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자와 거지.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마른 편이지만 붙을 곳엔 적당히 살집이 붙은 몸은 명공이 심혈을 기울여 다져 놓은 조각 같았다. 여성처럼 날카로운 턱선과 유리처럼 깨질 듯한 섬세한 콧날 위론 짝이 다른 금색과 은색의 오드아이가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거기에 적당한 길이의 백금발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화룡정점이다.
“피오나, 다리 아프지 않아?”
피오람은 자신을 닮은 오드아이의 쌍둥이 여동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성별이 다른 이란성 쌍둥이라 얼굴이 똑같은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오누이의 분위기는 거울처럼 흡사했다.
“아니, 안 아파.”
중천의 태양은 시나브로 정오를 알리고 있었다. 허기를 느낀 피오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가방 속에서 꺼낸 그리 많지 않은 건량을 피오람에게 건넸다.
그러나 먹을 것 앞에서 피오람이 하는 말은 늘 한결같았다.
“나는 배불러.”
어쩜 그렇게 똑같은 말을 얼굴색 하나 안 바뀌고 할 수 있을까. 참 뻔뻔하기도 하다.
“피오람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저녁은 먹었으니까.”
최근엔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천한출생 그리고 전쟁. 대지는 말발굽에 헝클어지고, 초원은 화상을 입었다. 일그러진 비더젠 제국의 국토는 보기 드문 멋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강제징병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비더젠 제국의 카이저에겐 후계자가 없었다. 폭쇄왕이란 별명을 가진 푄프 카이저는 그 특유의 거칠고 포악한 성격 탓에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아들들이나 왕비를 죽여 왔던 것이다.
그것이 언젠간 자신의 자리를 아들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강박증에서 왔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사학자들 사이에서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두는게 아니었어. 좋은 일자리였는데.”
피오나의 투정에도 피오람은 눈썹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그 돼지 놈이 너를 얼마나 음흉하게 훔쳐보고 있었는지 너는 몰라.”
“보는 것뿐이라면 얼마든지 상관없잖아 닳는 것도 아닌데.”
“보고 싶으면 만지고 싶어지는게 인간이란 가축의 특성이야.”
피오나는 달과 해가 섞인 듯한 금색과 은색이 오드아이를 깜박거리며 피오람에게 말했다.
“그러는 피오람도 인간이잖아?”
“그게 딜레마야. 아무튼 나는 싫어.”
땅이라곤 손바닥만한 것 밖에 없는 고작 시골 지주 주제에 감히 피오나를 넘보다니, 피오람은 견딜 수 없었다. 두들겨 패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피오람은 고집불퉁. 중증 시스터 컴플렉스 환자!”
“마음대로 불러.”
8년, 그 주점에서 도망친지도 벌써 8년이나 지났다. 도르트문트의 하얀 성을 피오나에게 선물한다고 약속했건만, 그 약속을 지키기란 지금으로썬 너무도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드디어 기회는 왔다. 비더젠 제국은 푄프 카이저가 죽은 후에 젝스 카이저를 찾지 못해 사오분열 된 상태다. 드넓은 비더젠의 대지는 불의 기사 루드비히 발락, 땅의 재상 하인츠 구데리안, 자유로운 대상인 슈비스트 징엔의 3세력으로 나뉘었으며 기타 제후들은 어디에 붙어야 할지 이리저리 숨죽여 가늠하고 있는 실정이다.
“힘내, 조금만 더 가면 슈비스트령이야. 피오나.”
“피오람, 정말로 괜찮은 거야? 그 징엔이라는 사람.”
한사코 건빵을 거절한 피오람 덕분에 덩달아 굶은 피오나가 석류화를 연상케 하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물어왔다. 피오람은 꽃처럼 화사한 미소로 피오나에게 답해 주었다.
“응, 이제부터 배부르게 해 줄게.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못해.”
“……피오람.”
“배고프잖아? 빵 먹지 왜 안 먹어.”
“피오람이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어.”
“너는 그런 고집이 문제야, 그러다 시집 못 간다?”
“그러는 피오람도 만만치 않네요.”
걸어 다니는 조각 같은 남매는 어디를 가나 이성에게 주목을 받아야 했다. 그건 가난하고 자신을 지킬 수 없는 힘없는 남매에겐 결코 좋다고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전엔 취향 나쁜 귀족에게 걸려선 거의 목숨을 걸고 도망친 기억도 있었고, 지금처럼 돼지 같은 지주의 눈요깃거리가 되는 건 다반사였다. 피오람에겐 스스로를 지킬 힘이 필요했다.
피오람은 주머니에 손을 뻗어 용린(龍鱗)을 어루만졌다. 마법의 힘이 담긴 이 용의 비늘은 피오람이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로 어떤 늙은 백작에게 몸을 팔아 얻은 대가로써 마법에 문외한인 피오람이 마법을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마법은 피오람의 소망을 이루어 줄 것이다.
용의 약속, 아인스 카이저 미하일로비치의 친우라 알려져 있는 에인션트 드래곤, 카마인이 남긴 비더젠 제국의 축복 용린(龍鱗). 고작 200여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그것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중앙교구에선 용을 뱀으로 구분해 사악한 존재로써 이 용린을 부정하는 입장이지만 그 탁월한 마법적 효과는 그런 부정을 오히려 상회해 부정하고 있었다.
사실 피오람은 배가 고팠다.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지만 그런 점으로 따지자면 피오나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불안정한 시국에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더구나 피오나의 외모는 눈에 너무 띈다. 살아남기 위해선, 피오나를 지키기 위해선 강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피오람, 저것 봐!”
피오나의 부름에 피오람은 어지러운 머리를 애써 흔들며 고개를 들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섞인 우울한 검은 비가.
피오람의 눈동자가 커졌다. 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에 비가 내릴 리가 없다. 해답은 분명 간단하다. 그것은 화살. 바로 죽음의 비였다.
“!”
피오람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여기는 구데리안이 지배하는 콜쉬비어령과 루드비히가 지배하는 도르트문트령이 맞닿아 있는 일종의 국경이다. 굳이 피오람이 이런 길을 택한 이유는 이 험난한 시국에 판을 치는 도적이나 산적들의 위협을 배제하고자 함이었다. 게다가 국경은 주점 등에서 정보만 제대로 주워듣는다면 전투를 피해서 통과하는 건 쉽다.
그럼 의미에서 이런 일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구데리안과 루드비히, 전략과 전술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두 영웅이 아무런 전략적 포석도 깔아두지 않고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싸울 이유는 없다. 피오람은 어떤 물자의 흐름도 읽지 못했다. 순전히 우발적인 전투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은 여기까지다. 피오람은 황급히 피오나의 손을 잡아끌며 외쳤다.
“도망쳐 피오나!”
“하지만 여기엔 화살이 날아오지 않아.”
“멍청아! 저건 견제야. 루드비히의 슈트름 라이더(질풍 기사)들은 3단 배열의 강노병으로 선두의 창병을 잡고 그 측면을 빠르게 갈라서 치는 것이 주특기란 말이야! 이 길로!”
피오나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누이의 창백한 얼굴에 이이를 제기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빨리. 더 빨리. 더 빨리 뛰지 않으면 잡히고 만다. 겨우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제대로 웃어본 적도 없는 삶이다. 도르트문트의 하얀 궁성을 피오나에게 준다고 말했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 이런 곳에서 개죽음을 당할 순 없다.
그러나 피오람의 폐는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도 급격히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피오람의 체력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혼자 익힌 검술이지만 어지간한 동년배는 혼자서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먹은 것이라곤 어제 먹은 물죽이라 힘이 날 리가 없다. 그래도 자신뿐이라면 무시하고 죽자 살자 뛰었겠지만 이미 피오나는 산소부족으로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제길!”
피오람은 비명을 질렀다. 여기는 지랄 맞게 숨을 만한 풀숲도 없다. 이렇게 넓은 길을 택한 건 역시 산적에게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자 이길은
경기병단이 전장을 날기 위한 활주로로 그 위치를 탈바꿈한 것이다.
두두두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발굽이 지축을 흔들었다. 마치 죽음을 시시각각 알리는 사신의 노랫소리 같았다. 게다가 이 노래는 점점 더 커진다.
말과 사람. 어느 쪽이 더 빠른지는 굳이 종이를 가져다 수학적 공식으로 산출할 필요가 없다. 달리기 위한 짐승과 인간. 다리 수만 해도 4개 대 2개다. 도저히 수지가 안 맞는다.
“피오람!”
“걱정하지 마. 피오나.”
따라잡히고 만다. 이를 악물은 피오람은 주머니의 용린을 쥐었다. 이 방법 밖에는 없다. 아인스 카이저와 용이 약속한단 증거 용린. 마법이 담긴 용의 비늘은 피오람의 은색과 금색의 오드아이를 일순간 모두 금색으로 바꾸었다.
휘리릭. 공기를 찢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날아든 실링(투석구)이 뒤쳐진 피오나의 두 다리를 끈덕지게 잡고 늘어졌다. 중심을 잃은 피오나의 몸이 휘청였다.
“까악!”
“피오나!”
넘어지는 피오나를 위해 피오람은 재빨리 몸을 틀어 피오나의 쿠션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가속도가 붙은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이 미소녀라 해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피오람은 그대로 미끄러지며 극심한 충격을 등으로 받아냈다.
“컥!”
급격한 충격에 폐가 산소를 토해내며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의식을 잃을 순 없다. 여기서 쓰러지면 그대로 잡히고 만다.
하지만. 일어나기가 무섭게 목덜미에 무거운 둔기가 떨어진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피오람은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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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스킨이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군요.
그냥 무난한 것으로 교체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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