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동지들이여.”
넓고 모던한 광장에서 그가 손을 들었다. 함성은 없었다. 암묵의 기운이 스멀스멀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갈 뿐.
“동지들이여!”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매섭게 뜬 눈 속에는 더욱 더 결의가 깃들 뿐이다. 그는 그런 군중들을 돌아보면서 들었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여기모인 그대들만으로도 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광장 안에 모인 인원은 5000명. 고작 오천의 인간으로 한 나라를 무너뜨린다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하는 그였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웃거나 토를 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인물들도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외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의 말에 처음으로 거기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안타까움 따위가 아니다. 분노. 그의 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자신들도 모르게 입으로 새어나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쥐고 있는 주먹을 더 높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숨어 있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 손길을 피해서 말이다. 길고 긴 세월동안 우리는 지하에서 그들의 만행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움. 분노. 그리고 갈망. 그의 말에 수많은 감정들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을 움켜쥔다. 그는 그런 그들의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더욱더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미동도 없었던 5000의 인물들은 그의 말에 격정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쥔다. 어떤 이는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리기까지 한다. 그는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광장이 무너질 듯한 목소리로 외친다.
“나가라! 그대들. 이젠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그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선사하고 우리들의 대지를 다시 찾아오라!”
“크아아아아아!”
함성이 광장을 울린다. 울부짖음과 같은 괴성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는 서서히 손을 내리고는 발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중얼거린다.
“과연······.”
*
“움직였나.”
“그렇습니다.”
“숫자는?”
“예상외로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무모하게 움직이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반듯한 백색의 책상. 그리고 하얀 의자. 보고를 하는 인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한 여인이었고, 의자에 앉아 보고를 듣고 있는 남자는 어둠에 가려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악귀같다 할 수 있을만큼 거칠고 탁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는 가슴과 등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백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무게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정 자세로 서서 입을 열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지부에서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독립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합니다만, 수적으로 우리가 열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인가?”
그녀는 서류를 꺼내 쭉 훑어보며 말했다.
“일단 미국은 블라드 제페슈공과 그 수하들이 모두 투입되어 있어 때문에 산발적인 소규모 움직임만 보일 뿐 위험은 없다 합니다. 하지만 유럽이 문젭니다. 그곳을 지키는 펜드레건 전하와 비아신 제르망공의 행방이 묘연하여 현재 샤를공과 멀린공이 분투중이라 합니다. 펜드레건 전하 휘하의 원탁 기사단 전원이 모습을 감춰 샤를공의 템플 나이트만으로 맞서고 있다곤 하지만 고전을 면하지 못한다 합니다. 아마 그쪽에서 유럽에 강력한 전력을 투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속히 펜드레건 전하와 제르망공을 불러들여······.”
“아서와 비아신은 신경쓰지마라. 잔.”
“예? 하지만······.”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국이 걱정되는 것인가.”
그의 조용한 말에 잔이라 불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이미 수 백년을 살아온 몸. 이젠 조국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그래도 남아있을 테지. 그 때의 영광이 말이야.”
“······.”
그의 말에 잔은 고개를 숙여서 흥분된 자신의 얼굴을 감췄다.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잔.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넌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
그는 묵묵히 서있는 잔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잔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마라. 이미 손을 써 놓은 상태니까.”
“손을 썼다 하심은······?”
“만천. 그가 이미 유럽으로 출발했다.”
“만천님께서!”
그의 말에 잔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만천. 그는 모든 뱀파이어들의 로드인 블라드 제페슈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몇안되는 인물이다. 그를 보낸다면 안심이다. 잔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펜드레건 전하와 제르망공 께서는······?”
“그들은 준비되었던 일을 시작하려 하는 중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제 질문을 허용하지 않겠다.”
“······.”
“끝났으면 그만 나가 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잔의 대답에 그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든 노을에 비춰져 드러났다. 창백하고 혈기가 없는, 마치 죽어버린 자의 얼굴. 잔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매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잔이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고 난 뒤, 무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면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과연······.”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
“동지들이여.”
넓고 모던한 광장에서 그가 손을 들었다. 함성은 없었다. 암묵의 기운이 스멀스멀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갈 뿐.
“동지들이여!”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 매섭게 뜬 눈 속에는 더욱 더 결의가 깃들 뿐이다. 그는 그런 군중들을 돌아보면서 들었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여기모인 그대들만으로도 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광장 안에 모인 인원은 5000명. 고작 오천의 인간으로 한 나라를 무너뜨린다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하는 그였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웃거나 토를 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인물들도 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외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들을 이길 수 없었다.”
그의 말에 처음으로 거기 모인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안타까움 따위가 아니다. 분노. 그의 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자신들도 모르게 입으로 새어나온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쥐고 있는 주먹을 더 높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숨어 있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 손길을 피해서 말이다. 길고 긴 세월동안 우리는 지하에서 그들의 만행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움. 분노. 그리고 갈망. 그의 말에 수많은 감정들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을 움켜쥔다. 그는 그런 그들의 마음을 잘 안다. 그래서 더욱더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지금부터 우리는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미동도 없었던 5000의 인물들은 그의 말에 격정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쥔다. 어떤 이는 이를 드러내면서 으르렁거리기까지 한다. 그는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광장이 무너질 듯한 목소리로 외친다.
“나가라! 그대들. 이젠 더 이상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 그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선사하고 우리들의 대지를 다시 찾아오라!”
“크아아아아아!”
함성이 광장을 울린다. 울부짖음과 같은 괴성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그는 서서히 손을 내리고는 발걸음을 옮기며 조용히 중얼거린다.
“과연······.”
*
“움직였나.”
“그렇습니다.”
“숫자는?”
“예상외로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무모하게 움직이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반듯한 백색의 책상. 그리고 하얀 의자. 보고를 하는 인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듯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한 여인이었고, 의자에 앉아 보고를 듣고 있는 남자는 어둠에 가려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악귀같다 할 수 있을만큼 거칠고 탁했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여자는 가슴과 등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백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무게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 정 자세로 서서 입을 열었다.
“이미 미국과 유럽지부에서는 움직임을 포착하고 독립적인 대응을 하겠다고 합니다만, 수적으로 우리가 열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인가?”
그녀는 서류를 꺼내 쭉 훑어보며 말했다.
“일단 미국은 블라드 제페슈공과 그 수하들이 모두 투입되어 있어 때문에 산발적인 소규모 움직임만 보일 뿐 위험은 없다 합니다. 하지만 유럽이 문젭니다. 그곳을 지키는 펜드레건 전하와 비아신 제르망공의 행방이 묘연하여 현재 샤를공과 멀린공이 분투중이라 합니다. 펜드레건 전하 휘하의 원탁 기사단 전원이 모습을 감춰 샤를공의 템플 나이트만으로 맞서고 있다곤 하지만 고전을 면하지 못한다 합니다. 아마 그쪽에서 유럽에 강력한 전력을 투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속히 펜드레건 전하와 제르망공을 불러들여······.”
“아서와 비아신은 신경쓰지마라. 잔.”
“예? 하지만······.”
의자에 앉아있던 남자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조국이 걱정되는 것인가.”
그의 조용한 말에 잔이라 불린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이미 수 백년을 살아온 몸. 이젠 조국 같은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그래도 남아있을 테지. 그 때의 영광이 말이야.”
“······.”
그의 말에 잔은 고개를 숙여서 흥분된 자신의 얼굴을 감췄다.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잔.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넌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
그는 묵묵히 서있는 잔을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잔의 불안감을 해소시켜주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마라. 이미 손을 써 놓은 상태니까.”
“손을 썼다 하심은······?”
“만천. 그가 이미 유럽으로 출발했다.”
“만천님께서!”
그의 말에 잔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만천. 그는 모든 뱀파이어들의 로드인 블라드 제페슈와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몇안되는 인물이다. 그를 보낸다면 안심이다. 잔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펜드레건 전하와 제르망공 께서는······?”
“그들은 준비되었던 일을 시작하려 하는 중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제 질문을 허용하지 않겠다.”
“······.”
“끝났으면 그만 나가 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그럼.”
잔의 대답에 그는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러자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든 노을에 비춰져 드러났다. 창백하고 혈기가 없는, 마치 죽어버린 자의 얼굴. 잔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매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잔이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고 난 뒤, 무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면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과연······.”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