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이제는 김민혁의 말을 철썩같이 믿게 되어버렸다. 방금 잠에서 깨어 정신이 없으면 이 고양이도 온순해졌다. 하지만 지금처럼 의식이 완전히 각성하게 되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무리 보아도 이 고양이는 내 마음을 반영하는 동물인 것 같았다.
얼굴로 뛰어오르는 고양이를 덮고있던 이불로 뒤집어 씌우고, 그 위를 눌러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고양이는 결국 숨을 크게 내쉬더니 짐잠해졌다. 숨 쉴 구멍은 확실히 만들어 두었으니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려 책장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오래 자버린건지. 오전인지 오후인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김민혁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분명히 오후일 것이다. 그런데 시계 옆에서 못 보던 A4용지를 발견했다. 거기에 나에게 하는 말인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열어봐'라고 겉표지에 적혀 있었다.
내용을 보기전에 일단 뒷면을 보았다.
[모두의 마음은 고양이와 같다. 주종관계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만 결정적인 때에 자신을 배반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경우에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지 않으면 평생을 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면지 재활용일까. 한 장에 30원 하는 A4용지가 그렇게 아까웠을까.
종이를 열려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았다. 이전에 주저앉았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확실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잠시 생각해보니 어제 진정제와 수면제를 같이 먹고 잤다. 이전의 의사가 처방해준 약이라나. 뭐, 그렇다고 하면 지금까지 자고 있던 것도 납득이 되었다.
고양이는 막 이불을 들추고 나와서 나에게 적의를 드러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양 팔을 벌리자 고양이는 깜짝 놀라 뒤로 뛰었다가 내가 아무 공격도 하지 않자 내 무릎에 와서 누웠다. 나는 그 고양이를 들고 방문을 열어서 내던졌다. 김민혁이 왜 저 고양이를 싫어했는지 이해해버렸다.
[Merry Christmas. 뜯기 전에 음성메시지를 들어볼 것.]
종이를 한 장 들추자 그런 문구가 있었다. 뜯어보려다가 그래도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한 사람이니까, 그 사람 말대로 일단 핸드폰을 열었다. 오전 7시 51분에 작성된 음성메시지가 하나 있었다. 오늘 아침은 아르바이트로 바빴으니까, 이렇게라도 어제 해주지 못했던 답을 해줄 생각인 것 같았다. 아주 약간 기대하면서, 그리고 약간 불안해하면서 버튼을 눌렀다.
[010, 9093, 5487. 님이 오전, 칠, 시, 오십, 일, 분에 송신한 음성메시지, 입니다.]
그리고 삑, 하는 비프음이 들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어조는 굉장히 익숙하지 않았다.
[아... 먼저 한가지만 약속해주세요. 이 메시지를 끝까지 듣는다고. 협박은 한 적 있어도 부탁은 한 적 없잖아요? 아마 마지막 부탁이 될테니까 좀 들어주세요.]
솔직히 '김민혁인가'라고 생각했다. 말투가 전혀 안 어울리는데다가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로 공손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사과부터 해야겠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가방끈도 굉장히 짧은데다가 잘하는 거라고는 말싸움밖에 없어서... 아니, 뭐 메시지로 남기면 말싸움도 아닌가. 어쨌든. 가장 자신있는 방법으로 인사를 하기로 했어요. 아하하. 보통은 이런 말 얼굴 보고 직접 해야하는데 말이죠... 그래도 서로 만나면 제 제안은 무조건 앞뒤 안보고 기각할 것 같았어요. 조금 강압적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을 쓰게 되었습니다.]
... 이거 누구야. 내가 아는 김민혁은 이렇게 공손한 표현 같은건 모를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어디서부터 말할까... 아, 그래요. 몸은 괜찮아요? 저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굉장히 걱정되는데요. 제가 쓰던 진통제 겸 두통약은 책상 세번째 칸에 있어요. 그리고 진정제와 수면제는 같은 서랍안에 이름표를 붙여서 플라스틱 통에 넣어두었어요.]
어딘가에서 말기 암 환자가 유언을 남길 때 이런 방식을 쓴다는 것을 들었다. 그것을 기억해내고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어제도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져서 굉장히 놀라버렸는데.
[그리고 또 당부해둘게... 없네요. 그럼 본론만 말해볼게요.]
"아니, 그럼 지금까지 한 말은 뭐냐고."
이미 본인은 일하고 있을테니까 말해봐야 소용 없겠지만, 그렇게 말해두고 싶었다. 초조해서 손에 피가 안 통하는 건지 손이 시려왔다. 차가운 방바닥에 대고있던 발도 굉장히 차가웠다. 그래도 대답을 듣고싶었다. 아직도 왼손에 들고있는 조잡한 크리스마스 카드의 용도를 알고싶었다.
[일단, 고백해주셔서 굉장히 감사드립니다. 이거 또 굉장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많이 넣어서 더 혼날지도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무리에요.
아아아, 잠시만요. 계속 들어줘요. 부탁했잖아요, 처음부터. 별로 당신에게 문제가 있다거나, 제 취향이 아니라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에요. 화내지 말고 들어줘요.]
손은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닫으려 하고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손이 떨릴 정도로 힘껏 힘을 주고있었다. 아주 약간만 긴장을 놓아도 그대로 끊을 것 같았다.
[어제도 말했다시피 능력부족이에요. 난... 뭔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지금까지 누구도 그런 감정을 알려주지 않아서인지, 조금 파란만장하게 살아서인지, 1년 전부터 죽어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관심을 갖고싶다, 잘 보이고 싶다... 글쎄요. 그런 이유가 없는 감정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저도 모르는 감정을 제가 가질 수 없다는 거에요. 제 마음을 전부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알고있는 제 마음속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무리입니다.
어떤 변명이라거나 둘러말하기라거나, 거짓말 아니니까 믿어줘요.]
맥이 탁 풀려버려서 침대에 누웠다. 배개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두고 팔을 아무렇게나 두었다. 결국... 그 빌어먹을 자식은 끝까지 시체로 남겠다는 소리일까.
[그래서 무리. 조금 합리화시키자면, 당신 꽤 예뻐요. 얼굴 작고, 키도 적당하고. 신념이라고 부를 것도 있고, 지금 상황에서도 심각하게 좌절한다거나 비틀어지지 않았어요. 거기에 제가 알려준 대처법이라고 할 것은 이미 생각에 없죠? 그래도 거의 평소와 다름없이 살고있어요. 당신은 그런 것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부러울 정도로 심지가 강한거에요. 저 같이 도피밖에 할 줄 모르는 시체와 달리.]
전화기 너머에서 버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동전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와, 교통카드와 단말기가 접촉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김민혁은 풀썩, 하고 자리에 앉는 소리가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조금만 더 내가 제대로 된 사람이었다면 이런 일 없었을거에요. 아마... 아직 덜 망가졌던 중학교때 서로 만났다면 정말 좋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지금 저는 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어서 당신과 더 가까워지는건 힘들 것 같아요.]
그래서 너를 원망하라는 거냐. 잘못이 있는 건 너가 아니라 네 환경이라는 것을 확실히 말해주면서도? 비겁한 사람. 그렇게 말하면 난 원망하지도 못하잖아.
[아직 듣고있죠? 안 들을 것 같지만 뭐... 1, 2년 후에라도 들으면 다행이니까 계속 말할게요.]
듣고있어. 듣고있다고.
[그리고 안 좋은 일이 겹치는 것 같아서 말하기 곤란한데... 이미 벌어진 일이고 지금 말하지 않으면 쓸모가 없으니까 계속 말할래요. 아, 그 전에. 한 10초 정도 기다릴테니까 그 카드 뜯어줄래요? 가운데 뜯으면 쓸모없어지니까 옆쪽만 살짝 뜯어줘요. 칼집 내었으니까 쉬울거에요.]
뜯을 것도 없었다. 김민혁의 말을 듣느라고 초조해진 손은 이미 안의 내용물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안의 종이를 확인하고도 한참동안 김민혁은 말이 없었다.
[비행기 티켓이에요. 페트로마닐라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이에요.]
페트로... 뭐? 그게 뭐하는 동네야.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곳을...
[페트로마닐라는 캐나다의 수도로... 당신의 가족이 살고있는 곳이에요. 정확한 위치는 책상의 첫번째 서랍에 있는 서류에 적혀있어요.]
그러니까, 김민혁? 너는 날 가족에게 보내겠다는 거야?
[내가 생각하는 최선책이에요. 한국에 남아있으면 당신은 일단 위험해요. 전날에도 보았듯... 몰상식한 쓰레기들이 꽤 있으니까요.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고, 또 굉장히 가까우면서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을 사람이라고 봐요.]
누구 멋대로. 그 빌어먹을 작자들에게 다시 돌아가라고? 메일로 죽인다고까지 말해놓았는데, 부모의 가슴에 비수를 박아넣고 동생에게 욕을 퍼부었는데?
[싫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꼭 해주세요. 당신에게 준 10만원, 그리고 초코바 다섯개와 식권 120장, 며칠간의 고시원시설 이용비... 그걸로 트레이드 할게요. 아니. 트레이드로 끝날 관계로 만들기 싫어도 해주세요. 만일 나를 좋아한다고 했던 그 말이 사실이라면, 꼭 그렇게 해주세요.]
못해먹겠어. 이 전화 계속 듣는것도 그렇고, 너의 그 익숙하지 않은 말투를 듣는 것도, 이상한 제안과 의무만 강요하는 널 모르겠어. 그래서 넌... 뭘 얻는 건데?
[하지 않는다, 는 선택은 불가능할거에요. 저는 그 고시원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고, 비행기는 내일 떠요. 오후 8시 비행기니까 사실상 2일 정도의 시간이 남겠네요. 공항까지 갈 차비 10만원도 책상 첫 번째 서랍에 같이 넣어두었어요. 정리할 시간으로는 좀 빠듯하겠지만... 할 수 있는 최대한 노력했어요. 그걸로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면 난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요.]
김민혁은 작별선언을 하고있었다. 이별도 아니라, 앞으로 볼 방법이 전혀 없는... 기약없는 안녕을 말하고 있었다.
[끝까지 도피한다고 매도해줘요. 빌어먹을 녀석이라고 원망해주면 전 후련할거에요. 제가 할 줄 아는 것은 도피 뿐이고, 또 빌어먹을 정도로 망가진 녀석이니까요.]
아하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이보다 더 꼬일 수 있는 한 달이 있을까. 한 달사이에 가족을 잃었고, 친구를 잃었고, 미래를 잃었고, 꿈을 잃었고, 순결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다. 왜? 어째서? 왜 하필 나인데?
[이 이후로는 푸념이에요. 주변정리하려면 빨리 움직여야 할테니까, 듣지 않아도 상관 없어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면서도 전화기를 떼어놓지 않은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마지막 목소리라고 생각하자 결코 전화를 끊을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봐야 달라지는 건 없는데.
[솔직히... 꿈 같았어요. 뭐 이미 죽은 녀석이기는 해도...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나, 이상할 정도로 짐작이 맞아 떨어지는 것이나, 여러 상황과 조건이 잘 맞는 것은 굉장히 기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의아했어요. 지금까지 이렇게 좋은 일이 없었는데. 그리고 결과적으로 좋은 일은 아닌거죠.
그만... 접근하는게 좋을거에요. 이런 불행덩어리에게는.
아마 저에게 접근하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이 도와주었다면 3일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면서도 '괜찮겠지'하고 덮어놓지 않았을 거에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신도 못 차리는 사람을 옆에서 간호하면서 눈물을 안 흘리지는 않았을거에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좀 더 친절하게 당신에게 대해줬을 거에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작별인사를 이런식으로 하지 않았을거에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좀 더 좋은 해결책을 내놓았을 거에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 어딘가를 놀러가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만해요. 난 당신의 관심따위 바래서는 안되었고, 당신에게 실수가 있다면 내가 앞뒤 보지 않고, 불행덩어리라는 자각도 없이 손을 내민 것을 잡았다는 거에요. 물론 나도 편하지는 않아요. 솔직히 말해 어이가 없어요.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데다가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없고, 뭘 하든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나쁜 결과만 뽑아내요. 난... 그저 당신과 면식이 있어서, 나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래서, 중학교때의 그 활발한 사람으로 남아주었으면 했는데...!]
김민혁은 쥐어짜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잠시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정답은 내가 관여하지 않는 것이었는데, 내 욕심만 채우자고 멋대로 접근해버렸어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여기까지 듣고있다면... 시간 약속 하나만 잡아도 될까요?
만약 10년 뒤 크리스마스에... 저는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라도 서로 살아있다면, 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줄래요? 내가 하는 이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웃을 수 있도록 도와줄래요?
기다릴게요. 이미 죽은 시체에요. 이미 유통기한 지난 시체더미니까 저에게 10년은 정말 빨리 지나갈거에요. 장소는... 그래요. 10년 후까지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김포공항에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김민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할 말은 다 했네요. 전화도 착신거부 설정했으니까 전화도 걸리지 않을거에요. 죽이기로 했던 쓰레기들은 한 팔 힘줄과 한 쪽 다리의 건을 끊은 뒤에 집에 돌려보냈어요. 다 내가 한 일이니까... 당신이 한거라고 해봐야 몇 번 찌른 것 정도고 다 살아있으니까 죄책감 가질필요 없어요.
잘 살아요.]
슬프다는 감정과는 달리 분노라는 감정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올랐다. 그 분노는,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지려하는 김민혁을 아직도 내가 좋아한다는 것에서 오는 자기혐오였다. 이미, 나와는 만날 일 없는 다른 사람일 뿐인데.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더 이상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나에게 접근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이 고양이와도 오늘이면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지하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멀어질테니까.
언덕의 눈은 이미 다 녹아있었다. 젖었던 자국은 그늘에만 희미하게 남아있고, 치워지지 않은 눈은 없었다. 정말로 염화칼슘이 없어서 뿌리지 못했는지 언덕에 쓰고 남은 염화칼슘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마 남아있어도 큰일이었을 것이다. 작은 알갱이라도 남아있으면 넘어질 것이고, 45도에 가까운 경사를 오르다가 넘어졌을 때를 생각하자 정신이 그만 아찔해졌다. 손목골절로 끝나는 건 애교정도겠지.
202호실의 문을 열자 굉장히 답답해졌다. 책상과 의자, 책장 하나가 전부. 그 이외에 있는 것이라고 하면 이불과 배개정도. 책상 밑에서 등에 매는 가방을 하나 꺼내고, 책상 옆에서 들고다니는 가방을 하나 더 꺼냈다. 이걸로 끝. 들고갈 수 있는 물건 중에서 이제 두고가는 물건은 없을 것이다. 이불과 배게는 조금 아깝지만 들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두고가기로 했다. 문을 잠그려다가 문득 두고가야 할 것이 생각나서 다시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지갑 속에서 열쇠를 꺼내 책상 위에 두었다. 이걸로 이제 이곳과도 안녕일 것 같았다.
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해가 뜨기 직전의 하늘을 창을 통해 올려다보았다. 대기는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고, 곧 물러갈 밤이 발악이라도 하듯 마지막 기승을 부리며 온도를 낮추고 있었다. 시간이 멈췄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요하고, 어떤 향도 피우지 않는 대기마저 정체된 것 같아서...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순간 겁이 났다. 이대로 해가 뜨지 않을 것 같아서 무서워졌다. 시계를 보는 것이 겁이 나서 손목을 바라보지 못했다. 만일, 이미 해가 뜰 시간은 지났는데, 하늘 위에 떠있는 것은 새벽의 끝무렵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별빛이라면 영영 해는 뜨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시야 안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정체된 공기가 망막을 자극해 피로하게 만들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중이었다.
한심한 착각은 금새 깨어졌다. 시간감각이 사라진 것 처럼 몽롱한 상태였기에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체감하는 시간은 대략 2분 안팎이었다. 어제는 김민혁의 메시지를 몇십번이고 들으며 울다 지쳐 자버렸다, 그게 대략 오후 7시 근처였을 것이다. 12시간정도 잤으면 많이 잔 것이고, 이미 생활리듬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으므로 피곤하지는 않았다.
시야의 구석부터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행복이라는 것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간이 멈췄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걱정되고 정체된 것 같은 느낌에 암울하기까지 했지만, 결국 해는 떠올랐다. 행복도 이처럼 언제라고는 정해져있지 않지만 명확하게 온다는 보장이 있다면 좌절할 사람 따위 아무도 없을텐데. 태양처럼 뜨겁고 밝은 행복이 절반까지는 못하더라도 지금까지 겪어왔던 아픔을 씻어줄 정도가 된다는 약속이 있다면 자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행복... 했다. 지금 당장 머리가 터져서 죽는다고 해도 신의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김민혁과 만나서 티격태격하고, 신세를 지고, 대화했든 그 기억들이 내가 가진 기억들 중에서 가장 멋졌다. 어떤것도 풍족하지 않았지만, 그래. 그 시간만큼은 한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자유가 있었다. 어떤것도 정해진 것은 없어서, 불안했지만 그 중에서도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다. 비유하자면 여행. 그것도 같은 길을 여러번 다니며 거래를 하는 상인의 것이 아니라, 그저 발 닿는대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여행자의 여행이었다. 목적지도, 가는 방법도, 일행과 동료도 자신이 정 할 수 있는 여행. 아쉬운 점도 있었다. 슬픈일도 있었고, 비참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선택한다고 해도 이 여행길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여행길의 끝자락에 있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쉬고 싶었다. 난생 처음 해본 여행의 피로가 몰려왔고, 일행은 다시 내개 돌아오지 않는다며 여행을 그만두라고 충고하며 떠나갔고, 강도를 만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래도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당연하게 원하는 것으로 끝날태지만, 나는 그 일행과 다시 만나 여행을 계속하고 싶었다. 끝이 없다고 해도, 거기에는 살아있다고 하는 생동감이 있었다.
나는 17년간 죽어있었다. 선택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선택되는 것에 만족할 줄만 알았다. 내가 무언가를 바꾼다거나 무엇을 쟁취할 필요도 없었다. 돈도 있었고, 가질 수 있는 것은 그저 아무런 노력도 없이 가질 수 있었다. 어떤 성취감도 없이, 마치 그 자리에 당연히 있었던 것 처럼. 지금은 그런것보다 오히려 없는데에서 오는 결핍이 차라리 살아있는 느낌이 들게 해주어서 더 좋았다.
알고있다. 끝날때가 되니 아쉬워지는 TV 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다. 시작하기 전에는 애태우다가, 즐겁게 보며 짜증나는 부분에 대해서 욕도 하다가, 끝나고 나면 다른 것보다 더 좋을 것 같은, 그런 간단한 이야기였다.
감상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어젯밤에 계속 울어서 나올 것 같지 않던 눈물을 지우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거의 완전히 밝아진 하늘을 바라보다가 창에서 시선을 돌려 방문을 향했다.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돌렸다.
"어?"
그리고 목소리가 겹쳐졌다.
"쯧. 둘만의 동창회가 되어버렸는데. 셋이 되었으면 했지만."
현선우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기억에 없지만, 중학교때 같은 반이었다고 했다. 덧붙여 김민혁과 굉장히 친한 사이이고, 흥신소를 운영하는 소장이기도 했다. 여기까지만해도 이미 보통의 범주는 아닌데, 학교도 아직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면...
"술 못 마셔?"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현선우는 솔직히 잘 기억나지 않았다. 집에서 침대에 누워있는 상태로 흘끗 본 기억은 있었지만, 말투가 김민혁과 비슷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다지 눈에 띄는 특징은 없었다. 어떻게 확인했냐하면 김민혁이 두고 간 서류와 같은 것을 현선우도 들고있었기 때문에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단 나이제한도 있고, 먹어본 기억이라고 해봐야 부모님 앞에서 몇 잔 정도였다. 가족이 아닌 사람과 마셔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가?"
현선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막 동이 터오기 시작한 시간부터 캔맥주를 내밀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술에 익숙한 것 같았다.
"현선우. 너 김민혁과 친하다고 했지?"
"그렇지. 서로 싫어하기는 하지만."
...... 싫어하는데 친해? 무슨 말장난이야, 그건.
"동족혐오랑 비슷해. 그 녀석도 나도 심상세계가 비슷한가봐."
확실히 닮았다.
당연하지만 이목구비는 확연히 달라서, 현선우는 학교의 두발규정에 맞추기 위해 군대에 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짧게 깎은 머리를 하고있었다. 그걸 가리려고 하는건지 모자도 눌러쓰고 있었다. 눈은 김민혁쪽이 좀 더 가늘었고, 코는 좀 더 오똑했고, 입술은 좀 더 얇았다. 귀는 그럭저럭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분위기랄까, 말투를 빼놓고도 비슷한 점이 많아보였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 같이 털털한 면이라던가, 집착하지 않는 것 같은 행동이라던가, 초점이 애매한 눈동자라던가.
"얼굴에 생각하는게 딱 드러나는데. 너, 김민혁이랑 나랑 비교하고 있었지?"
음. 이런 부분도 비슷했다.
"아니야. 어쨌든 내가 알고싶은건 김민혁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건데. 알아?"
현선우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한 발짝 현실과 떨어져서 자신을 자조하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웃음마저도 서로 닮아있었다. 일란성 쌍둥이라던가 그런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니. 알고있었다면 저쪽의 벤치에 김민혁이 앉아있었겠지."
턱짓으로 반대편 벤치를 가리키던 현선우가 말했다. 그랬다. 우리가 있는 곳은 한겨울의 바람이 쌩쌩 몰아치는데도 바람을 피할 것이 없는 놀이터의 구석이었다. 입깁이 하얗게 흩날렸다.
"흥신소잖아?"
"우리가 알아봐주는건 '존재하는' 정보야. 그 녀석이 서울을 유랑하기 시작했다면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거주지가 없거든. 그러니까 녀석의 소재지는 '존재하지 않는' 정보지."
"뭐?"
"그 녀석... 1년 전에도 그랬으니까. 역마살이 끼었다나, 뭐라나. 처음부터 한 80만원정도 나에게 맡겨놓고 1주일동안 훌쩍 사라졌다가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맡겨놨던 돈 찾으러 왔어.'. 정나미 떨어지는 녀석이지.
어쨌든. 정기적으로 다니는 길도 알 수 없고, 애초에 서울에 있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아. 잠은 어디든 침대나 신문지를 깔 수 있는 곳이면 잘거고, 이번에는 내게 돈을 맡겨두지도 않았으니까 나한테 달라붙어도 별 수 없어."
현선우는 질렸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건 꽤 난감해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듣자하니 고백했다며, 김민혁한테?"
뜬금없이 묻는 소리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런 일이 있던 건 사실이지만 남에게 들켰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끄러웠다.
"뭘 그렇게 당황하냐. 김민혁이 2일 전에 찾아와서 다 말했구만."
"에?"
반사적으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현선우는 2일 전에 김민혁과 만났다고 했다. 그렇다면, 뭔가 단서가 나올지도 몰랐다. 다급한 마음에 맥주를 들이켰다. 솔직히 무슨 맛인지, 쓴지 단지도 모르고 그저 입을 축일 것이 필요해서 마신 것 뿐이었다.
"미안. 잡지 못했어. 그 녀석 혀 하나는 일품이니까 말이지..."
"좀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어?"
내 말에 현선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
김민혁이 빌렸던 아이젠을 돌려준 것은 오후 11시쯤 되어서 동사무소에 심어두었던 사람이 자료를 보내왔던 때였다.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같이 일하던 녀석들은 전부 다 미리 만나기로 한 애인들과 일치감치 놀러갔다. 그래서 혼자 컴퓨터를 달그락거리면서 6명이 할 일을 혼자 하고있었는데...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김민혁이 찾아왔다. 양 손에는 날이 시퍼런 아이젠을 들고있었다. 저게 또 굉장한 물건이라서, 경사 45도 정도의 언덕길을 평지처럼... 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오를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물론 내 것은 아니고, 사무실 공동자산으로 구석에 던져놓았던 것인데 몇시간 전에 김민혁에게 빌려주었다.
"여기. 여권과 여행비자. 그리고 내 캐비넛에 200만원 정도 있을거야. 캐나다행 비행기가 대략 150만원, 그리고 나머지는 보수야. 크리스마스에 캐나다로 떠나는 비행기를 알아봐줘. 비행기 출발 시간은 늦을수록 좋아. 다만 지금부터 시작해서 3시간 이내에 끝내주면 정말 감사하겠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캐비넛 열쇠와 봉투 두 개를 던져놓았다. 하나는 여행비자고, 하나는 주민등록 등본이고, 하나는 여권인데... 주인은 열어보나 마나 양지은의 것이었다.
200만원이라. 적당한 가격이었다. 확실히 150만원이면 캐나다행 비행기를 사고도 5만원에서 6만원 정도의 돈이 남을 것이다. 거기에서 암표를 사니까 약 20만원의 지출이 있다고 치면... 내게 의뢰한 일이니까 개인적인 일로 30만원 정도 집어먹는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겠지. 애초에 나 혼자서도 이 흥신소의 운영은 가능할 것이다. 다만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위해 필요한 팀일 뿐이다. 싫으면 나가라고 하자.
그렇게 마음을 굳히고 아이젠을 받아들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이. 비행기표는 두 개 아니냐?"
그 부분이 이상해서 물어보았다. 양지은과 김민혁이 같이 간다고 하면 분명 두 개의 비행기표가 필요할 것이다. 저 녀석이 아무리 좋은 체력을 갖고있다고 해도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넌다는 재미없는 소리를 지껄이지는 않겠지.
"아니. 하나야."
진짜인가, 이 자식? 러시아의 동부연안에서 헤엄친다고 해도 함경도에서 부산까지의 거리보다 더 멀리 수영해야 할텐데?
"너... 수영 잘하냐?"
진심으로 말했다. 아니면 개인 소유의 경비행기라도 갖고있나?
"무슨 개소리야, 아까부터. 뭘 생각하는 건데?"
김민혁은 그제서야 문고리에서 손을 떼며 내게 돌아섰다.
"그러니까, 양지은이랑 너 둘이 가는 것 아니냐고."
"내가 왜 가?"
김민혁이 당연하다는 듯 물었다.
"당연히 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10평도 안되는 방에 남녀 한쌍이잖아?"
"멋대로 생각하셔."
김민혁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하고 미련없이 돌아섰다. 문득 궁금해졌다. 살짝 저울질을 해보았다. 이 호기심을 채울까, 아니면 30만원을 받고 그냥 호기심을 폐기처분할까.
"190에 해주지. 대신에 무슨 일이 있어서 양지은만 떼놓으려는지 말하고 가."
저 녀석은 굉장히 약아서, 170만원을 곧바로 부르면 150만원까지 지불한다고 할 것이다. 김민혁이 아니라도 비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이라면 처음부터는 높게 부르는 것이 내 스타일이다. 이 화법으로 손해본 일이 있던가?
"150이라면 생각해보지."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녀석, 내 속을 읽고있나?
"얌마. 비행기 표가 150에다가 수수료가 30이야. 내 수당 10만원 바쳐서 묻는 거 아냐. 좀 대답좀 해줘."
수수료는 원래 20이다. 그래도 교통비까지 합하면 올려서 30만원 정도 될테니까... 뭐, 경비라는 것으로. 난 거짓말 안했어.
"뭐, 내쪽도 입이 무거워서 말야. 그리고 넌 항상 정보료는 높게 부르잖아. 흥정해도 손해 안보게. 좀 더 쓰던가, 아니면 가게 두던가."
"쯧. 박정한 자식. 차포 다 떼고 뭐하라고?"
"너 강남에 집이 두 채잖아. 네 명의로 하나, 다른 사람 명의로 하나. 솔직히 200만원은 어린애들 용돈 아냐?"
...... 살짝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팀원들에게도 밝히지 않았던건데, 어째서 알고있는거지? 독심술인가?
"그 정보 어떻게 얻었는지 알려주고, 양지은이랑 무슨 일 있었는지 알려주면 공짜로 해줄게."
어디서 정보가 새고있나? 그건... 꽤 심각한데.
"아, 찍었어. 200 굳었다."
"찍어?"
"응. 너 전에 강남쪽에 분양정보 알아봤잖아.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찍었는데."
오른손으로 눈을 가렸다. 수전노는 아니지만,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지만, 김민혁에게 졌다는 생각이 들어서 굉장히 분해졌다. 이래보여도 산전수전에 시가전까지 다 겪은 몸인데 말야.
"아... 그래. 그래서 양지은이랑은 무슨 일인데?"
턱으로 의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김민혁은 느긋하게 걸어오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가죽으로 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젠장. 이 자식, 어떻게 해서든 200만원 어치 뜯어주겠어...!
"양지은이 나에게 고백했어. 좋아한다고. 여기까지 말했으니까 일 좀 시작하면 어떨까? 3시간까지 얼마 남은 것 같지 않은데."
"고백?"
"응. 고백. 진지하게 해주더라. 솔직히 정신 나갔다고 생각하지만, 장난치지 말라고 했더니 정색하면서 울었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모니터를 턱으로 가리켰다. 어차피 5분 동안 통화로 암표상에게 전화하고, 결과만 기다리면 끝날 일이었다. 내 일은 내가 한다고 말하고 다음을 재촉했다.
"잘됐네. 양지은은 너 좋다잖아. 그런데 왜 쫓아보내려고 안달이야? 이제야 슬슬 잘 풀리는가 싶더니만."
"머리없는 녀석. 양지은이 저렇게 된건 내 탓이잖아. 앞으로 나랑 있으면 더 불행해져."
"머리없는 건 너야. 너 미래를 볼 수 있는거냐? 증거라도 있어?
그리고 말 나온김에 말하자. 그게 네 잘못이냐? 살면서 옷은 필수적이잖아. 의식주에서 '의'를 맨 먼저 쓰는 것은 적어도 다른 나머지의 것들과 비슷하게 중요하니까 앞에 쓰는 거 아냐? 왜 네 탓인데?"
김민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자, 그 문제는 잠시 접어두고. 솔직히 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거나 그런 감정을 전혀 이해 못하겠거든? 뭐가 원인인지는 너무 많아서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게 다냐?"
아주 약간 화가 나 버렸다. 이 녀석, 쓰레기이거나, 진짜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응. 왜? 뭘 생각하는 건데?"
"너, 양지은을 싫어하는 거 아냐?"
내 말에 김민혁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후에도 계속 키득거리면서 왼쪽 뺨을 긁었다.
"야, 싫어하는 인간을 집에까지 들이냐? 하지만 좋아한다는 감정은 이해도 못하고, 솔직히 너나 양지은이나 딱히 느끼는 감정의 차이는 없어."
동성애자는 아닌 것 같으니까 나를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문득 잡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김민혁은 양지은이 불행하게 된 것에 대해 이상할 정도의 책임감을 갖고있다. 굉장히 자책하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그것을 계기로 삼아 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구나. 너 양지은을 좋아하는 거구나."
멍해져서 그렇게 말했다. 김민혁은 미간에 주름을 잡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 뭐 들었냐? 어디 갔다왔어?"
"아니. 들어봐. 너, 양지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이전의 그 일이 네 탓이라고 생각해서."
"응."
"보통은, 그렇지 않거든? 합리화시키는 것이 대부분일거고, 솔직히 지나가는 사람 누구라도 잡고 물어보면 네 탓이라고 할 인간은 없을거다. 뭣하면 양지은 본인에게 직접 물어봐. 네 탓이냐고."
"그래서 그걸 다시 떠올리게 하라고? 미쳤냐?"
"그래. 그런 태도. 그것도 하나의 근거지."
김민혁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는지 숨을 한껏 들이쉬더니 크게 소리를 내며 내뱉었다.
"무슨 소리냐고. 알아듣게 설명해봐."
"자, 그럼 정리해줄게. 너는 쓸데없는 책임을 떠맡으려 하고있고, 그게 양지은을 무의식중에 좋아한다는 근거야.
아아, 잠깐만. 기다려봐. 네가 책임을 지려는 행동은... 그러니까 적어도 양지은이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을 책망하는 것을 막으려는 거지. 알아들어? 너는 양지은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을 참지 못할 정도로 양지은을 좋아하고 있다고."
내 말이 재미있는지, 김민혁은 코웃음을 쳤다.
"처음 가정부터가 이상해. 나도 모르는 내 무의식을 네가 알고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고, 근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잖아. 뇌 까서 보여줄까?
좋아, 좋아. 맞다고 '가정'하자고. 어디까지나 '가정'. 그럼 이제 리턴매치인데. 내가 '만일' 양지은을 좋아한다고 치자. 아니, 사랑한다고 쳐. 그래서? 사랑하는 한쌍이 모였습니다. 그 이후는? 미래가 있냐? 희망은? 꿈은?
그냥, 아무것도 없이 굶어죽길 바라는 바퀴벌레 한 쌍일 뿐이야."
굶어죽는다... 별 같잖은 소리를 하고있어.
"왜 굶어죽어? 너 돈 많잖아? 2백만원 있지 않아?"
"그걸로 언제까지 먹고살건데. 아아, 좋아. 굶어죽지 않는다고 가정하자. 혼인신고도 못하고, 다른 인맥도 없어. 부모? 그거 먹는거냐? 결국 단조로운 일상에 치여서 아무것도 못 하다가 흐지부지 되거나 아르바이트 가능한 나이를 지나서 굶어죽겠지."
"전에 했던 제안은 아직 유효한데."
"됐어. 난 남을 죽이는 것 보다 자신을 죽이는데에 특화되어서 말야."
흥신소 하면서 죽이는 일은 없는데 말이지. 하여튼 대중메체가 직업에 대한 선입견을 너무 많이 심어놨다니까. 그래도 김민혁을 말로 이긴다는 것 자체가 무모했다. 자신을 책하면서 조용히 찌그러지기로 했다.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미래가 없는 사람끼리 모인다고 뭐가 되지 않아. 정 그렇게 양지은이 걱정이면 내일까지 돈 많고 눈 낮은...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그런 남자나 하나 소개시켜주던가."
김민혁을 돌려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김민혁은 양지은을 책임질 수 없고, 결국 바다에 철조각 둘이 뭉쳐봐야 더 깊이 가라앉을 뿐이라는 것이다.
생각했다. 신이 있다면, 만일 그 빌어먹을 자식이 있다면, 아마 지독할 정도로 고독해서 다른 사람의 연애사업이 잘되는 것을 눈 뜨고 보지 못하는 인격파탄자일거라고.
◆
"난 도저히 반론을 할 수가 없더라. 냉정하게 말하자면 김민혁은 너를 장기적으로 도와줄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지 않아. 그리고 돈이 없으면 사람은 죽어. 그건 진리야."
현선우는 다 먹은 맥주캔을 이상하게 던져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나도 어느새인가 반 넘게 먹어서 찰랑거리는 맥주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넌 설득할 수 있겠어?"
"응."
즉답했다. 나라고 멍하니 18시간동안 울어제낀 것은 아니었다. 만약 김민혁을 만나면 어떤 말로 돌려놓을까, 그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으니까. 만약 그래도 안된다고 하면 어떻게든 김민혁 옆에 달라붙을 작정이었다.
지금까지처럼 그저 흘려보내는, 무력한 자신으로 남고싶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일상을 잃을때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좋아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보냐. 오기로라도, 때려 눕혀서라도 그 녀석을 굴복시킬 생각이었다.
"그래. 그러면 할 말 없지. 그런데 오늘 출발해야 하지 않냐?"
"......"
여기까지 말했지만 그 부분에 대한 대책은 전무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반 이상은 운이다.
현선우는 한숨을 푹 쉬면서 옆 머리를 긁적였다.
"포기할 생각은?"
"일단, 오늘까지는 찾아볼거야."
현선우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를?"
그건 당연히... 어디지?
"설마 서울 전체를 다 뒤져보려고? 지금이 8시 근처니까... 대략 10시간동안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동네냐, 서울이?"
인정해야 했다. 나는 방금 전까지 굉장히 대책없이 찾으려 하고있었다.
"자. 그 녀석이 일하던 곳이야. 야간, 주간, 오전, 오후 다 체크해뒀으니까 참고해."
현선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하게 접은 A4용지를 내게 주었다.
"그리고... 그 녀석 만나서 설득하면 얼굴에 한 대만 내 대신 때려줘. 보수는 그걸로 할게. 혹시라도 녀석이 찾아오면 너에게 전화할게."
이렇게 챙겨주는 점도 굉장히 닮아있었다. 그래도 약간 다른 점이라고 하면, 현선우쪽이 아직 포기한 것이 적은 건지, 김민혁보다 눈동자가 더 또렷해보였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둘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같은 원석을 쪼개서 가공한 다른 보석들과 비슷해보였다. 다른 것은 광채와 같이 외면 뿐이고, 강도나 굳기, 색은 전혀 달라보이지 않았다.
다만 김민혁만큼 호감을 느껴지지는 않았다. 현선우쪽은 본인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지만, 뭔가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뭐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싫은 것은 아니지만, 쌍둥이라고 할 정도로 성격이 비슷한 사람인데 호감은 어느정도 분간할 수 있게 차이가 났다.
"저, 현선우."
"응?"
"고마워. 잊지 않을게."
현선우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손을 휘휘 저으며 걸어갔다.
어쨌든 남은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현선우가 체크해준 곳은 굉장히 많으면서도 서로 꽤 떨어져 있었다. 지금부터 부지런히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일단은 '오후'라고 되어있는 곳은 오후에나 나와있을테니, 지금은 '오전'이라고 되어있는 곳을 집중적으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리고
[야옹]
고양이가 울었다.
나에게 결정을 재촉하는 것 같은, 그런 알 수 없는 눈이었다. 결정이라니 무슨 결정일까. 나는 오늘 안에 현선우를 찾을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이 가야했다. 그것으로 더 이상 결정하거나 혼란스러워 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고양이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엄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로부터 약 10시간이 지나고, 내 자신의 무력감을 통절히 느꼈다.
김민혁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현선우가 준 쪽지에 적힌 곳을 대부분 돌아보았지만 전혀 찾을수가 없었다. 일단 지도에 나온 곳을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까지 주파하는 식으로 시간을 단축시켜 보았는데, 공사장을 제외한 표시된 모든 곳을 돌아보았지만 지금 일하고 있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최근에 일한 곳이 세 달 전이었다. 현선우가 나에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고의적으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김민혁쪽이 현선우를 속일 정도로 치밀하게 자신이 일하는 곳을 알리지 않은 것 뿐이다.
가방을 안고 대로변에 섰다. 이제 시간은 다 끝났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이제부터라도 할 수 있는 일은, 김민혁이 준 비행기표로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뿐이었다.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다시 내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서 결정을 내리기를 강요하며, 나를 엄한 눈으로 보고있었다. 지금까지 결정하지 않은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듯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내게는 더 이상 결정이고 뭐고, 남은건 없었다. 더 이상 여기에 있어봐야 김민혁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고, 만일 있다고 해도 만날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만나는 것이 내일이 될지, 다음달이 될지, 몇 년 후가 될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편안하게 살고싶다는 생각도 한 몫 했다. 생기 넘치고 자극적인 것은 좋지만, 아무래도 오래 되어버리면 질리는데다가 피곤하기 마련이다. 아마, 이 정도가 딱 좋은 선이라고 생각했다.
택시가 오기에 손을 흔들었다. 고양이는 바지의 끝을 물고 당기기 시작했지만, 그래봤자 그다지 아프거나 행동에 제약이 가는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귀여운 정도일까. 무엇을 말하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지만, 이 고양이와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약간 슬퍼져서 고양이를 안아들고 코를 맞대었다. 고양이는 고개를 숙인 채로 머뭇거리면서도 내 코를 한 번 핥아주었다.
택시를 앞자리에서 타고 눈을 감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나와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택시를 타기가 정말 힘들 것 같았다.
"어디로 가십니까?"
"김포공항이요. 얼마쯤 걸려요?"
"김포공항이라... 넉넉잡고 한 시간이면 갑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더 없이 인자해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내가 살면서 택시를 탄 것은 그리 많지 않은데, 단 한 번도 인상이 나쁘거나 실망해서 화가 났던 적은 없었다. 솔직히 밤에 택시를 타면 술 취한 사람이라거나 위험한 사람들도 탈텐데, 어지간히 신경이 굵어야 할 수 있는건지 다들 털털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대체 어떻게 가능한걸까.
"힘든 일 있습니까?"
물론. 대체가 한 시간 이내에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녀석이 아니었다. 어떻게 요약해야 알아들을 수 있을까.
문득,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가 떠올랐다.
"지금 가족이 있는 캐나다에 가려고 하는데... 모르겠어요. 가는게 맞는건지."
그 말을 듣고 기사님은 털털하게 웃었다. 왼쪽 눈을 힐끗 떠서 바라보니 이미 답이 나와있다는 것 처럼 달관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내 아버지가 독촉을 받기 전에 지었던 미소와 굉장히 비슷해 보였다.
"아니, 이미 답이 나와있잖아요."
뭐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하냐는 눈치였다.
"네?"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기사님은 다시 인자한 웃음을 지었다.
"가족이라... 여기저기서 가족은 모여있어야 한다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해요. 결국 만날 사람들이잖아요? 뭐, 곧바로 어디로 간다거나 하는건 아니죠? 연락만 되고, 만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가족은 어떻게든 다시 뭉쳐요.
평생 안보고 살건 아니죠?"
"물론 그건 아니죠. 하지만... 끝까지 만나겠다는 생각이 없을수도 있잖아요?"
"아이쿠. 그렇구나. 하지만 연락은 계속 하고 있으면 언젠가 기회가 있지 않겠어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요."
기사님은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아직 선택할 여지는 있었다. 남느냐, 가느냐. 가족을 만날 기회는 언젠가 또 있을 수 있었다. 그게 과연 오늘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내게 남은건 무엇일까. 그리고 이 정도가 딱 좋은 선이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극도 너무 심하면 지쳐버린다. 과연 난 계속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내 상황에서 더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두 분... 서로 좋아하시는 거죠?"
원미영이 말했다. 잘 자고 일어나서 웃는 얼굴로 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컴퓨터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구동중인 프로그램은 워드 프로세서로, 유일하다면 유일한 내 취미였다. 하루 종일 하고있어도 돈이 들지않는 것인데다가 나름 건전하고 생산적인 행동이었다. 단지 걱정이라면 몇 달째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점이었다.
"여자의 감이죠."
"킥킥. 그러고보면 그 감이라는게 참 무서워? 양지은이 감이 좀 나빴으면 넌 여기 없을텐데 말이지."
"아니에요?"
"응. 크게 잘못짚었어."
아직 목의 염증이 가라앉지 않은 건지 원미영의 목소리는 굉장히 그렁그렁했다. 아파서 하는 헛소리 치고는 좀 심각하지 않나.
"그럼 왜 도와주셨죠?"
"글쎄. 왜일까. 전날에 마셨던 브랜디 세 잔에 취해서? 그날의 날씨가 너무 맑아서?
그냥, 난 의사소통할 상대가 필요했어. 누구라도 상관 없었고. 찾고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를 어느정도 알 것 같은 사람이 있어서 도와준 것 뿐이야. 설령 너라고 해도 변화는 없었겠지."
"정말이에요?"
"응. 내가 세상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세 가지 있어.
첫번째는 대한민국 학부모들이 자신의 자식이 대학을 못 간다는 것을 믿지 않아서 자식을 닥달하는 것.
두번째는 애 한 번 가져보지 않은 여자가 사람이 애 낳으면 좋을 것 같다고 푸념하는 것.
세번째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거.
난 누가 나 좋아해준 적도 없는 것 같고, 내가 누구 좋아해본 적도 없는 것 같거든."
원미영은 나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여자친구 있지 않았어요?"
"성격도 얼굴도 밥맛이어서. 여자들은 나 피하기 바빴을걸."
별 감흥은 없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있으려면 있던가, 없으려면 없던가.
뭐, 정직히 말하자면 성격도, 돈도, 붙임성도 없어서 남자건 여자건 거의 내 근처에 없었지만.
"정말 아무 느낌 없어요?"
"있을리가."
"남자 맞아요?"
아니. 왜 거기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건 본능 비슷한거고. 감정하고 뭔 상관이야."
"계기는 그걸로 됐잖아요."
"본능쪽이라면 여기 둘 필요없이 5만원이면 만사 OK잖아."
원미영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며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시작한건 원미영이고, 솔직히 사실이잖아. 거기까지 쓸 돈은 없었지만.
"변태."
"시끄러. 네가 시작했잖아. 거기에까지 쓸 정도로 돈도 없었고."
어이. 진짜라니까. 왜 그런눈으로 보는건데.
"그럼 됐잖아요."
"아, 그래서 네가 말하는게 '사랑 = 5만원짜리 싸구려 술집 작부'냐?"
원미영은 미간에 더 주름을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같이 있으면 좋고..."
"그런 사람이면 수십명도 더 많이 있잖아."
원미영은 도저히 설명을 못하겠는지 조용해졌다.
"에이. 사람 감정이라는게 쉽게 설명이 되면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그리고 설명할 필요가 있나요?"
"난 전혀 모르겠다니까. 초심자도 알아듣게 설명 좀 해줘."
귀찮아져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다른 남자친구들이랑 여자친구들이랑 봤을때 느낌이 같아요?"
약간 뜨끔했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다만, 양지은을 보았을 때 아주 약간, 미묘한 긴장감이 생기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싫다, 좋다, 그런거라면 사람마다 다르지. 내 주변에 좋아하는 인간만 있는것도 아니고."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했다. 원미영은 뜨끔한 것을 눈치채서 노려보는지, 등판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집쟁이."
원미영은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그래. 자라. 가짜약이든 뭐든간에 효과는 만점인 것 같았다.
"계산."
서서 졸고있다가 부르는 소리에 꿈에서 깨었다. 크리스 마스가 지난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 꿈이다. 고양이도 끌고갔는지, 주변에서 검은 고양이는 본 적이 없었다.
별 부질없는 짓을. 이미 한국에도 없는 사람을 찾아서 뭐에 쓰자는 건지.
◇
※ 안녕하세요. 거의 반년만에 찾아뵙는 투명인간입니다.
다음번에는 엔딩과 에필로그 2편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