성은 왠지 그녀가 마지막에 했던 말에 신뢰가 갔다.
-당분간 위험은 없을 겁니다.
인성은 처음 이야기를 나눈 여인의 말을 자신이 너무 쉽게 믿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하고 보낸 것이 아쉬웠다. 그렇게 잠시 누워 있던 인성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차! 주영이!”
인성은 부리나케 1층으로 뛰어 내려가면서 왜 이제야 주영이 생각을 떠올렸는지 자책했다. 전화기를 든 인성은 우선 주영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한참 신호음이 들리다가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성은 주영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몇 번 신호음이 울리고 난 후 주영을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괜찮은 거야? 지금 어디야!”
“아, 인성이냐.”
주영은 힘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어디야?"
"여기? 어디긴 어디야. 병원이지.”
주영은 인성이 사라지고 난 후 곧바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 되었다고 했다. 놀래서 달려온 주영의 어머니는 주영이 총기사고로 인해 다쳤다는 말을 듣고 실신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행이 총알이 장기나 신경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어깨를 그대로 관통했기 때문에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 질 것이라고 했다.
“넌 어떻게 된 거냐? 내가 쓰러지고 나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야.”
인성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부 주영에게 들려주었다. 하지만 주영은 인성의 말이 웃긴 듯 피식거리다가 결국에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걸 믿으라고 나보고?”
“진짜라니까!”
“여자가 발로 화장실 칸막이를 부수고 총을 쏘던 괴한을 때려잡은 걸 나보고 믿으라고 지금?”
주영은 웃어서 어깨가 결린지 끙끙거리다가 인성에게 말했다.
“됐어 임마. 보나마나 열심히 도망쳐 적당한데 숨어 있었겠지. 안봐도 훤하다.”
“휴······. 그래. 믿던지 말든지 알아서 해라.”
“야. 그것보다, 오늘 수사 한답시고 병실에 들어온 사람들 좀 이상하더라.”
말을 돌려버리는 주영에 인성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상했다고?”
“응, 뭐랄까······. 마치 내 증언을 다 무시한다고 해야 되나······. 여튼 내가 계속 너를 겨냥했다고 네가 위험하다고 말했는데도 내 말을 무시하고 사고였네 뭐였네 하면서 허튼소리만 하고 나가더라. 총기 사건은 꽤나 엄격하게 조사하고 수사해야 되는 것 아니야? 완전 급하게 마무리 짓고는 휑하니 가버려서 조사받는 내가 더 당황스럽더라. 어쨌든, 네가 무사해서 진짜 다행이다.”
주영은 그 뒤로 간호사들 얼굴이 망했다느니 간호사 때문에 병원이 망할 것이라니 하는 농담 섞인 말을 하다가 취침시간이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인성은 내일 학교 마치고 문병이나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갑자기 인성의 마음속에 불안한 기운이 빠르게 싹트며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늦은 밤 혼자 집에 있다는 불안감 따위가 아니었다. 평소에 후배들이나 친구들과 만나거나 동네 불량아들을 교육한답시고 저녁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곤 하는 누나였지만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은 서희가 인성의 집에 오고 난 후부터 단 한번도 없었다. 인성의 머리엔 순간 서희의 모습과 주영이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이 머릿속에 겹쳐졌다. 인성은 안절부절하다가 전화기를 들어 서희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사오니······.”
“제기랄!”
인성은 평소에 잘 하지 않던 욕지기를 내뱉고는 잠옷바람으로 현관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중간 중간에 깜빡거리는 침침한 불빛을 뱉어내고 있는 가로등이 인성을 더욱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인성은 골목길을 달려 내려가면서 서희에게 아무 일이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누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죽을 뻔 했는데, 누나의 안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아마도 누나는 강하다 라는 인식이 인성의 생강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 간과해 버렸던 것 같았다.
“야, 저거 인성이 아니냐?”
“새끼야! 어딜 그렇게 좆 빠지게 뛰어가?”
골목 어귀에서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고 있던 남자 한 무리가 자신의 옆으로 쏜살같이 달려가던 인성을 불렀다. 아마도 누나가 평소에 알고 지내는 동네 형들 같았다. 인성은 뛰는 것을 멈추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누나, 우리 누나······!”
“뭐? 누나가 왜?”
머리를 빡빡 깎고 이마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인성의 말에 뭔가 일이 터진 것을 직감하고는 인성에게 물었다. 인성은 이미 누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처럼 울먹이는 말투로 누나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남자들의 표정은 묘했다.
“형들, 우리 누나 좀 찾아 주세요. 네?”
“누나를 여기서 왜 찾아.”
“무슨 소리에요 그게!”
빡빡이 남자는 인성이 빽 소리를 지르자 손가락을 들어 인성의 뒤를 가리켰다. 무슨 짓인가 싶은 인성은 그의 손이 가르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자신을 참으로 불안하게 만들었던 누나가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가득 담고 끙끙거리면서 들고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누나!”
인성은 서희를 부르며 다가갔다. 힘든 표정으로 골목을 올라오던 서희는 인성이 잠옷 차림에 맨발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깜짝 놀랐다.
“뭐, 뭐야 너?”
인성은 다짜고짜 누나를 안았다.
“왜 이러니?”
서희는 인성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일단 봉지를 놓고 인성을 밀어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누나를 쳐다보던 인성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누나를 살폈다.
“어디 갔다 온거야? 집에 없어서 놀랬잖아!”
“냉장고에 보니까 먹을게 다 떨어졌길래 장보고 왔지. 너야말로 잠옷 바람에 신발도 안 신고 이게 뭐니?”
“아······.”
인성은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단추가 다 풀린 윗도리에 땅에 질질 끌려 더러워진 바지 밑단, 그리고 더러워진 발바닥. 완전 어느 밤거리 길에 앉아 구구단 외며 길가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정신이 반쯤 모자란 사람의 옷차림과 흡사했다. 부끄러워진 인성은 얼굴이 빨개졌다.
“어이구. 우리 동생. 내가 없어서 무서웠어?”
“시, 시끄러. 나 먼저 집에 갈래.”
인성은 키득거리는 남자 무리들을 무시하고 집으로 성큼 성큼 걸어갔다. 남자들은 서희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누님. 나가실 때 인성이한테 이야기라고 하고 가시지 그랬어요.”
“저 녀석이 집에 늦게 들어와서 이야기를 못 했······. 잠깐.”
서희는 갑자기 눈을 치켜뜨고 집으로 올라가는 인성을 쳐다보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서희와 남자들의 대화에 인성도 움찔 하며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인성은 머릿속을 빠르게 회전시키며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이건 자기 스스로가 무덤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간 꼴이었다. 서희는 딱딱 끊어지는 음성으로 인성의 이름을 불렀다.
“김. 인. 성.”
인성은 뒤를 돌아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너. 내가 몇 시에 들어오라고 했지?”
“누, 누나. 미안······.우악!”
인성은 잡아먹을 듯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누나의 모습에 기겁을 하고 맹렬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김인성! 거기 안서!”
“미안해 누나!”
“잡히면 죽는다!”
“우왁! 아깐 무거운 척 다하더니 왜 이렇게 빨리 쫓아오는 거야!”
“시끄러!”
“누나! 당근 떨어졌어! 당근!”
오늘 여러모로 많이 뛰는 인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