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하다. 비참할 정도로 꿈도 희망도 무엇도 없는 잔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지은아..."
왜 가슴 한편이 아팠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내가 과거에 있었던 안락한 생활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아련하게 추억으로만 남아서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을 그것. 그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가질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현실을 직시하기 싫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아주 약간의 적개심과 엄청난 분노가 밀려오는 것이다.
"어제 전화를 받았던 사람은 김민혁이라고 해요. 저와 같은 중학교를 나온 동창이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민혁도 신림동에 살고있어요. 그리고 약간 도움을 받았습니다."
태연하게 피자를 잘라 접시에 놓으면서 말했다. 익숙해져야 한다. 앞으로 많이 접할 것이다. TV라던가, 인터넷이라거나, 사람들간의 소문이라거나. 누군가가 대학에 들어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결혼을 했다, 연애를 한다, 애를 가졌다. 이제부터는 좀 태연해지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지은아... 너..."
그리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내가 거북하고 껄끄럽다고 해서 알던 사람을 만나지 않기는 싫었다. 다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다가, 내 주변이 정리되고, 조금만 더 내가 여유를 갖게되면.
"죄송해요, 선생님.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나봐요. 길거리에 교복 입은 사람들을 봐도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아요. 여유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어서 허세를 부리는게 고작이에요."
정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죽고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부탁드릴게요. 저는 지금 현재를 보는 것 만으로도 버거워요. 과거는 되도록 보고싶지 않아요. 죽어버릴 것 같거든요."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물론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나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저... 지은아. 경찰에 가보는 건..."
"하려고 했지만... 경찰은 '피해를 받았다'는 전제로 수사를 진행하잖아요. 그리고 빚쟁이들은 제가 돈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다면 최소한의 원금만이라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쓰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니?"
"팔리겠죠. 부모도 버렸고, 가진것도, 빽도 없지만 몸은 있잖아요. 제가 입을 '최초의' 피해니까 경찰도 알 수 없겠죠. 기껏해야 실종정도?"
솔직히 놀랐다. 내가 이 정도로 냉정하게 못박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과, 냉정하게 직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은아... 그래도..."
울 것 같았다. 울 것 같아서 피자를 입에 넣었다. 어릴적부터의 습관대로.
"미안하다. 선생님이 좀 더 생각해야 했는데..."
"그건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오히려 저를 생각해주셨다는 것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시기가 나빴던거죠. 조금만 더 안정되면 되었을 것 같은데요. 죄송해요. 저도 제가 이렇게 여유가 없는지 처음 알았어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직 단념하지 못했는지 피자가 놓인 접시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뭔가... 필요한 건 없니?"
"지금 상태로는 딱히 없어요.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일자리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선생님이 아실리는 없다. 만일 알고있다면 내가 일자리가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알려주셨겠지.
죄송해요, 선생님. 아직 인생이 바뀌었다고 현실을 직시하기에는 제거 너무 약해요. 너무 빨리 바뀐 일상에 적응하지도 못했고요. 만일, 먼 훗날에 제가 여유롭게 웃으며 살아가는 그 날에... 제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웃는 얼굴로 인사드릴게요.
Day 6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시간은 이미 늦을대로 늦어버렸지만, 역시 전화가 오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거 누가 억지로 막고있다고 보지 않다면 억울할 정도로 일거리가 없다. 단순계산으로 해도 대략 100군데 이상에 연락처를 넣었다. 그런데 하나도 없었다. 애연가였다면 담배를 피우겠고, 애주가라면 술을 마시겠지만 담배는 일단 싫어하고, 술은 마셔본적이 없는데다가 구하기 힘들어서 한 적이 없었다.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에 들어가봐야 이미 가시방석이었다. 그런데 이 고양이씨는 매일 밤마다 내가 자면 어딜 가는걸까... 싶어서 벤치에 가만히 있어보았다. 맨날 보면 털도 반지르르하니까, 어디 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냥 두면 자기가 알아서 가겠지.
그리고 벤치에 찌그러져 앉아서 어제 전화했던 사람들에게 쭉 전화를 하고있는데...
[야옹]
글러먹었다. 이 고양이는 날 자기 집으로 생각하는 건지 무릎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가끔씩 하품을 하며 기분좋게 자기 시작했다.
집에 가봐야 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냥 자는 것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냥 멍하니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해도 얼어죽기 직전까지는 여기에 있고싶었다. 아직 전화할 사람도 많고.
그러던 중에 손이 얼어서 다른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리고 이 사람은 취소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받아들어주신다. 푹 잠긴 목소리로 보아 분명히 자고있던 것 같았다. 자고있다가 진동에 놀라서 전화기를 여는 모습이 왠지 생생하게 그려졌다.
"아... 그게..."
김민혁이었다. 딱히 부를 일이라거나 할 말은 없는데.
[무슨 일 있어?]
일은 있다. 좀 크다. 다음달 생활비가 없다. 그런데 딱히 새로울 것은 없지 않나.
"아니... 별로."
적당히 사과하고 끊어야겠다. 일하고 있을 사람에게 미안해지려고 했다.
[그래? 근데 어째 목소리가 우는 것 같다?]
"안 울어. 추워서 그래."
전혀 신빙성 없게도,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추워서 그런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냐? 일자리는?]
"아직."
생각하니까 한숨이 나왔다. 며칠째 발로 뛰었는데 쓰겠다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김민혁은 나를 대신해서 한숨을 쉬려는 것인지 한 1분 정도 말이 없었다.
[쯧. 밥은?]
...... 그러고보면, 밥을 먹은지 꽤 된 것 같았다. 오늘은 특히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아예 먹지를 않았다. 다이어트라던가 할 생각이 아니라,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그래도 뭔가 먹을 생각을 하자 식욕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밀려왔다. 무릎에서 자다가 등을 긁고있는 고양이가 맛있게 보일 정도로.
[비슷하네. 나도 하루에 한 끼 정도니까.]
그런데 나만 그런것은 또 아닌 모양이다.
[한 5분 정도만 지나면 오늘 일 끝나는데. 같이 먹을래?]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고양이를 먹으면 그건 그것대로 큰 일이고, 사람은 보통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니까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아,.."
응, 이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잘 생각해보면 이거...
나이 차이 없는데다가 어쨌든 같이 밥먹자고 한다. 최근에 기억난 것이 한 주도 안 되었다는 것만 치워버리면 그리 모르는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동병상련의 처지니까 정말 잘 아는 사이일지도 몰랐다.
이거... 이거...
[밥 안 먹었다며? 아니면 같이 먹을사람 있어?]
"아, 아니... 그건..."
그건 아닌데... 그, 뭐랄까. 생전 처음 해보는 거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럼 됐고. 혼자서 쓸쓸하게 먹을테니까 안 체하게 기도나 해줘. 무신론자면 그냥 빌어주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삐진거다. 이거 진짜로 삐졌다.
"아니, 그러니까..."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끊어버렸다.
[야옹]
고양이는 언제나 그렇듯 울어주신다. 다시 전화하려 했지만 바쁜지 받지 않았다.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먹는 이야기를 하고 보니까 굉장히 배가 고파졌다. 정말 간단하게 라면만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배고픈건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편의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편의점을 찾는다고 해도 집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일단 집은 산 비탈쪽이었으니까 그 쪽을 향해서 걷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너무 과민반응이었다. 김민혁은 나를 어떻게 볼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서 김칫국만 마시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삽질도 보통 삽질이 아니라 갯벌에서 손으로 삽질하는 것 같이 의미없는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변명이라고 하면 좀 많이 신빙성이 없는데다가 비참해지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자친구라고는 한 번도 없었고 대부분이 외톨이였다. 그래서인지 아주 작은 호의에도 이렇게 반응하는 것일지 몰랐다.
그리고 이 신림이라는 동네는 얼마나 작은 건지.
"나랑 먹기 싫다는거 아니었어?
모자를 깊게 눌러쓴 김민혁이 말했다. 겉옷에서 담배냄새가 조금 심하게 났고, 코가 아픈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온 곳이 피시방인 것으로 보아, 아르바이트가 끝난 직후인 것 같았다.
"아니... 별로..."
가로등이 어두운 것은 지금까지도 감사하고 있다. 자신의 귀가 화끈거린다고 느낄 정도면 얼마나 빨갛게 되어있는 것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뭐하자는 건지."
김민혁은 잠시 투덜거리더니 내게 우표크기의 종이조각을 한 뭉치 내밀었다.
"뭐야?"
일단 주는 거니까 받기는 했는데...
"식권. 네 집에서 내려오다보면 가장 첫번째에 있는 식당이야. 가기 귀찮아서 처박아두고 있었던건데."
음. 그래서 발급일이 여섯 달 전인거냐.
"가자. 맛 없지만 싼 집아라면 하나 알고있어."
폐점 직전의 식당에 들어가서 식권을 내자 접시를 주었다. 자신이 먹는 만큼 덜어서 먹는 형식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눈으로 먹을 것을 본 데다가 냄새까지 맡으니까 더는 못 참을 것 같았다. 폐점 직전이지만 사람이 꽤 있는 곳이어서인지 꼴사나운 짓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 전에는 ...를 ...에 먹더니."
솔직히 말해서 김민혁이 눈 앞에 있던 것도 알지 못했다.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음식이 접시인지, 접시가 음식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많이 덜어놓은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방금 김민혁의 말에 의식이 돌아온 것 같았다.
사람은 먹을 것을 못 먹으면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 입 안의 음식을 간신히 넘기고 김민혁을 바라보았다. 김민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정말 측은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내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정신이 들어?"
김민혁의 눈에서 어렴풋이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감이지만, 이 사람은 분명히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응."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쪽팔린 짓을 해버렸다. 몇 달 만에 음식 보는 거지도 아니고...
"...... 됐어. 다 먹고 나가자."
김민혁은 뭔가 말하려다가 내 뒤쪽을 바라보고 말을 바꿨다. 뒤를 돌아보자 셔터를 내리려고 고정핀을 빼고 있었다. 더 있으면 아무래도 민폐겠지.
"자자. 가만히 있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상냥했고, 짜증내는 알굴이나 귀찮다는 얼굴이 아니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신기하게도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쪽도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뭔가 씁쓸하네."
김민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왼손으로 하는 젓가락질이 굉장히 능숙해보였다.
"내가?"
음... 뭐, 보통이라면 굉장히 귀찮겠지만. 씁쓸할 정도로 귀찮을까?
"아니아니. 왜 당신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건지 궁금해져서."
"......"
갑자기 뭔가가 울컥 솟아오르려 했다. 갑자기 일상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중학교때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변한 것 때문이기도 했다.
"네 사정은 어느정도 알고있어."
눈물이 나오려고 하다가 황당함에 들어갔다. 이 사람, 내 일을 알고있어...?
"그건 뭐... 천천히 설명해줄거고.
나 같이 사람같이 않은 녀석이 이러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너 처럼 바른 사람이 여기에 있으면 뭔가 위화감이 있어. 궁금하다는 것은 그거야."
김민혁은 거기까지 말하고 턱으로 내 접시를 가리켰다.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들어. 애초에 이 시기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100% 운이라고 봐도 좋아. 나도 그랬고.
나는 신림역에서 여기 근처에다가 연락처를 그야말로 뿌리고 다녔어. 인터넷에 있는 아르바이트도 빠짐없이 체크하고. 얼마나 걸린지는 전에 알려줬던 것 같고.
됐어. 오늘 요점은 이게..."
김민혁은 말을 멈췄다. 아마 2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릇의 절반 이상을 먹어치운 내 먹성에 놀란 듯 했다.
"중학교때는 햄버거를 한 입에 먹었었지..."
김민혁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기억도 안 나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일단 먹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폐점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어딘가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을 구하려 했다. 그리고 커피 한 잔에 1시간의 임금이라는 가격에 좌절했다. 최소임금은 3800원인데, 커피 한 잔에 4천원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물론 어디어도 상관 없었지만, 문제는 지금 시간이 11시 가까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24시간 커피숍은 대부분 저 정도의 가격이었다.
김민혁은 주저앉아서 한숨을 푹 쉬더니 마지막 보루라면서 약 10분 정도를 걸었다. 그리고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애초에 왜 먹는거야?"
막상 자리에 앉으니 그런 의문이 들었다.
"뭐... 약간의 노하우라고 하면 믿을래?"
"노하우?"
"응. 근거는 없지만 대부분 먹을 것을 앞에 두면 경계가 약간 낮아지는 것 같더라고. 일반화의 오류라고 해도 할 말 없는데... 내가 살 테니까. 먹기 싫으면 그냥 두기만 해도 돼."
...... 정직하게 말하면 아직 더 먹을 수 있는데.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랑 어울리는게 그리 좋지는 않지?"
그거 또 미묘한 문제였다. 며칠간 만나기는 했지만 오늘까지는 그리 의식하지는 않은데다가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내가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김민혁은 손가락을 튕겨 내 주의를 끌었다.
"자자, 싫다고 말해도 뭐라 안할거고,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이 서로한테 좋다고 보는데."
"싫지는... 않은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안하다는 느낌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이상하게 이성으로 의식되어서 굉장히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래? 그거 또 의외인데. 매번 내가 불러내고 있으니까 싫은 줄 알았지."
거기까지 말하고 김민혁은 조용히 일어나서 햄버거 두 개와 콜라 두 개를 쟁반에 담아왔다.
김민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고, 왜 나에게 잘 해주는지 잘 모르겠다. 뭐라뭐라 이야기한 것 같지만, 글쎄. 그런 추상적인 이야기는 머릿속에 잘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단지 그런 이유라고 하면 딱히 나에게만 이렇게 잘 해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하나 충고할 것이 있어서 불렀는데."
"충고?"
김민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이 예리한 눈빛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 비춰서 하는 말인데, 한 달 전의 자신을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들어?"
한달 전. 그러니까 비록 지금은 나를 버렸다고 하더라도 가족이 있고, 동생과 티격태격거리면서 학교에 잘 다니던 그 때를 생각하라는 것 같았다.
명치보다 아주 약간 위, 하지만 심장보다 아주 약간 낮은 위치의 그 부분에 뭔가가 꽉 들어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쉬는 것이 아주 약간 갑갑해지고, 심장이 조금 더 강하게 뛰는 것 같았다.
이것은 몸의 변화일 뿐이고 마음 상태를 말하라면
"죽고싶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김민혁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럼 선생님을 만나고 온 이후에 느낌은 어때?"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내가 그렇게나 여유가 없나 싶었다. 결국 여기에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 처럼 말하고 있는 것도 다 허세같이 느껴져서...
"....... 오케. 거기까지."
김민혁이 콜라를 마시다가 말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나도 모르는 새에 울고있던 것 같았다.
"그게 보통이야. 나는 지금도 그래. 솔직히 말해서 너를 만나는 것도 꽤 거부감이 있어."
"난...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김민혁을 만나는 데에는 그리 거부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솔직히 중학교때의 김민혁과 지금의 김민혁이 동일시되는 부분이라고 하면...
"그런가? 그거 부럽네."
저 말투.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처럼 굉장히 자신을 살피지 않는 것 같은 말투. 그것이 전부였다.
머리는 멋대로 자란 더벅머리에 이목구비는 이미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어렴풋이 안개와 같은 형상으로 남아있을 뿐. 뇌리속에 남이있는 것은 저 말투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에 대한 충고야.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 그리고 믿든지 말든지 그건 네 자유야."
무의식중에 햄버거를 먹고있었다. 절반 이상. 김민혁은 포장도 뜯지 않고 있었다.
"먼저... 그 증상을 어떻게 할 필요는 분명히 있어.
일단 당신이 알고있는 사람들과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럴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확률이 적어. 그 때를 대비해서, 되도록 엉겨붙어서 잊지 않게 하라는 소리야."
"설마... 그래서 너 교회를..."
애초에 김민혁은 방에 성경책이라던가 전혀 들고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거기에 어디까지나 감이지만 전혀 종교를 갖고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응. 아는 녀석들이 대부분 교회에 몰리더라고.
여담이지만, 난 종교같은게 정말 싫어. 믿어도 변하는 것이 없거든. 기도해도 솔직히 시간낭비고. 뭘 하든 되는 일이 없어서 말이지."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고 잔뜩 인상을 썼다. 과거에 꼬였던 일을 회상한 듯 했다. 그 사이 고양이는 어디에서 들어왔는지 내 무릎에 앉아서 기분좋게 하품을 하고 곧바로 엎어졌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나를 집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민혁이 눈을 떴을 때 고양이는 꼬리만 살랑거리고 있었다.
"뭐... 어쨌든. 그런데... 그 고양이는 키우는거야?"
"아... 아니."
굳이 말한다면 내가 키워진다는 느낌일까. 전혀 고양이 같지 않은 고양이고. 김민혁은 고양이가 왠지 탐탁지 않은 듯이 탁자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던 꼬리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햄버거를 다 먹어버렸다. 이 집의 햄버거는 의외로 양이 적은 모양이다.
"음. 거기까지 말했었지.
자, 엉겨붙어야 하는 이유는 잘 접수되었을 거라고 믿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잖아. 그 인간들 보면 죽고싶어져. 그렇지?"
"그렇지."
그 말 만으로도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내가 궁극적으로 알려주고 싶은 것은 그에 대한 대처법이야.
자 그럼 질문-. 당신은... 한 달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같은 사람'이라고 보여져?"
김민혁은 엷게 웃고있었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탐정이 연상될 정도로 은근한 미소였다.
"같은 사람이잖아."
내가 있는 위치만 바뀐거고, 그 외에는 동일하다고 보여졌기에 그렇게 말했다.
"틀려. 다른 사람이야."
"뭐?"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김민혁은 예상대로의 반응이 즐거운지 웃고있었다. 이거 의외로 기분 나쁘다.
"중세 소피스트들의 사상이야. 같은 자리에 붙어있는 나무라고 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다른' 나무가 된다는.
쉽게 말하면 그거지. 1초전의 너와 1초 후의 너가 같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같은 사람이잖아."
"아니지, 그건. 세포의 호흡수, 심장의 총 박동수, 뇌세포의 변화, 뭐 그 외 기타등등. 너무 많이 바뀌는데?
제 멋대로의 괴변이라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데... 그거 논파하지 않는 편이 낫더라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괴로울 것도 없어.
그러니까 요약정리하면, '한 달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는 거지."
뭔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가 무식한건지 윤리와 사상을 공부하지 않아서인지 논파하기가 힘들었다. 영혼같이 추상적인 개념은 설명이 불가능하니까 논외로 치고, 그렇게 되면 내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하기가 힘들었다.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김민혁이 박수를 쳐서 주의를 끌었다.
"자자, 그거 논파할 생각을 하지 말라니까. 그냥 편한대로 받아들이자고. 지금 중요한 것은 이익의 여부지, 그 사상의 정당성이 아니잖아?"
잠깐, 그러면...
"저, 김민혁."
"응?"
"그러면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김민혁은 그 한 마디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우고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에이. 애초에 난 그런거 필요없었어."
"방금도 내가 거북하다고 했잖아."
"그건 별개. 그래서 내가 너한테 조금이라도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았냐?"
음... 그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 담임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줘?"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 눈은 한없이 공허하고, 굉장히 고독해보였다. 나는 그 눈을 마주보고 입을 열 자신이 없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작년에 이미 죽었어."
김민혁의 그런 말을 듣고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주문도 더 하지 않으면서 죽치고 있는다고 점원들이 의외로 귀찮게 했다. 얼핏 보기에는 청소를 하는 것 같지만, 뒤쪽의 의자를 소리나게 올리고, 누가 보아도 고의적일 정도로 집요하게 테이블 주변을 쓸어내었다. 말없는 위협이 있는 것 같아서 곧 일어났다. 김민혁도 햄버거를 더 주문하려다가 지갑이 굉장히 가벼워져서 그만두기로 한 것 같았다.
고양이는 꼬리를 휘적거리면서 집을 향해 걸어갔다. 굉장히 익숙해보였고, 나와는 달리 여유있게 하품도 느긋하게 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김민혁의 말을 듣고 나니 어느정도는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1주일 전에 비하면 엄청날 정도로 잘 참고 있었다.
다른 사람. 지금의 나와 1초 전의 내가 다른 사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해답 같지 않은 현실도피인데, 지금은 그 생각이 굉장히 안락하게 느껴졌다. 의외로 난 단순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자면서도 울 정도로 심각한 고민거리였는데, 김민혁의 그 한마디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누그러졌다.
그런데 그 말을 해준 김민혁은 자신은 1년 전에 죽었다고 했다. 이미 죽었다. 어떤 의미가 함축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움직이니까 진짜로 죽었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죽었다. 사망했다. 그것도 1 년 전에. 몸이 죽은것이 아니라면... 마음이 죽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침착하고 집착없이 털털했다. 자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이것이 정상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못 가진 것을 동경하고 또 원한다고 알고있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김민혁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치... 모든 것을 가진 억만장자처럼.
중학교때도 지금도 그다지 인상이 남는 사람은 아니었다. 1년 동안 몇 번이나 말했더라. 아마 얼굴도 잊어버릴 정도니까, 아마 눈을 마주친 적도 적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내가 김민혁을 기억하는 이유는 최근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의 이유가 뭐 있을까. 특징이라고 해봐야 저 초탈한 것 같은 태도가 전부인데.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나에게 잘 해주었기 때문인 것인지, 그 공허해보이는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13만원으로 고시원을 잡은지 2주일째.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Front part. -추락지점- End.
"지은아..."
왜 가슴 한편이 아팠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내가 과거에 있었던 안락한 생활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아련하게 추억으로만 남아서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을 그것. 그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가질 수 없다는 안타까움과 현실을 직시하기 싫다는 강박관념, 그리고 아주 약간의 적개심과 엄청난 분노가 밀려오는 것이다.
"어제 전화를 받았던 사람은 김민혁이라고 해요. 저와 같은 중학교를 나온 동창이고,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김민혁도 신림동에 살고있어요. 그리고 약간 도움을 받았습니다."
태연하게 피자를 잘라 접시에 놓으면서 말했다. 익숙해져야 한다. 앞으로 많이 접할 것이다. TV라던가, 인터넷이라거나, 사람들간의 소문이라거나. 누군가가 대학에 들어갔다,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결혼을 했다, 연애를 한다, 애를 가졌다. 이제부터는 좀 태연해지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지은아... 너..."
그리고 솔직해지기로 했다. 내가 거북하고 껄끄럽다고 해서 알던 사람을 만나지 않기는 싫었다. 다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있다가, 내 주변이 정리되고, 조금만 더 내가 여유를 갖게되면.
"죄송해요, 선생님. 아직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나봐요. 길거리에 교복 입은 사람들을 봐도 갑갑해서 미칠 것 같아요. 여유라고 할 만한 것이 전혀 없어서 허세를 부리는게 고작이에요."
정직한 마음을 말하자면 죽고싶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부탁드릴게요. 저는 지금 현재를 보는 것 만으로도 버거워요. 과거는 되도록 보고싶지 않아요. 죽어버릴 것 같거든요."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물론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지만, 나에게는 너무 버거웠다.
"저... 지은아. 경찰에 가보는 건..."
"하려고 했지만... 경찰은 '피해를 받았다'는 전제로 수사를 진행하잖아요. 그리고 빚쟁이들은 제가 돈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렇다면 최소한의 원금만이라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쓰지 않을까요?"
"무슨... 소리니?"
"팔리겠죠. 부모도 버렸고, 가진것도, 빽도 없지만 몸은 있잖아요. 제가 입을 '최초의' 피해니까 경찰도 알 수 없겠죠. 기껏해야 실종정도?"
솔직히 놀랐다. 내가 이 정도로 냉정하게 못박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과, 냉정하게 직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은아... 그래도..."
울 것 같았다. 울 것 같아서 피자를 입에 넣었다. 어릴적부터의 습관대로.
"미안하다. 선생님이 좀 더 생각해야 했는데..."
"그건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오히려 저를 생각해주셨다는 것에 감사드려요. 하지만 시기가 나빴던거죠. 조금만 더 안정되면 되었을 것 같은데요. 죄송해요. 저도 제가 이렇게 여유가 없는지 처음 알았어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아직 단념하지 못했는지 피자가 놓인 접시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뭔가... 필요한 건 없니?"
"지금 상태로는 딱히 없어요.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일자리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선생님이 아실리는 없다. 만일 알고있다면 내가 일자리가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알려주셨겠지.
죄송해요, 선생님. 아직 인생이 바뀌었다고 현실을 직시하기에는 제거 너무 약해요. 너무 빨리 바뀐 일상에 적응하지도 못했고요. 만일, 먼 훗날에 제가 여유롭게 웃으며 살아가는 그 날에... 제가 그때까지 살아있다면, 웃는 얼굴로 인사드릴게요.
Day 6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었다.
시간은 이미 늦을대로 늦어버렸지만, 역시 전화가 오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거 누가 억지로 막고있다고 보지 않다면 억울할 정도로 일거리가 없다. 단순계산으로 해도 대략 100군데 이상에 연락처를 넣었다. 그런데 하나도 없었다. 애연가였다면 담배를 피우겠고, 애주가라면 술을 마시겠지만 담배는 일단 싫어하고, 술은 마셔본적이 없는데다가 구하기 힘들어서 한 적이 없었다.
집(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에 들어가봐야 이미 가시방석이었다. 그런데 이 고양이씨는 매일 밤마다 내가 자면 어딜 가는걸까... 싶어서 벤치에 가만히 있어보았다. 맨날 보면 털도 반지르르하니까, 어디 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냥 두면 자기가 알아서 가겠지.
그리고 벤치에 찌그러져 앉아서 어제 전화했던 사람들에게 쭉 전화를 하고있는데...
[야옹]
글러먹었다. 이 고양이는 날 자기 집으로 생각하는 건지 무릎 위에 몸을 둥글게 말고 가끔씩 하품을 하며 기분좋게 자기 시작했다.
집에 가봐야 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냥 자는 것도... 그리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만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그냥 멍하니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해도 얼어죽기 직전까지는 여기에 있고싶었다. 아직 전화할 사람도 많고.
그러던 중에 손이 얼어서 다른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리고 이 사람은 취소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받아들어주신다. 푹 잠긴 목소리로 보아 분명히 자고있던 것 같았다. 자고있다가 진동에 놀라서 전화기를 여는 모습이 왠지 생생하게 그려졌다.
"아... 그게..."
김민혁이었다. 딱히 부를 일이라거나 할 말은 없는데.
[무슨 일 있어?]
일은 있다. 좀 크다. 다음달 생활비가 없다. 그런데 딱히 새로울 것은 없지 않나.
"아니... 별로."
적당히 사과하고 끊어야겠다. 일하고 있을 사람에게 미안해지려고 했다.
[그래? 근데 어째 목소리가 우는 것 같다?]
"안 울어. 추워서 그래."
전혀 신빙성 없게도,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추워서 그런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러냐? 일자리는?]
"아직."
생각하니까 한숨이 나왔다. 며칠째 발로 뛰었는데 쓰겠다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김민혁은 나를 대신해서 한숨을 쉬려는 것인지 한 1분 정도 말이 없었다.
[쯧. 밥은?]
...... 그러고보면, 밥을 먹은지 꽤 된 것 같았다. 오늘은 특히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아예 먹지를 않았다. 다이어트라던가 할 생각이 아니라,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그래도 뭔가 먹을 생각을 하자 식욕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밀려왔다. 무릎에서 자다가 등을 긁고있는 고양이가 맛있게 보일 정도로.
[비슷하네. 나도 하루에 한 끼 정도니까.]
그런데 나만 그런것은 또 아닌 모양이다.
[한 5분 정도만 지나면 오늘 일 끝나는데. 같이 먹을래?]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고양이를 먹으면 그건 그것대로 큰 일이고, 사람은 보통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것이 보통이라고 하니까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아,.."
응, 이라고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잘 생각해보면 이거...
나이 차이 없는데다가 어쨌든 같이 밥먹자고 한다. 최근에 기억난 것이 한 주도 안 되었다는 것만 치워버리면 그리 모르는 사이도 아니다. 오히려 동병상련의 처지니까 정말 잘 아는 사이일지도 몰랐다.
이거... 이거...
[밥 안 먹었다며? 아니면 같이 먹을사람 있어?]
"아, 아니... 그건..."
그건 아닌데... 그, 뭐랄까. 생전 처음 해보는 거라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럼 됐고. 혼자서 쓸쓸하게 먹을테니까 안 체하게 기도나 해줘. 무신론자면 그냥 빌어주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고.]
삐진거다. 이거 진짜로 삐졌다.
"아니, 그러니까..."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끊어버렸다.
[야옹]
고양이는 언제나 그렇듯 울어주신다. 다시 전화하려 했지만 바쁜지 받지 않았다.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먹는 이야기를 하고 보니까 굉장히 배가 고파졌다. 정말 간단하게 라면만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배고픈건 어쩔 수 없었다.
문제는 편의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편의점을 찾는다고 해도 집이 어딘지 모르겠다는 것이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일단 집은 산 비탈쪽이었으니까 그 쪽을 향해서 걷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너무 과민반응이었다. 김민혁은 나를 어떻게 볼지도 모르는데, 나 혼자서 김칫국만 마시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삽질도 보통 삽질이 아니라 갯벌에서 손으로 삽질하는 것 같이 의미없는 짓을 하는 것 같았다. 변명이라고 하면 좀 많이 신빙성이 없는데다가 비참해지지만, 태어나서 지금까지 남자친구라고는 한 번도 없었고 대부분이 외톨이였다. 그래서인지 아주 작은 호의에도 이렇게 반응하는 것일지 몰랐다.
그리고 이 신림이라는 동네는 얼마나 작은 건지.
"나랑 먹기 싫다는거 아니었어?
모자를 깊게 눌러쓴 김민혁이 말했다. 겉옷에서 담배냄새가 조금 심하게 났고, 코가 아픈지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온 곳이 피시방인 것으로 보아, 아르바이트가 끝난 직후인 것 같았다.
"아니... 별로..."
가로등이 어두운 것은 지금까지도 감사하고 있다. 자신의 귀가 화끈거린다고 느낄 정도면 얼마나 빨갛게 되어있는 것일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뭐하자는 건지."
김민혁은 잠시 투덜거리더니 내게 우표크기의 종이조각을 한 뭉치 내밀었다.
"뭐야?"
일단 주는 거니까 받기는 했는데...
"식권. 네 집에서 내려오다보면 가장 첫번째에 있는 식당이야. 가기 귀찮아서 처박아두고 있었던건데."
음. 그래서 발급일이 여섯 달 전인거냐.
"가자. 맛 없지만 싼 집아라면 하나 알고있어."
폐점 직전의 식당에 들어가서 식권을 내자 접시를 주었다. 자신이 먹는 만큼 덜어서 먹는 형식인 것 같았다. 안 그래도 배가 고팠는데, 눈으로 먹을 것을 본 데다가 냄새까지 맡으니까 더는 못 참을 것 같았다. 폐점 직전이지만 사람이 꽤 있는 곳이어서인지 꼴사나운 짓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 전에는 ...를 ...에 먹더니."
솔직히 말해서 김민혁이 눈 앞에 있던 것도 알지 못했다. 의식이 끊겼다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음식이 접시인지, 접시가 음식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많이 덜어놓은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방금 김민혁의 말에 의식이 돌아온 것 같았다.
사람은 먹을 것을 못 먹으면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일단 입 안의 음식을 간신히 넘기고 김민혁을 바라보았다. 김민혁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정말 측은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내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정신이 들어?"
김민혁의 눈에서 어렴풋이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감이지만, 이 사람은 분명히 나를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 응."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엄청나게 쪽팔린 짓을 해버렸다. 몇 달 만에 음식 보는 거지도 아니고...
"...... 됐어. 다 먹고 나가자."
김민혁은 뭔가 말하려다가 내 뒤쪽을 바라보고 말을 바꿨다. 뒤를 돌아보자 셔터를 내리려고 고정핀을 빼고 있었다. 더 있으면 아무래도 민폐겠지.
"자자. 가만히 있어."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능숙하지는 않지만 굉장히 상냥했고, 짜증내는 알굴이나 귀찮다는 얼굴이 아니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신기하게도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쪽도 당연한 일이라는 듯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뭔가 씁쓸하네."
김민혁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왼손으로 하는 젓가락질이 굉장히 능숙해보였다.
"내가?"
음... 뭐, 보통이라면 굉장히 귀찮겠지만. 씁쓸할 정도로 귀찮을까?
"아니아니. 왜 당신이라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야 하는건지 궁금해져서."
"......"
갑자기 뭔가가 울컥 솟아오르려 했다. 갑자기 일상과 동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중학교때의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로 변한 것 때문이기도 했다.
"네 사정은 어느정도 알고있어."
눈물이 나오려고 하다가 황당함에 들어갔다. 이 사람, 내 일을 알고있어...?
"그건 뭐... 천천히 설명해줄거고.
나 같이 사람같이 않은 녀석이 이러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너 처럼 바른 사람이 여기에 있으면 뭔가 위화감이 있어. 궁금하다는 것은 그거야."
김민혁은 거기까지 말하고 턱으로 내 접시를 가리켰다.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숟가락을 들어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들어. 애초에 이 시기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100% 운이라고 봐도 좋아. 나도 그랬고.
나는 신림역에서 여기 근처에다가 연락처를 그야말로 뿌리고 다녔어. 인터넷에 있는 아르바이트도 빠짐없이 체크하고. 얼마나 걸린지는 전에 알려줬던 것 같고.
됐어. 오늘 요점은 이게..."
김민혁은 말을 멈췄다. 아마 2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릇의 절반 이상을 먹어치운 내 먹성에 놀란 듯 했다.
"중학교때는 햄버거를 한 입에 먹었었지..."
김민혁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기억도 안 나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일단 먹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일단 폐점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우리는 일단 어딘가에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을 구하려 했다. 그리고 커피 한 잔에 1시간의 임금이라는 가격에 좌절했다. 최소임금은 3800원인데, 커피 한 잔에 4천원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물론 어디어도 상관 없었지만, 문제는 지금 시간이 11시 가까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24시간 커피숍은 대부분 저 정도의 가격이었다.
김민혁은 주저앉아서 한숨을 푹 쉬더니 마지막 보루라면서 약 10분 정도를 걸었다. 그리고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애초에 왜 먹는거야?"
막상 자리에 앉으니 그런 의문이 들었다.
"뭐... 약간의 노하우라고 하면 믿을래?"
"노하우?"
"응. 근거는 없지만 대부분 먹을 것을 앞에 두면 경계가 약간 낮아지는 것 같더라고. 일반화의 오류라고 해도 할 말 없는데... 내가 살 테니까. 먹기 싫으면 그냥 두기만 해도 돼."
...... 정직하게 말하면 아직 더 먹을 수 있는데.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랑 어울리는게 그리 좋지는 않지?"
그거 또 미묘한 문제였다. 며칠간 만나기는 했지만 오늘까지는 그리 의식하지는 않은데다가 오히려 내가 미안할 정도였다. 내가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김민혁은 손가락을 튕겨 내 주의를 끌었다.
"자자, 싫다고 말해도 뭐라 안할거고,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주는 것이 서로한테 좋다고 보는데."
"싫지는... 않은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안하다는 느낌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이상하게 이성으로 의식되어서 굉장히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래? 그거 또 의외인데. 매번 내가 불러내고 있으니까 싫은 줄 알았지."
거기까지 말하고 김민혁은 조용히 일어나서 햄버거 두 개와 콜라 두 개를 쟁반에 담아왔다.
김민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있고, 왜 나에게 잘 해주는지 잘 모르겠다. 뭐라뭐라 이야기한 것 같지만, 글쎄. 그런 추상적인 이야기는 머릿속에 잘 남아있지 않을 뿐더러 단지 그런 이유라고 하면 딱히 나에게만 이렇게 잘 해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하나 충고할 것이 있어서 불렀는데."
"충고?"
김민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이 예리한 눈빛이었다.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 비춰서 하는 말인데, 한 달 전의 자신을 생각하면 어떤 기분이 들어?"
한달 전. 그러니까 비록 지금은 나를 버렸다고 하더라도 가족이 있고, 동생과 티격태격거리면서 학교에 잘 다니던 그 때를 생각하라는 것 같았다.
명치보다 아주 약간 위, 하지만 심장보다 아주 약간 낮은 위치의 그 부분에 뭔가가 꽉 들어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쉬는 것이 아주 약간 갑갑해지고, 심장이 조금 더 강하게 뛰는 것 같았다.
이것은 몸의 변화일 뿐이고 마음 상태를 말하라면
"죽고싶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김민혁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럼 선생님을 만나고 온 이후에 느낌은 어때?"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내가 그렇게나 여유가 없나 싶었다. 결국 여기에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것 처럼 말하고 있는 것도 다 허세같이 느껴져서...
"....... 오케. 거기까지."
김민혁이 콜라를 마시다가 말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나도 모르는 새에 울고있던 것 같았다.
"그게 보통이야. 나는 지금도 그래. 솔직히 말해서 너를 만나는 것도 꽤 거부감이 있어."
"난...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김민혁을 만나는 데에는 그리 거부감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솔직히 중학교때의 김민혁과 지금의 김민혁이 동일시되는 부분이라고 하면...
"그런가? 그거 부럽네."
저 말투.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처럼 굉장히 자신을 살피지 않는 것 같은 말투. 그것이 전부였다.
머리는 멋대로 자란 더벅머리에 이목구비는 이미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어렴풋이 안개와 같은 형상으로 남아있을 뿐. 뇌리속에 남이있는 것은 저 말투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쨌든 그에 대한 충고야. 받아들일지, 안 받아들일지, 그리고 믿든지 말든지 그건 네 자유야."
무의식중에 햄버거를 먹고있었다. 절반 이상. 김민혁은 포장도 뜯지 않고 있었다.
"먼저... 그 증상을 어떻게 할 필요는 분명히 있어.
일단 당신이 알고있는 사람들과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럴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확률이 적어. 그 때를 대비해서, 되도록 엉겨붙어서 잊지 않게 하라는 소리야."
"설마... 그래서 너 교회를..."
애초에 김민혁은 방에 성경책이라던가 전혀 들고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거기에 어디까지나 감이지만 전혀 종교를 갖고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응. 아는 녀석들이 대부분 교회에 몰리더라고.
여담이지만, 난 종교같은게 정말 싫어. 믿어도 변하는 것이 없거든. 기도해도 솔직히 시간낭비고. 뭘 하든 되는 일이 없어서 말이지."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고 잔뜩 인상을 썼다. 과거에 꼬였던 일을 회상한 듯 했다. 그 사이 고양이는 어디에서 들어왔는지 내 무릎에 앉아서 기분좋게 하품을 하고 곧바로 엎어졌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나를 집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김민혁이 눈을 떴을 때 고양이는 꼬리만 살랑거리고 있었다.
"뭐... 어쨌든. 그런데... 그 고양이는 키우는거야?"
"아... 아니."
굳이 말한다면 내가 키워진다는 느낌일까. 전혀 고양이 같지 않은 고양이고. 김민혁은 고양이가 왠지 탐탁지 않은 듯이 탁자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던 꼬리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햄버거를 다 먹어버렸다. 이 집의 햄버거는 의외로 양이 적은 모양이다.
"음. 거기까지 말했었지.
자, 엉겨붙어야 하는 이유는 잘 접수되었을 거라고 믿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잖아. 그 인간들 보면 죽고싶어져. 그렇지?"
"그렇지."
그 말 만으로도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 내가 궁극적으로 알려주고 싶은 것은 그에 대한 대처법이야.
자 그럼 질문-. 당신은... 한 달 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같은 사람'이라고 보여져?"
김민혁은 엷게 웃고있었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탐정이 연상될 정도로 은근한 미소였다.
"같은 사람이잖아."
내가 있는 위치만 바뀐거고, 그 외에는 동일하다고 보여졌기에 그렇게 말했다.
"틀려. 다른 사람이야."
"뭐?"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김민혁은 예상대로의 반응이 즐거운지 웃고있었다. 이거 의외로 기분 나쁘다.
"중세 소피스트들의 사상이야. 같은 자리에 붙어있는 나무라고 해도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다른' 나무가 된다는.
쉽게 말하면 그거지. 1초전의 너와 1초 후의 너가 같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같은 사람이잖아."
"아니지, 그건. 세포의 호흡수, 심장의 총 박동수, 뇌세포의 변화, 뭐 그 외 기타등등. 너무 많이 바뀌는데?
제 멋대로의 괴변이라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데... 그거 논파하지 않는 편이 낫더라고.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괴로울 것도 없어.
그러니까 요약정리하면, '한 달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동일시 하지 않는다'는 거지."
뭔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가 무식한건지 윤리와 사상을 공부하지 않아서인지 논파하기가 힘들었다. 영혼같이 추상적인 개념은 설명이 불가능하니까 논외로 치고, 그렇게 되면 내가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하기가 힘들었다.
생각하고 있으려니까 김민혁이 박수를 쳐서 주의를 끌었다.
"자자, 그거 논파할 생각을 하지 말라니까. 그냥 편한대로 받아들이자고. 지금 중요한 것은 이익의 여부지, 그 사상의 정당성이 아니잖아?"
잠깐, 그러면...
"저, 김민혁."
"응?"
"그러면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김민혁은 그 한 마디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우고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에이. 애초에 난 그런거 필요없었어."
"방금도 내가 거북하다고 했잖아."
"그건 별개. 그래서 내가 너한테 조금이라도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았냐?"
음... 그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 담임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줘?"
김민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 눈은 한없이 공허하고, 굉장히 고독해보였다. 나는 그 눈을 마주보고 입을 열 자신이 없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작년에 이미 죽었어."
김민혁의 그런 말을 듣고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주문도 더 하지 않으면서 죽치고 있는다고 점원들이 의외로 귀찮게 했다. 얼핏 보기에는 청소를 하는 것 같지만, 뒤쪽의 의자를 소리나게 올리고, 누가 보아도 고의적일 정도로 집요하게 테이블 주변을 쓸어내었다. 말없는 위협이 있는 것 같아서 곧 일어났다. 김민혁도 햄버거를 더 주문하려다가 지갑이 굉장히 가벼워져서 그만두기로 한 것 같았다.
고양이는 꼬리를 휘적거리면서 집을 향해 걸어갔다. 굉장히 익숙해보였고, 나와는 달리 여유있게 하품도 느긋하게 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가빠졌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래도 김민혁의 말을 듣고 나니 어느정도는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1주일 전에 비하면 엄청날 정도로 잘 참고 있었다.
다른 사람. 지금의 나와 1초 전의 내가 다른 사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해답 같지 않은 현실도피인데, 지금은 그 생각이 굉장히 안락하게 느껴졌다. 의외로 난 단순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자면서도 울 정도로 심각한 고민거리였는데, 김민혁의 그 한마디에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누그러졌다.
그런데 그 말을 해준 김민혁은 자신은 1년 전에 죽었다고 했다. 이미 죽었다. 어떤 의미가 함축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움직이니까 진짜로 죽었다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죽었다. 사망했다. 그것도 1 년 전에. 몸이 죽은것이 아니라면... 마음이 죽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침착하고 집착없이 털털했다. 자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이것이 정상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못 가진 것을 동경하고 또 원한다고 알고있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그랬으니까. 그렇지만 김민혁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치... 모든 것을 가진 억만장자처럼.
중학교때도 지금도 그다지 인상이 남는 사람은 아니었다. 1년 동안 몇 번이나 말했더라. 아마 얼굴도 잊어버릴 정도니까, 아마 눈을 마주친 적도 적은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내가 김민혁을 기억하는 이유는 최근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의 이유가 뭐 있을까. 특징이라고 해봐야 저 초탈한 것 같은 태도가 전부인데. 나도 잘 모르겠다. 단지 나에게 잘 해주었기 때문인 것인지, 그 공허해보이는 눈동자가 지워지지 않았다.
13만원으로 고시원을 잡은지 2주일째.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Front part. -추락지점-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