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덜컹, 덜컹……
전은 요람에 누워있었다. 작은 요람이었다. 너무나 작아 그의 날개 뼈가
나무로 만들어진 벽에 부딪칠 정도였으니까.
흔들, 흔들, 기우뚱…….
쿵!
누군가가 그가 누워있는 요람을 내려쳤다. 지독한 진동이 요람의 벽을
타고 전해졌지만 전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사람들이 무겁다고 투덜대는
소리가 언뜻 들렸다.
흔들, 흔들, 흔들, 흔들…….
어머니가 요람을 흔드는 모양이었다. 작지만 부드러운 느낌이 요람 아래
서부터 전해졌다. 너무나 편한 곳이다. 그는 부드러운 이불을 머리까지
덮으며 생각했다. 너무나 편한 곳이야.
…뭐?
“일어나셨네, 밀항자 씨.”
긴 잠에서 깨어난 그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한 여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
였다. 전은 힘겹게 눈을 떴다.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방 안, 예상대로 곱상
한 여자가 약간 떨어진 의자에 앉아 그를 보고 있었다. 꼭 남자 선원들이
입는 것 같은 옷을 입고 위에 두꺼운 망토를 대충 걸친 그녀는 태연하게
자신의 군청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여긴 어디죠?”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의 것과 비슷한 갈색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우리 아버지의 딸. 그리고 여긴 내가 타고 있는 배 위야.”
전은 자신도 모르게 ‘아, 그러세요?’라고 말할 뻔했다. 그러다가, 그 말에
숨겨진 어폐를 깨닫고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잠이 덜 깬 탓이기도
했지만. 그런 그를 보며 여자가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하나의
비파 선처럼 산들거렸다. 왠지 벚꽃 향이 나는 것 같다. 전은 생각했다.
바다 한 가운데에 핀 벚꽃처럼 짠 듯하면서도 감미로운 초원의 향이 묻어나는
향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난 이 배를 항해하는 선장의 친구임과 동시에 카한 대륙
에서 상인 일을 모두 마치고 마지막 배로 돌아가는 배에 탄 상인인 우리 아
버지의 딸이지.”
“아, 그러세요?”
순간 전은 마지막 말 이외에 자기가 알아 들은 것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랐
다. 어리둥절해 하는 전을 보며 여자는 다시 한 번 웃었다.
“뭐야, 뭐야. 난 쉽게 말했다고. 저거면 꽤 정확하지, 안 그래?”
여자는 생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이름은 에리아 야. 그 쪽 이름은?”
“전……입니다, 컥!”
“이봐, 이봐. 아직 일어나진 말라고. 상처는 대충 손 봤지만 아직 완쾌된
건 아니야. 또 터지면 그땐 정말 파상풍에 걸릴지도 몰라.”
전은 결국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그의 큰 한숨을
들으며 에리아가 깔깔거리며 웃는다.
“말을 잘 듣는 아이로군. 맘에 들었어.”
그녀가 방문을 열며 말했다.
“먹을 것을 좀 가져다 줄 테니까 기다려. 네 사정은 좀 이따가 듣도록 하지.”
전이 고맙다는 말을 차마 하기도 전에 그녀는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차가운 벚꽃 향만을 남긴 채.
그녀가 다시 돌아온 때는 전이 막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다고 느낄 참이었다.
“그렇게 푸짐하진 못하지만 많이 먹으라고. 환자에겐 먹는 것이 가장 중요
하다니까.”
에리아는 커다란 나무 쟁반에 환자가 먹을 만한 음식, 즉 죽이나 부드러운
빵 등을 야채와 함께 담아 전에게 건네줬다. 포크와 나이프로 야채를 뒤섞
던 전이 의아한 듯 질문했다.
“선상 음식 치고는 꽤 파랗군요. 야채까진 기대 못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바다도 파랗다고. 난 며칠 동안 바닷물에서 건진 생선만 주
식으로 먹었더니 바다 냄새도 맡기 싫어졌어.”
전이 야채를 조금 베어 물었다.
“이건 땅에서 가져온 것 아니에요?”
“막 건져 올린 해초야.”
“…….”
“뭐 어때? 맛만 비슷하면 됐지. 그나마 소금기는 다 빼냈으니까 먹을 만 할
거야.”
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빵을 베어 물었다. 갓 구워낸 듯, 아직 따뜻
한 빵은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그의 위장에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
았다. 약간 소금기가 나는 죽도 먹을 만 했다. 간혹 입 안에 씹히는 소금의
느낌을 봐선, 역시 바다에서 조달한 재료를 쓴 것 같았지만, 전은 감히 주재
료가 뭔지 물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근데 말이지.”
에리아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꼬며 물었다.
“너, 어느 나라 사람이야? 그 눈 보니까 혼혈아 같은데 말이지. 아버지가
카한 대륙 사람이야? 아니면 어머니가?”
전은 죽 그릇을 비우고 정체불명의 해초가 담긴 그릇을 손으로 살짝 치우며
대답했다.
“아버지 쪽. 그러는 에리아 씨는요?
전의 질문에 에리아는 약간 놀란 듯 했다.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말
했다.
“나도 아버지 쪽. 잘 아네? 난 가끔 트로이메라이 토박이로 오해도 받는데
말이야. 하긴 반은 맞지만. 그래도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으니 대화가 쉽구
만?”
에리아가 살포시 웃음을 머금었다.
“그건 그렇고 계속 말 놔도 괜찮겠지? 나보다 어려 보여서 처음에 말을 놓
기는 했는데, 약간 버릇없이 보일까봐 그래. 진짜 나이가 몇 살이야?”
“스물 셋입니다.”
“와, 좋을 때구만. 난 스물 다섯이야. 좀 많나? 그래도 트로이메리아에선
대부분 이 나이 가까이 되어서 결혼하더라고. 뭐, 꼭 정해진 건 아니지만 말이야.”
전이 다 먹은 것을 확인한 아레아는 쟁반과 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게임을 하나 해볼까? 진실 게임이라고, 제
대로 말하지 않으면 벌칙을 받는 게임이지. 이제부턴 내가 질문하고 넌 대
답하는 거야. 간단하지? 헷갈리면 말해. 언제든지 다시 설명해줄 테니까.”
에리아가 한 쪽 발을 침대 위에 올리며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물론 눈엔 여전히 장난기가 다분했지만.
“이름은?”
“전 데이데크노.”
“호오……아버지께서 알스터 출신이신가 보네? 직업은?”
“전직 군인.”
“혹시 5년 전쟁에 참전했었니? 용케도 살아남았군. 나이는? 아, 이건
물어봤었지? 이 배에 탄 목적은.”
“없는데요?”
에리아의 고운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장난하니? 벌칙이 있다고 말했을 텐데. 다시 한 번 묻는다. 이 배에 탄 목적은?”
“목적 같은 건 없다니까요. 단지 상처가 심해서……”
그녀가 침대에 올린 발을 퉁 굴렸다. 여자였지만 힘이 상당히 실린 것이어
서 전은 상처가 터지지 않을까, 걱정을 해야만 했다.
“장난해? 오늘 내로 너한테 이 대답을 얻지 못하면 나 아버지한테 야단 맞
거든? 너 돈자루로 종아리 맞아본 적 있어?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알아?
아무튼 다시 묻는다. 이 배에 무단으로 들어온 목적은? 목적이 뭐냐고!”
그녀가 약간 짜증을 내며 다시 한 번 발을 굴렸다.
-쿵!
갑자기 태풍과 같은 엄청난 충격이 선체를 한 번 휩쓸고 지나갔다. 투석
기에 맞은 것처럼 선체가 진동하더니 위에서 사람들의 떠들썩한 말소리
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조용하던 나무 계단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사람
들에 의해 괴로운 신음소리를 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랫동안
쓰이지 않던 창고 문들이 열리는 소리까지 나자 에리아는 적지 않게 당황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지간한 그녀도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그녀는 문에 귀를 가져갔다. 그때 전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서펜트라도 나타난 거 아닙니까? 가끔 그런 괴수들이 출몰한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설마. 여긴 서펜트 출몰지역이 아니라고! 기껏 해야 길 잃은 와이번 정도
야. 서펜트는 없어.”
그때, 문에 귀를 대고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던 에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거 서펜트보다 귀찮은 게 나타난 모양이네.”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리며 전에게 말했다. 이제까지의 장난스럽던 목소
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긴장감이 가득 베인 말투였다.
“이봐, 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괜히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구조하러
올 테니까, 알았지?”
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급하게 방을 나섰다.
그리고 방문을 닫기 전, 미소와 함께 작은 윙크를 날리며 말을 이었다.
“취조는 나중에 계속하자고, 귀여운 밀항자님?”
문이 거세게 닫히고, 약간의 침묵이 방 안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어렴
풋이 파도 사이로 사람들이 고함소리와 쇳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전
은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상처 부분이 약간 쑤셨지만 고통은
빠르게 없어졌다. 빠르고 정확한 치료를 해준 선상의료인 덕분이었다.
그는 에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문에 귀를 조심스럽게 가져갔다. 사람들
의 말소리가 더욱 선명하고 크게 들렸다. 아버지가 알스터 출신이었기
에 대륙의 공용어를 배운 전이었지만, 워낙 빠르고 다급한 목소리들이어
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더욱이 여러 지방과 나라의 사투리가 섞여
서 들려와 더욱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날개? 이빨? 바람 하고 돛 정도 밖에 못 알아듣겠군. 도대체 무슨 일이 일
어난 거지?’
그는 귀를 더욱 바싹 갖다 대었다. 그때 귀청을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
려왔다.
“… 슬루프?…!”
“화살을 …와! …..을 막아야 ……다!”
“전 속력…달……! …지면 안돼!”
“오, 신이시어!”
한 선원의 찢어지는 단말마가 들리자마자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선실 문
을 박차고 나갔다. 좁은 복도에서 무기를 조달하던 선원 몇 명이 흠칫 놀
라며 질문했다.
“당신, 상처가 …던데 ….괜찮아?
단어와 문장을 확실히 알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그를 그리 경계하
는 눈치는 아니었기에 전도 띄엄띄엄 거리며 겨우 대답했다.
“네, 덕분에…..근데….음……뭐가 나…나타났다?”
“그…네. 근데 자네는 ……나?”
전은 그들의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찾았다.
계단은 복도가 끝나는 양 쪽에 하나씩 있었다. 전은 사람들의 소란스러움
이 더 크게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옻칠을 한 거대한 나무 들창
을 열자 갑자기 한 겨울의 서릿발 같은 찬 바람이 그를 휩쓸었다. 홑옷 밖
에 걸치지 않은 상태였기에, 찾아온 갑작스런 추위를 어찌할 겨를도 없이,
전은 날카로운 바람에 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받으며 겨우 밖으로 나
갈 수 있었다.
전이 본 선상 위는 혼돈 그 자체였다.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한편에선
선원 십 수명이 달려들어 바람을 맞아 잘 접히지도 않는 돛을 조절하고
있었고, 다른 한 쪽에선 한 무리의 무사들이 매섭게 화살을 날리고 있었
다. 그때 한 선원이 한번에 많은 무기를 나르다가 갑자기 배의 방향이 바
뀌며 발이 꼬여 넘어졌다.
-쿠당탕
나무 상자에 들어있던 화살과 검 등, 각종 무기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무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떨어진 화살 중 하나를 집고 시위를 당겼다.
-휘리릭! 휙!
화살이 바람을 찢으며 구름을 향해 쏘아져 갔다. 무사는 화살의 명중여
부도 확인하지 않은 체, 바로 다음 화살을 재며 시위를 겨누었다.
그리고, 전이 그 화살이 시위를 겨눈 곳을 보는 순간, 그는 차가운 피가
그의 몸을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푸른 하늘이 낮을 점점 갉아먹는 저녁 시간, 노을보다 더 붉은 거대한
슬루프의 이물이 안개처럼 부서지는 황혼 속에서 천천히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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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수정작업이 필요할 화입니다.
그냥 뭔가 좀 마음에 안 드네요.
자, 핫스퍼와의 조우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 용이 나타나서 싸워야 하지만 사실 엄청난
고뇌를 거듭하던 중, 예님 덕분에 번뇌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먼치킨이 아닌 평범한(?) 인물로 글을 쓸 떄는 용과의 전투가 왜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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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black water(7) | 刈 | 2006/04/02 | 2213 |
14 | black water(6) | 刈 | 2006/03/29 | 26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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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black water(4) | 刈 | 2006/03/25 | 2371 |
11 | 바람의 노래-5 | [성원] K. 離潾 | 2006/03/24 | 2129 |
10 | 바람의 노래-4 | [성원] K. 離潾 | 2006/02/03 | 2155 |
9 | 젝스카이저 /1.왕자와 거지-1 | 지티 | 2006/02/02 | 1753 |
» | 바람의 노래-3 | [성원] K. 離潾 | 2006/01/30 | 2873 |
7 | 바람의 노래-2 | [성원] K. 離潾 | 2006/01/27 | 2278 |
6 | black water(3) | 刈 | 2006/01/27 | 2426 |
5 | 젝스카이저 / 프롤로그 | 지티 | 2006/01/25 | 2124 |
4 | black water(2) | 刈 | 2006/01/24 | 2351 |
3 | 바람의 노래-1 | [성원] K. 離潾 | 2006/01/24 | 2481 |
2 | black water(1) | 刈 | 2006/01/23 | 2308 |
1 | 이 게시판은 | 현이 | 2005/12/19 | 23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