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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2009.03.15 16:27

단 하루, Part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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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K.kun]



[단 하루, Part III]

  두통은 어김없이 오늘도 뇌를 억압한다. 이를 악물고 참자니 오히려 턱이
더 아프기만 하다. 에라,  모르겠다. 진통제 투하!
  빌어먹을, 이래도 두통은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모른다. 조용한 장소에 가볼
까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만다. 창문 밖을쳐다보니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다. 밖도 결코 조용하지는 않을 거 같다. 오히려 어떤 일에 집중을 하면
이 일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책상에 멋대로 널부러진 CD 중 하나를 집어든다. 소중한 친구가 선물한
CD를 오디오에 집어넣고재생시키자 강한 일렉의 선율과 함께 구슬픈 여성
의 허스키한 보이스가 귀를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평소보다 볼륨을
더 높여서 조용히 - 집중한다.
  심장을, 가슴을 울리는 소리가 뇌까지 전잘된다. 두통은 놀랍게도 처음부
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마치 음악에 묻힌 듯이.
  하아 - 짜증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다가 맥없이 바닥에 가라앉는다. 시선
이 아래로 향하자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가 보인다. 하얀 이불 밖으로 살짝
드러난 하얀 허벅지. 흡혈귀의 면상보다도 창백한 피부.
  평생 새장 속에 갇힌 새조차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하지는 않는
다. 하지만 난 걷는 것조차  할 수가 없다. 자유란 없다. 문은 자유로이 오
갈 수 있으나 앞으로 나아갈 힘이 내게 있는 게 아니다. 내 의지로 걸어다니
지 못한다. 이것이 잔혹한 현실. 이런 젠장.
  밖에서 누군가의 웃음 소리가 들릴 때면 그러한 사실이 가끔 뼛속까지 침
투해 나를 외롭게 만든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사무친다. 맨정신으로 살
을 칼로 도려내는 아픔이 뭔지 아는 알고 있다. 그 아픔이 무엇인지 나는 너
무나도 잘 안다.
  삶에 대한 작별 인사를 고한 적이 언제였지. 왼쪽 손목에 남아있는 그때
의 과오는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나에게도 - 그에게도-. 그런데도 되
풀이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걷지 못하는 데 누군가는 걷고 있다. 나는
행복하게 웃을 수가 없는데 누군가는 행복하게 웃는다. 그러한  일련의 진
실들을 쭉 나열하면 비참해진다. 내게 있는 어두운 면이 삶을 또 다시 포기
하라고 요구한다. 나가고 싶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
  절대 내 손에 의해 열릴수 없는 문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열려라. 열려
라. 열려라. 참깨!

찰칵-

  맙소사, 정말로 문이 열려버렸다.



  사실 나, 소유진은 병원이라는 장소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라고 알려져 있다. 사춘기 시절 병원에서 큰 사고를 경험한 탓에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라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친척들은 그리 알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소유진은 병원이란 장소를 그리 싫어하지 않는다. 그
저 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는 병원이 싫을 뿐이지 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소음과 건물 전체에 퍼
져있는 알코올 냄새, 때때로 보게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사람들- 모두 당
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근에는 오히려 좋아지고 있다. 아니- 좋
아하려고 노력한다. 그 애 때문에.
  그 애는 음악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음악은 의외로 락 계열. 조용한 분위
기를 좋아하여 발라드 계열을 좋아하는 나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 좋아하는 게 있다면 피자빵이랄까? 병원 음식은 맛이 없다며 투덜거릴
때 매점에서 사온 빵들을 내밀었더니 그 중 피자빵만 2개를 먹었다. 그 다음
부터 나는 병문안을 올 때마다 피자빵을 가져왔고 그 애는 항상 싫어하는
기색없이 그것들을 맛있게 먹었다.
  병실은 607호.
  이 병원은 F층을 기준으로 1층부터 3층까지는 응급실과 일반 병동이 있
고 5층부터 6층까지는 중환자 병실 및 특급 병실, 7층부터 8층까지는 수술
실이다. 9층은 직원들을 위한 공간. 10층은 원장실과 11층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이 있다. 내가 이리 잘 아는 이유는 이 병원이 우리 가문에서 운영하는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6층은 특급 병실. 귀한 손님들이 머무는 장소다. 그래서 5층에는 병원 측
에서 고용한 경비원과 카운터를 지키는 전담 의사가 있다. 의사의 이름은
마리. 항상 흰 의사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는 여자다. 늘 졸린 눈을
하고 있지만 안경을 쓰는 순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의 이미지 변신
을 한다. 시퍼런 매스처럼 예리한 눈이 '역시 이 사람은 의사구나.'라는 생
각이 절로 든다.

『안녕하세요, 마리 씨.』
『어머- 안녕. 마술사 씨. 오늘은 무슨 마술을 쓰려고?』

  그녀가 웃는다.
  '마술사'라는 칭호에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인 이 구
역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ID 카드를 내가 갖고 있어서 붙여진 별명이
다.

『나크 씨는요?』
『김밥 사러 갔어. 오늘 방문 예정자가 없거든.』
『제가 왔는 걸요?』
『에이, 직원은 방문자가 아니야.』

  손을 휘이 저으면서 하는 말에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ID 카드 이야기다.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 나는 당연히 ID 카드가 없었다. 그래서 마리와 크
게 싸웠고 나크에게 강제로 쫓겨났다. 다음 날, 나는 직원용 ID 카드를 들
고 다시 나타났고, 물론 그때 마리가 지은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607호?』
『네, 맞아요. 혹시 검사나 재활치료 갔나요? 』
『아니, 병실에 얌전히 있어. 오늘도 질문 한 가지 해도 되겠어?』
『대답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가족도 아니면서 왜 계속 오는 거야? 그것도 매주 꼬박꼬박.』

  나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한다.

『매주 한 번도 빠짐없이 같은 질문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뭐죠. 그것도 매번
대답을 못 듣는데.』
『인간이 근본적 물음을 되풀이 하는 이유는 간단해. 모르거든. 그래서 되
묻는 거야. 게다가 답을 아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 걸. 얼마나 편해?』
『아, 열쇠가 문 옆에 있기 때문인가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인다. 방명록에 이름을 기입하고 마리에게 『다음에
물어봐요. 생각나면 대답해 줄 게요.』라고 말하며 카운터를 지나쳤다. 아
직 김밥이 오기까지 조금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그래서 마리는 곧장 자기
로 했고, 내가 지나가자마자 눈을 감고 졸기 시작했다. 계단을 통해 6층으
로 올라간다.
  통로의 왼쪽은 601호부터 605호까지, 오른쪽은 606호부터 610호가 있다.
모두 6인실 이상의 크기를 가진 특실로 들어가는 방법 또한 특별하다. 환자
와 가족에게만 지급하는 키(KEY)카드나 직원 중에서도 특별히 출입이 허가
된 ID 카드만이 문을 열 수 있게 되어 있다. 당연히 나는 아버지 덕택에 병
원의 모든 공간에 출입이 가능하다.
  카드 단말기에 ID 카드를 갖다대자 삐- 소리와 함께 장금장치가 해제되었
다. 찰칵.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예린아. 나왔어. 으음?』

  내가 문을 연 병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가 사준 음악이 주인 없는 방을
가득 채울 뿐이다. 두뇌는 순간 고속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답을 찾자. 그
녀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검사나 재활치료는 아니다. 방문 예정자도 없다고 들었다. 다른 층으로 이
동하자면 반드시 카운터를 지나야한다. 여기까지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
않으니까. 그래서 오류가 생긴다. 그 애는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당신은 누구죠?』

  그녀는 친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조차 잘 찾아오지 않는 자신
의 성을 마치 자기 집 안방처럼 자유롭게 드나드는 친구. 세상에서 제일 소
중한 친구. 마음의 문 앞까지 다가왔고 열쇠까지 들고 있으면서도 안에서
열어주기를 기다리는 바보 같은 사람.
  허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이국적인 외모에 짙푸른 눈
동자를 가진 여성이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고 들어왔다. 그리고 2초
정도가 지났을까?
  그녀는 11층 병원 옥상에 '서' 있었다. 이 믿기 어려운 기적에 처음에는 입
술조차 벙긋거리지 못했다. 당연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서서' 바라보는 세
상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에게 안겨서 왔을 때와 다른 두근거림이 심장
을 지배했다.
  심호흡을 해본다.
  하아. 하아.

『과연 높은 곳의 공기가 다르긴 다르네.』

  대가 없는 자유는 없다.
  놀랍게도 뜨거운 가슴은 얼음물에 담가놓은 것처럼 순식간에 식어버렸
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서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연녹색 셔츠의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죠?』

  쉽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상황이 예고없이 찾아온 불청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녹색의 여인이 말한다.

『강렬한 사념에 이끌려 날아온 나비랄까. 네 소망을 들어줄 수 있는 능력
을 가진 사람이 아닌 존재랄까.』

  예린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이라는 건가요? 당신이?』

  살짝- 뛰어올라 그녀에게 다가간 불청객은 자신의 검지 손가락을 예린의
코 끝으로 갖다댔다. 차갑다. 그리고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신도 신이라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우리는 저승사자라는 호칭을 더 좋
아해.』

  저승사자-.
  예린은 숨을 죽였다. 이런 설정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게 꿈
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아니- 속으로는 제발 꿈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거
다. 이 기적같은 일이 제발 현실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가 없는 성취는 없다. 당신이 바라는 건 무엇이죠?』

  이건 경험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 예린은 18살 때 다리의 자유
를 잃었다. 대신 하늘은 그녀에게 그를 보내주었다.
  자유를 잃은 건 무척 슬프지만 그가 있어 조금이나마 행복했다.
  저승사자는 의외라는 얼굴을 하고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등 뒤로 숨
긴 두 손이 다시 앞으로 나왔을 때 그녀의 키의 2배에 달하는 길이를 가진
낫이 등장했다.
  저승사자. 살벌한 호칭에 정말로 잘 어울리는 사형 집행도구다.

『우리는 신이 아니야. 그래서 만능이 아니지. 네 말대로 소원을 이루기 위
해선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해.』
『그가 세상의 이치니까요.』

  이렇게- 그가 말해줬다. 과연 그는 예린을 만나기위해 무슨 대가를 지불했
을까.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네. 거기, 가만히 서 있어.』

  이해가 빠르다? 아니다. 저승사자의 말을 예린이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시
퍼런 칼날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싸늘한 죽음의 냄새가 코를 간지럽힌다. 심장이 멎었다. 분명하다. 그 정
도로 낫이 휩쓸고 지나간 충격은 엄청났다. 공포에 사로잡혀 몸이 부르르
떨 정도로 감정의 흔들림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시원하게 낫을 휘두른 그녀는 원을 빙 그리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
다.

『아앗.』

  갑자기 왼쪽 손등이 따갑다.
  예린이 손을 살피자 남루한 연두색 망토를 두른 해골이 시침이 없는 시계
탑 뒤에서 낫을 들고 서 있는 그림이 보였다. 손등에서 풍기는 냄새는 '그
것'과 비슷하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모두가 가지고 있는 병. 죽음에 이르는
병이 손등에 새겨진 것이다. 그녀가 그림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자 저승사자
는 나긋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건 13시의 저주야.』
『13시의 저주?』
『그래. 지금은 3월 19일09시 28분 42초. 넌 지금부터 24시간 후면 죽게 되
는 저주에 걸렸어. 그러니까 '단 하루'의 유예가 주어진 거지.』

  이미 공포에 잡아먹혀서 인지 그러한 설명들이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오히려 무엇인가가 깨끗하게 정리된 느낌이다. 간단해서 좋네. 예린은 그렇
게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의 대가가 죽음이라는 건가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예린이 수긍하기도 전에 저승사자는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았다.

『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너라면-』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린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있어.』

  저승사자의 말에 예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저주가 반납이라도 된다는 뜻인가요?』
『아니, 13시의 저주는 꼭 성사가 되어야만 해. 그러니 '누군가'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소리지.』
『누군가?』
『누군가.』

  하아. 폐가 긴 한숨과 함께 살 떨리는 긴장을 밖으로 토해냈다. 예린이 나
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며 저승사자의 웃는 얼굴을 날카롭게 노려본다.

『세상 일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죠. 당신이 원하는 게 정확히 뭐죠?』
『.......』

  처음으로- 저승사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것
은 전염병처럼 예린의 얼굴에도 나타났다.




  그거 참 재미있는 상황이군. 나, 소유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이미 상상 그 이상의 최악을 18살 때 경험한 터라 그보다 훨씬 더한 걸 예
상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다. 계단과 통하는 중앙 통로는 나크와 마리가
지키지만 점심 시간이 되면 나크는 10분 정도 사라지고 그동안 마리는 단잠
에 빠진다. 그 사이를 이용하면 '기어서라도' 병실을 몰래 빠져나올 수 있
다.
  내가 생각한 건 겨우 이 정도다.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나 역시 예상하
지 못한 일이었다.
  저승사자가 굳은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강렬한 사념을 지닌 자는 버그가 될 확률이 높지. 그걸 알(Egg)인 상태에
서 제거하는 것 또한 저승사자가 하는 일. 네 남자인 소유진을 죽이면 넌
살 수 있어. 그리고 네가 그토록 갈망하는 자유도 가질 수 있지.』

  숨어서 그녀들이 하는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린이가
스스로 대지 위에 서 있는지금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 그래. 무엇이
든-
  잠시 호흡을 멈췄던 예린이가 처연한 미소를 짓는다.

『역시- 세상 일은 쉬운 게 하나도 없군요. 저승사자니- 버그니- 알이니-
사념이니- 모두 믿겠지만 이제 이 '기적'을 가지고 꺼져 주세요. 얌전히 있
다가 24시간 후에 죽을 테니.』

  이번에는 내가 호흡을 멈춰야만 했다. 가슴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기분
으로 차오르는 까닭은 아마도 내 반이 그녀로 채워져 있기 때문일 거다. 다
행이군. 그녀가 들어오도록 내 반을 버려서.
그렇다면- 그녀의 가슴에서 꽃피운 버려진 내 반쪽에게 최대한의 예우를
갖춰야겠다.

『버그는 벌레라는 뜻.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버그는 프로그램을 원활하게
진행하는 걸 방해하는 오류. 게임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기적같은 존재이기도 하지요. 음. 그렇다면 난 어떤 종류의 알을 품고 있는
걸까요.』

  본능이었을까? 나는 최대한 저승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사냥꾼 앞에 있는 사냥감과도 같은 기분이다. 두렵다. 그녀의 이론
대로라면 나는 사라져야하는 적이 분명하다. 하지만 의외로 저승사자의 표
정은 온화했고 예린의 얼굴이 더 무섭고 끔찍했다. 그래, 끔찍하다는 표현
은 저 얼굴에 어울려. 예린은 지금껏 자신이 매일 설사를 한 까닭이 장이 나
빠서가 아닌 영양 보조제로 알고 먹은 알약이 사실은 초강력 급설 설사약이
었다는 사실을 문자로 통보 받은 환자의 얼굴을 나에게 보여줬다.

『다- 듣고 있었어?』

  그런 것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성큼성큼 걸어가서 굳어버린 석상처럼 서 있는 나의 비너스를 살며시 끌
어안는다. 그리고 입맞춤. 살짝 입술을 때자 떨리는 숨소리가 그 사이를 통
해 새어나온다.

『예전에 내가 말했지? 반드시 서서 키스할 수 있을 거라고.』

  그녀의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귀여워 죽겠네. 예린의 허리에 두른 손
을 풀지 않은 상태로 나는 저승사자와 당당히 눈을 마주쳤다. 이젠 죽음도
불사할 수 있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념을 가진 자. 나는 그게 꼭 나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너는.......』

  저승사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희들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져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거
냐?』
『내가 지금 행복 할 수 있는 건 불행을 겪고 있는 누군가가 침묵하며 자신
이 짊어진 짐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 역시 대가를 치뤘기
에 예린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품에 안긴 예린이가 움찔거리더니 내 옷자락을 강하게 움켜쥔다. 그녀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지 알기에 나는 확고한 태도를 보여줘야만 했다.

『절대 후회하지 않아. 내게 너는 그만한 가치가 있어.』

  이렇게 그녀를 안심시키고 난 뒤에 저승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슴의
칼을 뽑았다.

『행복은 거져 생기는 신의 부산물이 아닌 노력하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선물입니다.』

  저승사자의 만면에 미소가 물에 막 풀리기 시작한 물감처럼 번져간다.

『좋아. 그게 너의 각오라면. 저주를 그녀에게서 너로 옮겨주지.』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대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부탁이라고? 나에게?』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나는 부드럽게 웃었다.

『예린의 재기를 축하하는 기념으로 당신에게 꼭 식사 한 끼를 대접하고 싶
은데, 허락하시겠습니까, 레이디(Lady)?』




  나, 신예린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기껏 멋을 내려고 언젠가
반드시 걸을 수 있게 되는 날에 입으려고 사 놓은 녹색 원피스까지 갈아 입
었지만 초조한 탓에 자꾸 시간을 확인하게 된다.
  시간은 오전 10시 52분. 우리 셋은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기 위해 병원 근
처의 레스토랑에 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유진은 너
무 태연하다.
  내 왼쪽 손등에 있던 13시의 저주는 유진에게로 옮겨졌다. 자신을 '연'이
라고 소개한 저승사자에 의해서.
  병원 근처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종업원이 우리
를 막아서며 아직 개업하지 않았다고 알렸다. 그러자 유진은 지갑에서 명함
을 꺼내 종업원에게 주며 지배인을 불러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잠시 후-

『오오, 조카! 이게 얼마 만이야!』

  그의 삼촌이 등장했다. 부자집 아들의 재력을 과시하는 것은 TV나 유진
이 가져온 노트북으로 본 영화가 전부였는데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그는 전국적으로 9개의 큰 병원을 가진 가문의 외아들이다.
  메뉴를 보지도 앟고 유진은 치킨 샐러드와 바싹 구운 토스트, 참치 더블
샌드위치와 토마토 파스타. 마지막으로 해물 볶음밥을 주문했다. 그러자 주
문을 받던 그의 삼촌이 메뉴판에 없는 것 좀 시키지 말라며 유진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야, 근데 이쪽 처자들은 내게 소개해주지 않을 거냐?』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 시선을 무릎에 고정시키고 말았다. 유진은 소리내
어 웃더니 저승사자를 먼저 소개시켰다.

『이쪽은 연, 내 사업 파트너.』
『오, 그래? 실례지만 아가씨께서는 무슨 일을?』

  그의 삼촌이 내민 손을 자연스레 잡은 연은 목례를 하며 대답했다.

『실내 인테리어와 건축 설계를 하고 있습니다. 혹시 실내 장식을 바꾸실
생각이라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라면서 자연스레 명함을 꺼내준다. 경악을 금치 못하는 나와 달리 유진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번쩍인다.
  명함을 지갑에 넣은 삼촌은 이제 나에게로 관심을 쏟았다.

『으음! 그래서 옷차림이 무척 세련되군요. 그리고 이쪽은?』

  무척 기대하는 눈빛이다. 사실 나도 기대하고 있다. 유진이 뭐라고 말할
까.

『소유진 주식회사의 51%를 소유하고 계시는 대주주시죠. 나머지 49%도
사들이겠다고 해서 고민 중인데 삼촌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오오! 이분이 바로?』

  갑자기 나를 바라보는 삼촌의 눈빛이 달라졌다. 감정이 그윽하게 담긴 눈
동자가 빨개진 나를 담아놓는다.

『반갑습니다. 아가씨. 못난 제 조카를 사람으로 만들어주신 분이었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저보다 천 배 정도 부족한 녀석이지만...』
『속도 위반을 해도 좋으니 빨리 결혼부터 하시지. 노총각 씨.』
『...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지금 결정하시면 평생 저희 레스토랑에서
80%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잘하는 짓이다.』

  한숨을 푹 쉬는 유진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악수를청하는 삼촌의 행동에
연과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의 해프닝이 끝나고 지배인 겸 주방
장이라는 그의 삼촌이 주방으로 사라지자 유진은 테이블 위로 몸을 불쑥 내
밀었다.

『근데 아까 삼촌에게 준 명함, 진짜입니까?』

  녹색 빛깔을 지닌 음료수에 꽂힌 빨대를 이리저리 휘젓던 연은 살짝 뜸을
들인 다음 대답했다.

『저승사작에게도 각자의 삶이라는 게 있어. 그런 면에서 내가 가진 명함
은 진짜라고 할 수 있지.』
『어떤 게 진짜 삶이죠?』

  저승사자의 삶. 인테리어의 삶. 그는 거침없이 남에게 선택하라고 강요한
다. 마치 두려운 것은 전혀 없다는 태도로.

『내 눈에 당신은 괴상한 녹색 망토를 두르고 앉아 있는 인상 사나운 여자
로 보입니다. 하지만 삼촌에게는 다른 모습으로 보였겠죠. 어떤 게 당신의
본모습이죠?』

  연이 휙휙 돌리던 빨대가 멈췄다. 컵 속의 음료는 무섭게 소용돌이 치는
게 지금 그녀의 복잡한 심정을 말하는 거 같다.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야?』

  질문에 질문으로 답한다. 그것도 전혀 연관이 없는 걸로. 그런데 유진은
태연하게 대답한다.

『몇 가지 가설을 세우고 있을 뿐입니다. 일단은 당신이 반드시 대답해 줄
거라는 쪽으로.』

『대단하군. 그냥 때려 맞추고 있을 뿐이란 거지?』

  유진은 어깨를 으쓱인다. 컵을 들어 음료를 한 모금 마신 연은 잠시 침묵
하더니 상체를 뒤로 눕혔다.

『누군가는 어떤 면을 거짓이 아니냐고 묻겠지. 마치 배트맨이나 스파이더
맨처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삶에 거짓이 어디 있어. 모두 진실이지. 남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진짜 중요한 건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하냐는
거지.』
『음, 그렇군요.』

  면벽 수도를 하는 중에 깨달음을 얻은 스님같은 얼굴을 하고선 유진은 나
를 바라봤다.

『좀 더 악랄해질 필요가 있겠군. 음식이 나오기 전에 본론으로 들어가보
죠. 당신이 말한 강렬한 사념, 지금도 내게서 느껴지나요?』

  연은 잔을 내려놓은 다음 고개를 가로저었다.

『버그가 아닌 이상사념은 뚜렷한 형태나 집중된 에너지를 유지할 수 없
어. 여자의 향수처럼 공기 중에 퍼져 남자들을 자극하고 유혹해. 그리고 오
류를 범하지.』

『오류를 자동적으로 유발한다는 뜻입니까?』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다. 에이, 도저히 못 참겠다.

『저기, 끼어들어서 미안한데, 내 관심사는 또 다른 사념의 소유자야. 시간
은 지금도 흘러가고 있어. 어쩌면 지금이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
는 사람과 함께 하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몰라. 단 일초도 낭비하고 싶지 않
아.』

  역시 나만 초조했던 것이었을까. 시간은 벌써 11시로 넘어갔다. 불안하고
보이지 않는 칼날이 다가오는 위험한 길은 싫다.

『누구인지 말해줘. 사념을 가진 다른 사람.』

  저승사자가 가지고 다니는 낫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하는 일이 아니야. 잘 모르겠는데.』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그녀는 단 번에 내 억장을 무너트리고 파묻
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시간.
11시 48분.
검은색 밴이 레스토랑 앞에 정차한 시간.
11시 49분.
신예린이 검은색 밴에 탄 괴한들에게 납치된 시간.
11시 49분.
소유진이 알아차린 시간.
11시 50분.
저승사자 연에게 도움을 요청한 시간.
11시 51분.
저승사자 연을 따라 밴을 추적하는 데 걸린 시간.
23분.
병원 앞에 도착한 시간.
12시 14분.
소유진이 충격에서 헤어나오기까지 걸린 시간.
단 2분.




  연이 말했다.

『서둘러, 그 애가 위험해.』

  현재 시간 12시 16분 13초.




  '아들아. 세상에 우연이 존재한다고 믿니?'

  어릴 적, 어머니가 들려주신 옛 이야기의 일분다. 3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
한 이야기.
  헤어진 연인이 있었다. 어느 날 무척 추운 겨울. 남자가 음반 하나를 사기
위해 레코드 가게 앞에서 벌벌 떨며 기다린다. 가게 주인은 문에 '식사
중'이라는 표지를 걸고 사라졌다. 그리고 30분 후- 남자는 결국 음반은 내일
에야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길 건너편에 헤어
졌던 여자가 그를 발견하고는 우두커니 서 있는 걸 보게 된다. 절대로 다시
만날거 같지 않았던 두 사람이 전혀 엉뚱한 장소에서 그렇게 만남을 이어간
다.

  '강렬한 사념은 알의 상태일 때 오류를 자동적으로 유발시킨다.'

  우연은 세상에 결코 없다.

  '우연이란 건 필연을 위한 구성 요소야. 삶이란 완제품이 과연 우연같은
불확실한 일련의 사건들로 만들어질까?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
까?'

  저승사자가 있는 마당에 우리를 운명의 실에 묶어 꼭두각시를 다루 듯이
가지고 노는 조물주가 없을 리가.
  그렇게 납득하니 오히려 머리가 개운해진다. 지금부터 무슨 짓을해도 신
이 뒤에서 지켜봐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시퍼런 죽음의 칼날을
휘두르는 미녀 저승사자가.

『최고의 가호로군.』

  실소를 터트리며 병원에 들어선 나는 카운터를 지키는 간호사에게 말했
다.

『검은색 밴을 타고 온 환자는 어디 있습니까?』
『잠시만... 그런 환자는 없습니다.』

  그럴 리가. 미소가 절로 올라온다. 이 사악함을 누가 막을소냐.

『나는 당신이 '반드시' 알려줄 거라 믿습니다. 신예린은 어디에 있죠?』

  백색의 나이팅게일은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다.

『F층에 있습니다.』

  F층? 4층이라고? 사고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다. 이 병원에 F층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 F층은 있어. 나는 F층
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것을 기준으로 병원 층이 나눠지는 거니까. 하
지만 그곳이 무슨 용도로 쓰이지?

『아슬아슬하군.』

  철저한 관찰자다운 무미건조한 음성이 등을 찔렀다. 따갑고-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차갑다고 느껴진다. 얼음 화살처럼 그녀의 시선은 예리하고 싸늘
하다.

『무슨 뜻입니까?』

  내 목소리가 이토록 무겁게 가라앉은 이유는 무엇일까.

『의식하면서 네 '힘'을 이끌어 내고 있잖아.』

『역시 그랬군요.』

『뭐가?』

『당신이 나를 따라오면서 미묘하게나마 협력하는 이유는 내가 알에서 깨
어나자마자 죽이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굳이 24시간을 기다릴
필요도 없고 당신은 다시 사자의 임무에서 벗어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쪽의 당신도 지금 당신 모습만큼이나 소중할테니. 저승사자 연은 흔들
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받아냈다.

『맞아.』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처럼. 그녀는 자연스레 인정한다.

『네가 버그가 된다면 주저없이 널 죽일 거야.』

  역시 그렇군.

  어차피 모가 아니면 도다. 내게 선택은 사치고 지금은 좌우고 천길 낭떠러
지인 외길 42.195km이다. 결국은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신이 나를 위해
준비해놓은 시나리오대로.

『F층으로 가죠.』

  엘리베이터로는 F층으로 갈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계단을 통해서
도 F층으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5층에는 F층으로 내려가는 계
단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카운
터를 지키고 있어야할 사람은 마리와 나크. 5층 카운터에 도착한 나는 천적
을 마주한 늑대처럼 이빨을 드러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리는 없고 호신용 삼단봉을 손에 든 나크가 우리를 맞이한다.

『당신은 어느 쪽이죠?』

『누구에게나 사정이 있기 마련이지. 내 경우는 적어도 돈 때문만은 아니
다.』

『신념인가요?』

『아니. 희망이다. 지푸라기와도 같은. 내 딸은 특이한 폐병을 가지고 있
어. 정화되지 않은 공기와 접촉하면 금세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기침을 토
해내. 그걸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들었다.』

  후후. 좋아. 부셔주지. 그런 나약한 희망따위.

『좀 더 튼튼한 밧줄을 붙잡지 그랬습니까. 연 씨. 부탁합니다.』

『싫어.』

  으응?
  튼튼한 밧줄은 한 마디 말에 동강 잘려나갔다. 따분하다는 느낌의 목소리
였다면 딱 맞다는 생각이 들었겠지만 연의 태도는 한결같이 무뚝뚝하다.

『저 사람은 평범해. 내가 나설 이유가 없어.』

  하여간 신이란 작자들은 정녕 필요할 때 침묵하기를 좋아한다니까.
  나크는 연이 내 조력자가 아니라는 판단을 내리기가 무섭게 곧장 호신용
삼단봉을 펼쳤다. 180cm에 달하는 거구가 어깨를 쫙 펴니 위압감이 장난
이 아니다.

『너는 무술을 익히지 않았어.』

  그가 거기를 좁히며 말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다친다.』

  부우웅! 집중하지 않앗다면 예측 거리 밖에서 휘두른 삼단봉에 맞아 머리
가 깨졌을 거다. 옆으로 피하다가 복도 벽에 부딪쳣지만 정신을 잃지는 않
았다. 중심이 무너진 지금 따라오는 삼단봉을 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
니다.
  탁! 삼단봉이 벽을 때리자 얼얼한 충격이 손목에 전해졌는지 나크가 공격
을 멈추고 몸을 곧게 폈다. 무술을 익히지는 않았는데 몸이 날쌔군. 이런 생
각을 하고 있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이건 그의 예측 밖이었나보다.

『빠른 판단이었다. 포기하고 돌아가라. 더 하면 누군가는 크게 다친다.』
『설마 그 누군가가 나라는 건 아니죠? 게다가 내 대답이 어떨 지는 알고 있
지 않습니까.』

  서로 어차피 같은 처지다. 모든 고민은 대기권 밖으로 날려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시원한 미소가 나크의 얼굴에 나타났다.

『그럼 해봐라.』

  그의 선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일어서서 달렸다. 정면 대결은 나의 패
배가 분명하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힘'을 쓸 수는 없다. 아직 구하지도 못
했는데 지상에서 발을 때는 건 잔인한 일이다.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숨가쁘게 복도를 달린다. 직사각형의 구조인 5층은 중환자들이 대부분이
다. 그리고 비어있는 병실은 없다. 아마도 이 중에 나크가 진심으로 지키고
싶은 이가 있을 것이다. 갑자기 그 대상이 극심한 애정의 대상으로 다가왔
다. 인질로 잡는다면 가망이 있다.
  나는 ID 카드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다음 모서리를 돌아 카운터 위를 뛰
어넘어 컴퓨터를 조작했다. 예상대로 - 내 모습을 확인한 나크는 달리던 것
을 멈추고 정승처럼 우뚝 섰다.

『무슨 짓이냐!』
『중환자실은 무균실. 계속 날 방해한다면 지금부터 모든 병실의 공기 정화
를 멈추겠습니다.』
『미친 거냐.』
『우린 서로의 불행을 바라고 있습니다. 서로 행복해지려고 눈깔이 뒤집힌
마당에 미친 게 중요해요?』
『네 행복을 위해서 관련 없는 사람들까지 끌어들이겠다고? 정말 그럴 생각
이냐!』
『관련이라... 자기만 쏙 빼버리는 식의 처세술은 보기가 좋지 않군요. 데이
트 중이던 사람을 납치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피해자인척 연기하는 겁니
까. 당신이 이 일에 끼어든 순간부터 이미 당신의 삶은 연관되었습니다.』

  잠시 말을 끊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거친 호흡을 진정시킨 다음 나는 말한
다.

『내 희망은 지푸라기 따위가 아닙니다. 예린이는 지금 걸을 수 있고 내가
곱게 사라진다면 죽는 날까지 기적을 노래하며 행복할 수 있어요. 그러니
당신이 포기하시죠.』

  이처럼 사람은 이기적이게 된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살아간다.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생각하지 못한다. 인간은 이기적이기
에- 옆을 바라보지 않는다.

『당신의 불행을 밟고 나아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부탁 드립니다. 포기하
시죠.』

  소용 없다. 얼마나 부질없는 행위인가. 하지만 중요하다. 나로 인해 불행
해질지도 모르는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겨우 잡은 기회다.』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온다. 혼을 내뱉는
괴물은 두려운 게 없다는 눈을 하고서는 나를 향해 돌진한다.

『당신, 반드시 포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면 절망에 빠지겠지
요. 미안합니다. 인간이 결국 인간이라서.』




  길을 걷고 있다.

  이상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이러한 사실을 인지
했다. 내가 무엇인가에 의지하지 않고도 걸을 수 있는 지금- 더 없이 커다
란 기쁨으로 채워진 마음으로 그동안의 외로움을 달래본다.
  그런데도 느껴지는 감정이 이 기쁨을 감쪽같이 지워버린다. 이것을 이렇
게 표현해본다.

  공허함.

  이걸 공허함이라 말하고 싶다. 채워져야하는 장소가 아무 것도 없이 텅 비
어버려 허전한 느낌.
  단팥빵을 한 입 가득 물었는데 단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라고 할까.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이 푸른 색이 아니라 까맣다는 걸 알
았을 때의 느낌이 이런 걸까.
  마음을 진정시킨다. 그러자 오직 길만 보이던 공간에 다른 길들이 하나 둘
씩 보이기 시작한다. 끊어진 길은 하나도 없었지만 나처럼 걷지 못하는 사
람들이 보였다.
  저 멀리- 아빠가 보인다.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하는 아빠 곁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엄마도 보였다. 두 사람의 길은 겹쳐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
도 걷고자 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불행 덕에 내게는 그가 생겼다. 그는 어디
에 있을까? 주변을 둘러보다가 나는 하늘로 이어진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구의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풍스럽고 멋있는 유럽 풍의 새하얀 다리처
럼 보이는 게 참 아름다웠다.
  그건 하늘로 향하는 다리였다. 나도 저 길을 걷고 싶다.

  뚝.

  다리가 후덜거리는 충격에 넘어질 뻔 했다. 간신히 몸을 추스리고 방금
전 감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위해 두 팔로 나를 껴안았다. 길 전체가 나
에게 슬픔을 호소한다.

  뚝.

  귀속에서 울리는 이 소리. 심장을 자극하는 생명의 소리. 나는 길 앞을 살
펴본다. 무언가,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뚝.

  한참 앞이다. 물방울? 아니- 검다. 뭐지? 그것을 향해 한 걸음씩 용기내어
나아가본다. 그러다가 움찔하여 멈추고 만다.

  ... ㅂ ㅜ ㄹ ㄱ ㄷ ㅏ ?

  '인식'해버린 순간 하늘로 이어진 다리가 순식간에 검붉은 핏빛으로 변해
버렸다. 묘하게도 그 빛깔조차 오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
지 무척 친근하다는 감정이 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애써 불안감을 감추려
한다. 한 가지씩 정보가 가시화되어 전해질수록 가슴이 떨린다.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붉은 하늘 다리를 올려다보며- 걷고- 걷고- 또 걷
다가 멈춰선다. 다리가 땅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다리의 끝은 내가 걷는
이 길과 연결되어있다. 그 너머는 계속 붉은 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나는 하늘에서 눈을 때지 못했다.

  뚝.

  거기에서 붉은 색이 시작되고 있었다. 십자가에 팔다리가 못 박힌 예수와
는 달리 커다란 낫 하나가 가슴에 박혀 내려오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다.
  얼굴을 확인하고 싶지 않다. 가슴으로 이미 알 수 있기에 눈으로까지 알
고 싶지는 않다. 생 전체를 사무치게 하는 통증이 심장을 강하게 압박한다.
  그가, 내가 사랑하는 그 남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한 명 밖에 없는 사람이
허공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다.

  손을 뻗어본다.
  만질 수가 없다.
  유진.
  이름을 불러본다.
  들리지 않는다.
  폴짝.
  뛰어본다.
  그래도 닿지 않는다.

  뚝.

  얼굴로 받아본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못한다. 그의 가슴에서 나와
낫을 통해 맺힌 피방울이 떨어지는 걸 그대로 받아낸다. 이 감촉은 온몸으
로 퍼져 내가 살아있다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나는 살아있다. 그의 생명으로.
  싫어.
  입 속에서 맴도는 단어.
  그가 없이는 싫어.
  혀 끝에서 춤추는 말.
  그의 피로 얼룩진 길은 싫어. 함께 걷고 싶어. 내려줘. 내가 사랑하는 저
사람을. 내 곁으로 돌려줘.
  길에 주저 앉는다. 그가 없이는 더 살아갈 수 없기에.




  13시 32분. 소유진. 아버지와 대면하다.




심장이 터져라 가쁘게 달려온 사실이 마치 거짓말 같다. 10년쯤 관리를 포
기한 것처럼 보이는 F층의 복도는 먼지와 거미줄, 그리고 침대 바퀴 자국
의 천국이었지만 문에 달린 유리창 너머의 병실은 최첨단 설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짐작이 간 건 녹색 수술복 차림의 남자
를 발견하고 나서였다.

『아버지.』
『얘기는 들었다. 용케도 이곳까지 왔구나.』

  숨 차오르는 고통 같은 건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해 하나의 상실감이 남
았다.

『무엇을 위한 곳인가요.』
『희망.』
『누구의 희망이죠? 어머니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아버지의 죄를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요?』

  가장 예민한 곳을 찔렀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차분한 태도는 전혀 흔
들리지 않았다.

『나 하나 만을 위한 희망은 아니다.』
『그렇겠지요. 나도 소명운이라는 사람이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는 실격
이지만 의사로서, 인간으로서는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나는 쓴웃음을 흘렸다.

『의외구나. 나를 원망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인간으로써는 아버지 당신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 고맙다.』

  진심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입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한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려줘요.』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더니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누군지 알겠구나. 5년 동안 하반신 마비였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정문
으로 걸어나간 신예린 환자를 말하는 거군.』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인간이 인간이기에. 쉽사리 자신의 희망을 포기하
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줄 수 없다. 그 애는 이 F층과 같은 힘에 영향을 받았다. 그
것을 규명할 수 있다면 네 어미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있어. 너라면 포기 하
겠느냐.』

  그렇겠지요. 하지만 아버지. 그 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습니다.

『내 여자입니다. 돌려 받겠습니다.』

  의사로서 반대했다. 그러나 가족으로서, 아버지로서 반대하지 못한다. 사
랑에 푹 빠진 사람이 어떤 일이든 망설이지 않고 도전한다는 단순한 진리
때문에 아버지는 내가 옆으로 지나가도 막지 못했다. 그저『408호, 거기
다.』 라며 알려줄 뿐. 나는 이대로 가서 되찾아오면 된다.
  갑자기 연이 말을 걸었다.

『아슬아슬하네.』
『뭐가 말이죠?』

  아버지는 그녀의 존재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소름끼
치도록 영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애의 마음.』




  이제는 예전의 일이다.
  아빠가 쓰러졌다. 과로로 인한 심근경색이 병명이었고 이미 죽었어야 했
는데 거짓말처럼 회복되었다. 그러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
교 신자였던 엄마가 얼마나 간절히 기적을 바라고 원했던가. 아빠 당신의
생명이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 안에 있다고 생각하신 엄마는 전 재산을 처분
하여 자선 단체에 기부했다. 그리고 이듬 해, 난 교통 사고로 다리의 자유
를 잃고 말았다. 엄마는 그때부터 더욱 깊은 절망의 강에 발을 담갔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아빠.
  자유를 잃은 딸.

  그 대가를 치루자 유진이 짠 하고 나타났다. 하느님이 보내준 천사는 나
를 특실로 옮겨준 다음 아빠에게 최고의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조치해줬
다. 엄마도 그러한 도움에 감사의 뜻을 전했지만 여전히 하느님 만이 아버
지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유진은 병원을 싫어한다. 그가 18살 때 엄마가 수술을 받았는데 의료 사고
로 인해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고 그대로 식물인간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
고 그 수술을 집도한 사람이 그의 아빠였다는 사실은 한참 후에 마리에게
서 들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엄마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라는 것
이었다. 세월의 손길이 그녀를 비껴간 것이다. 그래서 아마 그의 아빠는 아
내를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유진이 저승사자의 낫에 박혀 허공에 매달렸던 공간이 사라지자 사방은
깊은 바다와 같은 어둠에 휩싸여 고요해졌다. 어디에도 빛깔 같은 건 보이
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진 다리의 자유는 그의 희생으로 얻어진 값진 보상
이다. 하지만 그가 없다면 이런 건 다 필요없다. 이대로 죽어버려도 나는 괜
찮다. 그때의 과오를 다시 범할 수 있다면 기꺼이 웃으면서 내 팔목을 면도
칼로 그어버릴 수 있다.
  유진이 내 삶의 전부가 되었는데 그걸 앗아가버리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
는 걸까.
  잠들고 싶다. 눈이 스스로 감긴다. 잊어버리고 싶다. 유진과 함께 하고 싶
어.

『예린아. 너는 반드시 행복해질 거야.』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현재 시간 3월 20일 09시.
  병원 옥상. 소유진. 누워서 하늘을 감상하다.




『28분 40초 남았군.』

  소유진이 손을 들어 휙휙 저어본다. 마치 허공에 날아다니는 가상의 날파
리를 쫓아내는 것처럼.

『일일이 말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그 애를 다시 보지 않을 생각이야?』

  보고 싶다. 하지만 입으로는 『이제 괜찮아요. 만나봤자 나를 기억하지도
못할 겁니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 소유진은 신예린의 기억을 조작해 처
음부터 그에 관한 건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미로 속의 보물상자처
럼 교묘하게 숨겨놓았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간다. 반대편 옥상 모퉁이에 앉아 시간이 가는 것만을
기다리던 연은 등을 찌르는 듯한 통증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자
물쇠로 채워진 병원 옥상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둘 씩이
나.

『Evilline!』

  그 묘한 명칭에 마리는 싱긋 웃었다.

『수술할 사람이 생겨서 왔어. 저승사자 나리.』

  안경 너머로 날카롭고 냉철한 눈빛이 반짝인다.

『또 방해할 셈이냐!』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거든.』

  마리의 곁에는 예린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눈을 하고서
당당히 자신의 두 발로 서 있었다.

『내 남자를 되찾으러 왔어요. 어디에 있죠?』

  옥상의 공간 위로 발을 들여놓은 마리와 예린은 유진의 모습을 찾아 두리
번 거렸다. 저승사자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가 연을 분노하
게 만들었다.

『언제까지 우리를 방해할 셈이지!』

『글쎄, 사람들만 불행해져서는 불쌍하잖아. 세상만사가 좀 공평해야지. 때
론 신이 불행해져서 사람이 행복해지면-』

  마리가 한쪽 눈을 지그시 감는다.

『좋잖아?』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다.

『싸워봤자 결과는 뻔해. 수호자 없이 움직이는 너 같은 저승사자라면 더
욱 뻔하지. 마술사 씨는 내가 데려가겠다. 의미없는 죽음으로부터. 그 애는
자신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그걸 통제할 수도 있어. 어른이야. 그러니 죽기
는 너무 아까워. 어른인 척 하는 어린아이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는.』




3월 20일. 9시 30분. 병원 옥상.




  28분은 이미 지났다. 그래도 예린은 잠이 든 유진을 깨우지 않았다. 그가
깨어나기를, 그의 옆에서 얌전히 기다린다. 13시의 저주가 사라진 왼손을
붙잡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우리는 반드시 행복해질거야. 응. 그래. 난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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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3월 20일이 제 생일이네요.
그래서 3월 20일로 해봤습니다.

2년만의 복귀가 앞으로 2달 남았습니다.
아자아자, 화이팅.
조금만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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