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사비국의 북방국경선 근처에 있는 작은 마을 '류화(流花)'. 사비국에서 이비국으로 넘어가는 길목 중 하나인 류화마을은 주민이 정착하고 사는 마을은 아니다. 이곳은 사비국을 오고가는 무역상이나 나그네들의 숙식을 위해 만들어진 집단 숙박소이다. 대륙력 1346년, 42살로 훗날 추정되는 이때에 형골은 후미진 여객관(旅客館)에서 호객용으로 초급 마법을 시연(施緣)하거나 치료마법을 시전(施轉)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고향에 가기 위해 북방으로 왔지만 그는 정작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몇 달 째 이곳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스승의 묘소를 보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에게 스승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고, 스승에게 그는 피붙이와 같았다. 류화에서 고향 '가현(佳賢)'까지는 걸어서 이틀이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형골은 모든 것을 잃고 생명의 위험을 늘 느끼는 알콜중독자일 뿐이었다. 고향을 떠난 후 보낸 20여 년의 세월이 죽은 스승의 묘소를 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그는 그리우면서도 두렵고 떨렸다.
어제도 형골은 마법 시연이나 치료마법 등 밥벌이를 한 뒤에 싸구려 술병 여러 개를 가슴에 한아름 들고 4층으로 올라갔다. 싸구려 술은 맛이 거칠기도 했지만 다음날 숙취로 심한 두통을 남겨둔다. 형골은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현실을 현실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벌써 한 병의 반 이상 마신 채 형골은 문을 열고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초가을 달빛이 환한 밤이었다. 암살자는 날을 잘못 고른 것이다.
"야, 야, 다 보인다. 뭐 이리 어수룩해?!"
형골이 방 한 구석을 응시하며 핀잔을 줬다. 그러자 바스락거리며 뭔가가 움직이려 했다.
"어,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이 방은 내가 3일이나 공들여 마법진(魔法陳)으로 봉(封)해 놨으니까. 내가 아무 마법이나 조금 흘려주면 생물체는 그냥 뒤져. 덕분에 여름 모기 걱정 없었지."
혀 꼬인 소리를 내뱉으며 형골은 크게 웃어댔다. 상대방은 움직이지 않고 형골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태후가 보낸 건 아니군. 전후불만인사(戰後不滿人士)이신가? 오늘은 그냥 가라구. 내가 팁을 많이 받아서 오늘은 기분이 좋아."
웃음을 흘리며 형골이 조용히 말했다. 잠시 멈칫거리더니 상대방은 급히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여객관 지붕을 구르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섞여 들렸다. 형골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그런 큰 마법진을 발동시킬 힘이 있을 리 없잖냐, 마법이 봉인(封印) 당했는데. 평민들한테 마법 교육시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군. 해근 장군이 확실히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어.'
형골은 아득한 이름을 생각해 내고는 잠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곤 술병을 만지작거리며 창 밖 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달이 너무 밝았다.
그래서 오늘 아침 형골은 주인장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바닥 청소를 하면서 주인장은 고개만 끄덕였다. 형골이 빈 술병을 흔들었다. 주인장은 말없이 고개짓으로 술병상자를 가리켰다. 형골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자 주인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숙취로 쑤셔오는 머리를 흔들며 두 개를 펴 보였다. 그제야 주인장은 인상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북방국경선을 넘어가는 길목은 이 마을 말고도 네 군데가 더 있다. 형골은 그곳들에서 모두 암살 위협을 겪어오면서 점점 동쪽으로 향해왔고, 이곳이 마지막 여객 마을이었다. 그리고 이 여객관이 마지막 숙식처가 되었다. 형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일을 해내지 못하고 황천길 가는 건 사절이었다.
초가을이었지만 황량한 광야의 밤은 추웠다. 금단 현상으로 손을 벌벌 떨면서 싸구려 독주로 몸을 데웠다. 형골은 이틀거리를 나흘이나 걸려 한밤중에 고향 '가현'에 도착했다. 남은 술병 하나는 이미 반이나 비어진 후였다. 기억을 더듬어 공동묘지로 향했다. 달빛이 밝았지만 묘비명(墓碑名)을 읽을 수는 없었다. 찾기를 포기한 채 형골은 공동묘지 입구로 돌아왔다. 입구 옆에는 커다란 석조 묘실이 있었다. 묘실의 처마가 제법 길게 나와있었다. 밤이슬을 피할 요량으로 형골은 그 처마 밑에 쭈그려 앉았다. 옷깃을 여미고 금 같은 술을 홀짝거렸다. 어렴풋이 잠이 들었을까. 사람 발자국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형골은 천천히 몸을 가누어 일어났다. 머리를 길게 딴 여인이 달빛에 비춰졌다.
"흑자(黑紫) 마법사시군요."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얀 살결이 달빛에 반짝거렸다. 푸른 눈동자가 황금색 머릿결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붉은 입술에 요염한 자태가 흘렀다.
"……."
형골은 말없이 한참동안 여인을 바라만 보았다. 피식 웃으며 형골이 입을 열었다.
"내가 이 꼴이지만 정령 하나쯤은 아직 날려버릴 수 있는데. 주정뱅이 영혼이 뭐가 맛있다고 나한테 이래? 마을에 싱싱한 거 많잖아."
"들켰군요, 예쁜 사람으로 분장했는데도. 10년을 기다렸습니다, 흑자 마법사님."
"이젠 내가 귀신 나부랭이한테까지 원한을 샀단 말야? 놀라운 일이군."
형골이 짐짓 웃으며 말했다. 여인의 눈동자에는 잠시 동정의 빛이 흘렀다.
"진짜였군요, 그 소문이. 아무리 술에 취했다해도 흑자 마법사가 나부랭이와 그렇지 않은 자를 혼동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뭐, 오히려 호기일 지도 모르겠군요, 이런 상황이. 저희를 도와주시면 몸 속의 봉인을 풀어드리겠습니다."
"놀라운 일이군. 놀라운 일이야……."
형골은 여전히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손에 쉰 술병은 가냘프게 흔들렸다.
"저희 총령(總領)께서 봉인에 '갇혀' 계십니다. 대예언자 '바로크'께서 흑자 마법만이 그것을 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오직 마법사 '퀴트리아'만이 흑자 마법을 구사할 수 있죠. 도와주십시오, 저희를."
"제법 큰 마법이 시전됐나보군. 그래도 정령술사나 정령들 힘만으로 풀 수 없었단 건가?"
봉인 마법은 두 경우가 있다. 공간정신계(空間精神界) 봉인과 물질계(物質界) 봉인이 있다.
공간정신계의 봉인을 시전하는 것은 대상자 편에서 이를 '봉인 당한다'고 표현한다. 이는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정 공간에 봉인을 하여 공간 자체를 격리시키거나 기초 마법을 극대화시키는 작동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 그 하나다. (흔히 '결계'라고 하는 것은 전자이고, 며칠 전 여객관에서 형골이 암살자에게 말한 봉인이 후자에 속한다.) 다른 한 가지는 정신 계통을 봉인하는 것으로 감정·의지력·마법력·꿈 등에 간여할 수 있다. 주로 사람이 그 대상이 된다.
물질계 봉인은 대상자 편에서 '봉인에 갇혔다'고 표현한다. 물질의 모든 기능이 정지된 채 격리되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다. 공간 봉인의 경우 봉인된 공간 안에서는 활동이나 생체기능이 가능하다. 정신 봉인의 경우도 봉인된 부분 외에는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물질계 봉인은 물질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에 속한 공간·정신 등 모두를 봉인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물건이 갇히면 봉인의 마법력이 남아 있는 한 그 물건을 함부로 만지거나 옮길 수 없다. 사람이 봉인에 갇히면 그 순간 그의 심폐기능·근육기능 등과 기억·마법력 등이 정지된다. 섬 하나가 봉인에 갇히면 봉인의 경계면(또는 봉인을 도운 마법진의 경계선) 안으로 생물은 물론이고 물과 공기 심지어 빛까지 정지된다. (하지만 시간은 정지되지 않기 때문에 신진대사가 정지된 생물은 그 세포가 결국 썩게 된다.)
이처럼 공간정신계 봉인보다 더 복잡한 집중력이 필요하고 그 위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물질계 봉인은 아무 마법사나 할 수 없다. 또한 할 수 있다고 해도 대상물(그 공간과 정신까지 포함하여)을 온전히 유지시킨다는 보장이 없다. 조금만 실수해도 대상물의 형태을 변형시키거나 정신을 파괴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형골은 이 점에서 흥미를 느꼈다. 과연 지금 이 대륙에서 그 어떤 자가 정령들의 총령(總領)을 봉인에 가둘 수 있단 말인가. 형골이 아는 한 그런 '존재'는 없었다.
만약 총령을 봉인에 가둔 자가 존재하고, 그가 정령들의 적이라면 현재 이 대륙에서 그 봉인을 해제할 자는 없다. 봉인은 시전한 마법사 본인이나 그보다 강한 마법사만이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형골의 마법력을 묶은 봉인이 풀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저희가 먼저 풀어드리겠습니다, 마법사님의 봉인을. 그 후 저희 안전을 위해 봉인된 공간에서 총령의 봉인을 흑자 마법으로 풀어주십시오.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내일 자정에 다시 이곳에 나와 주십시오. 그때 말씀해 주십시오, 더 요구하실 것도. 돈이든 여자든 나라든 복수든 원하시는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내일 꼭 나와 주십시오."
여인은 마을로 난 오솔길을 불안하게 보며 다급히 말했다. 그리곤 형골이 대답할 틈도 없이 숲으로 사라졌다. 형골도 여인이 보던 오솔길을 보았다. 횃불 몇 점이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장정 세 명이 횃불을 들고 있었다. 유난히 횃불의 빛이 하얗고 밝았다. 그 중 한 사내가 형골에게 물었다.
"사람이요, 귀신이요?"
형골은 고향 사람을 만나기 전에 목욕재계라도 할 걸 그랬나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술병에 남은 술을 벌컥벌컥 다 마셨다. 여인이 사라진 숲을 바라보며 형골은 다시 생각했다. 정령의 제안이 매우 괜찮다고.
* 현이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8-05-19 2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