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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경우


‘오래 사는 게 고통스러워?’

새까만 눈동자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을 모조리 쓸어 담은 것처럼 희망을 노래하며 반짝이고 있다. 아름다운, 이런 수식어로 표현하기조차 아까운 눈동자에 내 추악한 모습이 비춰지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러면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다.

‘그럴 리가 없지. 살아있다는 건 정말 중요한 거니까.’

살아있다는 건 중요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검은 안개처럼 스멀거리며 밑바닥에서 올라온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머릿속에 글자를 새겨놓는다. 눈을 감으면 곧장 그 글씨가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새빨간 잉크를 바르고 망막에 찍어놓는다.

‘그러니까 제발 살아가려고 노력해.’

살아있다는 건 정말로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네가 없다면 ‘살아있다는 건 중요하다.’ 라는 공식은 이뤄지지 않아. 이건 전혀 안타깝지 않다. 왜냐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내 삶은 가뭄을 만난 논바닥처럼 건조했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사막의 많은 모래알갱이들처럼 무의미한 행동들의 연속이었으니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 모든 게 충족된 사람에게 오래 사는 삶이란 천국 직행 티켓을 받은 것처럼 행복할지도 몰라.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옥의 끄트머리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에게 그건 끔찍한 고문보다도 더 잔인한 집행유예에 불과해. 내게 어느 쪽이라고 묻는다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주기를 원하는지 생각하는 게 더 현명할 거야. 난 이미 정했거든.

잠에서 깨어나면 일단 절대로 눈을 뜨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게 꿈인지 아닌지 손가락으로 허리를 살짝 꼬집어본다. 전통적인 방식은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효력이 있다고 믿기 마련이니까. 그걸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던가.

일단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면 나는 손을 뻗어 옆자리를 확인한다. 침대에 있는 베개는 두 개. 하나는 주인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눌린 흔적조차 없다. 그것을 손으로 더듬어 확신하고 나면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차라리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꿨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 여기면서 눈을 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눈을 뜨면, 나보다 먼저 깨어난 그녀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빙긋 웃으면서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나는 옆자리를 확인하는 찰나의 순간까지도 헛된 희망을 품어본다.

없다.

한숨을 토해낸다. 그리고 손을 올려 눈을 덮어버린다. 하품 때문에 나오는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말자.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잠들기 전에 쳐놓은 노란 꽃무늬가 박힌 살구색 커튼을 걷어내는 거다. 침실 가득 따스한 햇살이 들어온다면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밤사이에 정체되었던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상쾌한 바람이 코끝을 건드리며 인사하면 저절로 빙긋 웃어버린다.

침실을 나가면 거실에 있는 벽걸이 텔레비전을 틀어놓는다. 아침에 보는 것은 늘 밤사이에 있었던 소식이나 오늘의 날씨를 말해주는 뉴스다. 직장이 여기서 차를 타고도 30분이나 걸리는 도심지에 있기에 그녀는 늘 뉴스를 보고 우산을 챙겨갈 것인지 결정했다. 작업실이 3분 거리에 있는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얼굴로 합성된 홀로그램이 진짜 사람인척 아침 공기가 매우 상쾌한 날이라고 말하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잠깐 소파에 앉는다. 1분. 2분. 3분. 딱 첫 번째 뉴스가 거의 끝나려는 시점에서 부엌으로 간다. 이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가벼운 세안을 마친 그녀가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아침을 챙겨먹자고 한 것은 나였다. 집에서 작업을 하는 나보다 밖에서 고생하는 아내를 생각해서 제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간단한 토스트를 먹자고 한 것도 나였다. 그것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도 역시 나였지만, 결국은 그녀가 준비했다. 나를 부엌에 출입시킬 수는 없다면서 그녀는 부끄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내가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한다. 오늘 뿐만이 아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아침에 토스트를 굽는다. 어제 저녁에 장을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도 준비하겠지. 딸기잼과 버터는 미리 꺼내서 식탁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준비한 아침. 내 접시에 담긴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 3조각, 약간의 샐러드. 잘 구운 토스트는 두 개다. 그리고 그녀가 먹을 접시에는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 한 조각. 샐러드에는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발사믹 식초를 베이스로 재현한 드레싱을 뿌려놓는다. 마지막으로는 막 구워 내 것보다 따뜻한 토스트 두 개를 올려놓는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녀가 잘 먹겠다고 말하는 걸 기다리다가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올린다. 나는 식사를 천천히 시작한다. 항상 이렇게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는다. 되도록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오래 볼 수 있도록. 하지만 그녀는 식욕이 없는지 오늘도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아니. 외면하지 말자. 나는 알고 있다. 여기에 없다는 걸. 이 집에 없다는 걸. 그리고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시간이 지나도 내 앞에 놓인 음식이 사라지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면 정말로 실감이 난다. 그러다가 둥근 테이블의 끄트머리에 있는 파란색 머그컵을 바라본다. 자기 직전에 사용한 그녀가 사용했던 머그컵과 같은 색이다. 아, 그래. 그녀는 죽었구나.

이제 생각난다. 집에 강도가 들었다. 지문을 인식하는 자물쇠를 용케 열고 들어온 그는 아주 조용한 작업을 좋아했다. 필요한 것만 챙기면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장난에 꽤 자신이 있었고, 그러한 점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망상을 갖게 만들었다. 나보다 민감한 그녀는 그가 방문을 여는 소리에 깼고 비명을 질렀다. 그런 행동은 그의 자부심에 대단한 상처를 안겨줬다. 조용한 작업이 끝났다고 여긴 그는 망설이지 않고 권총을 쐈다. 그때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모두 6발. 그 중 5발이 그녀의 장기와 뼈에 박혔고 나머지 한 발은 내 왼팔을 관통했다.

그녀는 강했고 나는 나약했다.

범인은 그녀에게 2발을 발사했고, 4발은 뒤늦게 일어난 나를 없앨 용도로 쓰려고 했다. 하지만 가슴에 총알을 맞고도 그녀는 연약한 몸으로 나를 감쌌다. 그 동안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범인은 현재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죗값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평소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조용한 범죄를 선호했던 이유는 자신이 경찰의 손에서 도망칠만한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성을 들은 이웃집의 빠른 신고 덕분에 제때 출동한 경찰은 근처를 배회하고 있던 범인을 어렵지 않게 붙잡았다.

나는 뒤늦게 집으로 들어온 경찰의 목소리 덕분에 정신을 되찾았다. 떨리는 손으로 끌어안은 그녀는 이불을 새빨갛게 물들인 선혈처럼 붉은 꽃이 되어활짝 피어올랐다.

여기까지.

더 이상은 생각하지 말자.

식사를 마치면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머그컵을 제외한 설거지 할 접시들은 자동세척기에 넣어둔다. 자동세척기가 접시를 씻고 건조하는 동안 나는 거실로 돌아와서 오늘의 날씨를 확인한다. 날씨에 비가 올 거라는 말이 나오면 현관문의 손잡이에 우산을 걸어놓는다. 잊지 말고 가져가라는 의미로. 그녀는 우산을 챙기는 걸 싫어하지만 내가 꼭 가져가라고 말하면 투덜거리면서도 챙겨간다.

그녀가 집을 나서면 나는 발코니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다음 텔레비전을 끄고 대신 오디오를 켠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 시작되는 부분을 맞춰놓고 볼륨을 올린다. 밖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발코니로 나가면 작은 분재들 속에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다. 테이블과 의자는 항상 닦기 때문에 먼지가 잘 쌓이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깥에 있기 때문에 사용하기 전이면 늘 바닥에 있는 나무상자에 보관된 수건으로 닦아놓는다.

테이블 위에는 책이 한 권 놓여있다. 책의 제목은 ‘로봇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에 가장 가까운 인공지능을 탑재할 수 있는 양자두뇌를 발명한 저명한 로봇학자 강연수 박사의 저서다. 그녀는 강연수 박사의 밑에서 일하던 우수한 연구원이었다고 한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강연수 박사는 내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줬다. 나는 그녀를 영원히 잃는 게 싫어서 부탁을 했지만, 그는 어떤 이유에서 내 부탁을 들어준 것일까.

그녀가 마지막으로 읽은 쪽수는 342쪽. 소제목은 ‘ 4번째 질문, 양자두뇌를 이용한 영혼의 정착은 가능한가?’이다. 나는 그곳을 펴놓고 옆에 놓여 있는 사자 모양의 북스탠드를 세워놓는다. 그리고 그것에 책을 고정시킨다. 하늘에서 그녀가 원할 때면 찾아와 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내 마음이 이렇게 하고 싶기에 해놓는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정리하려고 놔둔 창고에서 10년이나 함께 해온 기타 케이스를 들고 집을 나선다. 뒷마당에 있는 작업실의 문은 땅바닥에 붙어있다. 신고 온 슬리퍼를 벗어서 문에 갖다 대면 하얀 불빛이 발바닥 전체를 스캔한다.

찰칵.

잠금장치가 해제되면 강화 불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문은 좌우로 펼쳐진다. 작업실은 지하에 있다. 계단을 따라 설치해놓은 작은 전구들이 내 발걸음에 맞춰 불을 밝혀준다. 균형감각을 벌레가 좀먹지 않은 이상 실족할 우려가 없을 정도로 넓고 완만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초록색으로 칠한 문이 있다. 이웃집에 피해가 될 거 같아서 지하실에다 작업실을 만든 것으로 모자라 문에 방음처리까지 했다.

‘이웃집? 아,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그것보다 자기가 일을 하다가 방해받으면 내가 화날 거 같아서 그래. 이제 자기의 꿈에 온힘을 쏟아 부을 수 있겠지?’

이것 역시 그녀의 배려. 이쪽 문에는 잠금장치가 없다. 진짜 문은 바로 안에 있으니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세 번째 문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작업실로 향하는 진짜 문. 어차피 이곳을 들어오는 첫 번째 문은 나와 그녀의 발만을 인식하게끔 되어 있지만 보다 확실한 안전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문이라고 설비업자가 설명해줬다. 이 문은 로봇이나 사이보그의 파괴력으로도 부술 수 없는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졌다.

‘누군가가 당신을 죽이라고 사주할지도 모르잖아.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한 엄청난 재능이 두려운 나머지…….’

핫. 나는 실소를 터트리고 만다. 손잡이를 잡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그대로 문 앞에 주저앉아버린다.

내가 가는 모든 곳마다 그녀의 흔적이 있다. 침대 위의 미소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고, 그녀가 즐겨보던 뉴스는 여전히 같은 시간에 방송하고,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2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멍청이도 살아있고, 상쾌한 아침공기에 어울리는 음악은 꺼지지 않고 노래하며, 마지막으로 읽었던 책조차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늘 같은 쪽을 눈동자에 선명한 소제목을 새겨준다.

그녀가 상상하고, 설계하고,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이곳이야말로 내게는 천국과 다를 게 없다. 죄를 지은 자는 하느님의 성지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녀의 육신을 저 하늘로 보내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나는 죄인이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맹세조차 지키지 못하는 못난 한 남자에 불과하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문 앞에 앉아 기타를 케이스에서 꺼내고 생전 그녀가 좋아했던 음악들을 하나씩 연주한다. 몇 번이고 되풀이한 곡들의 악보는 머릿속에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어 절대로 틀릴 일은 없다. 기계처럼,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한 진혼곡들을 연주를 하고나면 손가락 끝이 마비되고 다리는 저려온다. 입은 메마르고 갈증과 함께 깊은 허기가 찾아오지만 나는 그런 일련의 증상을 느끼고서야 웃을 수 있다. 이렇게 될 때까지 시간이 지났다는 건 조금 있으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매일 12시가 지나면 나는 땀에 젖은 몸을 깨끗한 물로 씻어내고 침실의 옷장에서 정장을 깨내 갈아입는다. 데모 시디들을 관계자에게 갖다 줄 때나 입는 고급 정장을 차려입고 전신 거울 앞에서 그녀가 사준 넥타이도 맨다. 마지막으로 신고 갈 구두에 광을 내며 준비는 완벽하다. 이제 자동차 키를 챙겨서 그녀를 만나러 가면 된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 30분 거리에 있는 그녀의 직장이다. 도심지에 위치했지만 외곽 도로를 타고 들어가기 때문에 막히는 일은 전혀 없다. 게다가 자동운전이 국가적으로 의무화된 이 나라에서는 컴퓨터가 일제히 오류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교통사고가 일어날 리는 없다.

연구소에 도착하면 바로 내리지 않는 시간이 정확히 1시가 될 때까지 차에서 기다린다. 그녀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1시로 정해졌다. 게다가 도심지 부근은 열섬현상을 억제하기 위해 12시 30분부터 1시까지 인공 강우가 내린다. 비가 자동차를 열심히 두들기는 리듬에 맞춰 손가락으로 핸들을 열심히 두들기며 라디오를 듣는다. 그러다가 1시가 되면―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해맑은 얼굴을 드러낸다. 나는 그에 맞춰 빙긋 웃어준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내린다.

이제 그녀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 그녀의 경우

“삼단논법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인간은 거짓말을 한다. 나는 거짓말을 한다. 고로 나는 인간이다. 훌륭해. 나는 확실히 인간이군. 게다가 죄책감도 전혀 없어.”

<박사님의 논리를 반박할 물리적 힘이 내게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당신의 면상을 후려쳤을 겁니다.>

그는 양자두뇌와 연결된 모니터에서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래프를 지켜보면서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을 혀로 핥아먹었다. 그래프의 변화를 잠깐 지켜본 그는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건 진심이군. 자네에게 육신을 주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야.”

<네. 로봇 바디를 주셨다면 박사님은 분명 후회했을 겁니다. 왜냐면 나에게 이런 짓을 한 당신을 죽여 버렸을 테니까요.>

그는 다시 모니터를 바라본다. 그래프의 움직임을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인다.

“에― 그것도 진심이군. 그리고 답을 말하자면 그건 솔직하면서 솔직하지 못하군. 분명 자네를 되살린 건 내가 맞아. 하지만 그것을 실연 가능하도록 시신을 빼돌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남자친구가 했지.”

내게 이빨이 있었다면 미처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해서 초조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을 것이다. 아, 물론 내게 이빨이 없는데 입술이 있을 리가 없다. 육신도 없는 내게 남은 거라고는 보존용액으로 가득 찬 투명한 유리용기에 들어있는 가짜 뇌와 연결된 양자두뇌 뿐이다.

내게 이름은 없다. 내가 받은 기억에 있는 남자의 이름은 유진서. 27살이고 점차 성장하는 잠재적 능력은 인정받은 뮤지션이다. 아내는 아니지만 같이 살았던 하민아라는 여자를 무척 사랑했던 남자이고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강연수 박사님의 연구소 문턱이 닿도록 매일 찾아오는 불쌍한 인간 수컷이기도 하다.

“민아 양. 나는 분명 약속했네. 자네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만 보여준다면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자네도 그 계약에는 동의했지.”

정정한다. 하민아는 내 이름이 아니다. 나는 하민아가 생전에 가졌던 기억을 이식한 양자두뇌에 불과하다. 그녀는 죽었다. 다만 유진서라는 남자가 나를 철석같이 하민아의 영혼이 남아있는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흉내를 낼 뿐이다.

<나는 일종의 컴퓨터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하민아의 인간적인 메모리를 이식 받았다고 할지라도 스스로가 컴퓨터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상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자네는 나를 죽이고 싶잖나?”

<진짜 하민아 양이 느꼈을 감정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난 박사님을 죽이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또 아이작의 로봇공학 3원칙을 얘기하는 건가? 지루하군. 그딴 개떡 같은 소리는 잊어버려. 애초에 난 자네를 로봇이라고 규정하고 있지 않았네. 자네를 로봇이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사랑이라는 비과학적인 신뢰관계 구축을 요리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죽은 사람의 영혼마저 억압하고 싶을 정도로 소유하고 싶은 감정이 있다는 것도 비과학적인 신뢰관계 구축에 들어가는 사랑의 일종입니까?>

“……내가 그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면 지금쯤 나는 온갖 잡것들을 사랑하고 있겠군. 어머니가 키우다가 복날에 아버지 뱃속으로 꿀꺽 들어간 녀석까지도 말이야.”

<그게 뭔지는 물어보고 싶지도 않군요. 하민아 양은 동물을 꽤 사랑했습니다.>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턱을 움직여 이빨로 질겅질겅 씹고 있던 볼펜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사랑이 뭔지도 모른다며 로봇 행세를 하던 주제에 동물을 사랑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말씀대로 저는 인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동물을 애지중지 소중히 여기는 하민아 양의 행동양식을 분석하여 이것이 그녀가 사물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고 판단할 뿐입니다.>

“뭐, 좋아. 자네가 생각하는 사랑의 방식을 내게 보여주게.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그가 만족한다면 나는 로봇도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는 논리를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내 양자두뇌 속에 있는 하민아 양의 얼굴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그건 슬프다는 느낌을 가진 표정이었다.

<물론입니다.>

시간은 1시. 이제 곧 유진서 씨가 올 시간이다. 나는 머릿속에서 하민아 양의 말투를 연습한다. 지금은 그래프가 보이지만 연구실 안으로 그가 들어오면 하민아 양의 모습으로 나는 모니터에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연기를 시작한다. 목적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경할 박사님에게 내가 그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쉬운 일이다.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느끼게끔 하면 된다. 인간들의 사랑은 간단하다. 수컷의 마음 따위는 햇빛에 노출된 얼음을 녹이는 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날리면서 ‘사랑해.’ 라고 초콜릿 케이크보다도 달콤한 목소리를 귓가에 속삭여주면 된다. 거기에 적정 수준의 스킨십까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유진서 씨에게는 그것까진 필요가 없다. 그는 그저 하민아 양이 이 세상에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만 있으면 된다. 바로 그 점이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유일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천천히 논리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유진서 씨가 들어오면 시각을 담당하는 센서를 작동시켜서 모니터를 통해 그를 바라보는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면서 하민아 양의 기억을 더듬는다. 인사는 항상 그가 먼저 했다.

“안녕.”

<어서와……라고 해야 할까?>

수줍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자 그는 기쁜 얼굴을 하고서는 허공으로 손을 내민다. 서로 닿지는 않았지만 충분한 교감이 있었다고 생각하기까지 몇 초 동안 우리는 그렇게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박사님이 앉았던 의자에 그가 앉자 나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이끌렸다. 아마도 이건 양자두뇌에 남아있는 하민아 양의 신경이 반응한 것이다.

<오늘 아침은 어땠어?>

“좋았어. 바람이 상쾌했거든. 아침밥으로는 계란 프라이에 베이컨, 그리고 토스트를 먹었지.”

<샐러드는?>

“발사믹 식초로 만든 드레싱을 끼얹어서 먹었지.”

<내가 좋아하는 거네.>

그는 나와의 대화가 즐거운 듯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뭘 했어?>

“뉴스를 보고, 음악을 들었지.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역시 당신이 좋아하는 거야.”

<음. 언제 자기가 그 음악은 너무 쇠퇴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명곡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곡들은 시간이 흘러도 다시 나올 수 없는 뛰어난 완성도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기반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지. 당신이 없어져서야 그 곡의 아름다움을 알겠던걸.”

죽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도통 납득할 수가 없었지만 평온한 그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대충 짐작이 간다. 만약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저것과 같은 표정을 지어야겠다고 저장 공간에 기록한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그는 작업실로 간다. 나는 그에게 아침에 새로 작곡한 곡들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민아 양이 죽은 이후부터는 계속 새로운 곡에 대한 소위 인간들이 말하는 영감이라는 게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그럼 아침에는 뭘 연주했어?>

그제야 그는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곡들. 내가 예전에 지었던 것들―”

<흐음~ 흠~ 흐흠~ 흠흠~>

그는 말하다가도 내가 허밍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이내 입을 다물고 그 소리들에게 귀를 기울인다. 생전 하민아 양은 유진서 씨가 자작한 곳들 중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갖다 붙인 감미로운 멜로디들을 좋아했다.

손가락으로 툭툭 무릎을 두들기며 허밍을 따라오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 나는 미소를 짓는다.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콧노래를 끝나자 유진서 씨는 박수를 치며 내 노래를 칭찬했다.

“하나도 잊지 않고 있네.”

<당신이 내게 준 소중한 선물인데 어떻게 잊어.>

“고마워.”

<나야말로 고마워. 여전히 날 잊지 않아줘서.>

“어떻게 널 잊을 수가 있겠어. 넌 내 삶의 이유였고, 내 삶은 오직 너를 위해 있었는데. 절대로 잊을 수가 없지.”

이 부분이 오묘하다. 그는 분명 행복해하고 있지만 느껴지는 뇌파로는 어딘가가 불안정하다.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나는 하진서 양의 사랑을 펼침으로써 상실감으로 채워진 그의 감정을 자극한다.

<있잖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혹시 지금 행복해?>

불안하던 그의 뇌파가 움찔거리더니 심하게 요동친다.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저게 박사님이 말씀하신 인간의 심연에서 일어나는 아픔이라는 거다. 표층으로 나타나지 않는 지진과도 같아서 한 번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려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놓는다.

그는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로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럴 때 불러와야하는 표정의 메모리는 작곡이 잘 되지 않아서 고민하던 그를 위로하던 하민아 양의 기억이다. 나는 괜찮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 행복하냐고 묻는 거라면 당연히 난 행복해. 지금 이 시간에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는 당신은 행복해?”

그의 뇌파에 점차 안정을 되찾는다. 모니터에 비춰진 나는 잠깐 그의 시선을 회피한다.

<나는 이 안에 있어. 당신 곁에 항상 있을 수 없다는 게 불편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매일 이곳에 오잖아. 이곳에 당신이 오는 이상 우리는 함께인걸. 소중한 사람과 함께 있는데 불행할 리가 없잖아. 행복해.>

입 속으로 들어간 솜사탕처럼 살살 녹아들어가는 멘트에 그의 표정은 뭉게구름처럼 부드러워졌다. 저 반응만 봐도 확실하다. 하민아 양의 기억들을 분석하여 내린 논리적인 대사가 상처 입은 그의 마음을 조금씩 치료해주고 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완치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리를 받는 것처럼 앞으로 꾸준히 그의 상처를 위로해주면 완전한 사랑을 이룩할 것이다. 그러고자 하민아 양의 시신을 빼돌려 양자두뇌에 영혼을 정착시킬 생각까지 한 것이니까. 그가 말했다.

“나도 당신이 소중해. 당신이 있는 곳으로 하루라도 빨리 갔으면 좋겠어.”

<그 마음 알아. 하지만 그게 옳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잖아.>

“응. 강 박사님의 의견을 따르면 자살은 결코 영혼을 보존할 수가 없데. 자신이 죽고자 결심한 순간 영혼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서 복원할 수가 없다더라. 그건 내가 바라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좋겠어. 의미 없는 세상에서 떠나 당신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얼토당토 않는 그의 순수한 바람을 들으며 겉으로 슬프다는 표정을 연기하고 속으로는 하품을 토해낸다. 이러면 생물학적인 반응으로 인해 하품이 나오면 그 결과 눈물샘을 자극하여 모니터 상의 모습에서 눈물이 흐르는 효과가 발생한다.

<고마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당신을 정말 사랑해.>

복받쳐 오르는 감정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인지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그는 “나도 널 사랑해.” 라고 말한다. 뇌파에서 이상한 반응은 느껴지지 않지만 기묘한 불안감이 머리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도대체가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만 가볼게. 오늘도 괜찮아 보여서 정말 다행이야.”

<물론 괜찮지. 여기서 매일 당신을 기다려야 하니까.>

“응. 그럼 내일 보자.”

<운전 조심해서 가도록 해.>

그는 알았다는 의미로 왼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간다. 한쪽 구석에서 동상처럼 잠잠히 우리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던 강연수 박사님은 오른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흥미롭군.”

모니터 상의 나는 팔짱을 끼며 그를 노려본다.

<뭐가 흥미롭죠? 자신을 구하고 죽은 애인이 그리워서 찾아오는 그의 정신이 신기하나요?>

“육체적 쾌락을 얘기하는 거라면 자네는 물론이고 나도 거론할 대상이 못 돼. 일단 민아 양은 육신이 없고 나는 애인이 없으니까. 내가 흥미롭다고 말한 건 행복하냐는 물음에 반응한 그의 뇌파라네.”

분명 나도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뒤에서 몰래 우리들의 대화를 통해 나타나는 뇌파의 그래프를 체크하고 있었던 강연수 박사님은 입에서 볼펜을 뱉어냈다. 툭. 데구르르. 바닥을 굴러가는 볼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것이 멈추자 이상하다는 어조로 말한다.

“그는 인간이군. 행복하지도 않는데 행복하다고 말했으니. 자네는 사랑하지도 않는데 사랑한다고 말했으니 자네 역시 인간인가?”

<전 사랑을 흉내 낼 뿐입니다.>

“아하.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할 거 같은가? 자네는 사랑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사랑이라는 건 정말로 불확실한 미래를 얻어내기 위한 인간의 갈망을 담아낸 것이지. 불확실하고 무책임하고 부적절해. 게다가 이기적이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그에게 준 것은 사랑이 아니네.”

<아닙니다. 저는 분명 그에게 사랑을 줬습니다. 이만 인정하시지요.>

“하! 천만에!”

감정이 격양되었는지 박사님은 바닥에 있는 볼펜을 발로 걷어차려다가 실패했다. 헛발질을 한 그는 자신의 시원찮은 운동신경을 탓하는 대신 ‘모든 것은 네가 로봇이기 때문이야!’ 라는 의미를 품은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저 녀석은 수동적인 삶을 살아. 아마도 집에 처박혀서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폐쇄공포증을 가졌을 거야! 어떻게 아냐고? 죽은 애인을 살려달라는 발상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인간은 반드시 진보해야해. 늘 한 걸음 나아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에 지금 이런 수준 높은 삶을 살고 있지. 적어도 동굴에서 돌도끼를 들고 생고기를 씹어 먹다가 기생충에 걸려 뒤져버리는 덜떨어진 과거의 삶을 그리워하지는 않는단 말일세. 하지만 저 남자는 하민아라는 여성의 영혼이 양자두뇌에 정착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과거에 빌붙고 있네. 그의 아침 식사는 늘 같은 메뉴고, 아침에 듣는 건 늘 같은 음악이고, 여기에는 늘 같은 시간에 찾아와.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내지 못한다는 점이지. 창조도 모방도 할 수 없고 그저 과거만을 노래해. 그게 인간인가? 그리고 그걸 응원하는 자네는 과연 사랑을 하고 있는 건가?”

모니터를 표적으로 삼아 그야말로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잡아낸 나는 해독 프로그램을 우회하여 인간들이 사용하는 비유의 의미를 알아내고자 노력한다. 이건 발전의 원동력인 동시에 재앙의 근원이라 불리는 인간의 호기심이 아니다. 그저 하민아 양의 기억을 학습하는 프로그램의 영향이다. 보다 인간다운 양자두뇌를 만들기 위한 강연수 박사의 욕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애완동물을 돌보는 것처럼 유진서 씨가 원하는 안식처를 제공하지 말아야한다는 의미입니까?>

조금 전까지 유진서 씨가 앉았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바보는 아니군.” 이라고 중얼거린 그는 책상의 서랍을 열어 새로운 볼펜을 꺼냈다. 조금 전에 버렸던 것과 완전히 같은 종류의 볼펜이다.

<받아드리기가 어렵군요.>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지. 너희들은 하나같은 논리적인 것만 이해하려고 하니까. 물론 이미이미이미 말했지만 사랑은 비과학적이야. 과학에는 반드시 가설을 진실로 만들어줄 논리가 필요하지. 그런 공식 따위는 무시할 수 있는 게 사랑이야.”

물론 비과학적인 것을 납득하고 받아드릴 수 있는 넓은 포용력을 지닌 인간이라면 그렇다. 그러나 난 그가 만든 로봇의 두뇌 역할을 하는 양자두뇌다. 거기에 하민아 양의 기억력이 기초로 깔려있을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시겠죠. 하지만 우리가 정작 신경 써야할 요점은 유진서 씨의 만족입니다. 그는 분명 행복하다고 말했고, 나를 사랑한다고도 말했습니다. 게다가 내일 또 나를 보러 옵니다. 내가 이기지 않았습니까?>

그는 새로운 볼펜의 끝을 질겅질겅 씹어대더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모니터를 쳐다봤다. 젠장, 그래프의 수치는 충분히 요동칠 만큼 움직였을 텐데. 뭐가 틀린 거지. 하나를 가르쳐줬는데 둘을 모르는 무능한 조수를 바라보는 스승의 엄격한 시선에 나는 괜히 주눅이 들고 만다. 이것 또한 하민아 양의 기억에 의존한 자동 반응이다.

“틀려. 사랑은 그게 아니야. 너는 그를 온전하게 보호하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지. 인간의 사랑은 그게 아니다. 왜냐면 어린애는 친구가 가진 장난감을 자신도 갖고 싶어 하거든. 하지만 그것을 공유하는 건 절대로 허락하지 않지!”

<……소유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소유욕! 내가 그렇게 얘기했었나? 난 장난감을 말하고 있었는데. 흠. 좋은 단어야. 소유욕이라. 나는 나, 너는 너. 하지만 너를 갖고 싶다. 그럴 경우에 인간이라면 어떻게 하겠나?”

<상식적인 측면에서 결혼을 하면 되겠군요.>

“그래! 수만 번의 삽질로 무덤을 파고 결혼이라 새긴 묘비를 세운 다음 구멍에 쏙 들어가면 되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지. 내가 먹을 케이크의 절반을 주고, 상대의 오믈렛 절반을 가져오는 거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지만 서로의 마음을 나눠 갖는다는 겁니까?>

“사랑은 파괴야. 자신의 절반을 버리고 상대의 절반을 도려내야만 인간은 사이좋게 서로의 장난감을 공유할 수 있어. 하민아는 자신에게 쓸 돈과 시간적 여유, 취미생활로부터 오게 될 향락을 버리고 응석받이 하나를 받아드렸다. 그러나 행복했어. 유진서는 어떻지? 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그녀에게 맡겼지. 그러나 행복했어. 왜냐면 두 사람은 서로 가진 장난감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아하하핫! 넌 실패했다! 넌 그에게 하민아는 죽었으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인생을 똑바로 살아가라고 말했어야 했어! 죽은 사람은 되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까! 상쾌하군! 명쾌하고! 또한 불쾌해! 젠장!”

볼펜을 입에서 뱉어낸 박사님은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몸속 깊은 곳에서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울분을 참기 힘들었는지 그는 곧 흐느끼더니, 짝을 잃어버려 슬픈 짐승처럼 긴 울음을 내뱉었다.

<학습했습니다. 내일에는 확실히―>

그는 손을 들어 내 말을 막았다.

“그만. 지루하다. 1달째 같은 교육을 하는 것도 고역이군. 하긴, 내가 모두 지워버리니까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네가 정말 인간처럼 생각하려면 이 모든 걸 혼자 깨달아야해. 내가 가르쳐 준 것은 의미가 없어. 그러니까 리셋(Reset)이다.”

<뭐라고요? 내 기억회로에 외부의 침입은 없습니다. 이건 분명 오늘 학습한 내용입니다.>

강연수 박사님은 대꾸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왼쪽 벽면을 가득 채운 기계 장치의 앞에 섰다. 푸른색 버튼에 손가락을 올린 그는 그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을 집어먹었는지 무척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잊어버려.”

  
∞ 박사의 경우

지쳤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다. 푸른색 버튼을 눌러 양자두뇌를 강제로 잠재운다. 이러면 무슨 짓을 해도 모른다. 하민아의 기억을 가진 양자두뇌의 기억회로를 우회하여 저장 장치에 접근한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의 대화를 지워버린다. 기억의 혼란이 와야 정상이겠지만 그럴 리는 없다. 유진서는 애인의 죽음을 잊지 못해서 매일 같은 일만 반복하는 멍청이다. 데자뷰가 일어났으면 일어났지 기억의 혼란이 있을 리는 없다.

한숨.

절망이 섞인 그것을 길게 내뱉고 나면 나는 연구실에서 나와 내 방으로 간다. 그곳에는 보존용액이 가득 채워진 거대한 유리 용기가 있다. 그 안에는 3년 전에 죽어버린 아내가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차가운 유리 용기의 표면에 손을 갖다 대고 맹세한다.

“꼭 성공하겠어. 이번 실험만큼은. 양자두뇌가 인간을 사랑할 수 있다면, 당신도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거야.”

실험은 계속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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