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구역이 어떻게 나라처럼 조직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자신의 머리 위에 누가 있는 것이 싫어서, 남의 머리 위를 밟고 싶어서 GR구역에 온 자들이 태반인데. 그 이유가 바로 '빅 맨'이다. 남을 밟기 위해 모여든 자들의 머리를 밟고 올라선 ‘빅 맨’은 사실상 GR구역의 주인이었다. 남보다 우월한 힘을 과시하며 반항하는 자들을 차례대로 처리하고 나서, ‘빅 맨’은 자신의 아랫사람들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규칙을 선포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한 구역에서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어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8개의 구역모두에서 시작되었다. 규칙을 어긴 자에게는 단순한 벌이 아닌 빅맨에게 도전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초창기에는 3분단위로 빅맨이 교체되던 시기도 있었으나,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 ‘빅맨’ 체계는 자리를 잡아갔고 지금의 빅맨들은 모두 최소 4년 이상 구역을 통치한 괴물들이었다. 빅맨 체계에서 빅맨이 직접처벌을 한다는 것은 빅맨의 힘이 건제하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일벌백계의 효과를 얻었다. 지극히 원시적이지만 GR구역에서 만큼은 지극히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GR-5구역의 빅 맨은 [건물 밖에서 소동을 일으키지 마]라는 매우 간단한 룰을 선포하였다.
“지로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현재까지 사망자수 80여명이고 분단위로 10여명씩 늘고 있습니다. B급의 화기가 사용되고 있으며 목적 없는 난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분한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20평 남짓한 방. 오직 빈 책상위에 올려진 스탠드만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다. 책상과 의자와 전화기와 스탠드와 두 명의 남자가 있는 이 공간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방금 다른 곳에서 다른 무엇을 하고 있었을 법한 큰 남자가 차분하게 보고를 하는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팔짱을 꼈다가 깍지를 꼈다가 반복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아우성쳤다.
“언제까지 들어야 돼나?”
“예상 되는 사건 주모자는 2구역의 장츠파의 행동대장들… 다 끝나갑니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노골적인 투덜거림에 미울 정도로 유순하게 답하는 유람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도예시키코프였다. GR-5구역의 패자 도예시키코프. 통칭 코프로 불리는 빅 맨이었다. 2m 20cm의 장신에 온 몸이 근육으로 가득 차있는 코프가 아니꼬워하는 유람은 좀 신비한 놈이었다. 머리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코프가 온갖 더러운 비리가 난무하는 5구역(다른 구역도 마찬가지다)을 4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유람의 공작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보좌관을 자처하며 나타난 지가 어언 5년째. 유람이 심복이 되고 난 후 벌어진 모든 전투는 정말 쉬웠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전투 따위는 이제껏 2번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상대가 전투 시작 전에 죽어버리거나 딱히 좋다고 할 수 없는 컨디션으로 전투에 등장해서 식은 죽 먹기로 처리해버렸었다. 그리고 다른 구역들의 빅맨들이 국제기구와 비밀적 거래를 맺고 꼬리치는 개신세로 전락하는 시점에 유일하게 5구역이 독립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코프는 이런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물론 유람의 뒷공작으로 5구역은 독립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눈썹도 안 보이다가 사건만 터지면 ‘회의실’로 호출을 해서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보고서를 듣게 한다. 평소에 어디서 뭘 하는지 의심할 법도 하건만 코프는 유람이 하는 말을 투덜거리면서도 모조리 믿는다.
“만약 이번 사건의 주모자가 제가 예상한 인물이 아니라면 즉시 달아나야 합니다.”
“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이제껏 유람의 지시에서 달아남과 관계있는 단어들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판도라와 관계된 일이면 당장 손을 떼고 튀어야합니다."
"판도라? 그 세계 연구소?"
"뭐,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죠. 거리에 마크 없는 부대가 들이닥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이곳으로 돌아와도 안 됩니다. 이 방은 파기됩니다. 일단 도망쳐서 살아있다면 제가 차후에 연락하겠습니다."
뚜르르-
유람의 말이 끝나자 구식 핫라인 전화가 울렸다. 첨단 과학의 문명 아래 수많은 종류의 통신방법이 생겨났지만 그런 장비는 첨단 과학의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첨단 과학의 통제를 받고 있다. 그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 지나가 버린 세대이다. 핸드폰이 있어도 무전기는 사용되고, 무전기가 있어도 모스부호는 사용된다. 3D입체 통화가 가능한 시대이지만 한 줄로 연결된 다이얼 전화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유람이 전화를 받았고 아무 말 않고 듣기만한 후 전화를 끊었다.
"상황이 이상하군요."
"대체 무슨 일이야? 오늘 같이 말 많은 날은 처음이군."
그랬다. 항상 보고서를 읽어서 말이 많기는 했지만, 보고서가 아닌 다른 말은 기껏해야 일 끝내고 놀지 말고 빨리 들어와서 보고하라는 말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도망쳐라, 상황이 이상하다고?
유람의 얼굴은 상당히 심각했다. 저런 유람의 모습도 처음이었다. 항상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정도 쯤이야 당신에겐 껌이니 농땡이나 피우지 마세요.'라고 말하던 그였으나, 오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 지도 모를 때 유람이 입을 열었다.
"…그냥 지금 쨀까요?"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
로한 제1화 만남(0~5)
프롤로그
자네 마법사의 아이러니라는 것을 아나?
마법과 과학이 공존 한 지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네.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며 무섭게 발전해온 시기이기도 했지. 과학과 마법이 부딪쳤던 사건으로는 피노보노논쟁이 유명하지. 흔히 정령술논쟁이라고 하지만. 과학자인 피노와 마법사인 보노가 벌인 말다툼을 시작으로 마법계와 과학계가 정면충돌한 과격한 사건이었어. 그때 내가 제 2번째 판결인을 맡고 있었는데… 아, 이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군. 음… 사건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보자… 또 굴직한 사건이라 함은 마법계에서 이세계의 문을 발견한 디샬프발견, 과학계에서 분자나 원자같이 마법이 형상화 될 때 특정한 입자가 생긴다는 걸 증명한 구제네키발견 등이 있지. 그런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아, 그렇지. 자네 마법사의 아이러니라는 것을 아나? 그렇지! 컵 이야기야. 마법사들은 눈앞의 물 컵을 공중으로 띄울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겠지? 방법이야 어찌됐건 컵은 공중으로 뜬다네. 마법으로 어떠한 힘을 가하면 컵이 뜨는 거지. 그리고 마법사들은 그냥 공중에 떠있는 컵을 만들 수도 있다네. 아무 힘도 받지 않고 그냥 떠있는 컵을 만들 수 있어. 하지만 그냥 컵을 아무 힘도 가하지 않고 공중에 띄울 수는 없다네. 또 공중에 아무 힘도 받지 않고 떠있는 컵을 다시 바닥에 내릴 수도 없다네. 어떤가? 이것이 마법사의 아이러니라네.
이건 간단히 컵이 공중에 뜨고, 말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마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이야기라네. 먼저 눈앞에 있는 컵은 마법사의 간섭과 관계없는 존재이지. 그리고 공중에 떠있도록 창조된 컵은 마법사의 간섭에 놓인 존재야. 전자의 컵과 후자의 컵이 구분되는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원래 공중에 떠 있느냐, 아니냐. 마법사는 이 근본에 간섭할 수 없어. 설사 자신이 창조해낸 존재라 하더라도 말이지.
이걸 사람한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동화에서 나오듯이 계모를 생쥐로 바꿀 수는 없는 거라네. 마법에 걸려 4개의 팔을 가지게 된 거인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 간단하게 말해서 마법사가 어떤 마법을 걸든 간에 사람은 사람이지.
허나 신기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지. 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었던 때가 있었어. 어찌 보면 가장 떠들썩하게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가장 조용하게 묻힌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 자네들도 모를 것이네. 지금 세상에서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안 남았거든. 그래, 뜸들이지 말고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한번만 말할 테니 잘 듣게나.
-마법사 라신키프 유언 중…
제1화 만남
"이 아이 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껏해야 10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몸집의 소년. 이것이 '그것'의 첫 인상이었다.
일주일 전, G연구소를 침입했던 폭력조직을 괴멸시켰다라거나 제1,2특수부대 34명이 출동해서 23명이 죽었다, ‘그것’이 다시 출현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거대 조직에게 돈을 건네받은 허수아비 조직인 줄 알았는데 특수부대원 과반수가 사망하다니, 의외로 거물이었나라는 생각에 흘려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금지되었고, 판도라에서 온갖 더러운 연구를 담당하는 H연구소로 생포된 '그것'이 보내질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H연구소를 담당하는 책임자로써 ‘그것’의 정보를 얻기 위해 살아 돌아온 부대원들을 잠깐 만나보기도 했지만, 쓸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었다. 귀화한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결국 내가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건 이 아이가 오기 두 시간 전 넘겨받은 보고서를 통해서였다. ‘그것’에게 살해당한 부대원들의 이름과 계급이 간략히 적힌 프린트가 제일 첫 장이었다.
[T/N13-K23]
목표물/넘버13-아군23명 살해
정말 이 소년이 특수부대원 23명을 죽였단 말인가?
"네가 N13이냐?"
난 '그것'의 보고서와 눈앞의 소년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보고서를 몇 장 더 넘기다보니 급하게 갈겨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흥미로운 글귀가 적혀있었다.
[대원들의 증언과 피해상황을 볼 때, A1320에서 실종된 '로한'이 아닐까 싶음]
"아니, 네가 '로한'이냐?"
"그래."
기다렸다는 듯이 약간 거친 미성이 로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널 측정하게 될 도관민이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구나."
로한은 나를 그냥 빤히 쳐다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세포 채취부터 할 테니까, 입을 아- 해봐."
순순히 입을 벌린 로한의 입천장을 살짝 긁은 후 조수에게 면봉을 건넸다.
"오늘은 이게 다야. 저기 4350번에 들어가서 자라."
또 다른 조수가 로한을 안내해줬고 나는 보고서를 마저 읽기로 했다. 보고서의 뒷부분은 과거 로한의 행적에 대한 보고서였다.
[A530에서 최초로 확인된 '로한', 이후 R로 칭함, 은 첫 출현당시 MD1,2,3 소대의 90%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A562에서 R224분점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등 A822까지 판도라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R은 상상할 수 없는 괴력과 회복력과 기이한 기술을 사용한다고 한다. 언뜻 잘못 생각하기에는 마법사가 만들어낸 유기물이라고 믿을 정도로의 이상함을 보인다고 한다. 기이함의 예로 R의 육체는 총기류에 의해 상처 입는 순간 3배정도의 팽창과 함께 외모가 바뀌고 더욱 흉포해진다고 한다. 어떤 상처라도 순식간에 아물어버리며 TTE합판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손쉽게 구멍을 내버린다. 이 외에도…….]
2년 정도 전에, 내가 아직 C연구소에서 근무할 적에 T-mecan과 T-alcan을 분자단위로 쪼개서 균등히 혼합한 합판을 만들어냈었다. 다이아몬드의 3배정도의 단단함을 자랑하며 발명 즉시 각 국의 군사용품에 이용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지금은 모든 군사용품에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 합판이다. 강도, 탄성, 내구성, 가공성 등 거의 모든 금속능력이 최상인 과학이 만들어낸 마법의 금속이라는 별칭을 가진 TTE를, 대재앙피해소의 최외벽부터 최내벽까지 골고루 발라져있는 TTE를 손톱으로 구멍을 내다니… 도저히 방금 본 소년과 이제껏 상상했던 로한의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
"박사님, 결과 나왔습니다!"
세포 분석과 근 골격 분석을 마친 조수의 외침에 보고서를 책상위에 올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AIE FSD TRI CCG AKL ........
121 232 131 221 3 ........
(24) (8)
"그냥 평범한 아이랑 똑같잖아."
10세 정도의 사내아이와 같은 근골격에다가 일반인과 같은 비율의 단백질성분으로 이루어진 세포다. 이 결과만 가지고 결론을 내리자면 엄연한 인간이다. 아직 10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다.
허나…….
"로한의 공식 출현이 언제였지?"
"아… 1334년이니까……. 17년 전입니다."
"그 때도 지금의 외형과 같은 모습이었나?"
"예. 보고서에는 그렇다고 돼있었습니다."
17년간 살아오면서 10살 모습을 유지하고 TTE를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는 소년이라. 솔직히 지금 수면실에서 자고 있는 소년이 로한일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당장 정보부에 연락을 해, 길 가던 아이를 납치해 온건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로한이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왜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로한이 조직원들이 모두 죽고 나자 순순히 생포 당했는지도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그 로한을 어떤 구속구나 감시원 없이 비전투지대인 연구실에 달랑 보내다니. 설마 이게 정보부의 정말 한심한 오차거나 빌어먹을 리뷔트소장의 장난짓거리는 아니겠지. …. 전부다 아니라, 정말 저 소년이 로한이라면, 그렇다면… 한심하게도 내 머리에서 있을 수 없는 생각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설마 마법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겠지?"
***
여러 가지 조사를 하면서 로한의 특징을 몇 개 발견하기는 했다.
첫째로 반응전달이 빠르고 예민했다. 인간의 반응속도의 한계는 0.2초정도이다. 무언가의 자극이 있은 후 최소 0.2초 후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허나 로한은 반응속도 0.0을 기록했다. 좀 더 자세히 측정하니 소수점 자리가 100개가 넘어버렸다. 코앞에서 총을 쏴도 그저 캐치볼 하는 아이처럼 손쉽게 총알을 잡는다. 또한 오감이 세상 어느 동물보다 극한으로 발달해 있었다. 한 예로 육지의 동물 중 가장 뛰어난 후각을 가진 코끼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냄새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맡아냈다. 이 정도라면 육감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발달한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토대로 각 감각능력을 초월한 범위의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 육감이다. 시각으로 볼 수 없는 후면은 청각, 후각, 촉감, 미각이 판단한다. 들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소리는 나머지 4개의 감각이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해 오감의 조화 상태가 바로 육감인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검증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증명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껏 그 정도로 오감이 발달하고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둘째로 고통에 한해서는 반응이 없다. 상상을 뛰어넘는 오감과 그 전달 신경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지옥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고춧가루를 코끼리 코에다가 뿌리면 코끼리는 마치 화상을 입는 것처럼 고통을 느끼듯이, 세상 모든 소리나 냄새 등 이 모든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오감이 매우 뛰어나고 신경전달 속도가 측정불가인데 고통이 전달 안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다만 반응이 없을 뿐. 즉, 참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것은 인체를 위험에서 지키고자 하는 안전신호다. 즉시 고통의 원인이 되는 행동을 중지하라는 인체의 두꺼비집과도 같은 것이 고통이다. 인체에 해를 가한다는 것은 손상을 의미한다. 이것을 로한에게 적용시키면 그냥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 만해도 도검으로 난도질하는 정도의 손상을 입으며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가정이 나온다. 즉, 살아있는 상태가 곧 빠르게 죽어가는 상태인 것이다. 허나 로한이 고통을 참고 또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로한의 마지막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로한의 마지막 능력은 치유능력이다. 아니, 이것을 치유능력이라고 불러도 될지 확신이서지 않는다. 인간은 특정부위의 재생이 불가능하다. 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팔이 절단 될 경우 재생되지 않는다.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과 다르게 조직이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잘린 자리만 아물 뿐인데, 로한은 신체의 모든 부분이 재생가능하고, 조직재생 역시 가능했다. 이러한 타입의 생물은 단세포 생물에서 관찰 된다.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는데 그게 또 다른 내가 되는 재생인 것이다. 허나 일정 크기 이상이 아니면 재생하지 못하고 소멸한다. 믹서기에 갈리면 죽는 다는 말이다. 로한의 몸에서 떨어진 세포는 재생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핵을 중심으로 재생하는 타입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핵을 중심으로, 즉, 본체의 정보가 들어있는 재생 불가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가정은 참이 되지 못했다. 0.5나노미터 단위로 세포에 손상을 가했지만 모두 재생했다. 그래서 좀 무서운 가정이 생겨났다. 로한은 갈아도 살아난다.
2주일 정도에 걸쳐서 정밀검사가 끝났고, 이제 얼마 뒤 로한은 정보부로 가서 취조를 당할 것이다. 괴멸한 조직에 왜 있었는지, 이제까지 뭘 했는지, 배후조직은 있는지, 그리고… 지누스의 잔당은 어떻게 됐는지 등등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거나 말을 해야 하겠지.
"오늘 며칠이지?"
대강 조사를 끝냈기 때문에 연구소 내에서 로한이 돌아다니는 것에 제한은 없었다. 정보부에 넘길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잠시 쉴겸 커피를 타고 있는데 로한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7월 4일."
별거 아닌 질문이기에 성의 없이 답해주었다.
로한이 이곳에 온지 2주일이 지났다. 특수부대를 전멸시킬 정도의 능력을 가진 생체를 어떤 구속 장비도 없이, 어떤 군사 장비도 없는 연구소에 보낸다는 상부의 결정을 들었을 때 정보부 직원이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로한은 아무런 구속 장비 없이 연구소에 보내졌고, 지금까지는 어떤 문제도 없다. 이유라고 할 만한 것은 로한이 스스로 우리 쪽으로 투항했다는 가정뿐이다. 물론 난 정보부 소속이 아니다. 연구부 소속에다가 H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박사로서 그냥 로한에 대한 생체적 조사만 하면 내 임무는 그걸로 끝난다. 허나 로한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검사를 하며 경이적인 신체능력을 알아가면서 점점 의구심이 깊어져갔다. [대체 왜 여기로 온 것인가?] 잡혀 온 건 아니다. 충분히 그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특수부대원들을 전멸시키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보고서에는 제압했다라고 적혀있었지만 난 믿지 않는다)왜 순순히 잡혀온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내안에서 점점 깊어 갈수록, 그 해답 역시 점점 뚜렷해졌다. 판도라 기지의 염탐. 허나 이 해답을 타당치 못하게 했던 것은 로한의 과거 행적이었다. 왜 지금에서야 염탐을 하게 된 것인가. 하려면 옛날에 했지. 그리고 이제 와서 판도라의 중추기지 구조를 알아낸다한들 뭐에 쓸 것인가. 판도라의 최우선 퇴치목적이었던 지누스는 5년 전 완전히 괴멸했다. 40년에 걸친 전재에서 판도라가 승리했고 이제 세상에서 어느 누구하나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 되 버린 판도라를 … 설마 파괴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세력이 다시 조직되었고 로한은 그 조직에 편입되어 새로운 임무를….
"그럼 내일 가야지."
"응?"
"여자를 만나러 가야 돼."
"뭐?"
하고 있던 생각마저 날아가 멍해져 버린 날 뒤로하고 로한은 4350으로 들어가 버렸다.
***
-Ental-No0432. 도. 관. 민. 박사. N0124로. 와주싶. 시오. 반복합니다. Ental-No0432. 도. 관. 민. 박사. N0124로. 와주싶. 시오.-
여성의 목소리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A.I의 방송이다. 내가 있는 H연구소는 판도라 본관에 부속 되어있는 연구소이다. 세상에 공개할 수 없는 연구를 주로 취급하는 곳이기에 발밑에 놓아두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본부와 직결 되어있으니까 그만큼 정보의 교환도 빠르다. 타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호출이 되지도 않지만 H연구소에서는 빈번히 호출을 당하는 것이다. 연구의 성공이라니 실패라니 뭐 그런 것들이 직통으로 전해지니까. 그래, 오늘도 뭔 일이 났다.
"고유 No0432. 도관민 박사입니다."
"어서 오게, 박사."
작전부의 안보부 대령, 창현. 날 호출한 사람이다. 간략한 설명을 하자면 5년 전 내가 처음으로 판도라에 들어오자마자 엄청난 영웅 대접을 받으며 벼락출세를 한 인물이다. [지누스]라는 조직을 괴멸시키는데 혁신적인 공을 세웠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껍데기뿐인 지누스를 밟아버린 거라고 말하지만 말이다. 방안에는 내 앞에 앉아있는 대령 말고도 내 옆에 같이 서있는 소위가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제2특수부대 리더인 김영채로 얼마 전 로한사건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로한을 내보냈다면서?"
아아, 아침 7시에 내보내줬지.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도 안 지났네.
"그렇습니다."
"왜 그랬나?"
대령이 콧기름에 미끄러져 살짝 내려온 안경을 검지로 올리며 눈을 치켜세웠다. 내 입에서 조금이라도 허튼 소리가 나오면 요원을 불러 고문이라도 할 셈이다. 행여나 지누스의 잔당이 아닌지 그것부터 물어보겠지. 그러려고 소위를 불러놨을 것이다.
"나가는 문을 가르쳐 달라기에 가르쳐줬을 뿐입니다."
대령은 손을 깍지 끼고 손가락으로 손등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기분은 나쁘지만 내 말에서 꼬투리를 잡지 못 한 거겠지. 작전부의 통보를 모르진 않았을 테니까.
"로한을 H연구소로 보내기는 했지만 보호와 신변확보는 아직 작전부의 소관이었다. 연구가 끝나는 즉시 사살될 계획이었어."
"킥-"
"?! 왜 웃나?"
사살? 그 로한을? 어이 대령. 당신은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고 있군. 로한에 관한 보고서를 읽어보고도 사살을 집행하겠다고 하는 건가?
"로한은 사살 할 수 없습니다. 대령님"
"뭐야?"
"로한은 사살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소린가, 박사. 설명해보게."
대령이 또 미끄러진 안경을 밀어 올린다. 하긴 그는 마법스러운 존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겠지. 마법조직이었던 지누스를 깨부쉈을 때도 주력인 마법사가 행방불명되고 난 후였으니까.
"로한의 재생력을 고려할 때 U-S핵융합폭탄을 터트려도 로한이 죽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대령님. 그렇다고 고작 로한이라는 겉보기에 소년인 개채를 사살하고자 그런 폭탄을 터트릴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범국제적인 조직이라지만 세계여론에는 판도라도 당할 수 없을 테니까요. 또 로한은 어느 한 부분을 핵(center)으로 하는 이상세포재생타입도 아닙니다. 산산 조각난 몸이라도 다시 재생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한이 자신이 산산 조각날 때까지 가만히 있을 리도 없습니다. 아무리 총탄을 퍼부어 본들 로한의 사살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그것이 가능했으면 작전부의 자랑인 특수부대원 23명이 살해당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난 2주일가량의 연구를 통해 정확히 로한에 대해 알아낸 것은 얼마 없다. 그저, 과연 이 개채가 죽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만 증폭될 뿐이었다. 노화가 되지 않는다. 독극물에 반응하지 않는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에도 감염되지 않는다. 군사무기로도 죽일 수 없다. 호흡만으로도 체내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가 충족된다. 그리고 환경에 따라 호흡을 하지 않아도 된다. 체내의 모든 것이 재생가능하다. 실험을 계속할수록 불사의 유기체라는 것만이 명확해졌다.
"……. 그것과 로한을 내보낸 것은 별개일세."
"로한이 연구소에 온 후, 작전부에서 보낸 통보에는 '만약 로한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나 그 조짐이 보일 경우 생명보존을 우선시 하라.'라고 명시되어있었습니다."
"?! 그래서?"
"2주일간 로한을 연구한 결과 로한이 여기에 투항한 이유는 자신을 공격한 판도라라는 조직의 구조라던가 본거지 확인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기지의 정찰을 모두 마친 로한이 가는 것에 비협조적이었다면 로한은 기지 내에서 난동을 부렸을 지도 모릅니다. 특수대원조차 막지 못 했던 그 로.한.이 말이죠. 그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 로한이 기지를 나가는 것에 한해서 협조를 한 것입니다."
“로한은 투항한 게 아니라 제압당해 호.송. 되어왔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마침 여기 작전에 참여했던 김영채 소위가 있으니 당시 상황을 들어보도록 하죠.”
대령은 잠시 나를 째려보고는 이내 소위를 향해 눈을 돌렸다.
“소위, 당시 상황을 사실대로 말해보게. 사실대로.”
“예. 당시 로한을 사살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던 도중 로한이 두 팔을 머리 뒤로 올리고 투항의사를 표했습니다. 이에 고(故) 하정균 중사가 로한의 머리에 발포했으나 오히려 그가 쏜 총탄에 그가 머리를 맞아 사망했습니다. 로한은 ‘생포당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고, 사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로한을 제압하여 호송해왔습니다. 이상.”
소위의 이야기가 끝나자 대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시 안경이 밑으로 내려갔는데도 올리지 않고 손을 깍지 낀 채로 침묵했다.
로한은 실험이 끝나면 바로 지정된 자리에 가버렸지만 아마 내 예상이 맞을 거다. 초감각을 가진 로한은 굳이 기지를 돌아다닐 필요 없이 가만히 누워 기지의 구조를 느끼기 만하면 됐을 테니까.
"…….알았네. 그럼 둘 다 가보게."
"알겠습니다. 로한에 대한 보고는 빠른 시일 내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소위는 대령의 방에서 나왔다. 그 즉시 소위가 내게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박사"
그리고는 이내 등을 돌리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와 살아남은 1,2 특수부대원들은 로한이 폭력적인 행동을 할 경우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로한의 공포를 절실히 맛본 그들로서는 두 번 다시 로한과 대적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로한을 기지 밖으로 보낸 나에게 감사를 표한 것이 아니었을까.
***
짙은 밤이 깔리고 네온사인의 불이 거리의 하늘을 채우고, 귀를 아프게 하는 기계음악들이 사람의 성질을 긁는다.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사람들은 격하게 춤추기도 하고, 격하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며, 격하게 색(色)을 탐하기도 한다.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마치 붉은 빛에 휩싸인 지옥 같은 풍경인 이곳은 GR-5구역, 온갖 게릴라들이 모여 사는 치외법권지역이다. 이곳의 법은 불법이요 국민은 죄수이다. 넘쳐나는 쓰레기들을 감당할 수 없는 과거의 감옥 대신에, 쓰레기를 언제든지 매립할 수 있는 좀 더 넓어진 감옥을 계획한 세계정부 UCK는 20년 전 GR구역정책을 선포했고, 8개의 GR구역이 전 세계 곳곳에 지정되었었다. 그리고 10년 후 정부는 망했다. 일행성일국가를 외치며 전 세계를 통일한 UCK가 망해버린 것이다. UCK를 망하게 한 장본인들은 다름 아닌 GR구역의 주민들이었다. GR구역의 쓰레기들을 매.립.하려는 작전이 실패하고 역으로 세계정부가 망해버린 것이다. 그 즉시 자치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존속해왔던 각국의 정부들이 다시 일어서면서 세계는 크게 50여국으로 갈리고 말았다. 8개의 GR구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 구역마다 제일의 권력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하나의 나라 못지않은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고, 성가신 악동국가가 탄생해버렸다.
이런 엉망진창인 나라에서 작은 소년과 20대의 숙녀가 어두운 골목에서 담소를 나눈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박사는 만났어?"
네온사인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숙녀가 말했다. 그녀는 이 거리가 맘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별로 춥지도 않은데 폭신폭신 할 것 같은 털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응."
기껏해야 10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몸집의 소년이 몹시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오른손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알아보던가?"
"아니. 전혀."
소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은 주름하나 생기지 않고 그대로였지만 많이 낙담한 것처럼 보였다.
"휴, 결국 내가 가서 몇 마디 해줘야겠네. 꼭 설득 할 테니까 너도 약속 꼭 지키는 거다, 알았지 ?"
"응. 알아."
흡사 막둥이 동생을 챙겨주는 듯한 누나의 말투로 숙녀는 말하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호의나 정성도 담겨있지 않았다. 부하직원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계산된 친절을 베푸는 상사의 눈빛이랄까.
"지도는 다 그렸어?"
"응."
소년이 스케치북을 숙녀에게 건넸다. 요즘 세상에 스케치북에 그린 지도라니. 손톱만한 메모리칩에 100GB가 저장되는 시대인데. 허나 그런 시대이니만큼 누구도 이 스케치북에 암묵적인 세상의 통치세력인 판도라의 중추시설 지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 할 것이다.
숙녀는 스케치북에 그려진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뼉을 마주쳤다.
짝-★
순간 숙녀와 소년 사이에 3D입체영상으로 바뀐 지도가 나타났다. 세로로 새워진 아령 같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생긴 거 맞아?"
숙녀의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으니 어서 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좋아. 그럼 판도라에서 보자."
숙녀는 다시 손뼉을 마주쳤고, 영상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바닥의 스케치북을 주워든 후, 골목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소년은 그녀와 반대방향 인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점점 인파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파속의 가운데쯤에 섞여버렸을 때,
소년은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의 머리를 잡아 뽑았다.
***
"꺄악!"
시끄러운 비명소리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시선들이 모인다. 시선의 끝에는 목 위가 없이 피를 꿀럭꿀럭 토해내는 남자 몸이 있었다. 시선들은 의아해 한다. 왜 목이 없을까? 가장행렬이라고 생각하는 시선은 GR구역에 처음 온 녀석이 틀림없다.
"살인이다!"
"우아아아!"
"죽여라!"
범죄의 도시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모범적인 시민들은 그들의 삶에 실증이 났다. 그들은 보다 강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언젠가 '빅 맨'이 생기면서, 살인이 통재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금지된 것에 대해 맹목적인 욕구를 보였다. 인간이란 막힌 곳을 찾아가기 마련이니까. 목 없이 비틀거리는 시체는 그들의 도화선이 되었다. 억눌려왔던 근본 없는 분노와 공중으로 뿌려지는 새빨간 자극이 모여 보다, 강렬한 것을 외치는 자들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후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 자극을 다시 떠올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 중 몇은 익숙했던 촉감의 쇠붙이들을 하나 둘씩 꺼내며 조용히 속삭였다.
-my sweet home~
총소리, 비명소리, 거리의 쓰레기 중 반이 도망치는 소리, 총에 맞아 즉사한 1인, 멍청하게 칼을 꺼내는 1인.
순식간에 거리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아비규환의 시발점이 된 소년은 처음 남자의 목을 뽑은 것 외에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기계음악에 사람의 생목소리 비명이 섞여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소음이 거리 위를 떠다녔다. 높은 하늘 위의 회색구름이 땅으로 내려온 듯 붉은 네온사인들은 모두 꺼지고 거리는 조금씩 어둡게 어둡게 되었다.
-아직 이야.
소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직 이라고 말했다. 소년은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살인을 저질렀을까. 아무런 의미 없이 자신의 힘을 자랑하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소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아니든 간에 소년은 더욱 큰 소란을 바라고 있었다. 소년은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한참 차 뒤에 숨어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한 무리에게 다가갔다.
"넌 뭐냐? 꺼져!"
자신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소년을 발견한 금발의 남자가 거칠게 발길질을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허나 그전에 소년은 남자를 스쳐지나갔다.
금발남자는 어느 사이엔가 왼쪽 가슴에 생긴 바람구멍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고는 뒤로 허물어졌다. 6명의 동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 금발남자가 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렸다.
소년은 차례차례 목을 뽑은 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소년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거창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가서 머리에 손을 얹은 후 가볍게 쥐고 위로 15cm정도 들어 올려 주는 것뿐이었다. 이 작업은 매우 여유롭게 행해졌고 인간이 볼 수 없는 순간에 끝났다. 시끄럽게 울리던 기계음악은 예전에 멎었었다. 그리고 시끄럽게 울리던 총소리와 비명소리도 차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싸움의 열기는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다만 총을 연주하는 사람의 목이 뽑히고, 비명을 담당하는 연주자의 성대가 찢어져서 더 이상 시작과 같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소년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찾아 배회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죽였다. '빅 맨'이 나올 때까지.
소년이 걸어간 길에는 서로의 피로 새빨갛게 물든 목 없는 몸들이 지옥길을 나타내듯 아무렇게 내팽개쳐있었다.
“지로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현재까지 사망자수 80여명이고 분단위로 10여명씩 늘고 있습니다. B급의 화기가 사용되고 있으며 목적 없는 난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차분한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20평 남짓한 방. 오직 빈 책상위에 올려진 스탠드만이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다. 책상과 의자와 전화기와 스탠드와 두 명의 남자가 있는 이 공간에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방금 다른 곳에서 다른 무엇을 하고 있었을 법한 큰 남자가 차분하게 보고를 하는 남자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팔짱을 꼈다가 깍지를 꼈다가 반복하면서 불편한 심기를 아우성쳤다.
“언제까지 들어야 돼나?”
“예상 되는 사건 주모자는 2구역의 장츠파의 행동대장들… 다 끝나갑니다. 조금만 더 참으세요.”
노골적인 투덜거림에 미울 정도로 유순하게 답하는 유람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도예시키코프였다. GR-5구역의 패자 도예시키코프. 통칭 코프로 불리는 빅 맨이었다. 2m 20cm의 장신에 온 몸이 근육으로 가득 차있는 코프가 아니꼬워하는 유람은 좀 신비한 놈이었다. 머리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코프가 온갖 더러운 비리가 난무하는 5구역(다른 구역도 마찬가지다)을 4년이나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유람의 공작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보좌관을 자처하며 나타난 지가 어언 5년째. 유람이 심복이 되고 난 후 벌어진 모든 전투는 정말 쉬웠다. 숨 막히는 긴장감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전투 따위는 이제껏 2번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 외에는 상대가 전투 시작 전에 죽어버리거나 딱히 좋다고 할 수 없는 컨디션으로 전투에 등장해서 식은 죽 먹기로 처리해버렸었다. 그리고 다른 구역들의 빅맨들이 국제기구와 비밀적 거래를 맺고 꼬리치는 개신세로 전락하는 시점에 유일하게 5구역이 독립적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코프는 이런 상황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물론 유람의 뒷공작으로 5구역은 독립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눈썹도 안 보이다가 사건만 터지면 ‘회의실’로 호출을 해서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보고서를 듣게 한다. 평소에 어디서 뭘 하는지 의심할 법도 하건만 코프는 유람이 하는 말을 투덜거리면서도 모조리 믿는다.
“만약 이번 사건의 주모자가 제가 예상한 인물이 아니라면 즉시 달아나야 합니다.”
“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이제껏 유람의 지시에서 달아남과 관계있는 단어들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었다.
"판도라와 관계된 일이면 당장 손을 떼고 튀어야합니다."
"판도라? 그 세계 연구소?"
"뭐,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알려져 있죠. 거리에 마크 없는 부대가 들이닥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세요. 이곳으로 돌아와도 안 됩니다. 이 방은 파기됩니다. 일단 도망쳐서 살아있다면 제가 차후에 연락하겠습니다."
뚜르르-
유람의 말이 끝나자 구식 핫라인 전화가 울렸다. 첨단 과학의 문명 아래 수많은 종류의 통신방법이 생겨났지만 그런 장비는 첨단 과학의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첨단 과학의 통제를 받고 있다. 그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 지나가 버린 세대이다. 핸드폰이 있어도 무전기는 사용되고, 무전기가 있어도 모스부호는 사용된다. 3D입체 통화가 가능한 시대이지만 한 줄로 연결된 다이얼 전화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유람이 전화를 받았고 아무 말 않고 듣기만한 후 전화를 끊었다.
"상황이 이상하군요."
"대체 무슨 일이야? 오늘 같이 말 많은 날은 처음이군."
그랬다. 항상 보고서를 읽어서 말이 많기는 했지만, 보고서가 아닌 다른 말은 기껏해야 일 끝내고 놀지 말고 빨리 들어와서 보고하라는 말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도망쳐라, 상황이 이상하다고?
유람의 얼굴은 상당히 심각했다. 저런 유람의 모습도 처음이었다. 항상 여유로운 표정으로 '이정도 쯤이야 당신에겐 껌이니 농땡이나 피우지 마세요.'라고 말하던 그였으나, 오늘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 지도 모를 때 유람이 입을 열었다.
"…그냥 지금 쨀까요?"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
로한 제1화 만남(0~5)
프롤로그
자네 마법사의 아이러니라는 것을 아나?
마법과 과학이 공존 한 지도 많은 세월이 흘렀다네.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며 무섭게 발전해온 시기이기도 했지. 과학과 마법이 부딪쳤던 사건으로는 피노보노논쟁이 유명하지. 흔히 정령술논쟁이라고 하지만. 과학자인 피노와 마법사인 보노가 벌인 말다툼을 시작으로 마법계와 과학계가 정면충돌한 과격한 사건이었어. 그때 내가 제 2번째 판결인을 맡고 있었는데… 아, 이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군. 음… 사건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보자… 또 굴직한 사건이라 함은 마법계에서 이세계의 문을 발견한 디샬프발견, 과학계에서 분자나 원자같이 마법이 형상화 될 때 특정한 입자가 생긴다는 걸 증명한 구제네키발견 등이 있지. 그런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아, 그렇지. 자네 마법사의 아이러니라는 것을 아나? 그렇지! 컵 이야기야. 마법사들은 눈앞의 물 컵을 공중으로 띄울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겠지? 방법이야 어찌됐건 컵은 공중으로 뜬다네. 마법으로 어떠한 힘을 가하면 컵이 뜨는 거지. 그리고 마법사들은 그냥 공중에 떠있는 컵을 만들 수도 있다네. 아무 힘도 받지 않고 그냥 떠있는 컵을 만들 수 있어. 하지만 그냥 컵을 아무 힘도 가하지 않고 공중에 띄울 수는 없다네. 또 공중에 아무 힘도 받지 않고 떠있는 컵을 다시 바닥에 내릴 수도 없다네. 어떤가? 이것이 마법사의 아이러니라네.
이건 간단히 컵이 공중에 뜨고, 말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야. 마법의 한계를 보여주는 이야기라네. 먼저 눈앞에 있는 컵은 마법사의 간섭과 관계없는 존재이지. 그리고 공중에 떠있도록 창조된 컵은 마법사의 간섭에 놓인 존재야. 전자의 컵과 후자의 컵이 구분되는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원래 공중에 떠 있느냐, 아니냐. 마법사는 이 근본에 간섭할 수 없어. 설사 자신이 창조해낸 존재라 하더라도 말이지.
이걸 사람한테 적용시키면 어떻게 될까? 동화에서 나오듯이 계모를 생쥐로 바꿀 수는 없는 거라네. 마법에 걸려 4개의 팔을 가지게 된 거인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 간단하게 말해서 마법사가 어떤 마법을 걸든 간에 사람은 사람이지.
허나 신기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지. 사람이 아닌 사람이 있었던 때가 있었어. 어찌 보면 가장 떠들썩하게 입방아에 오르내릴 일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가장 조용하게 묻힌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 자네들도 모를 것이네. 지금 세상에서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안 남았거든. 그래, 뜸들이지 말고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한번만 말할 테니 잘 듣게나.
-마법사 라신키프 유언 중…
제1화 만남
"이 아이 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기껏해야 10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몸집의 소년. 이것이 '그것'의 첫 인상이었다.
일주일 전, G연구소를 침입했던 폭력조직을 괴멸시켰다라거나 제1,2특수부대 34명이 출동해서 23명이 죽었다, ‘그것’이 다시 출현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거대 조직에게 돈을 건네받은 허수아비 조직인 줄 알았는데 특수부대원 과반수가 사망하다니, 의외로 거물이었나라는 생각에 흘려들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날 이후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는 금지되었고, 판도라에서 온갖 더러운 연구를 담당하는 H연구소로 생포된 '그것'이 보내질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H연구소를 담당하는 책임자로써 ‘그것’의 정보를 얻기 위해 살아 돌아온 부대원들을 잠깐 만나보기도 했지만, 쓸 만한 정보는 얻지 못했었다. 귀화한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결국 내가 ‘그것’에 대한 정보를 얻은 건 이 아이가 오기 두 시간 전 넘겨받은 보고서를 통해서였다. ‘그것’에게 살해당한 부대원들의 이름과 계급이 간략히 적힌 프린트가 제일 첫 장이었다.
[T/N13-K23]
목표물/넘버13-아군23명 살해
정말 이 소년이 특수부대원 23명을 죽였단 말인가?
"네가 N13이냐?"
난 '그것'의 보고서와 눈앞의 소년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보고서를 몇 장 더 넘기다보니 급하게 갈겨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흥미로운 글귀가 적혀있었다.
[대원들의 증언과 피해상황을 볼 때, A1320에서 실종된 '로한'이 아닐까 싶음]
"아니, 네가 '로한'이냐?"
"그래."
기다렸다는 듯이 약간 거친 미성이 로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부터 널 측정하게 될 도관민이라고 한다. 만나서 반갑구나."
로한은 나를 그냥 빤히 쳐다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세포 채취부터 할 테니까, 입을 아- 해봐."
순순히 입을 벌린 로한의 입천장을 살짝 긁은 후 조수에게 면봉을 건넸다.
"오늘은 이게 다야. 저기 4350번에 들어가서 자라."
또 다른 조수가 로한을 안내해줬고 나는 보고서를 마저 읽기로 했다. 보고서의 뒷부분은 과거 로한의 행적에 대한 보고서였다.
[A530에서 최초로 확인된 '로한', 이후 R로 칭함, 은 첫 출현당시 MD1,2,3 소대의 90%를 살해하였다. 그리고 A562에서 R224분점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등 A822까지 판도라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하면 R은 상상할 수 없는 괴력과 회복력과 기이한 기술을 사용한다고 한다. 언뜻 잘못 생각하기에는 마법사가 만들어낸 유기물이라고 믿을 정도로의 이상함을 보인다고 한다. 기이함의 예로 R의 육체는 총기류에 의해 상처 입는 순간 3배정도의 팽창과 함께 외모가 바뀌고 더욱 흉포해진다고 한다. 어떤 상처라도 순식간에 아물어버리며 TTE합판을 날카로운 손톱으로 손쉽게 구멍을 내버린다. 이 외에도…….]
2년 정도 전에, 내가 아직 C연구소에서 근무할 적에 T-mecan과 T-alcan을 분자단위로 쪼개서 균등히 혼합한 합판을 만들어냈었다. 다이아몬드의 3배정도의 단단함을 자랑하며 발명 즉시 각 국의 군사용품에 이용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지금은 모든 군사용품에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 합판이다. 강도, 탄성, 내구성, 가공성 등 거의 모든 금속능력이 최상인 과학이 만들어낸 마법의 금속이라는 별칭을 가진 TTE를, 대재앙피해소의 최외벽부터 최내벽까지 골고루 발라져있는 TTE를 손톱으로 구멍을 내다니… 도저히 방금 본 소년과 이제껏 상상했던 로한의 이미지가 맞지 않는다.
"박사님, 결과 나왔습니다!"
세포 분석과 근 골격 분석을 마친 조수의 외침에 보고서를 책상위에 올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AIE FSD TRI CCG AKL ........
121 232 131 221 3 ........
(24) (8)
"그냥 평범한 아이랑 똑같잖아."
10세 정도의 사내아이와 같은 근골격에다가 일반인과 같은 비율의 단백질성분으로 이루어진 세포다. 이 결과만 가지고 결론을 내리자면 엄연한 인간이다. 아직 10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다.
허나…….
"로한의 공식 출현이 언제였지?"
"아… 1334년이니까……. 17년 전입니다."
"그 때도 지금의 외형과 같은 모습이었나?"
"예. 보고서에는 그렇다고 돼있었습니다."
17년간 살아오면서 10살 모습을 유지하고 TTE를 아무렇지도 않게 파괴하는 소년이라. 솔직히 지금 수면실에서 자고 있는 소년이 로한일거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당장 정보부에 연락을 해, 길 가던 아이를 납치해 온건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리고 로한이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왜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로한이 조직원들이 모두 죽고 나자 순순히 생포 당했는지도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그 로한을 어떤 구속구나 감시원 없이 비전투지대인 연구실에 달랑 보내다니. 설마 이게 정보부의 정말 한심한 오차거나 빌어먹을 리뷔트소장의 장난짓거리는 아니겠지. …. 전부다 아니라, 정말 저 소년이 로한이라면, 그렇다면… 한심하게도 내 머리에서 있을 수 없는 생각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설마 마법으로 만들어진 건 아니겠지?"
***
여러 가지 조사를 하면서 로한의 특징을 몇 개 발견하기는 했다.
첫째로 반응전달이 빠르고 예민했다. 인간의 반응속도의 한계는 0.2초정도이다. 무언가의 자극이 있은 후 최소 0.2초 후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허나 로한은 반응속도 0.0을 기록했다. 좀 더 자세히 측정하니 소수점 자리가 100개가 넘어버렸다. 코앞에서 총을 쏴도 그저 캐치볼 하는 아이처럼 손쉽게 총알을 잡는다. 또한 오감이 세상 어느 동물보다 극한으로 발달해 있었다. 한 예로 육지의 동물 중 가장 뛰어난 후각을 가진 코끼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냄새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맡아냈다. 이 정도라면 육감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발달한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토대로 각 감각능력을 초월한 범위의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 육감이다. 시각으로 볼 수 없는 후면은 청각, 후각, 촉감, 미각이 판단한다. 들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소리는 나머지 4개의 감각이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해 오감의 조화 상태가 바로 육감인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검증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증명된 이야기는 아니다. 이제껏 그 정도로 오감이 발달하고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둘째로 고통에 한해서는 반응이 없다. 상상을 뛰어넘는 오감과 그 전달 신경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지옥을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고춧가루를 코끼리 코에다가 뿌리면 코끼리는 마치 화상을 입는 것처럼 고통을 느끼듯이, 세상 모든 소리나 냄새 등 이 모든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질 것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 오감이 매우 뛰어나고 신경전달 속도가 측정불가인데 고통이 전달 안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다만 반응이 없을 뿐. 즉, 참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것은 인체를 위험에서 지키고자 하는 안전신호다. 즉시 고통의 원인이 되는 행동을 중지하라는 인체의 두꺼비집과도 같은 것이 고통이다. 인체에 해를 가한다는 것은 손상을 의미한다. 이것을 로한에게 적용시키면 그냥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것 만해도 도검으로 난도질하는 정도의 손상을 입으며 그에 상응하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가정이 나온다. 즉, 살아있는 상태가 곧 빠르게 죽어가는 상태인 것이다. 허나 로한이 고통을 참고 또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로한의 마지막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로한의 마지막 능력은 치유능력이다. 아니, 이것을 치유능력이라고 불러도 될지 확신이서지 않는다. 인간은 특정부위의 재생이 불가능하다. 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팔이 절단 될 경우 재생되지 않는다.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과 다르게 조직이 떨어져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잘린 자리만 아물 뿐인데, 로한은 신체의 모든 부분이 재생가능하고, 조직재생 역시 가능했다. 이러한 타입의 생물은 단세포 생물에서 관찰 된다.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는데 그게 또 다른 내가 되는 재생인 것이다. 허나 일정 크기 이상이 아니면 재생하지 못하고 소멸한다. 믹서기에 갈리면 죽는 다는 말이다. 로한의 몸에서 떨어진 세포는 재생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핵을 중심으로 재생하는 타입일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핵을 중심으로, 즉, 본체의 정보가 들어있는 재생 불가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가정은 참이 되지 못했다. 0.5나노미터 단위로 세포에 손상을 가했지만 모두 재생했다. 그래서 좀 무서운 가정이 생겨났다. 로한은 갈아도 살아난다.
2주일 정도에 걸쳐서 정밀검사가 끝났고, 이제 얼마 뒤 로한은 정보부로 가서 취조를 당할 것이다. 괴멸한 조직에 왜 있었는지, 이제까지 뭘 했는지, 배후조직은 있는지, 그리고… 지누스의 잔당은 어떻게 됐는지 등등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거나 말을 해야 하겠지.
"오늘 며칠이지?"
대강 조사를 끝냈기 때문에 연구소 내에서 로한이 돌아다니는 것에 제한은 없었다. 정보부에 넘길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잠시 쉴겸 커피를 타고 있는데 로한이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7월 4일."
별거 아닌 질문이기에 성의 없이 답해주었다.
로한이 이곳에 온지 2주일이 지났다. 특수부대를 전멸시킬 정도의 능력을 가진 생체를 어떤 구속 장비도 없이, 어떤 군사 장비도 없는 연구소에 보낸다는 상부의 결정을 들었을 때 정보부 직원이 짓궂은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로한은 아무런 구속 장비 없이 연구소에 보내졌고, 지금까지는 어떤 문제도 없다. 이유라고 할 만한 것은 로한이 스스로 우리 쪽으로 투항했다는 가정뿐이다. 물론 난 정보부 소속이 아니다. 연구부 소속에다가 H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박사로서 그냥 로한에 대한 생체적 조사만 하면 내 임무는 그걸로 끝난다. 허나 로한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검사를 하며 경이적인 신체능력을 알아가면서 점점 의구심이 깊어져갔다. [대체 왜 여기로 온 것인가?] 잡혀 온 건 아니다. 충분히 그 상황에서 도망치거나 특수부대원들을 전멸시키거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보고서에는 제압했다라고 적혀있었지만 난 믿지 않는다)왜 순순히 잡혀온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내안에서 점점 깊어 갈수록, 그 해답 역시 점점 뚜렷해졌다. 판도라 기지의 염탐. 허나 이 해답을 타당치 못하게 했던 것은 로한의 과거 행적이었다. 왜 지금에서야 염탐을 하게 된 것인가. 하려면 옛날에 했지. 그리고 이제 와서 판도라의 중추기지 구조를 알아낸다한들 뭐에 쓸 것인가. 판도라의 최우선 퇴치목적이었던 지누스는 5년 전 완전히 괴멸했다. 40년에 걸친 전재에서 판도라가 승리했고 이제 세상에서 어느 누구하나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 되 버린 판도라를 … 설마 파괴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그에 상응하는 세력이 다시 조직되었고 로한은 그 조직에 편입되어 새로운 임무를….
"그럼 내일 가야지."
"응?"
"여자를 만나러 가야 돼."
"뭐?"
하고 있던 생각마저 날아가 멍해져 버린 날 뒤로하고 로한은 4350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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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tal-No0432. 도. 관. 민. 박사. N0124로. 와주싶. 시오. 반복합니다. Ental-No0432. 도. 관. 민. 박사. N0124로. 와주싶. 시오.-
여성의 목소리를 어설프게 흉내 내는 A.I의 방송이다. 내가 있는 H연구소는 판도라 본관에 부속 되어있는 연구소이다. 세상에 공개할 수 없는 연구를 주로 취급하는 곳이기에 발밑에 놓아두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본부와 직결 되어있으니까 그만큼 정보의 교환도 빠르다. 타 연구소의 연구원들은 호출이 되지도 않지만 H연구소에서는 빈번히 호출을 당하는 것이다. 연구의 성공이라니 실패라니 뭐 그런 것들이 직통으로 전해지니까. 그래, 오늘도 뭔 일이 났다.
"고유 No0432. 도관민 박사입니다."
"어서 오게, 박사."
작전부의 안보부 대령, 창현. 날 호출한 사람이다. 간략한 설명을 하자면 5년 전 내가 처음으로 판도라에 들어오자마자 엄청난 영웅 대접을 받으며 벼락출세를 한 인물이다. [지누스]라는 조직을 괴멸시키는데 혁신적인 공을 세웠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은 껍데기뿐인 지누스를 밟아버린 거라고 말하지만 말이다. 방안에는 내 앞에 앉아있는 대령 말고도 내 옆에 같이 서있는 소위가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제2특수부대 리더인 김영채로 얼마 전 로한사건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로한을 내보냈다면서?"
아아, 아침 7시에 내보내줬지.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도 안 지났네.
"그렇습니다."
"왜 그랬나?"
대령이 콧기름에 미끄러져 살짝 내려온 안경을 검지로 올리며 눈을 치켜세웠다. 내 입에서 조금이라도 허튼 소리가 나오면 요원을 불러 고문이라도 할 셈이다. 행여나 지누스의 잔당이 아닌지 그것부터 물어보겠지. 그러려고 소위를 불러놨을 것이다.
"나가는 문을 가르쳐 달라기에 가르쳐줬을 뿐입니다."
대령은 손을 깍지 끼고 손가락으로 손등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기분은 나쁘지만 내 말에서 꼬투리를 잡지 못 한 거겠지. 작전부의 통보를 모르진 않았을 테니까.
"로한을 H연구소로 보내기는 했지만 보호와 신변확보는 아직 작전부의 소관이었다. 연구가 끝나는 즉시 사살될 계획이었어."
"킥-"
"?! 왜 웃나?"
사살? 그 로한을? 어이 대령. 당신은 뭘 몰라도 한참을 모르고 있군. 로한에 관한 보고서를 읽어보고도 사살을 집행하겠다고 하는 건가?
"로한은 사살 할 수 없습니다. 대령님"
"뭐야?"
"로한은 사살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소린가, 박사. 설명해보게."
대령이 또 미끄러진 안경을 밀어 올린다. 하긴 그는 마법스러운 존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겠지. 마법조직이었던 지누스를 깨부쉈을 때도 주력인 마법사가 행방불명되고 난 후였으니까.
"로한의 재생력을 고려할 때 U-S핵융합폭탄을 터트려도 로한이 죽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대령님. 그렇다고 고작 로한이라는 겉보기에 소년인 개채를 사살하고자 그런 폭탄을 터트릴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범국제적인 조직이라지만 세계여론에는 판도라도 당할 수 없을 테니까요. 또 로한은 어느 한 부분을 핵(center)으로 하는 이상세포재생타입도 아닙니다. 산산 조각난 몸이라도 다시 재생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한이 자신이 산산 조각날 때까지 가만히 있을 리도 없습니다. 아무리 총탄을 퍼부어 본들 로한의 사살은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그것이 가능했으면 작전부의 자랑인 특수부대원 23명이 살해당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난 2주일가량의 연구를 통해 정확히 로한에 대해 알아낸 것은 얼마 없다. 그저, 과연 이 개채가 죽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만 증폭될 뿐이었다. 노화가 되지 않는다. 독극물에 반응하지 않는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에도 감염되지 않는다. 군사무기로도 죽일 수 없다. 호흡만으로도 체내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가 충족된다. 그리고 환경에 따라 호흡을 하지 않아도 된다. 체내의 모든 것이 재생가능하다. 실험을 계속할수록 불사의 유기체라는 것만이 명확해졌다.
"……. 그것과 로한을 내보낸 것은 별개일세."
"로한이 연구소에 온 후, 작전부에서 보낸 통보에는 '만약 로한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나 그 조짐이 보일 경우 생명보존을 우선시 하라.'라고 명시되어있었습니다."
"?! 그래서?"
"2주일간 로한을 연구한 결과 로한이 여기에 투항한 이유는 자신을 공격한 판도라라는 조직의 구조라던가 본거지 확인을 위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기지의 정찰을 모두 마친 로한이 가는 것에 비협조적이었다면 로한은 기지 내에서 난동을 부렸을 지도 모릅니다. 특수대원조차 막지 못 했던 그 로.한.이 말이죠. 그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 로한이 기지를 나가는 것에 한해서 협조를 한 것입니다."
“로한은 투항한 게 아니라 제압당해 호.송. 되어왔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마침 여기 작전에 참여했던 김영채 소위가 있으니 당시 상황을 들어보도록 하죠.”
대령은 잠시 나를 째려보고는 이내 소위를 향해 눈을 돌렸다.
“소위, 당시 상황을 사실대로 말해보게. 사실대로.”
“예. 당시 로한을 사살하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던 도중 로한이 두 팔을 머리 뒤로 올리고 투항의사를 표했습니다. 이에 고(故) 하정균 중사가 로한의 머리에 발포했으나 오히려 그가 쏜 총탄에 그가 머리를 맞아 사망했습니다. 로한은 ‘생포당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고, 사살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로한을 제압하여 호송해왔습니다. 이상.”
소위의 이야기가 끝나자 대령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시 안경이 밑으로 내려갔는데도 올리지 않고 손을 깍지 낀 채로 침묵했다.
로한은 실험이 끝나면 바로 지정된 자리에 가버렸지만 아마 내 예상이 맞을 거다. 초감각을 가진 로한은 굳이 기지를 돌아다닐 필요 없이 가만히 누워 기지의 구조를 느끼기 만하면 됐을 테니까.
"…….알았네. 그럼 둘 다 가보게."
"알겠습니다. 로한에 대한 보고는 빠른 시일 내로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소위는 대령의 방에서 나왔다. 그 즉시 소위가 내게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박사"
그리고는 이내 등을 돌리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와 살아남은 1,2 특수부대원들은 로한이 폭력적인 행동을 할 경우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고 한다. 로한의 공포를 절실히 맛본 그들로서는 두 번 다시 로한과 대적하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얌전히 로한을 기지 밖으로 보낸 나에게 감사를 표한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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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밤이 깔리고 네온사인의 불이 거리의 하늘을 채우고, 귀를 아프게 하는 기계음악들이 사람의 성질을 긁는다.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사람들은 격하게 춤추기도 하고, 격하게 주먹을 휘두르기도 하며, 격하게 색(色)을 탐하기도 한다.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마치 붉은 빛에 휩싸인 지옥 같은 풍경인 이곳은 GR-5구역, 온갖 게릴라들이 모여 사는 치외법권지역이다. 이곳의 법은 불법이요 국민은 죄수이다. 넘쳐나는 쓰레기들을 감당할 수 없는 과거의 감옥 대신에, 쓰레기를 언제든지 매립할 수 있는 좀 더 넓어진 감옥을 계획한 세계정부 UCK는 20년 전 GR구역정책을 선포했고, 8개의 GR구역이 전 세계 곳곳에 지정되었었다. 그리고 10년 후 정부는 망했다. 일행성일국가를 외치며 전 세계를 통일한 UCK가 망해버린 것이다. UCK를 망하게 한 장본인들은 다름 아닌 GR구역의 주민들이었다. GR구역의 쓰레기들을 매.립.하려는 작전이 실패하고 역으로 세계정부가 망해버린 것이다. 그 즉시 자치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존속해왔던 각국의 정부들이 다시 일어서면서 세계는 크게 50여국으로 갈리고 말았다. 8개의 GR구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 구역마다 제일의 권력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하나의 나라 못지않은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고, 성가신 악동국가가 탄생해버렸다.
이런 엉망진창인 나라에서 작은 소년과 20대의 숙녀가 어두운 골목에서 담소를 나눈들,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박사는 만났어?"
네온사인 불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숙녀가 말했다. 그녀는 이 거리가 맘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별로 춥지도 않은데 폭신폭신 할 것 같은 털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응."
기껏해야 10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몸집의 소년이 몹시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오른손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알아보던가?"
"아니. 전혀."
소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은 주름하나 생기지 않고 그대로였지만 많이 낙담한 것처럼 보였다.
"휴, 결국 내가 가서 몇 마디 해줘야겠네. 꼭 설득 할 테니까 너도 약속 꼭 지키는 거다, 알았지 ?"
"응. 알아."
흡사 막둥이 동생을 챙겨주는 듯한 누나의 말투로 숙녀는 말하고 있었다. 허나 그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호의나 정성도 담겨있지 않았다. 부하직원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계산된 친절을 베푸는 상사의 눈빛이랄까.
"지도는 다 그렸어?"
"응."
소년이 스케치북을 숙녀에게 건넸다. 요즘 세상에 스케치북에 그린 지도라니. 손톱만한 메모리칩에 100GB가 저장되는 시대인데. 허나 그런 시대이니만큼 누구도 이 스케치북에 암묵적인 세상의 통치세력인 판도라의 중추시설 지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 할 것이다.
숙녀는 스케치북에 그려진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뼉을 마주쳤다.
짝-★
순간 숙녀와 소년 사이에 3D입체영상으로 바뀐 지도가 나타났다. 세로로 새워진 아령 같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생긴 거 맞아?"
숙녀의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말하기도 귀찮으니 어서 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좋아. 그럼 판도라에서 보자."
숙녀는 다시 손뼉을 마주쳤고, 영상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바닥의 스케치북을 주워든 후, 골목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소년은 그녀와 반대방향 인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점점 인파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파속의 가운데쯤에 섞여버렸을 때,
소년은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의 머리를 잡아 뽑았다.
***
"꺄악!"
시끄러운 비명소리를 중심으로 날카로운 시선들이 모인다. 시선의 끝에는 목 위가 없이 피를 꿀럭꿀럭 토해내는 남자 몸이 있었다. 시선들은 의아해 한다. 왜 목이 없을까? 가장행렬이라고 생각하는 시선은 GR구역에 처음 온 녀석이 틀림없다.
"살인이다!"
"우아아아!"
"죽여라!"
범죄의 도시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모범적인 시민들은 그들의 삶에 실증이 났다. 그들은 보다 강한 것을 원하고 있었다. 언젠가 '빅 맨'이 생기면서, 살인이 통재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금지된 것에 대해 맹목적인 욕구를 보였다. 인간이란 막힌 곳을 찾아가기 마련이니까. 목 없이 비틀거리는 시체는 그들의 도화선이 되었다. 억눌려왔던 근본 없는 분노와 공중으로 뿌려지는 새빨간 자극이 모여 보다, 강렬한 것을 외치는 자들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후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 자극을 다시 떠올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 중 몇은 익숙했던 촉감의 쇠붙이들을 하나 둘씩 꺼내며 조용히 속삭였다.
-my sweet home~
총소리, 비명소리, 거리의 쓰레기 중 반이 도망치는 소리, 총에 맞아 즉사한 1인, 멍청하게 칼을 꺼내는 1인.
순식간에 거리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아비규환의 시발점이 된 소년은 처음 남자의 목을 뽑은 것 외에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기계음악에 사람의 생목소리 비명이 섞여 오케스트라를 방불케 하는 소음이 거리 위를 떠다녔다. 높은 하늘 위의 회색구름이 땅으로 내려온 듯 붉은 네온사인들은 모두 꺼지고 거리는 조금씩 어둡게 어둡게 되었다.
-아직 이야.
소년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직 이라고 말했다. 소년은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살인을 저질렀을까. 아무런 의미 없이 자신의 힘을 자랑하려고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소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아니면 그저 아무것도 아니든 간에 소년은 더욱 큰 소란을 바라고 있었다. 소년은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한참 차 뒤에 숨어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한 무리에게 다가갔다.
"넌 뭐냐? 꺼져!"
자신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소년을 발견한 금발의 남자가 거칠게 발길질을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허나 그전에 소년은 남자를 스쳐지나갔다.
금발남자는 어느 사이엔가 왼쪽 가슴에 생긴 바람구멍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고는 뒤로 허물어졌다. 6명의 동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기 위해 금발남자가 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렸다.
소년은 차례차례 목을 뽑은 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소년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거창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가서 머리에 손을 얹은 후 가볍게 쥐고 위로 15cm정도 들어 올려 주는 것뿐이었다. 이 작업은 매우 여유롭게 행해졌고 인간이 볼 수 없는 순간에 끝났다. 시끄럽게 울리던 기계음악은 예전에 멎었었다. 그리고 시끄럽게 울리던 총소리와 비명소리도 차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싸움의 열기는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다만 총을 연주하는 사람의 목이 뽑히고, 비명을 담당하는 연주자의 성대가 찢어져서 더 이상 시작과 같은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는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소년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찾아 배회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죽였다. '빅 맨'이 나올 때까지.
소년이 걸어간 길에는 서로의 피로 새빨갛게 물든 목 없는 몸들이 지옥길을 나타내듯 아무렇게 내팽개쳐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