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원, 머리가 나빠도 이리 나쁠 수가 있나, 쯧쯧……."
대규가가 형골의 받아쓰기 답안지를 보고 혀를 찼다. 식탁 맞은 편에 앉아서 형골은 짐짓 무시하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글도 모르는 녀석이 뭔 마법이냐? 넌 그냥 장작이나 패며 살아라."
대규가가 얼굴을 찌푸린 채 받아쓰기 답안지를 형골 쪽으로 내던졌다. 형골은 보지도 않고 능숙하게 왼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흐트러짐 없이 식사를 계속 했다.
"는 건 운동신경밖에 없구만……."
"자기는 앉아서 책이나 읽고, 나한테 죽어라 맨날 일만 시키니 안 그럴 수가 있나?"
형골이 오물거리며 말했다.
"가출을 취미로 하는 놈이 또 뭔 밥은 그리 많이 먹는지, 아주 놀라워!"
대규가가 비꼬는 투로 핀잔을 줬다. '가출' 소리에 순간 형골은 울컥했다.
"아, 밥 먹을 땐 개도 개를 안 건드린다는데, 뭐 이딴 영감탱이가 다 있어?!"
형골은 수저를 식탁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부수듯이 세게 닫았다.
"저, 저,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기껏 키워 놨더니……!"
대규가는 끌끌 혀를 찼다. 그러나 눈길은 금세 식탁 위 그릇들로 옮겨갔다. 나물을 담은 그릇이 비어있었다. 대규가는 오늘 저녁에도 형골이 좋아하는 나물을 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형골은 화풀이하듯 힘껏 도끼를 내리쳤다. 나무토막이 둘로 쪼개질수록 마음의 동요는 더해갔다. 형골은 예전의 가출과 가출 때 저질렀던 일들이 큰 잘못임을 이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이 깊어갈수록 행동이나 말투는 더 퉁명스러워졌다. 이것이 다시 스스로를 화나게 만들었고, 미안한 마음을 더 크게 만들었다. 때로는 대규가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럴수록 착하게 행동해야하는데 더 퉁명스러워지는 건 왜인지 혼란스러웠다. 마치 쳇바퀴 같았다. 마음이 답답했다.
형골이 처음 가출을 한 것은 대규가와 함께 산 지 몇 개월 후였다. 따뜻한 잠자리는 형골이 그 동안 경험해본 적 없는 황홀한 느낌이었다. 피곤한 몸이어도 그 좋은 느낌을 좀더 느끼고 싶어 몇 번이나 뜬눈으로 밤을 보낸 지 모른다. 또 약속대로 대규가는 맛있는 밥을 꼬박꼬박 주었다. 특히 나물무침 솜씨는 까무러칠 정도였다. 그러나 대규가가 책을 구하러 집을 떠나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형골이 맡은 집안일도 많아지고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설거지나 청소로 시작했다. 그러나 곧 약초 캐기·나물 캐기·열매따기뿐만 아니라, 물 길어오기, 땔감 구하기, 장작패기, 벽난로 청소하기 등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집안 물건을 맘대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실 왼편에는 책들이랑 이상한 실험도구들이 탁자에 쌓여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그것들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초승달처럼 안쪽으로 구부려지더니 튕겨버렸다. 반대편 벽에 부닥친 형골은 그대로 고꾸라져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다.
"괜찮냐? 내가 봉인 얘기를 안 해놓고 갔구나."
돌아온 대규가가 쓰러져 있던 형골을 깨우며 건넨 첫 말이었다. 마법으로 봉인을 해 두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물건들에 몸을 직접 갖다대는 일은 없었다. 대신 도구를 이용해 대규가의 지팡이를 훔치려 했던 적은 있었다. 형골이 자주 가출을 하던 때에 유흥비 지출을 위해 돈이 필요했다. 대규가의 지팡이는 윤택이 나는 검은빛이었고 손잡이 부분에는 노란 보석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한 마디로 비싸 보였다. 어느 날 물건이 쌓여있는 탁자 밑에 지팡이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팡이를 봉인 바깥으로 쳐내면 될 것 같았다. 형골은 끝이 구부러진 쇠불쏘시개를 범행에 이용했다. 누워서 쇠불쏘시개를 탁자 밑으로 천천히 집어넣었다. 생물이 아닌 무생물이니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손끝으로 쇠불쏘시개가 뭔가에 부닥친 느낌이 전해졌다. 불길했다. 순간 '뽕' 소리가 나며 쇠불쏘기개가 손을 떠나 미끄러지듯 빠르게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복부를 강타했다. 형골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또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도대체 왜 또 그러냐? 내가 봉인 얘기했었잖아."
돌아온 대규가가 의식을 잃은 형골을 깨우며 건넨 말이었다. 물건까지 봉인 때문에 튕긴다고는 말 안 했잖아 영감탱이야, 라고 형골은 속으로 생각하며 신음소리를 삼켰다.
거의 10년 전 일이었다. 형골은 도끼질을 하다말고 가만히 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흘렀건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들은 좀더 자란 듯 했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마을로 가는 숲길은 여전히 길었고, 마을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일 다 했냐? 이제 공부하자."
대규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둘은 예전부터 싸운 뒤에도 곧 쉽게 풀어지곤 했다. 사실 대규가가 그런 방향으로 형골을 키운 영향이 컸다. 어릴 적부터 형골의 삐뚠 성격으로 많은 다툼이 있었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무조건 대거리를 해댔던 형골이었다.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대규가의 공은 컸다.
형골은 걸어오는 대규가를 곁눈질로 보았다. 백발의 더벅머리에 쭈글쭈글한 얼굴. 축 쳐진 눈초리에 비해 유난히 큰 눈. 몽땅한 키에 마른 몸. 예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은 없었지만 허리가 점점 앞으로 숙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지팡이를 짚지 않고는 쉬이 걷지 못했다. 반면에 자신은 점점 허리가 굵어지고 있었다. 형골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옜다, 욘석아."
대규가가 과일 하나를 던져주었다. 과즙이 많은 과일이다. 갈증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골은 자신의 마음이 들킬 것 같아 얼른 과일을 한 입 크게 물었다. 입 안 가득 단물이 찼다. 대규가는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으며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지팡이는 예전의 윤기 나는 검은색이 아니었다. 길고 단단한 나뭇가지를 잘라 대충 다듬어 지팡이로 쓰고 있었다.
"자, 마법이 뭐라고?"
대규가가 뜬금없이 물었다. 하지만 형골은 익숙하다는 듯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마음으로 그리기."
"그렇지. 마음으로 그린 것이 실현되면 마법이 '시전(施轉)됐다'고 하는 거다. 얼마나 집중력 있게 그리느냐에 따라 그 시전된 마법의 세기·지속시간 등이 달라지는 거다. 하지만 타고난 '마법력'이 작으면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의 등급도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초급 마법밖에 시전할 수 없겠지."
"영감, 그거 말야… 난 그게 이해가 안 돼. 누구나 마법력을 타고난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 마을 사람 모두 마법사가 될 수 있단 말이야?"
"가능한 일이야. 물론 훈련과 연습을 통해 좀더 힘을 계발하고 정제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하지만 원체 그 힘의 크기가 작다면 곧 한계에 부닥쳐. 그 한계를 넘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 마법사로서 혹은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잃을 지도 모를 위험이 따르기도 하지."
대규가의 눈에 잠시 회상에 잠기는 빛이 어렸다.
"그럼 나도 얼른 그 훈련과 연습을 해서 계발이니 새발이니 해야하지 않겠수? 허구헌날 이런 말장난만 까고 앉아서 뭔 마법을 배우겠냐고?"
"욘석아, 이런 본질론을 알아야 좀더 고급마법을 시전할 때 수월하단 말야. 기초가 없이 어찌 집을 짓누?"
"무슨 집까지……. 난 그저 원두막에서 살아도 좋으니 마법하는 주문이나 얼른 알려줘."
형골이 빈정거렸다.
"주문 같은 건 없다고 했잖아! 주문은 정령술사나 하는 짓이라니까!"
대규가가 갑자기 역정을 냈다.
"아, 맞다. 마법은 마음으로 그리기."
형골이 눈치를 살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말이 나왔으니 얘기를 해주마, 정령술사가 어떤 존재인지. 이 세상에는 정령(精靈)이라는 존재들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귀신'이라고들 한다만…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사람의 경우처럼 밝혀진 바가 없다. 단지 그들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지. 단지 가끔 죽은이들의 모습을 빌려 해코지를 할 뿐이야. 하여튼 그들은 사람의 영혼을 먹는다. 마을을 습격하거나 사람의 꿈속에 침입해 배를 채우는 식이지. 그 중에서도 순수하고 마법력이 큰 사람의 영혼, 즉 마법사들의 영혼을 최고로 쳐. 하지만 대개 고급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의 영혼, 즉 순수하고 마법력이 큰 마법사의 영혼은 얻기가 힘들겠지. 그런 마법사들은 정령들의 힘을 꺾고도 남기 때문에 이 마법사들과 싸워서 그 영혼을 차지하기란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정령들은 '유혹'이라는 방법을 쓰지……."
대규가는 말끝을 흐렸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생각하듯 그는 잠시 주저했다. 형골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더 상급의 고급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만큼의 마법력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훈련과 연습만으로 계발하고 정제할 수 있는 마법력은 한계가 있어. 애초부터 선천적으로 얻는 힘이기 때문이야. 마법사들은 그 지위가 낮든 높든 간에 그 한계를 넘어 더 큰 마법을 시전하고 싶은 강한 열망과 유혹에 빠진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 때문에 스스로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을 잃게 된다면 마법사는 그 자격을 잃고 마는 거다.
예전에 북방 원비국에 마법사 '바로크'라고 하는 대단한 마법사가 있었다. 그 또한 우리처럼 흑마법을 다뤘고, 나라의 중신(重臣)이기까지 했지. 그 나라는 궁정마법부가 없었지만 그 마법사의 실력과 인품이 출중했기에 널리 인망(人望)을 받아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훌륭한 분이었어…….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아내가 죽었다. 이름 모를 병에 걸렸는데 그 나라에 있는 의사나 백마법사들도 고칠 수 없었지. 그때는 지금과 달리 타국과 항시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타국에 있는 뛰어난 백마법사나 의사 들에게 보일 수도 없었다. 그는 모든 관직과 지위를 내동댕이치고 백마법에 몰두했어. 그 자신이 훌륭한 마법사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고치려 했던 것이지. 하지만 그의 본디 마법은 흑마법이었고, 설령 백마법사로 훌륭히 거듭났더라도 이미 죽은 아내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손을 댄 것이 정령술이었지."
정령과 계약을 맺어 자신의 영혼을 절반 내어주고, 대신 그 계약을 맺은 정령의 힘과 자신의 마법력을 결합시키는 것이 '정령술(精靈術)'이다. 정령술은 보통의 마법보다 더 크고 강한 마법 시전을 가능케 한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불가능했던 마법조차 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다만 계약을 맺은 자가 죽으면 그 영혼 전부가 정령에게 먹히고 만다. 순수하고 마법력이 큰 마법사들의 영혼을 차지하는 방법이 바로 이 정령술이다. 이것으로 마법사를 유혹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와 대면하고 절망한 마법사들은 정령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영혼이 사후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결점이 정령술에 있다. 어쩌면 '불행'한 것이리라. 그것은 정령술사가 되어도 원하는 힘을 얻을 확률이 작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능력으로 불가능하고 자신이 원했던 그 고급 마법을 정령술사가 된다하여 반드시 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A라는 고급 마법을 원하던 마법사가 정령술로 정령술사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A 마법 시전이 가능한 힘을 얻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B 마법만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즉, 정령술로 인해 새로이 얻게 되는 그 고유의 힘은 특별히 정해진 바 없고 정할 수도 없다. 원하던 힘을 얻지 못한 마법사는 기존의 마법도 잃어버린다. 오직 새로이 얻은 정령술사 고유의 힘만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정령술사는 끝없는 자살의 유혹과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절반을 내어줘도 그 영혼 자체는 계속하여 한 몸 안에 있다. 즉 절반씩 주인만 다를 뿐이다. 정령에게 내어준 영혼의 절반은 정령술사에게 자살을 속삭이며 재촉한다. 절반의 주인이 생명을 잃으면 그 부분은 사후세계로 돌아가는 대신에 나머지 절반의 주인에게로 속해진다. 그리고 하나의 영혼으로 그 새로운 주인에게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정령이 차지한 영혼의 절반은 정령술사가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령이 온전히 그 영혼 하나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전부 알면서도 많은 마법사들이 정령술사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정령술로 나타난 정령술사 '바로크'의 힘은 소생술(蘇生術)이나 치유술이 아니었다. '예지력(叡智力)'이었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대예언자 '바로크'가 정령술사가 된 후 내뱉은 첫 예언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신은 영영 슬플 것이다.' 그는 울먹이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고 한다.
"죽어서 이미 썩기 시작한 아내를 어떻게 예언력으로 되살릴 수 있었겠냐……. 이렇게 절망밖에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정령술사고, 그들은 마법사들과 달라. 암, 다르고 말고. 그런 패배자들이나 하는 주문을 감히 마법과 연관시키지 말거라. 마법은 순전히 마음의 힘으로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야."
대규가의 음성에 노여움이 스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형골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과 뭇 추앙자들을 배반한 채 추락해버린 자신의 스승을 향한 것이었다. 형골은 잠시 상념에 빠진 대규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골은 그 오래된 노여움에서 대규가의 진한 그리움을 느꼈다.
마음이 아파왔다. 형골은 자신의 실수가 너무나 큼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몇 년 전 한창 가출과 유흥의 단맛에 빠져있던 때에 형골은 모처럼 집에 돌아와 먹을거리를 찾고 있었다. 집은 여느 때와 같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과일 몇 개를 챙겨 집을 나오려는 순간 집안으로 들어오는 낯선 사내 몇과 맞닥뜨렸다.
"어? 사람이 있었네. 미안해서 어쩌지, 함부로 들어와서?"
"그러길래 우리도 노크 좀 하고 살자고 했잖냐. 예의가 없으면 복을 못 받아요, 복을! 똑똑, 실례합니다, 여기 복 좀 파나요?"
그들 중 한 치가 노크하는 모양새를 내며 소란스레 웃어댔다. 건들대는 폼이 눈에 거슬렸다.
"대규가 선생 안 계시나봐?"
"……."
"우리 돈 언제 갚으시려나 매우 궁금해서 매우 몸소 방문까지 했는데, 없으시면 매우 섭하잖아, 어떡하나……?"
"영감이 돈을……?"
형골은 의아했다. 집에 올 때마다 온 구석을 뒤져도 푼돈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사내가 앞으로 두세 걸음 나오며 입을 열었다. 형골을 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영감… 이라고 하는 걸 보니, 니 녀석이 그 유명한 제자놈이구나. 소문은 익히 들었다. 선생이 유일하게 들인 제자라고. 선생의 스승이 줬다는 지팡이를 우리한테 넘기면서까지 애지중지 하시는데, 그 제자분은 이 근방에서 보기 드문 양아치 짓거리를 하신다고. 물 쓰듯 돈 쓰고, 갈취하기·희롱하기는 기본이고 떼거리 지어서 사람도 곧잘 팬다고 들었다만……"
"그게 무슨 소리야, 지팡이? 영감의 스승?"
"우리 유명인께서 모르시나보네. 제자 뒤치다꺼리 때문에 이 돈 저 돈 다 쓰고, 선생의 스승이 준 그 귀한 지팡이까지 팔아 합의금 대고 손해 물어주고, 어떻게 된 게 제자가 한 번 날면 그 선생이 똥줄 타는구만. 제자 교육을 뭐 이따구로 시켰지?"
"……!"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형골은 그 지팡이가 그리 귀한 것인지도 몰랐고, 자신을 위해 그것을 팔았다는 것도 몰랐다. 머리가 멍해졌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놀라 눈만 끔벅였다.
"그런 지팡이 우리가 진짠 지 어쩐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바로크'라고 써 있긴 하던데, 대규가 선생이 정말 그 유명한 예언자 제자인지도 모르겠고. 근데 어찌나 하도 부탁을 하는지, 원,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혹시 또 알아, 그 지팡이가 예언자 것이었다면 나도 예언 좀 할 수 있게 될 지?"
그 사내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 늙은 마법사가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형님? 마법사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봅니다."
사내 몇이 큭큭 웃는 소리를 냈다.
형골은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 지팡이는 어디에……?"
"어딨긴, 우리 사무실에 있지."
"다시 내놔!!"
형골이 두 눈을 부릅뜨고 사내에게 달려갔다.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내 뭔가에 튕겨 방 한 구석에 쳐박혔다. 익숙한 느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법사 제자가 마법 대신에 주먹을 휘두르고, 참 말세네."
동정하는 말투였다.
"야, 양아치! 우리 형님이 마법사 칭호만 못 받으셨지, 웬만한 마법은 하신다 이 말이야! 엘리트야, 엘리트! 주먹만 휘두르면 되겠니? 로봇태권V처럼 주먹 로켓이라도 쏴보던가!"
옆에 있는 사내들이 형골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형골은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그러나 자신에게 마법을 시전한 그 사내의 마지막 말은 또렷이 들렸다.
"불쌍한 놈."
형골은 의식이 사라지면서도 자신의 시야가 눈물로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또 튕긴거냐? 학습효과가 전혀 없구만.' 돌아온 대규가가 쓰러져 있던 형골을 깨우며 건넨 말이었다. 그 후로 형골은 다시는 가출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시키는 대로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오는 등 집안일을 했다. 대규가도 그런 형골의 변화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규가는 둘 사이에 아무런 비밀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형골은 대규가의 비밀을 그제야 알아챘다. 어렸을 적 자신을 집으로 데려올 때 보았던 그 따스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너무나 멀리, 너무나 오래 돌고 돌아 그제야 알아챘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얼른, 얼른 마법을 영감한테 배워서 그런 싹퉁바가지 놈들 도시락 싸들고 쫓아가며 혼내줄게. 그러니까 빨랑빨랑 가르쳐 달란 말야. 달팽이 오줌 싸듯 찔끔찔끔 가르치지 말고."
형골이 짐짓 활기차게 재촉했다. 시무룩한 대규가의 모습에 부러 크게 소리를 냈다.
"나중에 마법으로 까불다가 술사한테 얻어맞지나 마라, 내 망신이니까."
대규가도 웃으며 일부러 핀잔을 줬다.
그러나 둘의 눈가가 촉촉해진 것을 서로에게 감출 수는 없었다. 대규가는 자신이 좀더 젊을 때에 형골을 만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쇠약해진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형골은 시무룩한 자신의 스승을 보니 마음이 갑갑해졌다. 지금까지 대규가에게 제대로 못 대해 준 것에 먹먹했다.
약속이나 한 듯 둘은 어색하게 각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물방울처럼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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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리 써 둔 분량이 바닥났습니다.ㅋㅋㅋ 앞으로는 더더욱 연재속도가 늦을 듯. ㅡ.,ㅡ;;
계속해서 주인공 '형골'의 어린시절 얘기입니다. 한 동안 이어집니다.
'형골'의 회심(;)에 대한 심리 묘사가 불완전하여 걱정이네요.흠;;
아,
얼마 전에 홍보했던 인터넷 개인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http://trebari.ohpy.com/148919/13
청취자의 녹음멘트가 있어야 방송을 시작할 수 있는 구조인데,
어떤 내용의 멘트든 상관없습니다.ㅋㅋ
많은 참여 바래요~
그럼 이만.. 약 두 달 후에 다시 뵙죠;;;;
-하늘날개-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
"원, 머리가 나빠도 이리 나쁠 수가 있나, 쯧쯧……."
대규가가 형골의 받아쓰기 답안지를 보고 혀를 찼다. 식탁 맞은 편에 앉아서 형골은 짐짓 무시하며 음식을 먹고 있었다.
"글도 모르는 녀석이 뭔 마법이냐? 넌 그냥 장작이나 패며 살아라."
대규가가 얼굴을 찌푸린 채 받아쓰기 답안지를 형골 쪽으로 내던졌다. 형골은 보지도 않고 능숙하게 왼손으로 그것을 막았다. 흐트러짐 없이 식사를 계속 했다.
"는 건 운동신경밖에 없구만……."
"자기는 앉아서 책이나 읽고, 나한테 죽어라 맨날 일만 시키니 안 그럴 수가 있나?"
형골이 오물거리며 말했다.
"가출을 취미로 하는 놈이 또 뭔 밥은 그리 많이 먹는지, 아주 놀라워!"
대규가가 비꼬는 투로 핀잔을 줬다. '가출' 소리에 순간 형골은 울컥했다.
"아, 밥 먹을 땐 개도 개를 안 건드린다는데, 뭐 이딴 영감탱이가 다 있어?!"
형골은 수저를 식탁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부수듯이 세게 닫았다.
"저, 저,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기껏 키워 놨더니……!"
대규가는 끌끌 혀를 찼다. 그러나 눈길은 금세 식탁 위 그릇들로 옮겨갔다. 나물을 담은 그릇이 비어있었다. 대규가는 오늘 저녁에도 형골이 좋아하는 나물을 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형골은 화풀이하듯 힘껏 도끼를 내리쳤다. 나무토막이 둘로 쪼개질수록 마음의 동요는 더해갔다. 형골은 예전의 가출과 가출 때 저질렀던 일들이 큰 잘못임을 이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이 깊어갈수록 행동이나 말투는 더 퉁명스러워졌다. 이것이 다시 스스로를 화나게 만들었고, 미안한 마음을 더 크게 만들었다. 때로는 대규가의 눈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럴수록 착하게 행동해야하는데 더 퉁명스러워지는 건 왜인지 혼란스러웠다. 마치 쳇바퀴 같았다. 마음이 답답했다.
형골이 처음 가출을 한 것은 대규가와 함께 산 지 몇 개월 후였다. 따뜻한 잠자리는 형골이 그 동안 경험해본 적 없는 황홀한 느낌이었다. 피곤한 몸이어도 그 좋은 느낌을 좀더 느끼고 싶어 몇 번이나 뜬눈으로 밤을 보낸 지 모른다. 또 약속대로 대규가는 맛있는 밥을 꼬박꼬박 주었다. 특히 나물무침 솜씨는 까무러칠 정도였다. 그러나 대규가가 책을 구하러 집을 떠나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형골이 맡은 집안일도 많아지고 힘들어졌다. 처음에는 설거지나 청소로 시작했다. 그러나 곧 약초 캐기·나물 캐기·열매따기뿐만 아니라, 물 길어오기, 땔감 구하기, 장작패기, 벽난로 청소하기 등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집안 물건을 맘대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거실 왼편에는 책들이랑 이상한 실험도구들이 탁자에 쌓여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소를 하다가 실수로 그것들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몸이 초승달처럼 안쪽으로 구부려지더니 튕겨버렸다. 반대편 벽에 부닥친 형골은 그대로 고꾸라져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다.
"괜찮냐? 내가 봉인 얘기를 안 해놓고 갔구나."
돌아온 대규가가 쓰러져 있던 형골을 깨우며 건넨 첫 말이었다. 마법으로 봉인을 해 두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물건들에 몸을 직접 갖다대는 일은 없었다. 대신 도구를 이용해 대규가의 지팡이를 훔치려 했던 적은 있었다. 형골이 자주 가출을 하던 때에 유흥비 지출을 위해 돈이 필요했다. 대규가의 지팡이는 윤택이 나는 검은빛이었고 손잡이 부분에는 노란 보석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한 마디로 비싸 보였다. 어느 날 물건이 쌓여있는 탁자 밑에 지팡이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팡이를 봉인 바깥으로 쳐내면 될 것 같았다. 형골은 끝이 구부러진 쇠불쏘시개를 범행에 이용했다. 누워서 쇠불쏘시개를 탁자 밑으로 천천히 집어넣었다. 생물이 아닌 무생물이니 마법의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손끝으로 쇠불쏘시개가 뭔가에 부닥친 느낌이 전해졌다. 불길했다. 순간 '뽕' 소리가 나며 쇠불쏘기개가 손을 떠나 미끄러지듯 빠르게 몸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복부를 강타했다. 형골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또 며칠 동안 의식을 잃었다.
"오랜만에 집에 와서 도대체 왜 또 그러냐? 내가 봉인 얘기했었잖아."
돌아온 대규가가 의식을 잃은 형골을 깨우며 건넨 말이었다. 물건까지 봉인 때문에 튕긴다고는 말 안 했잖아 영감탱이야, 라고 형골은 속으로 생각하며 신음소리를 삼켰다.
거의 10년 전 일이었다. 형골은 도끼질을 하다말고 가만히 서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흘렀건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들은 좀더 자란 듯 했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마을로 가는 숲길은 여전히 길었고, 마을은 여전히 멀게만 느껴졌다.
"일 다 했냐? 이제 공부하자."
대규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둘은 예전부터 싸운 뒤에도 곧 쉽게 풀어지곤 했다. 사실 대규가가 그런 방향으로 형골을 키운 영향이 컸다. 어릴 적부터 형골의 삐뚠 성격으로 많은 다툼이 있었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무조건 대거리를 해댔던 형골이었다.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대규가의 공은 컸다.
형골은 걸어오는 대규가를 곁눈질로 보았다. 백발의 더벅머리에 쭈글쭈글한 얼굴. 축 쳐진 눈초리에 비해 유난히 큰 눈. 몽땅한 키에 마른 몸. 예전과 크게 달라진 모습은 없었지만 허리가 점점 앞으로 숙여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지팡이를 짚지 않고는 쉬이 걷지 못했다. 반면에 자신은 점점 허리가 굵어지고 있었다. 형골은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옜다, 욘석아."
대규가가 과일 하나를 던져주었다. 과즙이 많은 과일이다. 갈증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골은 자신의 마음이 들킬 것 같아 얼른 과일을 한 입 크게 물었다. 입 안 가득 단물이 찼다. 대규가는 지팡이를 옆에 내려놓으며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지팡이는 예전의 윤기 나는 검은색이 아니었다. 길고 단단한 나뭇가지를 잘라 대충 다듬어 지팡이로 쓰고 있었다.
"자, 마법이 뭐라고?"
대규가가 뜬금없이 물었다. 하지만 형골은 익숙하다는 듯 당황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마음으로 그리기."
"그렇지. 마음으로 그린 것이 실현되면 마법이 '시전(施轉)됐다'고 하는 거다. 얼마나 집중력 있게 그리느냐에 따라 그 시전된 마법의 세기·지속시간 등이 달라지는 거다. 하지만 타고난 '마법력'이 작으면 시전할 수 있는 마법의 등급도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초급 마법밖에 시전할 수 없겠지."
"영감, 그거 말야… 난 그게 이해가 안 돼. 누구나 마법력을 타고난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 마을 사람 모두 마법사가 될 수 있단 말이야?"
"가능한 일이야. 물론 훈련과 연습을 통해 좀더 힘을 계발하고 정제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하지만 원체 그 힘의 크기가 작다면 곧 한계에 부닥쳐. 그 한계를 넘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 마법사로서 혹은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잃을 지도 모를 위험이 따르기도 하지."
대규가의 눈에 잠시 회상에 잠기는 빛이 어렸다.
"그럼 나도 얼른 그 훈련과 연습을 해서 계발이니 새발이니 해야하지 않겠수? 허구헌날 이런 말장난만 까고 앉아서 뭔 마법을 배우겠냐고?"
"욘석아, 이런 본질론을 알아야 좀더 고급마법을 시전할 때 수월하단 말야. 기초가 없이 어찌 집을 짓누?"
"무슨 집까지……. 난 그저 원두막에서 살아도 좋으니 마법하는 주문이나 얼른 알려줘."
형골이 빈정거렸다.
"주문 같은 건 없다고 했잖아! 주문은 정령술사나 하는 짓이라니까!"
대규가가 갑자기 역정을 냈다.
"아, 맞다. 마법은 마음으로 그리기."
형골이 눈치를 살피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말이 나왔으니 얘기를 해주마, 정령술사가 어떤 존재인지. 이 세상에는 정령(精靈)이라는 존재들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귀신'이라고들 한다만… 그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사람의 경우처럼 밝혀진 바가 없다. 단지 그들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지. 단지 가끔 죽은이들의 모습을 빌려 해코지를 할 뿐이야. 하여튼 그들은 사람의 영혼을 먹는다. 마을을 습격하거나 사람의 꿈속에 침입해 배를 채우는 식이지. 그 중에서도 순수하고 마법력이 큰 사람의 영혼, 즉 마법사들의 영혼을 최고로 쳐. 하지만 대개 고급마법을 구사하는 마법사의 영혼, 즉 순수하고 마법력이 큰 마법사의 영혼은 얻기가 힘들겠지. 그런 마법사들은 정령들의 힘을 꺾고도 남기 때문에 이 마법사들과 싸워서 그 영혼을 차지하기란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정령들은 '유혹'이라는 방법을 쓰지……."
대규가는 말끝을 흐렸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생각하듯 그는 잠시 주저했다. 형골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더 상급의 고급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만큼의 마법력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훈련과 연습만으로 계발하고 정제할 수 있는 마법력은 한계가 있어. 애초부터 선천적으로 얻는 힘이기 때문이야. 마법사들은 그 지위가 낮든 높든 간에 그 한계를 넘어 더 큰 마법을 시전하고 싶은 강한 열망과 유혹에 빠진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이 때문에 스스로를 바라보는 객관적인 눈을 잃게 된다면 마법사는 그 자격을 잃고 마는 거다.
예전에 북방 원비국에 마법사 '바로크'라고 하는 대단한 마법사가 있었다. 그 또한 우리처럼 흑마법을 다뤘고, 나라의 중신(重臣)이기까지 했지. 그 나라는 궁정마법부가 없었지만 그 마법사의 실력과 인품이 출중했기에 널리 인망(人望)을 받아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 정도로 훌륭한 분이었어…….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아내가 죽었다. 이름 모를 병에 걸렸는데 그 나라에 있는 의사나 백마법사들도 고칠 수 없었지. 그때는 지금과 달리 타국과 항시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타국에 있는 뛰어난 백마법사나 의사 들에게 보일 수도 없었다. 그는 모든 관직과 지위를 내동댕이치고 백마법에 몰두했어. 그 자신이 훌륭한 마법사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고치려 했던 것이지. 하지만 그의 본디 마법은 흑마법이었고, 설령 백마법사로 훌륭히 거듭났더라도 이미 죽은 아내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손을 댄 것이 정령술이었지."
정령과 계약을 맺어 자신의 영혼을 절반 내어주고, 대신 그 계약을 맺은 정령의 힘과 자신의 마법력을 결합시키는 것이 '정령술(精靈術)'이다. 정령술은 보통의 마법보다 더 크고 강한 마법 시전을 가능케 한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불가능했던 마법조차 시전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다만 계약을 맺은 자가 죽으면 그 영혼 전부가 정령에게 먹히고 만다. 순수하고 마법력이 큰 마법사들의 영혼을 차지하는 방법이 바로 이 정령술이다. 이것으로 마법사를 유혹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와 대면하고 절망한 마법사들은 정령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영혼이 사후세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결점이 정령술에 있다. 어쩌면 '불행'한 것이리라. 그것은 정령술사가 되어도 원하는 힘을 얻을 확률이 작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능력으로 불가능하고 자신이 원했던 그 고급 마법을 정령술사가 된다하여 반드시 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A라는 고급 마법을 원하던 마법사가 정령술로 정령술사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A 마법 시전이 가능한 힘을 얻는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B 마법만 가능하게 될 수도 있다. 즉, 정령술로 인해 새로이 얻게 되는 그 고유의 힘은 특별히 정해진 바 없고 정할 수도 없다. 원하던 힘을 얻지 못한 마법사는 기존의 마법도 잃어버린다. 오직 새로이 얻은 정령술사 고유의 힘만을 쓸 수 있다.
게다가 정령술사는 끝없는 자살의 유혹과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절반을 내어줘도 그 영혼 자체는 계속하여 한 몸 안에 있다. 즉 절반씩 주인만 다를 뿐이다. 정령에게 내어준 영혼의 절반은 정령술사에게 자살을 속삭이며 재촉한다. 절반의 주인이 생명을 잃으면 그 부분은 사후세계로 돌아가는 대신에 나머지 절반의 주인에게로 속해진다. 그리고 하나의 영혼으로 그 새로운 주인에게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정령이 차지한 영혼의 절반은 정령술사가 죽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야 정령이 온전히 그 영혼 하나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전부 알면서도 많은 마법사들이 정령술사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정령술로 나타난 정령술사 '바로크'의 힘은 소생술(蘇生術)이나 치유술이 아니었다. '예지력(叡智力)'이었지……."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대예언자 '바로크'가 정령술사가 된 후 내뱉은 첫 예언은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고 한다. '당신은 영영 슬플 것이다.' 그는 울먹이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고 한다.
"죽어서 이미 썩기 시작한 아내를 어떻게 예언력으로 되살릴 수 있었겠냐……. 이렇게 절망밖에 할 수 없는 존재들이 정령술사고, 그들은 마법사들과 달라. 암, 다르고 말고. 그런 패배자들이나 하는 주문을 감히 마법과 연관시키지 말거라. 마법은 순전히 마음의 힘으로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야."
대규가의 음성에 노여움이 스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형골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제자들과 뭇 추앙자들을 배반한 채 추락해버린 자신의 스승을 향한 것이었다. 형골은 잠시 상념에 빠진 대규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형골은 그 오래된 노여움에서 대규가의 진한 그리움을 느꼈다.
마음이 아파왔다. 형골은 자신의 실수가 너무나 큼을 새삼 다시 깨달았다.
몇 년 전 한창 가출과 유흥의 단맛에 빠져있던 때에 형골은 모처럼 집에 돌아와 먹을거리를 찾고 있었다. 집은 여느 때와 같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과일 몇 개를 챙겨 집을 나오려는 순간 집안으로 들어오는 낯선 사내 몇과 맞닥뜨렸다.
"어? 사람이 있었네. 미안해서 어쩌지, 함부로 들어와서?"
"그러길래 우리도 노크 좀 하고 살자고 했잖냐. 예의가 없으면 복을 못 받아요, 복을! 똑똑, 실례합니다, 여기 복 좀 파나요?"
그들 중 한 치가 노크하는 모양새를 내며 소란스레 웃어댔다. 건들대는 폼이 눈에 거슬렸다.
"대규가 선생 안 계시나봐?"
"……."
"우리 돈 언제 갚으시려나 매우 궁금해서 매우 몸소 방문까지 했는데, 없으시면 매우 섭하잖아, 어떡하나……?"
"영감이 돈을……?"
형골은 의아했다. 집에 올 때마다 온 구석을 뒤져도 푼돈 하나 나오지 않았다.
그들 중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사내가 앞으로 두세 걸음 나오며 입을 열었다. 형골을 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영감… 이라고 하는 걸 보니, 니 녀석이 그 유명한 제자놈이구나. 소문은 익히 들었다. 선생이 유일하게 들인 제자라고. 선생의 스승이 줬다는 지팡이를 우리한테 넘기면서까지 애지중지 하시는데, 그 제자분은 이 근방에서 보기 드문 양아치 짓거리를 하신다고. 물 쓰듯 돈 쓰고, 갈취하기·희롱하기는 기본이고 떼거리 지어서 사람도 곧잘 팬다고 들었다만……"
"그게 무슨 소리야, 지팡이? 영감의 스승?"
"우리 유명인께서 모르시나보네. 제자 뒤치다꺼리 때문에 이 돈 저 돈 다 쓰고, 선생의 스승이 준 그 귀한 지팡이까지 팔아 합의금 대고 손해 물어주고, 어떻게 된 게 제자가 한 번 날면 그 선생이 똥줄 타는구만. 제자 교육을 뭐 이따구로 시켰지?"
"……!"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형골은 그 지팡이가 그리 귀한 것인지도 몰랐고, 자신을 위해 그것을 팔았다는 것도 몰랐다. 머리가 멍해졌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그저 놀라 눈만 끔벅였다.
"그런 지팡이 우리가 진짠 지 어쩐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바로크'라고 써 있긴 하던데, 대규가 선생이 정말 그 유명한 예언자 제자인지도 모르겠고. 근데 어찌나 하도 부탁을 하는지, 원, 거절할 수가 있어야지. 혹시 또 알아, 그 지팡이가 예언자 것이었다면 나도 예언 좀 할 수 있게 될 지?"
그 사내가 유쾌하게 말했다.
"그 늙은 마법사가 무릎까지 꿇으며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형님? 마법사도 돈 앞에서는 어쩔 수 없나봅니다."
사내 몇이 큭큭 웃는 소리를 냈다.
형골은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 지팡이는 어디에……?"
"어딨긴, 우리 사무실에 있지."
"다시 내놔!!"
형골이 두 눈을 부릅뜨고 사내에게 달려갔다.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이내 뭔가에 튕겨 방 한 구석에 쳐박혔다. 익숙한 느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법사 제자가 마법 대신에 주먹을 휘두르고, 참 말세네."
동정하는 말투였다.
"야, 양아치! 우리 형님이 마법사 칭호만 못 받으셨지, 웬만한 마법은 하신다 이 말이야! 엘리트야, 엘리트! 주먹만 휘두르면 되겠니? 로봇태권V처럼 주먹 로켓이라도 쏴보던가!"
옆에 있는 사내들이 형골을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형골은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그러나 자신에게 마법을 시전한 그 사내의 마지막 말은 또렷이 들렸다.
"불쌍한 놈."
형골은 의식이 사라지면서도 자신의 시야가 눈물로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또 튕긴거냐? 학습효과가 전혀 없구만.' 돌아온 대규가가 쓰러져 있던 형골을 깨우며 건넨 말이었다. 그 후로 형골은 다시는 가출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시키는 대로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오는 등 집안일을 했다. 대규가도 그런 형골의 변화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대규가는 둘 사이에 아무런 비밀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형골은 대규가의 비밀을 그제야 알아챘다. 어렸을 적 자신을 집으로 데려올 때 보았던 그 따스한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너무나 멀리, 너무나 오래 돌고 돌아 그제야 알아챘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얼른, 얼른 마법을 영감한테 배워서 그런 싹퉁바가지 놈들 도시락 싸들고 쫓아가며 혼내줄게. 그러니까 빨랑빨랑 가르쳐 달란 말야. 달팽이 오줌 싸듯 찔끔찔끔 가르치지 말고."
형골이 짐짓 활기차게 재촉했다. 시무룩한 대규가의 모습에 부러 크게 소리를 냈다.
"나중에 마법으로 까불다가 술사한테 얻어맞지나 마라, 내 망신이니까."
대규가도 웃으며 일부러 핀잔을 줬다.
그러나 둘의 눈가가 촉촉해진 것을 서로에게 감출 수는 없었다. 대규가는 자신이 좀더 젊을 때에 형골을 만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쇠약해진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형골은 시무룩한 자신의 스승을 보니 마음이 갑갑해졌다. 지금까지 대규가에게 제대로 못 대해 준 것에 먹먹했다.
약속이나 한 듯 둘은 어색하게 각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살이 물방울처럼 맺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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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미리 써 둔 분량이 바닥났습니다.ㅋㅋㅋ 앞으로는 더더욱 연재속도가 늦을 듯. ㅡ.,ㅡ;;
계속해서 주인공 '형골'의 어린시절 얘기입니다. 한 동안 이어집니다.
'형골'의 회심(;)에 대한 심리 묘사가 불완전하여 걱정이네요.흠;;
아,
얼마 전에 홍보했던 인터넷 개인 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http://trebari.ohpy.com/148919/13
청취자의 녹음멘트가 있어야 방송을 시작할 수 있는 구조인데,
어떤 내용의 멘트든 상관없습니다.ㅋㅋ
많은 참여 바래요~
그럼 이만.. 약 두 달 후에 다시 뵙죠;;;;
-하늘날개-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