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징조
대한민국 충청북도의 어느 마을. 아침 산새소리만이 조용한 새벽을 알리던 어느 고요한 산자락에서 느닷없이 수십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온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 자리에 한꺼번에 등장을 한 것이다. 그들은 전부 깨끗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저마다 다른 자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의 등장으로 놀란 새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들 중 가슴에 三이 새겨져 있는 남자가 주변에 서있는 인물들에게 말했다.
“각 조는 맡은 임무를 확실하게 이행해야 할 것이다.”
“존명.”
남자의 말에 주변 인물들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나타난 것과 같이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 남아있던 남자는 주변 바위를 매만지기도 하고 낙엽을 쓸어보기도 하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한참을 그러다 자신의 키만큼 큰 바위로 다가가 손을 얻은 후 입을 열었다.
“風伯虎猛 雨師地敲 蕓師安世······.”
남자는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고 그 중얼거림이 계속될수록 그가 손을 얻고 있는 바위가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千槍萬劍 肥沃廣土 天下威哥.”
남자의 손 언저리에서부터 퍼져나가던 희미한 빛은 남자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기묘한 문양을 그리며 주변을 밝혔다.
“천부문(千符門), 개(開).”
기묘한 문양으로 빛나던 돌이 칼로 벤 듯이 세로로 금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소음조차 없이 서서히 양쪽으로 벌어졌고 돌 사이로 은색빛을 띤 돌계단이 지하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남자는 주변을 한번더 살피고 난 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양쪽으로는 각종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대부분 고대의 전쟁을 묘사한 벽화였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하얀 머리카락과 백색 옷을 입은 동양인 청년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림도 있었는데 그 그림에서는 실제로 약하게나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끝나자 커다란 돔이 나타났다. 산 아래에 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돔이었다. 넓이만 500여미터 정도되고 높이도 50여미터가 훨씬 넘는 그런 공간이었다. 남자가 돔에 들어서자 계단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장정 두 명이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일주(一住)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말씀 올릴까요?”
“아니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뵙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들도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장정들의 가슴에는 五百九十이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장정들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는 돔 중앙으로 걸어가 철로 만들어진 구조물에 올라타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구조물은 아무런 장치도 없이 공중에 떠올라 광장 왼쪽에 있는 터널을 통과해 작은 철문이 있는 곳에 멈춰섰다.
“외부인 식별 인식 작동합니다.”
남자가 문 앞에 다다르자 양쪽에 달려있는 스피커에서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부회(千符會) 삼주(三主) 처용(處容).”
“삼주 처용 인식 일치. 개문합니다.”
처용의 대답에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고 방안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밖과는 사뭇 다르게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해 놓은 사각 방 가운데에는 붉은 장발머리에 一이 새겨진 승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처용의 등장에 남자는 넘기고 있던 서류뭉치를 내려놓고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어서 오게나. 해룡의 아들.”
붉은머리 중년의 말에 처용은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대사.”
“허허. 자네는 아직도 태생을 거부할 참인가.”
대사의 말에 처용은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 하시고, 어쨌든 임무 완수하고 왔습니다.”
“허허, 그 사람 참. 알겠네. 일단 보고부터 하시게.”
처용은 짜증이 베여있는 얼굴로 자신이 알아본 바를 대사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대사가 말한 여섯 곳을 수색했습니다만 이렇다할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물건이 미약하게나마 반응한 곳이 몇 곳 있었습니다만 아쉽게도 그곳에 은거해있는 분들이 내뿜는 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런가. 알겠네. 헌데 그분께서는······?”
대사의 입에서 ‘그분’이란 단어가 나오자 처용은 난감하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분에 대한 것은 아직 그 어떠한 단서도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그분의 환체로 추정되는 인간들 100여명을 감시중입니다만······아직 경과가 없습니다.”
“그들 중에 징조를 보이는 자가 있던가?”
“아쉽지만 징조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환체와 습사한 신체조건을 가진 자들을 추렸을 뿐입니다. 현재 인도에 있는 인간 하나가 가장 유사한 환체를 가지고 있는 걸로 조사되었고 일본과 중국에도 많은 부분 환체와 일치하는 인간을 추려 조사중에 있습니다.”
“음. 한국에는 없는가?”
“한국 말입니까? 여긴 대사도 알다시피 민족의 죄로 인해 환체가 극히 드물지 않습니까. 혹시나 환체는 아니지만 비슷한 면이 있는 인간 한명이 있어 감시 중입니다만,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집니다.”
“허어, 이래저래 아직은 아니라는 소리 소구먼······. 그분은 도대체 언제 깨어나실 작정이신지······.”
“오래 자리를 비울수록 위태로워지신다는 것쯤은 그분도 잘 아실 겁니다. 조만간 깨어나시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사.”
대사의 진심어린 안타까운 중얼거림에 처용은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풀고는 대사를 위로했다. 하지만 대사는 쉽사리 걱정을 지우지 못하고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는 너무 길어. 벌써 300여년동안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있어. 난 너무나 걱정스럽다네.”
“하지만 이전 환생도 애를 태우시다 임진년(壬辰年)에 왜란(倭亂)이 발발하자마자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처럼 윤회가 길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저희들이 아직 환날이나 환점을 모르고 있는 것 일수도 있고 말입니다.”
“으흠······.”
고개를 저으며 침을성을 흐리는 대사를 지긋이 바라보던 처용은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지를 올려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왼편에 있던 탁자에 놓여있는 차입을 담은 주전가가 스스로 기울어 찻잔에 차를 채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찻잔에 차가 다 차오르자 처용은 검지를 까딱거렸고 그의 손동작에 찻잔 두개가 떠올라 처용과 대사의 앞에 조용히 놓여졌다. 처용은 찻잔에 코를 대고 향기를 음미하고는 잔 하나를 대사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직 예언에 기록된 날짜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잘못 해석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 보도록 합니다. 대사. 더구나 아직 수색을 하지 못한 곳이 남아있으니 조만간 낭보가 들릴 것입니다.”
“······그래, 알겠네. 내가 너무 걱정이 앞선 듯 하이. 그 분의 뜻을 믿고 기다려 보도록 하세나.”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대사의 모습을 보던 처용은 피식 웃으면서 대사에게 말했다.
“후후. 대사께서는 요즘 너무 걱정이 많아지신 것 같습니다. 제가 대사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렇게 대범하고 호탕하신 분이었는데.”
처용의 장난 섞인 말에 대사는 헛기침을 하고는 차를 들이켰다.
“크흠. 그때야 하늘 위의 하늘을 보지 못했던 때였고. 자네 이렇게 복수 하는 건가?”
“하하하. 아닙니다. 그저 왜란당시 대사님의 모습에서 그렇게 느꼈을 뿐입니다. 특히 왜······아니, 일본에서 보여줬던 그 경지는 정말······.”
“됐네, 이 사람아. 이젠 다 옛 일이야. 내 존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옛 이야기 말이야. 사람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사람을 죽였던 내가 아직도 부끄럽다네. 다 같은 하늘이 난 사람이거늘······조국이란 이름으로 많은 살생을 했음이야.”
대사의 얼굴에 숙연함이 스쳐가자 처용은 또 그러냐는 듯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사도 참. 대사 말대로 다 옛 이야기 아닙니까? 제가 공연한 이야기를 꺼냈나 봅니다. 대사께서 그분 일로 기운이 없는 것 같아 농을 건 것이 잘못이군요. 내 아까 하던 보고나 마저 하고 가렵니다.”
“허허허. 미안허이. 그래, 그럼 일 이야기나 해 보시게나.”
대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용은 품에 넣어뒀던 천 조각을 꺼내 대사 앞에 펼쳐 들며 말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건······?”
대사는 처용의 손에 들린 천 조각을 뺏어들고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피로 얼룩져 희미하긴 하지만 흰색 십자가의 양 대각선에 검과 방패가 그려져 있는 일종의 문장이었다. 갑옷에서 뜯겨져 나왔는지 천 끝부분에 갑옷을 연결하는 이음새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처용은 대사가 그것을 자세히 훑어보는 동안 차를 모두 비우고는 입을 열었다.
“전에 조사하라 했던 텍사스와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사주(四住)가 알아보는 중이지만이 이 ‘템플 나이트’의 문장으로 보아 바티칸의 템플러들이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템플 나이트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앙그리단 과의 마찰로 소규모 전투가 있곤 했지 않나. 아직 ‘그들’이라 단정하기는 이른 것 같네만.”
대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처용이 대답했다.
“텍사스 부근을 조사하던 우리 단원들도 그들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단원들 중 복귀를 못한 인원이 있어 부근을 수색하던 도중 살해된 단원들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검식결과 뱀파이어에게 당한 흔적이 나왔다 합니다. 그 단원들은 모두 오십(五十)결 이상의 실력자들이었습니다. 보통 어줍잖은 뱀파이어들에게 그들이 당할 리도 없거니와 그들이 살해된 시각은 오후 14시경으로 한 낮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고 1갑자 이상의 내공을 가진 그들을 살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뱀파이어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텍사스와 암스테르담의 전투는 모두 삼일 안에 일어난 전투였습니다. 템플 나이트와 뱀파이어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들이 틀림없습니다.”
“템플 나이트와 뱀파이어라······.
대사는 천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고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처용의 말은 상당히 현실성이 있었다. 오직 교황의 명령만 받고 움직인다고 알려져 있는 템플 나이트지만, 사실 그들의 간부 중 한명의 의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쯤은 이미 파악해 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 중 강력한 주력인 뱀파이어. 외관상으로도 극과 극에 놓여 있고 실제로도 두 조직 사이에 갈등이 많았었던 이들이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고 한다면 이 상반된 조직을 무리 없이 다룰 수 있는 그들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분명할 터였다. 하지만 대사는 깍지를 낀 손에 턱을 괴고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대사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그러나 쉽사리 그들이라고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니, 확신을 가지기 싫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대사의 모습에 처용은 그의 심중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대사. 이젠 결정을 할 때라고 봅니다.”
대사는 이마를 매만지면서 여전히 말이 없었다. 처용은 대사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팔짱을 끼고는 대사를 쳐다보았다.
“대사.”
“······아직은,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니 좀 더 기다려 보도록 하세나.”
처용은 대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려우신 겁니까.”
“······.”
대사는 고개를 들어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용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대사는 그런 처용의 눈에서 극한의 자제력으로 내리누르고 있는 분노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대사는 처용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탄식에 가까운 중얼거림으로 입을 열었다.
“두렵다네.”
“무엇이 두려우신 겁니까.”
“······.”
처용의 얼굴에 눌려있던 분노의 조각이 떠올랐다. 대사는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함이 아님을 알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처용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힘이 두려워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으신 겁니까.”
“······.”
“그런 것입니까? 천하의 대사가 그들의 힘에 눌려 이렇게 고민을 하시는 것입니까.”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대사를 보며 처용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했다. 그런 그 순간 슬픈 감정이 가득 담긴 말이 대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죄 없는 자들의 절규.”
일어나 대사에게 소리치려던 처용은 멈칫하며 대사를 쳐다보았다. 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용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처용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자리에 앉히면서 말했다.
“또다시 일어날 비극으로 인해 고통 받은 인간들의 통곡. 죽어서 까지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많은 영혼들.”
“······.”
“그리고, 또다시 억겁의 시간동안 되풀이되는 윤회.”
마지막 말에 처용은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들켰다는 표정으로 대사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날 두렵게 만든다네. 똑같은 비극의 반복이 말일세.”
대사는 처용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도록 하세나. 확실해 질 때 까지 말일세. 이만 가보게나. ”
“······.”
대사가 나가고 난 후 아무도 없는 방에서 처용은 대사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처용에게 인간들의 고통은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들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처용이었다. 하지만 대사의 마지막 말은 잊고 있었던 슬픔을 다시한번 상기시켜주었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인간이 눈앞에서 죽어갔고 그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때를. 처용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대리석에 그 인간 여인의 새하얀 미소가 떠오르는 듯 했다. 처용은 주먹을 꽉 쥐고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기 때문에 기어코 끝을 내 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처용은 대사가 나간 방문을 쳐다보면서 아까보다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 헤어스타일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좀 자르십쇼.”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
대한민국 충청북도의 어느 마을. 아침 산새소리만이 조용한 새벽을 알리던 어느 고요한 산자락에서 느닷없이 수십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서 온 것이 아니라 갑자기 그 자리에 한꺼번에 등장을 한 것이다. 그들은 전부 깨끗하고 새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가슴에는 저마다 다른 자수가 놓여 있었다. 그들의 등장으로 놀란 새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들 중 가슴에 三이 새겨져 있는 남자가 주변에 서있는 인물들에게 말했다.
“각 조는 맡은 임무를 확실하게 이행해야 할 것이다.”
“존명.”
남자의 말에 주변 인물들을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나타난 것과 같이 홀연히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 남아있던 남자는 주변 바위를 매만지기도 하고 낙엽을 쓸어보기도 하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한참을 그러다 자신의 키만큼 큰 바위로 다가가 손을 얻은 후 입을 열었다.
“風伯虎猛 雨師地敲 蕓師安世······.”
남자는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렸고 그 중얼거림이 계속될수록 그가 손을 얻고 있는 바위가 점점 빛나기 시작했다.
“······千槍萬劍 肥沃廣土 天下威哥.”
남자의 손 언저리에서부터 퍼져나가던 희미한 빛은 남자의 중얼거림이 끝나자 기묘한 문양을 그리며 주변을 밝혔다.
“천부문(千符門), 개(開).”
기묘한 문양으로 빛나던 돌이 칼로 벤 듯이 세로로 금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소음조차 없이 서서히 양쪽으로 벌어졌고 돌 사이로 은색빛을 띤 돌계단이 지하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남자는 주변을 한번더 살피고 난 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 양쪽으로는 각종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대부분 고대의 전쟁을 묘사한 벽화였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하얀 머리카락과 백색 옷을 입은 동양인 청년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림도 있었는데 그 그림에서는 실제로 약하게나마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지하로 이어진 계단이 끝나자 커다란 돔이 나타났다. 산 아래에 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돔이었다. 넓이만 500여미터 정도되고 높이도 50여미터가 훨씬 넘는 그런 공간이었다. 남자가 돔에 들어서자 계단 입구를 지키고 있던 장정 두 명이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일주(一住)님께서 기다리십니다. 말씀 올릴까요?”
“아니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뵙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들도 역시 남자와 마찬가지로 하얀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장정들의 가슴에는 五百九十이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장정들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는 돔 중앙으로 걸어가 철로 만들어진 구조물에 올라타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 구조물은 아무런 장치도 없이 공중에 떠올라 광장 왼쪽에 있는 터널을 통과해 작은 철문이 있는 곳에 멈춰섰다.
“외부인 식별 인식 작동합니다.”
남자가 문 앞에 다다르자 양쪽에 달려있는 스피커에서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부회(千符會) 삼주(三主) 처용(處容).”
“삼주 처용 인식 일치. 개문합니다.”
처용의 대답에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고 방안 풍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밖과는 사뭇 다르게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해 놓은 사각 방 가운데에는 붉은 장발머리에 一이 새겨진 승복을 입은 중년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처용의 등장에 남자는 넘기고 있던 서류뭉치를 내려놓고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어서 오게나. 해룡의 아들.”
붉은머리 중년의 말에 처용은 대번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대사.”
“허허. 자네는 아직도 태생을 거부할 참인가.”
대사의 말에 처용은 고개를 휘휘 저으면서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쓸데없는 소리는 이쯤 하시고, 어쨌든 임무 완수하고 왔습니다.”
“허허, 그 사람 참. 알겠네. 일단 보고부터 하시게.”
처용은 짜증이 베여있는 얼굴로 자신이 알아본 바를 대사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대사가 말한 여섯 곳을 수색했습니다만 이렇다할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물건이 미약하게나마 반응한 곳이 몇 곳 있었습니다만 아쉽게도 그곳에 은거해있는 분들이 내뿜는 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대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런가. 알겠네. 헌데 그분께서는······?”
대사의 입에서 ‘그분’이란 단어가 나오자 처용은 난감하다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분에 대한 것은 아직 그 어떠한 단서도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그분의 환체로 추정되는 인간들 100여명을 감시중입니다만······아직 경과가 없습니다.”
“그들 중에 징조를 보이는 자가 있던가?”
“아쉽지만 징조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환체와 습사한 신체조건을 가진 자들을 추렸을 뿐입니다. 현재 인도에 있는 인간 하나가 가장 유사한 환체를 가지고 있는 걸로 조사되었고 일본과 중국에도 많은 부분 환체와 일치하는 인간을 추려 조사중에 있습니다.”
“음. 한국에는 없는가?”
“한국 말입니까? 여긴 대사도 알다시피 민족의 죄로 인해 환체가 극히 드물지 않습니까. 혹시나 환체는 아니지만 비슷한 면이 있는 인간 한명이 있어 감시 중입니다만,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집니다.”
“허어, 이래저래 아직은 아니라는 소리 소구먼······. 그분은 도대체 언제 깨어나실 작정이신지······.”
“오래 자리를 비울수록 위태로워지신다는 것쯤은 그분도 잘 아실 겁니다. 조만간 깨어나시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사.”
대사의 진심어린 안타까운 중얼거림에 처용은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풀고는 대사를 위로했다. 하지만 대사는 쉽사리 걱정을 지우지 못하고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이번에는 너무 길어. 벌써 300여년동안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있어. 난 너무나 걱정스럽다네.”
“하지만 이전 환생도 애를 태우시다 임진년(壬辰年)에 왜란(倭亂)이 발발하자마자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때처럼 윤회가 길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아니면, 저희들이 아직 환날이나 환점을 모르고 있는 것 일수도 있고 말입니다.”
“으흠······.”
고개를 저으며 침을성을 흐리는 대사를 지긋이 바라보던 처용은 왼손을 뻗었다. 그리고 검지를 올려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왼편에 있던 탁자에 놓여있는 차입을 담은 주전가가 스스로 기울어 찻잔에 차를 채우기 시작했다. 곧이어 찻잔에 차가 다 차오르자 처용은 검지를 까딱거렸고 그의 손동작에 찻잔 두개가 떠올라 처용과 대사의 앞에 조용히 놓여졌다. 처용은 찻잔에 코를 대고 향기를 음미하고는 잔 하나를 대사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직 예언에 기록된 날짜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고, 우리가 잘못 해석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기다려 보도록 합니다. 대사. 더구나 아직 수색을 하지 못한 곳이 남아있으니 조만간 낭보가 들릴 것입니다.”
“······그래, 알겠네. 내가 너무 걱정이 앞선 듯 하이. 그 분의 뜻을 믿고 기다려 보도록 하세나.”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대사의 모습을 보던 처용은 피식 웃으면서 대사에게 말했다.
“후후. 대사께서는 요즘 너무 걱정이 많아지신 것 같습니다. 제가 대사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그렇게 대범하고 호탕하신 분이었는데.”
처용의 장난 섞인 말에 대사는 헛기침을 하고는 차를 들이켰다.
“크흠. 그때야 하늘 위의 하늘을 보지 못했던 때였고. 자네 이렇게 복수 하는 건가?”
“하하하. 아닙니다. 그저 왜란당시 대사님의 모습에서 그렇게 느꼈을 뿐입니다. 특히 왜······아니, 일본에서 보여줬던 그 경지는 정말······.”
“됐네, 이 사람아. 이젠 다 옛 일이야. 내 존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옛 이야기 말이야. 사람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사람을 죽였던 내가 아직도 부끄럽다네. 다 같은 하늘이 난 사람이거늘······조국이란 이름으로 많은 살생을 했음이야.”
대사의 얼굴에 숙연함이 스쳐가자 처용은 또 그러냐는 듯이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사도 참. 대사 말대로 다 옛 이야기 아닙니까? 제가 공연한 이야기를 꺼냈나 봅니다. 대사께서 그분 일로 기운이 없는 것 같아 농을 건 것이 잘못이군요. 내 아까 하던 보고나 마저 하고 가렵니다.”
“허허허. 미안허이. 그래, 그럼 일 이야기나 해 보시게나.”
대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용은 품에 넣어뒀던 천 조각을 꺼내 대사 앞에 펼쳐 들며 말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건······?”
대사는 처용의 손에 들린 천 조각을 뺏어들고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피로 얼룩져 희미하긴 하지만 흰색 십자가의 양 대각선에 검과 방패가 그려져 있는 일종의 문장이었다. 갑옷에서 뜯겨져 나왔는지 천 끝부분에 갑옷을 연결하는 이음새가 그대로 달려 있었다. 처용은 대사가 그것을 자세히 훑어보는 동안 차를 모두 비우고는 입을 열었다.
“전에 조사하라 했던 텍사스와 암스테르담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사주(四住)가 알아보는 중이지만이 이 ‘템플 나이트’의 문장으로 보아 바티칸의 템플러들이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템플 나이트는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앙그리단 과의 마찰로 소규모 전투가 있곤 했지 않나. 아직 ‘그들’이라 단정하기는 이른 것 같네만.”
대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자 처용이 대답했다.
“텍사스 부근을 조사하던 우리 단원들도 그들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단원들 중 복귀를 못한 인원이 있어 부근을 수색하던 도중 살해된 단원들의 시체를 발견했는데 검식결과 뱀파이어에게 당한 흔적이 나왔다 합니다. 그 단원들은 모두 오십(五十)결 이상의 실력자들이었습니다. 보통 어줍잖은 뱀파이어들에게 그들이 당할 리도 없거니와 그들이 살해된 시각은 오후 14시경으로 한 낮으로 추정된다 합니다. 낮에도 돌아다닐 수 있고 1갑자 이상의 내공을 가진 그들을 살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뱀파이어들은 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텍사스와 암스테르담의 전투는 모두 삼일 안에 일어난 전투였습니다. 템플 나이트와 뱀파이어들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그들이 틀림없습니다.”
“템플 나이트와 뱀파이어라······.
대사는 천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고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처용의 말은 상당히 현실성이 있었다. 오직 교황의 명령만 받고 움직인다고 알려져 있는 템플 나이트지만, 사실 그들의 간부 중 한명의 의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쯤은 이미 파악해 놓은 상태이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 중 강력한 주력인 뱀파이어. 외관상으로도 극과 극에 놓여 있고 실제로도 두 조직 사이에 갈등이 많았었던 이들이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고 한다면 이 상반된 조직을 무리 없이 다룰 수 있는 그들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분명할 터였다. 하지만 대사는 깍지를 낀 손에 턱을 괴고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대사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움직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그러나 쉽사리 그들이라고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니, 확신을 가지기 싫었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대사의 모습에 처용은 그의 심중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대사. 이젠 결정을 할 때라고 봅니다.”
대사는 이마를 매만지면서 여전히 말이 없었다. 처용은 대사의 모습에 입을 다물고 팔짱을 끼고는 대사를 쳐다보았다.
“대사.”
“······아직은,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니니 좀 더 기다려 보도록 하세나.”
처용은 대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려우신 겁니까.”
“······.”
대사는 고개를 들어 처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처용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대사는 그런 처용의 눈에서 극한의 자제력으로 내리누르고 있는 분노의 기운을 읽을 수 있었다. 대사는 처용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탄식에 가까운 중얼거림으로 입을 열었다.
“두렵다네.”
“무엇이 두려우신 겁니까.”
“······.”
처용의 얼굴에 눌려있던 분노의 조각이 떠올랐다. 대사는 그 분노가 자신을 향함이 아님을 알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처용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힘이 두려워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으신 겁니까.”
“······.”
“그런 것입니까? 천하의 대사가 그들의 힘에 눌려 이렇게 고민을 하시는 것입니까.”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대사를 보며 처용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했다. 그런 그 순간 슬픈 감정이 가득 담긴 말이 대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죄 없는 자들의 절규.”
일어나 대사에게 소리치려던 처용은 멈칫하며 대사를 쳐다보았다. 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처용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처용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자리에 앉히면서 말했다.
“또다시 일어날 비극으로 인해 고통 받은 인간들의 통곡. 죽어서 까지 평안을 누리지 못할 수많은 영혼들.”
“······.”
“그리고, 또다시 억겁의 시간동안 되풀이되는 윤회.”
마지막 말에 처용은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들켰다는 표정으로 대사를 올려다보았다.
“그것이 날 두렵게 만든다네. 똑같은 비극의 반복이 말일세.”
대사는 처용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도록 하세나. 확실해 질 때 까지 말일세. 이만 가보게나. ”
“······.”
대사가 나가고 난 후 아무도 없는 방에서 처용은 대사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처용에게 인간들의 고통은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인간들이 자신에게 준 고통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는 처용이었다. 하지만 대사의 마지막 말은 잊고 있었던 슬픔을 다시한번 상기시켜주었다. 처음으로 사랑했던 인간이 눈앞에서 죽어갔고 그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그 때를. 처용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대리석에 그 인간 여인의 새하얀 미소가 떠오르는 듯 했다. 처용은 주먹을 꽉 쥐고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기 때문에 기어코 끝을 내 버려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처용은 대사가 나간 방문을 쳐다보면서 아까보다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 헤어스타일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좀 자르십쇼.”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