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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2 23:51

크뤼거 (Kruger)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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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놀랍구나, 놀라워……!"

  대규가가 중얼거렸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들이 빙 둘러 선 채 구경을 하고 있었다. 마을 외곽지역이지만 어른들은 마침 숲에서 약초와 나물을 캐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대규가도 그 일행 중 하나였다.

  "그쵸? 원, 뭔 애가 저리도 사나울까……."

  옆에서 마을 주민 한 명이 맞장구를 쳤다. 아이들 세 명이 키 작은 아이 하나를 감당하지 못하고 계속 나가떨어졌다. 키 작은 아이는 씩씩대며 성을 내었다. 어른도 말릴 수 없을 만큼 눈빛에 날이 서 있었다.
  하지만 대규가는 그것 때문에 감탄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키 작은 아이 주변에서 일그러지는 공간을 주의 깊게 보았다. 마치 햇볕을 쬔 바위 위에 아지랑이가 펴지는 것과 같았다. 게다가 그 일그러짐은 팔을 뻗을 때마다 팔을 타고 주먹 끝에서 뿜어졌다. 그 탓에 덩치가 더 큰 아이들 셋이 꼼짝 못하고 계속 당하고 있었다.
  
  "어, 민수야, 그런 건 안 되지!"

  어른 중 하나가 외쳤다. 나뒹굴던 아이들 중에 갈색머리를 한 아이가 뾰족한 돌멩이를 쥐었다. 키 작은 아이는 두려운 기색 없이 갈색머리 아이를 노려보기만 했다. 갈색머리 아이가 돌멩이를 힘껏 던졌다. 그러나 키 작은 아이는 팔을 들어 막았다. 대규가는 돌멩이가 팔에 부딪친 것이 아니라, 팔 주위의 일그러진 공간에 부딪쳐 멈춘 것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어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제는 꼬마들 재롱-실제로는 싸움이었지만-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을 주민들 몇이 짐짓 험악한 표정을 한 채 아이들 사이에 끼어 들었다. 그러나 그들도 정작 키 작은 아이 곁으로 쉬이 다가가지는 못했다.
  큰소리를 내며 주민들 몇이 덩치 큰 아이들을 다그치던 중이었다. 키 작은 아이가 날쌔게 민수라는 갈색머리 아이에게 뛰어들었다. 어른들이 놀라 머무적거리는 사이 그 아이는 넘어진 민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민수의 얼굴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주먹에는 떨어졌던 돌멩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때 갑자기 공기가 터지는 듯한 '펑' 소리와 함께 그 아이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갑작스런 일에 주민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위험하지."

  대규가가 조그맣게 말했다. 그제야 주민들은 대규가가 마법을 시전(施轉)했음을 눈치챘다. 일반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공간계 봉인('결계')이 순식간에 민수를 둘러쌌던 것이다. 노련한 시전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충격 때문에 봉인을 당한 아이나 봉인에 튕겨버린 아이 모두 정신을 잃었다.

  수길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말과 화물용 마차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로 그는 유통업을 하였다. 이곳의 숲에서 나는 약초 중에는 희귀한 것들이 많았다. 그는 그 중 몇 개를 재배하는 것에 성공하여 대량으로 생산·판매했다. 하지만 값이 나가고 정말 희귀한 약초들은 재배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저 숲에서 캐오는 수밖에 없었다. 수길은 마을 주민들에게 그런 약초를 매입하며 도시의 도·소매상에게 넘겼다. 약초를 싸게 사서 비싸게 판 덕에 그는 마을 제일의 부자였다.
  마을 주민들은 약초가 도시 판매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수길에게 매입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 마을 가현(佳賢)의 주민들은 욕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일정한 수입을 주는 수길에게 감사했다. 잡풀로만 보이던 것들이 돈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이가 바로 수길이었다. 또한 약초를 캘 수 없는 겨울철에도 수길은 주민들에게 소정의 보조금과 식량을 지원했다. 그것은 주민들이 다른 유통업자에게 약초를 대주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혜롭게도 수길은 주민들이 추위에 건강을 잃는 것이 자신에게 전혀 이익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대륙에서 몇 안 되는 약초 생산지인 자신의 고향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겨울 한때나마 마을이 궁핍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마을을 사랑했다. 그리고 수길의 진심을 주민들은 알고 있었다.

  "마법사님은 잘 모르셨겠지만 이놈은 마을의 골칫덩이입니다. 다음에 도시로 갈 때 근처 고아원에 떨굴 작정입니다. 이놈이 그 동안 주민들 텃밭이나 부엌뿐만 아니라 우리 창고나 약초 재배지도 얼마나 들쑤셔 놓았는지 아시면 그런 말씀 못하실 겁니다. 게다가 장로님은 물론 마을 주민들 모두 쌍수 들고 제 생각을 반기고 있다구요. 이놈이 쪼그만 게 얼마나 날래던지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근데 이번에 마법사님 덕분에 펑 하고 자빠졌으니, 이런 기회가 또 오겠어요? 어렵지요, 어려워요."

  수길은 몇 올 안 되는 머리칼을 스윽 매만지며 말을 마쳤다. 가지런히 정돈된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머리의 반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반점은 머리 정수리에서 이마 언저리까지 퍼져 있었다. 반점은 이 집안 내력이었다. 수길의 부친은 뺨에 반점이 있고 조부(祖父)는 손등에 반점이 있었다. 그리고 전부 대머리였다. 수길은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을 애지중지했지만 곧 없어질 공산이 컸다. 그래서 철없는 아이들은 수길의 집안을 '반점대머리 가문', '대머리반점 가문' 이라고 놀리곤 한다. 공교롭게도 수길의 대(代)에 이르러선 집안의 대머리 내력과 반점 내력이 한 곳에서 구현되니 아이들의 그 놀림이 더욱 사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어린애를 저리 묶어서 잡아두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민수와 키 작은 아이가 봉인의 충격 때문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길의 종자(從者)들이 키 작은 아이를 업어 왔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상태인 채로 묶어서 집의 창고에 감금한 것이다. 누가 봐도 이 아이를 잡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침 대규가는 약초를 팔기 위해 수길에게 온 김에 그 아이를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있던 참이다.

  "마법사님, 아니지 않은 게 아니죠. 이놈이 또 어떻게 도망갈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맘 같아선 형틀에 묶어서 태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대규가는 난감하여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면 어떨까요? 저를 잘 아시니까요, 제가 철마다 캐오는 약초량을 잘 아실 겁니다. 그 값을 받지 않을 게요. 그리고 필요하시면 사람이든 말이든 치료마법도 무료로 시전해 드리리다. 어떻습니까?"

  수길은 적잖이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몸값을 높여 장사꾼 기질을 발휘할 것인지 순간 고민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어쩔 수 없네요. 저도 예의에 어긋나게 행동할 순 없으니까요. 근데 이놈을 왜 그리 두둔하시는지 알 길이 없네요. 제자라도 삼으실 요량이십니까?"

  수길의 말투에는 만족함이 스며있었다. 그리고 종자에게 손짓으로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 시켰다. 계약서를 쓰기 위해서였다.

  "……."

  대규가가 그저 조용히 웃기만 하자 수길은 놀라워했다. 그리고 이번엔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대규가가 가현(佳賢)에 온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한 번도 제자를 둔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수길의 아들은 물론 마을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내제자(內弟子)가 되고 싶었지만 모두 거절되었다. 주민들은 늙은 마법사가 여생을 조용히 보내고 싶어하는 것 같아 굳이 재차 부탁하지 않았던 것이다. 수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약서를 작성했다.

  "뭐, 마법사들은 보는 눈이 다를지 몰라도 이놈은 먼저 사람이 되야 합니다. 교육시키시려면 꽤나 곤욕(困辱)을 치르실 겁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도시 가는 길에 떨굴 테니……."

  "고맙습니다."

  대규가가 서명한 계약서를 다시 건네며 말했다. 수길은 가볍게 목례(目禮)를 하고 종자에게 그 아이를 데리고 올 것을 지시했다. 아이는 이미 깨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묶여 있었다. 종자는 아이를 묶은 밧줄을 끌고 와 대규가 앞에 데려 놓았다. 대규가는 난감한 듯 웃음을 지었다.

  "아, 이건 저도 어쩔 수 없네요. 주민들 이목도 있으니 마을 안에서는 이렇게 해 주십시오. 묶어 놓지 않으면 또 마을 안으로 도망쳐서 말썽을 일으킬 지도 모르니까요. 주민들도 이놈이 이렇게 묶여 마법사님 손에 마을 밖으로 끌려나가는 걸 보면 안심도 하고 마법사님이 아이를 맡은 것에 불만을 가지지도 않을 겁니다."

  수길이 수완 좋게 말했다. 대규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줄을 끌어 아이를 데려갈 마음은 없었다. 대규가는 나온 줄을 매듭지어 짧게 하여 땅에 끌리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춰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인상을 구기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안에서는 깊은 기운이 감돌았다.

  "자, 나랑 가자."

  아이의 손 앞으로 대규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아이는 자신의 손등으로 그 손을 탁 치며 수길 쪽을 향해 돌아섰다.

  "어, 뭐야, 내가 더 좋으냐?"

  수길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장난해, 반점대머리?"

  아이가 침을 퉤 뱉으며 짧게 쏘아댔다. 순간 수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표정이 험악하게 찌그러졌다. 대규가는 센스가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마음에 들었다.

  둘은 수길의 집에서 도망치듯 마을을 벗어났다. 어느덧 숲길에 접어들었다. 숲길 끝에 대규가의 집이 있었다. 대규가는 붙잡고 온 아이의 옷깃을 놓았다. 묶은 줄을 풀 수도 없어서 아이의 옷깃을 붙잡고 왔던 것이다. 아이는 오는 길에 연신 몸을 뒤틀며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마법으로 행동반경을 봉인한 뒤였다. 크게 움직일 수록 몸에 통증이 더해갔다. 그래서인지 대규가가 옷깃을 놓아도 아이는 도망치지 않았다. 대규가는 아이의 몸을 묶은 줄을 천천히 풀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앞서 걸었다.

  "욘석아, 뭐해? 어여 와."

  멀찍이 떨어진 아이를 향해 대규가가 돌아서서 말했다. 아이는 미동도 없었다. 그저 의심이 듬뿍 담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아, 이젠 맘대로 움직여도 돼. 마법 풀었으니까. 어여 오지 않고 뭐해? 배고프지 않아? 난 얼른 가서 한 술 떠야겠다."

  안색이 조금 바뀐 아이가 한 걸음 내딛었다.

  "밥도 줘?"

  '밥' 소리에 화색(和色)이 돈 아이가 물었다. 아이는 수길과 대규가의 대화 중에 대규가가 자신을 맡는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욘석아, 밥도 같이 안 먹고 어떻게 같이 살아? 난 이제 혼자 먹는 거에 질렸다."

  대규가는 아이가 자신에게 입을 연 것이 기특하고 마음에 흡족했다.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아이를 향해 걸어갔다.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살고 같이 열매나 약초도 캐고, 마법도 같이 하는 거지, 앞으로."

  1m정도를 남겨두고 대규가가 멈춰선 채 말했다.

  "마법? 영감, 진짜 마법사야?"

  "진짜 마법사는 아니고, 그냥 마법사다. 근데 아직 서로 이름을 모르네. 난 대규가라고 하지."

  대규가가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이의 곁으로 완전히 다가가지는 않았다.

  "난 형골. 성(姓)은 몰라. 그냥 형골이라고 불렀어."

  "형골이라…… 좋은 이름이야. 성(姓)은 몰라도 돼. 우리 세계에선 성은 필요 없지. 사람은 자신의 이름만 감당하기에도 버거운 거야. 내가 형골, 니 이름을 스스로 짊어질 수 있게 도와주마."

  형골은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쉽게 말하면 그냥 서로 돕고 살자는 거야. 나도 많이 외롭거든. 늙어서 여기저기 쑤시니 좀 주물러도 주면 좋고……."

  "그럼 밥하고 마법하고 주는 거야?"

  "그래."

  대규가가 형골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대답했다. 형골은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대규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왔지만 이 영감의 눈은 왠지 따뜻했다.
  둘은 잠시동안 미동 없이 서로의 눈길을 마주치고 있었다. 숲에는 새소리와 잎새를 적시는 햇살 소리만이 들렸다.

  "하지만 그냥 빈손으로 얹혀 살고 싶진 않아. 내 보물을 줄 테니까 그걸로 대신 해 줘."

  "보물?"

  대규가는 형골의 어른 같은 소리에 재밌으면서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응. 숨겨둔 데에서 가져올게. 갖다 와도 돼? 여기서 얼마 안 멀어."

  대규가는 형골의 눈에 잠시나마 의심의 빛이 지나감을 보았다. 대규가는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형골은 멈칫거렸다. 천천히 대규가의 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몸을 돌려 숲길을 뛰어내려갔다.
  하지만 대규가는 허리를 굽힌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형골이 뛰어간 길의 끝을 눈으로 쫓으며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형골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규가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안, 조금 헤맸어."

  형골은 영악했다. 숨이 찬 체하며 헐떡거렸다. 주변에 숨어 한참동안 대규가의 행동을 주시한 것치고는 숨 찬 연기가 썩 괜찮았다.

  "엄마가 준 마지막 선물이야. 엄마가 있었거든. 빈손으로 가긴 싫으니까 이걸 줄게."

  형골이 주먹을 편 채 대규가 쪽으로 팔을 뻗었다. 손 안에는 밝게 빛나는 물건이 있었다. 자수정 목걸이였다.
  여전히 허리를 굽힌 채 웃으며 대규가도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서로 손이 닿을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표정은 밝았지만 형골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그리고 대규가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한 걸음씩 천천히, 천천히 대규가를 향해 내딛었다. 거리가 좁혀졌지만 대규가는 꼼짝 하지 않았다. 형골은 대규가의 손 끝 근처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어머니의 유품인 자수정 목걸이를 대규가의 손 안에 내려놓았다.

  "잘 간직하마."

  "밥은 꼭 줘야 해."

  둘은 활짝 웃었다. 그러나 둘 모두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은 몰랐다. 그저 귀가 먹먹한 듯 서로의 심장소리만이 또렷이 들리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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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서서히 이미 써 놓은 분량들이 고갈되는군요;;
이번 편부터 주인공 '형골'의 어린 시절이 나옵니다.

-하늘날개-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