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고향에 왔다는 안도감은 침대가 아닌 거적 위에서도 단잠을 이루게 했다. 숲을 순찰하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 외곽에 있는 창고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침 햇살이 창틀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농기구며 과일즙틀 등 마을이 공동으로 쓰는 물건들이 보였다. 이런 창고에서라도 잠을 자기 위해 몰래 서성거렸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형골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어딘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꿈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성취된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 아직 철없던 아이의 때인지 분간하고 싶지 않았다. 형골은 만족했다.
쥐들이 소리를 내며 옆으로 지나갔다. 소중한 식량이다. 살찐 생쥐는 어린 고사리 손에 참 거대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잠자리와 먹을거리가 동시에 해결되는 이곳은 어린 형골이 생각하기에 천국이었다. 마을 외곽이어서 아침이나 낮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눈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 천국에 들어왔었다면 더 넓은 세상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형골은 생각했다. 아무리 천국이라도 '대규가' 선생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문이 빼가닥 열렸다.
"어, 일어나셨오? 아침을 좀 가져왔는데……."
사내가 광주리를 안고 들어왔다. 밤에 자신을 창고로 인도한 사내다.
"장로님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야겠오. 우리도 부탁 받은 거니까 아무렇게나 처리할 순 없어서……. 아침 다 먹을 때 즈음엔 뭐가 나오겠지."
사내는 광주리를 형골 앞에 내려놓았다. 물이 담긴 죽통(竹筒)과 밥 한 공기와 나물 찬이 두어 개 있었다. 형골은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사내는 창고 문 근처 나무통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형골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맛있군."
형골이 조용히 말하며 수저를 놓았다. 사내가 씨익 웃으면서 광주리를 다시 챙겼다.
"이제 나가보겠오? 진짜 그 선생의 제자가 맞다면, 정말 오랜만 아니오?"
형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밖으로 나서자 한 꼬마아이가 주뼛거리며 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내도 밖으로 나오자 꼬마는 허둥대며 사내 뒤로 돌아가 섰다.
"내 아들이오. 작은 마을이라서 소문이 벌써 애들한테까지 퍼진 모양이오. 욘석은 마법사를 보는 건 생전 처음이거든."
사내가 아들의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었다. 꼬마는 싫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들을 보는 사내의 눈이 아침 햇살만큼 다정해 보였다. 형골은 그 눈빛을 오랜만에 본 듯 했다. 자신을 보는 선생님의 눈빛이 바로 그랬다.
조금 걷자 마을 중심에 다다랐다. 예전과 달리 마을에 활기가 없음을 느꼈다. 아침이지만 대문과 창문까지 닫힌 집들이 몇 보였다. 빈 집인 것 같았다. 마을 중앙로 곁에는 지나가는 형골을 보기 위해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사내는 중앙로를 지나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길다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밤에 봤던 사람도 여럿 보였다. 사내는 형골을 식탁 말석(末席)으로 데리고 가고, 자신은 아들과 함께 한쪽으로 물러나 섰다. 형골의 자리 맞은편 상석(上席)에는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사내가 말한 장로인 듯 했다. 장로는 대머리였다. 대머리의 정수리에서 이마 언저리까지 반점이 퍼져 있었다. 형골은 옛 추억이 떠올라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저씨가 벌써 장로가 되었수? 하긴 그때도 젤로 부자였지."
"나를 아는가? 나는 자네를 모르는데."
"기억 못할 수밖에.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 노인네가 사람 얼굴 하나 온전히 기억인들 하겠오? 내가 마흔이 지났으니 아저씬 벌써 환갑이 넘으셨군."
"우린 마법사 선생으로부터 그 유품을 제자 분에게 전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받았소이다. 그래서 그 제자 분에게 급히 전보를 띄웠지. 하지만 감감무소식이더군. 근데 10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그 제자라고 자처하는, 부랑자 비슷한 사람을 만났네."
"그래서 뭘 보여주면 되지?"
"마법 시연은 필요 없네. 마법사인 것만으로 그 분 제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 단지 자네가 우릴 설득할 수 있는 그 무언가, 한 가지만 보여주면 될 텐데 말이지."
장로의 말을 들은 형골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봐, 아저씨! 선생님 재산이 얼마나 된다고 유품을 노리는 사람이 있겠어?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돈을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빚더미에 깔려 죽을 뻔한 노인이야, 알아? 그냥 날 보내 줘! 난 선생님 묘소에 참배하는 것으로 된다고."
형골이 인상을 구기며 큰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장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순 없지. 밤에 자네가 공동묘지 숲에서 귀신과 얘기하는 걸 본 사람이 있다네. 자네가 마법사 제자가 아니라면 분명 정령술사인 게 확실하니, 그냥 보낼 순 없지."
"이게 뭔 개풀 뜯다 만 소리야?! 도둑놈 취급도 모자라 이젠 정령술사 취급까지 하시나? 놀랍구만……! 내 아무리 개거지처럼 보여도 정령 똘마니 취급을 하면 안 되지!"
형골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그럼 마법사 선생 제자라는 걸 증명해 봐."
장로가 아무 동요 없이 말했다. 황당하고 약이 오른 형골은 장로를 노려보다 자리에 다시 앉았다. 가만히 '놀랍군, 놀라워……!' 를 연발하며 중얼대던 형골이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장로를 바라보았다.
"혹시 아직 여기에 민수나 민수 어머니 계시지 않소? 날 기억하실 거요."
형골의 말을 들은 장로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로가 옆 사람들과 잠깐 얘기를 주고받았다. 장로의 말을 들은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 사람은 지팡이를 의지한 늙은 여인을 조심스레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형골은 한 눈에 그 늙은 여인이 민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형골은 똑바로 그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늙은 여인은 장로 옆자리로 인도되었다.
"민영 어머니, 내 말 들리시오? 민영 어머니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모셔 왔어요. 힘드시겠지만 그 사람 말 잘 들어보시고, 아는 사람인지 말 좀 해주시오."
장로가 여인의 귀에 대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이해한 것을 본 장로는 손짓으로 형골을 불렀다. 형골이 일어나 장로 쪽으로 걸어갔다.
"노안(老眼)으로 눈이 머셨으니, 귀에 대고 말로 잘 설명해 보게."
장로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형골은 선뜻 여인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눈귀가 먼 늙은이의 30년 전 기억을 말로 소생시키는 것이 황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는 것이 형골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철없던 시절의 잘못이었으나 형골의 마음은 지금도 아팠다.
다시 한 번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형골은 여인의 옆에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선 채로 여인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런 자세로 말을 하던 형골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사람들은 형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형골이 매우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손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인도자를 찾았다. 장로의 집으로 데려온 사람이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형골은 무릎을 꿇은 상태 그대로 있었다. 장로는 '틀렸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여인이 문설주를 손으로 짚고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내어 말했다.
"니놈 선생이 이미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우린 이미 용서를 했다. 그걸로 족해."
여인이 말을 마치자 사람들이 일제히 형골을 보았다. 그가 죽은 마법사 '퀴트린'의 제자 '형골'임이 판명된 것이다.
형골은 아침에 식사를 가져다 준 사내와 그의 아들과 함께 공동묘지 쪽으로 향했다. 장로와 나머지 사람들은 몰래 숨겨둔 유품을 가지러 갔다. 왜 유품을 숨겨두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근데, 민수나 젊은 사람들 거의 도회지로 나갔오,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던데?"
형골이 앞서 걷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걸어가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꽤 오래 전부터 숲 귀신들과 해온 싸움 때문에 많이 죽었죠. 젊은 사람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저도 이 놈 위의 두 놈을 앞세웠죠."
사내는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꼬마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형골은 예전에 정령과 하던 얘기가 있어서 순간 뜨끔했다.
"그리 심했으면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에 도움을 청해보지 그랬오?"
"계속 전쟁통 아니었습니까. 전쟁에 끌려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명이 다한 게 그나마 복이면 복이죠."
형골은 또 속이 뜨끔했다. 제 1차 통일전쟁은 몰라도 제 2차 통일전쟁은 형골 자신이 일으킨 것 아닌가.
공동묘지가 가까워지자 사내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등에 멘 보따리에서 횃불대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불은 붉은색보다 흰색에 가까운 빛을 내었다.
"그 횃불은 예사 것이 아니군. 영구마법이 시전되었오?"
"예, 마법사 선생님께서 해 주신 거라고 하더군요. 선생님이 계실 때에는 그나마 나았는데 돌아가시니까 그저 이런 것으로밖에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불이 있으면 귀신들이 접근 할 수 없답니다. 한낮에도 불쑥 튀어나오는 놈들이라서 여기서부터는 이렇게 가야겠습니다. 덥더라도 참으셔야겠습니다."
"내 놀라운 소문을 들으셨군."
"……."
사내는 말없이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꼬마는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 석조 묘실이 선생님의 묘실입니다. 묘비명이 없어서 지난밤에는 모르셨을 겁니다."
공동묘지에 도착하자 사내가 석조 묘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지난밤에 형골이 밤이슬을 피해 처마 밑에 웅크렸던 바로 그 석조 묘실이었다. 바로 등뒤에 선생님이 계신 것을 몰랐었다니, 형골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있고 싶어하실 것 같아서요."
사내가 말했다.
"저, 저기……."
사내의 아들이 사내를 올려다보며 팔을 잡아당겼다. 사내는 허리를 숙여 아들의 입에 귀를 대었다. 이내 사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꼬마는 쭈뼛거렸다.
"아, 이거 참……. 이놈이 마법사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데,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마법사를 처음 만나는 것이라……."
"나야 심심하지 않고 좋지요. 근데 나한테 맡기시려면 횃불 하나 주셔야겠오."
형골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숫기 없는 이놈이 이러는 건 처음이네요."
"괜찮소."
사내는 보따리에서 횃불대를 하나 더 꺼내 불을 붙여 형골에게 주었다. 그리곤 아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일러둔 뒤 길을 되돌아갔다. 형골은 지난밤처럼 묘실 처마 밑에 앉았다. 그리고 횃불대를 그 앞 땅에 꽂았다. 정작 형골과 꼬마만 남자 꼬마는 더 쭈뼛거리며 형골에게 도통 다가오지 못했다. 형골은 손짓으로 꼬마를 불러 옆에 앉게 했다. 꼬마는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이름이 뭐냐?"
"예? 아, 저, 저는 권영…입니다……."
꼬마는 대답하고는 고개를 무릎 사이로 숙였다.
"나이는 한 7살 쯤 되냐?"
"10살인데요……."
"놀랍군. 10살이나 되면서 그렇게 아버지 말을 잘 듣다니,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데."
형골이 장난기 섞어 말하자 꼬마도 고개를 들어 형골을 바라보았다. 횃불의 흰빛 때문인지 몰라도 눈빛이 영롱히 빛났다.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이 아저씬 말야… 니 나이 때쯤에 얼마나 말썽꾸러기였는지, 어른들도 날 못 말렸어. 툭하면 애들 때리고 물건 훔치고 누나들 막 만지고 말야. 망나니 성질이 그때 만들어졌나봐."
즐거운 회상을 하듯 형골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그, 그래도 마법사 됐…잖아요……."
꼬마가 자기 일인 듯 항변했다.
"그래. 늙은 선생 하나 잘 만나서 사람도 되고 마법사도 되고 출세도 하고 인생 확 풀렸지. 이 마을에 선생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너도 선생님 하시는 말씀 꼭 잊지 말고 어느 순간에서나 지키려고 노력해야 돼. 뭐, 그렇다고 아무 선생 말이나 다 들으라는 건 아니고, 니가 딱 보기에 '아, 이 선생님은 정말 훌륭하구나!' 라고 느껴지는 선생 말이다. 인생 한 방이다. 좋은 선생 만나면 그 한 방으로 니 인생 확 풀리는 거야. 하지만 사람은 말야, 나이가 들수록 예전 것들을 잊어버리거든. 그래서 그 훌륭한 선생님 말씀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또 한 방에 주저앉게 된다. 그게 이치고 섭리야……."
형골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 내가 애한테 뭔 소릴 하는 거야. 이런 어려운 소리 말고 재미난 옛날얘기 해줄까? 이 아저씨 인생이 참 재밌어. 음…… 어디부터 얘기해줄까……. 그래, 내가 내 선생님 만난 얘기부터 해 줄까, 어때?"
꼬마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형골을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꼬마의 흡족할 만한 반응에 흥이 난 형골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꼬마 권영은 자신의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고, 평생 이 두근거림을 잊을 수 없었다.
총리 권영. 권영의 이름 앞에는 항상 '총리' 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362년 26살에 지방행정관으로 관직에 나아간 뒤 1382년부터 46살의 나이로 총리직을 맡아 78살에 사망할 때까지 총리로서 통일제국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 권영은 이때 이 두근거림이 자신의 인생을 '한 방'에 바꿔놓았음을 늘 고백했다.
======
'권영'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오해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더군요.
처음에 소개한 대로 액자 형식입니다. 즉, 중년의 형골이 나이 어린 권영에게 자신의 옛 얘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앞으로 전개됩니다.
이것을 # 0 에서는 '회고'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늘날개-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
고향에 왔다는 안도감은 침대가 아닌 거적 위에서도 단잠을 이루게 했다. 숲을 순찰하던 마을 사람들은 마을 외곽에 있는 창고에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아침 햇살이 창틀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농기구며 과일즙틀 등 마을이 공동으로 쓰는 물건들이 보였다. 이런 창고에서라도 잠을 자기 위해 몰래 서성거렸던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형골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어딘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꿈이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성취된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 아직 철없던 아이의 때인지 분간하고 싶지 않았다. 형골은 만족했다.
쥐들이 소리를 내며 옆으로 지나갔다. 소중한 식량이다. 살찐 생쥐는 어린 고사리 손에 참 거대하게 느껴지던 때였다. 잠자리와 먹을거리가 동시에 해결되는 이곳은 어린 형골이 생각하기에 천국이었다. 마을 외곽이어서 아침이나 낮을 제외하고는 사람의 눈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 천국에 들어왔었다면 더 넓은 세상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형골은 생각했다. 아무리 천국이라도 '대규가' 선생님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문이 빼가닥 열렸다.
"어, 일어나셨오? 아침을 좀 가져왔는데……."
사내가 광주리를 안고 들어왔다. 밤에 자신을 창고로 인도한 사내다.
"장로님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야겠오. 우리도 부탁 받은 거니까 아무렇게나 처리할 순 없어서……. 아침 다 먹을 때 즈음엔 뭐가 나오겠지."
사내는 광주리를 형골 앞에 내려놓았다. 물이 담긴 죽통(竹筒)과 밥 한 공기와 나물 찬이 두어 개 있었다. 형골은 아무 말 없이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다. 사내는 창고 문 근처 나무통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형골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맛있군."
형골이 조용히 말하며 수저를 놓았다. 사내가 씨익 웃으면서 광주리를 다시 챙겼다.
"이제 나가보겠오? 진짜 그 선생의 제자가 맞다면, 정말 오랜만 아니오?"
형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밖으로 나서자 한 꼬마아이가 주뼛거리며 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사내도 밖으로 나오자 꼬마는 허둥대며 사내 뒤로 돌아가 섰다.
"내 아들이오. 작은 마을이라서 소문이 벌써 애들한테까지 퍼진 모양이오. 욘석은 마법사를 보는 건 생전 처음이거든."
사내가 아들의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었다. 꼬마는 싫다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들을 보는 사내의 눈이 아침 햇살만큼 다정해 보였다. 형골은 그 눈빛을 오랜만에 본 듯 했다. 자신을 보는 선생님의 눈빛이 바로 그랬다.
조금 걷자 마을 중심에 다다랐다. 예전과 달리 마을에 활기가 없음을 느꼈다. 아침이지만 대문과 창문까지 닫힌 집들이 몇 보였다. 빈 집인 것 같았다. 마을 중앙로 곁에는 지나가는 형골을 보기 위해 주민들이 나와 있었다. 사내는 중앙로를 지나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길다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밤에 봤던 사람도 여럿 보였다. 사내는 형골을 식탁 말석(末席)으로 데리고 가고, 자신은 아들과 함께 한쪽으로 물러나 섰다. 형골의 자리 맞은편 상석(上席)에는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사내가 말한 장로인 듯 했다. 장로는 대머리였다. 대머리의 정수리에서 이마 언저리까지 반점이 퍼져 있었다. 형골은 옛 추억이 떠올라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저씨가 벌써 장로가 되었수? 하긴 그때도 젤로 부자였지."
"나를 아는가? 나는 자네를 모르는데."
"기억 못할 수밖에.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일인데 노인네가 사람 얼굴 하나 온전히 기억인들 하겠오? 내가 마흔이 지났으니 아저씬 벌써 환갑이 넘으셨군."
"우린 마법사 선생으로부터 그 유품을 제자 분에게 전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받았소이다. 그래서 그 제자 분에게 급히 전보를 띄웠지. 하지만 감감무소식이더군. 근데 10년이 지난 지금 갑자기 그 제자라고 자처하는, 부랑자 비슷한 사람을 만났네."
"그래서 뭘 보여주면 되지?"
"마법 시연은 필요 없네. 마법사인 것만으로 그 분 제자가 되는 건 아니니까. 단지 자네가 우릴 설득할 수 있는 그 무언가, 한 가지만 보여주면 될 텐데 말이지."
장로의 말을 들은 형골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봐, 아저씨! 선생님 재산이 얼마나 된다고 유품을 노리는 사람이 있겠어? 내가 없는 동안 얼마나 돈을 모았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빚더미에 깔려 죽을 뻔한 노인이야, 알아? 그냥 날 보내 줘! 난 선생님 묘소에 참배하는 것으로 된다고."
형골이 인상을 구기며 큰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장로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순 없지. 밤에 자네가 공동묘지 숲에서 귀신과 얘기하는 걸 본 사람이 있다네. 자네가 마법사 제자가 아니라면 분명 정령술사인 게 확실하니, 그냥 보낼 순 없지."
"이게 뭔 개풀 뜯다 만 소리야?! 도둑놈 취급도 모자라 이젠 정령술사 취급까지 하시나? 놀랍구만……! 내 아무리 개거지처럼 보여도 정령 똘마니 취급을 하면 안 되지!"
형골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그럼 마법사 선생 제자라는 걸 증명해 봐."
장로가 아무 동요 없이 말했다. 황당하고 약이 오른 형골은 장로를 노려보다 자리에 다시 앉았다. 가만히 '놀랍군, 놀라워……!' 를 연발하며 중얼대던 형골이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장로를 바라보았다.
"혹시 아직 여기에 민수나 민수 어머니 계시지 않소? 날 기억하실 거요."
형골의 말을 들은 장로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로가 옆 사람들과 잠깐 얘기를 주고받았다. 장로의 말을 들은 한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그 사람은 지팡이를 의지한 늙은 여인을 조심스레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다. 형골은 한 눈에 그 늙은 여인이 민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형골은 똑바로 그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늙은 여인은 장로 옆자리로 인도되었다.
"민영 어머니, 내 말 들리시오? 민영 어머니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모셔 왔어요. 힘드시겠지만 그 사람 말 잘 들어보시고, 아는 사람인지 말 좀 해주시오."
장로가 여인의 귀에 대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이해한 것을 본 장로는 손짓으로 형골을 불렀다. 형골이 일어나 장로 쪽으로 걸어갔다.
"노안(老眼)으로 눈이 머셨으니, 귀에 대고 말로 잘 설명해 보게."
장로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나 형골은 선뜻 여인 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눈귀가 먼 늙은이의 30년 전 기억을 말로 소생시키는 것이 황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낸다는 것이 형골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철없던 시절의 잘못이었으나 형골의 마음은 지금도 아팠다.
다시 한 번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형골은 여인의 옆에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선 채로 여인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런 자세로 말을 하던 형골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사람들은 형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형골이 매우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손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인도자를 찾았다. 장로의 집으로 데려온 사람이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다. 형골은 무릎을 꿇은 상태 그대로 있었다. 장로는 '틀렸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여인이 문설주를 손으로 짚고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내어 말했다.
"니놈 선생이 이미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우린 이미 용서를 했다. 그걸로 족해."
여인이 말을 마치자 사람들이 일제히 형골을 보았다. 그가 죽은 마법사 '퀴트린'의 제자 '형골'임이 판명된 것이다.
형골은 아침에 식사를 가져다 준 사내와 그의 아들과 함께 공동묘지 쪽으로 향했다. 장로와 나머지 사람들은 몰래 숨겨둔 유품을 가지러 갔다. 왜 유품을 숨겨두었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근데, 민수나 젊은 사람들 거의 도회지로 나갔오, 젊은 사람들이 별로 없던데?"
형골이 앞서 걷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걸어가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꽤 오래 전부터 숲 귀신들과 해온 싸움 때문에 많이 죽었죠. 젊은 사람뿐만 아니라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저도 이 놈 위의 두 놈을 앞세웠죠."
사내는 자신의 옆에서 걷고 있는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꼬마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형골은 예전에 정령과 하던 얘기가 있어서 순간 뜨끔했다.
"그리 심했으면 지방 정부나 중앙 정부에 도움을 청해보지 그랬오?"
"계속 전쟁통 아니었습니까. 전쟁에 끌려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명이 다한 게 그나마 복이면 복이죠."
형골은 또 속이 뜨끔했다. 제 1차 통일전쟁은 몰라도 제 2차 통일전쟁은 형골 자신이 일으킨 것 아닌가.
공동묘지가 가까워지자 사내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등에 멘 보따리에서 횃불대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불은 붉은색보다 흰색에 가까운 빛을 내었다.
"그 횃불은 예사 것이 아니군. 영구마법이 시전되었오?"
"예, 마법사 선생님께서 해 주신 거라고 하더군요. 선생님이 계실 때에는 그나마 나았는데 돌아가시니까 그저 이런 것으로밖에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불이 있으면 귀신들이 접근 할 수 없답니다. 한낮에도 불쑥 튀어나오는 놈들이라서 여기서부터는 이렇게 가야겠습니다. 덥더라도 참으셔야겠습니다."
"내 놀라운 소문을 들으셨군."
"……."
사내는 말없이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꼬마는 연신 이마의 땀을 훔쳤다.
"이 석조 묘실이 선생님의 묘실입니다. 묘비명이 없어서 지난밤에는 모르셨을 겁니다."
공동묘지에 도착하자 사내가 석조 묘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은 지난밤에 형골이 밤이슬을 피해 처마 밑에 웅크렸던 바로 그 석조 묘실이었다. 바로 등뒤에 선생님이 계신 것을 몰랐었다니, 형골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흰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있고 싶어하실 것 같아서요."
사내가 말했다.
"저, 저기……."
사내의 아들이 사내를 올려다보며 팔을 잡아당겼다. 사내는 허리를 숙여 아들의 입에 귀를 대었다. 이내 사내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꼬마는 쭈뼛거렸다.
"아, 이거 참……. 이놈이 마법사님과 함께 있고 싶다는데, 괜찮을까요? 아무래도 마법사를 처음 만나는 것이라……."
"나야 심심하지 않고 좋지요. 근데 나한테 맡기시려면 횃불 하나 주셔야겠오."
형골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숫기 없는 이놈이 이러는 건 처음이네요."
"괜찮소."
사내는 보따리에서 횃불대를 하나 더 꺼내 불을 붙여 형골에게 주었다. 그리곤 아들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일러둔 뒤 길을 되돌아갔다. 형골은 지난밤처럼 묘실 처마 밑에 앉았다. 그리고 횃불대를 그 앞 땅에 꽂았다. 정작 형골과 꼬마만 남자 꼬마는 더 쭈뼛거리며 형골에게 도통 다가오지 못했다. 형골은 손짓으로 꼬마를 불러 옆에 앉게 했다. 꼬마는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이름이 뭐냐?"
"예? 아, 저, 저는 권영…입니다……."
꼬마는 대답하고는 고개를 무릎 사이로 숙였다.
"나이는 한 7살 쯤 되냐?"
"10살인데요……."
"놀랍군. 10살이나 되면서 그렇게 아버지 말을 잘 듣다니, 나로선 받아들이기 힘든데."
형골이 장난기 섞어 말하자 꼬마도 고개를 들어 형골을 바라보았다. 횃불의 흰빛 때문인지 몰라도 눈빛이 영롱히 빛났다. 얼굴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이 아저씬 말야… 니 나이 때쯤에 얼마나 말썽꾸러기였는지, 어른들도 날 못 말렸어. 툭하면 애들 때리고 물건 훔치고 누나들 막 만지고 말야. 망나니 성질이 그때 만들어졌나봐."
즐거운 회상을 하듯 형골의 입가에 미소가 그어졌다.
"그, 그래도 마법사 됐…잖아요……."
꼬마가 자기 일인 듯 항변했다.
"그래. 늙은 선생 하나 잘 만나서 사람도 되고 마법사도 되고 출세도 하고 인생 확 풀렸지. 이 마을에 선생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너도 선생님 하시는 말씀 꼭 잊지 말고 어느 순간에서나 지키려고 노력해야 돼. 뭐, 그렇다고 아무 선생 말이나 다 들으라는 건 아니고, 니가 딱 보기에 '아, 이 선생님은 정말 훌륭하구나!' 라고 느껴지는 선생 말이다. 인생 한 방이다. 좋은 선생 만나면 그 한 방으로 니 인생 확 풀리는 거야. 하지만 사람은 말야, 나이가 들수록 예전 것들을 잊어버리거든. 그래서 그 훌륭한 선생님 말씀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또 한 방에 주저앉게 된다. 그게 이치고 섭리야……."
형골이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내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 내가 애한테 뭔 소릴 하는 거야. 이런 어려운 소리 말고 재미난 옛날얘기 해줄까? 이 아저씨 인생이 참 재밌어. 음…… 어디부터 얘기해줄까……. 그래, 내가 내 선생님 만난 얘기부터 해 줄까, 어때?"
꼬마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형골을 바라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꼬마의 흡족할 만한 반응에 흥이 난 형골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꼬마 권영은 자신의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음을 느꼈고, 평생 이 두근거림을 잊을 수 없었다.
총리 권영. 권영의 이름 앞에는 항상 '총리' 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1362년 26살에 지방행정관으로 관직에 나아간 뒤 1382년부터 46살의 나이로 총리직을 맡아 78살에 사망할 때까지 총리로서 통일제국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 권영은 이때 이 두근거림이 자신의 인생을 '한 방'에 바꿔놓았음을 늘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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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닙니다. 오해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더군요.
처음에 소개한 대로 액자 형식입니다. 즉, 중년의 형골이 나이 어린 권영에게 자신의 옛 얘기를 들려주는 방식으로 앞으로 전개됩니다.
이것을 # 0 에서는 '회고'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늘날개-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