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랑 놀고 있다. 수지는 내 옆에서 솜사탕을 먹으면서 나한테 팔짱을 끼
고 있다. 아, 행복한 기분. 이러기 위해서 내가 제대한 것 아니겠어? 군인이
었다면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겠지.
“와, 오랜만이다. 놀이공원은.”
“그러게. 푸훗.”
내 한 마디에 픽 웃어주는 수지가 좋았다. 수지는 나와 팔짱을 끼고 솜사탕
을 들고 있는 손으로 이곳, 저곳 방향을 가리키며 어딘가로 가자고 했고, 나
는 수지의 의견에 따랐다. 수지가 가고 싶은 곳이 바로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다. 그런데 어라, 어디가?
“수지야, 근데 어디가?”
“응? 저기.”
수지가 가리킨 곳은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수지
가 가고 싶은 곳이 내가 가고 싶은 곳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 없이 따
라갔다.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어떤 남자였다. 그 남자가 갑자
기 날 멱살 잡았다.
“너 뭐야?”
“에, 에?”
“너 뭔데 남의 애인 데리고 다녀?”
“나, 남의 애인이요?”
수지는 어느새 나와 팔짱을 풀고 골목 벽에 붙어서 날 보고 있다. 아니, 정
확히 말하자면 보고 있지 않다. 시선은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날 보고
있다고 느낀다. 난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그리고 수지에게 뛰어
가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수지는 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다. 어
디가! 소리가 목에서 멤 돌았다. 가슴에서 뭔가 턱하니 막혔다. 다리에 힘
이 풀린다. 뛰어 가야 하지만 뛰어 갈 수가 없다. 뛰다가 넘어지고, 뛰다가
넘어지고, 뛰다가 넘어졌다. 뿌얘진 내 시야에 수지가 버린 솜사탕이 보인
다. 흙이 묻어 있다. 난 순간 절제 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울었다. 그리
고 수지가 들을 수 있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목소리를 질렀다.
“수지야!”
순간 시야가 확 밝아졌다. 핑핑 도는 천장. 그런데 천장에 박혀 있는 것이
뭐지?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봤다. 황소? 아기자기한 SD그림체의 황소가
천장 벽지에 여러 마리 뛰어놀고 있다.
“잠 깼어요?”
“어?”
다시 정신이 확 돌아온다. 난 무의식적으로 날 봤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난 지금 어느 침대에 눕혀져 있다. 이불을 덮고 있고, 이불은 핑크빛. 무슨
꽃인지 모르겠지만 이불에 수놓아져 있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
시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을 봤다. 짧게 커트 머리. 민소매 티를 입고 있고,
바지는 짧은 반바지. 그리고 손에는 국자. 앞치마는 안 맸다. 귀엽게 생긴
여자.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내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자 그 여자도 덩달아 비명을 지른다. 예상
못한 여자의 반응에 난 다시 멍해져서 그 여자를 봤다. 그러자 그 여자는
씩 웃으면서 내 옆에 와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기억 안 나나 보네요?”
“기, 기억이요?”
무슨 기억? 여자의 말에 난 굳어버린 머리를 억지로 돌려봤다. 아직도 쓰러
질 것 같은 기분이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은 메스껍다. 왜 이러지? 그러
다가 문득 생각해버렸다. 어제, 수지한테 차이고 나서 엉망진창으로 술을
마셨었지.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 술집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마셨
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단지 현재 내 감정을 억누를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마시고, 마셨다. 보다 못한 어떤 여자가 와서 그만 마시라고 했고,
난 필요 없다고 했고, 그러다가 몸 망가진다고 여자가 말했고, 내 돈 주고
내가 마시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했고, 여자는 당신한테 술 안 판다고 했
고……그리고 기억이 없다.
난 멍해진 표정으로 그 여자를 봤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여자인
데? 아, 어제 나랑 술 가지고 실갱이한 그 여자인가?
내 멍한 표정에 여자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술 마시지 말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계속 마시더니 결국 쓰러지더라
구요? 그래서 제가 우리 집에 데리고 왔어요. 보아하니 혼자 같고 일행도 없
는 것 같아서.”
“에, 그게, 절 믿고요?”
“못 믿을 건 뭔가요?”
당돌하다. 욱씬거리는 머리였지만, 보통 안 이런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아
니면 내 상식이 잘못 된건가? 난 이불을 걷고 나왔다. 조금 골이 울리고 어
지럽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다. 더 이상 신세를 질 순 없지. 날 보고
있는 여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 했다.
“어찌됐든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 봐야 겠네요. 외박한 적 별로
없는데, 집에서 걱정하고 있겠어요.”
“아, 집이요? 괜찮아요. 아까 제가 통화했거든요.”
“아, 그래요? 감사……네?”
“푸훗. 새벽에 핸드폰이 꽤 시끄럽더라구요. 그래서 받았는데 어머님이신
가? 일단 제가 재우고 아침에 보내준다고 했어요. 어머님께서 아시겠다고
하셨는걸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맙소사. 난 지금 순간 내 이마를 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정말, 맙
소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 아냐? 그러고 보니 핸드폰 어디 있지? 여자
의 말을 듣다가 문득 핸드폰이 생각나 주머니를 뒤졌더니 역시나 핸드폰이
없다. 내 멍한 표정에 여자는 피식 웃더니 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꺼내
줬다. 난 핸드폰을 받으면서 복잡한 심정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맞
는 경우인가? 핸드폰 열어서 통화내역을 확인해보니 정말 집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그런데 부재 중 전화는 세 통……. 이래서야 전화 받았다고 뭐
라 할 수도 없겠는데. 정말 시끄러웠을지도. 하긴,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안 받기도 뭐하고. 갈등하다가 받은 것 같으니까. 난 이것저것 확인하고 싶
은 것이 많았지만 여기서 확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억지로 꾸욱
눌러 참았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내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자 여자가 일어서더니 내 손을 잡아서 부엌으로
이끌었다.
“이왕 일어나신 거 해장하고 가세요. 참, 제 이름은 미연이라고 해요. 강 미
연. 그쪽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이름은 알고 가자
구요.”
“아, 네? 아……전 강인이라고 합니다. 외자예요.”
“그래요? 실력이 변변찮아서 별 맛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김치찌개
해 봤어요. 뭘 해장해야 할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라면 말고는 떠오르
는 게 없어서. 그런데 우리 집에 처음 온 남자에게 라면대접 할 순 없잖아
요? 그래서 한번 찌개 만들어봤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아, 이 이상 폐를 끼칠 수 없어. 본능적으로 거부해
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난 황급히 여자에게서 손을 빼서 손을 흔
들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하룻밤 신세 진 것도 죄송한데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네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여기가 어디쯤이죠?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에이, 걱정 마세요. 어제 술 마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괜찮아
요. 해장하고 가세요. 저 혼자서는 음식 버릴거예요. 같이 먹으려고 만든 건
데.”
“폐만 끼치는 것 같은데요. 그냥 가 볼게요.”
“그냥 가는 게 저한테는 더 폐를 끼치는 거예요. 한 숟갈이라도 뜨고 가세
요.”
이렇게 나오면 뭐라 할 말이 없다. 난 축 처지는 어깨를 겨우 붙잡고 미연
이라고 소개한 여자를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김치찌개는 제법 맛있었다.
혼자 사는지 반찬은 조촐하게 몇 개 없었지만 얼큰한 김치찌개의 국물은 엉
킬 대로 엉켜버린 속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었다. 난 진심으로 칭찬했다.
“김치찌개가 맛있네요.”
“정말요? 다행이다. 매번 혼자 해 먹어서 누구 해 준 적 없었거든요. 그래
서 다른 사람들 입맛에 맞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활짝 웃는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제법 귀엽게 생겼다. 그리고 그 순
간 수지 얼굴이 떠올랐다. 아, 어제 헤어졌는데 여자가 있다고 반응하는구
나. 하하하하. 이런 바보 같은. 너 수지에 대한 마음이 이것밖에 안됐어? 고
작 이런거에 두근거려? 이러니까 차인거 아냐. 이렇게 바보 같으니까…….
이런 내 반응이 이상했나보다. 미연씨는 갑자기 근심스러운 얼굴로 날 보
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술 많이 마실 성격처럼 보이진 않던데요.
표정도 많이 어두워 보이고…….”
“그, 그래 보였나요?”
여자 친구랑 헤어져서 잊으려고 진탕 마셨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절대 할
수 없다. 괜히 말하기 싫다. 난 그래서 얼버무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마시면 속 망가져요. 천천히 드세요. 김치
찌개는 아직 많으니까요.”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자꾸 폐만 끼치게 되네요. 이만 일어나보도
록 하겠습니다. 혹시 연락처 주실 수 있을까요? 신세 진 것 같아서요.”
“앗, 설마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건가요?”
뭐, 뭐야?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급히 손사래를 치고 말
을 이었다.
“아, 아니예요. 진짜 신세 진 것 같아서 나중에 한 끼라도 보답해 드리려고
요. 설마, 제가 감히, 어찌 그럴 수 있겠어요!”
“아니, 그렇게까지 완강하게 부인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훗.”
아, 그런가. 아, 창피해라.
“연락하고 싶으시다면 어제 마셨던 술집으로 오세요. 거기서 아르바이트
하거든요. 이번에 대학교에 입학해서요. 학비 마련이랑 용돈 마련 때문에.”
“그, 그래요? 그런데 나이가?”
“어머, 숙녀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가 아닌가요?”
“아, 죄송합니다. 그럼 나중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
다.”
“한 숟갈 더 하고 가시지. 오랜만에 사람하고 마주 앉아서 밥 먹으니까 전
좋은데요.”
계속 밥 더 먹으라고 말하지만 더 이상은 내가 양심에 찔려서 못 앉아 있겠
다. 결국 난 말을 에둘러가면서 사양했고, 결국 나올 수 있었다. 여자가 알
려준 방향대로 나오자 어제 술을 마셨던 가게가 보였다. 아침시간이라 문
을 닫고 있지만, 밤이 되면 아주 활기차지지. 햇살이 눈부시다. 문득 노래가
사가 떠올랐다. 헤어지고 나서도 배고프다고 밥 먹는 걸 보니 나도 사람인
가보다, 라고 했던가. 그래, 그러고 보니 어제 헤어졌는데 태연히 아침을 먹
긴 했구나, 나도. 하하하하. 세상이 무너진 게 아니잖아, 그렇잖아?
……제길, 울적해진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집에 와서 모자란 잠을 약간 잤다. 오자마자 쏟아지는 엄마의 추궁의 눈빛
이 내 등을 계속 찔렀지만 애써 무시했다. 딱히 할 말이 없단 말이야. 물론
나도 안다. 이런 나의 행동이 엄마의 의심을 부추길만한 행동이라는 것을.
엄마도 수지의 존재를 알고 있고, 수지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어제 들은 여
자는 수지가 아니라는 것 쯤, 엄마도 충분히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그래
도 대충 사정은 눈치 채셨는지 나에게 딱히 더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
사만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나
니, 현실이 갑자기 무섭게 다가왔다. 오늘 아침엔 일어나긴 했어도 황당한
전개에 정신이 없었지. 그렇지. 난 수지랑 헤어졌지…….
3년간의 짝사랑. 그리고 그 후에 다시 5년간의 연애. 아니지. 군대 입대 후
1년 뒤에 난 차인건가? 애인이라고 해도 애인은 아니잖아. 그땐 이미 새로
운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하아. 4년간의 연애라고 할지라도……길고 긴 시
간이었구나. 그래,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질릴 만도 하겠지. 내가 돈도 많
은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
도 아니고. 수지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3년간이나 생각해 준 것만 해도 감
지덕지 아니겠어?
쓸쓸한 조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난 부스스 일어나 책상에 고이 모셔져 있
는 액자를 봤다. 수지와 내가 찍은 사진들. 커다란 액자에는 수지와 나의 사
진이 한 장 찍혀 있었고 테두리 부분에 같이 찍은 스티커 사진이 무수히 많
이 있었다. 난 액자를 뒤가 보이도록 책상에 엎었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
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다만, 나도 이제 정리를 시작해야 한다는 막연한 느
낌만 들 뿐이다. 근데, 어떻게 정리를 하지?
“아들 일어났어?”
“네. 일어났어요.”
“그럼 잠깐 나와 봐. 엄마랑 이야기 좀 하자.”
난 액자를 보고 잠시 갈등했다. 받침대가 보이는 액자. 난 한숨을 내쉬고
는 방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엄마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난 터덜터덜
걸어서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는 잠시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가 이윽
고 꺼버렸다.
“무슨 일 있었어? 생전 안 하던 외박도 하고 말이야. 거기다가 전화 받은
여자는 처음 듣는 목소리 같던데?”
“별 일 없었어요,”
“아들. 엄마는 못 속인다. 수지랑 헤어졌니? 어제 그 여자는 새로운 여자
친구야?”
“아니예요.”
“그럼 무슨 일 있었는데?”
엄마가 날 똑바로 쳐다본다. 난 일부러 시선을 회피했다. 난 한참동안 말
을 하지 않았고, 엄마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
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만 방에 들어갈게요.”
엄마는 날 붙잡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다시 텔레비전을 키셨다. 그런 엄마
의 모습이 못내 야속하기도 했지만 고맙기도 했다. 수지랑 헤어졌다는 사실
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면 울어버릴 것 같았다. 난 정말 수지를 좋아했다.
내 첫사랑이고 짝사랑이었던 수지.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그래
도 졸립다고 자고 배고프다고 밥 먹게 된다. 수지랑 헤어지고 하루밖에 지
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왔다. 조용한 방에서 탁 하고 문 닫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난 그냥 문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지가 떠올랐다. 너무 야속했다. 문득 너무 보고 싶어졌다. 내가 군 생활
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데. 전우? 보람? 다 필요 없다. 수지가 있다고 믿
었기에 버틸 수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물을 정신없이 훔치는 일 뿐이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멈
추라고 울지 않겠다고 속으로 백 번 천 번 외친다. 울지 않겠어, 울지 않겠
다고! 그런데 몸은 날 배반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소매는 푹 젖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난 제대 한 다음날 차였다. 평범하게 차인 것이 아
니다. 1년 정도 양다리였다. 이미 난 군 생활 하면서 차인 것이리라. 난 애
써 좋게 생각하려고 마음먹었다. 군 생활 도중에 차였다면 많이 힘들 거라
고 생각해서 수지가 미루고 미룬 게 결국은 어제였겠지. 좋게 좋게 생각해
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수지랑 헤어졌다고 세상이 망한 건 아니잖
아. 그렇지? 수지는 나에게서 감정이 떠난 거잖아. 치졸하게 이러지 말자
고.
난 눈물 때문에 흐릿한 시야로 천장을 바라봤다. 새하얀 벽지가 눈에 들어
왔고 전등이 눈에 들어왔다. 낮이라 전등에 불은 키지 않았지만 커튼을 쳐
놔서 방은 제법 어둡다. 어두운 명암이 전등 뒤로 그늘져있다. 어느새 전등
에는 수지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 웃어줘. 웃어줘, 제발. 수
지는 웃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새 사라졌다. 문득 오늘 꿨던 꿈이 떠올랐
다. 날 떠나는 꿈. 버려진 솜사탕. 그리고 수지를 잡아끄는 굵은 손아귀. 순
순히 따라가는 수지. 멍하니 바라보는 나. 쫓아가지만 쫓아갈 수 없는 나.
그런 모든 꿈.
절망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건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정리해야 하는데,
정리해야 하는데. 난 축 처지는 내 어깨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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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즈막히 한 편 업...
고 있다. 아, 행복한 기분. 이러기 위해서 내가 제대한 것 아니겠어? 군인이
었다면 이런 기분은 느끼지 못했겠지.
“와, 오랜만이다. 놀이공원은.”
“그러게. 푸훗.”
내 한 마디에 픽 웃어주는 수지가 좋았다. 수지는 나와 팔짱을 끼고 솜사탕
을 들고 있는 손으로 이곳, 저곳 방향을 가리키며 어딘가로 가자고 했고, 나
는 수지의 의견에 따랐다. 수지가 가고 싶은 곳이 바로 내가 가고 싶은 곳이
다. 그런데 어라, 어디가?
“수지야, 근데 어디가?”
“응? 저기.”
수지가 가리킨 곳은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수지
가 가고 싶은 곳이 내가 가고 싶은 곳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 없이 따
라갔다. 골목길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것은 어떤 남자였다. 그 남자가 갑자
기 날 멱살 잡았다.
“너 뭐야?”
“에, 에?”
“너 뭔데 남의 애인 데리고 다녀?”
“나, 남의 애인이요?”
수지는 어느새 나와 팔짱을 풀고 골목 벽에 붙어서 날 보고 있다. 아니, 정
확히 말하자면 보고 있지 않다. 시선은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날 보고
있다고 느낀다. 난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 그리고 수지에게 뛰어
가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수지는 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다. 어
디가! 소리가 목에서 멤 돌았다. 가슴에서 뭔가 턱하니 막혔다. 다리에 힘
이 풀린다. 뛰어 가야 하지만 뛰어 갈 수가 없다. 뛰다가 넘어지고, 뛰다가
넘어지고, 뛰다가 넘어졌다. 뿌얘진 내 시야에 수지가 버린 솜사탕이 보인
다. 흙이 묻어 있다. 난 순간 절제 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울었다. 그리
고 수지가 들을 수 있게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목소리를 질렀다.
“수지야!”
순간 시야가 확 밝아졌다. 핑핑 도는 천장. 그런데 천장에 박혀 있는 것이
뭐지?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봤다. 황소? 아기자기한 SD그림체의 황소가
천장 벽지에 여러 마리 뛰어놀고 있다.
“잠 깼어요?”
“어?”
다시 정신이 확 돌아온다. 난 무의식적으로 날 봤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은?
난 지금 어느 침대에 눕혀져 있다. 이불을 덮고 있고, 이불은 핑크빛. 무슨
꽃인지 모르겠지만 이불에 수놓아져 있다.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
시 목소리가 들렸던 방향을 봤다. 짧게 커트 머리. 민소매 티를 입고 있고,
바지는 짧은 반바지. 그리고 손에는 국자. 앞치마는 안 맸다. 귀엽게 생긴
여자.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내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지르자 그 여자도 덩달아 비명을 지른다. 예상
못한 여자의 반응에 난 다시 멍해져서 그 여자를 봤다. 그러자 그 여자는
씩 웃으면서 내 옆에 와 의자를 끌어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기억 안 나나 보네요?”
“기, 기억이요?”
무슨 기억? 여자의 말에 난 굳어버린 머리를 억지로 돌려봤다. 아직도 쓰러
질 것 같은 기분이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속은 메스껍다. 왜 이러지? 그러
다가 문득 생각해버렸다. 어제, 수지한테 차이고 나서 엉망진창으로 술을
마셨었지.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혼자 술집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마셨
다. 안주는 필요 없었다. 단지 현재 내 감정을 억누를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마시고, 마셨다. 보다 못한 어떤 여자가 와서 그만 마시라고 했고,
난 필요 없다고 했고, 그러다가 몸 망가진다고 여자가 말했고, 내 돈 주고
내가 마시는데 무슨 참견이냐고 했고, 여자는 당신한테 술 안 판다고 했
고……그리고 기억이 없다.
난 멍해진 표정으로 그 여자를 봤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여자인
데? 아, 어제 나랑 술 가지고 실갱이한 그 여자인가?
내 멍한 표정에 여자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술 마시지 말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계속 마시더니 결국 쓰러지더라
구요? 그래서 제가 우리 집에 데리고 왔어요. 보아하니 혼자 같고 일행도 없
는 것 같아서.”
“에, 그게, 절 믿고요?”
“못 믿을 건 뭔가요?”
당돌하다. 욱씬거리는 머리였지만, 보통 안 이런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아
니면 내 상식이 잘못 된건가? 난 이불을 걷고 나왔다. 조금 골이 울리고 어
지럽긴 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다. 더 이상 신세를 질 순 없지. 날 보고
있는 여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 했다.
“어찌됐든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 봐야 겠네요. 외박한 적 별로
없는데, 집에서 걱정하고 있겠어요.”
“아, 집이요? 괜찮아요. 아까 제가 통화했거든요.”
“아, 그래요? 감사……네?”
“푸훗. 새벽에 핸드폰이 꽤 시끄럽더라구요. 그래서 받았는데 어머님이신
가? 일단 제가 재우고 아침에 보내준다고 했어요. 어머님께서 아시겠다고
하셨는걸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맙소사. 난 지금 순간 내 이마를 치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정말, 맙
소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 아냐? 그러고 보니 핸드폰 어디 있지? 여자
의 말을 듣다가 문득 핸드폰이 생각나 주머니를 뒤졌더니 역시나 핸드폰이
없다. 내 멍한 표정에 여자는 피식 웃더니 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꺼내
줬다. 난 핸드폰을 받으면서 복잡한 심정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맞
는 경우인가? 핸드폰 열어서 통화내역을 확인해보니 정말 집에서 연락이
와 있었다. 그런데 부재 중 전화는 세 통……. 이래서야 전화 받았다고 뭐
라 할 수도 없겠는데. 정말 시끄러웠을지도. 하긴,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안 받기도 뭐하고. 갈등하다가 받은 것 같으니까. 난 이것저것 확인하고 싶
은 것이 많았지만 여기서 확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억지로 꾸욱
눌러 참았다. 그러고 보니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내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자 여자가 일어서더니 내 손을 잡아서 부엌으로
이끌었다.
“이왕 일어나신 거 해장하고 가세요. 참, 제 이름은 미연이라고 해요. 강 미
연. 그쪽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이름은 알고 가자
구요.”
“아, 네? 아……전 강인이라고 합니다. 외자예요.”
“그래요? 실력이 변변찮아서 별 맛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일단 김치찌개
해 봤어요. 뭘 해장해야 할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라면 말고는 떠오르
는 게 없어서. 그런데 우리 집에 처음 온 남자에게 라면대접 할 순 없잖아
요? 그래서 한번 찌개 만들어봤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아, 이 이상 폐를 끼칠 수 없어. 본능적으로 거부해
야 한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난 황급히 여자에게서 손을 빼서 손을 흔
들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하룻밤 신세 진 것도 죄송한데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네요. 이만 가보도록 할게요. 여기가 어디쯤이죠?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에이, 걱정 마세요. 어제 술 마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괜찮아
요. 해장하고 가세요. 저 혼자서는 음식 버릴거예요. 같이 먹으려고 만든 건
데.”
“폐만 끼치는 것 같은데요. 그냥 가 볼게요.”
“그냥 가는 게 저한테는 더 폐를 끼치는 거예요. 한 숟갈이라도 뜨고 가세
요.”
이렇게 나오면 뭐라 할 말이 없다. 난 축 처지는 어깨를 겨우 붙잡고 미연
이라고 소개한 여자를 따라 갈 수 밖에 없었다. 김치찌개는 제법 맛있었다.
혼자 사는지 반찬은 조촐하게 몇 개 없었지만 얼큰한 김치찌개의 국물은 엉
킬 대로 엉켜버린 속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었다. 난 진심으로 칭찬했다.
“김치찌개가 맛있네요.”
“정말요? 다행이다. 매번 혼자 해 먹어서 누구 해 준 적 없었거든요. 그래
서 다른 사람들 입맛에 맞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활짝 웃는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제법 귀엽게 생겼다. 그리고 그 순
간 수지 얼굴이 떠올랐다. 아, 어제 헤어졌는데 여자가 있다고 반응하는구
나. 하하하하. 이런 바보 같은. 너 수지에 대한 마음이 이것밖에 안됐어? 고
작 이런거에 두근거려? 이러니까 차인거 아냐. 이렇게 바보 같으니까…….
이런 내 반응이 이상했나보다. 미연씨는 갑자기 근심스러운 얼굴로 날 보
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제 무슨 일 있었어요? 술 많이 마실 성격처럼 보이진 않던데요.
표정도 많이 어두워 보이고…….”
“그, 그래 보였나요?”
여자 친구랑 헤어져서 잊으려고 진탕 마셨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절대 할
수 없다. 괜히 말하기 싫다. 난 그래서 얼버무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마시면 속 망가져요. 천천히 드세요. 김치
찌개는 아직 많으니까요.”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자꾸 폐만 끼치게 되네요. 이만 일어나보도
록 하겠습니다. 혹시 연락처 주실 수 있을까요? 신세 진 것 같아서요.”
“앗, 설마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건가요?”
뭐, 뭐야?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급히 손사래를 치고 말
을 이었다.
“아, 아니예요. 진짜 신세 진 것 같아서 나중에 한 끼라도 보답해 드리려고
요. 설마, 제가 감히, 어찌 그럴 수 있겠어요!”
“아니, 그렇게까지 완강하게 부인하실 필요는 없는데요. 훗.”
아, 그런가. 아, 창피해라.
“연락하고 싶으시다면 어제 마셨던 술집으로 오세요. 거기서 아르바이트
하거든요. 이번에 대학교에 입학해서요. 학비 마련이랑 용돈 마련 때문에.”
“그, 그래요? 그런데 나이가?”
“어머, 숙녀의 나이를 묻는 건 실례가 아닌가요?”
“아, 죄송합니다. 그럼 나중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
다.”
“한 숟갈 더 하고 가시지. 오랜만에 사람하고 마주 앉아서 밥 먹으니까 전
좋은데요.”
계속 밥 더 먹으라고 말하지만 더 이상은 내가 양심에 찔려서 못 앉아 있겠
다. 결국 난 말을 에둘러가면서 사양했고, 결국 나올 수 있었다. 여자가 알
려준 방향대로 나오자 어제 술을 마셨던 가게가 보였다. 아침시간이라 문
을 닫고 있지만, 밤이 되면 아주 활기차지지. 햇살이 눈부시다. 문득 노래가
사가 떠올랐다. 헤어지고 나서도 배고프다고 밥 먹는 걸 보니 나도 사람인
가보다, 라고 했던가. 그래, 그러고 보니 어제 헤어졌는데 태연히 아침을 먹
긴 했구나, 나도. 하하하하. 세상이 무너진 게 아니잖아, 그렇잖아?
……제길, 울적해진다. 집에 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집에 와서 모자란 잠을 약간 잤다. 오자마자 쏟아지는 엄마의 추궁의 눈빛
이 내 등을 계속 찔렀지만 애써 무시했다. 딱히 할 말이 없단 말이야. 물론
나도 안다. 이런 나의 행동이 엄마의 의심을 부추길만한 행동이라는 것을.
엄마도 수지의 존재를 알고 있고, 수지의 목소리를 알고 있다. 어제 들은 여
자는 수지가 아니라는 것 쯤, 엄마도 충분히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그래
도 대충 사정은 눈치 채셨는지 나에게 딱히 더 뭐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인
사만 하고 내 방으로 돌아와 다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고 나
니, 현실이 갑자기 무섭게 다가왔다. 오늘 아침엔 일어나긴 했어도 황당한
전개에 정신이 없었지. 그렇지. 난 수지랑 헤어졌지…….
3년간의 짝사랑. 그리고 그 후에 다시 5년간의 연애. 아니지. 군대 입대 후
1년 뒤에 난 차인건가? 애인이라고 해도 애인은 아니잖아. 그땐 이미 새로
운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하아. 4년간의 연애라고 할지라도……길고 긴 시
간이었구나. 그래,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질릴 만도 하겠지. 내가 돈도 많
은 것도 아니고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것
도 아니고. 수지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3년간이나 생각해 준 것만 해도 감
지덕지 아니겠어?
쓸쓸한 조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난 부스스 일어나 책상에 고이 모셔져 있
는 액자를 봤다. 수지와 내가 찍은 사진들. 커다란 액자에는 수지와 나의 사
진이 한 장 찍혀 있었고 테두리 부분에 같이 찍은 스티커 사진이 무수히 많
이 있었다. 난 액자를 뒤가 보이도록 책상에 엎었다.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
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다만, 나도 이제 정리를 시작해야 한다는 막연한 느
낌만 들 뿐이다. 근데, 어떻게 정리를 하지?
“아들 일어났어?”
“네. 일어났어요.”
“그럼 잠깐 나와 봐. 엄마랑 이야기 좀 하자.”
난 액자를 보고 잠시 갈등했다. 받침대가 보이는 액자. 난 한숨을 내쉬고
는 방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엄마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난 터덜터덜
걸어서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는 잠시 텔레비전의 채널을 돌리다가 이윽
고 꺼버렸다.
“무슨 일 있었어? 생전 안 하던 외박도 하고 말이야. 거기다가 전화 받은
여자는 처음 듣는 목소리 같던데?”
“별 일 없었어요,”
“아들. 엄마는 못 속인다. 수지랑 헤어졌니? 어제 그 여자는 새로운 여자
친구야?”
“아니예요.”
“그럼 무슨 일 있었는데?”
엄마가 날 똑바로 쳐다본다. 난 일부러 시선을 회피했다. 난 한참동안 말
을 하지 않았고, 엄마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
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만 방에 들어갈게요.”
엄마는 날 붙잡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다시 텔레비전을 키셨다. 그런 엄마
의 모습이 못내 야속하기도 했지만 고맙기도 했다. 수지랑 헤어졌다는 사실
을 다시 상기하게 된다면 울어버릴 것 같았다. 난 정말 수지를 좋아했다.
내 첫사랑이고 짝사랑이었던 수지.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그래
도 졸립다고 자고 배고프다고 밥 먹게 된다. 수지랑 헤어지고 하루밖에 지
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왔다. 조용한 방에서 탁 하고 문 닫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난 그냥 문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어느새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지가 떠올랐다. 너무 야속했다. 문득 너무 보고 싶어졌다. 내가 군 생활
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데. 전우? 보람? 다 필요 없다. 수지가 있다고 믿
었기에 버틸 수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물을 정신없이 훔치는 일 뿐이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멈
추라고 울지 않겠다고 속으로 백 번 천 번 외친다. 울지 않겠어, 울지 않겠
다고! 그런데 몸은 날 배반했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소매는 푹 젖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난 제대 한 다음날 차였다. 평범하게 차인 것이 아
니다. 1년 정도 양다리였다. 이미 난 군 생활 하면서 차인 것이리라. 난 애
써 좋게 생각하려고 마음먹었다. 군 생활 도중에 차였다면 많이 힘들 거라
고 생각해서 수지가 미루고 미룬 게 결국은 어제였겠지. 좋게 좋게 생각해
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수지랑 헤어졌다고 세상이 망한 건 아니잖
아. 그렇지? 수지는 나에게서 감정이 떠난 거잖아. 치졸하게 이러지 말자
고.
난 눈물 때문에 흐릿한 시야로 천장을 바라봤다. 새하얀 벽지가 눈에 들어
왔고 전등이 눈에 들어왔다. 낮이라 전등에 불은 키지 않았지만 커튼을 쳐
놔서 방은 제법 어둡다. 어두운 명암이 전등 뒤로 그늘져있다. 어느새 전등
에는 수지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 웃어줘. 웃어줘, 제발. 수
지는 웃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새 사라졌다. 문득 오늘 꿨던 꿈이 떠올랐
다. 날 떠나는 꿈. 버려진 솜사탕. 그리고 수지를 잡아끄는 굵은 손아귀. 순
순히 따라가는 수지. 멍하니 바라보는 나. 쫓아가지만 쫓아갈 수 없는 나.
그런 모든 꿈.
절망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건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정리해야 하는데,
정리해야 하는데. 난 축 처지는 내 어깨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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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즈막히 한 편 업...