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은 시내쪽으로 걸어가볼까. 배도 고프고 하니까, 식사도 좀 하고서 천천히 생각해보자. 대리자가 기한을 정한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시내로 향했다. 대리자의 궁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평화로운 하늘섬의 모습 그저 그대로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면서 하늘섬의 모습을 마음껏 즐기면서 걸어갔다.
시내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것을 알았다.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서둘러 도망치는 듯 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선명히 떠올라 있었고, 두려워하면서 다리를 놀려서 열심히 벗어나려 했다.
사람들이 도망쳐오는곳을 보면서 걸어가고 있으려니 앞쪽에서 작은 폭발음이 퍼져나왔다.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건 마법뿐이다. 그러나 마법사가 사람들을 공격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 마법사들의 정신이상에 이은 폭주.
마법사들은 가끔 폭주라는 걸 한다. 가디언인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마법은 정신적인 것들과 많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법실험의 실패라던가 무리한 마법의 사용 등을 하면 정신에 이상이 와서 정신이 붕괴되거나 폭주하여 닥치는대로 파괴하려 들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 마법사는 자신을 신경쓰지 않고 모든 기력을 소진할때까지 주위를 공격하기에 매우 위험하다고도.
그렇다면 가디언인 내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뿐.
"죽여서, 막는다."
걸음을 빨리했다. 토끼처럼 날렵하고 유연하게, 사슴처럼 재빠르게 날듯이 달려가 이 사태의 원인을 발견했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마법사 하나가 주위에 미친 듯이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마법들은 연계되어 아름답고 화려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들에겐 공포로 다가왔다. 죽음의 사신이 아름답게 유혹하듯, 마법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뺏긴 사람들은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졌다.
하나, 둘. 죽어나가는 사람들. 주문도 시동어도 없이 침묵한 채 스태프만을 휘둘러가며 마법을 뿌리는 마법사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른 것이 틀림없었다. 폭주했다고는 하나 사람을 죽임에 망설임이 없고, 펼쳐지는 마법들의 수나 수준도 보통은 아니었다. 하긴, 하늘섬의 최상부엔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도와줘요! 누가 좀 살려줘요! 엉엉‥‥"
마법사에게서 멀지 않은곳에 한 아이가 쓰러져 울면서 소리지르고 있었다. 죽음에 임박해서 절망적으로,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 빨리 달리고 있지만 아직 마법사를 막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마법사는 몸을 돌려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스태프를 휘두르는 간단한 동작 하나로 한 아이의 생명이 또 덧없이 스러질 찰나였다.
"그만 두세요, 자아를 잃은 마법사여. 스스로를 마법사라 칭하면서도 자신의 자아를 지키지 못하고, 또 이런 추한 꼴로 닥치는대로 파괴하며 살생하다니! 당신은 이미 마법사가 아니에요! 그저 추한 생물일 뿐입니다. 내가 당신을 막겠습니다!"
낭랑하고 고운 목소리. 마법사는 몸을 돌려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엘프였다. 책에서 읽은 그대로의 엘프. 그것도 엘프여성이었다. 재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옷감으로 한 옷을 아름답게 차려입고 한손엔 칼을, 한 손엔 스태프를, 그리고 등엔 활과 화살통을 매고 있었다. 이래서야 어디 싸우러 나가는 엘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마법사는 흥미가 당긴다는 듯이 아이에게서 몸을 돌려 엘프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묘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엘프를 재밌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마법사를 마주보던 엘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자연과 조화를 사랑하는 종족인 엘프로서는 파괴와 살생을 일분 일초라도 빨리 막고 싶기에 성급히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마법이 아니라, 마법사를 상대하는데 칼로 승부를 보려 한 것도 실수였다.
자아를 잃고 폭주하는 마법사라도 마법사는 마법사. 게다가 하늘섬의 최상부에 사는 보통은 훨씬 뛰어넘은 마법사다. 묘한 웃음소리를 계속 흘리면서 엘프의 칼을 막아낼 생각을 하지 않다가 엘프가 곧장 찔러들어오자 몸을 옆으로 살짝 비키면서 엘프의 곱고 흰 손목을 낚아챘다. 엘프는 곧장 손을 빼려 했지만 마법사가 스스로에게 스트렝스등 보조마법을 걸었던 모양인지 엘프는 힘으로 손을 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엘프는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게 힘을! 플레임 보텍스!(Flame Vortex)"
막 시전되려던 엘프의 마법이 사그라들었다. 상대가 마법을 쓰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어서야 전투의 태도로선 빵점이다. 그저 죽여주십쇼, 하는 것 밖엔 되지 않으니까.
마법사는 침묵한 채로 스태프만을 휘둘러 마법을 구상하고, 또 플레임 보텍스보다 훨씬 수준높은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엘프의 시전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마법이 발현되지 않게는 할 수 있었다.
마법사에게서 시작되어 주위로 넓게 거미줄처럼 펴진, 내 바로 앞까지 펼쳐진 그 마법. 상당한 수준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상당한 마법인 안티 매직 쉘(Anti Magic Shell). 펼쳐진 공간 내에서의 마법의 발현을 완전히 차단하는 정말 수준 높은 마법이다. 한 번 펼쳐지면 시전자가 직접 풀거나, 쓰러지거나 마력이 고갈되거나 하기 전까지는 풀리지 않을 뿐더러 안티매직쉘 보다 훨씬 수준 높은 마법조차도 발현되지 않으니까.
때문에 엘프는 스태프를 휘두른 채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마법사는 순간적으로 안티매직쉘을 해제한 후에, 마법을 이어나갔다.
"홀드 퍼슨(Hold Person). 앱솔루트 어레스트(Absolute Arrest)."
이젠 마력이 부족해졌는지 시동어를 외치며 마법을 구현하는 마법사.
엘프는 몸이 굳어서 움직일수 없게 되었고, 어디선가 나타난 무지 튼튼해 보이는 줄이 엘프의 몸을 꽁꽁 묶었다. 엘프는 여지없이 마법사에게 사로잡혀 버린 꼴이 된 것이다.
마법사는 더욱 묘한 웃음소리를 기쁜듯이 흘리며 엘프에게로 다가가서 엘프를 더듬기 시작했다. 깡마른 팔로 엘프의 희고 매끄러운 살결을 더듬으면서 마법사는 묘하게 흥분하는 듯 했다. 엘프의 미모는 최고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엘프는 수치를 이겨내려는 듯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떨면서 공포와 두려움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인간과 엘프의 종족분쟁으로 번질지도 모르는 문제. 말했던 대로, 마음먹었던 대로.
"죽여서, 막는다."
손을 쫙 편 채로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꽉 쥐었다. 아무것도 없던 내 손엔 어느샌가 나의 나르실이 잡혀있었다. 웅웅거리며 무언가와 공명하듯이 기분좋은 울림이 퍼져나왔다. 붉은빛을 띈 은색. 이 색이 난 맘에 든다.
나르실은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검인데, 사연이 많은 듯 하다. 하지만 나도 자세한 건 알수가 없다. 그저 무지하게 잘 드는 검이라는 것 정도.
나르실을 한손에 쥐고 바로 마법사 뒤에 당도했다. 그리고 검을 치켜들었다. 마법사는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다가, 내가 기척도없이 뒤에 서서 검을 높이 치켜들고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나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천천히 고했다.
"넌 바보다. 뒤를 내 주는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죽여주세요, 이다. 알았나? 그럼 이제 죽도록."
망설일 것 없이 베었다. 마법사는 경악한 표정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 소리에 떨면서 살짝 눈을 뜬 엘프는 마법사가 쓰러져있고 내가 나르실을 들고 서 있자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를 경계하는 듯 했다. 하지만 시전자가 죽음으로서 안티 매직 쉘과 홀드 퍼슨, 앱솔루트 어레스트는 해지되었다. 그저 엘프가 힘이 다 빠져버려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주었다. 엘프는 잠시 두려워하는 듯 하다가, 망설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손에 의지해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쓰러진 마법사를 보다가 피가 전혀 흐르지 않았다는 것에 의문이 남는 듯 했다. 마법사를 보고서, 나와 내 칼을 바라보았으니.
나르실은 보통의 검이 벨 수 있는 것은 벨 수 없다. 하지만, 보통의 검이 벨 수 없는 것을 벨 수 있다. 사람이나 나무 같은 것은 자르지 못하지만, 지금과 같이 생명만을 베어버릴 수도 있다. 아직 시험해 보진 않았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사랑이나 우정, 애정 같은 것들도 벨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르실도 보통의 검은 아니다.
엘프는 이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서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르실을 사라지게 하면서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엘프여왕을 만나러가는 사람입니다. 하늘섬의 주민들이 핍박받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것이 내 일이기에 도왔을 뿐입니다. 개의치 말고 가던 길 가십시오."
나르실이 사라진것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던 엘프는 내가 몸을 돌려 자신에게로부터 멀어가자 놀라서 나를 쫓아왔다.
"무언가 용무라도?"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엘프 여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에요. 제 생명을 구해주신 분이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무언가 보답도 하고 싶구요."
"개의치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엘프와 인간들의 종족분쟁을 막기 위해, 하늘섬의 안녕을 위해 나섰을 뿐입니다."
"헤에- 정의 사도인가요? 여하튼 고마워요. 내 이름은‥‥"
"제게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카 지켜야하는 것들은 전부 같습니다. 이름을 붙여서 특별하게 만들어선 제가 곤란합니다. 저에겐 대리자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자 엘프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며 웃기에 약간 기분 나쁜 투로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그러자 엘프는 웃음을 참지 못해 쿡쿡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너무 가디언 같아서 그래요. 당신 말투나, 엘프에게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태도나. 하지만 가디언이란건 하늘섬 내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존재들이니까, 당신이 가디언일 수는 없겠죠. 그런데 너무 가디언 같아서‥‥ 후훗‥"
묘하게 붙임성있는 엘프다. 개의치 말라고 말했으면 분명 고마워하는 마음만 가지고서 떠날 터인 엘프들이거늘, 달라붙으면서 도움이 되겠다고 하다니.
"저는 엘프여왕을 가까이서 돕는 엘프에요. 엘프여왕님의 명에 따라 하늘섬을 돌면서 여러가지를 배우면서 다니다가 이제 엘프여왕님께 돌아가려던 길이에요. 엘프여왕님을 만나러 가시는 길에 제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될거라니까요."
그렇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낮게 말했다.
"인간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던 상하관계가 엘프들에게도 있는 줄은 몰랐군요. 자연과 조화를 사랑하는 엘프가 불평등하다니"
그러자 엘프는 묘하게 어두운 얼굴이 되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뭔가를 작게 웅얼거렸다. 그러나 말하는 자신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라서 듣지 못했다. 그래서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하면서 엘프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다면 저와 동행하시죠. 그리고 그것보다‥‥"
동행하자는 말에 좋아하면서 그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기대하는 듯 '그 다음은요?' 라는 의미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엘프.
"아직 식사 전이시면 식사나 하고 가시죠. 제가 끝내주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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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면서 시내로 향했다. 대리자의 궁에서 시내로 향하는 길에는 별다른 것이 없다. 평화로운 하늘섬의 모습 그저 그대로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면서 하늘섬의 모습을 마음껏 즐기면서 걸어갔다.
시내에 도착했을 때,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것을 알았다.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서둘러 도망치는 듯 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선명히 떠올라 있었고, 두려워하면서 다리를 놀려서 열심히 벗어나려 했다.
사람들이 도망쳐오는곳을 보면서 걸어가고 있으려니 앞쪽에서 작은 폭발음이 퍼져나왔다.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건 마법뿐이다. 그러나 마법사가 사람들을 공격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 마법사들의 정신이상에 이은 폭주.
마법사들은 가끔 폭주라는 걸 한다. 가디언인 나는 잘 모르겠지만 마법은 정신적인 것들과 많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법실험의 실패라던가 무리한 마법의 사용 등을 하면 정신에 이상이 와서 정신이 붕괴되거나 폭주하여 닥치는대로 파괴하려 들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런 마법사는 자신을 신경쓰지 않고 모든 기력을 소진할때까지 주위를 공격하기에 매우 위험하다고도.
그렇다면 가디언인 내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뿐.
"죽여서, 막는다."
걸음을 빨리했다. 토끼처럼 날렵하고 유연하게, 사슴처럼 재빠르게 날듯이 달려가 이 사태의 원인을 발견했다.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마법사 하나가 주위에 미친 듯이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마법들은 연계되어 아름답고 화려한 광경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쓰러져 신음하는 사람들에겐 공포로 다가왔다. 죽음의 사신이 아름답게 유혹하듯, 마법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뺏긴 사람들은 그대로 죽음으로 이어졌다.
하나, 둘. 죽어나가는 사람들. 주문도 시동어도 없이 침묵한 채 스태프만을 휘둘러가며 마법을 뿌리는 마법사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른 것이 틀림없었다. 폭주했다고는 하나 사람을 죽임에 망설임이 없고, 펼쳐지는 마법들의 수나 수준도 보통은 아니었다. 하긴, 하늘섬의 최상부엔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도와줘요! 누가 좀 살려줘요! 엉엉‥‥"
마법사에게서 멀지 않은곳에 한 아이가 쓰러져 울면서 소리지르고 있었다. 죽음에 임박해서 절망적으로, 필사적으로 도움을 구하는 목소리. 빨리 달리고 있지만 아직 마법사를 막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마법사는 몸을 돌려 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스태프를 휘두르는 간단한 동작 하나로 한 아이의 생명이 또 덧없이 스러질 찰나였다.
"그만 두세요, 자아를 잃은 마법사여. 스스로를 마법사라 칭하면서도 자신의 자아를 지키지 못하고, 또 이런 추한 꼴로 닥치는대로 파괴하며 살생하다니! 당신은 이미 마법사가 아니에요! 그저 추한 생물일 뿐입니다. 내가 당신을 막겠습니다!"
낭랑하고 고운 목소리. 마법사는 몸을 돌려 목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나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엘프였다. 책에서 읽은 그대로의 엘프. 그것도 엘프여성이었다. 재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신비한 옷감으로 한 옷을 아름답게 차려입고 한손엔 칼을, 한 손엔 스태프를, 그리고 등엔 활과 화살통을 매고 있었다. 이래서야 어디 싸우러 나가는 엘프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마법사는 흥미가 당긴다는 듯이 아이에게서 몸을 돌려 엘프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묘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엘프를 재밌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마법사를 마주보던 엘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자연과 조화를 사랑하는 종족인 엘프로서는 파괴와 살생을 일분 일초라도 빨리 막고 싶기에 성급히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마법이 아니라, 마법사를 상대하는데 칼로 승부를 보려 한 것도 실수였다.
자아를 잃고 폭주하는 마법사라도 마법사는 마법사. 게다가 하늘섬의 최상부에 사는 보통은 훨씬 뛰어넘은 마법사다. 묘한 웃음소리를 계속 흘리면서 엘프의 칼을 막아낼 생각을 하지 않다가 엘프가 곧장 찔러들어오자 몸을 옆으로 살짝 비키면서 엘프의 곱고 흰 손목을 낚아챘다. 엘프는 곧장 손을 빼려 했지만 마법사가 스스로에게 스트렝스등 보조마법을 걸었던 모양인지 엘프는 힘으로 손을 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엘프는 마법을 사용하려 했다. 스태프를 높이 치켜들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게 힘을! 플레임 보텍스!(Flame Vortex)"
막 시전되려던 엘프의 마법이 사그라들었다. 상대가 마법을 쓰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어서야 전투의 태도로선 빵점이다. 그저 죽여주십쇼, 하는 것 밖엔 되지 않으니까.
마법사는 침묵한 채로 스태프만을 휘둘러 마법을 구상하고, 또 플레임 보텍스보다 훨씬 수준높은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엘프의 시전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마법이 발현되지 않게는 할 수 있었다.
마법사에게서 시작되어 주위로 넓게 거미줄처럼 펴진, 내 바로 앞까지 펼쳐진 그 마법. 상당한 수준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상당한 마법인 안티 매직 쉘(Anti Magic Shell). 펼쳐진 공간 내에서의 마법의 발현을 완전히 차단하는 정말 수준 높은 마법이다. 한 번 펼쳐지면 시전자가 직접 풀거나, 쓰러지거나 마력이 고갈되거나 하기 전까지는 풀리지 않을 뿐더러 안티매직쉘 보다 훨씬 수준 높은 마법조차도 발현되지 않으니까.
때문에 엘프는 스태프를 휘두른 채로 멍하니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마법사는 순간적으로 안티매직쉘을 해제한 후에, 마법을 이어나갔다.
"홀드 퍼슨(Hold Person). 앱솔루트 어레스트(Absolute Arrest)."
이젠 마력이 부족해졌는지 시동어를 외치며 마법을 구현하는 마법사.
엘프는 몸이 굳어서 움직일수 없게 되었고, 어디선가 나타난 무지 튼튼해 보이는 줄이 엘프의 몸을 꽁꽁 묶었다. 엘프는 여지없이 마법사에게 사로잡혀 버린 꼴이 된 것이다.
마법사는 더욱 묘한 웃음소리를 기쁜듯이 흘리며 엘프에게로 다가가서 엘프를 더듬기 시작했다. 깡마른 팔로 엘프의 희고 매끄러운 살결을 더듬으면서 마법사는 묘하게 흥분하는 듯 했다. 엘프의 미모는 최고니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엘프는 수치를 이겨내려는 듯 눈을 감고 부들부들 떨면서 공포와 두려움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잘못하면 인간과 엘프의 종족분쟁으로 번질지도 모르는 문제. 말했던 대로, 마음먹었던 대로.
"죽여서, 막는다."
손을 쫙 편 채로 앞으로 쭉 뻗었다. 그리고 꽉 쥐었다. 아무것도 없던 내 손엔 어느샌가 나의 나르실이 잡혀있었다. 웅웅거리며 무언가와 공명하듯이 기분좋은 울림이 퍼져나왔다. 붉은빛을 띈 은색. 이 색이 난 맘에 든다.
나르실은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검인데, 사연이 많은 듯 하다. 하지만 나도 자세한 건 알수가 없다. 그저 무지하게 잘 드는 검이라는 것 정도.
나르실을 한손에 쥐고 바로 마법사 뒤에 당도했다. 그리고 검을 치켜들었다. 마법사는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뒤를 돌아보다가, 내가 기척도없이 뒤에 서서 검을 높이 치켜들고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나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천천히 고했다.
"넌 바보다. 뒤를 내 주는 것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죽여주세요, 이다. 알았나? 그럼 이제 죽도록."
망설일 것 없이 베었다. 마법사는 경악한 표정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 소리에 떨면서 살짝 눈을 뜬 엘프는 마법사가 쓰러져있고 내가 나르실을 들고 서 있자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나를 경계하는 듯 했다. 하지만 시전자가 죽음으로서 안티 매직 쉘과 홀드 퍼슨, 앱솔루트 어레스트는 해지되었다. 그저 엘프가 힘이 다 빠져버려서 일어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주었다. 엘프는 잠시 두려워하는 듯 하다가, 망설이며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 손에 의지해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쓰러진 마법사를 보다가 피가 전혀 흐르지 않았다는 것에 의문이 남는 듯 했다. 마법사를 보고서, 나와 내 칼을 바라보았으니.
나르실은 보통의 검이 벨 수 있는 것은 벨 수 없다. 하지만, 보통의 검이 벨 수 없는 것을 벨 수 있다. 사람이나 나무 같은 것은 자르지 못하지만, 지금과 같이 생명만을 베어버릴 수도 있다. 아직 시험해 보진 않았지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사랑이나 우정, 애정 같은 것들도 벨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르실도 보통의 검은 아니다.
엘프는 이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서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나르실을 사라지게 하면서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엘프여왕을 만나러가는 사람입니다. 하늘섬의 주민들이 핍박받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것이 내 일이기에 도왔을 뿐입니다. 개의치 말고 가던 길 가십시오."
나르실이 사라진것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던 엘프는 내가 몸을 돌려 자신에게로부터 멀어가자 놀라서 나를 쫓아왔다.
"무언가 용무라도?"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엘프 여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에요. 제 생명을 구해주신 분이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무언가 보답도 하고 싶구요."
"개의치 마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엘프와 인간들의 종족분쟁을 막기 위해, 하늘섬의 안녕을 위해 나섰을 뿐입니다."
"헤에- 정의 사도인가요? 여하튼 고마워요. 내 이름은‥‥"
"제게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카 지켜야하는 것들은 전부 같습니다. 이름을 붙여서 특별하게 만들어선 제가 곤란합니다. 저에겐 대리자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자 엘프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내가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며 웃기에 약간 기분 나쁜 투로 물었다.
"왜 웃으십니까?"
그러자 엘프는 웃음을 참지 못해 쿡쿡거리며 대답했다.
"당신이 너무 가디언 같아서 그래요. 당신 말투나, 엘프에게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태도나. 하지만 가디언이란건 하늘섬 내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존재들이니까, 당신이 가디언일 수는 없겠죠. 그런데 너무 가디언 같아서‥‥ 후훗‥"
묘하게 붙임성있는 엘프다. 개의치 말라고 말했으면 분명 고마워하는 마음만 가지고서 떠날 터인 엘프들이거늘, 달라붙으면서 도움이 되겠다고 하다니.
"저는 엘프여왕을 가까이서 돕는 엘프에요. 엘프여왕님의 명에 따라 하늘섬을 돌면서 여러가지를 배우면서 다니다가 이제 엘프여왕님께 돌아가려던 길이에요. 엘프여왕님을 만나러 가시는 길에 제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될거라니까요."
그렇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낮게 말했다.
"인간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던 상하관계가 엘프들에게도 있는 줄은 몰랐군요. 자연과 조화를 사랑하는 엘프가 불평등하다니"
그러자 엘프는 묘하게 어두운 얼굴이 되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뭔가를 작게 웅얼거렸다. 그러나 말하는 자신도 알아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라서 듣지 못했다. 그래서 괜한 말을 했다 싶어 후회하면서 엘프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다면 저와 동행하시죠. 그리고 그것보다‥‥"
동행하자는 말에 좋아하면서 그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기대하는 듯 '그 다음은요?' 라는 의미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엘프.
"아직 식사 전이시면 식사나 하고 가시죠. 제가 끝내주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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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글 올리시는 방식 | 성원 | 2008/07/28 | 1678 |
13 | 하늘 그리고 하늘 그리고 하늘-01 | SOZA | 2008/09/27 | 1994 |
12 | [듀오(Duo)] - #04. 레오닐, 붉은 남자 | [보리밥] | 2008/09/12 | 1987 |
11 | [듀오(Duo)] - #03. 레이첼, 붉은 남자 | [보리밥] | 2008/09/06 | 1812 |
10 | 하늘의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 - #03 <당연한 말씀을.> | 실버네크리스 | 2008/09/01 | 1875 |
9 | 하늘의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 - #02 <애정을 담아 부르는 이름은> | 실버네크리스 | 2008/09/01 | 1851 |
8 | [듀오(Duo)] - #02. 레오닐, 붉은 새 | [보리밥] | 2008/08/29 | 1988 |
7 | [듀오(Duo)] - #01. 레이첼, 붉은 새 | [보리밥] | 2008/08/22 | 1990 |
» | 하늘의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 - #01 <죽여서, 막는다.> | 실버네크리스 | 2008/08/10 | 1936 |
5 | 잃어버린 대륙(Lost continent) 1. 마법 (1) | 현이 | 2008/08/08 | 1685 |
4 | [듀오(Duo)] - #00. 크래그 쌍둥이 | [보리밥] | 2008/08/02 | 1827 |
3 | 하늘의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 - Prologue <용건은 무엇입니까?> | 실버네크리스 | 2008/08/01 | 2112 |
2 | 하늘 그리고 하늘 그리고 하늘-00 | SOZA | 2008/07/31 | 2069 |
1 | 잃어버린 대륙(Lost continent) 0. prologue | 현이 | 2008/07/28 | 1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